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능력 / 겔 36:8-15, 요 4:46-54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이적이 7번 나온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행하신 두 번째 이적의 이야기이다. 첫 번째 행하신 물이 포도주를 만드신 곳과 같은 장소이다. 왜 여기서만 두 번을 행하셨나? 그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세우기 원하셨다. 사람들은 순수한 말씀보다는 이적이나 표적을 앞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그 반대이다. 말씀을 믿어야 이적이 나타난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고향을 지나지 않고 갈릴리로 가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핫기 때문이다. 그가 자라던 어린 시절을 본 사람들은 계속 그 모습만을 마음에 가지고 있다. 그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믿지 못했다. 말씀 자체보다는 과거의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변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과거의 경험을 따라 판단한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영접했다. 나사렛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본 게 아니다. 예수께서 기적 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예수를 대하였다. 순전히 외형적인 표적을 바라고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적은 진리의 힘에서 나와야 한다. 표적 그 자체만 가지고 믿으면 잘못된다. 인간은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남이 하면 기가 죽는 습성이 있다. 조금만 신비하게 보이면 맹종하려 한다. 그러니까 무당이나 점쟁이를 따르는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기독교는 반드시 신비를 포함한다. 신비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비한 것만 따르면 반드시 진리에서 벗어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분명한 자신의 말씀을 진리로 주셨다. 거기에 모든 것을 채워라.
1. 말씀은 세상 지위보다 권세가 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왕의 신하가 찾아왔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35km나 떨어져 있다. 그는 거의 백리의 먼 길을 달려왔다. 그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난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된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쳐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다. 왕의 신하는 헤롯 왕 밑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던 신임받는 신하였을 것이다. 그는 당당한 사회적 신분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누리고 있던 사람이다. 소위 특권의식을 가진 특수층 사람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가 가진 특권이나 특별한 신분 때문에 신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쉽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가 자기 문제의 해결자임을 믿고 있었다. 그는 외친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야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그것은 표적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 게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과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늘 듣는 이야기이지만 평상시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표적과 기사만 찾는다. 왕의 신하가 말하였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말은 극존칭이다. 그는 당시 수준으로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질서보다 하늘의 질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우리도 이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을 우리 생활 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하고 행하는 이는 복이 있다. 그의 높은 지위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더 크심을 믿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높은 지위와 권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서 굴복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모습이 진정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세상 영예와 직함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신앙고백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아들을 고치러 몸소 가지 않으셨다. 단지 그에게 말한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그 말뿐이었다. 그냥 가기에는 아무런 표적도 신비한 경험도 없었다. 백리 길을 달려온 그에게 너무도 허무한 상황이었다. 그냥 한마디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믿고 다시 백리 길을 걸어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2. 말씀은 믿는 자에게 보답한다.
여기서 믿음의 단계가 나온다. 먼저는 예수를 찾는다. 그래서 자기의 문제를 고한다. 그리고 어떤 신비한 경험보다 그의 말씀을 받는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기에 믿는 사람에게는 신비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라서 경험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믿음이 먼저요, 다음이 경험이다. 영적인 것이 세상을 향해 펼쳐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우리의 신앙의 방법이 아니다. 눈에 보여야 말씀을 믿는다면 성경의 내용은 하나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사람은 아직 경험이 없어도 그는 말씀대로 움직였다. ‘가라. 네 아들이 나았다.’ 그 말 한마디 듣고 다시 먼 길을 돌아간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신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확인도 않고 말씀을 신뢰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다 가기 전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가는 길에 마중 오는 종들을 만난다. 아이가 살았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아이가 나았는지를 물었다. 오후 한시부터 열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시간이었다. 말씀은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을 한다.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해도, 말씀은 스스로 사실임을 증명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이다. 또한 사실이다.
기적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귀한 신앙이다.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목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표적이 없어도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눈에 안 보여도 그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물질적인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말씀을 받은 사람이 믿어야 한다. 말씀은 믿는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세상으로 펼쳐져 나온다. 영적인 세상의 모든 보배는 믿는 사람의 마음을 통로로 물질 세상에 보여진다. 말씀을 마음에 심어라. 명상하라. 그래서 마음이 그 말씀으로 채워지게 하라. 그러면 그 채어진 것이 나의 주위를 채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 열매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3. 말씀은 믿음을 더해 준다.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믿음을 일으키고 키운다. 왕의 신하는 더욱 믿음이 일어났다. 이제 더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 그리고는 자기 집안 식구들 전체를 믿게 한다. 그래서 온 집안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백성으로 이름이 등록된다. 성도 여러분, 아이의 질병을 계기로 아이의 아버지만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햐였나? 본문 53절을 보면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아이가 죽을 병에 걸림으로써 아버지만이 근심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는 온 가족을 근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오히려 온 가족을 구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가족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가족을 전도하는 일이 생각처럼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 본문에 나타난 신하의 가정은 일시에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신앙을 돌아봄은 물론 주님의 크신 은총을 기대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신하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났는가? 첫째로, 그는 예수께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으로 믿고 나아와 부탁했다. 둘째로, 예수께서 아들이 살았다고 하시는 말씀을 믿고 행동했다. 셋째로, 가족 전체를 이끌어 믿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로 나오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돕도록 자라난다. 이처럼 신앙은 사용할수록 커지게 된다. 신앙이 자랄수록 사람도 역시 자란다. 그의 모든 주위 환경도 거기 맞추어 자란다. 그래서 예수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 중에 어디서든지 성장을 중단할 수도 있다. 예수를 알더라도 나오지 않거나, 나와서도 자기 문제를 그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말씀을 받았지만 표적을 구하면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확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문제 해결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다. 두 번째 이적의 설명이었다. 첫 번째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이었다. 둘 다 말씀을 주시고 믿고 행한 자들에게 결과를 보여주셨다. 말씀은 그대로 사실이요 현실이다. 아직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움직이라. 그것으로 먹고 마시고, 그것으로 힘을 얻어 행동하라. 힘이 나오고 자란다. 표적은 언제나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표적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믿어야 한다. 성경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축복의 길이 되는 고난에 직면했을 때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역경을 잘 견디면 선물이 있다. 믿음의 성숙, 점점 주님의 터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를 맺게 된다. 나만의 성숙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영향을 준다. 여기 모인 얼마되지 않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지금 놓여있는 갈보리교회의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눈을 뜨고 어려움을 이기면 큰 선물이 준비될 것이다. 시골에서의 순박한 믿음을 잃지 않고 이웃을 구원하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
(200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