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 의사의 유가적 생사의식과 실천행위
이학주(강원대학교 교양교육원)
1. 서론
2. 시대의식에 따른 학행일치
1) 가족과 국가의 일체의식
2) 윤희순의 마지막 투쟁, 죽음의식
3. 결론
1. 서론
이 글은 윤희순 의사가 평생을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배경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던 생사관과 실천행위를 알아보는데 있다. 논의의 바탕은 윤희순 의사가 남긴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윤희순 의사는 평생 16편의 작품을 남겼다. 경고문, 노래, 편지, 자서전 등으로 그가 남긴 작품은 윤희순 의사의 생사의식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사람의 절대정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그의 작품을 통해 윤희순 의사를 보면 가장 잘 파악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윤희순 의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이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윤희순 의사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세계를 정립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행해야 하는 행동방침을 세우는데 중요한 지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나라는 국민으로 구성된다. 국민은 사람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 영토라는 3대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국민인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정신세계가 있어야 주권을 행사할 수 있고, 영토를 획정하고 수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윤희순 의사가 평생 보여준 생사의식과 실천행위는 우리나라를 유지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윤희순 의사가 평생 보여준 생사의식을 일목요연하게 세상에 알리는 연구행위는 꼭 필요하다. 그동안 윤희순 의사를 대상으로 연구한 논저는 상당한 양에 달한다. 그리고 질적으로 높은 수준에 달한다. 이런 선학들의 업적은 본 연구를 수행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연구를 보면, 윤희순이 여성의병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그를 부각하기 위한 연구에 집중되었다. 아주 중요한 연구 사실이었다. 그러나 왜 그가 여성으로서 의병활동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윤희순이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한 여성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본고는 윤희순 의사를 연구하는데 여성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가족과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윤희순을 대할 필요가 있음을 부각하고자 한다.
또한 최근에 필자에 의해서 윤희순식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해왔다는 취지의 연구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바탕에서 윤희순식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이 이뤄졌는지에 대한 천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선학들의 업적을 참고로 해서, 필자가 썼던 <윤희순 의사의 작품을 통해 본 의병활동과 선비정신의 상관성>에 대한 후속 논문으로 ‘유가적 생사의식과 실천행위’를 작성하고자 한다.
2. 시대의식에 따른 학행일치
윤희순은 그가 쓴 <해평윤씨일생록(海平尹氏一生錄)>에서 그의 정신을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글은 그가 쓴 마지막 기록이라는 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
걸음을 걸어갈 때 발밑을 보고 옮겨해야 하느니라. 모든 정신은 발끝서부터 머리까지 조심해야 하느니라.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윤씨 할미가 자손들에게 보내는 말이니라.
이 글은 윤희순 의사가 왜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곧, 충효를 바탕으로 한 시대의식이었다. 그 시대의 절대정신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했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실을 따라 생과 사를 결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하면서 그 많은 고초를 다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의를 위한 그 시대의 절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이런 시대적 절대정신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윤희순 의사가 21세기에도 많은 사람의 모범이 되고 연구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면 그가 그 시대의 절대정신으로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해평윤씨일생록>에서 분명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렇게 며칠 지내자 돈상이 하는 말이 봉준, 연직은 어멈하고 외가로 가라고 하고, 돈상은 또 독립단을 찾아가고, 민상, 교상은 쌍두원으로 가고, 효상은 복고현으로 가고 하였느니라. 이렇게 기구하게 살자니 죽어지면 좋겠는데 죽자하니 광복이 빨리 와서 자손들이 조선에 가서 잘 사는 것을 보고 싶어 차마 죽을 수도 없고 죽어지지도 않고 하여 원수로다.
그가 바라는 것은 광복이었다. 광복이 돼서 고국에 가서 평범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광복이 곧 그가 생각한 그 시대의 절대정신이었다. 이때 그의 상황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손주들까지도 같이 못 있고, 외가로 보내야 했으며, 그래서 죽을 수도 없고, 죽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1) 가족과 국가의 일체의식
윤희순의 생사의식은 그의 실천행위로 이어졌다. 이는 진정한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그는 조선선비의 정신을 이어받았지만 그것을 그냥 따르지 않고 윤희순식의 선비정신으로 의병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활동은 여성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었고, 조선독립의 기치를 내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조선의 독립과 광복이라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뚜렷하게 ‘안사람’이라는 면을 부각한 그의 사고에서 비롯했다. 이런 의식은 당시 여성으로 의병에 참여하여 그 누구도 하지 못한 큰 업적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의병은 곧 남성이라는 경직된 사고에서 여성도 의병을 하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근원을 마련한 것이다. 그야말로 여성의병의 개척자였다. 이는 개화기에 일어난 여성의 자각운동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개화기 여성의 자각운동을 어누 누구보다도 먼저 드러냈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다만 그가 더 위대한 것은 여성자신의 입장만 부각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부각하기 보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여성이 나서야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는 큰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윤희순은 국가라는 대의에 따라 자신이 앞장섰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여성의 입장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처럼 여성의병의 선구자로 나선 것은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을 받은 집안 내력도 있겠지만, 그가 이런 절실함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자각능력 때문이었다. 이런 정신의 기본이 시대의식에 따른 절대정신의 발로였다는 면에서 우리는 윤희순 의사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
조선조 때 많은 관료들이 충과 효에 대한 선후를 놓고 갈등을 해왔다. 조선조는 군주제도를 수용한 군주국가(君主國家)였다. 이 당시는 거의 모든 나라가 그랬다. 임금이 주인인 나라였다. 그러나 임금이 주인이라 하지만 임금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임금은 효를 도(道)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했는데, 임금이 효의 모범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으로 삼고자 했다. 곧, 군주가 효(孝)로써 모범을 보임으로써 백성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 선정을 이룰 수 있다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효 중심적 사고는 정치적 분쟁과 정치적 피폐의 원인을 낳기도 했다. 그래서 파당을 일으키고, 수많은 정변의 시작이 되었다. 아울러 충효의식이 심화되면서 인간의 자율의식과 민주의식을 저해했다. 임금과 백성의 관계가 수직적인 것을 떠나 인간의 평등권이 없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여성과 하층민이었다. 조선조 사회에서 여성은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만들어 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면서 여성의 권위를 낮추는 이상한 행위를 해온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조에서 여성은 평등의식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사회적 진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윤희순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은 거의 회기적인 것이었다. 곧, 여성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제도 속에서 당당하게 여성의 역할을 찾아 여성의 권위를 드러내었다. 윤희순식의 선비정신을 만들어냈고, 윤희순식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런 윤희순식의 여성권위 신장은 기존의 제도를 파괴하거나 기존의 제도에 저항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기존제도를 수용하면서 여성도 남성과 같이 기족과 나라를 위해서 일제에 맞서 싸울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그 때문에 윤희순의 대일투쟁의 저변은 가족과 국가를 항상 대등한 관계로 놓고 보고 있다. 다만 국가가 존재해야 가족이 잘 살 수 있다는 측면이 조금 앞섰을 따름이다.
이에 윤희순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나서서 의병활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쓴 의병노래와 일제와 일제 앞잡이에게 보낸 서한은 이를 증명하는 논거이다.
그렇다면 윤희순의 이런 바탕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단적으로 말해서, 윤희순의 이런 사고와 활동의 바탕은 유가적인 가족과 국가관에서 출발한다. 그가 처음 의병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시집을 갔을 때의 상황이었다. 이 역시 그의 일생록 앞부분에 잘 나타난다.
시집을 와보니 시아버님은 홀로 계시고, 한곳에서 살게 되니 근심이었다. 외당(畏堂) 선생께서는 나라가 어지러우니 근심이라고 하시며 (밖에) 나가 사시고, 항재(恒齋)께서는 성재(省齋)께 가서 사시고, 짝을 잃은 두견새 신세가 되다시피 살자하니 항상 쓸쓸히 지내오던 차에 외당께서는 나라가 어지러우니 근심이라고 하시며 의병을 모집하여 큰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을 잡수시고 계셨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자 하루는 외당께서 하시는 말씀이 “의병을 하러 갈 것이니 너는 집안 가사(家事)에 힘쓰도록 하라”하시면서 “전장(戰場)에 나가 소식이 없더라도 조상을 잘 모시도록 하라”시며 눈물을 글썽하시었으나 앞이 안 보이는 밤중이었다. 또 하시는 말씀이, “자손을 잘 길러 후대에 충성되고 훌륭한 자손이 되도록 하라고 하시며 너희들은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길 바란다”하시고, “네가 불쌍하구나”하시며 눈물을 글썽하시니 차마 볼 수 없어 불쌍하신 시아버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길 지경이었다.(<해평윤씨일생록>)
이것은 윤희순 의사가 16살에 시집을 왔을 때 시가의 상황이었다. 정말 일상의 가정하고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시아버지 외당 유홍석은 홀로 살다가 의병을 하러 나가고, 남편도 성재 유중교에게 가 있고, 윤희순은 홀로 짝 잃은 두견새 마냥 큰 집을 지켜야 했다. 그때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나가면서 어린 며느리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은 정말 비장했다. 그런데 그 상황의 요지는 ‘가정과 조상과 국가’가 같은 선상에서 이뤄지고 있다. 가사 잘 돌보고, 조상 잘 모시고, 국가에 충성하는 자손이 되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이 ‘너희들은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는 일제의 강점에 의해 국가가 수모를 당하고 가정이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인데, 좀 더 확대해석하면 독립된 국가에서 가족이 오순도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곧, 독립과 광복이라는 절대정신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은 <외당 류공 행장>에도 나온다.
사당에 절하고 맞자부 윤씨에게 경게하시기를 “오늘 가는 길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으니 너는 마땅히 먼저 아들을 잘 가르쳐 끝까지 변하지 말고 광복의 날을 기다리도록 하라”하시고 길을 떠나셨다.(<외당 류공 행장>)
이런 유홍석의 정신은 윤희순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그의 아들 유돈상, 유민상, 유교상에게로 이어졌다.
죽더라도 선친(先親)의 뜻을 이어 받아 나라에 몸 바쳐 애국정신이 얼마나 장하나 생각해 보기도 하였노라. 돈상이가 한 번은 어려서 놀란 적이 있는데, 조선에서 왜놈과 왜놈앞잡이들이 와서 외당 선생은 어디서 전쟁을 하느냐고 묻기에, 어린 돈상을 붙잡아 내면서 네 자식을 죽인다고 하면서 (외당 선생의 거처를)대라고 호통을 심하게 때리며 어린 것을 위협 했지만 어린 것이 무엇을 아는 듯이 울면서도 대답 없이 맞으니 장하다 생각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나라 일에 도움을 주니 그 아니 자랑스러우나, 큰일들을 하시는 독립군을 착실히 도와주도록 하여라 하니, 돈상이가 하는 말이, “그때는 어머님께서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일을 하시는 시아버님을 죽도록 알려줄 줄 아느냐’하시며 걱정을 하실 때 저는 꼭 죽는 줄 알았나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장성하니 근심을 하지 말라”고 하나 너희들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더라. 만리타국에서 죽으면 우리나라로 영원히 가지 못할뿐더러 우리나라가 어이될 것이냐, 걱정이 되는 구나.(<해평윤씨일생록>)
윤희순 의사가 어떤 생각으로 국가를 생각하고, 의병과 독립군을 위해 힘썼으며, 가족을 위한 마음이 어떠한지를 읽을 수 있는 기록이다. 윤희순의 그런 정신은 오롯이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그래서 자식들 모두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 갔다. 인용문에서 유돈상(1894~1935)이 어머니를 위해서 하는 말은 그의 행적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나라’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윤희순이 가지고 있는 그 시대의 절대정신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이다. 윤희순 의사 항일독립 투쟁사를 낸 원영환은 이 대목에서 일본군과 앞잡이의 행태와 어린 돈상의 애처로운 모습 등의 상황을 말하면서 “그 분은 참으로 위대한 애국자요, 위대한 효부라고 아니 할 수 없다.”라는 말로 해석했다. 이 말처럼 윤희순은 가족과 국가를 같은 개념으로 보면서 가족도 국가가 있어야 존재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윤희순의 생각은 어쩌다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이 가장 컸지만 당시 변발령, 변복령, 민씨(명성황후)시해사건 등 전 국가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때 이항로를 중심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운동이 한창 전개되었고,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는 등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 중에 제일 큰 문제가 일제의 침략이었고 내정간섭이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윤희순이 살았던 항골은 가정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가정리를 주축으로 남면과 남산면 일대는 유인석, 이소응 등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당시 의병활동을 이끌며 살았던 고장이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이항로의 제자였던 유중교와 관련이 있었다. 이 동네는 당시 의병의 기치로 가득했던 곳이다. 그러니 조금만 관심을 둔다면 시대의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상황은 춘천항일독립운동사에 잘 정리돼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당시 국가적 상황과 춘천사람들이 행했던 항일운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정리했다. 이를 보면 윤희순 의사가 항일투쟁을 하게 된 배경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주변의 상황과 국가적 재난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계기를 윤희순은 누구보다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본인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생각도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의병으로 나가 싸우는 시아버지의 승리를 기도하는 일부터 행했다.
윤씨는 효성이 기특하여 그날 곧 북쪽 동산에 나아가 정결한 곳에 단을 모으고 밤마다 삼경(밤 열두시)에 목욕재계하고 새 자리를 단 위에 편 후 향을 피우고 네 번 절하며 빌기를 “싸움에 성공하시어 원수를 갚고 옛 제도를 보존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하늘께 빌어 십여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이 제천 장담리로 옮겨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고치었으니 이는 바로 공의 집안을 법도 있게 어거하신 한 끝을 보임이다.(<외당 류공 행장>)
윤희순은 가장 전통적인 믿음을 중심으로 시아버지의 승리와 조선의 제도를 이어가기를 기도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서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빌고, 또 산제당에 올라가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풍속과 같다. 정말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가족을 위한 기도이다. 그런데 그 가족인 시아버지가 국가를 위한 의병을 행하고 있었으니, 이 기도는 결국 나라를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싸움에 성공해서 원수를 갚고 옛 제도를 보존해 주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옛 제도는 조선조의 제도일 수도 있으나, 이는 일제의 제도를 벗어난 우리의 제도를 말한다. 그것을 백 일도 아니고 열 달이나 매일 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윤희순이 가족과 국가의 일체의식을 보인 것은 <숙모전장서>에도 그대로 나온다.
우리 가족이 어디 가서 살며 … 남정네만 의병을 하오면 무슨 수로 하리요. 뒷바라지 하온 것이니 그리 아시고 근심을 하지 마옵소서. 이 나라 없이 어이 살며 임금 없이 어이 살자하오리까. 차라리 죽어서 시아버님 외당 선생을 살릴 수 있도록 하겠나이다. (<숙모전상서>)
윤희순 의사가 항일투쟁을 한 의도가 분명하게 나온다. 어성들도 의병에 참여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윤희순식의 항일독립투쟁이었다. 그 배경에는 역시 가족과 나라의 일체감이 있다. 윤희순이 평생 의병과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생각이 흩어지지 않았던 원인은 굳은 그의 의지 때문이었다. 시대의식에 따른 그만의 절대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식은 윤희순 의사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이어져 왔다.
2) 윤희순의 마지막 투쟁, 죽음의식
윤희순 의사의 삶은 이 시대에도 그대로 모범이 된다. “매사는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해평윤씨일생록>)는 말은 천하의 진리이다. 이 말은 윤희순 의사가 76세를 평생으로 살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삶의 철학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사람 중심으로 대의(大義)를 파악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실천철학이 담겨 있다. 곧 유자들이 표방했던 사람중심의 인의(仁義)인 어짐과 의로움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식 읽기이다. 윤희순 의사의 그런 의지는 마지막까지 이어졌는데, 아들의 죽음을 접하고는 삶의 의지를 놓게 된다.
또한 돈상이와 민상이는 독립단(獨立團)에 가서 소식이 없던 차에, 시월 이월 제사 지내러 오던 날 저녁에 왜놈이 와서 데려가서 고생을 무한히 하더니, 칠월 열 여드렛날 데려 가라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요동감옥에서 나오는데 매를 얼마나 때렸는지 다 죽은 사람을 데리고 무순에 있는 제 처갓집이 가까워서 가는 도중 숨이 지니 어찌할 수 없어 옆 야산에다 묻어놓고 유(柳) 자(字)만 한 자 새겨 놓았으니 이 슬픈 마음을 이루 다 (말)하오리오. 차라리 내가 죽고 말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는 만리타국에서 누구를 의지하며 살며 연직이와 봉준이 이 어린 것을 누구에게 맡기오리까. 서방님.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죽도록 하여 주사오며, 고향 친척 근처에서 살도록 하여 주세요.(<재종 지와장 서방님에게 알림>)
1935년 음력 7월 23일 76세의 윤희순 의사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이다. 이국만리 중국의 무순에서 42살 된 아들을 품안에서 보냈다. 7월 19일이었다. 그것도 평생 독립운동을 하던 아들을 혼자 손으로 길거리에서 묻었다. 그 쓸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슬프고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때가 76세나 된 할머니였다. 윤희순 의사는 그날로 곡기를 끊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친척들이 있는 고향에 가서 살다가 죽는 것이었다. 정말 소박한 소원이었다. 윤희순은 이런 슬픔과 외로움과 고통을 어디 말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재종시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곡기를 끊고 죽음을 준비하면서 고향의 산천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상황을 원영환은 이렇게 적었다.
이 가련한 아들을 일제의 고문으로 잃은 윤희순의 슬픔은 76세의 노령으로 극복하기에는 어려웠다. 강철같이 굳은 의지로 일제와 당당하게 대항하며 40년 동안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윤희순도 아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울분과 슬픔을 참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아들이 죽은 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76세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 하였다.(원영환 글)
재종시동생에게 편지를 쓴지 일주일 만에 윤희순은 고향에 가서 살다가 죽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만리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첫 여성 의병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윤희순 의사의 죽음이었다. 40년 동안이나 항일독립운동을 하고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였다. 윤희순의 죽음은 그 어떤 경우보다도 비장미(悲壯美)를 내포하고 있다. 윤희순은 우리민족의 죽음 중에서 가장 슬프고 숭고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죽음으로써 마지막 투쟁을 한 것이다. 아들을 때려 죽게 한 일제에 맞서 76세의 노구로 할 수 있는 마지막 항거였다. 비록 그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엄청난 항거였다.
그의 삶은 비장한 죽음과 같이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이런 투쟁도 윤희순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왔다. 처음 그가 항일투쟁을 할 때는 반대가 많았다. 어쩌면 선구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동네에 의병들이 몰려왔는데, 누구든지 나와서 밥을 해달리기에 나가서 도와주고, 또한 그 날 저녁에 안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의병을 도와주자 하니 어떤 사람은 반대를 하고, 어떤 사람은 하자고 하였다. 첫째로 친척이 앞장을 서서 운동을 하니 잘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그 중에도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합심하여 의병이 오기만 하면 잘 도와주더라. 그 중에 고생이 많은 것은 몰래 포고문, 경고문, 노래 이러한 것들을 하자니 고생이고, 남정네들이 모르게 하자니 근심이 많았다.(<해평윤씨일생록>)
그 선구적 일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했다. 의병들이 와서 밥을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반대가 많았다고 했다. 여성의 주도적 독립운동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 고비를 넘기니까 잘 도와주었다고 했다. 아마도 보람이거나 어떤 의무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남정네 몰래 포고문, 경고문,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윤희순이 했던 윤희순식 시대의식이고 절대정신이었다. 윤희순은 그 나름대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이를 함으로써 여성의 권위가 상승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안사람들의 혁명이었다. 그것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반열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왜 윤희순이 이런 생사의식을 가졌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윤희순이 그 당시 가장 높게 봤던 것은 선비였다. 선비라는 말은 조선조 유자들이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말이었다. 아무리 무위도식해도 선비하나로 용서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안사람들이 아무리 고생을 해도 선비라는 입장에서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비는 살신성인할 수 있었고, 이웃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서서 방패막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학행일치의 실천적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한 마디로 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과 실천행위였다.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앞장 서는 정신이었다. 이것이 곧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인애를 바탕으로 의리를 표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애(仁愛)는 사랑의 포용적 성격이고, 의리(義理)는 악에 대한 배척의 분별적 성격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선비는 모든 사람의 선망(羨望)이었다.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다[捨生取義]는 말에서처럼 인간이 자기존재의 위기를 만났을 때 의리를 최고의 가치로 지켜서 모든 이해득실이나 고통의 감수는 물론 생명까지도 내맡길 수 있을 때 의리는 용기와 결합되어 의용(義勇)으로 나타난다.
의리를 바탕으로 한 확고한 사생관이 선비에게는 있었다. 그 때문에 한국의 의병들은 의(義) 하나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윤희순이 ‘시대에 따른 옳은 도리’를 따라 살라고 한 것도 바로 의(義)에 있었던 것이다. ‘의’가 ‘옳은 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용’(義勇)이 있을 수 있다. 의(義)가 있을 때 용(勇)이 생겨나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그리고 한말에 일제침략을 겪을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唱義[창의는 倡義 인 듯: 필자 주])를 하여 항의하고 순의(殉義)하는 선비의 주장과 실천은 곧 의리가 역사적 난국을 통하여 투지 속에 실현되는 것임을 말해준다.(금장태의 글)
이처럼 선비이기 때문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옳음을 위해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윤희순은 그의 시아버지부터 많은 선비를 주변에서 보았다. 그것도 국난위기에서 행한 선비들을 직접 보았던 것이다. 윤희순이 봐왔던 당시 가정리 중심의 유학자들은 모두 의리를 중시하여 멸사봉공할 수 있는 선비였다. 이런 주변의 분위기는 윤희순에게 있어 선비는 평소에는 학문을 익히면서 자신과 이웃과 나라의 발전을 생각하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과 나라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윤희순에게 있어 선비는 삶의 지표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의를 위하는 마당에서 남녀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최소한 윤희순이 볼 때는 그랬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위기에 처했는데도 의병이 되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남정네들에 국한 되었다. 윤희순이 보기에 이것은 모순이었다. 그래서 유습과 제도를 깨고 윤희순은 여성으로 선비의 반열에 나섰다. 그가 쓴 16편의 작품에는 독특한 작가 소개가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든가, 조선선비의 아내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안사람’이라는 표기이다. 그 사실을 보자. 곧, <왜놈대장 보거라>(조선선비의 ᄋᆞᆫᄒᆡ 윤히순), <애달픈 노래>(이 노래를 부르면서 도와주ᄉᆡ 윤히순 작), <방어장>(을미년 십이월 십구일 윤히순), <병정노래>(병신춘ᄌᆞᆨ 윤히순), <안사람의병가노래>(윤히순ᄌᆞᆨ 자주 일거보고 외워두고 ᄒᆞ여ᄅᆞ), <오랑캐들아 경고한다>(조선 안사람이 ᄃᆡ표로 경고ᄒᆞᆫᄃᆞ 조선선비ᄋᆞᆫᄒᆡ 윤히순), <왜놈 앞잡이들아>(병신년 치월이십일 선비ᄋᆡ ᄋᆞᆫᄒᆡ 윤히순), <금수들아 받아보거라>(윤히순 보ᄂᆡᆫᄃᆞ) 등이다.
이렇게 각 작품마다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였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혁명(革命)의 순간이었다. 이렇게 자기를 떳떳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여성도 남정네들처럼 선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확고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선비의 아내’, ‘선비의 아내’처럼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다. 이때 윤희순은 호칭을 아무렇게나 쓰지 않았다. 일제에게 보낼 때는 반드시 ‘조선선비의 아내’라 하여 ‘조선’이란 말을 넣었고, 일제 앞잡이에게 보내는 경고문은 ‘선비의 아내’라 하여 ‘조선’이란 말이 빠졌다. 그리고 의병이나 안사람들을 대상으로 계몽을 하거나 용기를 넣는 글에서는 저자를 밝히지 않든가 선비란 말이 들어가지 않았다. 윤희순은 이 표현에서도 윤희순이 무엇을 바탕으로 의병과 독립운동을 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삶의 선망이었던 선비이되 안사람으로써의 역할을 분명하게 밝혀 안사람들도 얼마든지 선비가 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드날린 것이다. 윤희순의 이런 의식과 실천은 조선사회에 있어서는 혁명이요, 일제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집안에만 있었고, 바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여성으로서 선비의 반열로 떳떳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약하게 집안일만 보던 여성들이 자신들을 향해 경고문을 보내고 의병을 도우면서 직접 총을 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확고한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경우에도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경고문, 포고문, 노래 등으로 발표하는데, 이는 조선의 여성들을 일깨워 항일투쟁에 앞장서게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정말 엄청난 실천행위였다. 그것도 상징과 비유와 같은 문학적 언사(言辭)는 극히 제한적으로 나타나고, 직접적 사실적으로 대항하는 언사를 쓰고 있다. 아래 인용문은 <왜놈대장 보거라>의 부분이다.
너희 놈들이 우리나라가 욕심나면 그냥 와서 구경이나 하고 갈 것이지, …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네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이 마적떼 오랑캐야. … 좋은 말로 달랠 적에 너희 나라로 가거라.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왜놈대장 보거라>)
이것은 윤희순이 왜놈대장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정말 일제가 들으면 섬뜩할 정도로 글을 썼다. 그런데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조선 안사람이 주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선안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이라는 사실이다. 선비가 가지고 있는 인의(仁義)에 따른 멸사봉공의 정신을 곧 ‘안사람 윤희순’이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선비가 가지고 있는 무서운 정신과 실천력을 바탕으로 안사람 윤희순이 한다고 이렇게 떳떳하게 밝혔을 때 그 파장효과와 힘의 과시는 정말 엄청나다. 전국의 안사람을 윤희순이 생각하는 투쟁의 현장에 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혁명적 발언과 실천행위는 일제앞잡이에게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앞잡이에게 보낸 글은 <왜놈 앞잡이들아>, <금수들아 받아 보거라>가 있다.
금수보다 못한 인간들아, 너희 부모 살을 베어 남을 주고, 너희 부모 살 수 있나? … 말 못하는 짐승들도 한 번 제 집을 정해주면 그 집을 찾아오건마는 너희놈들은 조선 땅에서 태어나서 남의 나라 왜놈에게 가서 짐승노릇을 한단 말이냐. 한심하고 애달프다. … 왜놈의 앞잡이놈들 참으로 불쌍하고 애달프다. … 우리 안사람도 너희 청년들이 마음을 고쳐서 살아간다면 도와주고 할 것이다. 우리 조선 안사람들이 너희들 마음 고치길 바란다. 조선 아낙네들이 바란다. 윤희순 보낸다.(<금수들아 받아 보거라>)
이처럼 일제 앞잡이들에게 보내는 글에서는 일제앞잡이에게 비난과 회유를 같이 하고 있다. 그 주체는 역시 안사람들이며 대표는 윤희순이다. 이때 <왜놈 앞잡이들아>에서는 “선비의 아내 윤희순”이라 했고, <금수들아 받아 보거라>에서는 “윤희순 보낸다”라고 썼다. 글의 강약에 따라 선비라는 말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였다. 선비가 가지는 위상과 윤희순이라는 여성의 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때 여성들이 해야 될 일은 <안사람 의병가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엇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것이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ᄋힹ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고 아늑하게 만져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 나라 없이 어이살고,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윤희순 지음 자주 읽어보고 외어두고 하여라.(<안사람 의병가노래>)
윤희순은 처음부터 여성들이 남정네들처럼 총을 들고 나간다거나 하는 일은 꾀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잘 하는 일로 의병을 돕는 것으로 시작했다. 옷을 꿰매고, 따뜻하게 보듬어 용기를 주어서 나라를 되찾는데 도움을 주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엄청난 여성의 힘을 나타내는 발단이 되었다. 나중에 여성들이 나서서 3.1독립운동을 외치고 여성의 권위가 신장되어 이 사회의 주역으로 나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윤희순이 윤희순식으로 선비정신을 내세워 의병활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이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윤희순은 선봉에 나설 수 있었다.
3. 결론
이 글에서는 윤희순의 유가적 생사의식과 실천행위에 대해서 그의 작품을 통해 조명해 보았다. 윤희순 의사는 경고문, 의병노래, 편지, 신세타령, 자서전 등 총 16편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이들 작품에는 윤희순 의사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상과 실천방향 등이 담겨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가 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40년에 걸쳐 행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윤희순이 유가적인 생사의식을 가지고 7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아왔다고 보았다. 그 글의 핵심은 <해평윤씨일생록>이라는 짧은 그의 자서전에서 밝혀낼 수 있었다. 곧, “매사에 자신이 알아서 흐르는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살아가길 바란다.”는 언급이었다. 이 글을 통해서 윤희순이 시대의식에 따른 절대정신을 파악했다고 보았다. 이때 그가 파악한 절대정신은 조선의 독립과 광복이었다. 그런데 독립과 광복을 위해서 나섰던 명분의 바탕은 유가적인 가족과 국가관에 따른 생사의식이었다. 그 생사의식은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충효정신을 이어받았다. 이를 윤희순은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윤희순식으로 만들어서 임했다. 곧 여성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제도 속에서 당당하게 여성의 역할을 찾아 여성의 권위를 드러내었다. 윤희순식의 선비정신을 만들어냈고, 윤희순식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다.
윤희순은 식음을 전폐하여 죽음으로써 마지막 투쟁을 했다. 죽음보다 더한 투쟁은 없다. 그런데 그의 이런 투쟁은 조선의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선비정신을 이어받았다. 이는 인의를 바탕으로 한 멸사봉공의 정신이었다. 윤희순은 조선의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선비정신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서 대일항쟁을 이어갔다. 여성인 안사람을 내세웠고,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앞세웠다. 그것도 대상에 따라 다른 호칭을 썼다. 이는 남정네 중심의 조선조 선비들의 반열에 여성의 이름을 당당하게 올리면서 여성의 권위를 신장하고, 일제에게도 안사람들이 대일항쟁에 나설 수 있다는 공포를 주었다. 이는 그 당시 누구도 감히 나서서 할 수 없던 안사람들의 혁명이었다. 그것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반열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 곳곳에 나와서 필자가 주장하는 충분한 논거로 본다.
윤희순이 윤희순식으로 선비정신을 내새워 의병활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나중에 여성들이 나서서 3.1운동을 하고 여성 권위 신장을 위해서 투쟁을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윤희순이 죽음으로 의병과 독립운동 선봉에 나섰던 행위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윤희순은 여성 혁명가였고, 여성 대일항쟁의 선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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