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상전심법(相傳心法)
제1절 유춘래(柳春來) 선생님
제2절 반용택(潘龍澤) 선생님
제3절 박모산(朴母山) 선생님
제4절 후기(後記)
제4장 상전심법(相傳心法)
순천도(順天道)는 천주님(天主任) 말씀에
「서전서문은 나의 법이고, 주역은 나의 비결이라」 하셨기 때문에
도의 연원은 서전서문의 뜻과 같이하고 또 법리도 이에 따르며,
공부는 주역의 뜻과 같이한다.
즉 연원의 상수심법과 상전심법의 두가지 법리가 있으니
상수심법은 요(堯)임금님이 순(舜) 임금께,
순임금님은 우(禹)임금님께 위(位)를 전하심과 같이
순천도(順天道)의 도맥을 전수하심이 같은 비유의 형태로 본다.
그러므로 순천도(順天道)의 상수심법은
증산(甑山) 천주님(天主任)이 장사수(張師首)님께로
장사수(張師首)님이 유춘래장님께로
그 어진 마음의 심법으로서 도맥(연원)을 주고 받았다.
춘래장님 이후로는 삼전심법이니
비유하면 우임금님은 탕(湯)임금님께 직접 위를 전수하심이 아니고
후손에게로 전하고 그후손이 운수가 다 되어서 탕임금님이 들어서서 새정치를 하고
탕임금님은 후손에게 물려주셔서 그후손이 운수가 다됨에
주문왕 무왕이 들어서서 새정치를 하실 때,
문왕이 지존시대의 법인 낙서(洛書)도를 내놓으시고
무왕이 정치를 하시면서 주공으로 하여금 주역(周易)을 지었다.
이를 상전심법이라 한다.
이와같이 순천도(順天道)의 삼전심법도 즉 도의 연맥을 계승하는 교화의 연원이 되며
후천역(正易)으로서 천주님(天主任)의 법을 나타내여 교민청세를 하게되여 있다.
즉 비유하면 우탕문무주공(禹湯文武周公)의 연맥과 같이
순천도(順天道)의 춘래장님이 직접 후계자에게 전수하심이 아니고
교화를 하여 뒷사람을 가르치게 하고 또 교화하여 도생을 만들고
반성환씨가 박모산장님을 교화하여 도생을 만들고
박모산장님이 교화하여 도생을 만드심이니
박모산장님(朴母山丈任)께서 문왕 문왕이 낙서를 세상에 내놓으심과 같이
후천역(後天易)인 정역(正易) 경주용담(慶州龍潭) 도역을 세상에 내놓으셨다.
그럼 모산장님 이하 도생이 무왕주공과 같이
정역을 정리하여 세상에 공포하여야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춘래장님 이후로는 상전심법으로서 모두 도를 인연따라 연결시켜 주는 연원이고
도통연원이 아니며 교화의 연원법이 된다.
그러나 도는 정치의 일이 아니므로
서전서문의 뜻과같이 정치적이나 후손관계와는 관계되지 않으며
다만 비하여 연원의 계승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상전심법은 그 심법으로서 주고 받음이 아니라
인연법에 의하여 전하여 주는 심법을 말함이다.
◎ 『포교연원계보(태을주연원)』 (도를 펴기 위하여 주문적으로 연맥이된 연원임)
증산천주님(甑山天主任) - 김경학(金京學) - 김화숙(金化淑) - 장사수장(張師首丈)
◎ 상수심법계보(相授心法系譜)
※ 상수심법(相授心法)은 순천도(順天道)에서는 도통연원이라 한다.
그마음을 보고 정석으로 후게자를 정한다.
증산천주님(甑山天主任) - 장사수선생님(張師首先生任) - 유춘래장님(柳春來丈任),
◎ 상전심법계보(相傳心法系譜)
유춘래장님(柳春來丈任) - 반용택장님(潘龍澤丈任) - 박모산장님(朴母山丈任) 도생
상전심법은 순천도(順天道)에서는 교화를 받아 스스로(自在) 연원이 되고 교화의 연원이다.
직접 주고 받음이 아닌 것을 말함.
※ 상전심법은 다만 연원일뿐, 제자가 되지않는다.
도생 모두가 누구에게 교화를 받았든지 연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수장님이 춘래장님을 연원장이라고 부르라’ 하셨다.
제1절 유춘래(柳春來) 선생님(先生任)
유춘래장님(柳春來丈任)의 사진영(寫眞影)
(1892.04.08 ~ 1966.12.03)
춘래장님은 고흥유씨(高興柳氏)로 명함은 영선(永善)이시고,
자(字)는 사운(士云)이시며 호는 춘래(春來)이시다.
단기 4225년 조선 고종 29(1892)년 임진(壬辰) 4월 8일 사시(巳時)에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豆原面) 금성리(金城里)에서 탄생하셨다.
부친은 인호(寅浩)씨이고 백부 병호(炳浩)씨가 무후하여 입양하시었다.
백부 23세에 별세하사, 계백모 여산 송씨 19세에 청춘과모가 되시매 양모를 모시었다.
춘래장님은 23세에 사수장님으로부터 태을주를 받고 사수장님의 연원이 되었다.
천성이 어질어서 마음의 변동이 없으시고,
맡은 일을 충실히 변함과 불평없이 실천하시고
형편이 궁곤한 사람을 보면
마음과 노력을 다하여 도우시고 도심이 매우 깊으셨다.
사수장님이 때에 형편이 궁곤하여 용돈과 절량이 될 때에 짚신을 삼아
시장에 팔아서 엄한 양모님을 모르게,
한컬래에 1전씩 띠여 모아 가지고 사수장님을 봉양하시고,
짚신 판돈은 모두 양모님께 드리고,
쓰실때는 양모님께 사유를 말씀드리고
돈을 얻어서 허락을 받고 쓰시고 남은돈은 다시 드렸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태을주 연원에 입문하여 많은 고생을 하셨고
사수장님의 득도로 인하여 순천도(順天道)의 2세 후계자로 계승되시었다.
사수장님의 생존시에는 모든 일의 일체를 맡아 보시고,
선화하신 후에는 사수장님이 전수하신 도법을 계승하여 많은 도생을 교화하시었다.
29세에되시던 경신(庚申 1920) 4월 7일에 법문공부를 사수장님께 받으신후
사수장님께서 춘래장님으로 하여금 법방의 모든 일을 명하시고
법방에 왕래하는 도생들의 접대와
사수장님의 일일문안과 일체 심부름과 일등을 책임저 오셨다.
임술(壬戌 1922) 3월 22일 사수장님 선화하신 후,
무의무탁 하던중 설상가상격으로 사수자님의 말씀데로
임술(壬戌 1922) 6월 24일 천주님(天主任) 화천 치성일에
자작이 나서 불의의 난동으로 주재소(지금의 경찰서)에 구치되어
三四개월 고생하시고 출옥하시었다.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임술(壬戌 1922)년에서 경오(庚午 1930)년까지 9년간을 잠복하고
도생들이 수련과 공부를 하지 못하고 각자 자기집에서 비밀히 수련을 하게되었다.
천주님(天主任) 회갑되시던, 신미(辛未 1931) 2월 중순부터
전남 보성군 벌교읍 두평리 서남술(徐南述)씨 댁에서 서계인(徐桂年)씨 3촌들이며
곽성보(郭性普) 김인태(金仁泰) 유남상(柳男相) 송상선(宋相善) 유춘래(柳春來) 장재준(張再準) 씨등
모모의 도생들 도중 중추인물들이 회합하여 임시회의를 개최코저 집합하였는데
회의는 다시 도를 재기와 규합이며 운영 등을 의논하게 되었다.
당시 운영대표자를 선정하기로 의논이 나왔는데 좌중이 춘래장님을 선임함에
사수장님의 친재인 재준씨가 “어찌 나를두고 타인을 선정한다”고 대립함으로
회의는 중단되었으나 내부로는 춘래장님이 사수장님 대리로 인정하고
도생들이 지도를 받게되었다.
신미(辛未 1931) 11월부터 송상숙(宋相淑)씨가
쌍암담터에 남구암 사모님 주택을 건립하여 12월 말에 입택을 하고
임신(壬申 1932)년 2월 초부터 법문의 <대향진설도>의 단상을 상숙씨가 만들어
4월 중순부터 춘래장님의 지도로 공부를 가르치게 되었다.
공부는 법문의 천문, 음양정사로부터 기초동량종까지 쓰고
그 다음은 이목구비에서 옥추통부 酉까지 써서 하되,
6명내지 8명으로 종일써서 소축을 하게되니,
화광이 충천하므로 「화지진(火地晉) 공부」라고 칭호하였다.
매일 2 30명이 출입 왕래하여 공부를 함으로,
쌍암면 담터가 욱군욱군 함에,
가까운 곳 본면 일경 주재소에서 밤이면 야경을 하는데,
오주(五呪)인 “신천지(天地) 가가장세 일월일월 만사지•••”의 주문 읽는 소리가
노래 읊으는 소리로 들림으로,
천우신조하시어 조사 한번없이 공부를 하였는데,
파석치성을 마치고 도생모두가 귀가한 후에
법방주인 강흥기씨 혼자 주재소에 불려가서 조사를 당하였다.
이상한 천운이 아니고는 4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을 주야로 분주하게 공부를 하는데,
조사 한번 없었다가 그후 조사가 엄하여 쌍암담터 법방이 폐지되었다.
그후 갑술(甲戌 1934)년에 전남 고흥군 과역면 인학동의 송상빈씨 댁에다가 법방을 정하고
갑술(甲戌 1934)년 2월 상순에 촌래장이 시기(時奇)공부를 가르치신바,
기문공부로
동지에 174상원(上元) 285중원(中元) 396하원(下元)을
하지에 936 825 714로 하여 공부를 가르치셨다.
그후 병자(丙子 1936)년 3월 상순부터 4월 하순까지
법문(현무경) 72권을 만들어(당시 인쇄를 하지않고 손으로 사본하였음)
각 도생들께 분배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책지(한지)는 서남술씨가, 책보는 서정술씨 형재가 부담하였다.
※ 순천도(順天道)에서는 법문을 간수하는데,
천주님(天主任)이 조화궤에 보관하신바와 같이,
사수장님이 하교 하신대로,
문자 한구절도 변경없이 사본하여 책을 절반 접어서 붉은 보자기에 싸서 각 도생이 보관함.
그때에 송상빈씨가 법방 주인으로 1년 4대 치성과 도생의 접대며
기타에 노고가 많았음으로 그후 도생들이 도중의 유공자라 하였다.
춘래장님이 기묘(己卯 1939)년 3월 중순에
전북 김제군 금산면 월평리로 이사하시고 6년간을 지내시다가
을유(乙酉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김제군 봉남면 동령리에 새 기지를 잡아 법방을 정하여
병술(丙戌 1946) 3월 중순 금산면 월평리의 전가족이 이사하였다.
2년후인 무자(戊子 1948)년 3월 하순에
김제군 황산면 남양리 개전지로 새 기지를 잡아 이거하시니
그후 신도생들이 춘래장님을 따라 남양리로 집중하고
황무지를 지주로부터 매입하여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1년 4대 치성을 모시고 일기 공부와 부(符) 수련과 주문 공부를 하고
도생들을 지도하시면서 지내셨다.
이후부터 도생들이 황무지에 들어가서 개간하니
일반민들도 들어와서 개간하고 하여 지금은 초등학교와 공장등이 들어서서
인구가 많은 마을이 건설되고 허허벌판이던 임야가 옥토로 전환되었다.
지금도 마을이름이 남양리 개전지라고 부른다.
도생들이 이 개전지로 이사한 후 6•25사변을 당할 때,
당시 6•25를 전후해서 세상이 매우 어지러웠으나 화액 하나없이 지내게 되었다.
춘래장님이 사수장님의 대리 지시를 받으신 임신(壬申 1932)년부터 갑신(甲申 1944)년까지
수차의 진법공부를 가르치시다가 실차(實差?)가 되심으로,
각자 도생의 생각이 점차적으로 전 도중이 지배되여,
분파가 되어가는 도중에 설상가상격으로 도생 곽성보씨의 소개로
전남 보성군 낙안면 귀산리의 거주인 김우경(金禹京)씨를 만났던바,
언어동작과 지식이 비범하므로
김우경씨의 법도를 춘래장님의 자신의 법도처럼 도중의 중추인물 몇몇과 비밀리 하여
경신(庚申 1980?)년 4월에 ‘봉천지도술 개화장 공부’로 인하여
난동한 사실이 있었던 후로부터 모든 도생이 실망하여 그후로 분열이 되었다.
춘래장님은 시일은 멀고, 좋은 기회는 이르지 않으므로
전 도생이 때를 갈망하여 선생에게 시기와 공부며 좋은 일들을 애원하니
너무 어지신 마음으로 생각을 내시어 도생을 이끌어 나가시자니
고통도 많으셨고 복잡하신 일이 수다하셨으며 실수되는 일도 많으셨다.
당시의 도생들이 때를 기다리고 도를 이루고저 한없는 고생을 하며
가정적 복잡과 원망이며 남에게 조소도 한없이 받았다.
때에 일기공부를하고 부(符)수련을 하는데 종이를 마차로 실어드리고
백로지 큰 것 한 장에 대필로 부(법문의 四부와 十二부)를 하나씩 그려내니
수십명이 그려내는 종이가 소화하는데 한 사람이 부담하였다 하며
마차로 실어드리는 종이가 딸렸다고 한다.
그리고 독송 수련을 하는데 법문의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를
전 도생이 크게 읽으니,
동네가 덜석들석하여 마을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춘래장님이 지내시면
저기 4월에 가신다고 별명도 있었으며 조소도 받았다.
그 당시 도생들은 불고가사하고 도에 전력을 하다보니,
가정의 빈곤함이 많았고 자녀들 교육도 등한이하고
도중의 공부나 일이라면 집안일을 전패하고 나셨다.
이리하여 오직 심심뿐이었다.
그리하여 도생의 자녀들은 지금에 와서 거의 원망을 하고 도를 믿지않고
현실의 사회에서 뒤떨어진 생활을 하며 도(道)라하면 다 싫어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같이 전의 도생들이 도를 닦아왔기 때문에
지금은 나날이 도가 발전되는 것이다.
개인적 가정적 영리만 취하고 도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 우리세대는 거룩한 천주님(天主任) 도(道)를 알아볼 길이 없었을 것이다.
춘래장님 말년의 을사(乙巳 1965) 4월 5일에 분파하고 나간 도생들을 제외하고
남은 도생들을 1주일간 수련을 시킬 때,
사전에 암암리로 6인에게 (이정•이교현•송재환•강대륜•라승렬•김재두) 통지하여 모으시고
이제는 진법이 나왔지만 (뒤의 도표)
모든 도생들이 신임하지 않으니 그대들 6인(六人)만이라도 공부하라.
“이후부터는 이 법으로 통일하리니 그리 알라”하시고 지시하시었다.
그후 6인(六人)은 계속 춘래장님의 지시대로 일기공부를 하여 오다가
춘래장님 선화하신 후 분파가 되었다.
춘래장님의 하신일이 수다하시겠지만 미쳐 자료 수집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또한 수다한 일들을 어찌 다 기록하기 어려움으로
대략 이나마 도생들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약하하고 대략 기술하였다.
오호라 선화 10여긴 전부터 ‘몸이 피곤하다’ 하시더니
하루는 ‘내가 옷을 갈아 입겠으니 옷을 가져오라’ 하사 갈아입으시고
법방에 나가셔서 혼자 앉아 계실 때,
도생이 문안 드리로 들어가니, 벽을 기대시고 조용히 앉으신 그대로 선화하셨으니
병오(丙午 1966) 12월 3일이라 선수 73세시었다.
춘래장님이 1평생 도(道)와 도생(道生)을 위하여 일하신 업적은
그 공덕이 후생도생으로는 하해와 같고
그 은덕을 전도생이 크게 힘입어 지금 도생들이 도를 잘 믿게 표훈을 하셨다.
모두가 다 선생의 노고로서 이루어진 일이라 하겠다.
분파한 각도생이 수백여명이 모여서 사수장님의 빈소옆에 빈소로써 장례를 모시었다.
그후 병오(丙午 1966)년에서 무신(戊申 1969)년까지
4년간 라승렬씨의 주션으로 법당을 남양리에 새로이 건립하고
춘래장님의 당시에 쓰시던 유물을 보관하고
지금까지 춘래장님 문하 각 도생들이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에는
분파를 떠나서 한자리에 모여 수련과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춘래장님 빈소에 채백관(棺)이 손상되어 수년전에 사수장님관과 함께
전도생의 성금으로서 개관하였다.
춘래장님이 선화하신 후에도 여러사람의 말씀을 들어보면
도의 지도자로서는 어느 도의 지도자 보다
제일 청렴결백하고 사심없이 어질고 깨끗하신 분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칭송을 하고 있다.
고서에 그 임금을 보고저 할진데 그 신하를 먼저보고
그 아비를 보고저 할진데 그 아들을 먼저보고
그 사람을 보고저 할진데 그 친구를 먼저 보라고 하였다.
후생의 도생으로서는 춘래장님을 뵈오반 없겠지만
지금에 이르러 춘래장님의 자제분들의 어진마음씨를 볼 때
부전자전으로 어진분이심을 짐작할 수 있다.
◎ 춘래장님이 내놓으신 후천의 용사 도표
제2절 반용택선생(潘龍澤先生)
(1921~)
반용택장님은 단기 4254년(1921) 대한민국 3년 신유(辛酉 1921)에 탄신하셨다.
성은 반씨(潘氏)시고, 휘함은 성환(聖煥)씨시며, 호는 용택(龍澤)이시다.
용택장님에 대하여는 본가가 남양리 개전지에서 거주하고
검소한 생활로 지내시고 60세 전에 선화하셨다.
소시에 춘래장님 도하에 입도하여 도생을 많이 교화하셨고
특히 경남 충무(통영)지방에서 많은 도생을 교화하셨다.
재질이 유망하고 지혜 총명이 과인하셨으며 도심이 매우 깊으셨다고 한다.
용택장님에 대한 모든 행적은 미처 자료를 수집치 못하여
대략 생존하고 있는 당시 도생 몇분들에게 득문한 바를 기술한다.
당시의 도생들은 고령하신분들로 지금은 별세한 분들이 많고
생존하신 분들이 불과 몇 분되지 않으므로
생존하신 분들의 가지고 있는 문헌등을 참조하여 볼 때
특히 음양 오행에 조예가 깊으셨고 재조가 있으신 분이었으며
영리하시고 지혜가 있으시며 공부를 많이 하신 분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도에 대하여는 춘래장님께 교시받은 일기법과 학문을 그대로 도생들께 가르치셨고
자신의 연구되는 천문이기와 음양오행 기문법에 능통하셨다.
현재 남양리 본택의 부인이 거주하시는 집과 생활을 볼 때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써 도생들께 부담없이 도에만 전심하시고
교화창생에 전력하심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도에만 전심전력을 하셨을 뿐
생계나 기타사에 대하여는 깊은 관심을 두시지 않으신 분으로 짐작이 된다.
용택장님의 연원인 박모산장님 이교현씨는
고명하신 도생으로 지금 많은 도생을 교화하셨다.
교화함에 있어서 자신이 먼저 초학 수련을 시켜서
선생님이신 춘래장님을 배현시켜 주시고
춘래장님께 연원을 달고 입도를 시키셨다.
자신의 밑으로는 연원을 달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자신은 춘래장님의 교시를 받아서 행하시고
자의로는 행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생각이된다.
모든 도생들에게 공부와 수련은 춘래장님을 대행하여 가르쳤으나
도생들을 자신이 통솔치 않이하고 모두 춘래장님께 인도하셨다.
당시의 용택장님께 수련을 받은 도생들께 말씀을 들어보면
시간과 약속을 생명처럼 지키셨고 엄숙하게 지도를 하셨으며
새벽 수련시간에 도생들이 곤하여 잠에 깊이 들어 있으면
직접 깨우지는 않으나 기침을 크게하시면
모든 도생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준비하고 수련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모산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하루는 젊은분이 찾아와서 뵙기를 원함으로 맞이하여
통성명을 하고 수문수답(隨問隨答)을 한바
좋은 도가 있으니 입도하기를 권함에 언어가 매우 지혜롭고 행동이 점잖하매
연령을 물으니 26세라 하는지라 당시 모산장님은 49세시니 23세 차이셨다.
젊은분이 공부를 많이 하였는데 무슨 도를 수도하며 선생이 누구신가 하고 물으니
증산(甑山) 천주님(天主任)을 신봉하고 고명하신 선생님이 계신다고 하시거늘
그럼 내가 후일을 정하여 선생을 만나 뵙고
입도를 하던지 못하던지 하자고 약속을 하고 작별을 하였다.
그리고 십여일 가량되서 다시 찾아왔거늘
‘그 선생을 만나뵈러 가자’하니
용택장님 하는말씀이
“저의 선생님은 고명하신 어른으로 그렇게 함부로 찾아 뵙기가 어렵습니다.
수련을 정성으로 하고 선생님의 승낙이 나셔야 찾아뵙게 되오니
선생님을 찾아뵈오려 가실분이 몇분 있으시니
모월모일 아무처소로 오십시오” 하므로
서로 약속을 정하고 작별한 후 준비를하여 그 처소에 이르니
30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있거늘,
용택장의 지시대로 치성을 모시고 수련을 하게 되었는데,
태을주를 받고 하루에 두시간만 잠을자고 남은 시간은 주문을 독송하게 되었다.
1주일이 끝난 후 모무 높은 선생님 만나보기를 청하니,
“제가 가서 물어보고 승낙을 얻어 보겠습니다” 하고
곧 갔다가 십여 시간 후 도착하거늘
‘선생님이 승낙하시드냐’고 물으니
‘“아직 덜 익었으니 수련을 더 하여, 오라 할 때 오라”고 하십디다’ 하거늘
모두 또 1주일 다시 수련을 하고 선생님 찾아 뵙기를 청하니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곧 떠났다가 돌아와서 하는말씀이
“선생님께서 이제 거의 익어가는구나 하시면서 1주일간 더 하라고 하십디다” 하거늘
모두 생각이 그 선생님은 멀리 계시면서도 우리들 하는 일을 훤히 아시는구나 하고
1주일간 수련을 더하고 나서,
마치는날 결공치성을 모시고 나서 선생님께 승낙을 받아오라고 청하니
곧 갔다 돌아와서 “이제 오시라고 합니다” 하거늘
반갑고 기쁜마음으로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약간씩 준비하여 가지고
따라가서 찾아뵈오니 유춘래장님이셨다.
선생님을 처음 뵈옵고 인사를 드리니,
인자하신 분으로서 반갑게 맞이하거늘 모두 정중하게 예물을 드리니,
하시는 말씀이 “집안형편도 넉넉지 않은데 이렇게 힘을 쓰니 받기가 미안하다” 하시고
“이번은 받겠으나 차후로는 나에게는 베풀지 말도록 하고
정성을 드려서 도나 잘하는 것이 나로서는 제일 기쁜 일이니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운수를 보게 하라하시고 당부하시더라“ 하셨다.
모산장님은 선생님을 처음 찾아 뵈옵는 예물로서(삼배) 1필과
그 외 약간으로서 찾아 뵙고 사정 형편을 잠시 둘러보니
생활이 빈곤하고 초옥의 선비 생활로 많은 도생을 통솔하나
검소하게 지내심이 사심없으신 분으로 생각이 드셨다고 하셨다.
모두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니
증산(甑山) 천주님(天主任)의 도법을 설교하시는데
처음으로 듣는 천주님(天主任)의 법도라
신비하고 높고 깊은 법리를 듣고 모두 마음이 감복되어
‘과연 고명하신 선생님이시구나’ 하고
연원을 달고 입도를 하셨다고 하시었다.
21일간 태을주를 읽으시는데,
하루에 2시간만 잠을 자고 식사시간을 공재하고
대략 계산을 하니 19시간을 공부하였는데
주문 읽으시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읽었던지
추시계 추가 한번 움직이는데 한번씩 정도로 읽었으니
하루에도 여러번 수독이 되고 21일간에 수 백만독이 된 듯 싶었다고 하셨다.
주문을 읽다가 곤하여 잠이오면
두 주먹을 포개 이마에 대고 앉아 엎드려서 약간씩 잠을 자면
용택장이 뒤에서 깨워주고 하면서
“큰 선생님을 뵈옵고저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정성이 그래서 되겠습니까,
열심히 수련을 하라고 하셨다”고 하셨다.
이런 일을 보아도 엄격하고 성심이 대단하신 분으로 알 수 있으며
더욱이 천문 계산법등은 타인이 연구하지 못한 것을 깨달아 알으셨으나
아무사람에게나 함부로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정성을 봐서 약간씩 일러 주신가 싶다.
이렇게 하여 도생들의 신심을 굳게하고 도를 스스로 본인들이 자각하게 하셨다.
도학에는 원래 스승으로부터 연원줄이 있어야 됨으로
군사부 일체로써 스승을 부모와 동일히 하는 법이다.
현시 학교공부와 같이 예법이나 경위가 없이 자기 이기주이 영리목적과는 다른 것이다.
그 외에도 하신 일들이 많았으나 당시의 도생들이 지금은 거의 고인이 되셨으나
당시 용택장님의 연원도생이던 몇 분을 만나보니
천문 역수와 음양 오행법을 간혹 일러주어도 도생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법문이나 많이 읽으면 자연히 깨달아지니
많이 읽고 일기공부나 계속하며
“천주님(天主任) 법이나 깊이 믿으라” 하시고
“일후에 16水법이 나오면 자연히 모두 알게되리라”고 하셨다 한다.
그리고 수 많은 일과 학문이 있으셨겠지만 한 구절을 필자가 소개하면
통영의 용택장님의 연원인 이진선 여사가
“이 법은 모두 알지못하니 당신에게 일러준다” 하고 받아 배우셨는데
이여사가 여러사람에게 일러주어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 법은 수산 밖에 전할 곳이 없다” 하면서
“나도 고령하였으니 전해준다” 하시면서 일러주시는데
그 법리를 저도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 시문은 천주님(天主任)이 말씀하신 고서의 인용문으로써
「삼인동행칠십리(三人同行七十里)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
동지한식백오재(冬至寒食百五除)」 로써
보통사람들은 영산수(靈算數) 계산법이라고만 하는데
영산수 계산법도 되겠지만,
천도가 순환하는데 구궁용사법이였다. 설명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 참고자료 ] |
* 하로는 종도(從徒)들에게옛글 한수(首)를 외워주시며 가라사대, 이글은 세상비결(世上秘訣)이니옛 글 한 수를 외워주시며 잘 긔억(記憶)하여 두라 하시니 이러하니라 「三人同行七十里(삼인동행칠십리) 五老峰前二十一(오로봉전이십일) 七月七夕三五夜(칠월칠석삼오야) 冬至寒食百五除(동지한식백오제)」(대순전경 3:171) |
이 뜻을 알으시는 분은 모산장님은
“천도의 용법이니
선천에는 필요하나, 후천에는 쓰지 않는다” 하셨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저가 알기로는 이 구절을 용택장과 모산장 외에는 아는 사람을 못보았다.
그 외에도 많은 업적과 문헌등이 있으나
세밀히 기록하자니 장구하고 또한 미처 수집치도 못하였으며
현실사회에서 믿음성이나 이해될 수 있는 점만 약간 기술하였다.
다만 선인 도생으로서 후생을 위해 일깨워주시고
신심을 불어 넣어 주셨으며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 등불이 되셨음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제3절 박모산선생님(朴母山先生任)
모산장님은 단기 4231년(1898) 조선 광무 2년 무술(戊戌) 6월 23일
전남 화순군 동복면 모우산 아래에서 탄신하시고
본관은 밀양 박씨이시며 휘함은 일문(日文)씨이시고, 호는 모산(母山)이시다.
유시에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수학하실 때 총명하고 제조와 지혜가 비범하시어
서당 선생이 심히 사랑하사,
“너는 장차 크게 이름을 떨치리니
모우산(母牛山) 아래에서 출생했으니 호를 모산(母山)이라고 하여라” 하시고
호를 지어 주시었는데, 그호가 연소시부터 모두 부르게되고
특히 도문에 입도하셔서 모산장으로 널리 알게되었다.
성품은 매우 인자하시어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시고 인정이 많으셨다.
성격이 급하셔서 때로는 실수하시는 일이 있어서
후회하시고 사과하시는 일이 있으셨다.
특히 학문을 즐기시사, 유불선(儒彿仙)의 서적을 많이 공부하셨고
신구학간에 고명한 학자이시었다.
음양 오행과 지리 의학에도 밝으셨다.
도문에 입도하신 후 성리학과 역학에 전렴하여 대가시었고
특히 천주님(天主任) 법문을 터득하여
법문에의 장구와 율여법 황극수 궁을법과
후천의 용법인 경주용담이란 정역도를 발굴하셔서 문하 도생들에게 가르치셨다.
문하에 많은 도생을 교화하여 고명한 문인 도생이 육성되었고
전국의 신구학간 학자들이 많이 찾아들어
혹은 연원 도생도 되고 혹은 진리를 배워가기도 하였다.
기술한 수산은 모산장님 문하 도생으로
을사(乙巳)년 (4298, 1965) 4월 14일에 입도한 이래
견문한 바를 대략 요약하여 기술하는바
후생 도생들에게 뜻깊은 교훈과 학문을 물려주신
표훈이 될 수 있는 바라 생각하여 약간 기술하는 바이다.
소시에 한문서당에 다니시다가 신학의 학교에 입학하시고 보성 전문학교등을 나오셨다.
보성 전문학교 학창시절에 己未年 3•1운동 당시에
독립운동군에게 학생들이 호위군을 하였는데,
혈서를 써놓고 호위군이 되어 33인을 호위 하게 되었는데
그에 가담하여 호위와 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격으셨는데,
지도하시는 분들의 주선으로 출옥하시고
그후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서 보통학교 교사를 잠시 하시다가
배일사상이 깊으셔서 사회와 세상 일에 뜻을 포기하시고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시면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회복하여 놓고
49세만 되면 불교나 천도교나 고명한 도의 스승을 만나
“입도하리라”는 맹세문을 「49세 후 위 입도」라고 써서
사용하는 조그만한 궤짝안을 열어볼 때마다 잊지않고 명심하기를 맹세하셨다.
48세가 되시어 세상에 많은 도교가 있지만
그중 불교나 천도교에 입도를 하시고저 생각을 하실때에
어느날 상업길로 출타를 하셔서 일모하여
주막집 객사에서 하루밤 주무시게 되셨는데
객사방에 나그네들이 한방 모여 잠잘 자리가 복잡하였고
베개가 없어 목침을 베고 자게 되었는데 목침도 모자라서 모두 두선두선 하는데
한 노인이 목침을 양손에 잡고 힘 않들게 절반씩 쪼개어서
나누어 주면서 베고자라하는지라.
모두 놀라서 경복하게 되었는데 모산장님은
이튿날 그 노인을 조용한 주점에 모시고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신비의 법을 알고저 수문수답을 하게되었는데
그 노인의 말씀이
“우리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해도중의 진인을 모시고 살며
그 진인이 세상에 나오면 일제의 정치가 물러나고
세계가 평화롭고 좋은 세상이 건설되며
우리나라에 세 진인의 정부가 서게된다”고 하거늘
그리하여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그러면 저도 선생의 하시는 일에 참여하여
해도중(海島中)의 그진인 앞에 갈수 없느냐”고 물으니
“나의 소개로 갈 수 있으나 그곳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므로
성심을 표하고 그 마음과 지혜도략을 봐서 들어오게 한다”하고
심히 어렵게 이야기함에
“좋은 방법만 일러주시면 어김없이 시행하겠습니다.” 하고 간청을 하였더니
노인의 말씀이 그러면 다음날 날자와 시간을 정하여 주시면서
“논서마지기 값이될 돈을 준비하여 여수(전남)바닷가 모장소로 어기지말고 오라”하므로
승낙하고 작별하셨다.
그후 약속한 날자가 되어 부탁 받은 준비를 하여 그장소에 당도하니
그 노인이 기다리고 있거늘 서로 반가이 맞아 대화를 하는데
그 노인이 준비를 하였느냐고 함에 모든 준비를 다하고 왔다고 대답하니
“이번은 동행하지 못하고 내가 우선 먼저가서
모든일을 주선하여 놓고 모일에 올것이니
그날 약속을 어기지 말고 이장소로 오라”하면서
준비한 돈을 돌라함에 드리고 작별하고 돌아와서
그날을 맞아 그 장소에 이르러보니 노인이 오지 않는지라
2일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영감한테 내가 돈만 잃고 속았구나” 하고
내집 주소를 아시니 다음 연락이라도 있을까 하고 귀가하였다.
그후 아무소식이 없었다.
하루는 여수지방에 볼일이 있어 여수에 갔더니
그 노인이 시중에 다니시는데 그곳 사람들게 물으니
한갓 술객으로 집도없이 그냥 쏘다니는 협잡군으로
그 노인을 만나서 손해와 속은 분이 많으나 포기하고 만나보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그 후 또 도를 찾기위하여 아는분이라면 모두 만나 보고저 하였는데
지리산 청학동에 산다고 하는 분을 만나서 아는말을 많이 하므로
그분을 친하여 또 비용과 돈만 많이 없애고 말았는데
그 사람도 금전만 청하여 받아간 후 약속도 어기고 종적이 묘연하였다고 하셨다.
모산장님은 천성이 저가 격어본 결과
남의 말을 너무 믿어서 실차 하시는 일이 많으셨고
너무 타인을 내마음 쓰듯이 생각하셔서
도리어 해를 입고 원망을 받은 일로 많으셨으며
도생들에게도 어느 사람이든 자기의 의견대로 말씀드리면
모두 그리하라고 승낙을 하셔서 기강이 잡히지 않은 일이 있었으며
이용을 당하신 일도 많으셨는데, 너무 남을 믿어서 그리하셨다.
옛날 황정승 재판하는 격이셔서 이 세상에 그 누가 진실을 알아주리요
다만 본인에게만 화가 미친 일이 많으셨다.
그후 50세가 되시던 병술(丙戌 4279, 1946)년 동절에
뜻하지 않은 젊은분의 방문을 받고 맞이하여 방문한 뜻을물으니,
“풍문에 듣자하니 박생원께서 도를 찾으신다” 하셔서
한 번 권고하여 보고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함에
기꺼이 대좌하여 문답하고 도의 뜻이 있으니
좋은 길이 있다면 입도를 하겠다고 승낙하고
도문에 드시게되니 그분이 반용택장님이었다.
반용택장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춘래장님의 지도를 받고 성심껏 도를 믿게 되었는데
선천적인 학문은 이미 공부하신 바로써
대략이라도 그 이치를 타인에게 배우실 바가 없었는데
다만 깊은 도학과 특이한 학문을 아시고저 하여
춘래장님을 종종 배현하고 진법을 알고저 하여
천주님(天主任)이 저술하신 법문의 깊은 진리를 배우고저 말씀드렸으나
춘래장님께서는 사수장님이 가르치신 일기법과
법문의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서만 설교하심으로 마음에 만족하시지 않아서
천주님(天主任) 말씀에
「이 법문 한 권만 하여도 천하사 세 번하고 책은 그대로 남는다」고 하셨는데
“필연 깊은 이치와 진법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법문의 이치를 아시고저 하셨으나 알길이 없고
충분한 설명을 하시는 분이 없는지라
그리하여 일변 뜻가는 분을 만나면 교화하여 춘래장님 앞으로 연원을 달고 입도시키면서
세월을 보내고 춘래장님의 지시대로만 행하시고 계셨다.
입도하신 7년 후 계사(癸巳 4286, 1953)년부터
자신이 이 깊은 법문을 알아보실 생각으로 10년을 기약하고
연구와 연구를 거듭하였으나 알아볼 방법이 없으므로
무조건 시간만 있으시면 주무시기 전에는 일을 하시면서도
길을 다니시면서도 읽기 시작을 하셨는데,
법문을 독송하신 6년만에 신교를 받으시고
법문의 진리를 터득하시게 되시어
생각 나시는대로 기록을 하시게 되셨는데
여기저기 종이 조각에 적어 놓은 것을 수집하여 체계를 잡기위하여 조용한 장소를 택하니
금산면 청도리 구성산 학선암이 좋을 듯하여
학선암에 들어가셔서 조용한 방을 얻어 홀로 계시면서 체계를 잡으실 때
학선암 주지스님이 간혹와서 들여다 보시고
“박생원은 무엇을 그렇게 쓰시고 있소” 하고
보아도 알수 없는 글이라고 하였다.
모두 공부하셔서 기록하신 문서의 체계를 잡아서 대략 책자를 만들어
천주님(天主任) 앞에 청수를 모시고 책자를 놓고
천주님(天主任)께 고하시기를,
“이 법이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쳐도 헛됨이 아니온지
승낙의 징조를 보여주십시오” 하고 4배를 드리고 기도를 정성껏 드리니
불시에 광풍이 대작하여 생감이 떨어지고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요란하다가 그치는지라.
마음의 감복하여 헛됨이 아님으로 자신을 세우고
다시 4배를 드리고 나서 쉬고 계시는데
학선암 주지스님이 대처승으로
들녘에 가정과 전답을 두고 왔다 갔다 하면서 절을 지키는데
그때 집에 갔다가 절에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
“저 밖에는 조용하였는데 여기는 무슨 광풍이 불어서 이 야단이 낫느냐”고 하면서
‘박생원이 혹시 도술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고
그뒤부터 항상 의심하여 뒤를 캐여 보매
그 스님과 작별하고 대면치 않으셨다 하시며
‘저희들을 보고 자네들도 이 공부가 할 공부인가 못할 공부인가 하고
천주님(天主任)께 기도를 정성껏 드려보게 필연 징조가 있을 것일세’ 하시면서
“헛된 공부를 가르치겠는가” 하시었다.
그리고 항상 말씀이
“나도 법문의 이치를 알지못하여 읽어서 대략이라도 알게되었으니
자네들도 많이 읽으면 자연히 알게되니 많이 읽으라” 하시고
“이 어려운 이치법을 배워서 다 알수있겠는가 본인이 자각하여야 되네” 하고 당부 하시었다.
“도생들이 교화를 하여 도생이 되어 도를 하다가도 물러나고
또 지극히 권고하여도 도를 믿지 않아 실망과 애석히 생각하면 모두 인연소치니
인연과 때가 되면 하게될 것이니 너무 관심할 바 없다” 하시고
“도를 사람마다 다 하겠는가 다 전생의 인과로서 되는 것이라” 하시고
“인연이 깊어야 되고 성의도 있어야 되며
고가 있어야 도를 이루고 못이룰 것이 아닌가
하늘이 신명을 용하여 추리는 것이라” 하시며
시를 일러 주시니 이러하니라.
기이태지(箕以汰之)하니 조강이선거(粗糠先去)하고
포이태지(匏以汰之)하니 사석이후퇴(沙石後退)라고 하셨다.
즉 키로서 푸게되니 겨가 앞으로 나가고
바가지로 일으니 모래와 돌은 뒤로 처진다 이다.
과연 초동들의 노래에
‘사람마다 글 다하여 선비되면 농부될 사람 그 누구며
의사마다 병을 다 고치면 북망산천이 왜 생겼나‘ 하는 뜻과 같다.
이야기는 잠시 돌려 6년간 공부하실 때의 사정을 조금 이야기 한다.
저도 도생이 되어 모산장님이 거주하시는 처소를 보았는데
토담 초가집이 금새 쓰러질 듯 하였고
공부하신 방은 골방에 궤짝 하나놓고
등잔불 밑에서 특별한 책자도 쌓아 있지 않았고
바듯이 혼자 누우면 맞은 방안이었다.
공부를 하실 때 사모님께 말씀을 들으니
“낮에는 일을 보시고 밤이면 혼자서 나오시지도 않고
무엇을 하시는지 주산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뿐
간혹 글읽는 소리 뿐이었고
집안 일은 돌아보시지 않은날이 많으셨고
항상 공부에 만전력을 하셨는데 너무 적적하게 계실 때
어디 가셨는가 싶어서 문을 열어보면
혼자서 조용하게 눈을 감고 앉아 계셨으며
식사 시간이 되어도 나오시지 않아 문을 열어보면
졸도를 하신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고 하셨다.
모산장님 말씀에
“나도 정신을 집중하고 글을 읽고 생각을 할 때
소 꼴 망태를 메고 꼴을 베면서도 길을 다니면서도 글을 읽었고
때로는 생각에 잠겨 넘어질 때도 있었고
남의 말을 듣지 못하여 실수 할 때도 있었으며
글을 읽고 생각을 하자니 타인을 만나면 대화를 하니
그것을 피하여 항상 소로로 다니고
이웃간에도 자주 접촉을 하지 않아 인심도 잃었다”고 하시었다.
자작 시를 보아도 그 뜻을 알 수 있다.
그 시에
천리원정(千里遠程)도 일보진(一步盡)이요
초발신심(初發信心) 편정각(遍正覺)이라
즉 천리의 먼길도 첫 발자국 부터다 마치고
처음에 믿는 마음을 정각까지 두르리라.
‘계산을 하실때에 긴 주산을 두 개 묶어서 수를 계산 하셨다’고 하며
제일 어려운 것을 황극수의 중앙자리 수놓을 때
어려워서 뇌가 돌아 졸도 하셨다고 하시고
그 중앙자리 수를 놓고나니 초봄의 날씨에 눈이 온 산천에 덮여 있는데
날씨는 따뜻한 편이나
양지바른 집뒤안 울타리 밑에 난초꽃 모양인 삼지 오엽의 꽃이 붉은 색으로 피여서
하루에 한 대씩 올라와서 삼일간(三日間) 세 송이가 그날 그날 시들어 지고하여
이상히 여겨 무슨 꽃이가 하고 캐어 보았더니
뿌리도 시원치 않은데 꽃은 좋아서
다음 해에 피도록 묻어두었더니 일후는 피지 않았다고 하셨으며
모산장님의 자제분들도 그꽃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후 정유(丁酉 4290, 1957)년 동절부터 3년간을
고명한 학자들을 찾아 각처에 다니시면서
본인이 터득한 법문의 뜻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하여
법문에 대한 대화를 하여 보았으나
별로 신통하게 아는 분을 만나지 못하고 지내시다가
천도가 경자(庚子 1960)로부터 열리게 됨에
할수 없이 춘래장님을 비밀리 찾아 뵙고
제가 법문을 연구한 바 여차여차 하오니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제가 도생을 교화하고 가르쳐 보겠습니다” 하고 고하시니
“그리하라”는 승낙을 받고
천도가 경자(庚子 1960)에서 열리고
무기(戊己)에서 바뀌게 되므로, 광주 무을교(戊乙敎)로 찾아가셔서
교단대표와 합의하여 법문 수련을 하고,
그후 여러교단과 도를 찾는 분들을 교화하여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법문 공부를 하게되고
법문에 대한 깊은 이치가 들어있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모산장님이 법문의 이치를 터득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법문장구(法文章句) 사상강유(四象剛柔) 부내해석(符內解釋)
황극수(皇極數) 구궁법(九宮法) 십일귀체(十一歸体) 궁상각치우율려법(宮商角徵羽律呂法)
문채(文体) 문석(文釋) 문의(文意) 의석(義釋) 이석(理釋)
천지인변역지리(天地人變易之理) 기우상수이치(奇偶象數理致)
천추만세진락법(千秋萬歲盡落法) 대학경일장장하법(大學經一章章下法)
사기의간략(史記干略) 운로법(運路法) 36궁72둔법(三十六宮七十二遁法)
천근월굴종시법(天根月屈終始法) 천문운회법(天文運回法)
경주용담도(慶州龍潭圖) 기타 세세법문설(細細法文說) 등으로
주공장(做工章)에게 기술(記述)되어 있으니 참고하시라.
모산장님이 후천 용사법이고 인존시대의 천지인신(天地人神)의 용법인
경주용담도(慶州龍潭圖)를 짜서 들고 나오시고,
황극수(皇極數)로서 후천역법과 구궁용사법을 재작하시어
각처에 수련과 공부를 가르치신 후부터는
전에 없었던 도판과 후천역이며 법문 해석등으로
수도를 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나름대로 들고나와
교화하고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저도 을사(乙巳 1965)년에 모산장님 문하 도생이 되었는데,
그 전에는 타교단이나 도를 하는 분들이 그러한 법을 가르치는 분이 없었다.
모산장님의 지시로는 내가 죄가 될는지는 모르나
법문중에 “사수장님이 달아주신 현토를 두곳 고쳤는데
도생들이 알기쉽게 함이였으니 그리알아라” 하시고
“서전서문을 보고 해석은 자의로 하여도 죄가 않될 듯하여 법문을 해석하였다”고 하셨다.
천주님(天主任)과 사수장님의 말씀을 항상 인용하셔서
법문을 설명하여 주시고 법문의 모든 이치를 함부로 유출하지 마라.
자못 후일에 각자들이 자기들 의견과 욕망으로 고쳐서
중구난방의 수라장이 될 우려도 있고
또 법이 한국에서부터 외국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니
외국사람이 먼저 알면 외국인을 우리가 지도할 수 없고
도리어 배우게되면 종주국이 되겠는가라 하셨다.
그리고 성인의 법을 함부로 남용하고
시기가 이르지도 않은데 사용하면 죄가 되고 난법이 된다 하시고
성인이 책자를 전하여 주심은 필요시가 있어서 하심이며
현토를 달아주심은 뜻이 바로되게 세워서 헛되게 설명을 못하게 하심이라고 교시하셨다.
생활이 빈곤하셔도 도중사 외에는 도생들에게 협조를 청하시지 않으셨고
아무리 가정적 복잡이 있으셔도
잠시나마 도생들이 공부한다고 모시면 일을 전패하시고 왕림하셨으며
식사와 잠자리도 도생들과 동일하게 하시고
항상 법문이 헛되이 유출될까 당부하셨다.
모산장님 당시는 법문 원본 외에는 인쇄를 못하게 하였는데
제가 도생을 교화함에 있어 수십 여명을 모아 한 자리에서 공부를 가르치면서
현토 법문과 주문이며 일기하는 법을 붓으로 써서 돌려 주자니
너무 복잡과 고통이 되어 현토 법문 인쇄하기를 청하였더니
승낙치 않으셔서 수차에 말씀드려 승낙을 얻어
초학교본(지금 ‘순천도교본’)으로 처음 출간하였다.
그후 도생들이 너무나 법문에 설명이 어려워서
들을 때는 이해가 되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림으로서
법문 해설 출간하실 것을 수차 간청하여
손수 「법문전경」이란 책자로 출판하시었다.
그리고 기행이적도 많으셨으며 구제를 받은분도 수 명이나 되었고
성리학적인 법문공부를 깊이 배운 도생들이 많으며
지금 교화에 전력하는 도생들이 많다.
모두가 모산장님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뚜겅이 열리어 진미를 알게되고
연구가 풀리어 교화의 일을 하는것이라 생각하겠다.
제가 천주님(天主任) 법문으로 모산장님을 모심은
다름아닌 몇가지 기적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를 말씀드리는바 당돌하나 도생들이 참고가 될까 하여 이야기 하는바이다.
처음으로 을사(乙巳 1965)년 4월 14일 모산장님을 모시고
4명이 금산면 청도리 천국사에서 7일간을 정하고
초학 일기공부를 하게되었는데
천주님(天主任)전에 입공치성을 모시고 진묵대사(震黙大師)님 단을 모신 앞에서
낮에는 부를 붓으로 그리고, 밤에는 주송을 하며 일기 공부를 하는데
처음 어떻게 구궁돌리는 법이 어렵던지 4명이 모두알지 못하였는데,
제6일이 되던날 ‘저의 부친 기일이라’ 공부중이어서
차마 선생님께 제사지내로 집에 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종일 공부를 하고 저녁에 주송을 하고 쉬게 되었는데
당시 저의 집안이 빈곤하여
수련비도 천국사 보살님이 베푼 신세를 지고 공부하는 처지라
집안에는 제사준비도 못되였으라 생각하고 내려가서 잔이 라.
집안에는 제사준비도 제대로 못되였으리라 생각하고 내려가서
잔이나마 한 잔 올리고 올까하여 할 수 없이 말씀을 드렸더니
“공부중이라도 부모님 제사이면 가봐야지 지금까지 있었느냐“고 하시며
“다녀오라” 하므로 집에가니
안식구가 품팔이를 하여 약간의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내려고 하거늘
뜻밖에 당도하니 “공부중에 어떻게 왔느냐”고 함에 “승낙을 받고 왔다”하고 제사를 모시고
천국사에 당도할 때 청하늘 이더니 문전에 이를 무렵
난데없는 검은구름이 하늘에 한점 있더니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모두 곤하게 주무심으로 가만히 들어가서 잠을 이루고저 할 때
난데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뇌성이 대작이더라.
이튼날 일어나 선생님께 문안드리니,
“집에서 자고오지 밤에 왔느냐”고 하시고
그날 또 일기공부를 배우는데 석양 무렵에 고명하신 분들이 세 분 오셔서
“공부하는 것을 보러왔다” 하시고
그날은 그분들과 이야기 하면서 쉬게 되었는데,
그분들이(최청용•황석주•위찬오) 모산장님께
새로 공부하는 사람들게 법문 설명을 하여 주라고 간청 하시니
“아직 일러 주어도 알아든지 못하니 써준 법문이나 많이 읽어,
외우고 일기나 잘하면 천주님(天主任)께서 증조를 보이시고
자연히 알아지게 될 것이니 그리알라” 하시고
일체 설명을 하시지 않으니
천국사 보살님은 화가나서
“누구가 그렇게 머저리인줄 아시오 말씀도 않고 무조건 모른다”고 하신다며
내당으로 들어가시매 모두 침소를 정하였다.
이튼날 결공치성을 모시고 귀가하였다.
그후부터 제가 교화를 하면서 도생들 수련을 시키는데
과연 모산장님 말씀과 같이
천주님(天主任)이 천지(天地)기운으로 증조를 보이시고
때문에 많이 읽으니 자연히 아는 바가 생기며,
천지(天地)의 기운이 없을 때는
도생을 많이 교화해도 다 물러나가고 도를 믿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리고 천주님(天主任)을 믿다가
좋게 물러나지 않고 악평을 하고 나간 사람은
화도입고 손해도 보고,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바며 순조롭게 풀리지 못하였다.
또 도를 빙자하여 도생들께 제물을 얻어
가정현편으로 욕심을 채우는 자나 도의 공금을 개인사복으로 쓰는 사람은
뜻하지 않는 화와 손해를 입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저에게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보여주심이 있었다.
모산장님은 63세 되시던 경자(庚子 1960)년부터
교화를 하여 많은 도생들이 교화하고 또 교화하여 도생이 많아지매
도생들 사정현편에 따라 각 지방에다가 운영 책임자를 정하여
방방을 마련하고 순회하시며 수련과 지도를 하셨는데
도생들의 지식이 높아지매 즐거워 하셨다.
말년의 80이 가까우실 무렵 고령으로 노쇠하셔서
설교와 지도를 각 법당에 지도 할 수 있는 도생들께 부탁하시고
본댁에 계시면서 치성때와 수련할 때에 참석하시었는데
도생들이 각히 자기들 의견으로 말씀드리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마음에 흡족하시지 않아 회피를 하시었다.
또한 도생들도 자기들의 뜻에 만족하지 않게 하여 주심으로
비방과 원성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물러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또 혹자들은 자기의 주장과 후임을 받으려고 하는 도생도 있었으나
운영상의 그 사람 역량에 따라 교화의 책임을 승낙하셨으나
후임은 정하여 주시지 않으셨다.
후임을 정하지 않으심은 당연한 일이다.
순천하는 도로서 서전서문을 직접 천주님(天主任) 법으로 비하여 설명하시고
우리도는 순천도(順天道)이니 도주와 선생은 사수장님이시고
춘래장님은 연원장님이시며
그 다음은 모두 도생이고 연원이니 “나보고 선생이라 하지말고 호를 부르라”고 하시고
자세한 설명을 하셨다.
과연 도법을 서전서문의 법으로 비하여 보면
후임을 춘래장님 후부터는 정하여 줄수 없는 도이다.
이는 상전심법인 자재연원법(自在淵源法)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도생이 후임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면
이는 선생을 무식자로 모독시킴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책임을 승낙하신 것은
자기 소신 것 교화의 일을 하라는
“운영의 책임을 승낙하셨을 뿐 도의 후임을 정하여 승낙”하신 바는 아니시었다.
말년의 80 고령에 원래 체구가 약하신 대다가,
빈곤한 가정과 힘에 겨운 일이며,
도중의 정신적 심력으로 급하신 성격에
심중이 불안하시여 정신이 혼미하시게 되시었다.
남양리의 전 초가집을 헐고 잠실을 지어 누에를 기르고
약간의 전답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 나가시는데
사모님 혼자 일을 보시니,
자제분들이 권고하여 매도를 하여서 서울에 전셋집을 얻어
협소한 집에서 생활을 하시면서
사모님은 노령에 시장에 나가셔서 품팔이를 하시었다.
사모님은 덕이 많으시고 인자하셔서 모산장님이 도중일을 보시매,
집안인을 돌보실 여유가 없으시므로
사모님 혼자서 가정사와 전답의 일을 담당하시고
도생들이나 도를 알고저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바쁜 일손을 멈추시고 불평없이 온화하신 얼굴로 맞이 하시며 대접하셨다.
서울의 전셋집이 너무 협소하여
어느날 연탄가스가 스며들어 노쇠하신 몸이라 모산장님은 일어나시지 못하시고
사모님은 중태에 계셨는데
때는 단기 4314년 신유(辛酉 1981) 12월 9일 선화(仙化)하시니 선수 84세시었다.
자제분들과 각지 도생이 모여 합의하여
김제군 금산면 용화동 법방 앞산에 빈소로 장례를 모시고
사모님은 수년후 별세하셨다.
모산장님은 평생 도를 위하여 고심하시고 사비를 쓰시면서 도생을 위하여 일하셨건만
많은 도생들이 빈곤한 탓인지 의리가 없고 성의가 부족한 탓인지
생화로가 거주하실 집하나 마련하여 드리지 못하였다.
다만 당신이 청렴결백하여 남의 신세를 지지않고 생활하시면서
도생들을 길러 냈음을 후생 도생들에게 표훈을 보여 주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존시 설교를 하실 때,
“성인의 사업은 자기 맡은 분야만 일하면 되고 타인의 분야를 침범하면 못쓰고
성인의 법은 전해질 곳으로 전해지면 그 외에는 허령이 나지않으면 가게되는 것이니
생의 애착과 욕심을 부릴 수 없다”고 하셨는데
당신의 하실 일을 다하셨는가 선화하시니
문하 도생들이 도를 이끌어 나가는데 힘이 무겁게 되었다.
그리고 모산장님의 모든 훈시와 하신 일들이 수많아 다 기술치 못하고
대략이나마 도생들께 도움이 될까 하여 기술하였다.
마산장님의 법문해석과 후천 인존시대에 사용할 경우
용담도(正易)의 법도는 후세에 크게 명망을 떨치고 높이 받드실 분으로 생각한다.
제4절 후 기(後 記)
광대무변하고 전만고 후만고의 유일한 미증유의 불가사의한
천주님(天主任)의 도법을 千百자로 법문을 제정하시사
창생으로 하여금 천주님(天主任)이시고 미륵불(彌勒佛)이신
당래용화 세계에 출세하시는 지상천국 선경시대에
교민청세를 하고 무궁한 영복을 누리라는 법문을
스승님께서 갖은 노고와 어려움을 당하시면서
열기 어려운 문을 열어 도생들에게 전수하셨으니
비하자면 세계 온 인류가 다 써도 딸리지 않은 큰 방죽이며 큰 광맥이다.
스승님들께서 이 큰 방죽과 큰 광맥을 쓰고 캐내도록 개발하여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모두가 가서 정성껏 일만하면
흡족하게 얻어 올것이니 안심하고 정성만 드리면 이룰 것이다.
천주님(天主任)께서는
「남 잘된 것을 부러워 말고 남은 복이 많으니 남은 복을 받으라」고 하셨으니
이 큰 복을 받을 사람이 없고 전해줄 곳이 없어 심히 걱정하시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고언에 “금은옥백의 중보가 가득해도 쓰면 다 없어지고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그자손이 지킬지 모르고
만권의 서적을 물려주어도 자손이 다 읽을지 모르니
숨은 덕을 쌓아 물려주라“ 하고
“내몸에 간직한 글은 얼마든지 써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쓸수록 더 샘솟듯이 나오게 되며
은덕은 자손만대에 영복을 물려주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눈앞에 일을 생각하여 영리의 탐심은 자손까지 멸망한다”고 하였다.
“사람은 이름 석자가 중요하고 범은 가죽이 중요한 것이며
선생을 잘 만나야 반성공이고, 성인을 따르면 반성인은 된다”고 하셨다.
스승님들의 하신 일을 상고하여 볼 때
참으로 순천의 도요 바른길을 인도하였으니
강호의 뜻있는 재현은 깊이 생각할 바가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천주님(天主任) 시문에
다유곡기횡이입(多有曲岐橫易入)이요
비무탄도정난심(非無坦道正難尋)이라.
굽은 길이 많아서 벗겨들기가 쉽고
탄탄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바로 찾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8가지 가까이 말라는 시로
비(非)자 불(不)자 문자를 연결하여 지으신 시로서
깊이 생각할 바 있으니 다음과 같다.
非人情 不可近 비인정 불가근
非情義 不可近 비정의 불가근
非義會 不可近 비의회 불가근
非會運 不可近 비회운 불가근
非運通 不可近 비운통 불가근
非通靈 不可近 비통령 불가근
非靈泰 不可近 비영태 불가근
非泰統 不可近 비태통 불가근
이시문을 각자의 나름대로 해설하여 보라.
비(非)자를 빼고도 해석하여 보고, 불(不)자를 빼고도 해석해 보고
여러모로 해설하여 보라.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하였다.
이 시문은 사회에서도 해당이 되겠지만 도의 필요로서 지으신 시인가 하여
도를 바른 길로 찾아쓰라는 계시인 듯하여,
도 찾는데 목적을 두고 해석하자면
인정이라도 그릇된데는 가히 가까이 말고
정의라도 그릇된 일이면 가까이 말고
옳은 모임이라도 그릇된 듯 하거든 가까이 말고
모임의 운이라도 그릇된 듯 하면 가까이 말고
운이 통한 듯 하여도 그릇된 듯 하면 가까이 말고
통한 것이 영특 하다해도 그릇된 듯 하면 가까이 말고
신령스럽게 크다해도 그릇된 듯 하면 가까이 말고
크게 거느렸다 해도 그릇된 듯 하거든 가까이 말라고 해석해 보았다.
현토를 하는데 따라서 뜻이 다르니 잘 새겨 보시라.
도를 찾음에 있어 우선적으로
깊은 진리와 도는 모르는 바로서 사람이나 형상을 보고 거의 찾게 되는바이니
특히 천주님(天主任)의 큰 법도를 뉘가 능히 다 알리요.
모두가 천주님(天主任)을 믿고 수도를 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풀이대로 옳고 진법이라 주장하는 바가 되니
심히 두렵게 생각하고 도생을 교화하여 도생들께 그릇됨이 없고
자기에게 죄가 되지않도록 하여야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성인이 아닌 이상 잘못됨이 없을수는 없다.
잘못되면 남까지 망치고 마는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하여 되리요.
그러므로 천주님(天主任)께서는 문자로서 창생을 교화하시고
그 형상과 사람의 존귀로서 하시는 바 아닌
오직 그 미천한 사람이라도 그 마음을 보시고 정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도(道)는 자기에게 있으며 천주님(天主任)을 믿고 그 법을 믿는 것이지
스승은 오직 길을 도인도하여 주시는 분이며,
옳고 그르게 인도 하였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감언이설로써 형상을 웅대하게 함과 많은 사람을 운집하였던들
진실과 진리진법이 없으면 무엇하며,
넘어질 때는 사정이 없는 것이 된다.
재현 도생은 무궁한 법문을 많이 읽고 수련하여
앞으로 오는 세계에 영복을 받아 선도하라.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구할 때는
산과 가시덩쿨을 사양치 않는 것이다.
시간이 없고 경제의 곤란으로 도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이해되지 않는다.
제가 수도로서 남보다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고 하면 다되는 것이니
오직 마음만 정하면 못할일이 없다.
도생모두가 세계 인류가 모두 도를 닦아 성도하고
악이없는 좋은 사회가 되면
선계에 계시는 스승님들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으리라 생각되고
스승님들의 은혜를 보답하는 바가 될 것이다.
끝으로 모든 방면 부족함이 많음을 송구히 생각하면서
대략이 나마 편술 하였으니 잘못 기록한 바는 이해하시고
스승님의 뜻을 알아주시고 도를 잘 하셔서 성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