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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예루살렘 공의회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의 시작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3:1-21:16까지 이어지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전 3차의 이방전도 여행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바울의 전 3회에 걸친 전도 여행 기사는 과거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열렬히 복음을 탄압하던 바울을 회심(回心)시키시고 바로 그를 이제는 정반대로 순교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 준다. 또한 이제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생명을 던진 철저한 헌신으로 주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명령(commision)과 동시에 약속(promise)으로 남기셨던 말씀, 곧 성령이 강림한 후에는 성령의 주도로 주의 사도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말씀을 증언함으로 복음이 세계 만민에게 전달되리라던 말씀(행 1:8)이 분명히 그리고 강력하게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처럼 전체적으로는 바울의 전 3회에 걸친 바울의 전도여행 기사의 연속 부분인 본장은 크게 전후반부로 나뉘어진다. 먼저 전반부 1-35절은 제 1차 전도 여행 이후 그리고 제 2차 전도여행 이전에 이방인 출신 성도들의 할례 문제를 두고 열렸던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Jerusalem Council) 관련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 36-41절은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Mark, John)의 동행 문제로 결별한 후 바울이 실라(Silas)와 함께 제 2차 전도여행(A.D. 49-52)을 개시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전반부에 보도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일종의 과도기였던 초대 교회 당시의 최대의 현안 문제였던 이방인의 구원 및 이방인 성도 나아가서는 유대인 출신 성도까지 포함한 신약 시대 성도 전체의 구약 율법에 대한 자세 문제를 이방인 출신 성도의 할례(割禮)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한 것이었다. 사실 이방인의 구원 및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한 신약 성도의 구약 율법에 대한 자세 문제는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께서 구약의 성취로서 오사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새로이 신약을 주시고 승천하신 이후 내내 문제되어 왔었다. 더우기 이제 바울 사도 등의 본격적인 이방 선교사업으로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대거 초대 교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 당시에는 초미의 현안이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결국 신약과 구약의 근본 관계라는 본질적이고도 포괄적인 구속사적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전 초대 교회가 공개적으로 토론한 예루살렘 공의회는 그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그 전모가 충분히 파악된다. 또한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신 · 구약의 경륜(經論)에 의거한 결단을 내린 것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심층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를 연구자료로 본장 말미에 게재하였는바 이를 필히 참조하라. 한편 예루살렘 공의회 자체의 진행 과정과 개별적 교훈에 대해서는 해당 강해 주석을 보라. 후반부의 새로운 전도 여행 개시 직전의 바울과 바나바의 분열과 두 그룹으로 나뉜 후의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개시 기사는 우리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는 구속사의 노정(路程)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역하고자 할 때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몇몇 교훈을 시사해 준다.
첫째, 성도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도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고 사랑이시나 성도는 부족한 인간인 고로 심지어 대사도였던 바울과 바나바도 갈라섰듯이 의견 대립과 나아가 분열이 있을 수 있음을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내용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상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면 불가피하나 인간의 이해타산과 감정에서 야기된 것이라면 선하지 못함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불가피하게 갈등과 분열이 있더라도 거시적 관점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늘 새로운 화해와 일치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본문에서 보도된 대로 서로 갈라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중에도 서로 같이 주의 사역자임을 잊지 않았으며 나아가 후에는 서로 다시 함께 모여 주의 일에 동역하였음이 이를 잘 교훈해 준다(갈 2:1,9).
둘째로 인간은 이처럼 자신들의 갈등에 못 이겨 갈라섰으나 하나님은 그것으로 전도여행이 지연되거나 중단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갈라선 두 사람 각각에게 새로운 동역자가 생기게 하사 두 개의 전도단이 이방 선교에 나서게 함으로써 결국은 이방 선교가 더욱 촉진되게 하신 사실은 우리에게 구속사는 거기에 참여한 인간의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궁극적인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단절되거나 후퇴함 없이 더욱 확장되니 세상 끝날 최종 성취될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준다.
외울 말씀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행 15:16,17)
예루살렘 공의회 개최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베드로의 이방인 구원 선포
6 ○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
12 ○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야고보의 결론적 제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예루살렘 공의희 결의 내용
22 ○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26 (25절에 포함되어 있음)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공의회 공문서의 안디옥 전달
30 ○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분열 및 제 2차 전도 여행 시작
36 ○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본문 & 자료 노트
도표-15:1-35 예루살렘 회의의 진행 과정
1. 발단: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유대파 성도들과 바울과 바나바 간의 논쟁 발발, 안디옥 교회의 문제 해결 요청(1-5절)
2. 전개:
1) 예루살렘 회의 소집(6절)
2) 장로들과 사도들의 변론(7절)
3) 할례가 구원을 얻는 것과 무관함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7-11절)
4) 이방인 중에서 행했던 표적과 기사에 대한 바울, 바나바의 증언(12절)
5) 이방인을 한 형제로 인정함에 대한 주의 형제 아보고의 선포(13-21절)
3. 결과:
1)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를 통해 안디옥에 답신서 전송(22-29절)
2) 이방인 개종자에게 최소한의 정결법 준수만 명하는 편지를 전하고 유다와 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30-33절)
보감-15:1-6 분쟁을 방지하거나 해결하는 방법
1. 분노를 쉽게 드러내지 않음(잠 15:18)
2. 시비를 일으키지 않음(잠 17:14)
3. 분쟁하기를 좋아하는 자를 피함(잠 21:19)
4. 차분하게 대화로써 해결함(행 15:2-6)
5. 모든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함(롬 12:18)
6.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음(롬 12:19-21)
7. 성령을 좇아 행함(갈 5:16,22,23)
8.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지님(빌 2:2-5)
9. 피차 용납하고 용서함(골 3:13)
10.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의 교훈을 생각함(딤전 6:3,4)
인물연구-마가(실패를 극복한 복음의 조력자)
1. 인적 사항
① 마가는 '비추이다'라는 뜻의 로마 이름. 본명은 '요한'.
② 예루살렘 마리아의 아들(행 12:12). 바나바의 생질(골 4:10).
③ 지중해 구브로 섬 출신. 예루살렘에서 성장한 부유한 레위 족속.
④ 바울의 조력자(행 13:5).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벧전 5:13).
2. 시대적 배경
A.D. 30-70년경에 주로 활동. 이 시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및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그리고 교회의 태동기, 과도기, 확장기 등 실로 구속사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의 핍박과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로마인들의 핍박이 점차 심화되던 교회의 시련기이기도 했다. 마가는 이러한 중요한 시기의 모든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고 또 체험한 자로서 실로 매우 중요한 역사의 증인이라 할 것이다.
3. 성품
① 예수가 체포되던 날, 몰래 예수를 따르다가 발각되어 겉옷을 벗은 몸으로 도망한 것으로 보아 의리는 있으나 두려움이 많은 자(막 14:51,52).
② 제1차 선교 여행에서 도중 하차한 것을 볼 때 고난에 대한 인내력이 부족하고, 심지가 약한 자.
③ 자신의 부를 가지고 믿음의 형제를 위해 봉사한 것으로 보아 인정많은 자(행 4:36-37).
④ 바울과의 갈등 후 재결합 했을 때 사형에 직면한 바울이 마가와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아 충성되고 헌신된 자
⑤ 부유한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자라난 레위 족속이면서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베드로를 조력한 것으로 보아 겸손하고 섬김의 자세를 지닌 자(골 4:10; 벤전 5:13).
⑥ 베드로의 어록을 모아 설교집을 편찬한 것으로 보아 기억력이 뛰어나고 섬세한 성격을 소유한 자
1) 전도여행 중단 이전
① 출생
② 예루살렘에서 성장
③ 예수 체포시 도망감 AD 30년 막 14:51,52
④ 제자들에게 기도처를 제공 AD 30년 행 1:12-15
⑤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동행 AD 46년 행 13:5
⑥ 여행 도중 예루살렘으로 귀환 - 행 13:13
2) 전도여행 이후
① 바나바와 구브로 선교 여행 AD 50년 행 15:39
② 바울과 화해, 재결함 AD 61년 골 4:10
③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힘 AD 61년 골 4:10
④ 베드로의 동역자로 활동 - 벧전 5:13
⑤ 마가복음 저술 AD 70년경 -
⑥ 순교 - -
5. 구속사적 지위
① 마가 복음을 기록하여 예수께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험난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음을 소개함으로써 고난 가운데 처한 성도들에게 위로를 준자.
②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의 행적을 직접 동행하며 목격한 자로서 초대 교회 역사의 산증인.
6. 주요 업적
① 마가복음 기록(A.D. 65-70년).
② 베드로 어록을 모아 설교집 편찬.
③ 초대 교회의 전도자로서 바울과 베드로의 수종을 들며 동역함(골 4:10; 벧전 5:13).
7. 주요 실수
① 바울과의 1차 전도여행 도중 하차함(행 13:5-13).
②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예수를 몰래 따르다가 발각되어 겉옷을 벗은 몸으로 도망감(막 14:51,52).
8. 평가 및 교훈
① 마가는 제 1차 전도 여행에서 도중 하차 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행 13:13). 그러나 한 번 실수한 것을 교훈삼아 자신을 더욱 강하게 연단함으로써 그는 바울과 베드로의 신실한 조력 자가 되었고, 또 마가복음서를 저술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골 4:10; 벧전 5:13). 이같이 우리도 자주 실수를 범하긴 하지만 그때마다 그것을 교훈삼아 새로운 신앙의 도약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시 37:24).
②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마가는 자신의 넓은 집을 제자들을 위해 개방하였다(행 1:12-15). 이처럼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사용했다는 것은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한 모본이 된다. 이처럼 우리도 내 것을 이웃과 나누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가?
③ 제 1차 전도 여행에서 도중 하차한 마가의 행동은 바울과 바나바 간의 다툼을 자아내어 결국 따로 사역을 떠나는 결과를 낳았다(행 15:37,38). 이처럼 한 사람의 직무 소홀이 자칫 주의 일에 큰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나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지킴으로써 주의 일을 온전히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자.
④ 마가가 실수를 딛고 일어서 훌륭한 복음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카의 허물을 덮어주는 바나바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행 15:39). 이처럼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따뜻한 사랑과 격려의 태도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각자가 갖춰야할 모습이다.
9. 핵심 성구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 13:13)
주요주제-15:1-35 예루살렘 공의회
본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15:1-5 초대 교회의 할례 논쟁
갈 2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5:7-11 본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의 요지
본문은 할례 문제를 위시한 이방인의 구약 준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유명한 '예루살렘공의회'의 진행 중에 실시된 베드로의 설교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율법의 행위가 아닌 주 예수의 무조건적 은혜로 말미암은 구속의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구약 준수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이에 대한 구속사적 의의는 본장 개관을 참조토록하고 여기서는 베드로의 설교 요지만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 사도들로 복음을 전파케 하신 것은 이방인들도 믿게 하기 위함(7절)
2.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이방인 전도의 타당성을 증거함(8절)
3. 성령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됨(9절)
4.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이방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됨(10절)
5.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음(11절)
인물 연구-15:13 야고보
약 1장 연구자료 참조
원어연구-15:24 괴롭게 하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는 '타라쏘'인데 문자적인 의미는 '뒤흔들다' 또는 '뒤짚어 엎다'이다. 또한 이는 '바다물이 출렁이는 것'(요 5:4,7), '대기의 흐름', 또는 '격렬한 감정의 동요'등의 다양한 용례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동요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구체적인 용례와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동을 일으키다’(마 2:3; 행 17:8)의 뜻이다. 이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평정을 잃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거짓 교사들은 무모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교란시켜, 교회로 하여금 무질서와 혼동으로 치닫게 한다. 둘째, '두려워하게 하다'(눅 24:38)의 뜻이다. 이것은 두려움이나 큰 공포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게 하는 행위이다. 거짓 교사들은 거짓 교리를 퍼뜨려 성도들로 하여금 평안을 잃고 놀람과 공포에 빠지게 한다. 셋째, '걱정되게 또는 고민되게 하다'의 뜻이다. 이것은 '거리낌이나 의심을 갖게 함으로써 당혹케 하다'는 의미이다. 거짓 교사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여(갈 1:7), 다른 마음을 품게 한다(갈 5:10).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은 그릇된 교리와 거짓 복음으로 교회의 조직을 파괴하고 성도의 평안과 확신을 잃게하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자.
15:1-3: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할례 문제 제기
행 13,14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A.D. 47-49년)으로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 세계로까지 확산되어간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장에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A.D. 49년)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는 본래 이방인 신자의 율법 준수와 할례 문제로 인하여 개최되었으나 그 결과는 공식적으로 이방 선교와 바울의 사도직 권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따라서 예루살렘공의회의 역사적 의미와 복음의 확산을 보여 주는 본서의 중심적 주제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예루살렘공의회의 개최 배경, 결과, 의의 등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에 상세히 다루었는 바 그곳을 필히 참조하라.
이러한 배경 하에서 살렘 공의회가 개최된 원인을 밝혀 주고 있다. 즉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에 대한 제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있을 때에 율법주의 전통을 간직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찾아와 이방인도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 얻는다고 주장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저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이방인의할례 문제를 넘어서 근본적으로는 이방인도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물론 이런 문제는 이미 앞에서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행 8장)와 고넬료의 회심 사건 (행 10장)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논란이 있었던 문제로 베드로의 변론(행 11장)으로 일시 해결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이미 이방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 과정에서 다시금 문제 제기가 된 것이다. 즉 아직도 율법적 전통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 신자들로서는 이방인들이 법적으로라도 유대인화되지 않고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자연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임을 주장하는 바울과 바나바와 저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의 본질과 기독교 공동체의 통일성을 지키기 위하여 안디옥교회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자문을 구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의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4-21절).
15:1 어떤 사람들이. - 유대인들, 특히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물론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에게조차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구제에 있어서 편향성을 보였으며(행 6:1), 베드로의 이방 선교에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행 11:2,3). 이러한 것들로 볼 때, 그리고 5절에서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본절에서 가리키는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적 성향이 투철한 기독교 개종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으며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주의적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준수하도록 강요함으로 다시 한번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율법주의자들의 뿌리 깊게 잘못된 인식은 이처럼 복음 위에 자신의 조상들이 모세 때에 받은 율법을 더하였다. 즉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행함'이 여전히 요구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유대인들에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가르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개종자들은 구원 받는 조건에 '할례'로 대표되는 모세의 율법 준수를 계속적으로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은 의문(儀文)의 할례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의 할례에 있다고 열변(熱辯)하였던 것이다(롬 2:25-29). 이와 관련하여 '할례'에 대해서는 수 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5:2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 잘못된 유대주의적 사고를 지닌 자들과 바른 복음을 지키고자 하는 자들 사이에서 이처럼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아마도 이 논쟁의 정도는 상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유대인 성도들의 주장은 이방 선교에 대한 중대한 위협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기본 진리 자체를 왜곡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온 교회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 및 바나바는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진리에 도전하는 유대인 성도들의 가르침에 분연히 맞섰는 바 양자 간에 큰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형제들이. - 안디옥 교회의 신실하고 지혜로운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유대인 성도들과 마음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중재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래도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사 당시 모교회(母敎會)였던 예루살렘 교회에 총대(總代)를 파송해 하교(下敎)를 받도록 수습책을 강구한 것 같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있었으며(행 8:1), 그곳 교회는 당시 초대 교회의 중심적 교회였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구원과 율법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의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및 몇몇 성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기로 하였다. 훗날 바울의 언급에 따르면 이때 동행한 사람 중에는 디도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갈 2:1,2).
15:3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 베니게(Phoenicia)에 대하여서는 행 11:19 주석을, 사마리아에 관하여는 행 8:5 주석을 참조하라. 이 지역은 이미 성도들과 빌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곳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그냥 가지 않고 이 지역들을 거치며 그곳 교인들에게 이방 선교에 대해 보고함으로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또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선교의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해 더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다졌을 것이다.
15:4-21 예루살렘 공의회 개최
지난 단락(1-3절)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된 배경으로, 율법주의적 전통에 젖어 있는 유대인 신자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와 저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사실과 안디옥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에 자문을 구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자문과 유대인 신자들의 문제 제기에 따라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공의회를 개최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지도자들 앞에서 1차 전도 여행의 결과를 보고하자 바리새파 출신의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시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4,5절). 이는 이미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찾아와 주장했던 것으로(1절), 이제 공의회가 개최되자 그들은 다시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관습과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주장을 따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대로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요한다면 사실상 복음 전도는 요원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바로 이방인 선교의 가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많은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6절).
둘째는 베드로의 변론 부분이다(7-11점). 베드로는 이때까지 적극적으로 이방인에 대하여 복음을 선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고넬료가의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토론이 무르익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선포한 것이다. 사실 베드로도 이 원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것을 확신 있는 구원의 원리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조차 기피할 정도였다(갈 2:12). 그러나 그는 이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체험하고 순수한 이신 득의의 구속 원리를 확신 있게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이신득의의 원리에 대해서는 롬 3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셋째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 보고 및 야고보의 결론적인 변론 부분이다 (12-21절). 즉 베드로의 변론이 끝나자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여행 중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와 이방인의 복음 영접을 증거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일한 구원의 은혜 안에 있음을 증거하였다. 그리고 이어 야고보가 결론적으로 이방인 구원의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며 예수님의 동생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의 발언은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행 12:17; 21:18; 갈 2:9). 이러한 야고보는 베드로의 고넬료가 방문 사건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임과 이방인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임을 증거하고 이어서 할례와 율법이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또한 그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화목과 일치를 위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 몇 가지 사항만 금할 것을 권면하였다. 물론 이것은 강제 조항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의 율법과 이방인의 관습이 완전히 조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서로 신앙의 덕을 세우기 위해 제안한 것이었다. 즉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먹는 것은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이것을 이방인이 행하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사랑의 교제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야고보는 서로를 위해 신앙의 양심으로 금하도록 권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야고보의 변론은 초대 교회로 하여금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게 하였고 이신 득의의 원리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로 확립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야고보의 변론은 공회로 하여금 바울의 이방 선교의 당위성 및 정당성을 강화하여 바울로 하여금 이후 전도 사역을 더욱 힘있게 감당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로 볼 때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 신자의 할례 문제로 개최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방 선교를 위한 성령의 역사요, 바울의 전도 여행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도 표출되었다시피 초대 교회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매우 미묘하고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이었던 바 이에 대해서는 특별자료로 깊이 상술하였으니 본서 서론 특별자료와 갈 서론 특별자료를 각각 참조하라.
15:4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 바울을 두려워하였다(행 9:26). 그러나 이제 안디옥 교회의 공식 대표로 방문하자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돌과 장로들은 이처럼 그를 극진히 영접하였다. 이는 이제 바울이 완전한 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그의 이방 전도 사역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즉 과거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되었으며 그는 이제 당당한 교회의 일원으로 또한 예수의 사도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방 전도 사역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행 9:1-19).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 -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이방 선교 사역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고 기뻐하는 자신들의 이방 선교 성과에 대한 영광을 자신들이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다. 이는 저들의 겸손한 자세가 돋보이는 장면임과 동시에 이방 선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반기를 드는 것과 같은 것임을 시사해 준다.
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 - 이들은 1절에서 언급된 '어떤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1절에 언급된 자들과 동일한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먼저 전파된 이래(행 9:31) 당시 교회 내에는 많은 유대인 개종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여전히 유대주의적 전통 사상에 사로잡혀 율법의 준수를 까다롭게 따지는 바리새파 개종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바리새파에 관해서는 본서 14권 신약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유대교 분파'를 참조하라.
15:6 사도와 장로들이. -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은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제기한 할례 문제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자 바울과 바나바를 보냈다. 그러자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사도와 장로들이 모였는데 이는 사도와 장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중대한 문제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 '이 일'은 1절과 5절에서 언급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가리킨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온 교회가 모였는데(12,22절), 이는 초대 교회의 첫 총회가 되었다. 이 회의의 의장은 야고보였고, 토론자는 사도들과 장로들과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할례를 주장한 유대인 개종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의 결과는 할례파의 패배로 끝났는바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의 교리가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또한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개념도 확정되었다(22-29절). 이로써 이 최초의 교회 총회는 성공리에 치루어졌으며 후에 기독교 종교 회의의 모범이 되었다. 본장 연구자료 참조.
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누가는 예루살렘에서의 회의를 이처럼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실상은 장시간 동안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저자인 누가는 본장에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만을 기술하고 복음에서 벗어난 자들의 변론의 내용은 간략하게 언급한 후(1,5절) 이로 인해 논쟁이 있었음을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가 일어나. - 격한 논쟁이 오고 간 후,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당시 교회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사도 베드로가 일어서서 결론을 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결정적인 말을 하였다. 언제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선두에 섰던 베드로는(행 1:15; 2:14; 3:4; 4:8)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대한 도전이 있자 이번에도 분연히 일어서서 복음의 진리를 설파한 것이다.
너희도 알거니와. - 이미 베드로는 고넬료의 회심 사건 때에 할례파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구원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행 11:1-18). 그리고 그때에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말에 수긍하였었다(행 11:18). 베드로는 바로 이 일을 가리켜 '너희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 - 이에 해당하는 '톤 로곤 투 유앙겔리우'( )를 직역하면 '좋은 소식의 말씀'이다. 이는 곧 '구원의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말씀을 가리킨다(롬 1:1-4).
15:8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 이 말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성령받은 사실을 가리킨다(행 10:44).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언급하면서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베드로는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는 할례파 교인들에 대해 하나님이 '마음을 보신다'고 대비시킴으로써 할례파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도 그의 설교에서 유대인들이 육체의 할례를 받았으되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실을 지적했거니와(행 7:51) 베드로도 동일하게 마음의 할례, 즉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고 있다(요 3:5). 실로 하나님은 의문(儀文)의 할례를 감찰치 아니하시고 심령을 감찰하신다(잠 16:2). 그러나 유대인들 중 대다수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무리였는 바(고후 5:12)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외형의 할례를 복음 위에 두려는 구습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 여기서 베드로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8절)은 할례와 같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을 보시고 저를 의롭다 칭하사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다(롬 3:28).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을 주신 하나님은 그것을 얻게 하심에 있어서도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이는 중대한 발언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벽이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롬 1:16;3:29). 즉 이로써 베드로는 유대인의 선민(選民)의식의 철폐를 촉구하는 것이다.
15:10 하나님을 시험하여. -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 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린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 자신도 욥바에서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마다한 경험이 있었다(행 10:1-16).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베드로는 할례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이방인들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경고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 즉 '믿음'을 보시고 받아들이신 이방인을 배척하거나 도리어 그들에게 율법의 멍에를 씌우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경죄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 여기서 '명예'에 해당하는 라이는 '쥐고스'로, 이것은 생기를 걸기 위해 소의 목에 없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이 부족(사 9:4)과 고역(신 28:48)을 상징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율법이 인간에게 시킬 것을 요구하는 규례와 의무를 상징하곤 하였다(갈 5:1). 본절에서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할례를 지칭하며, 넓게는 1절에서 언급된 모세의 법, 즉 율법을 지칭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 율법을 지킨다고 자랑하였으나 실상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자신들의 죄성(罪性)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롬 3:19,20). 그런데도 저들은 자신들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이제 이방인에게 지우려하고 있으니 이에 베드로는 그것이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믿노라. - 하나님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베드로의 결론의 말이다. 이 베드로의 만민 평등 사상은 바울 신학과 일치하는 기독교의 기본 신학이다(롬 1:16,17; 2:10, 11; 3:29,30; 5:15; 갈 3:27,2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어떤 이방인들도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한 자녀인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은혜로 동일하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의 선각자적인 통찰력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사실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체험하였고(행 10:34,35) 그 진리를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방인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 회의가 시작된 후 바리새파 중 어떤 사람들이 제기한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하여 시끄러운 변론들이 있었으나(7절 주석 참조)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분별 있고 위엄있게 발언하자 시끄럽던 회의장 분위기가 가라 앉았다. 즉 참된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서 옳지 않은 율법주의적 주장을 관철시키려던 자들은 침묵하게 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저들이 침묵하게 되었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그 진리에 따라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에 저들도 결국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바나바와 바울이. - 2절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에 앞서 언급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바나바가 앞서 언급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는 바울보다 바나바의 위치가 더 중요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울이 회심한 후 첫 예루살렘 방문 때에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을 기피하자 바나바가 중재하여 소개시켜 주었던 적이 있다(행 9:26,27). 이처럼 예루살렘에서는 바나바가 바울보다 신앙의 연조가 더 오랜 탓에 상대적으로 더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그러한 연유 때문에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이 회의에서 주도적인 발언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표적과 기사. -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이방 선교를 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말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 표적과 기사가 있었다고 중언하고 있다. 즉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이방 선교 사역이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였음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행할 수 있었던 여러 이적들을 내세워 역설하고 있는것이다. 행 14:3 주석 참조.
15:13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마 4:21)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눅 6:15) 가 아닌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이다(마 13:55).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큰 지도자였다. 이 야고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약 1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그는 본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의장으로 회의 진행을 맡았는 바(6절 주석 참조) 이제 의장으로서 논의의 최종적 결론을 내리려 하고있다.
15:14 시므온. - '시몬'과 같은 말로 베드로의 히브리식 본명이다. 마 16:17 주석 참조. 그런데 야고보가 베드로를 시므온이라 부른 것은 아마도 사도들 사이에서는 베드로가 본명대로 불리웠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유대인으로서 이방 선교에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하였으니. - 야고보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회심 사건과 관련하여(행 10장) 이방 선교의 장(場)을 열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베드로의 발언을 옹호하고 있다. 사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행 10:5,15,19,20),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으며(행 10:44-48),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였다(행 11:4-17). 야고보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상기시키어 베드로의 말이 정당함을 회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이방 선교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아울러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 야고보는 베드로의 변론을 옹호하면서 이방 선교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논증함에 있어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방 선교의 당위성과 정당성이 구약의 권위로부터도 지지받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선지자의 예언은 아모스의 말씀이다.
15: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 본절과 17,18절은 암 9:11,12의 인용이다. 그런데 정확히 자구적으로 일치하지 않고 약간 변형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야고보는 이 말씀을 당시 읽혀지던 아람어역이나 70인역(LXX)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이 예언의 내용은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장막, 즉 이스라엘 왕국은 비록 바벨론에 정복되어 무너졌으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것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신령한 메시아 왕국을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일으키리니. 야고보는 다윗의 장막이 무너졌고 이제 그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주께서 새롭게 일으킨다고 말함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율법 시대는 지나갔으며 복음의 시대, 즉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저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메시야 왕국 건설의 때가 도래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논중(7-11절)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으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기록하고 있다.
15:17 그 남은 사람들. - 히브리어 본문에는 '에돔의 남은 사람들'로 되어 있으나 70인역(LXX)에는 본문과 같이 되어 있다. 따라서 히브리어 본문을 따르면 에돔이 이방 땅이므로 에돔의 남은 사람들은 이방인을 지칭할 것이나 70인역 본문을 그대로 따르면 '남은 사람들’은 유대인 중 남은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야고보는 유대인들을 언급하기 위해 히브리어 본문을 따르지 않고 70인역이나 그와 유사한 아람어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뒤에 이방인이 언급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본절을 유대인들 중 남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본절 전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불문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될 자들에 관한 언급이 되기 때문이다. '남은 자'에 대해서는 사 10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은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도를 좇는 자들은 누구든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바(행 11:26 주석 참조)이는 이방인일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이다. 유대인들은 선민(選民) 의식을 가지고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도를 좇아 예수의 제자가 된 유대인들 중에도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이어서(행 11:2,3), 그들에게 자신들도 능히 지지 못하는 율법의 멍에를 지게 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1,5,10절)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미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방인들도 메시야 왕국의 일원으로 부르시고 계셨던 것이다. 본절을 통해야고 보는 바로 이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 히브리어 본문에는 '주를 찾게'가 '주를 소유하게'로 되어 있다. 그러나 70인역(LXX)에는 본문처럼 '주를 찾게'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재건된메시야 왕국이 유대인들 중 '남은 자'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을 위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야고보는 이를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5:18 예로부터…말씀이라. - 본절은 암 9:12의 내용으로 '예로부터'라는 말이 더 첨가되었으며, 어투에 있어서는 사 45:21과 유사하다. 따라서 야고보는 아모스(16절 주석 참조)와 이사야를 동시에 인용하고 있으며 그 인용도 매우 자유롭게 변형시켜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인용문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계시되었으며, 그러므로 이방인의 구원은 필연적인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의지에 속해 있는 것임을 나타내 준다.
15:19 내 의견에는. - 이 말에 해당하는 '에고 크리노'는 '내가 판단하다' 또는 '내가 판결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야고보가 단순히 자신의 사견(私見)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으로서의 권위에 입각하여 일단의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헬라어에서는 통상적으로 주어가 생략되나 화자(話者)의 말을 강조할 때에는 주어를 사용하는데 본문에서도 야고보는 '내가'에 해당하는 '에고'를 사용하여 자신의 말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야고보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를 통해 자신이 앞서 인용한 선지자의 말, 즉 구약의 말씀과 그 권위를 빌어 자신의 말이 최종적 판결이 됨을 은연중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괴롭게 말고. - 여기서 괴롭게 하다'는 말은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 준수, 특히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 말을 '멍에를 두게 하다'(10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즉 야고보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의 멍에를 지우게 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1,5절) 옳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15:20 다만…멀리 하라고. - 야고보는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워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되 단 신앙의 권면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사항만은 지키도록 권면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우상의 더러운 것. - 이것은 29절에 비추어 볼 때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말한다. 이 우상의 제물은 이방인들의 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먹으므로 신앙이 미혹되어 다시 우상 숭배로 되 돌아갈 염려가 있으므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후에 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각자의 신앙의 판단과 양심에 맡김으로 상당히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였다(고전 8:1-13; 10:23-33).
음행. - 학자들 간에는 이 조항이 다른 율법의 조항에도 나와 있는 점을 들어(출 20:14)이 음행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서 이 음행을 ① 영적 간음(Beza), ② 축첩 행위(Calvin), ③ 근친상간 등의 금지된 육체적 음행(Lightfoot), ④ 이교도와의 결혼(Teller), ⑤ 우상 숭배하는 신전에서 행하는 성 행위(Heinrichs), ⑥ 매음을 조장하는 포주(抱主) 행위(Salmasius), ⑦ 돼지고기를 먹는 것(Bentley), ⑧ 재혼(Schwegler)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금지 조항들이 모두 의식법과 관련이 있는 것을 감안하여 볼 때 본질의 음행은 일반적인 성적방종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이방인들의 풍습과 관련하여 성적인 면에서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여기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목매어 죽인 것과 피. - 짐승의 피를 먹는 것(창 9:4; 레 3:17; 17:10-14; 신 12:16,23) 은 이미 율법에서 금지된 조화이다. 그런데 목매어 죽인 것은 그 속에 피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는 것은 곧 피를 먹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 따라서 위의 두 항목은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한편 '피를 먹지 말라'하는 이유는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피로써 인간의 죄를 속하였기 때문이다(레 17:11,12),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레 17:10 주석을 참조하라.
15:21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 행 6:9에 보면 유대인들이 흩어진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그 지역에는 회당들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왔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역시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에 관해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러한 당시의 상황 하에서 이방인들에게 20절의 네 덕목을 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미처 저들이 이해하지 못할 사항도 아닐 뿐더러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의 멍에를 지워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문제의 일단락을 내리고 있다.
15:22-35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 및 통보
앞 단락(1-21절)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한 할례 강요 문제로 개최된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이 옳지 않은 것으로 의견을 모았던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루살렘 공의회가 최종 의결을 마치고 이를 안디옥 교회에 문서로 전달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 공회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할 자로 택하여(22절) 그들의 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과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에게는 지우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방인 성도의 할례 의무를 폐지하고 네 가지 금지 사항만을 지키도록 하기로 정하고 이를 기록한 공식 문서를 전달하도록 의결 조치한 바(23-29절), 바울 일행이 안디옥에 도착하여 그 결의 사항을 교회에 전하자 안디옥 교회가 매우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가운데 날로 흥왕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30-35절).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의사 결정 과정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사실을 몇몇 사람의 독단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지 않았다. '즉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문제를 교인들의 충분한 의견 수렴을 토대로 그에 합당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문제를 인간의 판단이나 이성에 의존해 결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하여 의사를 결정하였다(28절). 오늘날 교회에 분쟁이 있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몇몇 사람이 교회를 좌지우지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판단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의사 결정은 오늘날의 교회들에 큰 교훈을 준다 하겠다.
다음으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안디옥 교회에 요구한 네 가지 금지 조항은 이방인들이 다른 불신자들과 고민되게 하는 최소한의 징표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교제와 회복을 위한 긴장 사항으로 구원에 필요한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든 일에 있어 자유롭다. 그러나 믿음에는 반드시 그 열매가 있고,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성도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의회의 결의의 결과이다. 이 결정으로 긍정적인 결과는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간의 반목과 갈등이 해소되고 이방 선교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율법의 틀을 벗는 탈 유대교적 선언을 함으로 유대주의자들에게 더욱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방 선교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고 점차 복음이 세계로 확장됨으로써 성령의 역사와 섭리가 승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대로 행하는 교회는 반드시 교회의 부흥과 흥왕을 가져오고 하나가 된다는 교훈을 준다(엡 2:19; 히 2:11).
15:22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 한마디로 예루살렘 총회의 구성원 전체를 가리킨다. 즉 이는 당시의 총회에 모인 모든 참석자들을 가리킨다. 이로 보건대 야고보의 결론적 말이 총회의 의결로 공식 채택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모든 총회의 구성원이 '가결'에 참여하였다고 기록 있기 때문이다(26절).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 총회는 예루살렘 교회 교인 중 지도적 위치에 있는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대표자로 해서 안디옥에서 온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을(19,20절) 안디옥 교회에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23-29절). 이로써 할례파들이 제기한 율법 준수 문제(1,5절)는 일단락되었으며, 더불어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도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부수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 - 행 1:23의 바사바라고도 하는 요셉과 동일인이거나 그의 형제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그가 예언을 하는 선지자라는 것(32절) 외에는 달리 알려진 인적 사항도 전혀 없다.
실라. - '실라'(Silas)라는 이 이름은 그의 히브리 명이다. 바울 서신에는 그의 이름이 로마식으로 '실루아노'(Silvanus)로 언급되어 있다(살전 1:1). 그는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부터 동행하였으며(40절; 행 16:19-29; 17:4,10,14; 18:5), 베드로와도 같이 전도한 것으로 보인다(벧전 5:12). 또한 디모데와도 함께 전도한 사실이있다(행 18:5; 고후 1:19). 후에 고린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전승이 있기도 하나 확실치 않다. 실라에 대해서는 행 17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5:23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 - 본절은 역본들에 따라 다음과 같이 번역되고 있다. ① '사도와 장로와 형제들'(the apostels and elders and brethren, KJV). ② '사도와 장로되는 형제들'(the brethren, both the apostles andelders, RSV). ③ '사도와 맏형들'(the apostles and the elder brethren, RV), 이는 판사가 있느냐 생각되었냐에 따른 것으로 대개의 사본은 첫 번째 형태를 띠고있다. 그러나 한글 개역성경은 두 번째 것을 따르고, 있는데 편지 발신자가 교회 지도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아 이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보여진다.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 - 이 지역은 예루살렘 총회 공문이 수신되는 지역이다. 이로 보건데 할례 논쟁은 안디옥을 중심으로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안디옥은 수리아 지방의 수도이며, 길리기아는 다소를 수도로 하는 지방이었다. 행 6:9; 11:19 주석 참조. 따라서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수리아에 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있었을 것이며, 길리기아인들에게는 바울이 자신의 고향 다소에 머물러 있을 동안 전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행 9:30; 11:25).
15:24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 1절에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이 보낸 자들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구절이다. 사실 그들은 교회의 재가나 사도들의 검증도 받지 않고 구원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왜곡시켜 자의적으로 주장하였다.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 여기서 '괴롭게 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타락산'으로, 이 단어는 '어지럽게 하다'는 뜻이다. 즉 할례를 주장하던 유대 개종자들은 옳지 못한 주장으로 이방인 개종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이처럼 진리는 인간을 자유케 하며(요 8:32) 교회를 하나되게 하나 거짓된 진리는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따라서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물리적 폭력 뿐만 아니라, 말의 폭력도 사람을 괴롭게 하는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마음을 혹하게 한다. - 여기서 '마음'은 '프쉬카스'로 '영혼'을 뜻하며, '혹하게하다'는 '아나스큐아존테스'( s )로 '물건을(옮기기 위해) 꾸리다' 또는 '전복시키다', '타락시키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영혼을 타락시키다', '영혼을 망가뜨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곧 이방인 개종자들이 할례파의 주장에 동요되어 고민하다 결국에는 믿음을 저버리고 마는 것을 가리킨다.
15:25 사람을 택하여. - 여기서 택한 주체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이다(22a절). 그리고 그때 택함을 받은 사람은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이다(22b절).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 총회가 결의하여 선택한 문안(文案)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갔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의 공식 대표이며 그 결의문은 교회의 공식 입장인 것이다.
15:26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 사도들은 이 말 속에서 분명하게 바울과 바나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전도 사역이 이제 완전하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그 두 사람이 할례파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2절) 옳은 행위였음을 시사해 준다. 이로 보아 한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을 꺼려했으나(행 9:26) 이제는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동역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 사도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신실한 동역자로 인정하였다는 것은 이 표현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를 언급함으로써 두 사람의 안디옥 교회에서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할례를 주장하던 자들은 더 이상, 거짓된 말로 교회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치 가결하였노라. - 예루살렘 총회가 아무런 반대없이 한뜻으로 베드로와 야고보의 의견을 받아 들였고,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와 실라를 대표자로 보내기로 가결한 것을 가리킨다.
15:27 말로 전하리라. - 이 말은 본문의 편지 내용 외에 선택되어 보냄을 받은 유다와 실라가 직접 말로 모세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자들의 주장이 옳지 못한 것임을 설명해 줄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다와 실라가 하는 말도 총회의 결의문인 편지와 동일하게 권위있는 말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한편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 외에 유다와 실라를 같이 안디옥과 수리아, 길리기아에 보내(23절)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 내용을 말하게 한 것은 할례파들이 바울과 바나바만으로는 계속 자신들의 거짓 진리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기에(2절) 바울과 바나바를 보다 확고하게 공식적으로 지지하기 위한 조처로 보여진다. 예루살렘 교회는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신중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15:28 성령과 우리는. - 이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도와 장로들에 의해 의결되었음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즉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는 단순히 인간의 자의적인 결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의한 결의였던 것이다.
이 요긴한 것들. - 야고보가 말한 4가지 덕목(20절)을 지칭한다. 이것을 '요긴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4가지 조항이 반드시 지켜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사도와 장도들은 자신들이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결한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채택되었다고 함으로써 그 4가지 조항이 신적인 명령임을 암시하며 더욱 마땅히 지켜야할 조항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요긴한 것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성도들의 덕목이긴 하나 반드시 구원의 조건들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행함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행 4:12; 롬 1:17).
가한 줄 알았노니. - 가장 중요한 4가지 금지 조항 외에는 그 어떤 율법의 짐도 이방인에게 지우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도 할례에 대한 논쟁이있었으나(5-7절) 결국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모세의 율법 준수는 성도의 마땅한 생활 규범일 뿐 구원의 조건이 아님이 선포되었으며,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취된다는 구원론이 확정된 것이다.
15:29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 베자 사본(D)에는 본절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결의된 교회의 결정사항은 반드시 실천되어져야 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면 신앙이 성장하고 실족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평안함을 원하노라. - 이에 해당하는 '엘로스데'( )는 '강건할지어다'는 뜻으로 우리식으로 하면 '안녕히 계십시요'(공동번역)라는 말이다. 이를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샬롬'(Shallom), 즉 '평안할지어다'가 된다.
15: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 23절부터 29절까지는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을 사도와 장로들이 편지로 쓴 내용이다. 따라서 본절은 22절에 연결된다. 여기서 '저희'는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와 실라를 지칭한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전송을 받는 가운데 작별 인사를 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간 것이다.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에 도착한 즉시 안디옥 교회와 그 주변의 성도들을 소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공문은 안디옥 뿐 아니라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의 성도들까지도 수신자로 삼고있으므로(23절) 그곳 사람들도 모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안디옥에 성도들이 소집된 가운데 예루살렘 교회의 공문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예루살렘 교회의 공문을 안디옥 교회에 모인 성도들 한 사람 한사람이 모두 돌려 보면서 읽기는 무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목청 큰 대표자가 공문을 낭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낭독된 편지의 내용을 듣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예루살렘 공문을 가리켜 '위로한 말'(테 파라클레세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권면의 말'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 아무튼 성도들이 공문의 내용을 듣고 기뻐한 것은 안디옥과 그외 지역의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개종자 중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그 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즉 그들은 할례파들이 율법의 멍에를 자신들에게 지우는 것을 걱정했던 것같고, 더 지혜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호도(塗)하지나 않을까 염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할례파 주장이 그릇된 것이며 단지 4가지 금지 조항만 잘 지키라고 권면하자 기뻐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과 다투기까지 하였으니(2절) 바울과 바나바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기를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권면의 말은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에 더욱 충분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공문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 선지자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행 11:27; 13:1의 주석을 참조하라.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도자라 불리운 까닭과(22절) 중책을 맡고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권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시사해 준다.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은 편지를 통해 유다와 실라가 편지의 내용 외에 직접 말로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 내용을 설명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27절). 그리고 그같은 전갈을 따르기라도 하듯 말에 능한 선지자들이었던 유다와 실라는 여러 가지 말로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을 권면하였다. 여기서 '권면하다'는 것은 '위로하고 가르쳤다'는 뜻으로, 할례 문제로 인해 상했던 형제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그러한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더욱 확실하게 가르쳤다는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신앙에 굳게 서도록 지도한 것이다.
15:33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받고. -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 교회에서 얼마 간 머물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와 가르침에 안디옥의 형제들은 마음의 평온을 얻고 더욱 굳센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을 되찾고 여느 때처럼 정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활동하자 유다와 실라도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의 형제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장면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선교의 전진 기지인 안디옥 교회의 긴밀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이방의 교회에 문제가 생기자 이방의 형제들은 즉시 예루살렘에 대표자를 보냈고(2절)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즉시 회의를 열어(6-7절) 그 회의의 내용을 이방의 형제들에게 보냈다(23절). 그리하여 이방의 형제들은 그 공문을 받고 기뻐하며(31절) 예루살렘에서 온 형제들을 환대하다가 환송하여 평안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은 교회 간의 화목한 정경을 느끼게 해준다. 이는 정녕 성령의 인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거짓 진리를 가르친 자들은 교회를 어지럽히려 했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그 문제를 통해서 교회들이 더욱 하나되게 역사하신 것이다.
15:34 주요 사본인 시내(א), 알렉산드리아(A), 바티칸(B) 사본 등에는 본절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에브라임 수리아어 사본(C)이나 베자 사본(D) 등에는 '실라는 저희와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란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처럼 실라가 안디옥에 남았다고 보는 사본들은 아마도 실라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 동행했다는 사실(40절)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상 유다와 실라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가르치며 전파하니라. - 유다와 실라가 떠나가고 난 후 비록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이지만(36절)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해서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을 가르치고 또 아직 주를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즉 두 사람은 할례 문제가 일단락되자 다시 평상시처럼 쉬지 않고 주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바울 및 바나바와 함께 활동했다는 '다수한 다른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많은 선지자와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행 13:1).
15:36-41 바울과 바나바의 분열과
제 2차 전도 여행의 시작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가 요한의 동행 여부를 놓고 서로 견해 차이를 보여 결별하는 장면이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 선교를 공식 인정받은 바울(6-21절)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제1차 전도 여행 당시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돌아볼 것을 바나바에게 제의한다(36절). 사실 안디옥 교회는 이제 어느 정도 완전히 자립할 수 있는 데까지 성장했다. 반면 다른 지역 교회들은 매우 미약하여 항시 위험한 상태였다. 이에 바울은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바나바에게 제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제 2차 전도 여행 계획은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그들의 조력자로 추천하면서(37절) 문제에 부딛히게 된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골 4:10)로 제 1차 전도 여행 때 선교사역을 도왔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여행 도중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었다(행 13:13).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마가 요한을 불신하게 되었고 바나바의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38절). 결국 두 사람은 이 일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게 되는데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바울은 실라를 수종자로 택하여 각자 다른 길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된다(39-41절).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이다. 두 사람은 모두 선교에 대해 뜨거운 열정과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족하여 결국 결별하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즉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는 냉철한 성품을 지녔지만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바울의 차가운 성격과 형제의 허물을 감싸주는 포용력과 온유함을 지녔으나 공사를 확실히 구별하지 못하는 바나바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마찰을 일으켜 결별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 분쟁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상대방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움으로써 발생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먼저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주장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보다 좋은 결과를 돌출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둘째는 인간의 부족함마저도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이방 선교라는 중대한 과업을 위기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두 사람의 결별이 그것 때문에 이방인 전도사역이 지연내지 중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 전도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결과적으로는 더욱 강력히 진행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결별하였으나 새로운 동역자를 만나 더욱 전도 사역에 정진하게 된다. 즉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한 지도자이자 로마 시민권을 갖고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라(행 16:37)를 동역자로하여 선교에 큰 도움을 받았으며,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동역자로 삼고 그를 훌륭한 선교자로 성숙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훗날 바울은 헌신적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던 마가 요한과 결과적으로는 화해하게 되고 마가 요한은 바울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딤후 4:11; 골 4:10; 몬 1:24).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와 연약함까지도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능력의 소유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부족함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 헌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5:36 수일 후. - 이 기간이 어떤 기간을 지칭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유다와 실라가 떠난 후의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Lenski). 그리고 '수일 후'란 말로 미루어 볼 때 이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던 것 같다. 즉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곧 이방 전도 여행을 재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구원의 말씀 전파에 대한 식지않는 사도 바울의 열심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우리가…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목적은 기존의 전도지를 다시 다지려는 목회적 차원의 배려에서 시작되었다. 즉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의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고(1-35절)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서 있는가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양떼들을 염려하는 바울의 세심하고도 치밀한 목회자적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그러한 계획을 더 크게 확장시키시어 유럽의 마게도냐까지 이르도록 바울을 인도하셨다(행 16:6-10). 즉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에 전파한 지역을 다시 다지려는 여행을 계획하였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걸음 더 나아가 드로아, 빌립보, 데살로니가를 거쳐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에 전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복음은 소아시아를 지나 지중해를 넘고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이다(행 16:11-18:23).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 경로에 대해서는 행 13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15:37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 바나바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동행시키려는 사람의 문제에 봉착하였다. 즉 바울은 1차전도 여행시 중도에서 포기한 적이 있는(38절; 행 13:13) 마가 요한과 동행하기를 거절하였으나 바나바는 끝내 동행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인 마가를(골 4:10)마다 못했던 것 같으며, 또 천성적으로 관대한 그의 성품에(행 9:27; 11:25) 바울처럼 단호히 거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또 다시 마가 요한으로 인해 중도에 전도 여행이 차질을 빚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동행을 거부한 것 같다. 한편 마가는 1차 전도 여행시 밤빌리아에서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행 13:13) 그가 이후에 계속 예루살렘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후 바나바가 불러 이때에는 안디옥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마가 요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5:38 바울은…옳지 않다 하여. - 본 절에서 바울이 마가라 하는 요한을 동행시키기를 기절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 당시 중도에서 포기하고 되돌아간 자라는 것이 바울의 의견이다. 즉 바울은 마가가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간 것과 관련하여 마가의 신실성이나 소명 의식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하여 그가 일관성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서 그와의 동행을 반대하고 있는 듯하다.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 바나바는 과거에 바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었던 자이다(행 9:27; 11:25). 그러나 마가와의 동행 문제에 직면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심히 다투고 결국은 갈라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바울의 입지가 예루살렘 총회 이후에 강화되고 그로 인해 감정적 대립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성령이 충만했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던(26절) 그들이 누가 크냐를 놓고 감정적 대립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오히려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냉철하게만 대한 바울의 관대성 없는 강직성으로 인해 바나바와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갈라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로 여겨진다. 한편 이렇게 결별한 후 바나바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 두 사람이 재회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마가가 후에 다시 바울과 합류하게 되고 바울로부터 유익한 일꾼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바울 서신에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골 4:10; 딤후 4:11; 몬 1:24). 아마도 후일 마가는 자신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의 절친했던 관계가 나빠진 것 때문에 자숙하고 좋은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 같고, 바울도 차차 나이가 들면서 원숙하게 되어 관대성을 가지게 된 것같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는 그 후에도 바나바의 이름 이몇 차례 언급되고 있다(고전 9:6; 갈 2:1,9,13; 골 4:10). 그리고 바울은 절친했던 친구 바나바를 못내 아쉬워했을 것이다. 한편 전설에 의하면 바나바는 만년에 자신의 고향인 구브로 섬(행 4:36)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전설은 그가 이태리밀라노의 감독이 되어 많은 일을 했다고도 하나 전설에그칠 뿐 확인할 길이 없다.
바나바는…구브로로 가고. - 바울과 결별한 뒤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인 구브로로 갔다(행 4:36). 이후로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한편 그가 구브로로 간 것은 그곳이 1차 전도여행의 첫 방문지였는 데다가(행 13:14) 자신의 고향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행 11장 연구자료 참조.
15:40 바울은 실리를 택한 후. - 마가를 거절하고 그로 인해 동역자인 바나바와 결별하게 되어 동역자가 없게 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때에 만나게 된 실라(22절)를 동역자로 선택하였다. 이때 실라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어 일을 마친 후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갔다가(33절) 바울의 부름으로 안디옥으로 다시 온 것으로 추측된다. 실라에 대해서는 행 17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형제들에개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 이 말은 바울이 안디옥 교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전송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이를 '주님 은총을 비는 교우들의 인사를 받으며'로 번역하고 있다. 본서 저자 누가는 비록 바울이 바나바와는 결별하였지만 그가 행한 위대한 전도 사역에 비중을 두고 바나바의 구브로 행(行)과는 달리(39절) 바울이 교인들의 축복 속에 독자적인 전도 여행을 떠났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 바울은 북쪽의 육로를 통해 안디옥을 중심한 수리아 지방과 자신의 고향이 있는 길리기아 지방을 먼저 방문하였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곳 지방에도 할례 문제가 있어서(23절 주석 참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구브로는 방문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바나바가 구브로에 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9절). 아무튼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에 나섰는데 처음 그의 계획(36절)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행 16:6) 확장되어 장대한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거보(巨步)가 되었다.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의 여정에 대해서는 행 13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연구 자료
예루살렘 공의회(The Conference of Jerusalem)
행 15:1-21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명실 공히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종교 회의였다.
한편 신학적으로는 이 공의회는 이제 구속사(救贖史)가 우리 주 예수 안에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갓 이전되었던 과도기였던 초대 교회 시대에 있어서 최대의 현안 문제였던 구약 율법에 대한 신약 성도의 자세 문제를 최초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정립한 회의였다.
즉 이 공의회는 표면적으로는 구약 율법 중에서도 의식법 그리고 의식법에서도 극히 일부에 속하는 할례(割禮)를 신약 시대 기독교에 개종한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시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를 가렸던 단순한 회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실은 구약 율법 전체에 대하여 유대인 출신 및 이방인 출신 성도를 막론한 신약 성도 모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구원은 시대를 불문하고 오직 믿음으로써만 얻는 것이며, 의식법은 물론 도덕 및 시민법까지 포함한 전 분야의 구약 율법이 신약 복음으로 부분적으로는 성취되고 부분적으로는 승화된 신약시대에는 구약 율법에 자구적으로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초대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결정한 회의였다. 그리하여 이 회의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는 공식적으로 구약 율법에 대한 신약 성도의 준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가장 심각했던 장애물 하나를 제거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기독교의 세계 전파에 있어 확고한 기틀을 다진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이 중차대한 의의를 갖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초대 교회 당시의 역사적·신학적 배경과 이를 반영한 사도행전을 비롯한 서신서의 제반 본문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구약 율법과 신약 성도의 관계를,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1. 공의회 소집의 배경
행 15:1-5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되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제 1차 전도 여행(A.D. 47-49년)을 끝마친 뒤 자신을 이방 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Church of Antioch)로 돌아와 머물 무렵이었다. 이때에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안디옥 교회에 유대인 출신 성도로서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로 믿기는 했으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막론하고 여전히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소수의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구원을 위해서는 구약 율법을 준수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회중에 드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그 일환으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들의 가르침은 이방인 선교 사역을 전적으로 담당하면서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의 준수가 인간 구원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며 더욱이 이제 구약 율법이 예수를 통하여 신약 복음으로 부분적으로는 성취 종료되고 또 부분적으로는 승화 확장된 신약 시대에는 구약 율법의 자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던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과 충돌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양자 간의 논쟁이 격해지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및 몇 사람을 당시 초대 교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교회에 파견하여 이 문제의 공식적 해결을 요청함으로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공의회 소집의 배경 뒤에는 근원적인 신학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 즉 초대 교회 시대는 구속사의 시대(時代)가 예수의 초림의 약속을 직·간접으로 보여 주는 율법과 예언을 중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행된 구약 시대에서, 이제 구약의 성취로 초림하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께서 새로이 주신 재림과 천국 구원의 새약속을 중심으로 전 세계 만민 중에 택한 성도 모두를 통해서 진행되는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일종의 과도기(過渡期)였다.
그리하여 이 당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며 성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속성과 점진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구속사의 섭리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미비된 결과, 심지어 사도들조차도 구약율법과 신약 복음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바른 관계 등에 대하여 명확한 신학적 이해를 아직 갖고 있지 못했었다. 여기에다가 외적 체제로만 볼 때에는 초대 교회 당시의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유일한 종교였으나 기실은 구약을 왜곡 변질시켰던 유대교(the Judaism)가 초대 교회에 더욱 큰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기도 하였다.
이 유대교는 비록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종교였으나 태초 아담의 때부터 계승된 순수한 정통신앙은 아니었다. 즉 그들은 B.C. 5세기 무렵부터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인 순수한 구약 전체가 아니라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취하여 이를 왜곡 해석하고 거기에 유대인 자신들이 인본주의적 전승(tradition)까지 가미하여 여러 가지 그릇된 교리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분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려는 구원(救援)은 유대인 자신들만을 중심으로 한 이 지상에서의 정치적 승리와 평화이며 이런 구원을 얻는 길은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메시야가 와서 이루어 줄 것을 고대했다. 이런 잘못된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참 메시야(Messiah)로서 구약의 성취로 오사 구속 사역을 성취하고 새로이 신약을 주셨음에도, 주님이 그들의 착각과 달리 세계 만민 중에 택한 모든 자들을, 오직 믿음을 통하여서,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새 천국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구원을 주시겠다고 선포하시자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메시야 예수를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금 예수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선포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금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하는 무리들을 무조건 유대교를 문란케 하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정치·종교적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실은 기독교가 구약 전체를 온전히 계승한 신약을 믿음으로 결국 정통성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구약을 부분적으로만 취하여 그 의미를 곡해한 유대교도들이 기독교를 구약 특히 모세 율법을 모독하고 나아가 하나님까지 모독하는 종교로 매도하고 핍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소위 유대교적 오류의 영향을 미처 탈피하지 못한 일부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유대교적 민족주의와 율법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 출신 성도들의 할례 실시 등을 고집하며 교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심지어 이보다 조금 전에는 즉 A.D. 30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태동된 직후 소위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이 있기까지 한 10년 동안은 사도들에게 있어서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조차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행 10:1-11:18). 그러나 이제 신약 시대에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전 이방인 만민에게로 확장되는 것만은 일단 분명해진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방인 성도, 나아가서는 유대인 출신 성도까지 포함한 신약 시대의 전성도가 의식법 관련 분야 뿐 아니라 전 구약 율법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최대의 현안 문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이 문제가 구약적 관점에서의 선민 이스라엘의 회중에 참여하기 위한 결정적 증표요 또한 구약 율법 중 가장 초보적이고 가시적 율법 조항이었던 할례의 법을 놓고서 이방인 출신 성도에 대한 할례 시행 문제로 표면화된 것이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한 신약 성도의 구약 율법에 대한 자세 문제는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께서 구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사 공생애를 수행하실 때부터 시작하여 이제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새로이 신약을 주시고 승천하신 이후 내내 문제되어 왔었다. 더욱이 이제 사도 바울 등의 본격적인 이방 선교 사업으로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대거 초대 교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 당시에는 초미의 현안이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결국 신약과 구약의 근본관계라는 본질적이고도 포괄적인 구속사적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 문제를 분명히 규명해야만 이방인 선교에 임하는 초대 교회의 기본 입장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같은 시급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 및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되게 된 것이다.
2. 공의회의 진행 과정
공의회 진행 과정은 행 15:6-21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토의는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개최되기 전 예비 회의에서 예수의 수제자로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수장이기도 하였던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리고 이방인의 대사도였던 바울과 바나바 간에 먼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공의회는 이 예비 회의에서 결의된 사실에 대해 변론을 한 뒤 그것을 교회의 공론(公論)으로 인정하기 위한 회의였던 것이다.
공의회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다(6절). 그리고 얼마간의 변론 끝에 1차적으로 베드로가 최종적으로 이제 곧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발표할 예비 회의 결의 내용의 정당성을 입중하기 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교리를 다시 한 번 변증하였고(7-11절), 이어 바나바와 바울이 자신들의 이방 선교사역 시 겪었던 경험담에 대한 증언(12절)과 이 회의를 주최했던 주의 형제 야고보의 공의회 결정 사항에 대한 발표(13-21절)로 공의회는 끝났다.
3. 공의회의 결정과 그 신학적 의의
공의회의 결정 사항에 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막론하고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주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방인 성도에게 율법의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의 발의(7-11절)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자'는 야고보의 결의(19절)로 확정되었다. 이는 결국 이방인 출신 성도뿐만 아니라 유대인 출신 성도까지 포함된 신약 성도 전체는 할례 등을 포함한 구약 의식법을, 나아가 구약 율법 전체를 문자적으로 준수치 않아도 된다는 대원칙을 확정한 셈이었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대로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막론하고, 그리고 신 ․ 구약 시 대를 막론하고 율법 준수가 구원의 근본 조건이 아니라는 신학적 대원칙이 근본적으로 깔려있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는 분명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구되던 이런 율법 조항의 준수는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성도에게 요구되지 않는다는 구속사의 시대 경륜에 의한 구약 율법의 문자적 준수의 폐기라는 원칙이 전제된 것이다. 이제 이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태초 인간의 타락 직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법을 세우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즉각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일단은 예수의 초림과 구속 사역의 성취를 주 내용으로 하는 옛 약속 즉 구약(舊約)을 주셨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예수께서 성육신 초림하실 때까지의 구약 시대의 역사가 진행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성육신 초림하셔서 구속 사역을 일단 성취하신 후에는 새로이 예수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세상 끝 날 예수가 다시 재림하셔서, 그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으로서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을 성자 예수께서 새로이 세우게 하셨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예수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기 전에 우선 구약 시대를 두시고 구약 시대에 신약 시대를 직 ․ 간접으로 약속하는 여러 예언과 예표를 그리고 특히 구원의 온전한 계시인 복음(福音)이 있기 전에 먼저 그 복음이 필히 요청됨을 보여 주는 율법(律法)을 먼저 주시고자 하셨다. 이는 훗날 마침내 예수가 이 모든 것을 성취하고 또 복음을 온전히 계시하셨을 때 우리 완악한 인간들이, 주님이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에 대한 약속으로 새로이 주신 천국 구원의 새 약속도 필히 성취될 것을 보다 더욱 쉽게 확신하고 또한 복음도 더욱 온전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전 민족을 대표하여 이런 구약의 약속과 율법들을 먼저 받아 보존할 자들로서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구분하시고 예비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약 율법은 1차적으로는 구약 시대 성도의 생활 기준으로 본질적으로는 신약의 복음 계시 이전의 그리고 예수의 구속 사역과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음을 보여 주는 복음의 필연성을 역으로 확증하기 위한 또 한 측면의 계시로서 주어진 것이었다. 이런 구약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 행위의 선악 기준을 제시하는 도덕법(moral law), 선민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시민법(civil law),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의 구속 사역의 여러 측면을 예표 하는 가운데 여호와 백성으로서의 정결과 여호와와 백성의 정당한 관계 수립과 유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제사나 성결법 등의 의식법(ritual law)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을 모두 성취하시고 신약을 주시며 복음을 주신 후에는 의식법 분야는 그 예표성이 성취됨으로 그리고 도덕 및 시민법은 보다 더 승화된 복음의 법으로 대체됨으로 종료된 것이었다. 즉 분야별로 그 종료의 양상은 달랐지만 어쨌든 구약 시대 ․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소위 모세 율법으로 불리우는 구약 율법 자체(Old Testament law, law of Moses)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복음의 법(Gospel law)으로 대체되었음으로 해서 시효 종료된 법이었다.
이에 성령의 지도를 받은 초대 교회 사도들은 신약 시대 성도들의 구약 율법의 문자적 준수의 불필요성을 교회의 공론으로 정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공의회의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이방인 출신 성도들만의 할례 의식의 이행 여부에 대한 결론인 것 같으나 기실은 이와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 곧 신약과 구약의 근본 관계 전반에 대하여 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한 것이었다.
둘째 이방인 성도는 구약 율법 더욱 정확히는 구약 시대의 의식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대원칙을 깨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회의 대단합과 불신자들에게 교회의 건덕을 일하여 그 행위가 현저하게 유대인 출신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정하게 보이는 것으로서 혐오감을 주는 행위, 곧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 이방인들은 자연스럽게 행하는 풍습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보기에 음란하게 보이는 행위들, 목매어 죽인 것과 퍼를 먹는 행위들은 금할 것을 결의했다. 이는 그 행위 자체는 의식법과 관련된 구약 율법 이외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 볼 때 선 . 악과 직접 관련이 없는 아디아포라(adiaphora)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이를 특별히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금하고 있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악해서라기보다는 이방인 출신 성도들과 유대인 출신 성도 간에 마찰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아디아포라'에 관해서는 롬 1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4. 공의회의 역사적 의의
예루살렘 공의회(The Conference of Jerusalem)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공식 공의회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기독교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유추적으로 어떤 신학적 결론을 내릴 수 있기는 하나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어떤 사실들을 규명할 때 이 같은 공의회를 통해 교회의 공식 입장을 정리하는 관례를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A.D. 325년에 열린 제 1회 니케아 회의는 그 유명한 삼위 일체 논쟁을 다룬 회의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종교회의가 있었는데 예루살렘 공의회는 그 모든 기독교 종교 회의(基督敎 宗敎 會議)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으로 초대 교회의 이방 선교 사업이 기독교의 정통성을 공고히 한 가운데에 더욱 활성화되었다. 만약 신약 시대에도 이방인들의 개종의 조건으로 할례와 같은 구약 의식법을 요구했었더라면 그것은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유대인화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기독교는 유대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유대인의 민족 종교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이방인은 물론 전 성도에게 구약 의식법 및 모든 율법 조항의 문자적 준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공의회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민족과 문화를 떠나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제 신약에 이르러 세계 만민에게 구원의 복음이 확장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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