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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간음한 여인 용서 사건 및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에 관한 자기 증거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 이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7:1-10:42의 사건들은 유대 종교력으로는 7월, 태양력으로는 10월경에 있는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과 종교력 9월, 태양력 12월경에 있는 수전절 때에 주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들이다. 초막절을 기준으로 볼 때 이는 제 6장에 기록된 바, 유월절 가까운 때에 있었던 오병이어 사건 이후 약 6개월이 지난 때임과 동시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까지 불과 6개월 정도 남긴 때였다. 이 무렵에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나 전 우주의 구속주(救贖主)이신 메시야(Messiah)로서 오신 예수의 구속 사역을 다만 편협한 민족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곡해한 유대인 가운데 한편으로는 민중들이 예수를 정치적 해방자로 추앙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종교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정적(政敵)으로 여기고 무조건 배척하는 양상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이런 때를 배경으로 초막절 이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본장에서는 예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배척이 점차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서도 담대히 자신이 참 구세주이며 또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본장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1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재판을 예수께 의뢰한 사실을 기록한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구속사적 진리를 발견한다. 첫째, 구약 계시의 핵심인 율법은 정죄하고 책망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 같은 율법의 본질을 망각한 채 율법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방편으로만 사용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종교적 짐만 무겁게 지웠다. 둘째, 예수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 초림하신 것도 이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사(눅 5:32)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구약 율법의 교훈의 본질이나 예수 교훈, 곧 복음의 본질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에 구속사적 관점에서 서로 그리스도의 연결되는 율법과 복음의 이해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 서론 특별 자료를 참조하라.
12-59절에서는 예수 자신이 곧 세상의 빛이시며(12-20절), 자기 가르침이 죄에서 자유케 하는 진리임을 교훈하시면서(31-38절), 자신과 자기 가르침의 신적 기원을 증거하신 사실과(21:30,39-47절)이를 신성 모독(blasphemy)으로 간주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48-59절).
여기서 빛(light)과 진리(truth)는 예수의 신성과 구속 사역의 한 측면을 반영하는 것인 바, 이와 관련된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인 온 인류는 어두움 안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어두움이란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죽음(엡 2:1), 아담의 육적 혈통을 이어 받아 모태에서 난 인간이면 반드시 겪어야 할 육체적 죽음(히 9:27), 그리고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인해 영원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지 못할 죄의 굴레, 심판, 멸망 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개념이다. 이처럼 어두움가운데 갇혀있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이후 곧 세우신 구속 계획에 따라 구약 시대 동안에는 구속 원리(救贖 原理)와 구속주(救贖主)에 관한 약속과 예언, 곧 구약 계시의 희미한 빛을 비추어 주시다가 마침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 사역을 성취케 하심으로 일단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 땅에서도 진리 가운데로 걷게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어두움이 없는 곳 천국으로 들어가는 축복을 주시게 된 것이다. 이처럼 빛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출애굽 당시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으로 밤의 어두움에서 지켜 보호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케 하였듯이 이 세상의 죄와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신약의 선민인 성도들을 사단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 천국(天國)으로까지 인도하는 빛이요 진리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자신이 세상의 참 빛이요 진리라는 사실은 성부 하나님의 증거(18절)와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 사역을 통한 직접적인 증거(28절), 유대인들이 자기들 조상으로 내세우는 아브라함의 증거(39,40,56절), 그리고 끝으로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54,58절)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예수께서 생명과 구원의 빛이요 진리로서 숱한 증거들을 통하여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를 영접지 않고 믿지 않은 사실은(요 1:10,11) 우리로 하여금 자기 구속주를 배척하는 인간의 완악함이 배은망덕함에 대해 실로 심각하게 생각케 한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아직 어두움 가운데 걷고 있어 빛 되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배치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삼가 주의 깊게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외울 말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용서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2 〇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음이러라
예수와 하나님의 일체성
21 〇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 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진리이신 예수
31 〇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신성과 선재성에 대한 예수의 자기 증거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 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8:1-59 본서에만 나타난 기사들
1. 제 2위 성자의 초월적 존재(1:1-18)
2. 세례 요한의 두 제자(1:35-42)
3. 빌립과 나다나엘의 소명(1:43-51)
4. 가나의 혼인 잔치 이적(2:1-11)
5. 예수의 1차 성전 숙정(2:13-25)
6. 니고데모와의 대화(3:1-21)
7. 요단강가에서의 예수 사역(3:22-30)
8.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1-42)
9. 왕의 신하의 아들 치유(4:46-54)
10. 38년 된 병자 치유(5:2-9)
11. 생명의 떡이신 예수(6:22-71)
12. 예수의 친형제들의 배척(7:2-9)
13. 초막절 성전에서의 설교(7:10-44)
14. 간음한 여인 사건(8:1-11)
15. 바리새인과의 논쟁(8:12-21)
16. 나면서 소경된 자 치유(9:1-34)
17. 수전절 논쟁과 도피(10:22-39)
18. 베레아 지방으로의 피신(10:40-42)
19. 죽은 나사로의 부활(11:1-44)
20. 대제사장 가야바의 예언(11:49-52)
21. 대제사장들 나사로 살해 모의(12:10)
22. 헬라인들과의 대화(12:20-36)
23.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13:2-17)
24. 참포도나무와 가지 비유(15:1-11)
25. 대제사장적 중보기도(17:1-26)
26.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심(19:31-37)
27. 부활 후 갈릴리에 재출현(21:1-23)
지리배경-8:1, 감람산
막 13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8:3-11, 간음
삿 20장 자료 노트 참조
난제해설-8:3-11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용서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의 기록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얼핏 보기에는 마치 간음한 여인의 죄를 예수께서 묵과하신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처사가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신 22:22-24)는 모세 율법에도 명백히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묵과가 아닌 용서임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를 묵과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공의(公義)에 절대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결코 그 여인의 죄를 묵과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그 여인의 죄를 알고 계시면서도 정죄하는 대신 용서하신 것을 보여준다. 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한 여인에 대한 모세 율법을 근거로 하여 그 여인을 돌로 치려 할 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분명 그 여인이 자기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함을 예수께서도 인정하신 것이다. 다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의 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죄만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죄를 묵과하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당신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2. 모세 율법의 정신과 배치되지 않음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것은 결코 모세 율법과도 배치되지 않는다. 모세 율법의 근본 목적은 결코 범죄한 자들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는데 만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있다. 특정 죄인에게 사형을 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경고 삼아 다른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더 이상 죄를 범치 말라 하시고 그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모세 율법의 본래 목적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다. 죄를 더 나아가 모세 율법은 단지 지적하여 깨닫게 하고 또 그것에 대해 형벌을 가하게 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서 죄를 규제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용서를 통하여 더 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고 의를 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구약에서는 동해 보복법(출 21:23-25) 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단지 더 이상의 피 흘림을 방지하기위한 소극적인 방책으로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교훈을 하고 있으나 신약은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사랑과 관용으로 원수까지도 선대하라고 교훈한다(마 5:38-41; 눅 6:5). 이는 신약의 복음이 단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소극적인 데서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義)로 나아가게 하는 보다 성숙된 교훈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약보다 우월함을 발견하게 된다.
3. 의의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용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사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잘 보여 준다(요 3:16-18). 또한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보여주신 관용과 자비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범한 것과 같은 자신의 눈 속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만 보고 정죄하며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마 7:45) 항상 형제에 대해 관용과 사랑으로 대할 것을 교훈한다 하겠다.
주요 주제-8:6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 -8:12-19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기 증거요
요 5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8:24,25 불신자에 대한 10대 묘사
1. 이미 심판받은 자(요 3:18)
2. 어둠을 사랑하는 자(요 3:19)
3. 죽은 자(요 8:24,25)
4. 핑계지 못할 자(롬 1:19,20)
5. 진노의 자녀(엡 2:3)
6. 소망이 없는 자(엡 2:12)
7. 어두움(엡 5:8)
8. 복음을 순종지 않는 자(살후 1:8)
9. 진리를 안 믿는 자(살후 2:12)
10. 세상에 속한 자(요일 5:19)
도표-8:26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본서의 묘사
요 5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8:28,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8:32 진리로서의 복음의 성도에 대한 역할
1. 보호해 줌(시 61:7; 잠 20:28)
2. 영혼을 정화(잠 16:6; 벧전 1:22)
3.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함(요 8:32)
4. 거룩하게 함(요 17:17,19)
5. 구원함(엡 1:13)
6. 새사람 되게 함(엡 4:24; 약 1:18)
7. 진리로 무장케 함(엡 6:14)
8. 성도 안에서 영원히 거함(요이 1:2)
보감-8:41-47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계시하신 것들을 말씀하시며 진리를 증거하시는 당신을 대적하고 죽이려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마귀의 지배 하에서 마귀의 뜻대로 말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하려는 자들 곧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을 한 번 살펴보자.
1.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음(37절)
2. 외적으로 드러나는 육적인 일을 신뢰함(39절)
3.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려고까지 함(40,44절)
4.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일을 사랑치 않음(42절)
5.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함(43절)
6. 진리보다 거짓을 더 사랑함(44절)
7. 하나님께 속해있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함(47절)
도표-8:44 사단의 여러 칭호들
사단은 원래 천사였으나 타락한 후 인간까지 유혹하여 그 결과 이 세상 모든 질고를 가져오게 한 자이다. 동시에 그는 인간을 꾀어 넘어뜨린 후 자기에게 굴복된 저주받은 자들 위에서 임금 노릇을 하면서 예수님과 택하신 교회에 계속 도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권세의 범위는 그가 넘어뜨린 죄인에게만 국한되며, 나아가 그 권세의 기간도 예수께서 이 세상의 선과 악을 완전히 구분하시기 전까지 즉 세상 끝 날까지 만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의 존재와 영향력의 크기를 분명히 파악하여 조심해야겠다.
1. 계명성(사 14:12)
2. 마귀(마 4:1)
3. 사단(마 4:10)
4. 귀신의 왕(마 12:24)
5. 바알세불(마 12:24)
6. 악한 자(마 13:19)
7. 원수(마 13:39)
8. 살인자(요 8:44)
9. 거짓말쟁이(요 8:44)
10. 거짓의 아비(요 8:44)
11. 이 세상 임금(요 12:31)
12. 이 세상 신(고후 4:4)
13. 벨리알(고후 6:15)
1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15.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 6:12)
16. 시험하는 자(살전 3:5)
17. 대적(살후 2:4)
18. 사망의 권세자(히 2:14)
19. 무저갱의 사자(계 9:11)
20. 아바돈 아볼루온(계 9:11)
21. 큰 붉은 용(계 12:3)
22. 옛 뱀(계 12:9)
23.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
24. 참소자(계 12:10)
신학용어-8:56-59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측면 중 그의 신성(神性)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증거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과 세례 요한을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증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예수의 신성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요 1:1에서 이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의 선재를 증거하였으며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59절)는 말씀으로 그의 선재성을 증거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선재성(Preexistence)은 많은 이단 종파에 의해, 혹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숱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선재성의 교리는 무너지지 않았으며 사도 요한의 증거하는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로 취급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선재의 증거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제 그 증거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심:
요 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다. 여기서 '태초에'(헬, 엔 아르케)는 창 1:1의 '태초에' 와는 다른 의미이다. 창 1:1의 '태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시작하던 시점을 가리키나 여기서 '태초에'는 창세 이전의 영원의 때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헬, 로고스)은 바로 제 2 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자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셨으며(요 17:5), 창조사역에도 함께 동참하셨다(요 1:3), 혹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막1:1)이라 하기 때문에 성자는 곧 성부에게서 탄생한 것이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탄생했거나 또는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임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되 사역은 달리 하시기 때문에 붙여진 칭호일 뿐이다(요 5:18).
② 창조 사역을 행하심:
요 1:3,10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증거한다. 한편 혹자는 골 1:15에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이 세계의 창조 이전에 피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기 영원 이전부터 존재하신 분임을 뜻하지, 결코 그가 피조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③ 구약 시대에도 활동하심:
본문 56절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다. 구약 시대에 제 2위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사자'(창 16:7-13; 18:1-21; 19:7-14; 22:11-18; 출 14:19; 32:34)로 나타나사 하나님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여호와의 사자'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왕하 1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2. 의의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태초부터 선재하신 분이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이심을 확신케 하는 것으로서 그분을 통한 구원과 천국의 소망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신학용어-8:31-47 성경의 진리 개념
요 16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8:34 죄의 종류
민 15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8:34, 진실로 진실로
요 6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 -8:50, 영광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독사'이다. 이 단어는 원래 '생각하다'(마 3:9) 또는 '알다' (요 20:15; 행 27:13)라는 뜻을 지닌 동사 '도케오'에서 유래하였다. 이로 볼 때 본래 '독사' 의 의미는 한 사람의 생각, 즉 '의견' 및 옳고 그름을 '알아서 평가하는 행위' 등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의견' 또는 '판단', '좋은 평가' 및 그로부터 나오는 '칭찬', '찬양' 등의 뜻을 지닌 '독사'는 성경에서 대부분 '영광'(마 6:13; 벧전 4:11; 계 21:11) 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똑같이 '영광'으로 번역이 된 '독사'는 이것이 쓰인 문맥에 따라 어느 정도 의미의 차이를 보인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존엄을 가리켜서 '영광'으로 번역이 되기도 한다(요 17:4; 롬 1:23). 이것은 창조주로서 스스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본성과 능력을 찬양하기 위해 쓰인 경우이다.
둘째로, 하나님이 현현하실 때 발산되는 초자연적인 광채, 혹은 빛나는 구름 등을 가리켜서 '영광'으로 표현한다(행 22:11; 롬 9:4; 고전 15:40,41).
마지막으로 '독사'는 좋은 평판이나 칭찬 및 명예를 뜻하기도 하는데(눅 14:10; 요 5:41), 이 경우가 본절에 쓰인 영광의 의미와 동일하다. 동시에 이것은 '독사'가 파생되어 나온 '도케오'의 의미에 가장 직접적으로 접맥된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절의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 자신이 유대인들로부터 자신의 명성이나 칭찬 및 좋은 평판들을 추구하거나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인 것이다.
8:1-11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
앞장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체포령을 내린 사건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그러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조건을 찾기 위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을 어떻게 처벌해야 옳은지를 묻는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함정을 깔고 있는 음흉한 술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첫째는 예수께서 율법의 규정(레 20:10; 22:22)에 따라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대답하면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마 5:43,44)과 상반된다는 사실을 들추어내어, 예수님을 이율배반적이고도 무자비한 인물로 매도할 계획이었다. 둘째 역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대답을 예수님께서 할 경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 황제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총독 외에는 누구도 사형을 선고할 권한이 없다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구실로 하여 예수님을 일종의 정치범으로 고소할 계획이었다. 셋째는 간음한 여인을 처벌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대답할 경우로서, 이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파기자로 예수님을 정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음모를 미리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셨다(7절).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땅히 율법에 따라 여인을 처벌하되, 과연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스스로 무죄하며 의롭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라야 그와 같은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의기양양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궁지에 몰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8,9절).
한편 이러한 본문은 공관복음서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고 오직 본서에만 언급된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적(神的) 지혜와 권세를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악에 대한 심판(요 5:22-30)과 죄인에 대한 용서(11절; 요 3:16,17),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사랑을 동시에 수행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교훈해 준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이중적 사역은 마침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인류의 죄를 대속할 속죄 제물로 내어주심으로써 결정적으로 완성된다(요 19:30).
마지막으로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주목해야 될 사실은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결코 정죄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하시는 너그러움을 보이셨다 (10,11절).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먼저 네 눈 속에 든 들보를 뺀 후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마 7:5)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교만된 자리에 서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먼저 돌아볼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비록 행악하는 형제라 할지라도 권면하고 타일러 주께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마 18:15).
8:1 개역성경이 괄호로 묶어서 처리하는 요 7:53-8:11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기사(記事)는 그 진정성이 대단히 의심받는 부분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A.D. 5세기의 베자사본(codex Bezae, 사본기호 D)에 이 부분이 처음으로 나타나며 그 이전의 오래되고 중요한 사본들인 시내산 사본(N),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 레기우스 사본(L), 프리얼 사본(W) 등의 사본들에서는 본문이 발견되지 않는다.
② 이 부분을 수록하고 있는 소수 사본들도 누가복음 뒤나 요한복음 끝 등 다른 곳에 부록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본문과 관련해선 이러한 사본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간음'에 대한 속사도 시대의 교리적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즉 터툴리안(Tertullianus)과 키프리안(Cyprianus) 같은 자들은 간음에 대한 회개 불가능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이러한 기독교 윤리관을 고려하여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m) 등의 주석가들은 본 구절을 주석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 당시 2,3세기의 대부분의 사본들이 본문을 삭제함으로써 간음에 대한 기독교의 강경한 입장을 보였는데, 이는 이교도의 비윤리성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본문의 강조점이 '간음에 대한 허용 가능성'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용서하심'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평가한다면 어거스틴(Augustine)이 이 본문을 중시하고 제롬(St. Jerome)이 벌게이트 역(Vulgate)에 이 부분을 삽입한 것은 A.D. 2-5세기를 지난 후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한 교회의 올바른 평가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본문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나 행동을 전혀 왜곡시키지 않고 제대로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A. Robertson). 또한 본서 저자의 본서 저술 의도(요 20:30,31)와 전혀 모순되지도 않으므로 이 부분을 배제할 필요 없이 그대로 수납하는 것이 좋다(Hendriksen).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 여기서 '감람산'(Mount of Olives)은 기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는 팔레스틴 중앙 산맥에 속한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이곳은 풍부한 강우량과 적절한 햇빛, 그리고 지중해성 기후 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감람나무(올리브나무)들이 자생하였으므로 '감람산'이라 불리웠다. 이곳에 대해서는 막 13장 자료노트, '감람산'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눅 22:37에 의하면 공생애 막바지에 예수께서 낮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이곳 감람산에서 쉬셨다고 한다. 따라서 본절 역시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주무시기 위하여 감람산으로 가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 8:20).
8:2 아침에 다시. - 본장과 앞장과의 연관성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즉 앞장에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일로 인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요 7:14-53)은 이제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자 저를 올무에 빠뜨리고자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3-9절).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 아침 일찍부터 성전에서 강론이 있을 때 백성들이 모이던 관습은 이미 에스라의 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8:3).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 '당국자'라고 묘사되던 정치적 성향을 띤 유대의 지도자 계층이 여기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요 7:26 주석 참조. '서기관'(Scribes)은 율법해석 학자요 율법 교사로서 처음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일반인들도 이 일을 맡아 하였는데 이들은 존경의 뜻에서 '랍비'('나의 선생')라고 불리웠다. 이들 서기관들은 대개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 바리새인들의 해석을 따랐다. 이에 대해서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 신 19:15에 따르면 이 여인의 범죄가 재판 요건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남편을 제외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탈무드 중 미쉬나(Mishna)의 규정에는 약혼한 여자나 유부녀의 간음 현장을 발견했을 시 현장에서 처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단 한 사람의 증인도 나오지 않으며 더구나 함께 간음한 남자 또한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보아 이는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다소 조작되거나 과장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가운데 세우고. - 법정에서의 심문을 위한 자리 배치를 의식하여 급조한 상황이다(행 4:7). 산헤드린에서의 재판 시, 피고인은 반원형으로 둘러 앉아 있는 산헤드린 위원들의 가운데에 서서 심문을 받는 것이 통례였다.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 '선생'에 해당하는 '디다스칼로스'는 공관복음에서는 익숙한 표현이지만 본서에서는 흔치 않다. 왜냐하면 요한은 대개 '랍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38). 아무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관한 전문적인 문제로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기에 이러한 호칭은 적절하다(Morris). 왜냐하면 여기서 '디다스칼로스'는 '랍비'와 마찬가지로 '율법 교사'란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상은 예수를 갈릴리 출신으로 여겨 무시하면서도(요 7:52) 이제 여기서는 예수를 올무로 엮기 위해 저들은 예수를 율법에 따라 확실한 판단을 내려줄 수 있는 '율법에 정통한 자'로 추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 '현장에서'는 '아우토스'(자신)와 '포르'(도둑)의 합성어로 원래는 '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이란 뜻이다. 그러나 점차 현행범으로 체포된 자'란 뜻으로 관용화되었다(A. Robertson). 이러한 현행범은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 모세의 율법에는 유부녀가 남자와 통간(通姦)한 경우 및 약혼한 여자가 성읍 내에서 다른 남자와 통간한 경우 두 사람 다 돌로 쳐 죽이도록 규정되어 있다(신 22:23,24).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은 전혀 문제가 없었고 그 율법대로 실행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께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그들의 숨은 동기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정보다는 예수를 책잡으려는 악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즉 이 순간 예수는 유대인의 율법(당연히 사형)과 로마의 형법(사형에 해당하지는 않음, Morris) 사이에서 갈등해야만 할 상황에 처했다. 더군다나 예수가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도록 명할 것 같으면 다음 두 가지 올무에 걸리게 된다. 첫째,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한 평소의 예수의 가르침과 상반된다(마 5:43,44). 둘째, 당시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 당국에는 사형 집행권이 없고 로마 황제의 대리인인 총독에게만 있었다. 따라서 그의 허락 없이 사형을 명하는 것은 곧 살인 교사죄(敎唆罪)를 범하는 것이 된다.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페이라존테스'는 여기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시험을 하다'(막 8:11; 10:2)라는 뜻이다. 요 6:6 주석 참조. 다음으로 '고소하다'에 해당하는 '카테고레인'은 현재 부정사로서 예수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계속적인 음해(害) 행위를 나타내 준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본절은 예수께서 무엇을 기록하셨다는 성경상의 유일한 언급이다. 하지만 '쓰시니'에 해당하는 '카테그라펜'은 예수께서 그림을 그리셨는지, 글을 쓰셨는지, 어떤 기호를 쓰셨는지에 대해서조차 밝혀 주지 못한다(A. Robertson). 그러므로 그 내용을 상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예수의 이 행위가 예수를 시험하여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하며 흥분하는 모든 사람들의 분위기를 정돈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행위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 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죄 없는 자'(아나마르테토스)란 부정의 접두사 '안'과 '죄를 짓다'라는 뜻의 '하마르타노'의 합성어이다. 이는 곧 '죄를 짓지 않는 무흠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러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기에(롬 3:23) 예수의 이 말씀은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또한 '먼저 돌로 치라'라는 말은 '제일 먼저 던지라'는 뜻이므로 어느 누가 선뜻 나서서 사형을 집행하기 곤란한 상황을 제기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예수의 충격적인 말씀은 그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이미 그 여인의 범죄를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근본적인 사실과 그들의 마음속에 내재한 불순한 동기를 지적하고 있다. 즉 외적인 형식의 준수를 문제 삼아 예수를 시험하려는 자들에게 예수는 율법의 근본적 취지를 들추어 되묻고 계신 것이다. 더욱이 예수의 이 말씀은 실제적인 문제도 지적하시는 것이다. 즉 본래 간음죄란 은밀한 중에 행해지기에 증인들이 없는 것이 보통인데,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바로 그 증인의 위치에 서게 되므로 그들은 결국 간음을 방조한 또 다른 죄의 추궁을 받을 수밖에 없다(Morris). 따라서 이유를 불문하고 무리들은 예수의 이 말씀 앞에서 꼬리를 감추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8:8,9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 이후의 저들의 행동으로(13절) 보아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잠시 마음에 가책을 받았을 뿐 전혀 돌이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예수 앞에서 물러난 것은 예수의 말씀에 응수할 만한 답변거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Hendriksen). 즉 자신들이 예수께 패배한 사실을 연장자부터 먼저 알았고 그런 까닭에 그들부터 차례로 그 수치스러운 현장을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에는 열심이었으면서도 그 근본정신인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망각하였다. 그리고 남의 눈 속에 박힌 티끌은 보았으나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볼 줄 몰랐다. 그러기에 예수께선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마 16:12)고 일깨워 주신 것이다.
8:10 예수께서 일어나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여자여'(귀나이)라는 표현은 속된 호칭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육신적인 어머니에 대해서도 사용하실 만큼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정중한 호칭이다. 요 2:4 주석 참조. 즉 예수께선 뭇사람들이 정죄하고 비난하던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조차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또한 귀히 여겨 정중히 대한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질문은 고소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상황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Morris). 그리고 여인의 간음 행위도 부도덕한 것으로 정죄 받아 마땅하지만 그 여인을 진정으로 정죄하고 판결할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고(롬 3:23)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50절).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도 일치한다(요 3:17). 하지만 이 말씀은 그녀의 범죄가 묵인된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A. Robertson). 이는 '이후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라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한편 본문에는 여인의 회개와 같은 반응이 전혀 묘사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생각해 볼 때 여인은 새로운 삶에로 초청되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고후 5:17)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Morris).
8:12-20 세상의 빛이신 예수
본문에서부터 시작하여 59절까지는 본서에 소개되는 예수의 주요 강화(요 3:1-21; 4:1-26; 5:19-47; 6:22-59; 7:10-53; 8:12-59; 10;1-21; 13:31-14:31) 가운데서 여섯 번째 강화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어두운 죄악을 밝히는 구원의 참 빛이시며(12-20절), 근본 하나님으로서(21-30절)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진리 그 자체(31-59절) 라는 사실을 밝히고 계신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6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시는 부분으로 이것은 마치 요 1:1-10의 내용을 연상케 한다. 즉, 초막절에 등불을 밝혀서 성전의 구석구석을 환히 비추는 유대인들의 풍습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야 말로 죄악의 어둠으로 가득찬 세상을 밝히 비추는 구원의 참 빛이심을 증거하신다. 그리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게로 오는 자마다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듯이(요 6:35),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더 이상 어둠 속을 헤매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12절).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증거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즉각적인 반론을 제기했는데,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이 다른 증인들의 증거 없이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것은 아무런 율법적 효력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참되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3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그 어떤 증인들보다 더 진실하신 성부 하나님의 증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14-18절).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영적 무지와 완악함을 자랑하려는 듯이 예수님을 향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19,20절). 진정 그들은 영적인 지혜와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채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결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마 13:13; 막 4:12; 눅 8:10; 롬 3:11).
결국 이러한 본문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확실히 증거하는 것은 사람이나 다른 외적인 것보다 우선적으로 성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는 곧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성경 말씀이 바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요 5:37-39). 그러므로 성경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판명할 때 비록 세상 사람들은 과학, 지식 등 인간의 방법과 시각으로 바라보지만 성경은 성경 가운데서 친히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 진리됨을 자증(自證)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또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을 오히려 거부한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볼 때 현대의 많은 사람들도 복음의 빛 되신 주님을 외면한 채 여전히 어둠에 속한 삶을 살아간다면 유대인들과 동일한 어리석은 자요 완악한자들이라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 본절은 요 7:52에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하면 요 7:37,38에서 자신을 목마른 자를 위한 생수로 증거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을 어두움에 다니는 자들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계시하기 때문이다(Hendriksen). 이는 요 7:53-8:11 이 사본 상의 문제를 지니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1절 주석 참조).
나는 세상의 빛이니. - 여기서 '나는~이다'(에고 에이미)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과 신적 사역의 성격을 증거하시던 독특한 자기 선언(계시)적 표현법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요 6:35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절을 초막절(요 7:2)과 연관해서 이해한다면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행사와 관계있는 요 7:37의 '생수'와 본절의 '생명의 빛'은 하나의 짝(pair)을 이룬다. 즉 초막절에는 성전의 여인들의 뜰에서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밝힘으로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힌다는 상징성을 부여한 행사가 있었는데,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신이 모든 빛의 근원이요 생명의 빛임을 선언하신 듯하다(Godet, Westcott). 그리고 만약 이 말씀이 간음한 여인의 사건 직후에 있었다면 마침 그 시간에 떠오르는 해를 보시고(2절) 이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다(Bengel). 어쨌든 예수의 이 말씀은 과거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빛으로 인식되고 있는(출 14:19-25; 시 27:1; 사 60:19; 겔 1:4,13)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반영한다. 특히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배타적인 선민(選民) 의식을 넘어서는 종말적, 구속사적 중요성을 가진 혁명적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신(요 1:4,9; 3:19) 예수께서는 죄 짐을 지고 어둠 속에 거니는 모든 인류를 영원한 빛 가운데로 인도할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따른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근원적인 빛이신 예수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메시야이심을 믿고 또한 전인격적으로 그의 뜻에 순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명의 빛'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이견들이 있다. ① '생명을 주는'(gives life) 빛: 쿰란 사본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Morris, Brown). ② '생명인'(is life) 빛. ③ '생명으로부터 솟아나는'(spring from life) 빛: 이와 관련해선 '생명의 떡'에 관해 주님이 직접 해설하신 요 6:33, 51을 참조하라. ④ '생명을 비추는'(illuminates life) 빛. 그러나 이 네 가지 중 어느 견해를 취하여도 사실은 무방하다. 왜냐하면 '생명의 빛'은 예수 자신과 그로 말미암는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증거하신 데 대하여 이제 바리새인들은 증인의 증거 채택 규정이라는 법적 문제를 들고 나온다. 자신이 스스로 증거를 채택해 확증할 수 없다는 것은 율법과(민 35:30; 신 17:6; 19:15) 미쉬나(Mishnah Ketub, 11.9)의 규정인 바 증거 채택을 위하여 그런데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 율법적 올무로 묶어 보려는 바리새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이미 5장에서도 예수에 의해 적절하게 반박되었다. 즉 하나님의 증거(요 5:32), 세례 요한의 증거(요 5:33-35), 예수 자신의 사역의 증거(요 5:36), 구약 율법의 증거(요 5:39)등은 일관되게 예수 자신의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하다(17절).
8: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 5장에서의 증거와는 다소 다르게 이곳에서 제시하시는 예수의 '참된 증거의 논리'는 ① 천상적(天上的) 근원(14절 하), ② 성부와의 친밀한 연합(15,16절), ③ 성부와 자신의 증거의 완전한 일치(17,18절) 등으로 전개될 것이다. 한편 본절은 요 5:31의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라는 말씀과 형식상으로는 모순된다. 하지만 그 사상(idea)에 있어서는 양자 간 다 '아버지의 증거'가 자신의 증거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내포하므로(요 5:32과 16,18절을 비교해 보라)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Brown).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 예수가 자신의 증거의 신빙성으로 제시한 첫 번째 항목은 이처럼 자신의 신적 기원에 관한 배타적 지식이다. 예수가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시던 선재(pre-existence, 요 17:5)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라는(요 13:3; 14:2)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신 사항이다(요 16:28). 그러나 예수의 부활, 승천 이전에는 미처 제자들도 이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으니(요 2:22) 더구나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거부하는 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러한 예수의 말이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 것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의 증거를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예수를 육체적 기준으로만 판단했기 때문이다(요 7:24; 고후 5:16). 그런데 여기서 '육체'(사륵스)라는 표현은 바울이 영(프뉴마)과 육(사릌스)을 대조시켜 강조하는 부정적 측면의 '죄된 인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인간의 외면적 조건 곧 빈부귀천이나 유식함과 무식함, 잘났고 못났음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께선 그러한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아니하시는데 이는 '사람은 외모로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삼상 16:7). 더욱이 예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므로(요 3:17) 그의 심판은 재림 시까지 유보될 것이다(벧후 3:9).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은 참되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라는 구절은 14절의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라는 구절과 구조상 유사하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양자가 다 성부하나님에 그 판단과 증거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G. Beasley-Murray). 따라서 본절에 사용된 '참되니'에 해당하는 '알레디네'는 14절의 '알레데스'와 별다른 차이 없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어떤 학자들은 14절의 '알레데스'가 '단순히 참되다'는 뜻이고 본절의 '알레디네'는 확실한 근거가 있으며 보다 완전한 개념의 참됨을 가리킨다고 구분한다(Westcott), 그러나 17절에 다시 '알레데스'가 사용된 것을 보면 양자는 같은 뜻임이 분명하다(Brown), 이와 관련 요한은 동일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꺼려 비슷한 단어를 나열하는 경향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바리새인들의 비평(13절)에 대해 예수께서는 이제 두 번째의 증인으로 성부 하나님을 제시하신다. 이러한 본절에서 바리새인들을 더욱 경악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러한 놀라움이 19절에서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요 감히 그분을 기도 중에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꺼려했던 그들에게 목수의 아들이요 자신들과 함께 지상에서 생활하는 예수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자 불경한 언사였다. 하지만 예수는 더욱더 하나님과의 일체성을 강조하여 요 10:30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분노가 극에 달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몰아 즉석에서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한다(요 10:31).
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 - 이는 1차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비판하기 위하여서 내세운 율법의 조항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앞에 붙인 '너희'라는 것은 율법의 제한을 받는 대상을 규정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친히 율법 아래에 매이셨는데, 그것은 인간이 이루지 못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심으로 인간을 율법의 저주와 요구에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였다(롬 8:1-4).
8: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 이처럼 예수에 대한 증인으로 '자신'과 '성부 하나님'을 내세우심은 2인 이상의 증인을 요구하는 율법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는 구절은 요 5:37과 시제만 다를 뿐 동일한 말씀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8: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 어거스틴(Augustine)은 유대인들이 묻고 있는 이 '아버지'가 예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을 가리키며, 이때 요셉은 이미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본절은 이미 세상을 떠난 그를 증인으로 세울 테면 세워 보라는 조롱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예수에 의해 지금까지 언급된 '아버지'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본절은 유대인들이 그 같은 예수의 말을 재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가리킴이 분명하다(Bernard).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 성부와 성자 간의 존재론적 동일성(essential equality)은 본서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강조점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충분히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요 1:18) 성자를 바르게 아는 것은 곧 성부를 아는 것이다(요 14:7; 16:3).
8:20 이 말씀은 연보궤 앞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 경내의 여인의 뜰(the Court of Women) 안에 나팔 모양으로 생긴 13개의 연보궤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은 여자들도 헌금을 내도록 출입이 허용되었기에 성전 경내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을 것이다(Vincent).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하여 이곳을 강론 장소로 삼으셨을 것이다.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요 7:6,30 주석 참조.
8:21-30 예수와 하나님의 일체성
앞 단락(12-20절)에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 자, 즉 하나님의 아들임을 본문에서 또다시 증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神性)을 지니신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하여 보다 분명히 밝히고 계신 것이다. 비록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지만(21-25절),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또한 성부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함으로 그분의 기쁘신 뜻을 행하고 계시는 메시야이신 것이다(26-30절).
한편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자신의 선재성(先在性) 및 하나님과의 동등성과 관련하여 자신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승귀(昇貴)를 예고하셨다는 사실이다(21,22절). 예수의 선재성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귀를 믿지 않는 자들은 그 같은 불신앙으로 인해 결국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도 주목할 만하다(23,24절). 누구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심을 믿고 깨달아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촉구의 메시지이기도 한데, 본서 저자가 본서를 기록한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요 20:31).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반응은 오해와 회의(懷疑)에 가득찬 것이었다. 또한 일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듯하는 태도를 취하기는 했지만(30절), 결국 다음 단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태도는 결코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일시적 감정의 호응에 불과했다(48-59절). 이것은 진정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로 시들어 버린다면 불과 얼마 가지 않아 원래 상태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음을 교훈해 준다(마 13:5,6,20,21).
8:21 다시 이르시되. - '다시'에 해당하는 '팔린'은 날짜의 변경을 의미하거나(A. Robertson)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의 반복을 의미할 수 있다(Hendriksen). 그런데 본절에서부터 30절까지가 내용상 요 7:33,34의 반복이니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임을 알 수 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여기서 '내가 가리니'에 해당하는 '휘파고'는 요한에 의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신 후 부활, 승천하여 성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에 자주 적용되었다. 요 7:33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께서 이처럼 떠나신 후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더라도 이미 때를 놓친 허망한 탐색이 될 것인데(Bernard), 실상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온 유대교(Judaism)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A. Robertson). 이처럼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한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들의 죄 가운데 죽은 것이므로(C. K. Barrett) 영원히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갈 수 없다.
8:22 유대인들이 가로되. - 본절로 미루어 보아 3절과 13절에 언급되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물러가고 예수께선 다시금 유대인 청중들과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닌 저가 자결하려는가. - 예수께선 이미 앞에서도 자신이 성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실 것에 대하여 언급하셨다(요 7:33,34). 그러나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저가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터인가'(요 7:35)라고 조롱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동일한 언급(21절)에 이번에도 청중들이 '저가 자결하려는가'라고 되물은 것은 분명히 조소(笑)의 말이다(Vincent, A.Robertson, G. Beasley-Murray). 즉 유대인들은 비록 부활이나 사후 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내세에 관한 것임은 어렴풋이나마 감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살하는 자들의 거처라고 여겨지는 지옥의 심연(深淵)이 바로 예수가 가려는 곳이 아니냐고 빈정거린 것이다(Josephus의 War III, 8:5).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 예수의 기원을 이 세상이 아닌 '위'(아노)라고 언급하는 것은 본서에서나(요 3:31; 17:16) 신약 성경에서(골 3:31; 약 3:15-17) 일반적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아래서'(카토)라는 표현은 예수의 천상적 기원과 자연스럽게 대조되는 인간들의 지상적 기원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약 3:14-17). 즉 인간들은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혈통을 좇아 출생하지만 예수께선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 전에 발생하신 근본 하나님이신 것이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여기서 '이 세상에 속하였다'함은 죄악 세상의 지배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즉 아담의 타락 이래 모든 인간은 죄의 굴레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천지 만물 또한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롬 5:12; 8:18-22). 그러나 예수께선 비록 성육신(成肉身)하사 인간이 되셨으나 결코 죄악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권세로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이다(요 16:33).
8:24 이르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유무로 영원한 사망이냐(롬 6:23) 생명이냐(요 3:15,16)가 결정된다는 사실이 분명히 증거되고 있는 구절이다(G. Beasley-Murray). 한편 '내가 그인 줄' 이란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예수의 자기 선언으로 자주 등장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이다. 그러나 본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고자 함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를 구약 성경과 연관시켜 이해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쉬나켄부르그(Schnackenburg)는 사 43:10과 본절의 연관을 주장하며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는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을 예수께서 자신에게 적용한 것으로 본다. 반면에 다드(C.H. Dodd)는 이를 여호와의 자기 선언, 즉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껏 운행하시는 자가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임을 선언한 사 41:4과 연관지어 예수께서 자신이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이러한 복잡한 추론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전후 문맥 가운데서 해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즉 간접화법의 연결 동사 '에이미' 뒤에 서술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의미하신 것은 자신이 '위로부터 난 자'(23절), 즉 근본 하나님이심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A. Robertson).
8:2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메시야 혹은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암시하는 예수의 발언에 제동을 걸기 위해 경멸적이고 강조적인 어조로 특히 '너'(수)란 말을 강조하여 '네까짓 게 감히 누군데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다그치고 있다(A. Robertson, Hendriksen).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니라. - 헬라어 원문상 본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즉 '처음부터'라고 개역성경이 번역하는 '텐 아르켄'이 부사적 용법으로 쓰인 목적격(accusative)이란 점과 '말하여 온'에 해당하는 '랄로'가 현재형인 점, 그리고 보통 간접 질문에 사용되는 '호 티'가 무엇과 연결되는지가 애매한 점이 문법적 논의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견해로는 다음 세 가지 설명이 있다.
① 평서문으로 보는 경우: '텐 아르켄'의 전치사 부재(不在)로 인해 다음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a) 나는 원래 (primarily) 내가 너희에게 말하던 존재이다. b) 나는 무엇보다 우선(first of all) 너희에게 말하던 자이다. c) 나는 처음부터(from the beginning) 있는 자라고 너희에게 말하던 자이다(Vulgate, Syriac, KJV, RSV, NIV, 개역성경, 새성경, 새번역, 현대어 성경, 표준 신약전서 등). ② 의문문으로 보는 경우: 아봇(Abbott)과 바렛 (Barrett) 같은 학자들은 반대하지만 '호 티'는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How is it that)라는 뜻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Blass, Debrunner). 따라서 이에 의거하면 본절은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온 것은 무엇인가?'라고 해석할 수 있다(Meyer, Westcott, Hort, NASB, NEB.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 ③ 감탄문으로 보는 경우: '도대체 (at all) 그것은 내가 말한 것이 아닌가!'(Nonnus of Panopolis, Chrysostom, Cyril of Alexandria,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이 가운데 가장 타당한 견해는 ① c)로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21-30절의 내용이 예수의 신적 기원, 선재성(先在性), 신적 사역 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8: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서 말하노라 하시되. -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조롱기 섞인 질문에 대하여 전혀 회피하지 않으시고 거듭 자신의 신성에 대하여 언급하셨다(23-25절). 그런데 이제 본절에선 자신을 향한 유대인들의 태도에 관한 말씀으로 전환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먼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이 있으나 자신이 자제하고 계심을 밝힌다(C. K. Aarrett). 그리고 이어선 자신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 참되신(알레데스) 하나님에게 기원을 둔 예수의 그들에 대한 판단과 비교할 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8:27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의거하여 현세적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를 기대했으나 예수께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아니하자 저를 배척하였다(Westcott). 더욱이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기에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즉 예수의 거듭된 자기 계시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일에만 골몰한 그들은 영안이 어두워 그만 자신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를 도리어 배척하고 만 것이다(59절).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 - 26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한 본서 저자의 해설이다. 즉 예수께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관련, 자신을 보내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심과 그러므로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곧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미처 그 같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8: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 '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오'는 본서에서 예수의 십자가 형벌 당하심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요 3:14; 13:32,34). 본절에서는 특히 이러한 십자가 형벌의 주체가 유대인임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 24절 주석 참조.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본장에서만도 4번째 반복되는 '나를 보내신 이'(16,18,26절)와 예수와의 밀접한 연관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는 말씀 속에는 성부와 성자 간의 완전한 존재론적 동질성(essential equality)과 친밀한 연합(intimate association)이 강조되고 있다. 한편 '그의 기뻐하시는 일'이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요 4:34) 아들의 순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 6:39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택한 자들의 구원임을 밝히고 있다.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믿더라. -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결과에 대한 간략한 보고이다. 그런데 '믿더라'에 해당하는 '에피스튜산'은 동작의 시작을 의미하는 부정과거로 결코 완전한 신앙의 경지에 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A. Robertson). 31절 이하에서 살필 수 있는 그들의 과격한 언동이나 행동으로 보아서도(48,59절) 이러한 사실은 충분히 입증된다(Calvin). 즉 저들은 예수의 말씀에 일시적으로 귀 기울이긴 하였으나 예수의 가르침이 깊이를 더하자 더 이상 진리를 수납하지 못하고 그만 예수를 배격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이고 만 것이다.
8:31-59 자유케 하는 진리이신 예수
12절에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예수의 여섯 번째 강화의 일차적 주제는 예수께서 '세상의 참빛' 이시라는 것이다. 이제 본문은 그러한 사실을 일시적이나마 믿은 일부 유대인들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 죄의 종된 인간들을 자유케 하는 참된 진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류를 자유케 하는 진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 진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주는 유일한 참 진리되심을 가르치셨다(31-38절).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를 믿고 또한 저가 이루신 대속(代) 사역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49-51절). 그러므로 이제 자유케 하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우며, 또한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롬 8:1,2).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민(選民)이요 혈통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즉각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매도하며 돌로 치려고 했다(48,52-59절). 이처럼 본문에서 보여 주는 그들의 태도는 앞 단락에서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잠시 취했던 우호적인 반응(30절)이 결코 진정한 신앙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지혜로운 한 인간으로만 여기고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예수를 추종했을 뿐임도 드러내 준다.
하지만 진정한 성도는 이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주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인정하며 자신의 전 삶을 통해 그분을 좇는 자들임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마 16:24). 즉,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롬 9:6-8). 따라서 정작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심은 부인한 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은 줄 착각한 유대인들의 경우는 우리들에게 역설적으로 크나큰 교훈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우리가 주께 대하여 믿고 확신하는 바를 굳게 붙들어야 할 것이다(딤후 1:13,14).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 본절 이하에 나타나는 믿는 자들이 30절의 많은 사람(폴로이)과 동일한 사람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란이 있다. ① 30절의 '믿더라'는 동사가 부정과거 시제인 것과 달리 본절은 완료시제(페피스튜코타스)인 것으로 보아 30절은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한 자들'을, 본절은 '완전히 믿지는 않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하는 견해(W.F. Howard), ② 30,31,32절은 진정한 신자와 관계된 기사임에 반해 33절 이하는 믿지 않은 유대인들과 관계된 기사라는 주장(R.Lenski, Columbus), ③ 30-36절은 진정한 신자와 관계된 기사인 반면 37절 이하는 불신자와 관계된 기사라는 주장(F. W. Grosheide) 등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들 모두는 이를 정확히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30절에서 이에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예수께 대한 불완전한 신앙을 지녔던 '많은 사람'과 동일인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Calvin).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거하면'에 해당하는 '메이네테'는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기본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특히 요 15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결과는 믿음의 열매를 통해 온전히 드러난다(요 15:8). 그러한 믿음의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표식인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체화 된다는 것이(요 15:12) 본서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진리'(알레데이아)라는 말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요 1:17),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질을 표현하는 용어이기도 하다(요 14:6).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증거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서의(Hendriksen, Brown)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요 17:7). 따라서 이 진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결부된다. 이러한 사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36절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와 평행을 이루는 것을 보아서도 확실하다(Brown). 즉 누구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이심을 믿고 저가 이룬 대속 사역의 공로를 힘 입기만 하면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의 결과로의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자유케 되는 것이다(롬 8:2).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 이는 곧 유대인들의 선민(選民) 사상을 드러내 주는 말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여종 하갈에게서가 아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언약 자손인 이삭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것이다(갈 4:22,23).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 이는 자신들이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등의 압제 하에 있었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러한 정치적 압제 하에서도 종교적인 자유만은 여전히 향유해 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보다 더 근본적인 '죄에서의 자유함'이었으니 34절에서 이를 보다 상세히 일러주고 있다.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32절)의 개념이 분명해진다. 즉 비록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더라도(33절) 죄를 범하는 자라면 그는 곧 죄의 종인 것이다(롬 3:23). 한편 여기서 '범하다'에 해당하는 '포이온'이 현재 분사인 것은 죄의 지속적 습성, 나아가서 모든 사람이 예외가 될 수 없는 죄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강조점은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니(롬 3:9-18) 유대인인 그들도 예외일 수 없다는 데 있다.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 당시 한 가정에 공존하는 '아들'과 '종'을 등장시키는 대조적인 비유법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비유가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인데 그 까닭은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들을 '죄의 노예'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대인들이 우러러 보는 모세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하나님의 집에 있는 종(데라폰)에 불과하였다(히 3:5,6). 따라서 그 이후의 모든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종의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주인의 아들을 배척하는 자들은 저가 주실 유업인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갈 4:30).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 - 이 자유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종교적 자유'(33절)의 개념을 초월하는 것으로 죄로부터의 영적인 자유이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인하여 저를 믿는 자마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음으로 인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말씀은 당시 노예를 해방시킬 권한이 가장(家長)뿐만 아니라 상속자인 아들에게도 있음을 아는 청중들의 사전 지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35절의 '종과 아들'의 비유와 연결성을 지닌다. 즉 좋은 그렇지 못하되 성숙한 아들은 아버지가 행하는 바를 다 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8:37,38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 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중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였다(56절).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도리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예수에 대해 죽이려고까지 하였다(59절). 만일 저들이 혈통적으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뜻을 이어받는 아브라함의 후예라면 그러한 행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를 상기시키기 위해 '너희 아비'가 진정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39절) 영적으로는 마귀의 자녀들이었다(44절).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 예수께서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서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육신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점만을 들먹이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 '아브라함의 행사'란 구체적으로 창세기가 증거하는 여러 사건들(창 12,17,18,22장),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위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신약은 '그의 행위가 믿음과 더불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언급하고 있다(롬 4:20; 갈 3:6; 약 2:21-24).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르지 아니하였다(눅 3:8). 즉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결과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나님의 보내신 그 아들을 믿고 저에게 순종하기는커녕 도리어 저를 대적하고 배척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 배척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하나님의 천사들을 부지중에라도 정중히 대접했던(창 18:1-8) 아브라함과는 대조적으로 이처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저들이 마귀의 자손들이었음을 자증해 준다(44절). 한편 '사람'에 해당하는 '안드로포스'( )는 예수의 자칭호로서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어이다(Bernard). 이러한 희소성과 독특성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를 가리켜 예수의 인성을 자증(自證)하신 증거하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Brown). 그러나 실상이 표현은 어떤 '칭호'로서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개인'(someone)을 의미하는 단순한 히브리적 용법(simply semitism)이다(Blass, Debrunner). 즉 여기서 이는 단지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예수 자신을 가리킨 것일 뿐이다.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 여기서 '너희 아비'란 44절의 '마귀'를 가리킨다. 즉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에 걸맞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유대인들, 특히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자들은(40절)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방해하는 영적으로 마귀의 자손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사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신 14:1,2) 육신적인 출생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에게서 난 후손들이라는 점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예수 출생은 육신의 아비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마 1:18-25), 즉 마리아의 사생자(私生子)라고 오해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T. Walker).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라는 말로서 예수를 비웃은 것으로 보인다(Brown, Barrett, Hendriksen).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 이 조건문의 특징은 조건절과 귀결절 양자가 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전제이다. 사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또 그를 사랑하는 자이다(요일 5:1).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 마치 마리아의 사생자라는 헛소문을 반박이라도 하듯 예수께서 자신의 신적 기원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시는 구절이다. 이와 관련해선 요 5:36,37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 유대인들의 완악함과 우둔함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보내신 그 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서 '들은 줄'에 해당하는 '아쿠에인'은 단순한 청취 행위가 아닌 듣고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심령이 완고해져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Brown).
8:44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너희 아비 마귀'(투 파트로스 투 디아볼루)란 문자적으로 '마귀의 아버지'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여기서의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이해하여 악의 기원조차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잘못된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천사 중 하나가 타락한 것이 곧 사단임을 증거하고 있으니(사 14:12) 그 같은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헬라어 본문은 다소 생략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가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영적으로 마귀의 자녀들은 마귀가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 행하기 마련이다. 역(逆)으로 이렇게 죄를 계속 짓는 것은 자신이 마귀에게 속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요일 3:8).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계속 죄를 짓는 자들은 절대로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마 3:9; 12:34). 한편 본절에서 제시된 마귀의 특징은 ① 살인자요 ② 거짓말쟁이이다. 여기서 '살인한 자'란 아마도 창 4:8의 아벨을 죽인 가인의 배후에 마귀가 있음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거짓말쟁이'란 그리스도의 속성인 빛과 진리(요 1:9; 14:6)와는 대조되는 마귀의 속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뱀이 하와를 속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하였던 점(창 3:1-6)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사단의 종노릇한 유대인들은 이와 마찬가지로 거짓 증거로서 예수를 고소하였으며 마침내는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살인죄를 범하였다(마 26:59-27:2). 이는 실로 그 아비의 행실을 그 자식들이 본받아 행한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 '제 것으로 말하나니'는 '제 본성에 따라 말하다'(he speaks according to hisown nature, RSV)는 뜻이다. 때문에 공동번역은 본절을 '그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로 번역하고 있다.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 이는 어두움이 빛을 수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요 1:5). 즉 스스로 어두움 가운데 다니며 거짓과 시기, 살인 등을 행하는 유대인들 (44절)은 예수가 진리를 말한다는 단순한 그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저를 미워하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40,59절).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는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 직접적으로 이 말씀은 2-11절의 간음한 여인 사건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서 혐의를 잡지 못한 사건을 지적한다(Brown). 한편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무죄하시다는 사실은 이미 그의 신성(神性)에 내포된 것이요(거룩성)히 4:15도 특징적으로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밝힌다.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계속하여 악행을 하듯이(44절) 하나님께 속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요 15:10).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소속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M. Dods, 요일 4:6 참조). 이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마 7:18).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 엄격한 의미의 이성적인 논의는 전절로써 마감되고 이제 말문이 막힌 유대인들은 말머리를 돌려 예수를 인신공격하기 시작한다. 즉 그들은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요 7:41,52) 당시에는 치욕적인 상스러운 표현으로 사용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예수를 모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에 대해서는 요 4:9 주석과 눅 10:33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이 같은 모독은 예수의 출생이 이방인과의 통혼(通婚)에 의해 비롯된 사마리아인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비난일 수도 있다(41절 주석 참조).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이는 곧 정신 이상 상태를 의미하는데(Moffat) 이 같은 비난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여러 차례 예수에게 집중되었다(요 7:20; 10:20; 마 12:22; 막 3:30; 눅 13:11). 한편 '귀신'에 관해서는 마 4장 자료 노트, '마귀'를 참조하라.
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 사마리아인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심인지(A. Robertson) 언급이 없고 귀신이 들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만 단호히 말씀하신다. 즉 자신의 행동은 결코 정신 이상자가 행하는 미친 짓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단호히 주장하신다. 이러한 본절에서 '나'(에고)와 '너희'(휘메이스)가 각각 강조형으로 대조되고 '그러나'(알라)라는 강조적 접속사가 사용된 것을 보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매우 강한 어조로 반박하셨음을 알 수 있다(Morris). 한편 '무시하는 도다'에 해당하는 '아티마제테'는 '영광 돌리다'란 의미인 '티마오' 동사에 부정어 '아'가 접두된 동사로 '모욕하다'(dishonor)라는 뜻이다.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당연히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빌 2:6-8).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서로 자신의 영광만을 구하려 하는 인간들과는(요 5:44) 대조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굳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장차 그를 영화롭게 하시고(요 12:28) 의롭게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판단하시는'의 원어 '크리논'은 본서에서 대개 '세상을 심판한다'는 의미로 쓰였지만(요 5:22) 이곳에서는 성부께서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신다는 뜻으로 쓰였다.
8: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 '지키면'에 해당하는 '테레세'는 요한의 애용어로 요한의 문서에 총 36회나 나타난다(본서: 18회; 요일: 7회; 계시록: 11회, Morris).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제시된 이 동사는 어떤 사실에 대한 단순한 수긍이 아니라 전적으로 수납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과정을 포함한다(J.Calvin).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삶에 해당하는 영원한 사망을 의미한다(롬 6:23).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함을 얻게 되니 그 마지막은 영생인 것이다(롬 6:22).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 여기서 '아노라'는 완료 시제(에그노카멘)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귀신들렸다고 말한(48절) 후 이에 대한 예수의 말(49-51절)을 듣고 보니 그것이 사실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가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 성도의 영생을 불가사의한 것으로 이해하는 유대인들의 논리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다 죽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죽음이 묘사되지 않은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의 경우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근본적인 전제가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육체적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 사망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1절 주석 참조.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 이는 수가성 여인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라고 예수께 질문했던 것과 유사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수가 성 여인이 긍정적인 해답을 얻었던 것과 달리(요 4:15, 19, 29) 여기서 유대인들은 점점 더 강퍅해져 가는 점이 대조적이다(57,59절).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요 15:18) 예수의 정체성(identity)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그러한 생각이 자신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54절).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니라. - 개역 성경이 '너희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사본에서 두 가지 이문(異文)들이 나타난다. ① 너희 하나님(데오스 헤몬): 시내산 사본(R), 바티칸 사본(B), 베자사본(D) 등. ② 우리 하나님(데오스 헤몬): 알렉산드리아 사본(A), 에브라임 사본(C), 모스코 사본(K), 레기우스 사본(L) 등. 이중 후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지만 오히려 더 매끄럽지 않은 형태가 본래의 형태일 수 있다는 사본 비평상의 기준을 고려하면 후자가 본래의 의미일 수 있다(Brown).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유격의 인칭이 아니라 '아버지'와 '하나님'으로 대조되는 명사의 차이에 있다(Morris).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지적하심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밀접한 관계성을 강조하신 것이다(18,19,28,29,38,42절).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 이곳에 사용된 '안다'라는 동사가 각각 '기노스코'와 '오이다'인 것에 대해 전자는 경험적 지식, 후자는 직관적이고 친밀한 지식으로 구분하는 시도(A.Robertson, Hendriksen)가 있다. 그러나 요 7:28,29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오이다'라고 표현되었으며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역시 '오이다'가 사용되었다. 또한 요 17:25에서는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기노스코'로 사용되었고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역시 '기노스코'로 나타난다(Brown). 즉 본서 전체에서 요한은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여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는 어휘 구사 습관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여기서 '나의 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어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러한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은 아마도 이삭의 수태 고지(受胎告知)와 그 탄생,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의 일 등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기뻐한 것(히 11:10-12,17-19)을 구약의 메시야 대망 사상 및 그 역사와 관련시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후손 중에서 천하 만민에게 복을 미치는 메시야가 태어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기뻐하였음이 틀림없다(창 12:1-3; 22:17,18).
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 '오십'과 관련하여 학자들 간에는 다음과 같이 의견이 분분하다. ① 이는 예수께서 40대 공생애를 시작하셨음을 나타내 준다는 견해(Barrett). ② 이는 단지 예수의 나이가 적다고 하는 개략적 표현이므로 그러한 중요성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견해. ③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가 30세쯤이라는 복음서 전통을 수납하되 예수께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을 가능성을 추론케 해주는 근거라는 견해('사십'도 안 되었다고 해야 정상적인 표현일 것이므로). 그런데 누가의 기록(눅 3:23)에 의하면 예수께서 30세쯤에 공생애를 시작하셔서 3년간 사역하신 후 33세경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십도 못되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예수가 아직은 젊은 층에 불과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강조적 표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의 견해 중 두 번째 것이 타당한 셈이다.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 그리스도의 선재성(pre-existence)은 본서의 첫머리를 여는 대전제이다(요 1:1,2). 한편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나다'(게네스다이)라는 단어와 예수 자신에게 적용된 '있느니라'(에이미)는 단어는 완벽한 대조를 보여 준다(A.Robertson). 즉 '나다'란 말은 어느 한 출생 시절을 일러주지만 '있다'는 창세 전부터 있었다는 선재성과 영존성을 나타내 준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본서 전체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요 14:10; 16:28; 17:5).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아브라함보다 선재(先在)했다고 주장하는 예수의 말씀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선언과 같다(요 5:17). 따라서 이러한 신성 모독에 분노한 유대인들은 혈기를 자제하지 못하고서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 하였는데 이는 율법의 규정(레 24:16)을 준수하려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저들을 피해 숨어서 성전을 빠져 나오셨는데 이는 아직 자신이 죽임당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요 7:20). 한편 여기서 '숨어'에 해당하는 '에크뤼베'는 그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단회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이 행위는 어떤 물건이나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긴 것이라기보다는 무리들 속으로 묻혀 들어간 행위로 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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