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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중 웹페이지 <소종중 및 지회 소식> 난에 <찬물>님이 올리신 "명문혈족(OO공파) 뿌리찾기" 행사 홍보에 대한 댓글에서 <允中>님은 "명문혈족(OO공파) 이라하니, 묻습니다"라고 하면서 해파(該派)의 몇 가지 근거가 불분명해 보이는 기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추측컨대, '명문(名門) 운운하면서 정작 족보의 기록은 명문답지 않게 불분명하다'는 뜻으로 올린 글이 아닌가 싶다. <允中>님은 족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관심하게 지나치기 쉬운 부분을 깊고 날카로운 안목으로 분석하여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명문(名門)"을 내세우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그것이 당당한 긍지(矜持)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치졸한 과시욕에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듣는 이들을 종종 민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명문(名門)은 '이름 있는 문벌, 또는 훌륭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낱말인데 여기서 '문(門)'의 개념은 전근대적 권위주의 가부장제(家父長制)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 밑바닥에는 계급주의 신분제도가 깔려 있다. 그것은 관존민비(官尊民卑)ㆍ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부계혈통(父系血統)으로 이어지는 '모관모씨(某貫某氏)'라는 문중(門中)이며, 명문(名門)은 대체로 과거(주로 문과) 급제자와 관직(특히 고관대작)자를 상대적으로 많이 배출한 모관모씨 문중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명문'은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개념일 뿐, 모든 국민이 평등한 자유민주공화국인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남녀를 차별하는 호주제, 아버지 성(姓)을 따르는 부성(父姓)주의, 심지어 동성동본 결혼 금지조차 모두 헌법을 위배하여 폐지된 마당에 아직도 명문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모관모씨 문중의 어떤 이가 (예를 들어)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그 모관모씨 문중 전체가 갑자기 명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가 명문 운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지 오늘날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즉 조선시대 선조와 오늘날의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는 백일몽(白日夢)을 꾸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명문 이야기는 조선시대에 해당된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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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가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1세 호장공(박응주)에서 5세 문정공(박상충)에 이르는 고려 후기의 선조들께서 바탕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에 반남박씨(나주박씨)가 명문이 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확고하게 다진 분은 누가 뭐라든 6세 평도공(박은)이시다. 평도공이야말로 반남박씨의 '중시조(中始祖)'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도공의 후손이라 해서 모두가 한결같이 명문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 것은 아니다. 물론 평도공의 세 아드님들(박규ㆍ박강ㆍ박훤)께서 음사(蔭仕)로 3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했지만 그 이후 9세에 이르기까지 의정공(박숭질: 8세) 외에는 단 한 분의 과거(문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의정공께서는 세조 2년(1456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정1품)에 이르렀으나 안타깝게도 그 후손들은 유락잔미(流落殘微)한 상태가 되어 반남박씨 문중에서 사실상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의 명문을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문과급제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반남박씨는 10세에 이르러 4명의 문과급제자(박억년ㆍ박조년ㆍ박영ㆍ박양)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문과 등방자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문과 등방자는, 족보 총편 상대 선조 맨 마지막 세대인 9세를 기준으로 했을 때, 상주공(박임종) 후손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승지공(박숙)과 신계공(박연) 후손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 후 반남박씨는 11세에 이르러 두 분의 기린아(麒麟兒)가 등장하는데 바로 문강공(박소)과 소고공(박승임)이다. 소고공께서는 품계가 당상관(통정대부)에 이르렀으나 혈손이 번성하지 못한데다가 크게 두각을 드러낸 후손이 사실상 없었던 반면, 문강공의 자손들은 승승장구하여 반남박씨를 이른바 '국반(國班)'의 자리에 올려 놓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13세 참봉공(박동민)ㆍ서포공(박동선)ㆍ남곽공(박동열)ㆍ오창공(박동량)의 후손들이 매우 두드러졌다(혈손 기준). 반남박씨가 명문이니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니 하는 말은 사실상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반남박씨 전체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뭐 그렇다고 이 4동(四東) 후손들께서 목에 너무 힘을 주지 않으시기를 부탁 드린다. 잘못하면 목디스크 걸릴 수 있으니 . . . ㅎㅎㅎ. 또한, 명문가에는 반드시 어두운 면도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길. 예를 들면, 평재공(平齋公) 같은 분도 계시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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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반남박씨가 조선시대에 이른바 '명문'의 반열에 어떻게 올랐는지 그 과정을 간략히 살펴 보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명문'은 조선시대의 일이니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면서 조상을 팔아 우쭐거리는 짓거리는 반드시 삼가야 할 일이다. 단순히 성관(姓貫)이 반남박씨라고 모두 다 명문가의 후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기억할 일이다. 훌륭한 조상--꼭 고관대작이 아니더라도--을 둔 후손들은 조상에 대해 존경심과 긍지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조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가문이 조선시대의 명문임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미래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니겠는가! 족보 조작으로 명문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니!!!
참고: 위에서 언급한 선대 인물 혈계(血系)
1~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世 始祖 朴應珠 박응주 戶長公 호장공
2世 宜 의 及第公 급제공
3世 允茂 윤무 進士公/ 진사공/ 參議公 참의공
4世 秀 수 密直公 밀직공 | 尙衷 상충 文正公 문정공 | 訔 은 平度公 평도공 | 葵 규 參判公 참판공 | 秉文 | 林宗 임종 尙州公 상주공 | 億年 | | | |
兆年
| 紹
| 應川 | . . . . . |
東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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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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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順 | 의인왕후 |
應男 | |
應福 | . . . . . |
東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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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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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寅 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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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年 | | | |
林楨 | | | | |
秉鈞 | 䃞 숙 承旨公 승지공 | 琛 | | | |
璡 | | | |
珩 | . . . . . | | |
承任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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薑 강 世襄公 세양공 | 耣 | . . . . . | | | | |
塤 | . . . . . | | | |
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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䎩 | . . . . . | | | | |
基 | 讓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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埇 | 인성왕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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堧 연 新溪公 신계공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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萱 훤 慶州公 경주공 | . . . . . | | | | | |
崇質 숭질 議政公 의정공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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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眞 | | | | | | | | |
尙褧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