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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관광지 스크랩 여주 신륵사
뜬금없이 추천 0 조회 209 11.03.14 20:13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신륵사      神勒寺

 

 

 

 

 

 

 

 

 

北에서 南으로 흐르던 여강(麗江)이 몸을 풀어 은빛 모래밭을 빚고 기름진 옥토를 빚어 건설한 낙토(樂土)가 여주(麗州)라고 하였다. 그 여주에 8가지 자랑이 있는데, 그 하나가 신륵모종(神勒暮鐘)으로 신륵사에서 울려퍼지는 저녁 종소리를 으뜸으로 꼽는다.

 

 

신륵사는 고찰로는 유일하게 강가에 위치한 명찰이다. 극락보전으로 바라보면 울울한 산세가 시야를 가리고,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도도한 강물로 사바세계가 아득해진다. 그 모습이 얼마나 환희로웠으면,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문인 김병익은 " 신륵사의 아름다움을 어찌 유학자라 하여 폐할 것인가 "라며 찬탄하였다.  

 

 

 

 

                                                    창건 연혁

 

 

 

신륵사는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579~631 재위)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치 않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壁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절 경내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多層塼塔)이 세우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벌어진 이후의 일이다.  1379년(고려 우왕)에 제자 각신(覺信) 등이 절의 북쪽에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하였다.

 

 

 

1382년에는 목은 이색 (牧隱 李穡)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하여 만든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이 대장경은 조선의 억불숭유정책과 일본의 요청에 따라 일본에 보내졌고, 최근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이 신륵사에 모여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그 대장경의 반환을 요청하는 모임도 있었다.조선에 들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3년에는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1671년이후 꾸준하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신륵사의 보물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다층전탑 (보물 제 226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 石鐘. 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 (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석등 (보물 제231호)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위 그림은 조선 후기의 화가 정수영(鄭遂榮 . 1743~1831)이 그린 신륵사도이다. 그는 과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리학의 명문이었던 집안의 전통을 따라 기행(紀行)과 탐승(探勝)으로 일생을 보내면서 詩, 書, 畵에 몰두하였다. 

 

 

 

 

 

                                                              일주문     一柱門

 

 

 

 

 

 

                                      

 

 

절로 들러가는 첫번째 관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의 안팎으로 속계(俗界)와 진계(眞界)가 경계를 이룬다.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一柱門)이라 한다.이 문을 들어 설 때에는 번뇌로 찌든 마음, 갈라진 마음, 분별하는 마음을 한마음으로 오롯하게 하여 진리의 세계로 향하겠다는 결심을 갖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문을 들어서는 수행자는 인과법(因果法)과 발보리심(發菩提心) 그리고 십선(十善) 등에 대한 굳은 믿음과 발원을 하여야 한다.

 

 

 

여러개의 山門 중에서 유독 일주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 선 이유는 세속의 여러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일주문을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 즉, 일심(一心)을 의미함에서 연유한다. 세속에서 수미산(須彌山)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인과법(因果法).... 인과(因果)란 철두철미하게 좋은 원인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쁜 원인에서는 나쁜 결과가 온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도리를 믿는 것이다.발보리심(發菩提心)...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發心)하는 것이다. 

 

 

십선(十善) ... 인생 행로를 스스로 올바르게 지키게 하는 열가지 선행..즉 산 목숨을 죽이지 않는 것, 훔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거짓말 하지 않는것, 악한 말을 하지 않는 것, 이간질 시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희롱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탐욕에 빠지지 않는 것, 시기 질투 성내지 않는 것, 어리석은 사견을 품지 않는 것.... 

 

 

일반적으로 일주문은 천왕문이나 不二門처럼 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대개 " 무슨 산의 무슨 절"이라는 내용의 편액을 걸어 사찰의 성격을 표현하게 된다. 일주문은 그 구조상 기둥의 직경이 매우 크며, 지붕은 팔작 혹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공포(拱包)는 화려한 다포계(多包系)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TEMPLE    STAY

 

 

 

 

 

 

신륵사에서는 1박2일의 일정으로 템플스테이(山寺體驗)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발우(스님의 밥그릇)공양, 새벽 예불 및 108배, 문화유적 답사, 좌선 및 명상, 다도(茶道) 등의 내용으로 운영된다.참가비용은 1인당 30,000원이며 4인가족 기준으로는 100,000원이라고 한다.

 

 

 

 

                                          세심정     洗心亭

 

 

 

 

 

 세심정(洗心亭)...불결한 마음을 씻는....뜻은 좋지만 없었으면 하는 건물이다. 꼭 있어야 하나...

 

 

 

 

 

                                            구룡루       九龍樓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잇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다. 

 

 그 말에 따라 원효대사가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이에 원효대사는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龍)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룡루(九龍樓)이다.

 

 

 

 

 

 

                                     구룡루의 천정이 화려한 듯 소박하다.

 

 

 

 

 

 

 

 

극락보전 맞은 편에 자리하는 구룡루는 1858년  김병기의 지원으로 중창된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인데, 보통의 사찰 누각이 누대 밑으로 출입문이 나 있으므로 공간을 충분히 두는 데 비하여, 이 구룡루는 누대 밑 공간이 아주 낮다.

 

 

그것은 신륵사 중심 사역으로의 출입이 강가쪽의 정면이 아니라 범종루와 극락보전 오른쪽이므로 출입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의식 집행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구룡루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석가모니부처가 탄생할 때 성수를 뿜어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9마리의 龍에 대한 이야기와 신륵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9마리 용의 승천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원효대사와 9마리의 용에 관련된 창건설화와는 별도로 절 이름의 유래에 관한 두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 온다. 하나는 고려 우왕시절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巖..실존함)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굴레를 의미하는 륵(勒)자를 써서 신륵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의 신(神)과 제압의 뜻으로 륵(勒)를 합쳐 신륵사로 하였다는 설화..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龍)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되는데,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江)을 다스린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것이다.즉 신륵사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의미가 짙은 사찰이다.

 

 

 

 

                                           비보사찰   裨補寺刹

 

 

 

 

 신라말,고려초의 도선(道詵)이 체계화한 이론으로 밀교(密敎)의 택지법(擇地法)과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풍수지리설이 결합된  비보사탑사상(裨補寺塔思想)에 의하여 세워진 절을 이른다.  왕건은 도선을 국사(國師)로 삼아 통일을 이룩하였다.

 

 

도선은 전국 산천의 역처(逆處)나 배처(背處)에 절을 세워 지기(地氣)를 보완해야 한다고 하여, 전국 3,00여곳을 지정하였다. 그 곳에는 어김없이 사찰을 세워 전답을 비롯한 많은 특혜를 주었고, 결국 고려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世宗과 신륵사 

 

 

 

 

 

1440년(세종 22)에 신륵사를 중수하였다.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면서 太宗의 장인으로서, 태종이 왕위에 등극하기 전의 사부이었던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영정을 신륵사에 두었던 것으로 인해서이다.

 

세종은 신륵사를 중수한지 7년 후인 1447년에 " 여흥 신륵사에는 문도공(文度公)의 영정을 모셨는데, 의지없는 잡된 승려들이 잘 수호하지 못하여 형편없이 되었다기에 이제 전라도 장성 백양사의 승려 학몽(學夢)을 들어가 살게 하였으니 잘 접대하여 주어라 "는 명령을 내렸다..세종 29년7월9일

 

  

그후 世宗의 능인 영능(英陵)을 여주로 옮기고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대사찰로 일신하게 되었다. 영릉은 본래 광주 대모산(大母山)에 있었는데, 예종이 즉위하면서 풍수지리상으로 지세가 불리하다고 하여 1469년 세종대왕과 그의 왕비 소헌왕후의 능을 여주 영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金守溫의 報恩寺記

 

 

 

 

성화 5년 기축(己丑.1469)에 세종 재궁(梓宮)을 여주에 옮겨 능사지내는 일이 끝나자 대왕대비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선왕께서 부왕을 꿈에 보시고 장차 영릉(英陵) 밑에 절을 세우려 하셨으나, 갑자기 승하하시어 문득 臣民을 버리셨으므로 절을 경영할 겨를이 없었더니, 이제 선왕이 하늘에 계시는데 우리들이 빨리 遺志를 거행하지 않으면 어찌 장차 선왕(세종)을 지하에서 뵈올 것인가 " 하였다. 

 

곧 한명회 등에게 명하여 영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세울만한 곳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陵의 경내에는 절을 세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로 옛 현인들이 놀던 자취가 완연하고, 또 선왕의 陵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과 북소리가 들릴만 하옵니다. 만일 이것을 수리하면 옛 것을 새롭게 만드는데, 일은 반절이고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니 이보다 편리함이 없을 것입니다 "고 하였다. 

 

 

 

 

위의 기록처럼,世宗의 능인 英陵 옆에 원찰(願刹)로서 절을 세우려 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서 신륵사를 중수하고 원찰로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명회를 제조(提調)로 삼고 1472년(성종 3) 2월부터 10월까지 200여 칸의 건물을 신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륵사 자리한 이곳은 여흥부(麗興府)에서 비로소 여주(麗州)로 승격한다.  

 

 

     

 

 

 

 

 

 

 

 

 

 

 

 

 

 

                                               강월헌(江月軒) 과 나옹선사(懶翁禪師)

 

 

 

 

 

 

 

 

 

 

강월헌(江月軒)은 나옹선사의 호(號)이다.  나옹선사가 일찍이 신륵사에 머물렀고, 후일 다시 이 곳에서 입적(入寂)하므로써 신륵사의 寺勢가 확장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1376년 양주의 회암사(檜岩寺) 중창 낙성식에 너무 많은 신도들이 왕래하여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왕은 나옹선사에게 명을 내려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이주케 하였다. 이 때 병든 나옹이 여주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入寂)하게 되니,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신륵사에서 다비식(茶毘式)을 하고 석종(石鐘)과 부도(浮屠)를 조성하여 나옹의 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륵사는 많은 전각들을 중수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나옹선사가 주관한 회암사(檜巖寺)의 중창 낙성식에 구름같은 인파가 모이자, 두려움을 느끼게 된 유학자(儒學者)들은 나옹을 탄핵한다. 王도 어쩔 수 없어 그를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도록 지시한다.  실제로 유배이었다. 

 

 

나옹은 밀양으로 가는 길에 이 곳 신륵사에 들러 잠시 머무르다 갑작스러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누군가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는얘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나옹의 입적(入寂) 소식을 들은 전국의 제자들이 신륵사에 모여 다비식(茶毘式)을 치루고, 그 자리에 삼층석탑을 세우고, 경내의 뒷편에 사리탑과 석종비를 세운다.

 

 

 

 

 

 

 

 

나옹선사가 그 중창을 주관한 회암사지(檜巖寺址)이다. 양주에 있는데 지금은 발굴 복원 중이다. 상상 이상의 대규모이다. 태조 이성계도 왕위를 물려준 후 이 곳에 머물렀다.

 

 

 

 

 

 

 

 

                                

                                                  청산은  나를 보고 (靑山兮要我) / 나옹선사

 

 

 

 

             청산혜요아이무어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혜요아이무후   蒼空兮要我以無朽    청산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료무애이무증혜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여수여풍이종아      如水如風而終我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혜요아이무어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혜요아이무후   蒼空兮要我以無朽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료무노이무석혜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여수여풍이종아      如水如風而終我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조선 초기의 문인 김수온(金守溫)은 "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 "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줄기가 감싸 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인, 김병기(金炳冀)는 세종의 능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능의 원찰로  신륵사를 중건하자는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를 남긴다. 

 

 

"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儒學者)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고려시대의 나옹선사가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塔)과 오래된 비(碑)가 늘어진 것이 옛스러워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미롯한 여러 문인들이 詩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가 일컬어 온지 이미 千年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는 못할 망정 폐할 수가 있겠는가 ? "

 

 

 

 

 

 

 

 

 

 

 

 

                                        신륵사, 다층전탑  多層塼塔

 

 

 

 

 

 

 

 

 

 

아래로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江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전망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북지역에 몇 기(基)만 있을 뿐이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팁의 윗쪽에 수리할 때 세운 碑가 전해 오는데, 거기에는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 (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 "이라는 年代 표시가 있다. 조선 英祖 2년 (1726)을 의미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한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나, 여러 차례 수리하는 과정에서 벽돌의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는 등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장각기비각     大藏閣記碑閣

 

 

 

 

 

 

 

 

 

고려말 목은 이색 (牧隱 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선사의 제자들과 대장경을 만들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후일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태종의 지시에 의하여 (그동안  일본의 꾸준한 요청이 있었다) 그 대장경은 일본에 주었으며, 대장경을 보관하던 대장각은 현재 그 자취가 없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碑文)을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았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을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cm의 해서체(楷書體)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年代 역시 탈락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제존자 석종비 (普濟尊者 石鐘碑) 제작 4년 후인 138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 (牧隱 李穡)... 그는 고려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된다. 유배가 풀린 후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1396년 이 곳 신륵사에서 죽었다. 그는 한 때 나옹과 신륵사에서 교류하였고, 왕명으로 나옹의 비문을 지어 신륵사에 세웠다고 한다.

 

 

이색은 부친 이곡(李穀)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장경을 만들기를 희망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후일 이를 알게 된 이색은 부친이 죽은지 30년만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의 봉안을 추진하였다.이 대장경 불사에는 나옹의 제자들과 국가의 원로 중신 및 권문세가의 호응을 받아 바로 나옹화상의 열반처인 신륵사에 대장각을 지어 봉안했다는 것이다. 이 碑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범종각    梵鐘閣

 

 

 

 

 

 

 

 

 

 

 

 

 

 

 

 

 

 

 

 

 

 

 

 

 

 

 

 

 

 

 

                                                           극락보전     極樂寶殿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를  "대영웅(大英雄) 석가모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전각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부른다. 반면 신륵사는 대웅전이 아니고 극락보전(極樂寶殿)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전각을 극락전이라하고, 더욱 존칭하여 극락보전이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 장수와 안락을 보살피는 부처이다. 신륵사가 과거 영능(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었기 때문에 대웅전 대신 극락보전이 신륵사의 중심 전각이 된 것이다.

 

 

 

 

 

 

 

 

 

 

 

 

 

극락보전은 건물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전에는 아마도 대웅전이었을 듯하나, 영릉의 원찰(願刹)이 된 후 극락보전이라고 명명되었고, 성종4년(1473)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 극락보전은 正祖 21(179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이 그 이전의 불전과 얼마나 다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건축형식을 볼 때 그 이전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극락보전 내부의 대들보에는 나옹화상의 필적이라고 구전되어 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천정은 우물천정이고, 불단 위에는 닫집이 있다. 불단인 수미단은 안상(眼像) 모양의 창 안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표현하였다. 천정아래 대들보에는 나옹화상이 썼다고 전해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쓰여진 현판이 걸려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

 

 

 

 

나무는 한자 남무(南無)의 한글 표현이다. 남무(南無)는 산스크리스트語(印度의 古代 言語)로 나마스(NAMAS...귀의)의 한자 표기이다.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다.따라서 " 나무아미타불 "은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歸依)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보살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보살피는 보살인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스스로 성불(成佛)하기를 포기한 보살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갖고 있으면서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 들어 주고, 구제하여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상징인 現世의 보살이다.

 

 

즉, "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죽어서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염원함과 동시에 살아 생전에는 괴로움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행복과 죽은 후의 안락(安樂)...이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바램인 것이다.티베트에서는 인사말로 "나마스 테"라고 한다. 당신에 귀의합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좋은 인사말이다. 우리의 안녕하세요? 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인사말이다.

 

 

 

 

 

 

 

 

 

 

 

 

 

 

 

 

 

                                          다층석탑    多層石塔

 

 

 

 

 

 

 

석탑은 일반적으로 화강암으로 조성되나,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이 탑은 드물게도 하얀 대리석으로 조성되었다.  원각사십층석탑(국보 제2호)와 재질이나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 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으로 돌려 새겼고, 아래층 기단의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이색적이라고 한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 하고 있다. 성종 3년(1472)에 신륵사를 대규모로 새 단장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당     祖師堂

 

 

 

 

 

 

 

 

조사당(祖師堂)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 3 선사(禪師)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하여 영정을 모셔 놓은 곳이다. 나옹은 인도승 지공의 제자이며, 무학대사는 나옹의 제자인데,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가닥 빛이 되었던 고승들이고 특히 나옹은 한국 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祖師堂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 대 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향에 가깝고 건물 내부에는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無學大師를 기리기 위하여 이성계의 지시로 세웠다고 하나, 목은 이색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5년 (1397)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있었슴은 분명하다.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선사 그리고 좌우에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 두고 있으며, 가운데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선사의 독존(獨尊)을 안치하였다.

 

 

 

 

 

                 조사당 오른쪽의 계단을 올라 가면 나옹선사의 부도, 석종비 등이 있다.

 

 

 

 

 

                                                     향나무

 

 

 

 

 

전설에 의하면 祖師堂 앞의 향나무는 이성계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 내려 온다. 또는 무학대사가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학대사는 1327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고, 姓은 박(朴)씨이고, 號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53년 중국 元나라 연경으로 가서 인도승 지공(指空)을 만나 道를 인정받은 후 나옹을 찾아가 그의 전법제자(傳法弟子)가 되었다.

 

 

 

나옹이 입적한후 다시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무학대사는 조선왕조가 들어 선 후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조선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檜巖寺)에 건립하고, 1402년에는 왕명으로 회암사에 머무른다. 태조 이성계도 왕위를 떠난 후 회암사에 머물게 된다. 

 

 

1405년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으로 가서 이 곳에서 나이 79세, 법랍 62세로 입적(入寂)하고, 후에 太宗은 무학대사의 사리를 회암사 부도에 모시게 하였다.  스승나옹이 신륵사에서 입적하였고, 그 제자인 무학대사가 신륵사 옆 고달사에서 은신하였던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두 고승이 맺게된 인연으로 이 곳 조사당에 함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     冥府殿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冥府殿)이라고 한다. 그 내부에는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 시왕전(十王殿)이라고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이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자신의 성불(成佛)을 미루면서 악도(惡道)에서 헤메이거나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할 때까지 그 스스로가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기에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대개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시왕(十王)은 저승이 십대왕을 지칭하는데 중생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罪를 이들 앞에서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관음전   觀音殿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주불(主佛)로 모신 관음전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중과 가장 친근한 보살인데,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 관세음 또는 관음보살이라고 불리운다.

그는 석가모니 입적 이후 未來佛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난파, 화재,암살, 도둑, 사나운 짐승들에 의한 피해 등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주며, 구제할 중생의 근기(根機...정신적 수준)에 맞추어 33가지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관세음보살은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여러 구세신앙(救世信앙)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면서 대중과 가장 친근한 신앙으로 위치하게 된다. 티베트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보살이며, 역대의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받들여 지고 있다.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선사의 석종비(石鐘碑), 부도탑(浮屠塔), 석등(石燈) 

 

 

 

 

 

 

 

 

 

나옹(懶翁)의 성은 아씨(牙氏), 속세의 이름은 원혜(元惠), 법호(法號)는 나옹이며 당호(堂號)는 강월헌(江月軒), 시호(諡號)는 선각(禪覺)이라고 하며 1320년 1월 15일 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서 선관서령(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살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알아 보기 위하여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 가 출가한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1344년(충혜왕) 양주 천보산의 회암사(檜巖寺)에서 깨달음을 얻는다.1374년 중국 元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의 승려 지공선사(指空禪師)를 친견하고 정진하여 그의 법을 전수받은 후 1358년 (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 이후 신광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홍건적의 침입을 법력으로 막아 신광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에서 수도 정진한 후 양주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1371년 공민왕으로 부터 가사(袈裟)와 법복,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 (王師大曺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 졌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낙성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본 유학자(儒學者)들이 탄핵함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유배 비슷한 길을 떠난다. 그 도중에 이 곳 신륵사에 잠시 머물다가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1376년 5월 15일 갑자기 입적하니 나이 57세, 법랍(法蠟) 38세이었다. 제자로는 자초(自超), 지천(智泉) 등 2,000여명이 있었으며 나옹화상어록과 가송(歌頌)으로 그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다. 신륵사와 관련된 나옹의 행적은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와 김수온의 "보은사기(報恩寺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륵사는 나옹이 도를 펼쳤던 곳으로 목은 이색 (牧隱 李穡)과 함께 이 곳에 머물며 교유하였다고 한다. 한국불교의 초석을 마련한 고려말의 고승이다.

 

 

 

 

                                           나옹선사 부도탑

 

 

 

 

                    

 

사리(舍利)란? 유골 특히 부처나 聖人의 유골을 의미하나 요즈음은 스님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난 후 유골에서 추려낸 작은 결정체를 말한다.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입적하자 그 유골을 8등분하여 각지에 탑을 세우고 그 속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후일 아소카王은 8개의 탑중에서 7개의 탑으로부터 사리를 모아 다시 세분하여 8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런 전통에 연유하여 사리를 숭배하고 공양하는 신앙이 사리탑을 세우는 등 아시아의 불교국에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사리(佛舍利)를 상징하는 다른 것으로 代用하는것이 보통이고, 이에 따라 석가모니의 유골을 생신사리(生身舍利) , 진신사리(眞身舍利) 또는 신골사리(身骨舍利)라 하고, 그의 가르침을 사리에 비유하여 법신사리(法身舍利)라고 한다. 흔히 사리의 양(量)과 수행의 정도가 비례한다고 믿는 것은, 사리가 한량없는 공덕에서 생기며 매우 얻기 어렵고 으뜸인 복전이라고 기록한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유래한다.

 

 

 

 

 

 

 

 

 

 

 

                                          나옹선사 죽음에 관한 기록

 

 

 

 

고려 말기 공민왕 이후 태고 보우(普愚)와 더불어 고려의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나옹 혜근(慧勤. 1320~1376)은 1371년(공민왕 20)에 王師가 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나옹은 잠시 순천 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가 되어 회암사를 중수하여 1376년에 낙성회인 문수회(文殊會)를 열었으나,

 

 

전국의 무녀(巫女)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혼잡을 빚은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받아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추방되어 가는 길에 여흥(麗興)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하였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나옹의 탑비에는 병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회암사선각왕사나옹부도비"와 "신륵사보제존자시선각탑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략) ... 이리하여 명을내려 영원사에 이주하게 되어 급히 길에 올랐다. 나옹선사는 이 때 마침 병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三門을 지나서 못가에 이르니 인도하는 자가 열반문으로 해서 가라고 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소리쳐 울었다. 선사는 뒤를 볼아보면서 " 힘 쓰라! 힘 쓰라 ! 나로 인하여 중단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 "고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簽)에게 이르기를, " 내 병이 심하니 배를 타고 가도록 해다오" 하였다. 이에 강을 거슬러 7일 동안 올라가 바야흐로 여흥에 다다랐다. 이 때 또 탁첨에게 이르기를, " 조금 머물렀다가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가도록 하자"고 하니 탁첨도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이래서 여흥 신륵사에 우거하였다. 5월15일에 탁첨은 다시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였다. 선사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의당 갈 것이다. "하고 이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석등(石燈)은 불교의 공양(供養) 중 으뜸이었다. 묘 앞에 장명등(長命燈)이 있듯이....사찰에서 불전(佛殿) 앞에 석등을 맑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 (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549년 (신라 진흥왕) 중국의 양(梁)나라 사신이 불사리를 가져와 王이 백관 앞에서 흥륜사 앞 길에서  봉영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이다. 이후 황룡사,월정사,통도사,화엄사 등에 사리탑이 세워졌고, 751년에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사리의 수습은 승려의 장의(葬儀)습관과 관계가 깊다. 다비식(茶毘式)이다.

 

 

 

 

 

 

 

 

 

 

 

 

 

 

 

 

                                           나옹선사 석종비 (石鐘碑)

 

 

 

                                  

 

 

3단의 받침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신은 양 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을 목조건물의 기와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을 표현하였다.

 

 

앞면에는 끝부분에 碑文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과 이름을 적고 있는데, 고려 우왕(1379년)에 세워진 碑이다. 글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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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14 20:46

    첫댓글 겁나 크구만요..절하기싫어서..절 안감..ㅋㅋ

  • 11.03.15 09:16

    요 절만 돌아도 하루는 걸릴듯~ㅎㅎ

  • 11.03.15 18:33

    절은 오래 된것 같은데...
    절에 그려진 그림은 뭐라하죠??? 그거는 새로 칠한것 같다는..

    여기 한번 가보고 싶다.
    저도 강가에 있는 절은 첨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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