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
‘우리 남편은 마음이 좋아서
맨날 사기를 당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기 당하는 사람은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공감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은 좋은 일이지만,
판단력 없는 사람이 남의 말에 공감하는
능력만 뛰어나면 사기를 당한다.
책을 읽고 공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판단력 없이 아무 책이나
읽고 공감한다면 사기를 당할 수 있다.
성경 연구란 교리 연구가 아니다.
성경 연구란 나의 운명을
어디에 맡길 것인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 중요한 일을 알아보는 일에
사기를 당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따라서 성경 연구란
인간에게는 누군가 들어와야만 채워지는
밀실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그 밀실에 들어와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성경을 읽기 전에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아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글을 쓸 때
그의 사랑을 글로 옮기듯이
성경의 하나님도 당신의 사랑을 성경에 담으셨다.
자녀가 부모의 글을 읽을 때
그 글에서 부모의 사랑을 읽어내야 하듯이
성경을 읽으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한다.
세상의 신은 인간에 관심하지 않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의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은
그분이 사랑을 나누는 인격신이기 때문이다.
내 집 화장실 고치는 사람이 온다고
집을 청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개인적 관계가 있는 사람이 오면
청소를 하고 맞이하면서
누추한 집에 오셨다며 자신을 낮춘다.
성경에 입문하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고 싶다는 청원이다.
이 청원은 거절되지 않는 청원이어서
그리스도은 ‘죄인’을 성경의 문을 여는 비밀번호처럼 사용한다.
성경 백성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도덕적 잘못에 연루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 선고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순간
성경의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산인 영생이
그대로 나의 것이 된다.
역할 바꾸기
이하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 나오는 글이다.
“처음으로 영문학 과목을 듣는 1학년 학생들에게
문학 작품 분석법을 가르칠 때
나는 ‘역할 바꾸기’를 역설한다.
이번 학기 영문학 개론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라는 작품을 읽혔다.
남부 귀족 가문의 마지막 혈통인 에밀리 그리어슨은
빠르게 변하는 현대의 도시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북부에서 온 십장
호머 배론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떠나려는 그를 붙잡기 위해
그에게 극약을 먹인다는, 아주 기괴한 이야기이다.
작품 분석을 하면서
에밀리의 성격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학생들은 보통,
“그 여자는 제 정신이 아니에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지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토론이고 분석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떤 작품에서 작중 인물이 그저 ‘남’이고,
그의 행위는 괴팍스러운 성향을 가진
‘남’의 일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나’와 ‘남’ 사이에 공존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공부하는 문학은 애당초 의미를 잃는다.
학생들 말마따나 에밀리의 경우는
단지 하나의 정신병 사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 ‘역할 바꾸기’를 통해
스스로 에밀리가 되어 보라고 하면,
학생들의 관점은 달라진다.
“에밀리도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귀족이기 이전에,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하나의 인간이지요”라든가
“에밀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바깥 세상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라든가
“에밀리의 고립된 삶은
지독한 자기와의 투쟁이었고,
그래서 포크너가 장미를 바치는 거지요”라는 등
에밀리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꽤 그럴듯하게 비평적 접근을 한다.
성경에서 하와는
최초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여자로,
가인은 최초로 아우를 죽인 살인자로,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 위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사람으로,
그렇게 성경을 읽고 나면
성경은 분석이고 해석이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내가 하와라면,
내가 가인이라면,
내가 야곱이라면,
그리고 홍수로 인간을 멸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하고
그들의 역할을 바꾸어 읽으면
전혀 다른 이해에 도달한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언듯 이해는 객관적이요
해석은 주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해를 돕는 것이 해석이다.
잘못 해석하면 다르게 이해된다.
따라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바른 해석이 요구된다.
오래 전부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물(계 17:1)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계 17:15)이요,
짐승(단 7:3)은 나라(단 7:23)요,
바람은 전쟁(암 1:14)이다.
성경은 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도록
상징을 많이 사용한다(마 13:10-11).
성경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상징에 대한 풀이는 해석이 아니다.
상징에 대한 풀이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원하면
성경에서 용례를 찾아 보면 된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해석이 달라지면 처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기가 울 때 배가 고파서 운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젖을 먹이려 하고,
잠이 부족해서 운다고 생각하는 아빠는
잠을 재우려고 한다.
그와 같이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과 상식을 사용해야 한다.
상식이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이 달라서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가정이 깨어지고, 교우 관계가 버성기게 된다.
그런데 어떤게 성경 해석을 상식에 맡길 수 있는가?
인간의 상식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인간이 타락하면서 원정보를 해킹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이 해킹하지 못한 곳이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가정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만은
지역이 다르고 세월이 달라도 변함이 없다.
2009년 2월 4일, 경기서남부 연쇄살인범 강호순(38)이
경찰 조사과정에서 ‘내가 저지른 범행을
책으로 출판해 아이들이 인세라도 받게 하고 싶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공분을 샀지만,
이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만은
인성과 관계없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세상의 상식과 가정의 상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성철 스님은
가야산의 메아리(1982년 10월)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이 말은 부모의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내 나이 10살 때
한국에는 고아들이 넘쳐났다.
하루는 아버님이 잘 아는 장로님이
경영하는 고아원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마침 그때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과히 넓지 않은 고아원 마당에 들어서자
열댓명의 아이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한 중년인이 아이들을 엎드리게 한 후에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얼른 나를 돌려세우더니
고아원 원장에게로 갔다.
이 말 저 말 나누다가
아버님이 원장에게 물었다.
“아이들 돌보기가 쉽지 않지요?”
원장님 하는 말씀이
“네, 쉽지 않습니다.”
“왜 나쁜 짓을 많이 하나보지요?”
“오늘 아침엔 아이 하나가 밥을 먹으며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맞는 군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는 집에서 밥 먹을 때 마다
밥을 흘려도 말 한 마디 듣지 않는데,
부모가 없으면 저렇게 매를 맞아야 하는 거로구나.”
가정에 용서가 흐드러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불교에서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는 잘못하지 않은 사람이
잘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상대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이다.
가끔 성품 좋은 두 형제가 불목하는 것을 본다.
성품은 좋은데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과 문제가 생기면
거듭거듭 ‘그래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고 말한다.
용서는 많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이 타락할 때
사단이 가정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면
‘지금 잘못된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 ’ 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가정이 다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허물어진 가정만 보도되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이다.
세상의 상식은
죄인이 벌을 받아야 하지만,
가정에서 아들이 잘못하면
용서가 아버지 마음에 먼저 내려앉는다.
교육상 때로는 엄하게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벌이 아니라 징계이다.
벌과 징계는 받는 자의 아픔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가하는 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사랑 없이 때리는 매는 벌이요
사랑으로 때리는 매는 징계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으로 보인다.
내 나이 80이 되던 어느 날
딸이 나에게 말했다.
“어릴 때 아빠는 너무 무서웠어요.
잘못하면 막 때렸어요”
나는 “그래?” 하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화들짝 놀랐다.
“자녀 사랑이라고 하면
누구 못지 않은 사람인데... .”
만약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잔인한 분이라고 생각된다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것이다.
원정보가 해킹당한 세상에서
잘못된 상식이 횡행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진화론이 제창된 이후
‘콩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당연한 상식이 무시되고 있다.
아버지가 소개되어야 내가 소개 되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아버지를 원숭이라고 하는 이론을
과학으로 받아들인다.
상식이 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면
지배와 착취를 생각하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고 하면 수치를 생각하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사 43:21)를 읽으면
‘북한의 기쁨조와 우리들이 무엇이 다른가?’라고 묻는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땅과 생물을 돌보라는 말이요,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인간에게 주인이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더 열심히 일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거룩에서 분리만 생각하고,
예수를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간 이야기에서
예수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요 21:3)는 말에서
실망한 베드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의로워진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글을 읽을 때
저자나 주인공의 마음으로 읽는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들으면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인정을 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이기시려는 것입니다’
(롬 3:4, 새번역)는 말씀을 기억하고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눅 19:4)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의 모습에서
예수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 21:3)는
베드로의 말에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2)는 말씀을 기억한다.
글을 뜻으로 읽는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저자의 마음을 헤아린다.
원정보을 잃어버림으로
상식이 달라진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귀있는 자들은 들으라’(마 13:9)는 말씀이다.
원정보를 잃어버림으로 사람들은
‘들을 귀’(막 4:23), 즉 상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한다는 것은
부모의 마음으로 성경 읽기를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