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의사의 발자취와 생애
- 숭고한 그의 뜻을 가슴에 새기며
- 하 금 수
볕 고운 초 여름날 오후는 가로수이팝나무의 싱그러움 같다. 푸름이 짙어가는 가운데 예당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의좋은 형제 공원의 초가에도 여름의 향기가 짙다. 훌쩍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날이다.
지난 달, 친구들과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와 정토원을 다녀오면서 나는 많은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다. 그날 이후, 늘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쯤 나의 삶을 되돌아 볼 여유도 없이 떠밀려 살아온 지나간 시간들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가.’순간, 나는 목적 없이 방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를 찾는 여행을 이제 부터라도 시작하자는 생각과 함께 한 달에 단 하루라도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여행이라도 떠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첫 여행지는 바로 김한종 의사 기념관이다. 김한종 의사 기념관은 몇 년 전 산불이 크게 발생했을 때 한걸음에 달려갔던 곳이기도 하다. 김한종 의사의 고향, 그리고 그의 생가가 내 기억 속에서 스멀스멀 다시 피어오른다. 발표 자료 수집에 대한 의무감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 언제라도 찾아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운이 좋게도 한통의 전화가 연결되어 김한종 의사의 손자인 김경식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5월의 햇살을 닮은 선생님은 웃으시며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오늘 다시 뵈니 김경식 선생님은 김한종 의사와 많이 닮은 것 같다. 비록 김경식 선생님과 짧은 시간의 대화였지만 무언 할 수 없는 긴 여운을 남겼다.
일우 김한종 의사는 1883년 1월 14일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에서 백하 김재정 선생의 1남 3녀 중, 독자로 태어났다. 김한종 의사의 집은 근교에서 머슴을 여럿 두고 살 정도로 비교적 잘 사는 집안이었고, 어려서 부친과 숙부로부터 한학과 성리학을 배웠다. 장손으로서 남다른 책임감으로 효를 실천하였고 일찍이 홍주의병장이었던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슬하에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먼저, 김한종 의사의 가계의 정려문(旌閭門)을 정리해본다.
Ⅰ. 김한종 의사 가계의 정려문(旌閭門)
1. 김방언공과 김치화공의 효행(孝行)
김한종 의사의 7대조인 방언공의 자(字)는 사상(士上), 본관은 금령(金寧)이다. 이 효자문은 계묘년(癸卯年,1783년) 5월에 정조 대왕으로부터 아들 치화공과 함께 양세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방언공은 유경(宥慶)공의 아들로 1693년 10월 2일에 출생하였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마음을 편히 해드렸으며, 아버님 병환에는 밤낮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피를 수혈하는 등 그 효성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의 아들인 치화(致和)공도 아버지와 같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종기를 앓자 약을 붙이고 고름을 빨아내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약과 섞어 올려 겨우 병에서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기이한 병환을 앓자, 먼저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리고 뒤이어 넓적다리 살을 베어 올렸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니,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한 모금의 물도 삼키지 않았으며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하여 효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치화공은 어머니께 아뢰고 형과 결별하며 말씀하기를 “아버지께서 지하로 돌아가시니, 누가 옆에서 모시겠습니까? 어머니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형님이십니다. 나와 같은 지차(之次)는 소중할 것이 없으니, 반드시 죽어 지하에서 아버지를 따르겠습니다.”하고는 눈물을 모두 쏟고 별세하였다.
2. 김치화(金致和)공의 부인 신씨(申氏)의 효행(孝行)
치화공이 별세하던 날, 그 아들 민형(敏炯)공은 겨우 두 살이었다. 어머니 신씨(申氏)는 이 어린 아들을 기르고 교육시켰으며, 뒤에 경계하기를 “부자(父子) 분의 뛰어난 행실을 네가 힘써서 후세에 찬양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 민형(敏炯)이 명령을 받들고 감영(監營)에 글을 올린 것이 스무 번이었는데, 마지막에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경우 금강(錦江)에 투신하겠다고 맹세하고 마침내 감영의 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이때 관찰사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아름다운 일로 여겨 임금께 아뢰어서 은혜로운 정려문이 특별히 남편인 치화(致和)공께 내리게 되었다.
이에 부인 신씨는 아들로 하여금 혈서(血書)를 써서 상소하게 하고 화성(華城)으로 행차하는 대가(大駕) 앞에서 하소연하여 남편의 정려문을 시아버지에게 옮겨주어 죽은 남편의 효성스러운 혼(魂)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임금(정조)은 시아버지를 위하는 신씨의 지극한 효성을 찬미하여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실적(實蹟)을 탐지하게 하였다. 이때 승정원(承政院)의 차지승지(次知承旨)인 박우원(朴佑源)이 아뢰기를 “도(道)에서 사실을 조사한 결과 두 효자(孝子)에 한 열부(烈婦)입니다.”라고 보고 하였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전교하기를 “김방언(金邦彦)과 김치화(金致和) 부자(父子)를 표창하여 정려하는 일은 신녀(申女)의 효성에 감동한 소치이다. 해당 고을로 하여금 이 전교(傳敎)의 내용을 신녀(申女)에게 타일러 가르쳐 주며, 판부(判付)한 내용을 한문(漢文)과 언문(諺文)으로 등사하여 길거리에 게시해서 온 도의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는 자료로 삼게 하라. 인간(人間)에 효행이 반드시 있다고 말하나 어찌 이와 같이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양세정려문(兩世旌閭門)을 하사하였다.
김치화공의 부인 신씨(申氏)는 정식으로 열녀문이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계묘년 5월에 양세정려문이 내려질 당시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김방언(金邦彦)과 김치화(金致和) 부자(父子)를 표창하여 정려하는 일은 신녀의 효성에 감동한 소치이다”전교하였으니 임금께서 인정하신 효부이자 열부였다.
Ⅱ. 김한종 의사에 대하여
1. 생애와 업적
김한종 의사는 1883년 1월 14일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번지에서 출생하였고, 1921년 8월 21일 대구 형무소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1900년 2월에는 홍주의병에 참가한 부친 김재정 의사를 도와 홍주의병에 참가하였으며, 1916년 7월에 조선총독이 부여를 시찰하다는 정보를 입수하다가 조선총독을 처단하려는 사실이 발각되어 경북 풍기로 피신하였다. 채기중, 박상진 의사와 함께 대한광복회를 만들고 군자금을 모아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 무력으로 국권을 되찾고, 친일세력을 응징하여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2. 김한종 의사의 일화와 가족에 관하여
현재, 김한종 의사의 둘째와 셋째 여동생은 생존하고 있다. 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한종 의사에 어린 시절은 학문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고 한다. 서당에서 한문 및 성리학 등을 부친 및 숙부로부터 배웠으며 장손으로서 남다른 책임감으로 효를 실천하였으며 부친을 도와 홍주의병에 참가 하는 등 의로움과 책임감이 강했다.
김재풍 의사는 김한종 의사의 삼촌이다. 그는 대한광복회가 국내의 소자산가들에게 고시문을 발송할 때 고시문에 날인할 인장을 직접 새겨 김한종 의사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김재창. 김원묵. 김재철. 김재인. 김성묵 등은 군자금 모집 시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대한광복회원들이 활동할 때에 이들을 피신시키거나 무기를 보관하였다가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일가 및 부친인 김재정 의사의 제자들이며 40호의 이 작은 마을에서만 9명이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렇듯 김한종 의사의 충효를 실천하며 조국애로 민족을 위해 살다 가신 분들이 많다.
3. 독립투사 김한종 의사
김한종 의사가 태어난 1880년대에는 조선이 처음으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서양 문물이 급격히 밀려들어오던 때이며 강대국들의 침탈로 나라의 기운은 점점 쇠퇴해 갔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급기야 1895년에는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일어났던 암울한 시대였다.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다음해 부친인 김재정 의사도 홍주 의병에 참가하면서 청년이 된 김한종 의사 역시 부친을 도왔으나 결국 의병 운동에서 패하여 성달영 동지들과 함께 오지인 김의사 집으로 피신한 후 국권창탈에 분개하여 조선총독 암살을 모의하게 되었다.
1916년 7월 8일, 부여의 이철영 선생과 정산의 이익 선생과 만나 국권을 회복하여 조국을 광복할 방법을 모의하였다. 마침내 익년 2~3월경에 부여지방을 총독이 시찰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한종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부여의 이철영 선생 댁에서 왜적의 두목인 총독을 살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같은 해 12월에 동지 우덕상 선생을 중국의 장춘지방으로 파견하여 권총 2정과 실탄 2발을 입수하였다. 그러나 김한종 의사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왜경이 그의 자택을 압수수색하였고 이에 의사를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피신하였다. 김한종 의사는 경상도에서 박상진. 채기중 선생 등이 조국 광복사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멀리 경상도로 내려갔다.
4. 김한종 의사와 대한 광복회
김한종 의사는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1917년 7월 15일,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박상진. 채기중. 노백린. 임세규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0여명의 동지들이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한다. “우리의 목숨을 바침은 물론 우리 생애에 뜻을 이루지 못할 때에는 자자손손이 뜻을 이어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 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 피로써 다짐하고 대한광복회 충청지역의 지도자가 된다.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군자금 모집과 의협투쟁이었다. 대한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에는 무관학교를 양성하여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군자금은 의연금 및 우편마차 탈취, 각 지방에 미곡상등 연락소를 설치하여 상행위를 하면서 모집하였고,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키며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5명이 사형되고, 70여명이 옥고를 치렀으며, 김좌진 장군 등이 피신하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충효의 전통을 가진 유교 집안에서 자란 김한종 의사는 성품이 강직하였고, 대한 광복회 내에서는 격정적인 인물이었다. 김좌진 장군도 김한종 의사를 존경하고 그와 뜻을 함께 했다. 김한종 의사는 대한광복회 내에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이다. 한말의 독립운동가 박상진은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였다. 판사고시를 합격하였고 친 외가 모두 경상도 갑부였다. 그의 나이는 김한종 의사보다 어렸지만 김한종 의사의 깊은 학식과 강직한 성품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당시 의병장이었던 허위선생의 제자인 박상진과 함께 친일 부호를 처단을 주관하기도 한 김한종 의사는 동지포섭에 힘을 쏟으며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또한, 광복군 창설을 목적으로 김좌진을 만주로 파견하여 만주에 군사 학교를 세우게 하고 그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허위 선생은 경상도 구미 출신이었고 대지주였다. 故 박정희 대통령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 난처한 상황이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 생가 근처의 허위 선생 집안의 땅을 내줘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허위 선생 집안 대지주였고, 박정희 대통령 아버지가 소지주였다고 한다. 또한 허위 선생은 장승원이라는 자를 도지사를 시켜 주고, 나중에 국가 위기 시 군자금을 내라고 하였는데 장승원은 왜놈한테 밀고하였다. 허위 선생은 경북지부와 충청지부 세 사람을 시켜 장승원의 집을 찾아가게 하여 두 사람이 친일파 장승원을 죽이고 나머지 또 한사람은 장승원의 집에 불을 지르려다 실패했다. 이승만 정부의 경찰청장과 외무장관을 지낸 장택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승원의 셋째 아들이다. 그 외에도 아산의 도고면장 김용하 역시 악질면장이었는데 김한종 의사가 사람들을 보내 군자금을 요구하자 그 역시 왜놈에게 밀고하였다. 김한종 의사는 사람을 보내 김용하를 처단하였다. 이와 같이 친일분자를 응징한 것은 왜로 하여금 에포케하고 동포를 각성케 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을 촉진하려 함이었다.
김한종 의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힘을 모으기 위하여 중국으로 노백린(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보내기도 했다. 그 후, 귀향한 김한종 의사는 모든 재산을 팔아 광복군의 연락 장소를 마련했다. 친일부호 대상으로 목숨을 걸고 막대한 군자금을 거둬 해외 동지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제의 경찰에 의해 발각되었고, 피신하며 지내던 김한종 의사는 어머니의 기일 날 위험을 무릅쓰고 집에 왔다가 일제의 경찰에게 1918년에 일제의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김한종 의사는 길러준 어머니와 애틋한 사연이 있다. 김한종 의사는 두 어머니가 있었는데 낳아준 어머니는 일찍 죽고 길러준 어머니는 김한종 의사가 충남 공주의 옥중에 있을 때, 김한종 의사의 옷을 손수 지어 구십 리 공주까지 걸어가 자주 만났다고 한다. 김한종 의사는 세 명의 이복 여동생이 있는데 한명은 죽고 두 명 중은 한 명은 신양면 가지리에서 생존하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천안에 있다.
대한 광복회는 국내외에서 유기적으로 조직망을 펼쳐 나갔는데 1917년 8월26일 김한종 의사는 서울 남일 회관에서 박상진선생과 더불어 김좌진장군을 만주로 송별할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격려하였다.
今 日 送 君 渡 滿 行
금 일 송 군 도 만 행 오늘 동지를 만주로 전송하오니
劒 頭 秋 水 照 心 明
검 두 추 수 조 심 명 의를 행할 칼 가는 곳 가을 물에 밝게 그 마음 비치도다
衆 誠 合 處 能 成 業
군 성 함 처 능 성 업 못 정성 합친 곳에 능히 대업을 이루리
相 克 逢 時 必 有 聲
상 극 봉 시 필 유 성 서로 이겨 만날 때 반드시 큰 외침이 있으리라
위와 같이 광복회원들은 혈맹을 마친 후, 김한종 의사는 충청도의 책임자가 되고 박상진과 채기중 선생은 경상도의 책임자가 되고 김좌진장군은 만주지방 책임자가 되었다. 대한 광복회의 활동은 김한종 의사가 맡은 충청도 지방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특히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가 그 활동중심지였다.
5. 김한종 의사, 순국하시다
김한종 의사는 충청도를 중심으로 조국광복 자금모금 운동에 있어서 맹활약하였다. 상당한 군자금도 모집되었고,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을 건 눈부신 활동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 광복군의 위명은 왜놈들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고, 이천만 동포는 드디어 광복되는 날이 온다고 그 날을 학수고대 하였다.
그러나 천안지방의 한 동지의 가족의 실수로 1918년 1월 27일에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동지로서 같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신 분이 75명에 이르렀다. 김한종 의사는 비롯한 모든 동지들은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김한종 의사는 1918년 10월 19일에 공주지방법원의 합헌부에 회부되었다. 1919년 8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21년 8월 21일(음7월8일)에 박상진과 더불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으며 향년 38세이다. 유해는 생가 뒷산에 있다. 김의사의 동지 중 채기중. 임세규. 김경태 등 3인은 서울에서 사형을 당하고, 나머지 동지 28명은 1년에서 10년의 체형을 받았다. 그 외 사람들은 국외로 망명하였거나 국내에 은신하게 되어 국내에서 광복회 독립운동은 그 후 정체되었다.
Ⅲ. 김한종 의사의 생가와 기념관
김한종 의사의 생가는 김한종 의사가 1916년 7월에 조선총독 처단에 실패하여 경상도로 피신할 때(33세)까지 살던 집이다. 김덕남 공이 논산의병 전투에 패하여 터를 잡은 이후 조선 정조 대왕으로부터 김한종 의사의 6,7대인 방언공과 치화공이 양세정려문을 받은 곳이다. 사랑채인 서당에서는 부친 김재정 의사가 한학을 가르쳤고 김한종 의사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대한광복회 충청지부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활동한 곳이다. 안채는 초가지붕을 못해서 쓰러졌고, 사랑채에서는 김한종 의사의 손자가 김한종 의사가 옥고를 치르던 감옥에서 보냈던 편지 및 엽서, 서당에서 썼던 선대 및 제자들의 서필을 여러 편 발견하였다. 이곳 생가는 두 명의 효자와 세 명의 의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2000년 7월 30일에 안채 복원과 사당 신축이 이루어졌지만 안타깝게도 2002년 4월15일 청양-예산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2003년 생가 복원이 이루어졌다.
1974년 10월 3일에 예산읍의 역전에서 일우 김한종 의사 순국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이는 예산 모현 사업회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졌다. 제막식에는 군민 2000여명이 참석하여 성대히 봉건 하였다. 1996년 3월 4일에는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받았으며 2007년 11월 2일에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120평으로써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 1전시실은 대한 광복회의 설명 및 동지들의 유품전시, 제 2전시실은 김한종 의사 가문의 효자, 의사들의 소개 및 유품전시, 제 3전시실은 김한종 의사의 독립 투쟁 활동 및 우품 전시, 제 4전시실은 영상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월산과 사당을 주축으로 사당을 가장 위에 짓고 기념관은 일제의 36년의 암울한 기억으로 지하처럼 제일 밑에 배치하였다. 기념관은 김한종 의사가 4년여의 옥고를 치른 대구 형무소의 감옥처럼 조그만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무채색의 콘크리트로 설계하였다. 현재 박쥐들이 감옥으로 착각하여 여러 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생가가 산불이 나서 일부 소실된 후, 건축가인 손자 김경식이 직접 설계하여 직접 건물을 지었다. 해마다 문예 대회, 음악 행사 등을 열어 김한종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사당은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김한종 의사 때문에 광복사라 일컫는다. 독립 운동가이자 헌법재판관을 지냈던 김진우가 이름 짓고 글씨는 한학자 교수 성백휴가 썼다. 김한종 의사의 생가의 이름은 ‘옛날의 밝음을 다시 불러 온다’는 뜻의 부명헌(覆明軒)이며 이재인 경기대 교수가 지었다.
Ⅳ. 옥고에서 순국까지
( 유창순 심문조서 ) 박상진이 말하기를 김한종 의사가 채기중에게 장승원을 살해하면 이태윤이 1만원을 출금할 것이니 그 암살에 대해 그대와 함께 채기중과 상의하라고 말하자 채기중은 그처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니 김한종 의사는 일을 그와 같이 어정어정 미룰 진데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사나 돌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김경태 심문조서 ) 김한종 의사가 천안 읍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주막에서 “도고면장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것을 헌병에게 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용하는 부하인 면서기 가족을 거지와 같이 만들고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이므로 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 낼 리가 없으므로 이 자를 살해하여 그 밖의 사람들을 위협하여야만 한다.” 고 말했다. 그러자 장두환도 여기에 찬동하여 그 실행을 본인과 임동근에게 명령했다. 그리하여 김한종 의사는 앞의 면장에게 붙여줄 사형선고서를 써야만 하겠는데 이 집에서는 남의 눈에 띄기 쉬우니 다른 곳에서 쓰라고 하면서 백지에 “광복회 도장을 찍고, 광복회에 반대하는 자는 군율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고 기재하라” 면서 건네주었다.
( 김한종 심문조서) 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실시하는 데에 있다. 그 방법으로서는 조선 내 자산가들로부터 금품을 수집하여 군기를 구입한 후 독립을 성취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청색의 죄수복은 마음이 허락지 않아 무더위 속에서도 솜옷을 입고 있으셨다는 자신의 행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굳은 신념에서 우러나온 정당한 행위임을 말했다.
현재 일우 김한종 의사의 손자인 김경식 선생님이 그 유지를 받들어 김한종 의사의 불굴의 독립의지와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몇 년 전 필자도 이곳에서 독립의지를 담은 시를 시낭송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여기에 함께한 모든 이들의 모습은 경건하며 의연하였다. 김한종 의사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살다가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발자취를 감히 다시 재조명 해보며, 그 숭고한 뜻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재평가되기를 바란다. 조국을 뜨거운 가슴에 품고 세상을 큰 가슴으로 품으려고 했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혼란하게 시작했던 첫 여행의 마무리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