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학>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처음 떠나는 견학이었다. 샤워하고 거울 보면서 치장을 하는 데 한 시간 정도를 썼다. 기껏해야 청바지에 티셔츠와 카디건을 입는 수준이었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가는 중간에 거울을 꺼내서 몇 번씩 얼굴을 확인했다. 코 옆에 땀구멍이 커다랗게 보이는 것이 신경 쓰여서 기름종이를 꼭꼭 눌러 문질렀다.
단과 대학 건물 앞에는 'C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라고 써 붙인 빨간색 관광버스 두 대가 서 있었다. 조교 선배와 신입생 몇몇이 버스 옆 화단 모서리를 둘러앉아서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 모여서 출발하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동기지만 여섯 살이 많은 영달이 형이 뒤에서 어깨를 치며 아는 척을 했다. 부쩍 주변을 맴돌며 사람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사회복지가 뭔지는 잘 몰랐다. 어쩌다보니 사회복지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원하던 곳에 원서를 쓰기에는 점수가 모자랐다.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최저 성적이 하필 수능 성적이었다. 재수를 하려면 학원비가 더 든다는 소리를 듣고나서 집 근처 국립대학교에 점수 맞춰서 원서를 쓰기로 했다. 미래 사회에는 사회복지가 전망이 좋을 거라는 담임 선생님의 막연한 한마디가 나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영혼이 없는 것 같은 담임 선생님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전망이 좋다’는 말은 왠지 지금의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사는 지금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 말이다.
신입생들이 모두 버스에 앉았다. 나와 다른 버스에 타기로 되어 있는 영달이 형이 굳이 명부까지 수정해가며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이 한 번씩 고개를 돌려 형을 쳐다보면서 키득거렸다. 영달이 형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 나도 웃어버렸다. 설레었다. 이윽고 전공 교수님이 조교선배와 함께 메가폰을 들고 버스를 탔다.
이번 사회복지시설 견학지는 한 지역 복지관과 근처 아파트라고 했다. 공들여 채비를 하고 버스로 한 시간에 걸쳐서 온 길을, 학교에서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견학을 간다는 아파트는 우리집이었다. 대학교 전공 첫 견학지가 우리집이라니. 관광버스를 타고 우리집으로 견학을 가다니.
견학을 가기 며칠 전이었다. 삐삐로 몇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K방송국의 유명 프로그램 작가라고 했다. 방송국이라니 마음이 들떴다. 삐삐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된 사연을 방송에 나와서 자세히 소개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본보기를 줄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봄날 저녁, 해가 떨어져 으슥해진 학교 공중전화부스였다.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 수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나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온갖 말을 듣으면서도 몸이 굳어지는 상황이 혼란스럽고 서글펐다.
기대하던 답변을 내놓지 않자 작가는 언성을 높였다. 부모의 장애와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학생이 부끄러운 거라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동생들에게 귀감이 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에게까지 떳떳하지 못한 거냐고 몰아붙였다. 반응이 시원찮다고 여겼는지 급기야는 나를 보고 비겁하다고 했다. 나는 방송에 나가고 싶지 않을 뿐,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잔디밭 어딘가에서 소주를 홀짝이며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깜깜한 교정을 돌아다니면서 숨죽여 울었다. 이렇게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이야말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증거인건가 싶어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하루종일 나만 기다리고 반기는 엄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생방송이었다. 그 작가가 만든 방송이 얼마나 대단한가 지켜보아야겠다는 오기, 혹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혀서 놓쳐버린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내 눈으로 확인해보겠다는 미련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섞인 마음으로 방송을 지켜보았다. “엄마가 이렇게 아프다가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음이 어땠나요?”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질문을 받자마자 목이 메여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나운서는 이런 식으로 그날 방송에 나온 아이들을 하나같이 울렸다. 단체로 눈물을 닦지도 않는 걸 보니 어떤 연출을 위한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저는 요 앞 네거리에서 한복점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기 저 빨간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 사연이 제일 안됐네요. 제가 저 아이에게 이십 만원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생방송 중에 연결된 시청자와의 전화통화 내용이었다. 빨간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는 그날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고 그래서 가장 안쓰러워 보였다. 전화로 언성을 높이던 방송 작가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그런 말로 불러 모은 아이들을 재료 삼아 이 아이들보다 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심’을 선물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관광버스는 아파트 안에 위치한 복지관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사회복지사 한 명이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그를 보자마자 등뼈를 타고 손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나를 데리고 동네 경찰서 장학금 전달식에 다녀온 사회복지사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우리 엄마가 몸이 불편한 걸 알고 집에 반찬도 배달해주는 사람이었다. 교수님 앞에서 우리 엄마 안부를 묻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동기들 앞에서 후원금은 잘 썼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지? 우리집으로 함께 반찬 배달을 가보자고 하면 어떡하지?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사회복지사가 나를 본 후에도 철저히 모른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복지관 앞마당에서 새빨간 조끼를 입고 행색이 별난 아저씨 아줌마들과 어울려서 햇빛을 쐬고 있을 아빠가 또 다른 복병이었다. 더군다나 그 새빨간 조끼는 ‘C대학교 사회복지학과’라는 글자가 새겨진 우리 과 조끼였다. 아빠는 그 조끼에 얼룩이 묻어도, 냄새가 나도 벗는 법이 없었다. 낯선 동네에서 과 조끼를 입은 아빠를 발견한 순간, 아이들이, 무엇보다 주변 둘러보기를 좋아하는 영달이 형이 반갑다고 아는 척이라도 할까봐 무서워졌다. 아니, 더 무서운 건 아빠가 이 무리를 찾아와 내 얘기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아빠는 늘 내 얘기를 하고 다녔다.
미래 사회에는 사회복지가 전망이 좋을 거라는, 그래서 지금의 나를 왠지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게 만들었던 사회복지는, 내가 가장 도망쳐버리고 싶은 이곳으로 나를 다시 데리고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다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안도 밖도 아닌, 경계 어디엔가 어정쩡하게 세워놓는 것이었다. 대학교 첫 견학지로 우리집을 간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매일매일, 교과서 안에 적힌 장애인이라는 단어 안에서 엄마 아빠를 보았고 빈민이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 가족을 보았고 영구임대아파트라는 단어 안에서 우리집을 보았다. 심지어 서비스 대상자라는 단어 안에서도 나를 보았는데, 동시에 나는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수업시간마다 내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집을 코 앞에 두고 관광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저녁, 아빠는 방안에서 과 조끼를 입은 채 TV를 켜놓고 혼자 앉아 화투패를 돌리고 있었다. 아빠를 보자마자 물었다. 오늘 낮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시내 나갔다 왔지.” 무심코 답하는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발끝까지 짜릿하게 웃음이 났다. 무슨 좀비나 되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아빠를 찾아 경계하던 그날, 복지관 앞마당에서 과 조끼를 입은 아빠와 마주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날의 웃음은 대학교 첫 견학지로 우리집을 갔던 날, 그 어떤 기억보다도 질기게 남아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물론이고 아빠나 엄마까지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빠의 대답을 듣고나서 웃느라고 잔뜩 잡아당긴 얼굴 근육의 느낌하며 몸통을 갑갑하게 채우던 묵은 걱정 같은 것들이 시원하게 통과해 나가던 날숨의 느낌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다시 감각되고는 했다.
어쩌면 아빠는 그날 복지관에서 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고도 다른 곳에 있었다고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빠에게 그날 일을 다시 물어보지는 않았다. 물질적인 궁핍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속해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타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쪽에서도, 심지어 저쪽에서도.
그나마 연애할 때만큼은 경계 위의 시선 때문에 평안을 찾기도 했다. 이듬해 봄쯤이었을 것이다. 영달이 형이 무릎 아래 어디쯤을 손날로 치면서 애타게 물었다. “혹시 사고 같은 게 나서 다리 한쪽을 자르거나 하더라도 지금처럼 계속 나를 사랑해 줄 수 있겠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막 웃었다. “우리 아빠는 사타구니 아래로 한쪽 다리가 아예 없는 사람이고, 우리 엄마는 뇌성마비로 매 순간 전신이 뒤틀리는 사람이다. 형이 무릎 밑에 다리를 조금 잘라낸다고 해서, 그게 나한테 형을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가 될 것 같나?” 버스 의자에 나란히 앉아 내 답변을 기다리던 형도 덩달아 소리를 내어서 마구 웃었다. 황당할 정도로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너무 안심을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25년이 지난 지금, 그 남자는 더 이상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정작 그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은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갓 스므살이 넘은 은혜님의 첫 견학에서 서비스 대상자에서 서비스 제공자로 바뀌는 순간의 현장은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일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사건의 현장에서 가족인 된 남편과의 만남은 또 다른 사건의 시작으로 보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할 것들을 끝까지 몰아붙여서 사유하는 게 힘듭니다. 어느 순간 마침표를 찍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줄행랑 쳐 버리는 저를 보게 됩니다. 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읽고 쓰고 응원해주시는 연옥님 덕분에 다시 앉을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