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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기도에 관한 교훈, 바알세불 및 표적 논쟁과 외식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경고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 1-13절이 기도에 관한 주의 교훈을, 중반부 14-36절이 예수를 바알세불(Baalzebul)의 힘을 빌어 일하는 자로 규정하고 또 근본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주의 사역과 교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면서 계속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表迹)만 구함으로써 일어난 논쟁을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 37-54절은 외식(blasphemy)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들을 보도하고 있다.
1-13절의 기도에 관한 주의 교훈은 제자들의 바른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실 것에 대한 요청(1절)에 따라 주께서 기도할 내용의 원형(漂型)으로서의 주기도문(2-4절)을 제시하시고 나아가 간절한 심정으로 간구할 것(5-8절) 그리고 창조자이신 하나님(God)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피조물들에게 분명히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며 기도할 것(9-13절) 등 바른 기도의 자세를 교훈하신 것으로 보다 세분할 수 있다.
실로 기도는 성도 각자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이다. 기독교 신앙은 가장 위대한 객관적 교리(敎理)와 조직(組織)의 신앙이기도 하지만 성도 각자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도 직접적인 교제를 통하여 회개 중생하고 성화(Sanctification)를 계속함으로 역동하는 체험(修驗)의 신앙이기도 하다.
따라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구속사(redemptive history)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성도의 삶 속에서 갖는 기도(prayer)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교훈대로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며,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진정 요청되는 내용을 확신하며 간청하는 자세로 기도하느냐 안하느냐라는 기도의 실천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 말씀 자체와 2000년 교회사(敎會吏)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대한 승리의 삶을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의 비결의 근본은 모두 다 이러한 자세에 입각한 기도의 실천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4-36절의 바알세불과 표적 논쟁은 과거 갈릴리에서 사역할 때 발생했던 논쟁(마 12:22-45 ; 막 3:20-30)과 유사한 상황이 이제 후기 유대 사역 중에도 다시 발생한 것을 보도한 것이다.
상황이 동일하므로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도 말미(末尾)에 시바 여왕의 예뿐만 아니라 주께서 등불과 눈의 비유까지 추가하여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와 완고성을 더욱 명료히 지적하신 점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유사한바 이에 대해서는 앞서 밝힌 마 12장의 개관을 참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사건을 보도하는 누가의 독특한 관점에서 갖는 이 사건의 구속사적 의의에 대해서만 고찰하기로 한다.
전날 마태와 마가는 바알세불 논쟁과 표적 논쟁을 비교적 독립된 사건으로 보도하고 특히 바알세불 논쟁의 경우 이를 주께서 성령(Holy Spirit)을 거스리는 죄로 규정한 점에 초점을 맞추었었다. 그러나 누가는 바알세불 논쟁과 표적 논쟁을 벙어리 귀신을 쫓아낸 주의 사역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로 묶었을 뿐 아니라 이를 동일한 사역을 목도하고 주를 찬양하는 한 여인의 반응(27절)과 대조시켜 제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본 사건을 인자(人子) 예수의 사역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 다루면서 이런 반응의 내용으로 아예 예수의 사역을 사탄(the Satan)의 힘을 빌은 것으로 정죄하는 자, 근본적으로는 예수를 믿을 마음이 없으면서 계속 표적만 더 요구하는 자. 예수를 찬양하는 자 등의 반응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본문은 우리에게 바로 이 시간 태초부터 종말까지 진행되는 구속사(救贖史)에 대한 계시인 성경(聖經)에 대하여 그리고 거기 담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증거에 대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응답하고 있는 여러 사람의 여러 유형에 대하여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하여 물론 이에 무관심하거나 적대하거나. 거부하는 자는 구속사의 축복에서 당연히 제외 되겠으나 28절의 말씀이 분명히 선포하듯이 그저 이론으로 이를 알거나 분석하고 관습적으로 주를 수긍하는 사람도 또한 온전한 구속사적 축복을 누리지 못하며 오직 이를 진심으로 믿고 행하는 자만이 참 복을 얻을 수 있음을 새삼 각성한다. 실로 지금 이 시간 나는 우리 인생의 존째의 절대 근거인 하나님의 진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후반부 37-54절의 바리새인들을 향한 책망은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형식주의적 신앙의 오류와 외식(blasphemy)에 대한 책망인 동시에 기실은 예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행한 구속사적 오류에 대한 저주와 경고이기도 하였다.
인자이신 예수는 다만 다른 많은 인자(人子) 중의 한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현재는 사탄의 유혹에 따라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인이 된 인간의 죄 값을 다른 존재가 대신 지고 희생함으로써 구속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 본질로 하는 구약의 예언과 언약의 성취로서 성육신(Incarnation)하여 인자가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셨다. 그리하여 구속 사역을 일단 성취하셨음은 물론 다시금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을 골자로 하는 새 언약을 주신 분이었다. 즉 주님은 인자이신 동시에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요, 또한 제 2위 성자로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우리의 구속주(救讀主)이셨다. 그리고 최종적인 천국 구원을 골자로 하는 새 언약을 주신 분이셨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이처럼 구약을 계승 확장시킨 주님의 사역과 행적과 교훈이 보여 주는 주님의 메시야직을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구약의 전제가 아니라 일부 내용만을 자신들의 유대 민족의 입장에서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에 빠져 메시야는 자신들만을 이 지상나라들의 지배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착각을 그대로 고수(固守)했다. 그리하여 참 메시야(Messiah)로서 사역하신 주님을 거부했다. 그중에서도 일부 지도자 계층은 메시야로서의 주의 사역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기득권이 파손될 것을 염려해 세계 만민을 위한 메시야로서의 주님의 사역을 무조건적이고도 악의적으로 배척하였다.
이런 이들의 배척은 급기야는 미구(未久)에 예수의 무고한 처형에까지 이를 것이었다. 실로 하나님이 택한 구약 선민(選民)이 오히려 구약에 거듭 예언 약속된 메시야를 죽이는 엄청난 범죄에 앞장선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통찰하고 계신 주님께서는 그들의 형식주의적 신앙과 위선은 물론 과거 인본주의적 오류에 빠져 참선지자들을 죽인 그들 조상들의 오류처럼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구속사의 주체이신 자신에 대하여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런 저주와 경고를발하셨던 것이다.
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또 남들보다 더욱 철저하고 경건하게 실천한다고 남에게 내세우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기실은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왜곡시킨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신본주의적 자세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앉을 때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일부에만 집착한 결과 오히려 더 큰 사탄의 도구로 전락될 위험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교제가 아닌 이론적 교리와 제도에만 얽매인다면 곧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될 것임을 경고받게 된다.
외울 말씀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기도의 내용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 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하라
간절한 기도
5 ○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눅 18:11
확신하는 기도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마 7:9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를 사단의 수하로 정죄하는 자
14 ○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마 9:34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요 2:25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출 8:19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掃除)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주를 찬양하는 자
27 ○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눅 1:28,48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마 7:21; 눅 8:21:
주께 표적을 요구하는 자
29 ○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24:46; 행 10:40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고 전 15:4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 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왕상 10:1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 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욘 3:5
등불과 눈의 비유
33 ○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외식하는 바리새인들
37 ○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고전 15:36
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사 58:7;
눅 12:33
바리새인들을 향한 여섯 가지 저주
42 ○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마 23:23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마 23:6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마 23:29
48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 도다
49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마 23:34; 고전 1:24,30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창 4:8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 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막 12:13
본문 & 자료노트
보감-11:1-4 주기도문이 교훈하는 기도자의 자세
마 6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1:5-13 기도 응답의 5대 요건
막 11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1:1-4 마태와 누가의 '주기도문' 기록 비교
마태와 누가의 주기도문은 내용상 그 핵심 부분이 서로 일치하고 있으나. 마태에 비해 누가가 훨씬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이방인들을 독자로 하는 누가의 본서 기록 동기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주기도문의 구성 요소 분석에 대하여 마 6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마태복음 | 누가복음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6:9) | 아버지여(11:2)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6:9)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1:2) |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 나라이 임하옵시며(11:2)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6:11) |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3)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11:4) |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6:13)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11:4)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6:13) | 기록 없음 |
삽화 -11:33 팔레스틴의 등잔
1세기 팔레스틴에서는 B.C. 5세기경 금속으로 만든 단순한 형태의 등잔에서 발전한 점토 또는 도기로 가장자리를 오그려 얕은 접시 형태로 만들어진 등에 불을 켜놓았다. 마 5장 자료노트, '팔레스틴 가옥의 등불' 참조.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별도로 등경 대신 말 같은 그릇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등불을 올려놓았다.
보감-11:2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
1 | 하나님 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음(출 20:7; 느 9:5) |
2 | 하나님의 이름을 늘 높이 찬양함(시 34:3; 99:3) |
3 |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함(시 69:36) |
4 | 하나님의 이름의 권능을 믿음(시 99:3) |
5 |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함(시 119:55) |
6 |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김(사 57:15) |
7 |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생활을 함(마 5:16) |
8 |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요 4:24) |
9 |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킴(고전 16:2) |
10 | 성도가 받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림(계 4:11) |
풍습-11:7,8 침상과 침실
왕상 21장 자료 노트 참조
역사 배경-11:42-54 유대교의 이해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참조
삽화-11:42, 박하
박하(Mint)는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서 많이 서식하는 방향 식물이다. 그 잎과 줄기에는 약이나 음식물의 조미료에 사용되는 향내 나는 기름이 들어 있다.
삽화-11:42, 운향
운향(蕓香, Rue)은 강한 냄새가 나는 사철 관목초로 회색빛이 도는 초록색 잎사귀와 레몬빛 노랑색의 꽃이 달렸다. 이는 양념, 약, 장식품 등에 다양하게 사용된다.
원여연구-11:44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타 므네메이아 타 아델라'이다. 여기서 '타 므네메 이아'는 기념비(monument) 내지는 '분묘'(tumh)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회고하다'나 '기억하다'(벧후 1:15)는 뜻의 동사 '미므네스코'에서 유래하였다. 이에 '므네메이아'는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이나 회고를 위해 세워둔 기념비 내지는 기념비가 세워진 무덤 전체를 가리킨다.
한편 '아델라'는 '므네메이아'를 꾸며주는 단어로서, 부정적 불변사인 '아'와 형용사 '델로스'의 합성어이다. 이때 '아'는 '~없이'(without) 또는 '~이 아니다'(not)라는 뜻을 가지며, '델로스'는 '분명한'(고전 15:27; 갈 3:11)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을 합친 의미는 '분명 하지 못한'(uncertain)이 된다. 결국 본절의 '평토장한'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은', 또는 '알지 못하는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평토장한 무덤'이란 원문상의 의미로 볼 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덤'(공동 번역), '기호표가 없는 무덤들'(Unmarked graves, NIV), 숨기워진 무덤들' (hidden graves)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처럼 당시 종교 지도자급에 해당하던 바리새인들을 평토장한 무덤으로 비유하신 이유를 원문의 뜻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흡사 시체를 넣었으나 표면상으로는 시체로 인한 부패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또 사람이 위를 밟고 있으나 그것이 무덤인지도 알 수 없는 평토장한 무덤처럼 속으로는 부패하며 썩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행동하여 사람들이 도무지 타락상을 알 수 없게 한 바리새인들의 양상을 예수께서는 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요 주제-11:14-26 축사의 이해
막 9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1:28 성경적 복의 개념
신 28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1:30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난제 해설-11:29-32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유대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하늘로서 오는 표적'(막 8:11)을 구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막 8:12에서는 보다 더 직설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표적들을 나타내 보이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본 사건 이후로도 얼마든지 많은 표적들을 행하실 수 있는 신적 권능을 가지신 분이다. 예수의 표적에 관해서는 요 2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당신이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수가 없다고 하셨는가? 이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경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은 당신이 더 이상 표적을 행하시지 않으신다거나 아니면 더 이상 표적을 보일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표적을 보일지라도 악함과 편견과 불신으로 가득찬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다. 때문에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 이다' (요 3:2)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고 하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이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유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취한 편견과 불신으로 예수를 배척하였던 것이다. 유대인의 예수 배척에 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께서는 애당초 예수를 믿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시험하기 위매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경고로서 본문의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를 믿고자 마음을 열지는 않고 믿음의 증거만 거듭 요구하는 완악함을 지니고 있지나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2. 끝까지 불신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
유대인들의 완악함과 불신이 그토록 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최후로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3일간 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이렇게 부활의 표적을 보여 주신다 하신 것은 그 표적이야말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의 복음 및 장차 천곽과 영생에 관한 약속과 예언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표적이요 믿음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만일 유대인들이 당시와 같은 불신을 끝까지 고집하고 있다면 결국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을 경고하시기 위해서였다. 곧 요나의 표적을 보고도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었건만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와서 부활의 표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정죄받아 마땅했던 것이다(32절; 마 12:41).
3. 교훈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신과 완악함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불신과 완악함 때문에 '너희에게 더 이상 보일 표적이 없다'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삼가 주의 깊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예수께서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의 구속 희생과 부활의 표적을 보여주시기까지 인간들의 완악함과 불신을 끝까지 참으시고 묵묵히 당신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신 사실에서 그분의 사랑의 깊이와 크기가 어떠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 곧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당시의 완악한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부활의 표적을 약 2천년 전에 주시고 이를 성경과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증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현대인들을 향하여 정죄의 손가락을 내밀지나 않을지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볼 일이다.
보감-11:37-44 외식자의 특징
마 23장 자료 노트 참조
풍습-11:37-39 유대인이 식사 정결례
막 7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1:53,54 유대인이 배척
막 12장 연구 자료 참조
11:1-13 기도에 대한 가르침
앞장(눅 10장)에서는 70인의 제자 파송과 귀환, 사마리아인의 비유, 마리아와 마르다의 일 등을 통해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많은 교훈을 베푸시는 모습을 소개했다.
이제 본장에서는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간의 충돌과 언쟁이 절정에 달하고 있어 예수님께서 점차 수난의 길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한 가운데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는 모습을 소개한다.
이 기사는 마태도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산상 수훈의 일부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마 6:7-13; 7:7-11). 그래서 참 신자의 기도하는 태도와 외식하는 자나 이방인의 형식적인 기도를 대조하여 참된 기도의 모습을 교훈한다. 반면에 누가는 시기나 장소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이 없이 단지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기도의 내용(1-4절)과 기도의 자세(5-13절)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산상수훈의 주기도문(마 6:9-13)과 그 내용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다. 하여튼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서두에서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하나님나라의 실현을 구하고(2절) 그 다음에 개인적인 간구를 드리는 것(3,4절)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전형으로 성도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시는데(5-13절), 먼저 밤중에 찾아와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5-7절)를 통해서는 기도할 때에 응답이 될 때까지 인내와 열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 18:1-8)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기도의 방법을 제시하신다(9,10절). 이러한 기도의 방법은 삼중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뒤로 갈수록 더욱 강조되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녀 점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구한다'는 것은 자기의 결핍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채워주시도록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한다'는 말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결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자기 결핍을 인식하지 않고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한 것이다. 즉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인내를 더한 것을 말한다. 즉 구하는 자는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믿음으로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며(약 4:2), 기도에는 인내가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산상 수훈에 나타난 주기도문과는 달리 본서에 나타난 주기도문은 주어진 장소와 시간이 매우 모호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기도가 주어진 동기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기도하심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이에 제자들은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갖는 교제의 실질성과 중요성을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서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이러한 동기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제자 중 하나가. - 여기서 말하는 제자가 열 두 사도 중 한 사람인지 예수님의 추종자중 한 사람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70인의 전도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Hendr조mien, Spence). 아마도 그는 전에 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여‥‥가르쳐 주옵오서. - 당시 유명한 랍비들이 제자들에게 기도의 어떠한 형식을 가르쳐 주는 일은 자주 있었다(Plummier, Spence). 요한도 자기 제자에게 기도문을 가르친 것이 분명하며 예수께서도 실천적으로 기도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이에 도전을 받은 이 제자는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문장 형태나 모범적인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 주시기를 요청한 것이다.
11:2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의 요구에 응하여 모범적인 기도문을 말씀해 주셨다. 이러한 기도문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 초기에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한편 여기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은 형식적인 반복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주기도문의 정신을 터득하고 그 정신에 근거해 기도하라는 말이다.
아버지여. - 기도의 대상이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은 아람어 '아바'(Abba)의 음역으로, 이 호칭은 예수님이 직접 사용하셨고(막 14:36), 초대교회에서도 사용하였다(롬 8:15; 갈 4:6). 예수님께서 일반적으로 친근감이 있는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라신 것은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에 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성도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전능자이신 거룩한 아버지께 깊은 신뢰와 진실한 믿음과 친근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히브리인들의 사고에서 이름은 호칭 이상으로 그 존재의 인격 전체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존재에 대한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동사 '거룩히 여김받다'(하기아스데토)가 수동형 명령법으로 되어 있는 것은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며 경배하오니 받으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청원이 아니라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이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섬기겠다는 신앙의 서약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거나 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하며(출 20:7; 시 7:17). 기도와 예배, 삶 가운데 겸손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만방에 하나님을 알려야 할 것이다(겔 36:23).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성취되길 대망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영역이다(마 3:2 주석 참조).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초림과 그의 가르치심으로 이미 임했다(눅 9:1; 10:17). 그런데 현재 임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바라는 이 기도는 타락하여 죄로 오염된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사탄의 세력이 종식되길 바라며, 하나님의 뜻이 인류의 마음과 생활에 점점 더 완전하게 이루어 지길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갈망하면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예배와 경배의 삶을 실천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앞장 서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기도를 한 다음 이제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실질적인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인식하는 기도이다. 한편 '일용할'(에피우시온)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① 원어 자체가 '내일'을 가리키므로 '내일을 위한'으로 해석할 수 있다(Meyer, Bengel, slummer). ② '필요한' 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Hendriksen). 이 두 가지 견해 중 '날마다'(토 카드 헤메란)와 '주옵시고'(디두)가 현재 능동태로,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고려해 볼 때 ②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또한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오늘날'이라고 분명히 명시된 점(마 6:11)을 보아도 본문의 '일용할'이란 매일 매일 사용하기에 필요한 양식임이 분명하다. 하여튼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매순간 우리는 우리의 지상 생활에 필요한 것조차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주옵시고. - 전절(3절)이 육을 위한 기도라면 본절은 영을 위한 기도이다. 여기서 누가는 마태가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경제적인 부채를 의미하는 '오페일레마타'를 사용한 것과는 달리 도덕적인 범죄를 의미하는 '하마르티아'( )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보다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 본절과 마 6:12절은 동일하다. 따라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마 6:12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마치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본절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용서를 구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기를 꺼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죄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한다(엡 4:32; 골 3:13). 다만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자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지은 죄를 용서함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죄 사함의 증표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진심으로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더 이상 죄 짓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악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길 기도하게 된다.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을 의미하며, 이 유혹은 사단으로부터 온다. 시험에 대해서는 마 4:1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하나님은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시기도 하지만(욥 1:12),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약 1:1-15). 따라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된다. 또한 시험을 받았으나 승리하시고,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롬 8:5; 히 2:18; 벧후 2:9). 한편, 마태복음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이 삽입이 되어 있다(마 6:13).
11:5 또 이르시되. - 기도에 대해 질문하는 제자에게 주님은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비유를 통하여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실성을 다시 말씀하고 계시다.
밤중에‥‥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 어떤 사람의 벗이 떡 세 덩이를 빌리기 위해 찾아온 시간은 '밤중'이었다. 이 시간은 식구들이 함께 잠자고 있는 시간(7절)이라 비록 친구라 할지라도 실례가 되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중에 찾아간 것은 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떡 세 덩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1:6 내 벗이‥‥먹일 것이 없노라. - 밤중에 찾아온 그 친구는 팔레스틴의 낮 시간의 더위를 피하여 밤에 여행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여행에 지친 몸으로 친구를 방문하여 숙식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방문을 받은 사람은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아무런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떡을 필요로 하는 친구를 위해 친분이 있는 다른 친구의 집에 찾아간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궁하면서도 손님 접대를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1:7 저가 안에서‥‥없노라 하겠느냐. - 본문은 자기 친구의 요구에 응하기를 거절하다가 후에 치근거리는 친구를 돌려보내기 위해 그 필요를 채워 주었다는 잘못된 해석을 하기 쉽다. 그러나 본절은 오히려 보편적인 사람은 친구의 간청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사람은 비록 문이 닫혔고, 식구들이 함께 잠들어 있어서 일어나게 되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도 있고, 어두움 속에서 문빗장을 여는 것이 매우 귀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간청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즉 부모, 자녀, 종들까지도 한 방에서 자야 되는 넉넉지 않은 평민 가정의 가장도 친구의 간청에 응답하는데, 하물며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성도들의 필요를 위한 기도를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뜻인 것이다.
11:8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 '강청함'(아나이데이안)은 '부끄러움도 없는 파렴치한', '때나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가시게 구는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본절은 구하는 자가 염치 불구하고 간곡히 구할 때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이는 성도가 열심과 끈기, 그리고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간절히 끝까지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절에서 13절까지는 앞선 비유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기도에 힘쓸 것을 가르치신 것으로 12절의 내용이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마 7:7-11과 문자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마 7:7-11 주석을 참조하라.
구하라‥‥주실 것이요. - 구하는 것은 필요에 대한 인식 속에서 겸손히 청원하는 것을 뜻한다.
'구하라'(아이테이테)는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구하는 것(행 12:20)으로 '기도'와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했는데(마 18:19; 요 11:22; 엡 3:20), 그 뜻은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겠다는 진지한 의지가 엿보이는 기도의 행위'를 가리킨다.
찾으라‥‥찾을 것이요. - '찾으라'(제테이테)는 말은 '찾거나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실하게 기도한 사람은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더욱 상고해야 하며 (요 5:39; 행 17:11), 하나님의 뜻대로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마 7:21-25; 요 7:17).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두드리라'(크루에테)는 기도하고 찾는 데 있어서 절박성이 내포된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고, 행하고, 그것이 응답될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곧 왕께서 문을 여시어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주실 때까지 왕국의 문을 계속 두드려야 한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동사는 모두 현재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가지고 계속 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11:10 구하는 이마다‥‥열릴 것이니라. -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일치한다. 9절과 본절에서 응답에 대한 약속이 6번 나온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행동과 인내가 동반된 기도는 응답되리라는 점층적인 논증에 의해 강화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의 약속(시 91:15; 사 58:9; 요 15:7)을 확신해야 하며, 항상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주님(마 7:11)의 경륜을 믿어야 한다. 또한 응답이 없을 때에는 자신의 삶과 기도에 대한 태도가 바른가를 겸허하게 성찰해야 하며, 끝까지 간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11:11 아비 된 자 누가‥‥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번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함으로 보다 친밀감을 느끼게 하신다. 생선과 알과 떡은 유대 지방의 정식이었다(Plummer). 이와 같은 필수품을 요구하는 아들에게 아무리 악한 세상의 아비라 할지라도 뱀과 같은 악한 것을 대치하여 줄 자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역설적인 강조 표현이다.
11:12 알을 달라‥‥전갈을 주겠느냐. - 여기서 알은 삶은 달걀을 의미하며, 전갈은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되는 독충을 가리킨다. 그런데 전갈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종종 등장한다(신 8:15; 계 9:3,10). 하여튼 전갈은 모양 상 뱀이 생선과 유사하듯 알과 유사하다. 그리고 뱀과 전갈의 공통성은 모두 독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본절 역시 악한 세상의 아비라 할지라도 구하는 아들에게 나쁜 것을 주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역설적 표현이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할지라도'(포네로이 휘팔콘테스)는 직역하면 '처음부터 악하였으나'라는 뜻으로, 원죄설과 관련되었다고 보기도 하나(Bengel),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악함, 하나님의 완전성과 인간의 불완전성을 대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보는 것이 좋다.
너희 천부께서‥‥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마태복음에는 단순히 '좋은 것'(아가다)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성령'(프뉴마 하기온)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서로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신자의 참된 삶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생과 영적 생활에 있어서 가장 좋은 원천이 된다(요 16:7; 고전 12:4-11). 따라서 주님은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는 요구에 참된 기도의 모범을 소개하셨을 뿐만 아니라 응답의 확실성과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런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11:14-28 바알세불 논쟁
앞 단락(1-13절)에서는 주기도문과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를 통해 기도할 내용과 자세를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에서부터는 점차 고조되던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나타난다. 본문의 내용은 소위 바알세불 논쟁이라 불리는 기사인데(마 12:22-37; 막 3:22-30)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시자 세 부류의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즉,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기이히 여긴 무리들이 있었던 반면, 몇 사람은 이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힘입어 행한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어떤 이는 신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면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였다(14-16절). 결국 이 논쟁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과 말씀 전파의 원천적인 근원이 어디인가를 놓고 일어났다. 즉 그 유래처가 바알세불이냐 하나님이냐 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먼저 통일된 조직체 내에서의 분열은 파멸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음을 보이심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바알세불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의 비난이 모순된 것임을 반증하셨다(17,18절). 사실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축사를 행했다면 바알세불 스스로가 자신의 세력을 파괴하여 자멸하는 것이 되고 만다. 또. 그 당시에 축사의 능력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바알세불의 능력을 받았다는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19절).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자신 의 이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임하였다는 사실을 선포한다(20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강한 자의 비유(21-23절)와 일곱 귀신의 비유(24-26절)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탄을 쫓으신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 그러나 예수님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신 예수를 배척하고 핍박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 한편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배척하는 자들 중에서도 한 여인은 예수님을 찬양하는 신앙을 보여 준다(27절). 이러한 찬양은 마치 세례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이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를 찬양했던 대목(눅 1:42)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칭찬을 듣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축복의 조건이 육적인 혈연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있음을 교훈하신다(눅 8:21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현재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28절), 또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분께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11:14 본절에서 20절까지는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으로 불붙은 바알세불 논쟁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이 바알세불 논쟁을 기점으로 하여 예수와 유대 교권주의자들과의 대립의 양상이 결정적으로 깊어져 간다.
한 벙어리 귀신. - 여기서 귀신은 선천적이 아닌 어떤 기회에 벙어리 되게 한 일종의 악령이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눈까지 멀게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마 12:22). 예수께서는 이러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셨다. 이에 대해서는 막 9장 자료노트 '축사의 이해'를 참조하라.
11:15 그 중에 더러는. -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마 12:23), 부정적으로 예수가 사탄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자도 있었다. 이들을 마태는 바리새인들이라고 했고(마 12:24),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이라고 했다(막 3:22). 하여튼 이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행한 불가사의한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것으로 판단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은 신약에서 사탄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마 10:25 주석을 참조하라.
11:16 예수를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 (마 12:38)이었다. 이들이 요구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은 엘리야가 불이 떨어지게 한 것(왕상 18:38)이나, 모세의 불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이라면, 과연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중명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요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보다 더 큰 능력을 요구하여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려는 술책이었다. 여기에서
이들의 불신앙과 교만을 볼 수 있다.
11:17 저희 생각을 아시고. - 혹자는 예수님이 그들의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나(Greydanus), '아시고'(디아노에마타)가 '의도나 목적을 간파하였다'는 뜻이므로 본절은 예수께서 그의 신적 능력으로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간파하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무너지느니라. - 논리적으로 볼 때, 나라가 내분이 생겨 갈라지면 망하듯이 개개인의 집도 서로 싸우면 망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간단 명료한 이치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11:18 만일 사탄이‥‥서겠느냐. - 본절에서 예수님은 '바알세불'이라는 냉소적인 경멸의 별명 대신에 '사탄'이라는 본명을 사용하였다. 이는 17절과 같은 의미로 동일 집단 내에 분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히려 분쟁은 사탄 나라 내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는 것이다(엡 6:1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이 입증된 것이다.
11:19 너희 아들들은. - 이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비방에 대한 두 번째 논증을 하신다. 여기서 '너희 아들들'이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나 동료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Hendriksen, Ridderbos).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당시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나 그 추종자들 중 어떤 이는 물, 연기 또는 마케루스라는 나무의 뿌리를 이용하여 귀신을 축출하고, 곧이어 솔로몬이 비방으로 남겨두었다는 주문을 외워 그 귀신이 다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마 7:22 ; 막 9:38; 행 19:13-16, Josephus). 바리새인들은 이런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유독 예수의 이적에는 비방으로 맞섰다. 그 이유는 예수의 이적은 자기들의 주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했기 때문에,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추종할까봐 염려해서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러한 귀신 쫓는 자들의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물으셨다. 바리새인 중 귀신쫓는 자들의 능력의 원천을 묻는 예수님의 이 질문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게 하는 심오하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귀신 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 되고, 이와 반대로 그들의 귀신 축출 행위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자기들의 행위는 인정하면서 유독 예수의 행위는 인정치 않는 자기들의 부당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예수의 행한 기적은 인정치 않고 자기 제자들의 유사한 기적은 인정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예수에 대한 비난의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판결 내릴 수는 없다. 따라서 그 비난의 옳고 그름은 바리새인 중 귀신 쫓는 자들이 판결 내려야할 것이다(Ridderbos). 예수의 이 답변은 전혀 빈틈이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귀신 쫓는 자들이고 비난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기들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 되며, 반대로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선생들을 비난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예수를 변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11:20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쫓아내는 것이면. - '하나님의 손'(닥튈로 데우)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구약적 표현으로(출 7:5) 십계명이 쓰여질 때도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었다(신 9:10). 마태의 병행구에는 '하나님의 성령'(엔 프뉴마티 데우)으로 표현되었다. 결국 본절은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적극적인 변론이다.
하나님의 나라가‥‥임하였느니라. - 여기서 '임하였느니라'( 에프다센)는 말은 원어상 부정과거 형태로서 '결정적으로 임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이미 임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란 공간적 개념에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주권'과 '통치'의 개념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본서 서론, '하나님 나라의 이해' 참조),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이 사건은 곧 사탄의 통치 영역에 하나님의 능력이 침입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하도록 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원칙적으로 이미 임하여 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형태로는 임하지 않았다. 즉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절정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전적인 실제인 것이다(Hendriksen).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이 원칙적 사실은 귀신의 왕이 최종적으로는 완전히 추방될 것에 대한 약속과 보증이 된다(Ridderbos).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귀신 축출 사건은 사탄의 나라가 완전히 정복되는 '전조'인 것이다. 한편 '축사의 이해'에 대해서는 막 9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1:21 강한 자가‥‥안전하되. - 이제 예수께서는 지금까지의 그의 논조를 더 한충 강화하는 확증적인 한 예를 들고 계시는데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을 상징한다. 또한 '집'은 세상을 가리키며 '소유'는 사탄이 지배하는 사람과 가치들을 말한다. 이것은 사탄이 비록 인류를 실질적으로 다스릴 권리를 갖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허용 아래서 매우 강력하게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 '더 강한 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서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마 4:11; 눅 4:13), 사역을 통해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셨고(눅 4:1-13; 8:26-39; 9:37-42), 마침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갈 6:14; 골 2:15). 그리고 주님은 종말론적으로 재림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승리를 이루실 것이다(계 20:1-3).
저의 믿던 무장을‥‥재물을 나누느니라. - '저의 믿던 무장'이란 '사탄이 유용하다고 신뢰하던 무기'란 뜻으로 이것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는 사탄의 능력과 영향력을 의미한다. 또한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는 말은 더 강한 자이신 주님께서 사탄의 모든 지배권에서 성도들을 벗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결국 예수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 대한 사탄의 영향력을 파쇄(破碑)하시고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심을 뜻한다(요 3:16; 5:24).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헤치는 자니라. - 예수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신다. 사람들은 예수와 함께하든지 아니면 반대하든지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서로 대적하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Bengel). 그래서 만약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분에게 대항하는 자며 반대하는 자인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나'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① 사탄과
그 추종자들(Allen, Chrysostom), ② 뜨뜻미지근하여 아직 결정짓지 못한 사람들(Bleek)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 중에서 ①의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또한 본절에서 '모은다'는 말은 추수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Barclay). 즉 예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마치 사람이 곡식을 흩어지게 해서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예수로부터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자를 의미한다. 또 이런 사람은 사람들을 목자 없는 상황에 빠뜨려 사탄의 손쉬운 먹이가 되도록 방치해 두는 자들이기도 하다(마 9:36). 따라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를 불러 모으는 그분의 전도 사역에 동참하기를 꺼려하는 자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정면 대항하는 자들인 것이다(Hendriksen).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영적 중립 상태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귀신이 나간 사람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을 보면 귀신이 나간 사람이 성령을 영접했다는 말이 없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는 했으나 영적 공백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 없는 곳. -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광야와 같은 곳을 뜻하는 말로,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을 나타낸다.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 사람에게서 나간 귀신은 여러 곳으로 돌아다녀 보았지만 그가 이전에 거했던 그 타락하고 부패했던 사람의 마음과 같이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옛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11:25 와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 귀신이 돌아와 보니 그 집은 비어 있었다(마 12:44). '비어 있다'는 말은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빈집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Ridderbos).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그 집에 거주하시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집은 다시 귀신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Calvin). 더욱이 이 집은 깨끗이 소제되어 있었다. 여기서 '소제되어 있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즉 귀신이 보기에 자기가 들어와 살기에 적합하도록 소제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집은 '수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수리되었다'(케코스메메논)는 말의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장식되어 있었다'(had been decorated)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집은 그 귀신이 거하기에 아주적합하도록 꾸며져 있었다. 한편 본절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시 우상 숭배라는 패역한 범죄를 척결하는 등 개혁적인 일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바리새주의가 발흥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적 의는 잊어버리고 외부적인 데에만 신경 쓰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율법주의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들은 전에는 한때 악한 영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참된 영적 변화가 없으므로 악한 영이 다시 들어와 살기에 적합하게 텅 비어 있었고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었다.
11:26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더 심하게 되느니라. - 그 더러운 귀신은 그 비어 있는 집을 완전히 자기의 세력 하에 두기 위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갔다. 귀신 일곱이 들어가자 그 사람의 형편은 전에 귀신 하나에게 지배받았을 때보다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유대인의 수 개념으로 볼 때 완전한 숫자이다. 따라서 '일곱 귀신'이란 더 이상 생각해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악한 귀신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하여튼 우리는 이상과 같은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 받게 된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즉시 하나님의 영을 영접하여 그 마음을 지배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11:27 한 여자가‥‥복이 있도소이다. - 바알세불 논쟁에 대해 마무리 짓는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의 힘, 진실성, 지혜에 깊이 감동된 여인이 부르짖은 탄성이다. 이러한 여인의 외침은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의 고백(눅 1:41,42)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대망했던 람비들의 문헌과도 일치하는 것으로(Edersheim), 이는 이 여인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11:28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오히려'(메눈)는 됫 문장에 강세를 두고 있다. 이는 여인의 고백처럼 마리아가 복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본절은 축복을 받는데 있어서는 육적 조건보다도 영적 조건이 보다 중요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러한 본절은 눅 8:21에서 예수님의 참 모친과 동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과도 상통한다. 그런즉 성도들은 약속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롬 9:8)을 확신하며, 약속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해야 할 것이다(눅 8:15; 약 2:17-20).
11:29-36 진정한 표적
본문은 앞 단락(14-28절)에서 바알세불 논쟁과 함께 제기된 표적에 대해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의 메시야되신 표적은 이미 선포하신 천국 복음과 많은 이적을 통하여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무리들은 또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였다. 결국 이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난하고 모함하기 위해서였다(마 12:38-42). 이에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다(29절). 여기서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지내다가 다시 육지로 나와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을 외친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3일 동안 무덤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심판주가 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이적으로서 메시야됨을 확증해 주는 최고의 증거라는 것을 강조한다. 더불어 예수께서는 당시의 지혜의 그림자에 불과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왔던 스바 여왕(31절)과, 예수님의 예표에 불과한 요나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였던 니느웨 사람들(32절)과 당시 유대인들을 비교하여 솔로몬이나 요나가 예표하고 있는 실체이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고 계신다. 이는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내리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유대인 전부에게 심판의 선포를 하신 것이다(31,32절). 한편 예수께서는 이미 주신 메시야의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의 영적 우매함을 '등불' 비유를 통해 지적하신다(3336절). 즉 그들은 마음에 빛이 없어 이미 주신 표적도 깨닫지 못하고 또 표적을 구한 것이다. 진정 유대인들의 배척과 불신앙은 예수님의 표적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과 진리를 보는 영적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정죄를 면치 못하며 따라서 심판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② 인간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감추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심령이 완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착하고 청결한 양심을 갖도록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1:29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 마태복음에는 '음란한 세대'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까닭이다. 하여튼 예수께서 여기서 유대인들을 '악한 세대’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인들이 표적 구하는 이유(고전 1:22)가 그의 메시야 되심을 믿기 위함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신 표적에 만족치 못하고 더 큰 표적을 요구하면서 그를 책잡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이들에게 여러 가지 이적으로(눅 4:3844; 8:22-25, 40-56) 자신의 메시야성을 계시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의 가르치심과 사역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의 표적. - 본서에는 요나의 표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언급이 없으나 마태복음에는 요나가 3일간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임을 밝히고 있다(마 12 : 40).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1:30 요나가…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그러하리라. - 이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만에 구출된 것 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나의 표적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표적이며 요나는 예수의 예표적 모형이라 할 수 있다.
11: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솔로몬보다 더 큰 이. -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명하는 이적을 수차례에 걸쳐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완악함으로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표적만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의 완악함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계신다. 본절은 예수께서 왕상 10:1-13을 배경으로 하신 말이다. 여기서 '남방 여왕' 이란 '스바 여왕'을 말하는데 스바는 오늘날 아라비아의 남부에 위치한 예멘에 해당하는 국가이다(왕상 10:1 주석 참조). 그런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솔로몬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당시 세계의 제일 끝으로 알려진 곳에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예루살렘까지 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바 여왕의 태도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즉 그들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서 참 지혜를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불신하였으며 배척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최후 심판 때에 이방의 여왕인 스바 여왕이 완악한 유대인들을 정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 요나보다 더 큰 이. -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완악함을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대조시키고 있다.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한 요나가 악의 도시인 앗수르 수도 니느웨(창 10:11; 욘 1:2)에 회개를 촉구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금식하며 진실로 회개하였다(3:5-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대부분은 실체이신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또 그의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다(요 1:11; 12:37). 따라서 최후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유대인을 송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수용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겸허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역시 정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11:33 등불을…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 본절에서 36절까지는 일명 '등불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앞부분과 연결하여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빛이 없어 이미 주어진 표적을 깨닫지 못하고 또 구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기 위해 도입하신 비유이다. 한편 여기서 '등불'은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의 복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한 것은 예수께서 자기 계시의 빛, 곧 복음의 빛을 숨기셨기 때문에 그의 메시야 되심을 알지 못하고 또 다시 메시야 표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령이 악했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11:34 몸의 등불은 눈이라. - 여기서 '눈'은 빛과 어두움을 감지하는 기관으로 여기서는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눈이 건강할 때 비로소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다.
네 눈이 성하면 … 밝을 것이요. - '성하면'(하플루스)은 '주름이 없는', '단순한'(single)의 뜻으로 병든 눈의 이중시(double vision)와 대조된다. 즉 영혼의 눈이 성하여 단순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빛 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며, 이로 인해 전 인격이 변화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 '나쁘면'(포네로스)은 '악하다'의 뜻으로, 눈이 한 곳에 시선을 주지 못하고, 분산하여 시선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보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눈은 결국 영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인격도 악하게 된다.
11:35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속에 있는 빛'(토 포스 토 엔 소이)은 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는 내적인 양심을 말한다(Gilmour).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양심은 오염되었다(고전 8:7; 딤전 4:2; 딛 1:15).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양심은 성령 안에 있는 양심을 가리킨다(롬 9:2). 따라서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는 말씀은 범죄하는 양심이 되지 말며, 빛 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성도들은 우상 숭배하는 악하고 더러운 양심을 버리고(고전 8:7; 딤전 4:2)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착하고 청결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행 23:1; 딤후1:3).
11:36 네 온 몸이…온전히 밝으리라. - 35절의 권고에 순종할 때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데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다'는 상태의 완전성과 '온전히'가 강조되어 있다. 하여튼 본절은 내적 빛이 온전히 밝아지면 내적으로 거룩하게 되고, 새롭게 되며, 말씀과 함께 생활하며, 봉사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Greydanus). 즉 전인격적 변화가 오게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와 같이 믿음의 신령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이며, 그 빛을 비추는 삶을 누리게 된다.
11:37 - 54 여섯 가지의 화(禍)
이미 살펴본 바알세불 논쟁(14-26절)과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27-36절)에서 보았듯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비난에 대해서 지금까지 수동적으로만 대처했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들을 책망하시며 정죄하고 계신다. 마태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에 대해서 일곱 가지 화를 선언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마 23:13-36) 누가는 본문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화와 율법사에 대한 화를 각각 3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본문은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37-44절)와 율법사에 대한 저주(45-52절) 및 그 결과(53-54절)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바리새인과 율법사에 대한 저주는 6가지로 나타나는데 그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바리새인들에 대한 저주는 ① 신앙의 내면보다 형식에 치우쳐 율법의 정신인 공의와 사랑을 저버렸고(42절), ② 교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는 것을 기뻐했으며(43절), ③ 다른 사람에게 겉과 속이 다른 가증한 위선을 행하였기 때문이다(44절). 즉, 바리새인에게 주어진 저주는 그들 자신의 외식에 대한 것이었다. 율법사에 대한 저주는 ④ 자기는 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율법의 짐을 지우는 행위(46절), ⑤ 진리를 전파하는 자를 핍박하는 포학성 (47-51절), ⑥ 다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막는 행위 때문이었다(52)절). 즉 율법사에 대한 저주는 주로 대인관계에서 행한 그들의 죄악성에 대한 저주였다. 그러나 율법사와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는 엄격히 구분된다기보다는 한 부류에 대한 저주였다. 왜냐하면 당시 율법사는 대개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당시 외식과 부패로 점철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책망과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악의에 찬 계략을 계속 획책하였다 (53,54절). 이것은 예수님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심화되어 가는 갈등과 반목을 보여 준다. 결국 이와 같은 예수님의 태도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결정적인 반감을 가지게 하였고 결국 죽음의 계략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한편 우리는 이상의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게 된다.
첫째, 신앙생활이 형식적인 의무 사항을 지키는 식의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신앙 조직 등에서 만든 형식적인 규칙, 규정에 얽매어 그것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오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삼상 16:7; 잠 4:23).
둘째,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에게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빌 4:9) 말할 수 있는 본을 보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율법사들의 경우처럼 자신은 지키지도 못하는 일을 타인에게 가르치는 일은 예수님께 책망 받을 일인 것이다(46절).
11:37 한 바리새인이…들어가 앉으셨더니. - 한 바리새인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감동되어 식사에 초대하자, 주님은 그의 초대에 흔쾌히 응하셨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여기서 '점심'(아리스테세)은 원래 '아침 식사'를 뜻하는 '아리스톤'에서 유래한 말로 아주 이른 아침에 먹는 '아크라티스마'나 늦은 오후에 먹는 '데이프논과는 달리 회당에서 아침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먹는 가벼운 식사로, 본절의 '점심' 역시 가벼운 오찬이었을 것이다(Farrar, Bruce). 하여튼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것은 당시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의 대립 양상을 생각해 볼 때 매우 파격적인 일로, 그가 예수를 음해할 악의를 품고 비방거리를 찾기 위함이었는지 혹은 선의의 의도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여기서는 후자로 보는 것이 문맥의 흐름상 정확하다.
11:38 잡수시기 전에…이상히 여기는지라. -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따라 식물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막 7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여기서 '씻다'(에바프티스데)는 '의식상으로 씻다'는 뜻이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먼지가 많은 까닭에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상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하나의 율법적 규례로 만들어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의식으로 행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러한 결례를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이를 철저히 준수했던 유대인(마 15:2; 막 7:3)들에게는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유전에 무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질타하기 위한 계기를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11:39 주께서 이르시되. - 자신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식사를 하는 것을 이상히 여긴 바리새인의 생각을 아신 예수께서는 드디어 책망의 포문을 여신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 마태복음 23:25,26의 책망과 상통하는 말로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마시는 모든 그릇을 통칭한 말로, 사람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잔과 대접은 음식을 담기 위해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릇을 닦을 때는 안팎을 모두 깨끗이 닦아야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음식이 담기는 안쪽을 우선적으로 깨끗이 하지 않는다면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은 먹을 수 없게 되고 겉을 닦은 것은 아무런 효과도 거둘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들도 우선적으로 속사람을 깨끗이 해야만 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듯 율법의 사소한 규정들을 준수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겉 사람만 정결하게 보이게 했을 뿐 정작 정결해야 할 속사람은 탐욕과 악독으로 채워 섞어지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탐욕과 악독. - 여기서 '탐욕'(할파게)은 '약탈', '노략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추상명사로 물질적 측면의 죄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악독'(포네리아스)은 '악한 자'(포네로스)에서 유래한 말로, 도덕적 측면의 죄악을 의미한다. 즉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모양으로 그들의 악한 모양을 가리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심각한 죄악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 육체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생명과 영혼까지도 지으신 하나님을 속이고 겉만 깨끗이 치장하면 더러운 자신들의 속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하게 책망하시는 말씀이다. 이로써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행동이 하나님 앞에 지극히 가증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11:41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깨끗하리라. - 본절의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즉 ① 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NEB), ② 마음(Turner), ③ 모아둔 재산(Knox) 등의 견해가 있다. 문맥상으로는 ③의 견해가 적합하다. 즉 물욕으로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안도 깨끗해지고 바깥도 깨끗하여 모든 것이 깨끗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Godet, Bengel, Alford).
11:42 화 있을진저. - 본절에서부터 52절까지는 예수께서 보다 실증적인 예를 들어 율법주의자들의 외식을 책망하고 저주하신 내용으로 마태의 병행구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7가지의 화를 선언하신 것으로 나타나나(마 23:13-36) 본문에는 바리새인을 향한 3가지 화(42-44절)와 율법사를 향한 3가지 화가 구별되어 나타난다.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되. - 마태복음의 네 번째 화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철저한 형식 위주의 신앙 속에 율법의 근본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신다. 여기서 '박하와 운향과 채소'는 매우 하찮은 것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바리새인들은 아주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바치는데 열심을 내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이와 같은 열심을 비판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십일조를 부인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이와 같은 것들을 자발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규정에 얽매여 형식적으로 바치면서 정작 지켜야 할 율법의 근본정신은 간과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가치의 경중을 잘못 인식한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박하'는 방향성이 있는 식물로 음식에 넣는 조미료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운향'은 회색의 잎과 노란색의 꽃을 가진 식물로 마태의 병행 구절에는 '회향' 으로 나온다. 그리고 '채소'는 마태의 병행구절에 구체적으로 '근채'로 나오는데 이는 미나리과에 속하는 나물이다.
공의와 사랑은 버리는도다. - 율법의 사소한 규정은 열심히 지키면서도 율법의 근본정신은 간과했음을 책망한 구절로, 여기서 '공의'와 '사랑'은 율법의 핵심 내용이라 할 것이다. 마 23:23에는 '공의와 사랑'이 '의와 인과 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여튼 여기서 '공의'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신 16:19; 렘 5:1), '사랑'은 마태복음의 '의와 신'을 합친 상태를 나타낸 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도 행하고…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 여기서 '이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가리키며, '저것'은 '박하와 운향과 채소'로 대변되는 율법의 형식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형식주의를 책망하셨다고 하여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근본정신이 결여된 형식주의이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그 형식까지도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결국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유전적 규범에 매여 율법 준수의 바른 생활을 곡해하는 것을 비판하셨고, 나아가 사랑과 공의가 동반된 율법 준수를 실천하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11:43 가치의 경중을 잘못 인식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본절에서는 그들이 교만과 명예욕에 사로 잡혀 있음을 책망하고 계신다.
회당의 높은 자리. - 바리새인들의 교권적 교만을 지적하는 말이다. 여기서 '높은 자리'(프로토카데드리아)는 '가장 높은 자리'를 뜻하는데 회당 내에서 율법책을 넣어 두는 궤의 맨 앞자리를 가리킨다. 바리새인들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는데, 이는 그들이 교만으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한 까닭이다. '회당'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회당의 높은 자리'가 종교적인 명예를 의미한다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세상적인 명예를 의미한다. 특별히 여기서 문안하는 것은 상대방의 평안을 묻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우월함에 대해 정성스런 말로 인정해 주는 존경의 표시를 말한다(Hendriksen).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시장과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문안을 받음으로써 뭇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즐겨했다.
11:44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알지 못하느니라. -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저주를 선포하신 세 번째 이유로,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의 본질적 모습을 지적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은 보통 사람이 죽으면 동굴과 같은 곳에 장례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처형된 자와 같이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는 봉분이 없이 평토장(平土葬)을 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평토장은 봉분이 없기 때문에 주검이 은폐되어 있는 것과 같다. 본장 자료 노트 '평토장한 무덤'을 보다 참조하라. 그래서 무덤 주위에는 보통 하얀 회를 칠해 놓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러한 표식도 사라지게 되고 사람들은 무심코 그 무덤 위를 밟게 된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무덤과 접촉한 자는 의식적으로 7일간 부정하게 되어 있다(민 19:16). 바로 이처럼 사람을 부지중에 부정케 만드는 평토장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동일시하고 계신다. 즉 바리새인들은 속은 썩고 부패하였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가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부정케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편 마태의 병행 구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속은 부패했으면서도 겉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회칠한 무덤에 비유되고 있다. 이는 본절이 바리새인들의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거기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경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45 한 율법사가… 모욕하심이니이다. - 바리새인에 대한 세 번의 책망이 나오고 본절부터 율법사에 대한 세 번의 책망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사가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을 듣고 그 또한 모욕감을 느낀 것은 당시 율법사의 대부분이 바리새인에게서 배출된 까닭이다. '율법사'는 보통 '서기관'으로 불리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마 5:20 주석을 참조하라.
11:46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 율법사들의 첫 번 저주의 이유는 그들이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면서도 그들은 손가락도 대지 않은 까닭이다. 여기서 '무거운 짐'이란 율법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율법사들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만든 각종 까다로운 규범과 의식법을 가리킨다. 즉 율법사들은 율법 외에도 613개 조항이나 되는 규례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피해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율법사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예수님의 저주를 촉발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23: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1:47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도다. - 율법사에 대한 두 번째 저주의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까닭이다. 유대인들의 조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였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단장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이는 선지자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들의 본색은 자신들의 죄악을 은닉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단장하고 화려하게 꾸밈으로써 그들 자신은 조상들과는 달리 선지자를 존경하고 선지자의 자취를 물려받은 자처럼 가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당대의 의인이었던 세례 요한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님마저 음해하려 하고 있으며 종국에는 그분을 죽였던 것이다. 그들은 조상의 악한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고 은닉하려는 작태까지 보인 것이다.
11:48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 도다. - 여기서 '옳게 여기다'(쉬뉴도케이테)는 '같이'를 의미하는 '쉰'과 '옳게'를 의미하는 '유', 그리고 '생각함'을 의미하는 '도케오'의 합성어로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결국 본절은 조상들의 악행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것을 좋게 여겨 스스로 행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단장함으로써 마치 조상들의 행한 바를 비난하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조상들과 똑같이 행함은 물론 선지자의 가르침을 무시했다는 말이다.
11:49 하나님의 지혜. - 예수께서 인용하신 '하나님의 지혜'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없으므로 다양한 해석이 제기 되었다. 그것을 살펴보면, ① 대하 24:18-22을 가리킨다(Alford). ②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Goddet). ③ 잠언과 같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고(Plummer) ④ '하나님의 지혜'라 불리운 책(Edwald, Bleek) ⑤ 예수가 이전에 한 말들(Meyer) 등의 견해가 있다. 이상의 견해 가운데 ②의 견해가 비교적 무난하게 받아들여진다.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핍박하리라. - 마태복음에는 선지자와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 (마 23:34)이라고 나와 있는데 다 같이 하나님의 종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11: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 담당하리라. - 마태는 '모든 선지자'를 '의인'(디카이온)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는 점이다. 한편 여기서 '이 세대가 담당하되'라는 말은 위와 같은 전 세대의 교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죄에 대한 책임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11:51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 50절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당한 하나님의 종들을 요약하고 계신다. 여기서 요약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말은 구약에 언급된 수많은 순교자의 명단을 대부분 생략하고, 그 처음과 끝의 이름만 기록했다는 뜻이다. 하여튼 여기서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로 모든 순교자들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창 4:8; 요일 3:12). 그런데 사가랴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사가랴'를 ①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감시하다 성전 뜰에서 군중들에게 맞아 죽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 24:20-22), ② 베레갸의 아들 스가랴(슥 1:1), ③ 예루살렘 함락 때(A.D. 70년) 성전에서 죽은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Josephus, Kornmann, Penn), ④ 세례 요한의 아버지 (Chrysostom) 등의 견해가 있는데 많은 학자들은 ①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다(Meyer, DeWette, Bengel, Carr, Plummer). 특별히 역대기가 유대인들의 히브리 성경 배열 상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은 이 견해의 타당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성경의 최초 순교자 아벨과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의 마지막 순교자 사가랴를 언급함으로써 모든 순교자들을 요약하신 것이다.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 본 구절은 전절 후반부와 동일한 의미로, 여기서는 전반부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과 더불어 매우 강조적이다. 즉 예수께서는 역대 순교자들의 모든 피의 탄원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유대인의 머리 위에 임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이 예언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성취되었다.
11:52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막았느니라. - 율법사들이 저주를 받게 된 세 번째 이유이다. 당시 율법사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고 실제적으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특권을 그릇되게 사용하였다. 즉 그들은 율법의 선생의 자리를 이용하여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율법의 조문을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함으로써 백성들이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함은 물론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배척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늘 문을 닫아버리는 중죄를 범한 것이다. 마 23:13 주석 참조.
11:53 본절과 다음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 되었으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책망한 결과 발생한 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서기관과 … 힐문하고. - 여기서 '달라붙어'(에네케인)는 '안으로 잡는 것', 혹은 '굳게 잡는 것'을 뜻한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책망에 분개하여 예수에게 죽일 듯이 달라붙은 것이다. 한편 여기서 '힐문하고'(아포스토마티제인)는 '질문으로 열을 내다'라는 뜻으로 질문으로 예수를 귀찮게 하는 모습을 나타내 준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마음에 새겨 자아 성찰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책잡으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완악하고 거만한 종교적 횡포와 치부를 볼 수 있다. 우리 역시 교만하거나 말씀을 왜곡되이 따를 때 이렇게 되므로 삼가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11:54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목을 지키더라. - 예기서 '잡고자하여'(데류사이)는 짐승을 사냥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며, '지키더라'(에네드류온테스)는 '숨어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본절은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짐승이 자주 출현하는 길목에 매복하여 기다리듯 예수로부터 책망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음해할 거리를 찾기 위해 광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막 12장 연구 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과 행 서론 특별 자료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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