설교자: 윤성숙 전도사
제목: 기드온과 삼백 명
말씀: 사사기 7장 1-8절
기드온은 자기 아버지 요아스의 집에 있는 우상을 파괴하고 여룹바알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아닌, 여룹바알이라 불리는 기드온으로 그 행보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삿 7:1>은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라는 말로 그 행보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룹바알이라 불리는 기드온의 행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멸하려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심한 궁핍으로 괴롭게 한 미디안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디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7장 2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에서 <삿 7:2>의 ‘거스르다(against)’라는 이 말은 ‘높은’, ‘지존’이라는 의미의 말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여기에 쓰인 것으로 보아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과 같이 된 이스라엘의 죄의 상태를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 된 입장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이었지 순종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롬10:21).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에 대하여 직역 성경은 ‘이스라엘이 나에게 뽐내며 이르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라고 직역하고 있습니다. 뽐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보란 듯이 우쭐대는 것입니다. 이 짓을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무엇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는 것입니까?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이스라엘의 죄의 상태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이 말은 사실 기드온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사기 6장 36-37절>: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여룹바알로 나선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러들여 군대를 소집입니다. 그 수가 삼만 이천 명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또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조건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표징을 보여주면 내 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다는 것입니다. ‘내 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알겠나이다’라는 기드온의 이 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삿 7:2>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한다’라는 이 말이 기드온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하나님을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뽐내는 자로 곧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며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는 자로 규정하면서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들까지도 모두 부정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오직 자신의 ‘의’만 남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전쟁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만 남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 줄이기’입니다. 기드온을 따르는 많은 이스라엘 자손의 그 수를 확 줄여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는 것입니다(3절). 그래서 돌아간 자가 이만 이천 명입니다. 그리고 남은 자가 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만명으로는 미디안의 수를 이기기는 역부족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사사기 7장 12절>: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연합군의 수가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싸움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2/3가 돌아가 버렸으니 이 싸움의 승패는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두려워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메뚜기 떼같이 이스라엘에 들어온 많은 수의 미디안 사람과 그들의 낙타의 수가 이스라엘을 멸하려 한 것입니다(삿6:5). 그렇다면 이들을 이기는 방법은 이들의 수 만큼 이스라엘도 그 수를 더 모으고 늘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 남은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것이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한마디로 이 전쟁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는 사람의 많고 적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나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전쟁을 주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무엇입니까? ‘수 줄이기’입니다. 하나님은 좁은 길을 인도하는 방식으로 미디안과의 전쟁을 주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방식으로 치뤄지는 전쟁입니다. 이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이 수 줄이기, 좁은 길로 인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제 물가로 남은 자들을 내려가게 하여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 일을 시행하십니다. 이번에는 누구든지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은 따라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따로 세우라 하십니다. 둘 중 어떤 자들이 선택되었습니까?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선택되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해석은 ‘경계심이 뛰어난 병사들’이라서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추론에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수’에 있습니다. 적은 수의 쪽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수가 몇 명입니까? 삼백 명입니다. 그 나머지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남은 자 삼백 명으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기드온과 삼백 용사’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은 자 삼백 명은 용사라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 아닙니다. 그저 미디안의 많은 수에 두려워 떨던 자들입니다. 하물며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는 자들, 전쟁에 나갈 방패와 칼도 없는 자들이 삼백 명입니다. 이들의 무기라고는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횃불이 전부입니다.
이 전쟁은 사람의 많고 적음의 방식으로 치뤄지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의를 완전히 차단한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방식의 전쟁입니다. 기드온과 삼백 명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치고 소리를 외치는 들러리들일 뿐입니다. <삿 7:22>은 여호와께서 서로 칼로 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는 이스라엘의 ‘의’를 원천 차단하기 위하여 선택하신 것이 삼백 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적은 수, 삼백 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하여’ 적은 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삿6:36-37)’라고 나온 기드온의 ‘의’와 그러한 기드온을 따르는 삼만 이천 명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그 ‘의’까지 모두 부정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구원의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규모, 크기, 수입니다. 현대는 이 규모, 크기, 수라는 구조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에 우리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취하는 것을 자기들이 구원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갈망하며 이것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규모와 크기와 수에 자신들의 영혼을 갈아 넣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구원은 규모, 크기, 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에 국한되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을 믿게 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좁은 문, 바늘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세상의 규모, 크기, 수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것을 제일 잘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서로 묻고 자랑하는 말이 ‘재정이 얼마?’, ‘교인의 수는?’, ‘교회 건축은?’, ‘목사의 사례비는?’라는 말들입니다.
이렇게 교회조차도 규모, 크기, 수라는 구조에 갇혀 탐심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기들의 사업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자기를 위한 탐심들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인데 교회가 거대한 우상으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가 장착되어 있는 인간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의 모든 시각은 크기, 규모, 수에 꽂혀 있습니다. 큰 문, 넓은 길이 자기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길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합니다. 좁은 문은 들어가기를 힘써도,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눅13:14). 왜 그러합니까? 좁은 문은 인간에게 허락된 문이 아닙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아예 통과할 수 없는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곧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은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의’로는 도무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은 인간의 ‘의’를 배격하는 문입니다. 인간의 ‘의’가 부정되어야 통과할 수 있는 문 곧 예수를 믿음으로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이 말은 ‘예수를 믿으라’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8장 23-26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큰 부자는 예수께서 ‘네가 있는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을 듣고 근심합니다. 예수께서 그런 그를 보고 하신 말씀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한 말이 이것입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부자의 재물은 곧 자기 자신입니다. 부자라는 자기 자신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 재물입니다. 부자의 자기 ‘의’의 산물이 재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버리지 아니하면, 이것이 부정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의’가 부정된 자들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이며 바늘귀를 통과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드온과 삼백 명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의’만을 남게 하시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삼만 이천 명이라는 수의 프레임에 갇혀 사람의 많고 적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자기가 모집한 삼만 이천 명을 자기의 등에 업고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는 기드온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본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드온의 방식을 부정하고 자신의 전쟁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전쟁의 방식이 무엇이냐면, 기드온이 구원의 힘으로 내세우고 있는 인간의 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방식으로 인간의 ‘의’는 부정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남게 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규모, 크기, 수라는 이 욕망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눅18:27).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와 함께 자기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5:24) 예수를 믿는 자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이며 바늘귀를 통과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을 통과하고 바늘귀를 통과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갈 5:25>에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직 자기에게는 이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 자기의 자랑을 복음으로 내놓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바늘귀를 통과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