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가 혼연히 일어나 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중생이 사는 세계를 욕심으로 이루어진 세계[欲界],
색이 남아 있는 세계[色界], 색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無色界] 셋으로 나눕니다.
내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욕계입니다.
마음은 저 혼자서는 생겨나지 못하고
형상[色]을 빌미로 생겨나기 때문에 색계라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보거나 듣기 전에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다가
촛불을 보거나 종소리를 들으면 촛불이구나,
종소리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색계입니다.
무색계는 색이 없어진 세계이므로 경계를 반연하는
거친 생각은 없으나 마지막 번뇌는 남아 있는 세계입니다.
삼계는 아직 마음이 일어나는 세계이므로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세계는 마음 하나로 귀결됩니다.
과거의 부처님이나 미래의 부처님이나
모두 이 마음으로 마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석가모니도 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법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음법은 형상이 없어 문자로는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가령 ‘마음 심(心) 자’라도 있어야 마음인 줄 알고 전하지 않겠습니까.
달마스님은 지금 묻는 것이 네 마음,
대답하는 것이 내 마음이라고 대답하였으니,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법문을 듣고 그냥 깨치면 구태여 어렵게 화두 들고 참선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네게 대답해줄 수 있겠느냐,
입이 저 혼자 대답할 수 있겠느냐,
마음이 입을 빌려서 대답을 하는 것이지,
또 너에게 마음이 없다면
무엇을 빌려서 나한테 묻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대답하는 그것이 마음인 줄은 알지만,
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가?
어느 천년, 만년, 억이나 조 같은 숫자로 헤아릴 수가 없는,
시작한 때가 없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도록
날마다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모든 시각,
모든 장소가 다 여러분의 본마음이며 본 부처입니다.
마음은 지금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에 가면 산에도 있고 바다에 가면 바다에도 있고 저자에 가면 저자에도 있고
서울에 가면 서울에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늘상 하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는 말도 이런 뜻에서 쓴 것이니,
이 마음말고는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고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있는데,
이것을 떠나서 다른 부처가 없으니 이 마음을 떠나 보리(菩提)나
열반(涅槃)을 찾아 다닌다면 이치에 닿지 않는 일입니다.
자성(自性)은 진실하여 인(因)도 아니고 과(果)도 아니라 하였는데,
무엇이든지 자기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밥 먹는 성품, 옷 입는 성품, 지금 듣고 있는
이 성품은 실다워서 거짓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씨를 심어 열매를 보듯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나오는 것이 법칙인데,
본래 자성은 원인도 결과도 아닙니다.
자기 성품이 바로 보리이며 열반이니,
원만하고 밝고 고요하되 비추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래도 자기 마음 밖에 보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어디에 있는지 그 부처와 보리를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허공을 손으로 잡는 격이라 주먹으로 움켜잡을 수도 없고
쥐었던 손을 펴서 허공을 놔줄 수도 없습니다.
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는다는 것도 그와 같아서
한평생을 찾아도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되는가?
제 마음으로 지어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자기 마음을 놔두고 바깥에서 찾겠습니까.
모든 부처님들이 한결같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음 바깥에 부처가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부처라는 생각[佛見]’조차 일으킬 것이 없습니다.
중생들은 자기 본심을 확실히 알지 못해서 의혹을 품기 때문에
부처라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설마 자기가 부처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돌로 만든 부처나 나무로 만든 부처 같은 무정물(無情物)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처가 있으니 그것을 쫓아다니느라 피곤하고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자기가 부처인 줄을 믿지 않으면 제 스스로 속는 것이라,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부처는 중생을 속인 적이 없는데 부처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중생들이 뒤바뀐 생각을 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요즘도 어떤 이들은 참선하다가 걸핏하면 무슨 부처가 보인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부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이 법문 듣고는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제도하지 못한다 했는데,
자기 부처말고 딴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는 자는 부처를 알지 못해 그러는 것입니다.
제 마음이 부처인데 뭐 하러 부처에게 절을 할 것이며,
제 마음이 부처인데 무얼 가지고 부처를 염하겠습니까.
예불(禮佛)도 염불(念佛)도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안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경을 외우지 않으며,
부처는 계를 지니지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 않으며, 부처는 선이나 악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 부처를 일러주는 말씀이니,
이대로 알아버리면 깨닫는 것이지 다른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성품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견성하면 부처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견성을 못했다면 염불을 하고 경을 외우고 재(齋)를 지내고
계를 지켜도 성불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염불을 부지런히 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좋은 과를 얻습니다.
경을 많이 외우면 사람이 총명해지고,
계를 잘 지키면 극락에 가서 나고,
보시를 많이 하면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다들 좋은 결과를 얻기는 하지만
이들이 부처를 본 사람은 아닙니다.
아직 자기 성품을 보지 못했다면 선지식에게 가서 참구하여
생사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선지식이란 견성한 사람입니다.
견성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십이부 경을 막힘없이 설하더라도
생사를 면치 못해서 삼계에 윤회하여 고통을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옛적에 선성(善星)비구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어떻게 총명하던지 십이부경을 다 외웠습니다.
그러나 팔만장경을 다 외우고도 윤회를 면하지 못했으니,
자기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성과 같이 총명한 비구도 그랬거늘 지금 사람들은 겨우 경론 서너 권 송한 것 가지고
불법을 삼으니 어리석다 하겠습니다.
견성에서 ‘성품 성(性) 자’는 부처의 성품을 뜻합니다.
이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 이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재한 사람입니다.
보통 중생들이 하고 싶은 대로 욕심껏 한다면 가는 곳마다 부딪치겠지만
이런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걸림이 없습니다.
또 부처는 아무 일도, 아무 작위도 없으므로 한가하고 편안한 분입니다.
견성을 못하고는 아무리 종일토록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부처를 찾는다 해도 부처를 볼 수 없습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찾으니 될 일이 아니지요.
아직 깨닫지 못한 이는 선지식을 찾아뵙고 간절히 물어서 알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물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불법인데 선지식에게 무엇을 얻어 오느냐고.
물론 불법이 주고받고 얻고 잃고 하는 다른 법과는 달라서,
얻을래야 얻을 수도 없고 잃을래야 잃을 수도 없지만,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뭔가를 손에 쥐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얻을 것 없는 이 법을 어떻게 얻었는지 길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화두를 준다든지, 화두 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든지,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인생은 잠깐이고 생사의 일은 막중하므로 혼자서 허송세월하지 않으려면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인생을 속절없이 지낸다면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살아서 아무리 보배가 산더미같이 쌓이고 부모니 자식이니
형제 친척이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더라도,
눈을 떴을 때나 보이는 것이지 눈 감았을 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유위법이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金剛經)』 제일 끝머리에도 “모든 유위법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하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는 사구게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상(相)을 내서 하는 법은 전부 유위법입니다.
세상살이가 다 유위법이고,
우리 불법 중에서도 상을 내서 하는 것은 다 유위법에 들어갑니다.
몽환포영 등의 비유는 한마디로 세상사가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칠팔십 년이 잠깐 사이에 넘어가니 오늘 못하면 내일 하지,
금년에 못하면 내년에 하고,
내년에 못하면 그 다음에 하고, 이렇게 미룰 일이 아닙니다.
생사를 누가 알겠습니까.
꼬박꼬박 늙어서만 죽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생사입니다.
그러니까 급한 마음으로 스승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불성이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기가 찾는 것이지만,
스승의 도움 없이는 밝게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드물기는 해도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해서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승 없이 바른 안목으로 공부하다가
어떤 인연이 터지면 자기 공부가 성현의 뜻과 합치하는데,
이런 사람은 선지식한테 가서 참례할 것이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아주 수승한 근기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았어도 미혹한 사람과는 처음부터 다르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그 정도가 못 되므로 스승을 찾아서 참학(參學)을 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검고 흰 것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전한다고 망언을 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설사 법문을 잘한다 해도 옳은 소리가 아닙니다.
과거 어떤 스님은 어찌나 법문을 잘했던지
돌멩이를 앞에 놓고 설법을 하면
돌멩이들이 머리를 끄덕였다고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법문을 잘하면 또 하늘에서 꽃비를 내린다고도 합니다.
아무리 쏟아지는 비처럼 거침없이 법문을 할지라도
성품을 보지 못했으면 그 법문이 다 마구니의 설이지 부처의 말씀은 아닙니다.
법을 설하는 자는 마구니 왕이 되고,
그를 따르는 어리석은 무리들은 무지해서 스승이 지휘하는 대로 따라가 마구니의 백성이 됩니다.
봉사 하나가 여러 봉사를 끌고 간다[一盲引衆盲]는 말이 있는데,
자기 혼자만 개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는 봉사도 다 개천에 빠지겠지요.
이 세상에는 오랫동안 많은 종교가 있어 왔고 지금도 이름 모를 종교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법 종교 구실도 하고 권속들이 많은 종교도 있지만,
그런 중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봉사 같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눈뜬 사람이라면 봉사가 가자는 대로 끌려갈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견성을 못한 사람이 “내가 부처다.” 하고 중생을 속여 끌고가서
생사의 바다에 빠뜨리면 큰 죄인이 됩니다.
팔만대장경을 다 외워 전하더라도 부처님 집안의 권속은 아니니,
검고 흰 것도 구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사바다를 벗어나
삼계의 윤회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냐 중생이냐 하는 것은 견성을 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이라고 해서 부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우리에게 갖추어진 그 부처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 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래도 중생의 성품을 여의고 따로 얻을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부처가 어디 있는지 내놔 보십시오.
이 방 대중들이 다 중생인데,
이 방 대중말고 부처를 하나라도 가리켜 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 불단에도
부처님이 계시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우리 자성불을 지적하는 것이니,
이 성품을 내놓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부처를 내놓고 성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