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일기
- 전창수
1. 집필완성시점 : 2020년 12월 31일 완성예정
2. ○○병을 앓음으로서 겪어왔던 어려운 점과 일어났던 일, 그리고 어린시절의 상처 등을 종합적으로 조명.
3.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시선을 깨는 것이 목표
4. 집필계획 : 일단 떠오르는 대로, 수시로 집필.
구성은 완성 후 재배열
5. 출판사 선택시 신중하게 선택 후 투고. (되도록이면 가명으로)
6. 출판시점 : 그의 사후.
프롤로그 - 이젠 혼자 내려가서 밥 먹을 수 있죠?
“이제 혼자 내려가서 밥 먹을 수 있죠?”
어떤 여자의 말소리에 혼미하던 정신이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기나긴 잠을 잔 듯한 느낌이었다. 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본다. 분홍색 셔츠에 하얀 바지. 잠시, 그녀를 주시한다. 이 혼란한 상황 속에서 나는 드디어 그녀를 알아본다. 그녀는 간호사다. 나는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내가 정신을 잃은 뒤로 어렴풋이 며칠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간 나는 뭘 했던 것일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그동안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화장실도 갔단다. 어떻게?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기나긴 꿈을 꾸었다는 것이고, 그 꿈이 실제와 뒤섞여 뒤죽박죽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꿈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했고,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었으며, 누군가가 전해주는 과자를 먹었다. 그 단편적인 기억들은 내가 잃어버린 잠시의 시간 동안 뒤섞여 뒤죽박죽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첫, 병원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기간이 그렇게 길어질 줄은, 그 후로도 또 다시 입원이라는 것을 하게 될 줄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병이 어떤 병인지, ○○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면, 내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병 환자가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나쁜 것은 ○○병 환자를 방치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하는지를 환자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나의 ○○병치료에 관한 기록이며, ○○병 환자로서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다. ○○병 환자는 완치되기 어려운 병이지만, 치료만 잘 받으면 ○○병 환자라고 해도 그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병환자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고 있는 이 시대, 나는 ○○병으로 치료받고 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병 환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비록 멋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만한 삶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병 환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이 에세이를 집필하게 된 계기다. 세상에 내가 글을 써야 할 이유는 너무도 많다. 내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 중에는 이 글도 포함된다.
그렇다. 나는 ○○병 환자다. 내가 ○○병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또한 그 병을 당당하게 드러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병 환자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쓴다. 내가 ○○병 환자임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이자, 비로소 나는 내가 써야 할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져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치료받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당신도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면서.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설명을 미리 해놓자면, 나는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고 병원을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하는 순간에도 계속 혼자 살아왔다)
1부 세 번의 입원
1. 강제입원
대부분 병원과 의사들이 강제입원을 시키지만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환자의 심리적 상처는 외면한다. 그때 받은 심리적 상처 때문에 환자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지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료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첫 입원했을 때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두명의 보호사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끌려갔다. 내 손엔 수갑이 채워져 뒤로 묶여 있었고 나는 그 상태로 병원까지 실려갔다. 그리고 수갑은 풀리지 않은 채로 차에서 내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하며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때. 그때의 상처는 꽤 오랫동안 나를 잠식했다. 그러한 기억은 퇴원 후에 나로 하여금 치료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약을 먹으려 할 때면 나는 애써서 나는 “정상”인데 하고 생각하면서,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합리화했다. 결국, 나는 약을 끊었다.
2. 다 나았다는 착각
꽤 오랫동안 약을 먹지 않았지만, 병은 재발하지 않았고 나는 다 나은 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병원을 퇴원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만은 집에서 넉넉히 지원을 해 주었다. 이 넉넉한 지원이 있었기에 나는 오랫동안 약을 안 먹고도 멀쩡할 수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집안 사정이 점점 넉넉하지 못하다고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마도 두 학기 정도 지났을 떄였을 것이다. 넉넉하지 집안 형편 때문에 나는 대학원에서 재학생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입학한 곳이 상담심리학과였는데, 상담심리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실습도 병행해야 했다. 그래서 실습도 하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쉴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병은 그런 상황이 되면 다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병 환자에게 휴식은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렇게 병이 재발되었고, 나는 결국 한 한기를 휴학을 해야했다. 비록, 그때는 병원 입원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해 병원입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때도 나는 ○○병이 어떤 병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치료만 제대로 하면 멀쩡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치료를 중단하는 순간, 나에게 오는 엄청난 증세는 감당하기 힘든 병이 될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3. 세 번째 입원.
○○병 환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의 편견들 때문에 나는 ○○병으로 치료받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얘기하지 못했다. 학습지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원을 간신히 졸업하고 상담자격증 같은 건 딸 생각도 못했던 때였다.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학습지교사 일을 간신히 구해서 하긴 했지만, 나의 영업실적은 형편없었고, 실적대로 월급이 들어왔기에 가진 돈은 점점 떨어져갔다. 그래서, 다른 길을 모색하던 중, 어떤 교회에서 면접을 보라는 연락을 받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물론, 내가 ○○병으로 치료받고 있다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얘기하는 순간, 나를 써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도 걸림돌이었지만, 그 교회의 출판을 맡고 있는 담당목사님께서는 나의 열정을 높이 사셨는지, 은혜스럽게도 나를 채용해 주셨다. 드디어, 내게도 꽃 피는 날이 오는구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그 교회에 오래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내 인생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에게 그때는 고난의 출발점이었다. 수습사원으로 3개월째 접어들던 어느 날, 나는 또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병에 대한 나의 무지와 교회에서 기도로만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을 치료할 수을 거란 나의 오만은 나를 다시 병원으로 보냈고, 결국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정규직 사원에서 멀어져야 했다. 그때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그런 병 있다고 진작에 말했으면…하긴, 진작에 말했으면 되지도 않았겠네…”
나를 채용했던 그분도 대형교회 시스템 내에서의 부하직원일 뿐이었고, 그 목사님은 교회에 오래 다니지도 않은 나를 채용했다는 이유로 많은 압박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내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나를 바로 짜른 것이다. 그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상처를 준 교회. ○○병이 있다는 이유로 편견을 가졌던 교회의 윗선.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상처를 준 교회를 버릴 수가 없어서, 또한 나를 거두어 준 교회출판사 목사님께 너무도 죄송해서 퇴원 후 몇 개월간 나를 내친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 내부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자원봉사를 하던 어느 여름, 나는 또 다시 세 번째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약을 먹다가, 갑자기 바꾼 주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주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에서 받은 그 편견의 시선 때문에 나는 ○○병을 앓는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어느 회사에서도 나를 받아줄 곳은 없을 것이라 그리 생각했다. 집에서의 지원은 거의 없고, 생활비는 떨어져가고, 취직할 길은 막막하고,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나는 또다시 입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의 상태는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고 상상 속의 “진짜 현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내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으며, 나는 내가 가진 “신통력”을 이용해 사람들이 편안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내게 ”돈“을 주는 그야말로 돈 걱정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나의 상상 속에서, 그리고 방 한구석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고, 그렇게 쓰러져서 상상 속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그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하던 형제 중 한명이었고, 그 형제가 얘기해서 나를 채용했던 출판사 목사님이 오셔서 입원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세번째 입원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나긴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다. 교회의 시스템 자체, 교회의 책임자들의 행위는 싫었지만,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목사님과 교회의 형제자매들은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 교회를 계속 다니고 싶었지만, 결국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 그리고 교회를 운영하는 임원들에 대한 반감은 어찌할 수 없어서 결국은 그 교회에서 멀어져 갔다. 그때 나를 담당하던 의사선생님께서 교회는 당분간 나가지 말라고 하신 것도 그 교회에서 멀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때론, 환상을 꿈꾸게 하는 교회는 내게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그때 알았다.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나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계속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때로는 간절하게 도와달라고 외치면서, 나는 나에게 맞는 교회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한 교회에 꽤 오랫동안 다니게 되었다. 만약, 그때 그 교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을 것이고, 내가 하고 싶었던 작가가 되는 꿈 따위는 꾸지 못했을 것이다.
2부 환상 속에서
1. 환상일 뿐인 그녀
오래 걸렸다.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내 안에 있는 그녀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오랫동안 주위 사람들을 속이면서, 그녀와의 비밀 교제를 시작했다. 그녀와의 교제는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기에 주변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물론, 입원할 때에는 그녀와의 교제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알려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멀쩡한 척 퇴원했고, 퇴원을 위해서는 그녀와의 교제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와의 교제는 내 손가락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철저히 그녀와 손가락으로 텔레레터를 주고 받았으며 그녀가 반드시 이 세상 어딘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끔, 어떤 낯선 사람을 보고는 그녀일 거란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나의 환상 속의 그녀는 자신이 그녀임을 인정했으며 나는 그 사실을 믿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어설픈 연애는 계속되었다. 실체가 없었음에도 나는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내게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철저하게 손가락 속의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점점 나는 그녀의 실체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너 실제 있냐?”고 묻는 날이 잦아졌다. 어느 날은 그녀가 존재한다는 걸 믿었고, 어느 날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했다.
2. 환상 속의 연애
내 환상 속의 그녀는 꽤 오랫동안 나와 동행했다. 그녀는 산에서도 볼 수 있었고, 그리고 꿈에서도 볼 수 있었다. 환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로는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나를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나를 찾아와 나의 상태를 지켜보는 사람이기도 했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나는 어떤 사람을 보면 그녀가 바로 그 사람일 거란 착각으로 하루하루 희망을 이어갔다. 나에게는 오직 그녀만이 있었으며 그녀는 내 사랑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힘든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다. 외로웠던 시절,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고, 나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나는 철저하게 환상 속에서 그녀와의 연애를 했으며 언젠가 그녀를 만날 날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견디어냈다.
3. 꿈이 생기니.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나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당신은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인지요.”라는 문구를 읽고 나서 오랫동안 포기하고 있었던 글을 다시 쓰기로 마음 먹었다. 본격적으로 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내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꿈이 다시 생기니, 비로소 나는 행복이란 뭔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꿈이 생기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그녀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갇혀서 그녀에게 의지하던 때는 몰랐지만, 이제 새로운 행복이 보이기 시작하니, 더는 그녀를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존재는, 실은 나의 환상일 뿐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고, 그때에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병임을, 실제 나는 환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환상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나는 나의 일기를, ○○병에 대한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병을 앓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정확한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3부 끔찍했던 시절
내가 ○○병을 얻게 된 계기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지난 이야기를 통해 ○○병이 내게 오게 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병은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의사들이 많고, 뚜렷한 원인이 없다는 말도 많다지만, 그러나 분명한 원인은 있다고 생각한다. 환자의 개인적 기질도 작용하겠지만, 그에 반응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증거로 나의 입원 전과 입원 후, 부모님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나의 환경은 점점 더 좋아졌다. 지금도 부모님께 나의 모든 마음을 털어놓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버지와는 담을 쌓고 있으며, 어머니와만 조금 많은 대화를 한다. 입원 전에 비해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진 것을 느끼면서 나의 증세도 차츰차츰 나아졌다.
1) 상처는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은 중학교 때였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만, 그때는 성당을 다녔다. 어느 날이었다. 성당에서 공허한 하루를 보내고 왔다. 나의 사춘기 시절은 그렇게 공허한 하루로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이었을 거다. 부모님이 갑자기 반성문을 제출하란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라고 썼다. 나와는 달리 동생은 잘못했다는 반성문을 쓴 걸로 기억한다. 나는 정말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며, 있으면 알려달라고 그렇게 썼으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여전히 나는 그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단순히, 성당에서 하루를 보내고 온 것이 왜 잘못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의 무차별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매질에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그렇게 나의 상처는 시작되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내게 계속해서 상처를 주는 존재였다.
2)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불렀다. 그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어떤 말을 아버지가 했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나는 무슨 말을 하려 했었고, 마치 아버지는 내가 하려는 말을 다 안다는 듯이 말을 끊어버렸고, 내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아버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알려 하지 않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3) 꼬래비가…
대학교 때였다. 친척들끼리 모여서 버스에서 어딘가로 가야 할 때, 내려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을 날렸다.
“넌 왜 가만 있어, 꼬래비가…”
사촌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큰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기분도 나빴다. 그것은 분명 나를 비난하는 말투였고, 나를 조롱하는 말투였다. 그 말을 듣은 사촌동생은 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내게 같기 가잔 말을 안 하고 할 일을 하러 갔고, 나는 그대로 그 말을 온몸의 상처로 받아내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그렇게 병들어가고 있었다.
(4) 소유물이라고?
기흉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고기를 먹인다고 식당을 갔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정확히 기억난다.
“그럼, 내가 소유물이란 말이야?”
그리고 그는 정확히, 당신의 소유물이라고, 나는 당연히 아버지의 소유물이라고 말했다.
기가 막혔다. 나는 핸드폰 하나만 달랑 들고, 밥도 먹지 않고 그 자리를 나왔다. 정말, 싫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나의 이 증오를 불러일으킨 사건은 또 하나 있었다.
(5) 200만원 내놔!
사람들 앞에서는 참 잘해주던 아버지는 단둘이 있을 때, 내게 한마디를 한다.
“200만원 내놔!”
수술할 때 지출했던 돈을 나보고 내놓으란 애기였다. 내게 쓰는 돈이 그렇게 아까운가.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부채를 더해갔다.
(6) 나의 상처는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 역시도 변하지 않았다. 나와의 화해를 시도해 보려 하지만, 그것 역시 당신의 가치관을 내게 주입하려는 시도였을 뿐이지, 진정 나를 위한 시도는 아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아버지가 진짜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소유물로서, 그냥 자신이 하라는 대로 조종하는 꼭두각시이길 바랄 뿐이라는 걸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길 바라는 시도는, 내가 몇 번씩 병원에 입원함으로서 조금씩 변화를 맞이한다. 아버지는 나와 얘기하길 원했지만, 나의 깊은 상처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살았고, 혼자 살면서 단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의 그 바람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4부 나의 일상은
1. 장애와 함께 한 그들과, 나의 이야기
장애판정을 받기에는 너무 예후가 좋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나는 장애인등록을 포기했다. 장애판정을 받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냐고 많은 사람은 물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조금의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리 하고 싶었다. 나의 병은 그렇게 나를 힘겹게 길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공공근로로 장애인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공공근로는 주민센터에 신청하게 되면 6개월 정도 일할 수 있는 저소득층 지원 정부일자리다. 아무래도 예산 탓인지, 60세 이하인 나에게는 2년에 2회까지만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그 소중한 기회를 이용해서 장애인센터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한번은 지적장애인이 많은 센터에서 일했고, 한번은 정신장애인이 위주의 센터에서 일했다. 장애인이 될 수도 있었던 나인 터라, 그들에게 특별히 더 애착이 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의 병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그들뿐에게 아니라, 나의 병은 떠벌리고 다닐 수 있는 그런 병이 아니었다. 가끔 뉴스에서 떠드는 ○○병 환자들은 그 병을 이용해, 감형을 받으려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병 환자에 대한 인식은 더욱 더 나빠지고 있었다. 장애인센터에 가서는, 나의 병이 구청이나 시청에 알려질까 봐, 그럼으로 인해서 나를 또 “번외자”로 분류하게 될까봐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나도 환자일 뿐이라고, 나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환자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은, 나는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 라는 나만의 외침일 뿐이었다. 사회의 편협한 시선으로 인해, 나는 언제든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러나 장애인센터에 가면 나는 더 이상 잠재적 범죄자가 아닌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1년이 넘는 시간은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다. 비록 내 병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느끼는 것이 내게는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더더군다나, 그들은 너무도 순수했다. 누군가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으며, 감정에 솔직했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행복이 내게 전해지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쓰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또한 나의 이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