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최수경
인식의 원형과 자문(自問)의 시학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1. ‘동두천 사람들’의 정감적 언어
현대시에서 존재의 인식에 관한 담론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취택하는 소재나 주제의 근원이 존재와 자아인식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으로 추출하는 인생의 궤적(軌跡)에서 시적 상상력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시법을 구사하는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생멸(生滅)까지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경향이 오래 전부터 현대시에서 탐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우리 시인들은 당연하게 시적 상관물로 존재의 의미로 추구하려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여기 최수경 시인이 상재하는 세 번째 시집『다시 피는 불꽃에는 연기도 없다』에서 그가 해법을 탐구하는 중심축이 인식의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여력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체로 ‘동두천’이라는 생활터전을 시적 원류로 해서 정감적인 언어로 출발하지만, 그에게 내재된 진실의 일단은 인식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천착(穿鑿)해야 할 숙명적 과제처럼 작품들의 축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인생 연륜과 시적 교감이 더욱 활성화하고 있다는 단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그가 ‘자서’에서 ‘일상 속에서 / 내 자리가 어디일까 / 허무가 안개처럼 / 아찔한 순간이 와도 / 떨림 없이 / 후회를 차버린다.’는 비장한 언술로 보건대 그의 내면에는 이미 정립된 가치관이 침잠(沈潛)되어 성찰하거나 새로운 기원의 의지로 나아가려는 의식의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우선 그가 작품「동두천」에서 ‘소용산 왕방산 해룡산 칠봉산 마차산 / 예쁜 산으로 둘러싸인 꽃술 터 / 동 두 천 / 벌, 나비처럼 꿈을 나르며 / 실향민도 이방인도 /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곳’이라고 존재와 생명의 근저(根底)를 강조하고 있다.
최수경 시인은 동두천문인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지역 문학 발전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재원으로서 동두천 주변 경관과 그곳 시민들의 애환을 담은 시집『소요산 가는 길』을 발간하여 동두천 사랑의 열정을 토로한 바 있었다.
이러한 정감이 넘치는 ‘동두천’을 시적으로 현현(顯現)하는 연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정황이 그에게 간절한 내면의식을 충전하고 있음에 기인(基因)한다.
소요산입구에 들어서면
파란 산에서 품어내는 시원한 바람과
산뜻한 기온이 여전히 찾는 객을 반기니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여 마셔본다
어제 밤 폭우 때문이리라
한바탕 전쟁을 치룬 듯
산 능선으로 포연처럼 피어오르는 운무
그 아래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아직은 식상하지 않은 길섶에 늘어선 시비
동두천문인협회 회원들의 분신들
풀숲에서 건재함에 정겨움이 앞서는데
여느 때는 들리지 않던 생소한 물소리에
맞은편 인공 수로를 본다
물소리가 끄는 마력이라니
철철 물 흐르는 소리가 이렇게 좋구나
--「이런 아침」중에서
상패교, 안흥교의
시비 혹은 시 벽보들
우리들의 열정과 정성의
자취들 긴 꼬리별이
찬란히 무한 허공을 헤치고
흐르는 듯싶은 영롱한
페이지들 누군가 또 미래의
어느 날 또 새로운 열정의
페이지들을 펼쳐서 잇고
이어가리라 믿으며
--「시비(詩碑」중에서
이렇게 최수경 시인은 ‘동두천’과의 인연을 찬양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학공부’를 하고 등단을 하여 문학과 인생의 동반자적인 공유를 생활화하고 있다. 그는 ‘문학의 본령이 / 우연찮게도 본인의 / 본령인 삶 그 자체임을 / 적으나마 깨친 것을 겨우 / 엊그제 쯤이라고나 할까(「문학 탐방기」중에서)’라는 어조(語調)로 자성(自省)히고 있다.
또한 그는 ‘소요산 입구’ ‘자유수호평화박물관’과 ‘상패교, 안흥교’에서 ‘시비 혹은 시 벽보들’을 보면서 ‘동두천’ 사랑의 절정을 이루면서 존재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있다.
2. 자문(自問)으로 탐색하는 인식의 해법
최수경 시인은 이처럼 존재와 인식에 관해서는 시적 화법을 의문형으로 처리하는 자문의 시학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이는 단정적인 어조보다 어떤 사물이미지나 관념에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시적 진실의 해법을 찾는데 효율성을 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나(또는 인간 전체)’라는 존재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성찰하면서 살고 있는가(혹은 살아왔는가)를 심층적으로 추적하여 이미지를 추출하거나 투영하는 시적 구도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에서 동화(同化)하거나 투사(投射)된 자신의 존재 미학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유추하게 된다.
그가 구사하는 자문의 어조는 다음과 같이 인식의 과정을 여과(濾過)하여 현현함으로써 그가 희구(希求)하거나 발현(發現)하려는 사유(思惟)의 일단을 정리하고 있다.
- 사찰 문을 들어설 때 / 아 나는 왜 이쯤에서 눈물이 나는 것일까(「봉정암 가는 길」중에 서)
- 늦어 구부러진 기형이라도 / 마지막이라는 것에 / 절로 따라붙는 소중함까지 / 반추하는 소리 / 아작 아작 / 나는 누구에게 소중한 마지막인가(「오이넝쿨을 걷으며」중에서)
- 야합수(夜合林) / 소문 듣고 마당에 심어진 작은 나무는 / 내 집에 초대되어 실려 온 이 유를 알까 / 합환목에 기대보는 나의 마음을 / 얼마나 알까(「자귀나무」중에서)
- 생각하면 즐거운 / 그 시절을 캐보면 / 가을을 떠돌던 바람이라 해도 / 수북한 낙엽 추억 으로 앉히고 / 내 어머니 닮아가는 일이 / 전혀 서럽지 않아 / 살아, 노래해도 좋은 것인 가(「남쪽 어느 아름다운 섬」중에서)
- 그대로인 마음 밭은 / 초로의 끄트머리에 있으니 / 묵은 이랑 이랑에 / 다시 무엇을 어떻 게 심어 / 영원 하라 할까(「잃어버린 편지」중에서)
- 흠 없는 이 있으랴만 / 용케도 찾아 분간 할 수 있을 때 / 이미 쏟아버린 어제인걸 알까 / 밤마다 강력 지우개를 구해야 했다(「세상 구경」중에서)
- 큰 나무가 아니면 어때 / 누구에게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다면 / 나눔으로 또 얻어지는 것이 / 오히려 진정한 삶이 아닐까(「오래된 느티나무에 까치둥지가 없다」중에서)
그렇다. 우선 수사법에서 ‘일까’, ‘인가’ 또는 ‘할까’ 등의 의문형 종결어미로 시행을 수식하는 특징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최수경 시인이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서 더욱 효과적인 문장으로 그 해법을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그 인식의 범주(範疇)나 인식의 지향점이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우려와 동시에 명징(明澄)한 해법과 조화에 이르기까지는 좀더 탐구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자성이 침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나’라는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더욱 자아의 개념을 확실하게 투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도 자신의 주관적인 사유의 발현이 자아 인식의 접근에 투명하게 어조를 조절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고뇌와 갈등들을 화해하려는 시법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아 나는 왜 이쯤에서 눈물이 나는 걸까’, ‘나는 누구에게 소중한 마지막인가’ 또는 ‘내 집에 초대되어 실려온 이유를 알까’ 등 ‘나’라는 화자가 시적 중심 주체로서 시적상황을 설정하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문의 시법을 강조하는 것은 그가 현재의 삶 전체의 실재(實在)에 대한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그가 간구하는 인생관 혹은 가치관의 창출을 위한 심도(深度) 있는 철학에서 분출하는 그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존재 인식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다음 작품들에서 그가 실현하려는 존재의 의미 찾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밤새워 달려가 그 주위를 뱅뱅 돌다
잠을 설치던 안개 낀 어느 날이듯
그의 부재 속에서
모든 걸 읽을 수는 없었다
기적이고 꿈이던 사연이
단명이던 놀라움에
어떤 방도도 어떤 결단도
내 전부인 속수무책이던 것을
때로는 웃음이 절로 흐르던
짧았던 날들을 열어 보면
뒤돌아 서 있는 흐릿한 그림 하나
용케 내 원망에서 벗어나고도
태연히 부재중이다
--「부재중」전문
그늘이 사라졌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이해 못할 일이 있으랴 했지만
눈이 있어도
아찔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끝내 허무를 겹쳐 흐려지는
아직도 그 속을 몰라
네가 꼿꼿하게 걸어간
그 길을 나도 가야하나보다
--「그늘」중에서
혈기 혹은
젊음의 자취 멀어져
때론 허탈하지만
그러나 새로운 영혼의 성찬으로
생애를 넉넉하게 빚어내고자
눈을 떠보는
--「새로운 성찬」중에서
우선 그는 ‘모든 걸 읽을 수는 없었다’나 ‘속수무책’이라는 단정을 통해서 ‘짧았던 날들을’ 반추하면서 현재의 ‘나’를 관망하고 있다. 그러나 ‘태연히 부재중’이라는 어조가 결론으로 적시되면서 그가 갈구하는 존재의 해법은 아직 미확인이거나 인식이 진행중에 있음을 알게 한다.
또한 그는 ‘그 길을 나도 가야하나보다’라는 자성의 언술이 내포(內包)된 의식의 단정은 ‘끝내 허무를 겹쳐 흐려지는 / 아직도 그 속을 몰라’ 어쩔 수 없이 현재의 삶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정서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정황은 아마도 그가 구현하려는 새로운 인생관에 대한 지표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많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성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로운 영혼의 성찬 / 생애를 넉넉하게 빚어내고자’ 지금도 그러한 지적자양의 충전에 골몰하면서 해법을 탐색하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3. 기원(祈願) 의식의 시적 형상화
최수경 시인이 탐색하는 존재와의 화해과정에는 다시 기원의 의식으로 형상하는 점을 읽을 수 있다.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다시 피는 불꽃에는 연기도 없다」전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린 바람 다가와
잿더미 속
불씨를 찾는다
젖은 나무 불 지필 때
눈물 쏙 빠지도록
매운 연기에 가려
분별없던 지난날
이제 미련 없는 숯덩이
버릴 줄도 알아
이제 철없던 오지랖
여밀 줄도 알아
다시 타는 불꽃의 아름다움아
언젠가 묻어 논
감자 익는 냄새가 있어
따스한 너의 곁이
오래도록
내 자리였으면 좋겠다
여기에서 ‘오래도록 / 내 자리였으면 좋겠다’는 어조는 그가 간절하게 희구하는 그의 소망이 내재되어 있다. 우선 ‘좋겠다’라는 어휘의 역동성은 시적 구도에서도 절실한 심리적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분별없던 지난 날’이며 ‘이제 미련 없는 숯덩이’로서 ‘버릴 줄도 알’게 되는 그의 진실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지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자기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이상의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일단 그렇다고 정해진 이상에는 그렇지 않을 리가 없는 그러한 존재는 아니며 어느 상태로서 고정될 수 이는 현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자유에 의한 가능성이 있으며 이 자유로운 인간은 다시 자기가 무엇인가를 자기의 사실적 행위 속에서 결정하게 된다는 철학적 논지(論旨)가 아니더라도 최수경 시인의 가치관은 존재의 원형에서 이탈하지 않는 정도(正道)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의 의식은 다양하게 분사하고 있는데 대체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미리 씻어 냈어야할
말라버린 찌꺼기는
나의 침묵 앞에서
개운하고 싶다고
다 털어버리고 싶다고
댕그렁 댕그렁 오열하며
남아 있던 밥풀이
끝내 떨어져 나간다
--「설거지」중에서
허기진 날
약수 한 모금 마실 수 있는
봄빛 널린 언덕위에
그날처럼
쉬어 감을 허락해도 좋을
작은 의자를 만들어
겨울을 끝낸 나무와 마주 앉아
봄을 가득 채워 마시고 싶다
--「작은 의자」중에서
이유 없이 끊어진
무심한 긴 날의 침묵을 깨고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시원,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나는 이렇게 늙어 버렸네
--「실타래」중에서
보라. 이처럼 기원의 의식은 최수경 시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인식에 대한 탐색의 근원은 바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절실성이 그가 지향해야 할 존재의 해법이며 시적 진실임을 잘 인지(認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하나의 욕구이거나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그가 진솔하게 간구하는 내면에는 현실 수용과 상상력의 포용이 동시에 상관성을 갖게 되어 결국 인식 자체를 여과하는 단계라는 점이 더욱 공감을 확대하게 된다.
그는 ‘나의 침묵 앞에서 / 개운하고 싶다’ 또는 ‘다 털어버리고 싶’은 기원이며 다시 ‘봄을 가득 채워 마시고 싶’은 시인의 진실이며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 나는 이렇게 늙어 버렸’음을 자각하는 인식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그는 ‘에덴의 평원을 뛰고 싶었다(「야생마」중에서)’거나 ‘늙은 일상을 팽개치고 도망하고 싶은(「봄날의 유혹」중에서)’ 것이나 ‘詩를 낚시하고 싶은 / 나의 속셈이 온산을 뒤진다(「봄,봄,봄」중에서)’ 혹은 ‘아직 길어 먼 길 / 그때까지 사랑이라 해 주오(「사모」중에서)’라는 등의 다변적(多變的) 어조가 기원의 시적 형상화로 분출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4. 서정적 자아의 실체와 그 진실
최수경 시인은 이미 첫 시집『묻어둔 사랑 향내 있겠네』와 제2시집『소요산 가는 길』에서 보아 왔듯이 자아의 실체는 서정적 이미지를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천성적으로 간직한 보편적 자연정서와 더불어 시정신이 지향해야 할 진실의 원류가 바로 실재(實在)의 자아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가 자연 경관이 수려한 동두천이라는 본향(本鄕)에서 삶과 인생이 동반한 사유의 근저에는 그에게서 체질화한 서정적 자아의 실체가 안온한 이미지로 승화함으로써 그가 구가하려는 시의 본령이나 위의(威儀)를 확연하게 함축하는 시법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서정성의 발현도 그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면서 탐색하는 장의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와 자연이 동질의 생명성을 그의 정서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자연과 인간의 숙명적인 상관관계를 분리해서는 만유(萬有)의 섭리가 생성할 수 없다는 진리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큰, 별난 향기를 토해내는
온산은 밤꽃으로 하얗고
밤 뻐꾸기 애절한 노래로
뜨거웠던 한낮의 열기를 재운다
바람도 없는 조용한 밤
홀로 우는 개구리소리 이상스러워
달빛에 가만 귀 세우니
꽃잎끼리 만나는 쫄깃한 행위에
풀숲에 똑똑 떨어지는 교성
굵은 알밤을 잉태하는
우리의 자화상 일지라도
난 아직 그대 앞에서 부끄러워라
이 작품「유월 밤나무」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향기’와 ‘밤꽃’과 ‘뻐꾸기’와 ‘개구리소리’와 ‘달빛’이 함께 어우러지는 서정성은 자연이 전해주는 한 편의 환상곡이다. 이것이 최수경 시인의 심성 내면에 잠재한 정감이며 자연 친화를 통해서 그의 시학을 정립하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그는 다시 「산수유」에서도 ‘첫사랑 / 너의 용기는 늘 떨고 있었지 / 겨울이 흘리고 간 독한 바람에 / 더 물들 수 없던 노랑 / 봄비에 촉촉이 젖기 전에 / 우린 너무 일찍 만났던 거야 / 꽃잎에만 쏟아지던 봄날 / 아무리 돌아봐도 / 그날이 처음인 작은 송이’라고 자연 사물과의 대화는 자연과 인간의 불가분적인 요소들을 심도있게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서정적 시법의 승화는 대자연관에서 추출한 자아의 인식과도 많은 연관을 갖게 된다. 그것이 단순한 경관적 혹은 관조적이라고 하더라도 시인은 진지한 응시를 통해서 시공(時空)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생존의 법칙인 섭리(攝理) 또는 순리(順理)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밤나무’나 ‘산수유’ 등 사물이미지를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임을 감지하고 있으나 ‘난 아직 그대 앞에서 부끄’럽다는 어조가 사물과의 진솔한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더욱이 ‘그대’라는 화자를 내세워 ‘나’와 대칭적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시법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우리들의 공감(sympathy) 영역을 확산시키고 있다.
나풀대는 신비한 존재의 인연은
순간마다 환희로 뿌려와
혼자서 혼자서만
갖고 싶어서
촘촘히 엮어진 울타리를 만지며
괜한 걱정인 여린 마음
긴 여름날 석양으로 집니다
--「치자나무」중에서
둔치 어디쯤에서
그렇게 떠오르던 사연
어느 날 피고 지고를 끝내며
찬바람에 꽃잎 떨군
내 기억에서 너를 만나니
또 한해를 기다리는 꿋꿋함을
까만 씨로 여물리고 있구나
--「코스모스」중에서
최수경 시인은 이렇게 ‘신비한 존재의 인연’인 자연에서 ‘혼자서’나 ‘내 기억’이라는 어휘와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을 투사(project-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일)하는 작품을 많이 대할 수가 있다.
그는 또한 ‘괜한 걱정’이나 ‘너를 만나는’ 정황이 자연과 자아를 일치시키는 화해의 순정성도 읽을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은 평소에 그가 간직하고 있던 순박한 정서와 시 정신의 결집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온 순진성이 복합적으로 존재를 인식하는데 기여함으로써 그가 지향하는 시 미학이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이러한 동두천 토박이의 성숙된 삶을 통해서 각인(刻印)된 의식의 일단은 생활과 밀접한 가정과 가족관에서도 잘 현현되고 있어서 그의 서정적 자아에 대한 인식의 법주를 더욱 확연하게 유추할 수 있게 한다.
- 모처럼 가족 나들이 / 팔순의 시모님 발걸음이 잰 것은 / 화목이 떠들썩하게 걸어가는 길 에 / 파란신호등이 연달아 피어나는걸 보며 / 당신이 뿌린 육남매의 풍성을 보며 / 절로 포만감에 젖으신 걸까(「가족 나들이」중에서)
- 아버지는 흙으로 덮히고 / 나의 슬픔은 거짓말처럼 아물었다 / 누군들 마지막이 없으랴 / 천지간에 살아보려고 한 / 벚나무는 속으로 앓았고 / 토막 난 그 나무는 이제 간곳이 없 다(「그 벚나무는 아팠다」중에서)
- 문틈을 내다보는 할머니와 / 반세기 고부간이던 어머니는 / 말없이 군불을 지핀다 / 닳아 빠진 부지깽이를 들썩일 때마다 / 숨어있던 한숨이 활활 타고 있다(「어머니」중에서)
그가 투사하는 자연 정서 속에는 이미 이러한 가족관계(시모님, 육남매, 아버지, 어머니 등)에서도 체질화 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서 체험하고 절감한 보편적 정서에서 발원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의 감수성(sensibility)이나 감정이입(empathy)은 작품의 형상화에 축을 형성하는 중요한 모태(母胎)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가 작품「철새」「시월의 초상」「아우라지 강」등과 같은 자연현상이나 「관객」「사랑한 죄」「계절없는 꽃이고져」등의 가족관계에서 투영된 이미지와 주제는 그의 탐색하는 인식의 대상이며 인식에서 획득하는 시적 진실의 암묵적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최수경 제3시집『다시 피는 불꽃에는 연기도 없다』에서는 이와 같은 인식의 해법을 자문을 통한 시법을 구사하는 특징을 엿보게 하지만, 다음 작품「외출」과 같이 그 해답을 정리해도 좋을 듯싶다.
야산에 진달래랑
길섶에 개나리
서둘러 단장 시키느라
밤새워 빗소리 창밖에 있었구나
봄날에
바라만 봐도 좋고
느낌으로 더 좋은
따스한 온기를 만난다
내가
나를 벗어 가벼워진
오늘 일기는 행복이고
적어 놓은 외출을 들춰내어
가끔은 웃어도 되지
그러나 시는 영혼의 음악이라는 볼테르의 언지를 경청할 필요가 있으리라. 사절대 조화를 형성하는 형이상시(形而上詩)의 개념이 우리 현대시에 도입된지는 오래다. 존재를 인식하는 기본바탕에서 우리는 영혼과도 교감할 수 있는 노래를 들려주는 것도 시인들의 과제이며 시의 본령을 조화롭게 완성하는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시는 오로지 시간과 공간의 한 삶이 희비(喜悲)의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비젼의 확장이 될 수도 있고 삶 이상의 자아 인식이 근원적으로 동시성을 획득하여 시인의 진실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수경 시인이 이처럼 자문의 시학을 통해서 인식의 문제를 심도 있게 해법을 찾는 일도 앞으로 그가 지향하면서 정립하려는 시학의 근본이며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창조해야 하는 시적 진실임을 그는 숙지하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연유(緣由)에서가 아닌가 싶다.
물과 관념의 이미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