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3장 23-24절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3장 1-8절 【하나님의 유대인 심판의 타당성】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3: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고,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
3:1 그러면 유대인의 나은 점은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은 무엇이냐?
직역: 그러므로 유대사람의 우월한 것이 무엇이며 또는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3:1 Τί οὖν τὸ περισσὸν τοῦ Ἰουδαίου
무엇이며 그러므로 그 우월한 것이 그 유대사람의
ἢ τίς ἡ ὠφέλεια τῆς περιτομῆς;
또는 무엇이냐 그 유익이 그 할례의
주해
▣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 지금까지 할례의 무효성과 표면적인 유대인에 대해 공격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바울은 이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비록 불법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지 못한 유대인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축복은 일단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의 우선 순위 내지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즉 바울 자신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적으로 본절과 2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나음'에 헬라어 '토 페릿손'은 '넘치는', '남아도는', '두드러진', '필요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정관사 '토'와 함께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고, 부사적 용법으로서 '과도하게 풍부하다'는 의미로도 쓰였다. 본절에서는 의문대명사 '티'와 함께 사용되어 유대인이 가진 '탁월성' 또는 '우월성'을 의미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3: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으니,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
직역: 모든 방면을 따라서 많은 것이 왜냐하면 첫째는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3:2 πολὺ κατὰ πάντα τρόπον.
많은것이 따라서 모든 방면을
πρῶτον μὲν [γὰρ]
첫째는 참으로 왜냐하면
ὅτι ἐπιστεύθησαν τὰ λόγια τοῦ θεοῦ.
때문이다 그들이 맡게 되었기 그 말씀들을 그 하나님의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복)
주해
▣ 범사에 많으니 - '많다'(폴뤼)라는 말은 1절의 '토 페릿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많았다는 의미는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9:4)이 주어졌다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와 규례 아래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2:25). 바울이 이와 같이 유익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첫째는 - '첫째는'으로 번역된 '프로톤 멘' 뒤에는 당연히 '둘째', '셋째' 등의 서수가 기대되지만 바울은 '첫째는' 외에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시키지 않는다(1:8). 본절에서는 문맥상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순서상 앞선다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2) 그 중요도나 비중에 있어서 첫째라는 의미로서 유대인에게 가장 첫째되는 유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문맥상 (2)의 견해가 타당하다.
▣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 9:4, 5절에서 바울은 보다 자세하게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즉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그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해석된 '언약'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블랙은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아'를 '예언적인 말씀'으로 번역하여 주로 '구약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구약성경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9:4, 5절을 근거로 '말씀'을 '구약성경'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점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맡았음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과 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3:3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3:3 그러나 어떤 이들이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들의 믿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겠느냐?
직역: 어찌하리요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들이 믿지아니하였다면, 그들이 믿지아니함이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지할 수 있느냐? 아니라.
3:3 τί γάρ;
어찌하리요 왜냐하면
εἰ ἠπίστησάν τινες,
만일 믿지아니하였다면 어떤사람들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μὴ ἡ ἀπιστία αὐτῶν
아니라 그 믿지아니함이 그들의
τὴν πίστιν τοῦ θεοῦ καταργήσει;
그 신실하심을 그 하나님의 폐지할수있느냐?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주해
▣ 어떤 자들이 -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있으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라 총칭하지 않고 부분적인 의미의 부정 대명사를 사용했다. 어찌하리요(티 가르에이). 빌 1:18에 기록된 '그러면 무엇이뇨'(티 가르)와 같은 감탄조의 어투이기도 하지만 본장에서는 이어지는 두 가지의 질문 형식과(5, 8절) 같이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완전히 무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특권 속에서 무한한 것을 기대하며 착각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논쟁적인 문체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서 유대교 랍비들의 논쟁법을 인용한 수사법(修辭法)이라고 할 수 있다.
▣ 믿지 아니하였으며...그 믿지 아니함이 - 본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다. 본절에 사용된 동사 '에피스테산'과 명사 '에피스티아' 가 개역성경처럼 '불신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함이나 믿음의 부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주장하지만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합쳐질 수 없다. 영역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불신앙', 이 의미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어감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2) '믿음의 결여'. 이 해석은 하나님을 배척했다는 의미보다 '적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믿음'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믿음의 강도(强度)가 어느 정도 약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이 해석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히 3:12에서 언급된 '아피스티아'(는 분명히 '불신앙'을 나타내며, 딤후 2:13에서도 하나님의 '미쁘심'과 인간의 '미쁨 없음'을 대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본절도 그러한 형식을 취해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20의 경우와 같이 해석하기 애매한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은 '믿음의 결여'라기 보다는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것이지 '믿음의 결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히 4:3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도 약속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불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불성실하거나 불신앙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取消)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들 특히 메시야 예언 등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4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 b)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주께서 c) 판단하실 때에 주께서 이기십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시51:4)
3:4 결코 그럴 수 없다. 사람은 다 거짓되어도,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기록된 것과 같으니, "주께서말씀하실 때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하심이다." 라고 하였다.
직역: 결코 그럴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되신 분이라. 그런데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이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당신의 말씀들 안에서 의롭게 된다면 의롭게 하려함이며, 그리고 당신께서 판단받으실때에 이기실것이다.
3:4 μὴ γένοιτο·
없다 결코 그럴 수 (동사: 희구법 과거 중간태/디 3단)
γινέσθω δὲ ὁ θεὸς ἀληθής,
이라하라 그러나 그분 하나님께서는 참되신 분 (동사: 명령법 현재 중수디 3단)
πᾶς δὲ ἄνθρωπος ψεύστης,
다 그런데 사람은 거짓말쟁이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이같이 그것이기록되었던 것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ὅπως ἂν δικαιωθῇς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σου [ 인용한 시 51:4]
하려함이며 주께서 의롭게 되시면 안에서 그 말씀들에 당신의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2단)
καὶ νικήσεις ἐν τῷ κρίνεσθαί σε. (부정사: 현재 수동태)
그리고 이기실것이다. 때에 그 판단받으실 당신께서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2단)
주해
▣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히브리어 '할릴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70인역(LXX)도 '할릴라'를 '메게노이토'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 사람은 다 거짓되되 - '모든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시 116:11의 인용구로서 인간의 불의함, 신실치 못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과도 부합된다.
▣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 3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알레데스)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로기아), '미쁘심'(피스티스), '의'(디카이오스)와 함께 연결되어 서로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불신앙과 거짓과 불의는 참되신 하나님을 자기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죄악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참'(알레데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약속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변하지 않는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사람의 믿음이나 진실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동일하다.
▣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 본 구절은 천상(天上)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편 저자 자신의 죄와 무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을 반복적으로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시편에 그리 흔하지 않은 독특한 용법이다. 아마 유대적 관점에서 무법과 불신앙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 같다. 바울은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천상 법정의 공의로움이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고,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상대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미쁘심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3절)을 설득력있게 말한다. 요컨대 이 인용은 인간의 불의함과 거짓됨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참되심에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 판단받으실 때에 - '판단받으실 때'에 해당하는 시 51:4의 히브리 본문이 개역성경에는 능동형인 '판단하실 때'로 번역되어 있으나 바울의 인용대로 수동태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동형이든 능동형이든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판단받는다는 의미로 다윗이 고백하거나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의도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으나 그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하나님의 순전(純全)하심에는 손상을 가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논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죄인된 인간을 판단하시든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순전하심에 한치의 도전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왜곡되지 않고 의롭기 때문에 '이기려 하심이라'는 표현이나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란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 이기려 하심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세이스'를 제외한 본절 전체가 똑같다. '이기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에서는 미래형 '니케세이스'로 되어 있고 몇몇 사본들에서는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인 '니케세스'로 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편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종말의 심판과 사람의 죄를 연관지어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미래형으로 쓴 것 같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3: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
3:5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는데,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는 말이냐?
직역: 그러나 만일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나타나게 한다면, 무슨 말을 할것인가?
내가 사람의 말을 따라서 말한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께서 불의 하시냐? 그분은 아니다.
3:5 εἰ δὲ ἡ ἀδικία ἡμῶν θεοῦ δικαιοσύνην συνίστησιν,
만일 그러나 그 불의가 우리의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나타내게한다면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τί ἐροῦμεν;
무슨 말할것인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복)
μὴ ἄδικος ὁ θεὸς ὁ ἐπιφέρων τὴν ὀργήν;
아니다 불의하시냐 그하나님께서 그분 내리시는 그 진노를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κατὰ ἄνθρωπον λέγω.
따라서 사람을 내가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주해
▣ 본절에서 바울은 앞절(4절)에서 인용한 시 51:4에 대해 유대인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단지 자기 교훈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지, 오해나 잘못된 추론(推論)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단순한 유대인의 반대가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은 바울의 진술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실하게 언약을 맺어 오셨던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은 공정한 처사가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약속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공의의 판단으로 징계(懲戒)하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 지금 바울은 5;20에서와 같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의미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빛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불의를 의로우신 판단으로 징계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더 드러나게 된다.
▣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들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3절). 문제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불의며,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을 따름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3: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
3:6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직역: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심판 할 것인가?
3:6 μὴ γένοιτο·
없다 결코 그럴 수 (동사: 희구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ἐπεὶ πῶς κρινεῖ ὁ θεὸς τὸν κόσμον;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심판할것인가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주해
▣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4절과 마찬가지로 '메 게노이토'이다.
▣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審理)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었으며,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신약에서는 '심판'이 '크리노', '크리마', '크리시스'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구약의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권위에 의하여 판단하는 종말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여졌다. 따라서 본절에 쓰인 '심판'(크리네이)의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룩된 신성한 도덕적 질서,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판단받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의 조건을 갖춘 자는 전자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전자의 판단 기준 곧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육체의 법을 따라 정죄받으며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종의 자리에서 율법에 의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3:7 또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그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아야 하느냐 ?"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3:7 그러나 나의 거짓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실하심이 더 풍성하여 그분의 영광이 되었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
직역: 그러나 만일 나의 거짓말에 의하여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그분의 영광을 풍성하게 하였다면 어찌하여 아직 나도 죄인처럼 비판을 받아야 하느냐?
3:7 εἰ [ γάρ] δὲ ἡ ἀλήθεια τοῦ θεοῦ ἐν τῷ ἐμῷ
만일 그러나 그 참되심이 그 하나님의 의하여 그 나의
ψεύσματι ἐπερίσσευσεν εἰς τὴν δόξαν αὐτοῦ,
거짓말에 더욱풍성하게하였다면 를 그 영광 그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τί ἔτι κἀγὼ ὡς ἁμαρτωλὸς κρίνομαι;
어찌하여 아직 역시나도 처럼 죄인 비판을 받아야하느냐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1단)
주해
▣ 그러나 - 이 접속사에 대해 몇몇 헬라어 사본들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때문이다')를 사용하고 있다. 개역성경과 같이 역접 '그러나(데)를 취할 경우(A), 형식상으로는 앞 구절(6절)에서 언급한 것을 반대하는 구문이 된다. 그러나 본절은 6절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으로나 문장 구조상 5절과 연결된다. 즉 5절과 본절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6절은 삽입구로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본절은 5절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진술로 서로의 내용을 보충한다. 이와 반대로 '가르'라는 이유 접속사를 사용할 경우 본절과 8절은 의미상 5절이나 6절 그 어느 절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가르'는 어떤 판단의 진술 후 그 진술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데 적합한 접속사이다. 따라서 '가르'가 본절에 사용될 경우에는 앞 구절과 연결되어, 5절의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절을 이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데'가 더 적합한 접속사로 보인다.
▣ 나의 거짓말로...그의 영광이 되었으면...심판을 받으리요 - 이 말은 '나의 거짓과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죄인 취급되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를 지닌 궤변(詭辯)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8절 후반부에서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한편 본문만을 따로 떼어내어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반문을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황 윤리가 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3:8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라고, 악한 일을 하자"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3:8 또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한 일을 행하자." 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비방하는데, 그들이 정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직역: 그러면 또 우리가 말하는 것을 어떤이들은 이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악을 행한다는 것은 선한일들이 오게한다면
오게하기 위하여 우리가 이같이 비방을 받는것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들이 심판 받는것이 정당한 것이다.
3:8 καὶ μὴ καθὼς βλασφημούμεθα
그러면 않겠느냐? 이같이 우리가 비방을 받는 것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1복)
καὶ καθώς φασίν τινες ἡμᾶς λέγειν (부정사: 현재 능동태)
또 이같이 주장한다 어떤이들이 우리를 말하는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ὅτι ποιήσωμεν τὰ κακά,
것을 우리가 행하다 악한 일들을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1복)
ἵνα ἔλθῃ τὰ ἀγαθά;
위함이라 오게하기 그 선한일들이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단)
ὧν τὸ κρίμα ἔνδικόν ἐστιν.
그런사람들이 그 심판은 정당한 것이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 나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결과는 본절과 같이 보다 적극적인 궤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공양(供養)의 책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바 있다. 바울도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선을 이루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 악을 행한 적이 있다. 비록 바울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태도가 변하여, 오히려 유대인이 바울의 과거에 범했던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시각에는 바울의 주장이 도덕 폐기론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소행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종된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 속에서 믿음을 판단하려 하지만, 거짓 판단으로 선을 이루려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 이 판단의 근거는 7절과 8절의 반문식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도무지 조화될 수 없음에도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바울은 본 구절로써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 바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의 교훈을 곡해(曲解)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논술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줄 수 있었다.
로마서 3장 9-18절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3:9 그러면 어떻습니까 ? 우리 유대 사람에게 더 나은 것이 있습니까 ? 전혀 없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더 나으냐? 결코 그렇지 않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다.
직역: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가 더 나으냐?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죄의 세력 아래 있는것을 앞서 지적하였다.
3:9 Τί οὖν; προεχόμεθα; οὐ πάντως·
어떠하냐 그러면 우리가 더 나으냐 아니다 전혀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1복)
προῃτιασάμεθα γὰρ Ἰουδαίους τε
우리가 앞서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유대인 둘다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1복)
καὶ Ἕλληνας πάντας ὑφ᾽ ἁμαρτίαν εἶναι,
그리고 헬라인 모두 아래 죄(의 세력) 있는 것을 (부정사: 현재 능동태)
주해
▣ 우리는 나으뇨 - 본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지칭하는 바가 누구인지 규명해야 한다. (1) 유대인을 통칭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음 근거를 볼 때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본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역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을 가리킬 때 보통 3인칭으로 나타냈으며 2:1-29에서는 유대인이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 (2)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8절에서 사용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부터 18절까지는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그리스도인도 그 죄의 보편성에서 제외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란 바울 자신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더 넓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나으뇨'에 대한 해석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헬라어 '프로에코메다'의 번역인데, 이 동사가 수동태와 중간태의 형태가 같고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동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우리는 나아지는가'로 해석되어 '우리는 나은 자로 판단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중간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능동의 의미이든 수동의 의미이든 간에 '우리는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수동태를 취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현 실존이 죄의 보편성 문제에 있어서 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강조되지만, 중간태를 취하면 유대인과 비교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물음이 강조된다.
▣ 결코 아니라 - '우 판토스'는 고전 5:10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결단쿄 그럴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들은 1, 2절에 기록된 유대인의 유익이 범사에 많다는 진술(陳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 2절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유대인이 갖는 특이한 지위와 역할을 다루었고, 여기서는 유대인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언급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泉田昭). 더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영적 윤리적 상태에 있어서는 별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본 구절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판토스'는 보다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부정어 '우'의 위치를 바꾸어서 '판토스 우크'를 취해야 한다.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아니다', '터럭 만큼도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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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a)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시14:1-3, 사53:1-3,전7:20)
3:10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직역: 이 같이 기록되어져 왔다. 의로운자도 없다. 하나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3:10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이 같이 기록되어져 왔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ὅτι οὐκ ἔστιν δίκαιος οὐδὲ εἷς,
때문이다 않다 있지 의로운 자 도 없다 하나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기록한 바 -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 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DSS)을 통해 입증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시 14;3;53:3),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 의인은 없나니 - 문자적으로는 시 14:1보다 전 7:20에 더 가까운데, '세상에 아주'(엔테게) 없다는 것을 '하나도'(우데 헤이스) 없다고 표현한 점만 다르다. 시편과 비교해 보면, '선을 행하는 자'(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시 13:1, ', 포이온 아가돈, 시 52:2)라는 표현 대신에 '의인'(디카이오스)이라고 변형시켰고, 시편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을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이러한 표현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의인'에 대해 혹자는 '올바른 도덕관을 갖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도 포함시키고 있으나,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죄에 오염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선'이나 '의'라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 하나도 없으며 - 헬라어 '우데 헤이스'는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울이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몇몇 경건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렀기 때문이다(빌 3:6).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의'의 개념 조차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 묵시 문학 속에서도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느님의 판단에 의하면 의로운 자가 없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라는 구절은 신약에 기록된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주장이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버렸고(빌 3:8)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속에서 사용된 보다 권위 있는 구약의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직역: 깨닫는 사람도 있지 않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사람도 있지 않다.
3:11 οὐκ ἔστιν ὁ συνίω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않다 있지 그(사람도) 깨닫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οὐκ ἔστιν ὁ ἐκζητῶν τὸν θεό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않다 있지 그(사람도) 열심히 찾는 그 하나님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깨닫는 자도 없고 - 시 53:2에 대한 70인역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쉬니온)의 목적어로 '하나님'(톤 데온)을 최할 수 잇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시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닫음이다.
▣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3:12 모두가 탈선하여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
직역: 모든 사람이 함께 그들의 길에서 빛나갔다. 그리고 무익하게 되었다. 친절함을 행하는 사람도 있지 않으며,
한사람 조차도 있지 않다.
3:12 πάντες ἐξέκλιναν ἅμα ἠχρεώθησαν·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복)
모든사람이 길에서 빚나갔다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οὐκ ἔστιν ὁ ποιῶν χρηστότητα,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않다 있지 그(사람도) 행하는 친절함을(선함)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οὐκ ἔστιν] ἕως ἑνός.
않다 있지 조차도 한사람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본절은 70인역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시 14:3/13:3 ; 시53:3/ 52:4).
▣ 다 치우쳐 -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3에서는 '사르'로, 시 53: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여세클리난'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1:21)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은 '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는 '모든', '다'(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 즉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1:31)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c)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 시5:9,시140:3)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직역: 그들의 목구멍은 열려져 있는 무덤이고, 그들의 혀들은 속이고 있었다. 그들의 입술들 아래로 독사들의 독이있다.
3:13 τάφος ἀνεῳγμένος ὁ λάρυγξ αὐτῶν,
무덤이고 열려져있는 그 목구멍은 그들의 (분사: 완료 수동태 주격 단수)
ταῖς γλώσσαις αὐτῶν ἐδολιοῦσαν,
그 혀들로 그들을 속이고 있었다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3복)
ἰὸς ἀσπίδων ὑπὸ τὰ χείλη αὐτῶν·
독이(있고) 독사들의 아래로 그 입술들 그들의
주해
본절은 시 5:9;14:3에서 인용된 것이다.
▣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 외식(外飾)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고 비유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다. 인간은 입을 통해서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불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듯이 인간의 혀도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조차 죽일 수 있는 지옥 불과 같다.
▣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 시 5:9의 인용으로 히브리어 사본에서는 '혀로 아첨했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70인역은 이를 '혀를 유창하게 만든다'고 의역하였고, 본문의 원어도 이와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 '속임을 베풀며'의 헬라어 '에돌리우산'은 '속이다', '사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돌리오오'의 미완료형 '에돌리운'에서 '뉘'대신에 '오산'이 붙어 반복적인 의미의 미완료형이 되었다. 즉 계속해서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혀의 특성을 보여준다.
▣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죽이는 독이 가득할 뿐이다(약 3:8). 이것은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함과 같고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약 3:12).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3: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 시10:7)
3:14 그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다.
직역: 저주와 악독이 그들의 입 가득차 있다.
3:14 ὧν τὸ στόμα ἀρᾶς καὶ πικρίας γέμει,
그들의 그 입에 저주 와 악독이 가득차있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본절은 시 10:7의 의미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시 109:17-19) 깨달아야 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저주와 악독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저주하는 주체인 가해자와 악독을 당하는 피해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을 대표적으로 '저주와 악독'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구절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뒷바침해주는 시구이고, 문맥상 강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3: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사59:7,8)
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며,
직역: 그들의 발 들은 피를 흘리는 것에 빠른지라.
3:15 ὀξεῖς οἱ πόδες αὐτῶν ἐκχέαι αἷμα,
빠른지라 그 발들은 그들의 흘리는 것에 피를 (부정사: 과거 능동태)
주해
▣ 그 발은 - 본문은 잠 1:16의 앞 부분과 동일하지만 다음 구절(16, 17절)이 사 59:7, 8의 인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 59:7 상반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포한 후에 13절과 14절에서는 '말'에서 비롯되는 악행을 설명했으며, 본절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악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입의 말과 악행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자연인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선'도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다.
▣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악행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피' (하이마)는 성경에서 '생명의 원천' 또는 '생명의 좌소'(고전 15:50;히 2:14)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쏟아버리다', '피를 쏟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크케오'의 단순 과거 부정사 '에크케아이'와 함께 쓰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의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빠른지라'로 번역된 분사 '와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날카로운', '예리한'(계 1:16;2:12;19:15)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만 '빠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빠르다'를 뜻하는 헬라어 '타키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 '와세이스'를 쓴 것 같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3:16 그들의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3:16 파멸과 비참함이 그들의 길에 있어
직역: 그들의 가는 길들 안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3:16 σύντριμμα καὶ ταλαιπωρία ἐν ταῖς ὁδοῖς αὐτῶν,
파멸 과 비참함이 안에 그 길들에 그들의
주해
▣ 파멸과 고생 - 직접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혹자는 이 표현을 인간의 지독한 잔인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미 2:9에서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환난과 곤고'와 '파멸과 고생'은 모두 영혼이 지옥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나타날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 그 길에 있어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본절은 앞절의 결론으로서 피흘리는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의 길에' (엔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톤) 파멸과 고생이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간 데 마다 남겨진 흔적'으로 파멸과 고생을 이해하였으나 그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미래에 주어질 형벌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의 잔혹한 피흘림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결국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런 파멸(破滅)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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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3: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직역: 그래서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3:17 καὶ ὁδὸν εἰρήνης οὐκ ἔγνωσαν.
그래서 길을 평강의 못한다 그들은 알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혹자는 '평강의 길'을 현실적인 평화 내지 이웃과의 화목으로 해석한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평강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약속이 성취되었다(5:1). 이 평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다. 이 길은 (1)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요 14:6) 동시에 (2)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화평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또한 (3)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가야 할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길로서 성도들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동시에 나타내는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결코 이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또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얻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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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3: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시36:1)
3:18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직역: 그들의 앞에 영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움이 있지 않다.
3:18 οὐκ ἔστιν φόβος θεοῦ ἀπέναντι τῶν ὀφθαλμῶν αὐτῶν.
않다 있지 두려움이 하나님의 앞에 영의 그 눈에는 그들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본절은 시 36:1 하반절의 직접적인 인용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시 14:1a)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11절에서 17절까지의 인용 구절들에 언급된 부패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레이는 본절을 보다 자세히 해석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의 중심부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계산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이므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로마서 3장 19-20절 【모든 인간을 정죄하는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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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3:19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3:19 우리가 아는 것은,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직역: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말하는것을 알고 있다 율법 안에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
모든 입이 막혀지면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된다면 있기 위함이라
3:19 οἴδαμεν δὲ ὅτι ὅσα
우리는 알아오고 있다 그러나 것을 무슨일이든지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1복)
ὁ νόμος λέγει τοῖς ἐν τῷ νόμῳ λαλεῖ,
그 율법이 말한다 그 안에 그 율법이 말하는것은 (동사1,2: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ἵνα πᾶν στόμα φραγῇ
위함이라 모든 입을 막혀지면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3단)
καὶ ὑπόδικος γένηται πᾶς ὁ κόσμος τῷ θεῷ·
그리고 심판아래 있게 된다면 모든 그 세상이 그 하나님께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디3단)
주해
▣ 율법이 말하는 바 - 10절에서 18절까지 인용 구절들의 출처는 시편과 이사야서였다. 이 책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서'에 포함되지 않으나 통상적으로 바울은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
▣ 율법 아래 있는 자들 - 헨드릭슨은 이 용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1) 유대인. 랑게와 리델보스가 이 견해를 따른다. (2) 로마에 있는 신자들. 렌스키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나 본서 어디에서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로마에 거주하는 신자들에게 국한되었다는 암시가 없다. (3) 모든 사람이 해당되나 특별히 유대인들. 어드만에 따르면, 본 구절은 자기들의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애쓰는 유대인들과, 그밖에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진 전체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4) 모든 사람, 세상 전체. 머레이는 6:14의 '법 아래'(은혜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함)와 본 구절을 구분하여 본 구절은 율법이 적용되는 영역, 즉 온 세상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블랙역시, 정죄되어 하나님의 몽둥이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온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다너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이 주장은 본절 하반절에서 모든 입, 온 세상,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용어들과 관련지어 볼 때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하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온 세상을 지칭한다.
▣ 모든 입을 막고 - '히나'('곳')가 이끄는 본 구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결과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이 절속에서 반복된 '모든'(판)이라는 단어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특히 20절에 기록된 '모든 육체'(개역성경은 '모든'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음)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한다. '막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게'는 '잠잠케 하다', '멈추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랏소'의 제 2단순 과거 가정법 수동태형으로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 앞에서 최소한의 변호마저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여기서 (1) 단수형을 사용하여 '입'(스토마)과 '프라게'를 연결시킨 것은 '온 세상'을 하나의 집단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심판대 앞에 선 피고인들 각자의 침묵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2) 또한 단순 과거 가정법을 사용한 것은 현재 가정법이 반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작의 단회적 성격, 즉 심판대 앞에서는 심판의 단회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 - 율법의 기능은 심판대 앞에 있는 피고들을 변호하거나 또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되게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대 앞에 기소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동일한 심판대 앞에 서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하면서 심판을 논했을 때 이방인들조차도 이 심판에 대하여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복음이나 율법을 접하지 못한 자들이 하니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이방인들이 일반 계시를 통하여 알 수 있었듯이 심판에 대한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1:20, 32). 따라서 '온 세상'(*, 파스 호 코스모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의 형벌을 해결할 수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무능력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다.
직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가 의롭게 할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의 온전한 지식을 통하여
죄를 인식한다.
3:20 διότι ἐξ ἔργων νόμου οὐ δικαιωθήσεται
그러므로 의하여 행위로는 율법의 없다 의롭게 될 수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πᾶσα σὰρξ ἐνώπιον αὐτοῦ,
모든 육체가 앞에서 그의
διὰ γὰρ νόμου ἐπίγνωσις ἁμαρτίας.
통하여 왜냐하면 율법의 온전한지식 죄를 인식한다
주해
▣ 그러므로 - 모든 사람이 율법의 세력권 아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또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이 단어를 사용했다. 혹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기에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는 본절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정죄 아래 있게 된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실을 알리는데 바울의 의도(意圖)가 있다는 것을 든다. 내용의 흐름으로 비추어 볼 때 본절은 지금까지 전개해 온 논리에 대한 결론이 되면서, 21절 이하의 내용을 준비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러므로'와 별 차이가 없다.
▣ 율법의 행위로 -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할례와 같은 의식에 관한 율법을 수행하며 복종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연적(혹은 본성적)인 양심에 따라 수행되어지는 행위라고 한다. 이외에 혹자는 순전한 양심에 의한 율법의 행위, 고도로 개선된 자연적인 율법 행위, 의식 율법의 행위, 도덕 율법의 행위 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이 용어는 의식 율법 특히 할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본서에서도 바울은 이 용어를 '할례'에 대한 진술후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18-2:22와 본장 10-18절의 내용은 모두 도덕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4:2에서 '율법의 행위'란 용어 대신에 단순히 '행위'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바울 서신 중 본서와 갈라디아서의 공통 주제인 '이신 칭의'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 그 자체에서 나오는 어떠한 것으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바울은 굳이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면서까지 강변할 필요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구약성경의 율법, 나아가서는 양심의 법,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하여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했던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시 143:2의 '인생'을 의도적으로 '육체'(사르크스)란 용어로 바꾸어 인용했다. '사르크스'는 단순히 인간의 몸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마'와는 달리 죄와 대항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
▣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바울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은 행하여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 탄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옷입어야 한다. 본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율법이 죄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없음을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로마서 3장 21-28절 【이신득의의 원리】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3: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언을 받은 것이다.
직역: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 가 나타났다.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이다.
3:21 Νυνὶ δὲ χωρὶς νόμου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πεφανέρωται
이제는 그러나 상관없이 율법 의가 하나님의 나타났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μαρτυρουμένη ὑπὸ τοῦ νόμου καὶ τῶν προφητῶν,
증거를 받으며 의하여 그 율법 과 그 선지자들에 (분사: 현재 수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이제는 -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데'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본절 전체가 지금까지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는 '그러나 이제는'(뉘니 데)이란 용어를 '대전환점'
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그는 본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논리의 시작이라는 점과 아울러 본 서신 전체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이제는'이란 단어가 시간상의 대조, 즉 '율법 아래 있을 때'와 '율법에서 자유로울 때'를 대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로이드 존스의 견해와 같이 인간 상태의 전환(轉換)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율법에 의존된 관계'와 '율법에서 벗어난 관계'간의 대조를 나타낸다.
▣ 율법 외에 - 이 표현속에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나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그 의를 옷입을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고 율법의 의 이외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 하나님의 한 의 - 어거스틴은 이 의가 '중생의 은혜이며,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자 값없이 주신 은혜이고, 율법의 행위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하면서 좀더 부가적으로 시 32:1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선행이나 심지어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선행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나타났던 '절대적(絶對的)이고 객관적인 의'로서 이제는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칼빈은 본 구절을 '복음이 값없이 의를 주는 점에 있어서 율법과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가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혹자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과 본 구절의 '율법'과의 의미상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는 '칭의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며, 후자는 '칭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의 의미와는 달리 '선지자들'이라는 단어와 함께 단순히 구약성경 전체를 나타내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단순히 '성경'이라고만 말씀하시기도 했으며, 또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선지자' 혹은 '모세와 선지자들'등으로 언급하셨다. 본 구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성경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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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3: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다.
직역: 곧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왜냐하면 차이가 있지 아니하다.
3:22 δικαιοσύνη δὲ θεοῦ
의가 곧 하나님의
διὰ πίστ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εἰς πάντας τοὺς πιστεύοντας.
인하여 믿음(확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으로 모든 그(사람에게) 믿는(확신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οὐ γάρ ἐστιν διαστολή,
아니한다 왜냐하면 있지 차이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1:17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암시적으로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믿음' 의 구체적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정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시작한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영접하는 주관적인 고백에 의하여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법정적 판결은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새로운 삶의 운동력이 되며 또한 새로운 삶을 주관하는 원리(原理)가 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으로 소유격이 사용되고 있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가졌던 자로 해석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 기록된 믿음은 예수 자신의 믿음으로써 주께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믿음을 바울이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성격이 예수께서 지상 사역에서 보여주신 믿음을 흉내내는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신앙의 대상이시다. 바울이 1:3, 4에서 설명한 예수를 본절에 와서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명백하게 설명한 것은 그분이 가졌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구속자로서 화목 제물이 되시고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라고 진술하지 않고 '믿는 자'(투스 피스튜온타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갈 2:16에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표현하였다(1:17).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믿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절에서 시사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며 그 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할 수 없다. 특히 '믿는 자'를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믿음은 과거의 것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며 미래의 예정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계속 믿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 차별이 없느니라 - 율법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 죄있다고 기소(起訴)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듯이, 새로 나타난 한 의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마음의 손'이다. 따라서 그 손을 내미는 모든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
직역: 왜냐하면 모든사람이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지 못한다.
3:23 πάντες γὰρ ἥμαρτον
모든사람이 왜냐하면 죄를지었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ὶ ὑστεροῦνται τῆς δόξης τοῦ θεοῦ
그리하여 이르게 되지 못한다 그 영광에 그 하나님의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복)
주해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고 그 의로 옷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20절)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다시 반복하고 있다.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머레이는 이에 대한 견해를 네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 칼빈.이 이 견해를 취한다. 그리고 밤비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광, 존귀, 또는 칭찬을 받지 못한 것. 렌스키가 이 견해를 주장한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한 것. 헨드릭슨이 이견해를 지지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4)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눠질 완성된 영광을 지니지 못한 것. 리델보스가 이 견해에 동의한다. 그런데 본절은 '죄'와 매우 밀접한 구절이므로,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여해 주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도 포함될 수 있고, 만물에 대한 지배권(창 1:28)도 포함될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습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직역: 그리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정의롭게 되었다.
3:24 δικαιούμενοι δωρεὰν τῇ αὐτοῦ χάριτι
정의롭게 되며 값없이 그 그의 은혜로 (분사: 현재 수동태 주격 복수)
διὰ τῆς ἀπολυτρώσεως τῆ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통하여 그 구속을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
주해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표현을 바울이 엡 1장에서 주로 사용한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엡 1장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며,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실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나 '값 없이'란 말을 내용상 차이점이 없다. 다만 '값 없이'란 말이 부가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드러나며, 또한 '구속'이란 말이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과 관계되어 있기에 강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행위임이 부각된다. 따라서 '값 없이'란 말은 엡 2:8에 언급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와도 일맥 상통한다. 한편 23절과 본절을 합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구원받게 된다는 보편 구원론적인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22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효력(效力)이 있다고 한 바울의 선포가 본절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 헬라어 '디카이우메노이'는 현재 분사 수동태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의롭게 되는 것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값 없이'(도레안)라는 단어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있는 바,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분사적 의미는 22절에 기록된 현재 분사 '투스 피스튜온타스'('믿는 자들을')와 연결되어 있다. 후자는 '믿는 자'라는 능동적 의미를 시사한 반면 전자는 '이롭다 함을 받은 자'라는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바울은 수동형과 능동형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 의지를 대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엡 1:7) 구원의 영광을 부각시키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받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3: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이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어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직역: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에 일어나 죄들을 간과 하시어 의로움을 내보내기 위하여 그의 피 안에 믿음을 통하여 속제물로 예수를 제시 하셨다.
3:25 ὃν προέθετο ὁ θεὸς ἱλαστήριον
이 예수를 제시 하셨다 그 하나님께서 속제물로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 3단)
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ἐν τῷ αὐτοῦ αἵματι
통하여 그 믿음(확신)을 안에 그 그의 피에
εἰς ἔνδειξιν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αὐτοῦ
위하여 내보이기를 그 의로움을 그를
διὰ τὴν πάρεσιν τῶν προγεγονότων ἁμαρτημάτων
때문에 그 간과하시어 그 전에 일어난 죄들의 (분사: 완료 능동태 소유격 복수)
주해
▣ 그의 피 -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심은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바쳐 희생시키셨음을 의미한다.
▣ 화목 제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이 단어의 번역에 따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1)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는 견해. '힐라스테리온'이 히 9:5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혹은 '시은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온 백성을 위한 속죄'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희생의 '피'가 언급되어 있으므로 '속죄 제물'로 번역되어야 한다. (2) 화목 제물. 바울은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속죄뿐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24절에서 이미 '구속'에 대한 언급을 했으므로 속죄에 대한 것을 계속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속죄'보다는 '화목'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 두 가지의 견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문자적으로 '힐라스테리온'의 의미를 밝혀야 겠지만, 신약성경 가운데 이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 다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힐라스테리온'이 '구속'과 함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으로 나아간다. 그런 이유로 '힐라스테리온'은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역 성경 중 NIV는 이 두가지 번역의 시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헨드릭슨 같은 학자도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인정한다.
▣ 세우셨으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티데미'는 '계획을 도모하다', '제출하다', '앞에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절에서는 '의도하다'란 의미가 적절하다.
▣ 길이 참으시는 중에...간과하심으로 -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것'(아노케)은 결코 하나님의 불의하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알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과'(看過)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인내로 말미암아 죄의 가리움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6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3:26 이때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자신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분이심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직역: 하나님께서 그 오래참음 가운데 지금시간 안에 자기 의로움을 내 보이기를 위하여 예수의 믿음안에 속한 의로움 사람으로 의롭게 있기 위함이라
3:26 ἐν τῇ ἀνοχῇ τοῦ θεοῦ,
가운데 그 오래참음 그 하나님께서
πρὸς τὴν ἔνδειξιν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αὐτοῦ ἐν τῷ νῦν καιρῷ,
위하여 그 내 보이기를 그 의로움의 그의 안에 그 지금 시간
εἰς τὸ εἶναι αὐτὸν δίκαιον
위함이라 그 있기 그를 의롭고 (부정사: 현재 목적격)
καὶ δικαιοῦντα τὸν ἐκ πίστεως Ἰησοῦ.
그리고 의로운사람으로 그 속한 믿음(확신)에 예수의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단수)
주해
▣ 곧 이 때에 - '카이로'는 정해진 때를 의미하는데 이 때는 종말론적인 시기,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실현하시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던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때로서 지금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인 칭의를 제공하는 때를 의미한다.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오해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로 삼으사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진노와 저주를 담당케 하신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사는 여전히 공의로우시며 그의 공의로운 처사를 따르는 자들도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 - 본절에서 '의'를 뜻하는 '디카이오스'는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는 앞에 있는 두 의로움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요한은 '디카이오스'를 심판과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또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한다. (1) 바울은 죄인들의 행악을 당장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랜 세월 동안 간과하신 하나님의 인내를 의의 개념으로 해석하며 (2) 또한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속에 드러낸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안의 의로움을 인하여 참으시기도 하셨으며 또한 죄인의 의로움을 위하여 희생적 죽음을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으므로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되는 사건 곧 의롭다고 간주하는 신분의 변화가 현재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3: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3:27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다. 어떤 율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이다.
직역: 그런즉 어디에도 자랑할 여지가 전혀 없다. 무슨 율법을 통한 행위들로냐? 아니라 다만 믿음을 통한 믿음의법이다.
3:27 Ποῦ οὖν ἡ καύχησις; ἐξεκλείσθη.
어디에도 그런즉 그 자랑할 여지가 전혀 없다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단)
διὰ ποίου νόμου; τῶν ἔργων;
통한 무슨 율법 그 행위들로냐
οὐχί, ἀλλὰ διὰ νόμου πίστεως.
아니라 다만 통한 법 믿음의이다.
주해
▣ 자랑할 데가 어디뇨 - 인간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
▣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바울은 '믿음의 법'을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 믿음이 결코 인간 편에서 취한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선물에 불과하다(엡 2:8).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3: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인정한다.
직역: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들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한사람을 의롭게 되는것을 우리가 생각한다.
3:28 λογιζόμεθα γὰρ δικαιοῦσθαι (부정사: 현재 수동태)
우리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롭게되는 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1복)
πίστει ἄνθρωπον χωρὶς ἔργων νόμου.
믿음(확신)으로 한 사람을 상관없이 행위들과 율법의
주해
▣ 그러므로 - 어떤 사본에는 접속사 '가르'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같이 본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면 27절에 종속되어 부가적인 설명이 되는 보충절이 된다. '믿음의 법'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 본절은 독립적으로 해석되기보다 종속적으로 해석되는 편이 타당하다.
▣ 우리가 인정하노라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26절) 의미하며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인정하노라'에 해당하는 헤라어 '로기조메다'는 '생각하다' '추론하다' 또는 '결론을 맺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로기조마이'의 현재 중간태로서 '그러므로'가 지시하는 두 가지의 요소를 확고 부동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성도들과 더불어 확실하게 결론을 맺은 두 가지는 (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라는 사상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로마서 3장 29-31절 【이신득의의 보편성】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29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정으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직역: 하나님은 유대 사람의 하나님이시냐? 혹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냐? 역시 그렇도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3:29 ἢ Ἰουδαίων ὁ θεὸς μόνον;
혹 유대사람들의 그 하나님은 오직
οὐχὶ καὶ ἐθνῶν; ναὶ καὶ ἐθνῶν,
아니냐 역시 이방인들의 그렇도다 역시 이방인들의
주해
▣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킨 종족 수호신의 개념을 공격하면서 범우주적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근동 지방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나라로서(출 19:6) 열국의 구속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무시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율법의 준행과 할례 제도의 시행이 그러한 자신들의 신앙이 옳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확신했다.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의 잘못된 신앙관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4:1-25에서 유대인의 자랑거리인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미리 정당화 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감히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과 같이 무거운 범죄에 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의 교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되심을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을 '고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동자들과 같은 '집단' 또는 '무리'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혈연 관계의 결속(結束)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여졌다. 족장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없으나 시내산 계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별 의식과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는 민족 의식에 의하여 배타 의식은 강화 되었다. 특히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어서 '이방인' (에드노스)이라는 말 자체가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서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 참 이스라엘의 영광을 높이는 자로서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구원은 메시야가 오셔서 참된 빛이 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예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방인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셨으며 또한 제자들을 이방 가운데 파송하시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동참한 이방인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또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된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3:30 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직역: 하나님께서는 한분 이시므로 또한 무할례자도 믿을 통하여 할례자도 믿음에 의하여 그분이 의롭게하실 것이라
3:30 εἴπερ εἷς ὁ θεὸς
이시므로 한 분 그 하나님께서는
ὃς δικαιώσει περιτομὴν ἐκ πίστεως
그분이 의롭게하실 것이라 할례자 의하여 믿음(확신)에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καὶ ἀκροβυστίαν 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그리고 무 할례자를 통하여 그 믿음(확신)을
주해
29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조된 것처럼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같은 방식, 같은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이신 칭의를 얻는 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바울이 그동안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적절하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 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란 의미로 이해된다. 29절의 내용에서도 역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바울이 주장했던 점을 참고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합니까 ?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3: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으니,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
직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율법을 폐지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도리어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운다.
3:31 νόμον οὖν καταργοῦμεν 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율법 그런즉 우리가폐지하느냐 통하여 그 믿음(확신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복)
μὴ γένοιτο·
없다 결코 그럴 수 (동사: 희구법 과거 중간태/디 3단)
ἀλλὰ νόμον ἱστάνομεν.
도리어 율법 우리가 굳게세운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복)
주해
▣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20절)고 주장했으며, 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21절) 주장하면서 믿음의 법(27절)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背馳)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마르시온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저급한 신으로 취급하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했다.
▣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말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지킨다'란 의미이다. 어떻게 해서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대담은 이신 칭의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이다.
첫댓글 샬롬^^
25절 직역 중 "죄들"에 관심합니다. 1:1-5:11 절까지는 대체로 "죄들"로 5:12절 부터 8:17 절까지 대다수 "죄"로 복수와 단수로 분별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계시하는 진리를 옳게 분별하는데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7장 죄와 죄의 법 율법의 부분 집중하여 보려고 분석연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
감사 합니다.
매일 밤을 새워 연구하고 낯에는 강의를 하다 보니
요즘 몸 상태가 많이 안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체력좀 보강하고 연구 하려구요
너무 많이 앉아 작업하다 보니 어께와 허리도
많이 안좋아 졌습니다.
많은 타이핑으로 손가락도 마디마디 염증도 생겼구요.
7장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강의 끝나면 좀 쉬려고 합니다.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을 기도합니다.
죄들의 형벌로 부터의 해결책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2-26 말씀 그대로 읽기만 해도 알 수있다.
죄들에서 의롭다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