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트 달인은 스무 살
최서온
남들은 스무 살 시절을 떠올리면 향긋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런데 내 스무 살을 떠올리면 기름 냄새가 콧구멍을 맴돈다. 1년 내내 ‘마가린’을 만져야 했으니까.
수능 시험 성적표가 나온 날이었다.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다. 사교육 없이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고 믿으셨던 순진한 부모님은 입시 실패의 원인을 내 의지박약에서 찾았다.
“재수하고 싶으면 네 돈으로 해.” 첫 아르바이트 출근을 앞두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나와는 달리 공부를 상당히 잘했던 아이였는데, 원하던 대학에 근소한 성적 차이로 떨어졌다. 친구의 부모님은 곧바로 재수학원을 등록해주셨다. 나는 부러운 마음을 숨기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을 나섰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그 스낵바는 신도림역 1호선 상행선 플랫폼에 있었다. 시급은 5천 원. 당시 시급이 4,680원인데다 적지 않은 사장들이 그보다 못한 값으로 어린 학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시절인 걸 생각하면 꽤나 괜찮은 보수였다.
면접을 봤던 사모님은 훗날 내 등장에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녀가 생각한 새 동료는 최소한 30대 후반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젊다 못해 ‘어린애’가 와서 일하겠다고 하니 나라도 기가 찼을 것이다. 사장님 부부의 큰 아이가 나보다 고작 세 살 어렸으니 오죽했을까? 그날 면접을 본 나는 토스트 하나와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소식을 손에 쥔 채 스낵바를 나왔다.
‘남의 돈 벌어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일을 시작하니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사실 신도림역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국 지하철역 중에서도 일간 이용객 수가 가장 많은 역 중 하나다. 이들 중 스낵바를 찾는 손님들은 성미가 매우 급했다. 나는 이들에게 어묵과 김밥, 우동, 토스트, 와플을 팔아야 했다. 나는 음식들을 만들기도, 건네주기도, 돈을 거슬러주기도 했다. 확실히 내 또래 아이들이 쉽게 선택할만한 일자리는 아니었다.
일하면서 고된 노동보다는 감정에 가해지는 자극을 참아내는 게 고역이었다. 사람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음식들을 휙휙 낚아채 갔고, “여기서 지하철을 타면 의정부로 가는 게 맞나요?”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해줘도 의심하는 눈치를 보인다. 함께 일하는 이모가 “손님, 이 아가씨가 의정부 출신이에요. 아가씨 말이 맞아요.”라고 거들어줘도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아가씨’ 하니까 생각난 건데, 스무 살이던 그때 나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했다.
“저기요”, “학생”, “아가씨”, “이모”, “애기야”, “언니”, “아줌마” …….
그러니까 스무 살은 애기도 될 수 있고, 아줌마도 될 수 있는 엄청난 나이였던 셈이다. 무슨 호칭으로 부르든 그 뒤에 붙는 반말 조의 주문이 더 참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어떨 때는 감정 제어가 힘들었던 스무 살에게 대놓고 욕지거리를 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서른둘인 지금의 나 역시 감정을 가다듬는 게 여전히 서툴다는 걸 그때의 내가 알았다면 뭐라고 말해 줬을까? “성질 좀 죽여라. 어떻게 10년 넘게 배운 게 없냐?”라고 하지 않았을까?
퇴근할 때가 되면 매일 나는 기름 냄새를 풍기는 녹초가 되었다. 상의와 하의는 물론, 내의부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마가린이 스며 냄새가 진동했다. 안쪽에 고이 넣어두어 유일하게 냄새가 침범하지 않은 겉옷으로는 기름내를 막기 역부족이었으리라. 괜스레 지하철을 타는 게 부끄러웠던 나는 차비도 아낄 겸 지하철로 10분이면 되는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어서 출퇴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나는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끝도 없이 드는 생각이 머릿속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둘 틈을 줄 수 있어 좋았고, 그 생각이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어폰을 통해 귓속으로 전해지는 음악은 내 빠른 걸음걸이에 맞춰 템포(Tempo)가 빨랐지만, 당시 내 머릿속은 몸에 밴 기름내만큼이나 우중충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당시에는 하루에 6시간씩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8시간으로 늘어났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내년에는 어떻게든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대로 개방적인 편이었다. 단, 교육관에 있어서는 부모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엄마, 아빠의 뜻은 완강했기 때문에 학원도 다니지 못한 채 스무 살 갓 세상에 나온 나는 스스로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수능 교재를 사고 독서실을 끊어두긴 했지만,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하다 보니 독서실에 가게 되는 날보다 그대로 집에 가서 쓰러지는 날이 더 많았다. 이런 상태로는 대학 진학은 요원해 보였다.
부모님께 삼수한다고 하면 그때는 정말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나는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내년에는 정말 내가 생각하던 20대 초반의 생활을 만끽할 수 있을까?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하던 일은 기름내가 밴 옷을 벗어 세탁실에 넣어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스무 살 기름내 인생이 아무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옷에 마가린 냄새가 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토스트 불판 때문인데, 나는 널찍한 불판에 마가린을 둘둘 둘러 토스트 속 재료부터 완성품까지 만들어야 했다.
토스트 만들기 작업은 아르바이트 첫날부터 내게 시련을 안겨줬다. 사모님께 토스트 굽기를 배우면서 한창 달궈진 불판을 다루던 중 그만 오른손 중지 마디가 살짝 불판을 스쳐버린 것이다. 순간 손가락 마디가 따끔하면서 알싸하게 달아올랐다. 집에 가보니 기다란 물집이 잡혀 있었다.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한 나는 애써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하루 만에 잘릴까 봐 스낵바의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시간이 좀 지나 이 사실을 사모님께 고백하자 한참 웃으시더니 이내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걸로 일하는 사람을 자르는 사장은 없으니 다치면 바로바로 말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스무 살이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나이라고 하는데, 나의 스무 살은 무엇이든 두려워하던 나이였다.
이후로도 토스트 만들기는 한동안 내게 여러 방식으로 ‘텃세’를 부렸다. 토스트를 만든 후 종이 포장에 쏙 넣어 손님한테 건네줘야 한다. 그런데 내가 집게를 잘 못 다루는 것인지 토스트 포장지가 매번 찢어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토스트에는 달걀에 양배추와 당근을 채 썰어 부친 속 재료가 들어가는데, 양배추를 채칼에 썰다 보면 종종 손가락도 같이 썰어 유혈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손님의 입에 내 피가 함께 들어가는 일만은 막아냈지만 ‘왜 나는 이렇게 일을 못 할까?’ 하고 자책했던 것 같다.
누군가 ‘꾸준함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불판을 다루는 내 모습에도 변화가 생겼다. 토스트 주문만 들어오면 도망가고 싶었던 내가 어느새 익숙하게 주문받고 별 어려움 없이 토스트를 척척 만들어 손님에게 건네는 것이다.
종이 포장지가 찢기는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오는 지하철을 타야 한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손님에게 내가 지하철보다 더 빠르다며 여유 있게 토스트를 완성해 건네기도 했다. 일하기 시작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내가 토스트 만드는 모습을 유심히 보시던 사장님이 한마디 하셨다.
“이야, 이제 나보다 토스트 잘 만드네!”
격려의 말씀인 줄 알지만, 사장님 실력을 뛰어넘었다는 칭찬에 기분이 정말 좋았다. 나의 이런 ‘청출어람’은 단체 손님이 왔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한 번은 이른 오후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 네 명이 스낵바 앞으로 다가왔다. 학생들은 ‘햄치즈 토스트’ 네 개를 주문했다. 사장님이 뒤에서 넌지시 말했다.
“실력 발휘할 때가 왔구먼!”
난 자신 있었다. 이미 레시피는 정해져 있어 어느 정도 숙련된 상태에서 토스트를 여러 개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이미 어느 정도 달궈진 불판 온도를 좀 더 높이고 마가린을 슥슥 문지른다. 식빵 여덟 조각을 올려준 후 미리 만들어둔 계란 속을 그 옆에 올려주고, 슬라이스 햄은 얇아서 빨리 익으니 식빵들을 뒤집을 때쯤 나중에 올린다. 보기 좋게 일렬로 선 식빵들에 사선으로 머스터드를 뿌려준다.
토스트를 만드는 내 모습을 보며 여학생들이 신기하다며 탄성을 질렀다. 내심 뿌듯했지만 나는 애써 입꼬리를 내리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나는 토스트 위로 다시 갈색 설탕을 뿌려주고, 바삭하게 익힌 햄을 놓는다. 또 그 위에는 슬라이스 치즈를 올려주는데, 치즈는 가열된 재료들의 가운데에 올려줘야 빨리 잘 녹는다. 다시 그 위로는 계란 속, 그 위로는 다시 한번 사선으로 케첩을 뿌린다.
다시 한번 여학생들의 탄성. 완성된 토스트 네 개는 순식간에 종이봉투에 싸여 여학생들의 손으로 향한다. 한 여학생에게 만 원을 건네받고 이천 원을 거슬러주는 것으로 내 임무는 끝. 당시에도 ‘릴스(숏폼 형태의 영상)’가 유행이었다면 인스타그램에 한 번쯤 내가 토스트 만드는 모습이 찍혀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달인 시절. 내게도 ‘토스트 만들기 달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도 끝이 다가왔다. 전문대이긴 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무사히 진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학 후에도 종종 용돈을 벌기 위해 스낵바에 출근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사장님은 스낵바를 정리하셨다. 다시 1년이 지난 후 사장님이 다른 지역에 차리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는 수제버거와 커피를 팔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토스트를 굽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토스트와 애증 관계를 맺으며 함께했던 내 스무 살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토스트 불판 앞에 선지 어느덧 11년이 지났다. 문득 돌아보니 스낵바에서 토스트 파는 일 말고도 많은 일을 했고, 김밥을 싸는 일 외에는 그럭저럭 잘 해냈는데 이상하게 토스트에 대한 기억이 유독 강렬하다. 그만큼 강렬한 마가린 냄새를 내 몸과 마음에 남겼기 때문일까? 이후 대학을 나오고, 회사에 다니고,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사람을 잃고, 잊어도 봤다. 하지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토스트 굽는 방법은 생생히 기억난다. 누군가 잘 달궈진 불판 앞에 나를 세워두면 마치 어제도 만들었다는 듯 토스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사회로 나온 이후에도 난관을 만날 때마다 토스트 굽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토스트 하나만큼은 잘 만들던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리면 가라앉은 기분이 다시 떠오른다. 남들이 봤을 때는 대단한 장기로 보이지 않겠지만, 앞날이 막막했던 어린 내게 토스트는 자존감을 지켜줬다. 심지어 올해 상사의 가스라이팅에 반강제로 회사를 나와야 하던 날에도 토스트를 굽던 시절을 떠올렸다. 스무 살의 토스트 장인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살아있다. 무엇이든 꾸준히 하면 버틸 힘이 된다고 속삭여주는 어린 장인을 보면, 기름 냄새가 내 가치 있는 스무 살 나날을 만들어줬음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최서온 : 1993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났다. 돌잡이 때부터 연필과 공책을 잡아서 엄마를 기쁘게 함. 공부 잘하는 딸로 클 줄 알았던 부모의 바람과 달리 그냥 책을 좋아하는 여자로 성장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교내외로 상도 몇 번 탔으나 세상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문예창작과를 나오지 않은 사람의 글이 더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함. 돈은 벌어야 하니 꽤 괜찮은 학점을 이용해 약 9년간 마케터로 일하다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인1책 프로그램 수료.
* 주제문 : 토스트 잘 만들던 20살 알바생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첫댓글
'하면 느는구나' 를 경험한 스무 살. 무엇보다 좋은 거름.. 시크하게, 그러나 자신감을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토스트를 굽는 작가님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집에 와서 ~
집에 가보니 --> 와보니 로 통일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