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1
제2장 요녀(妖女) 등장 (7)
주유왕(周幽王)은 여전히 포사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석으로 내궁에 머물며 한시도 포사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포사(褒姒)는 자신의 소원대로 강후를 냉궁(冷宮)으로 내쫓고 왕후의 자리에까지 올랐건만, 도무지 웃지를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은 더 차가워졌다.
그 차가움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한 겨울날의 서리꽃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
- 결빙(結氷)의 아름다움.
그것은 포사의 천성일 수도 있겠으나, 추론해보면 그녀가 자라온 환경 탓일 수도 있었다.
포사(褒姒)의 탄생에 관한 모든 역사 기록은 야담이나 설화의 성격이 짙다.
한결같이 포성(褒城)에서 올라온 두 마리 용의 거품을 밟은 궁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정확도를 유별나게 따져 기록했다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도 이 설화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잉태기간이 40년이라면 현대인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용의 거품이라는 것도 왕의 정액을 상징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째서 모든 기록이 포사(褒姒)의 탄생을 이처럼 기괴하게 만들었을까?
이렇게 생각해본다.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생존 싸움에서 이긴 자가 당시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대한 합당한 논리와 이유를 전개해 나간다.
이긴 자는 옳고 패배한 자는 나쁘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승리자는 승리한 이유가 있고, 패배한 자는 패배한 이유가 있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포사(褒姒)에 관한 탄생을 이런 논리에 적용시키면 어느 정도 그 기괴한 출생의 궁금증이 풀린다.
주왕조는 사실상 주유왕 대에 이르러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주왕실을 멸망시킨 새 정권은 당시의 개념으로 본다면 대역(大逆)행위에 해당된다.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으리라.
그 희생자의 대표로 찍은 것이 포사였음에 틀림없다.
포사(褒姒)는 태어날 때부터 요사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기록해야 주왕실의 멸망이 정당화되며, 주왕실을 무너뜨린 새 집단은 정의를 수행한 것이 된다.
그들 입장에서는 포사(褒姒)가 가능한 한 악한 여자라야 했다.
마침 주유왕(周幽王)의 총애를 받은 포사는 시골뜨기 출신이었다.
신분도, 태생도 분명치 않았다.
그런 여자의 출생을 기괴하게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잘도 만들었고, 열심히 홍보했을 것이다.
멸망당한 왕조의 기록보다는 승자의 기록이 더 널리 보급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포사(褒姒)의 출생 이야기는 재미나기까지 하다.
야담이나 설화는 네 발로 뛰는 말(馬) 보다도 빠르다.
급속도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어느덧 사람들은 포사(褒姒)는 이러이러한 여자였다 라고 굳게 믿어버렸다.
실제로 포사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상당히 파란만장(波瀾萬丈)했을 것이다.
현대판 소공녀이다.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에게 버림받은 기아(棄兒)였을지도 몰랐다.
만일 궁녀에게서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면 주선왕의 딸일지도 모른다.
주선왕(周宣王)이 건드린 어린 궁녀가 임신을 했다.
그 궁녀는 겁이 나서 왕에게도 왕후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리라.
혼자 고민하다보니 어느새 열달이 지나 해산하게 되었다.
이제는 비밀에 부칠 수가 없었다.
왕후의 문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용의 정기를 끌어대는 길밖에 없었다.
해산한 궁녀로부터 용에 관한 얘기를 들은 강후(姜后) 역시 그 말을 액면대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의 자식이다.'
그러나 강후(姜后)는 궁녀의 말을 믿는 척 했다.
그것이 속이 편하고 별 말썽이 없다.
능히 그렇게 할 만한 도량을 지닌 여자였다.
만일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였다면 강에다 갖다버리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계집아이였다.
버려도 아무 미련이 없다.
주선왕(周宣王)은 이러한 내막을 알고 강후 보기가 민망했음에 틀림없다.
아예 계집아이를 죽여버림으로써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과잉제스처를 취했을 것이다.
왕궁에서 태어났든 민가(民家)에서 태어났든, 어쨌거나 포사(褒姒)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손 저손 거치다가, 혹은 여기저기 팔려다니다가 포성 땅의 대부 포향의 집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비관했을 것이다.
아니 세상을 저주했을 것이다.
- 복수하리라.
이렇게 마음먹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포사(褒姒)는 차가운 여인으로 변해갔다.
그런 중에 헌상품이 되어 주유왕(周幽王)의 후궁이 되었다고 상상하면 어떨까.
얘기가 잠시 옆길로 빗나갔다.
'이상한 일이다.'
후궁시절에는 강후와 태자 의구(宜臼)의 시달림 때문에 웃을 여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왕후가 된 지금에 와서는 한 번이라도 웃어야 하지 않겠는가.
포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주유왕(周幽王)은 그것이 가장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기어코 포사를 웃게 하리라!'
급기야 이런 오기가 일었다.
포사가 좋아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시도해 보았다.
악공을 불러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고, 일류급 배우들에게 갖은 묘기를 부려보게도 했다.
날마다 다른 술과 음식으로 포사의 얼음장 같은 얼굴을 풀어보려고도 했다.
그런데도 포사(褒姒)는 미소 한 번 짓지 않았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느 날 주유왕(周幽王)은 애원하다시피 포사에게 물었다.
포사(褒姒)가 겨우 대답했다.
"저는 본시 좋아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지난날 강후의 의녀에게서 뺏은 비단을 손으로 찢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소리가 몹시 상쾌하게 들렸던 것 같습니다."
"오, 그런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주유왕(周幽王)은 즉시 비단 1백 필을 들여오게 하였다.
그러고는 궁녀들을 시켜 비단을 찢게 하니, 그날 부터 내궁안에는 비단 찢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그런데도 포사(褒姒)는 웃지 않았다.
주유왕(周幽王)이 다시 물었다.
"비단을 찢는데도 어째서 웃질 않느냐?"
"비단 찢는 소리가 싫지는 않으나 웃을 만큼 좋지도 않습니다."
주유왕(周幽王)은 더욱 오기가 발동했다.
이번에는 궁성 안팎으로 널리 전지를 내렸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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