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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탄생
네트워크는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BBS와 연결되는 전화선과 모뎀들, 그리고 인
터네트이나 LAN에 연결된 회선들까지도 겉으로 보면 그냥 별것 아니지만, 실상 그
에는 엄청난 속도로 전자와 파동들이 헤매고 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가시화
되지 않은 작은 세계의 안에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엄청난 작동들을 거의 오차 없이 수행해가고 있는 것이다.
인터네트에 접속하는 것이 자신의 3대 주습관(잠, 밥, 그리고 접속)이라고 자처
하는 전산과 대학생인 미쉘은 며칠간 시험에 시달리다가 문득 묘한 아이디어를 얻
었다. 아침에 잠을 깨어 나오는데 문 앞에 서있는 나무에 거미 한 마리가 밤새 줄
을 쳐놓았던 것이다. 거미줄 무늬는 사람의 지문과 같아서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
다고 어디선가 들은 생각도 나고 해서, 미쉘은 그 거미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
다. 거미줄의 모양은 정말 완벽한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날줄과 씨줄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유연함과, 언제라도 제물이 오면
옭아맬 준비가 되어 있는 그 긴장감……. 문득 미쉘은 그 거미줄의 모양을 보다
가 자연스럽게 그 거미줄의 형태가 네트웍을 구성하는 회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
고 곧이어 어떠한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주 재미있고 기발한
발상의 프로그램이…….
미쉘은 그날부터 작업에 몰두했다. 아직 시험이 끝나지도 않았고, 제출해야 할
레포트도 여러 개 남아 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작업이 있었으므로 다른 데 신경을
쓸 시간이-시험 공부에 쓸 시간 조차도-없었다. 과거에 미쉘은 라이프 게임에 심
취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형태의 패턴을 심고 환경을 설정해주면 꿈틀꿈틀 자라
나거나 또는 소멸해버리는, 또는 자기와 같은 형태의 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데 성
공하기도 하는 모니터 상의 작은 문양들을 보면서, 마치 창조주가 된 듯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아이디어를 프로그램에 심는 것이다.
그러나 '거미'와 비슷한 형태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퍼스널 컴퓨터 레벨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든 퍼스널 컴퓨터에 이식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넓
디 넓은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해야 했다. 네트워크 상에서도 자생할 수 있는 프로
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컴퓨터 시스템 상의 하드웨어에 대한 자세한 이해가 있
어야 했다. 다행히 그 네트워크 노드들의 대부분은 유닉스(UNIX)를 운영체제로 하
고 있었다. 또 퍼스컴들은 숨은 명령어 몇 개로 간단히 유틸리티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고. 퍼스컴이라 봐야 기종이 몇 가지나 되겠는가? 미쉘은 한 때 아르바이트
비슷하게 네트워크에서 일 해 본 적도 있었고, 유닉스 체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미쉘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기본골격은 운영체제 상에서 각 주변 기기
밑 외부 장치 상에 거미줄같이 얽혀지는 구조를 스스로 키워나갈 수 있는, 즉 거
미줄처럼 여러 곳을 얽어서 전체 구조를 이루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었다.
미쉘은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아라크노이드'라 붙였다.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
은 거미의 생활 양태와 거미줄의 모양을 많이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 프로그램은 우선 각각의 DNA라 할 수 있는 기본 코드를 갖는다.
그 기본코드는 주 시스템 상에서 만들어지는데, 각 주변 기기 및 네트워크상의 여
러 기기들의 특성을 스스로 파악하는 긴 코드를 자동 생성한다. 이 코드는 '엄마
거미'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일단 '유충'격인 DNA격의 기본 코드를 생성한 뒤에
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소멸한다. 그 다음, 거미줄의 씨줄 격인 네
트워크를 통하여 기본코드는 각 네트워크 상의 하드 디스크 내에 우르르 쏟아져
들어간다. 그리고 각 주변 시스템 상에서 통신을 타고 '엄마거미'로 다시 커가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생장해 나가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뭔가 작동
을 하는 것도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시스템 차원의 제어가 필요하다. 미쉘은 없
는 그림 솜씨를 발휘하여 그림을 몇 개 그렸다. 거미줄과 다소 흉악하게 생긴 거
미 몇 마리의 그림……. 원래는 좀 예쁘게 그릴 생각이었으나 그려놓고 보니 솜씨
가 없어서인지 을씨년스럽고 그로테스크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하긴 아무 시스템
에나 그림이 뜨려면 그림 자체가 흑백이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이
야 아무렴 어떤가?
프로그램을 작성 할 때는 게임처럼 생각하고 작성했는데, 만들다보니 이건 바
이러스의 형태를 띠게 되어서 약간은 찝찝했다. 만들어놓아도 퍼뜨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적어도 맨 처음에만은 이 프로그램을 장착시킬 네트웍이 있어야 하는
데……. 그러나 순수하게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미쉘으로 하여금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미쉘은 밤잠을 잊고 작업에 몰두하다가 가끔씩 쓰러져 잠이 들곤
했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고…….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그 꿈의 내용은 잊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을 깬 다음
에는 전날 그를 괴롭히던 '아라크노이드' 코드 상의 난제의 해결점을 찾아내는 것
이었다.
시스템의 네트웍 담당자인 알렉은 친구인 미쉘이 불쑥 나타나 종이 한 장을 휙
내밀자 다소 놀라서 미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미쉘의 얼굴은 수척했고 이미 여
러 날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미쉘이 입을 열었다.
"이걸 돌릴 수 있게 해줘. 시스템의 일부만 이용해서……. 확인해보고 싶어."
알렉은 종이쪽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급히 갈겨쓴 듯한 필체로 이상한 코드에
대한 기능 설명이 씌어져 있었다. 코드의 제목은 범용 컴퓨터에 올리기 쉽도록 영
어로 되어 있었고 그 이름은 '아라크노이드'였다.
[program'Arachnoid']
종류 : 바이러스성 코드
기능 :
1. 메인 프레임의 시스템 커널 영역에 주 프로그램 '엄마거미' 장착.
2. '엄마거미'는 시스템의 상태를 파악하여 각각의 '유충' 코드를 스스로 작성.
3. 네트워크 상에 연결된 모든 주변 시스템에 '유충'코드를 퍼뜨림.
4. '엄마거미'는 스스로 파괴됨.
5. 각 '유충'코드는 네트웍의 횡적인 연결을 이용하여 점차 '엄마거미'로 성장.
6. 다시 반복.
특징 :
1. 각 '유충' 코드는 시스템 상의 모든 주변기기 상의 기억장치에 중복하여 데
이터를 저장함. 그리고 각 데이터가 파괴되었을 때에는 다른 곳에 있던 데이터를
찾아서 다시 다른 주변기기나 하드 디스크의 파일 상에 재저장 - 복구함.
2. 각 데이터의 크기가 커지면 다시 주변기기 별로'유충' 을 만듦. 이는 시스템
의 커널 코드와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주기적 관찰로 시스템의 완벽한 통제가 된
이후에야 독립된 '유충'으로 성장됨.
3. 이 코드의 목적은 소프트웨어가 독립적 유기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의 테
스트가 됨. 그 결과를 알기 위해 각 '엄마거미'가 자폭하거나 '엄마 거미'에 의
해 유충들 이 파괴될 때 특정한 그림을 내보냄.
이상. programmer 쟝 쉥 미쉘.
알렉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했다.
"이게 뭐야? 이걸 시스템에 올려달라고?"
"음……. 오류는 없다고 생각해. 그러나 한 번 정말로 이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지 확인해보고 싶어."
미쉘의 눈은 흐릿했고 많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어딘가 제 정
신이 아닌 듯한, 아니 신이 들린 듯한 모습에 알렉은 알 수 없는 전율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이건 바이러스성 코드잖아? 이런 걸 시스템에 올릴 수는 없어!"
"그러니 시스템의 일부만 이용하여 해보자는 것 아냐?"
"그러다 네트워크가 정지되면 어쩔려구! 그럴 수는 없다구!"
"며칠 후에 네트워크의 정비기간이 있어. 그때에 시험하면 되잖아? 내가 책임지
고 모두 거미를 죽일게."
"정비라 해도 일부의 정비일 뿐이야. 그러나 이 내용대로면 이미 프로그램들이
네트워크 상의 모뎀들을 타고 퍼질 텐데 어떻게 다 죽인……."
"아니, 지운단 말야? 아니, 너는 이것 자체가 말이 되는 코드라고 생각하니?"
"왜 말이 안 된다는 거야?"
"여기는 결정적 오류가 있어. 물론 다른 것들도 많이 있지만. 일단은 이 뭐야…
…. 아라크노이드? 흠, 이 거미 코드는 맨 처음에 슈퍼유저 레벨에서 커널에 인스
톨 해야 돼. 분명 엄마거미는 휘하의 주변기기들을 지배하는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커널 루틴 상에 설치되어야 한다는 거야. 누가 그렇게 하겠어? 자칫 시스템을 말
아먹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부탁하는 것 아냐?"
"안 돼. 그리고도 실현 불가능한 부분은 많아. 이대로라면 엄마거미 자체가 엄
청난 데이터를 쌓아야 하는데, 그걸 버텨낼 만한 오퍼레이팅 부분의 용량을 확보
하기 위한 페이징 속도가 빠른 컴퓨터는 거의 없어. 엄마거미가 되기 전에 시스템
이 다운되기 때문에 유충이 엄마거미로 부화하지 못한다구."
"아니, 그걸 막기 위해서 데이터 분리법을 쓰는 거야."
"그러면 네트웍 로드가 엄청나게 커질 텐데? 프로토콜의 싱크로가 안 될지도 몰
라!"
"그것도 다 생각해 뒀어!"
미쉘은 알렉에게 자기의 코드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
코드 자체는 독창성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원리가 너무 복잡했고 사용되
는 시스템의 부담이 과중했다. 그리고 이 코드는 맨 처음, '엄마거미'의 상태에서
출발해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미쉘은 열을 올리면서 아라크노이드에 대해 설
명을 했지만, 알렉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팠기 때문에 미
쉘의 말을 귀로 대강 흘려버렸다. 그러는 그들의 뒤로 레오라는 오퍼레이터가 들
어섰다.
"뭔지 좀 끼어도 될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알렉은 미쉘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바이러스성
의 코드임이 분명한 프로그램을, 그것도 시스템 커널 영역에 올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쉘은 열을 올리면서 이건 단순한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생명
창조라고까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악까지 써댔으나, 알렉은 이제 미쉘을
완전 미친 놈 취급을 하면서 내몰아버렸다.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미쉘에게 레오
가 다가섰다.
"알렉을 이해하라구. 이 큰 네트워크에서야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도 호기심
이 당기는데, 그러면 내 조그만 사설 BBS가 있으니 거기서 테스트해 보자구."
"정말 그래도 돼?"
"음. 어차피 좀 있으면 닫아버릴 엉터리 비비야. 그리고 가입자는 내 친구들 뿐
이고……. 그러니 미리 양해를 얻고 시작하면 돼. 그러나 조건이 있어. 그 '엄마
거미' 상에 모니터링 루틴과 어디트 트레일 루틴을 넣어야 해. '유충'의 상태를
보려면 말야……."
좋은 테스트 여건이었다. 미쉘으로서는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고…
…. 둘은 이미 어두워진 밤거리를 걸어서 레오의 집으로 걸어갔다. 그 미쉘의 눈
이 불타듯 푸른 빛을 띠어가고 있는 것을 레오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거미의 성장(1)
"에잉! 이게 뭐야?"
요즘 한참 잘 나가는 모뎀인지 뭔지로 까르르륵 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울리고
있던 준후가 소리를 쳤다. 원래 그들은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지만 여기 프
랑스에 도착하면서 우연히 만나게 된 정혜영이라는 한국 학생을 통해서 그 집에
초대되어서 놀러왔다가 준후가 그 방에 있는 컴퓨터를 만지작거린 것이다. 집 주
인인 혜영은 연희와 함께 대접할 거리를 사러 나갔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
지지 말라고 승희가 준후에게 말했지만 준후는 지루했던지 살금살금 눈치를 보더
니 또 접속을 해본 모양이었다. 물론 준후가 프랑스 쪽의 네트워크의 전화번호를
하나도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준후는 그냥 무심코 아무전화 번호나 때
려 넣거나 원래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번호들을 심심풀이로 한 번씩 넣어본 것에
불과했다. 몇 번 접속은 되었지만 재미없어서 끊기를 반복하던 차에 시스템이 이
상해진 것이다.
현암과 박신부는 그들이 추적하고 있는 코제트의 행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
고 있었고, 승희는 패션 잡지를 뒤적이다가 준후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전에 동민이라는 아이의 문제[국내편 제1권 '아무도 없는 밤' 참조]를
해결해준 이래, 오락은 싫어해도 통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진 승희였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승희누나, 이거 봐! 징글……."
준후가 가리키는 모니터의 화면상에 시커먼 거미 몇 마리가 거미줄 위에 웅크리
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별로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굵은 선으로 팍팍 그려
진 그림은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승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흉악하구나! 이건 무슨 게임이니?"
"아녜요. 내가 한 게 아니라구요. 난 그냥 통신 프로그램 비슷한 게 있어서 신
기해서 들어갈려는데 갑자기 이게 나오더니 먹통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망가
뜨린 게 아닌데 어떻게 하지……. 잉잉, 이게 뭐야."
준후는 순간 당황을 했는지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를 꺼버렸고 잠깐 아주 잠깐
동안 승희의 마음속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치 그 의
미만이 마치 말로 들리는 것처럼 그 의미만이 마음속에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파괴를 위한…….
"음, 이게 뭐지?"
승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준후는 어리둥절한 듯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
는 자기가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준후야, 현암군! 방금 소리내지 않았어? '파괴를 위한……'이라고!"
"아녜요. 누나."
"조용히 좀 해! 승희!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이야!"
현암은 눈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마음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였는데……. 그렇다면 영의 목
소리? 그러나 지금 다른 퇴마사들도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게 잡령 따위가 갑자기
뚫고 들어올 여지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어디서
들린 것일까? 가만 보아하니 준후도 전혀 낌새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분명
승희에게만 들리는 것이었다. 마치 사람의 마음이 승희에게만 읽혀지는 것처럼.
"에구! 이거 또 나오네!"
막 컴퓨터를 껐다가 켠 준후가 다시 징징 우는 소리를 냈다. 리부팅해서 다시
모뎀을 작동시키기만 하면 거미그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준후가 투덜거리며 다
시 컴퓨터를 끄는데 승희의 마음 속에 다시 목소리가 울려왔다.
-파괴를 위한…….
승희가 고함을 질렀다.
"준후야! 한 번 더! 한 번 더 켰다가 꺼봐!"
"왜요?"
"그걸 켰다가 끌 때마다 소리가 들려! 영적인 소리가!"
"뭐라고요? 어어……."
"어서!"
준후가 겁먹은 눈초리로 다시 컴퓨터를 켜고 전원을 껐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
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 되잖아요? 이번엔 나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모뎀을 작동시켜! 거미 그림이 나오게 하고 끄란 말야!"
현암과 박신부도 둘의 떠드는 소리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는지 컴퓨터 쪽으로 다
가왔다. 승희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 중 하나를 준후에게 주었고,
준후는 영문도 모른 채 세크메트의 눈을 받아들고 떨리는 손길로 다시 컴퓨터를
켰다. 모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자 거미그림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전원 스위
치를…….
-파괴를 위한…….
준후가 후다닥 컴퓨터에서 물러섰다. 세크메트의 눈을 통하여 승희의 마음속에
들린 목소리를 이번에는 준후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승희의 얼굴에 두려운 기
색이 감돌았다.
"너……. 너도 들었니? 그. 그 목소리 분명히 들리지!"
준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컴퓨터에서 영의 목소리가 들
리다니 믿을 수 없었다. 승희가 다시 해보라고 준후에게 고갯짓을 했으나 준후는
이제 컴퓨터에 손을 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컴퓨
터를 다시 껐다가 켰다. 그리고 마음의 힘을 모아서 순간적으로 영사를 행할 생각
이었다. 거미그림이 나오고……. 다시 전원을!
-파괴를 위한…….
순간적으로 어떤 사람의 눈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승희는
다시 여러 번 컴퓨터를 껐다 켰다 해보았지만 여전히 영사에 의해 나타나는 모습
은 눈 하나뿐이었다. 깊고, 어디인가 번득거리는 듯한, 그리고 붉게 충혈 되어 있
는 눈…….
"누나, 무서워! 투시를 해도 왜 눈밖에 안 보이는 거지?"
승희도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컴퓨터에 영력이 깃들여지다니. 그것도 상
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눈 하나뿐…….
"눈이 보여! 누군가의 눈이…….이게 뭐지?"
주의깊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암이 입을 열었다.
"제길……. 이젠 별것에까지 다 잡귀가 설치는군!"
거미의 성장(2)
넷은 컴퓨터를 가운데에 놓고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발견된 이 이상한 현
상에도 뭔가 영적인 이유가 있을 것임에 분명했고, 그러한 것들은 절대 그냥 넘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승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분명히 영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는 했지만, 절대 일반적인 형태는 아녜
요. 그러니 이 컴퓨터 자체에 혼령이 맺혔거나 한 건 아니라는 말이죠."
"그건 당연한 일이야."
현암이 대답했고 박신부도 말했다.
"나는 구세대라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만 혼령이 컴퓨터에 맺혔다고 그
컴퓨터를 이상하게 동작하도록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네."
준후가 반박했다.
"아녜요. 컴퓨터도 기곈데……. 전기로 동작되는 거니 전기로 힘을 가하면 이상
하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녜요?"
현암이 웃었다.
"준후야, 그래. 너는 뇌전을 쓸 수 있지? 그러면 그 뇌전으로 컴퓨터를 오(誤)동
작시킬 수 있니? 해볼래?"
"에이……. 그러면 부서지고 말죠. 회로들이 얼마나 예민한 건데……."
"그건 영에게도 마찬가지일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아예 볼 수조차 없을
미세한 전기신호를 물리력을 가해 다룬다는 건 영력으로도 안돼. 네가 봤다는 거
미그림, 그건 분명히 어떤 신종 바이러스가 붙은 걸거야."
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전원을 끄면 어째서 영의 소리가 들
리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
"그 바이러스 프로그램에 뭔가가 있어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바이러스는 원래
증식성이죠. 거기에 어떤 자의 영이 맺히고……."
현암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그 영의 소리는 원래 바이러스의 일부가 섞인 걸까? 그러니까
원래의 바이러스 코드에 영이 붙은 거고 그 바이러스가 복제되어 나갈 때마다 그
영력의 부분들이 거기에 깃들여서……."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런 물질이 아닌 정보에 영이 깃들 수 있다니,
그리고 증식이 된다면……."
준후는 다시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 컴퓨터를 잘 알았던 자의 영일 거예요……. 원래 영이 나눠져서 분
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죠. 비쉬누 신이 아바타라를 만드는 것이나, 시바 신
이 자신의 분신을 창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이야기일 거예요."
승희가 급히 준후의 말을 받았다.
"그러
그런 분신이 아니야. 영이면서도 일부분……. 마치 하나
의 데이터 조각에 불과한……."
"아이구. 나는 머리가 아파지는구먼. 아멘!"
박신부는 머리를 싸쥐었고, 현암은 계속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군. 그러니까 그 흉측한 그림이 나타
나게 하는 바이러스의 원래 프로그램에 영이 하나 붙었고, 그러다 보니 그 바이러
스가 증식됨에 따라 점차로 원래의 영의 분체가 나뉘어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말
이로군. 소설이 문단에서 문장으로, 다시 낱말로 분해되는 것처럼 말이야……. 좋
아. 신기한 일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보자구. 그런데 준후의 컴퓨터에서 나왔다는
메시지가 뭐였다고 했지?"
"파괴를 위한…….이라는 뜻이었어."
"파괴를 위한다? 그러면 이거 보통의 일이 아니군. 분명 원한령류가 깃들어 있
는 프로그램이 분명해. 그리고 놈이 프로그램으로 숨어들었다면 뭔가 목적이 있었
을 거야. 아니라면 굳이 컴퓨터 프로그램에 숨어들 이유도 없고, 계속 쪼개지며 분
화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준후와 승희, 박신부도 뭔가 섬뜩한 것을 느꼈다. 원한령이 목적을 가지고 통신
망에 잠입하여 떠돌아다닌다니……. 그것도 바이러스성 코드를 타고 한없이 분화
되어 나간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박신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보통 일은 아닐 것 같아. 속히 근원을 밝혀서 놈을 잡아내야 해!"
"하지만 신부님, 우리는 일정도 복잡한데……."
"아무리 일정이 촉박해도 이런 식으로 이상한일이 벌어지는걸 보고 그냥 지나
칠 수 없지 않겠니?"
"그건 그래요."
"그런데 가만히 있어보자……. 남의 컴퓨터를 이렇게 망가뜨려놔서 어떻게 한
다?"
승희가 눈을 깜박거리며 마치 화난 것 같은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기
더니 입을 열었다.
"이 집 주인인 혜영이 언니는 컴퓨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원래 프로그
래머였으니까. 아마 그 언니 정도라면 쉽게 고칠 수 있겠죠.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다면 사과는 해야죠. 혜영누나는 연희누나와 같이 나갔죠?"
준후가 얼굴에 풀이 푹 죽어서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현암이 웃
으며 말했다.
"기운을 내. 혜영 씨에게야 뭐 그다지 큰 일은 아니잖니. 바이러스 프로그램 정
도면 프로그래머라면 쉽게 해결하겠지.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한번 볼까?
한 번만 다시 보자."
현암이 말하자 준후가 다시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컴퓨터에 전원을 넣자마자
을씨년스러운 거미그림만 화면에 떠오를 뿐, 아무런 작동도 되지 않았다.
"에이! 벌써 바이러스가 다 퍼진 모양이에요!"
승희가 깨끗한 도스 디스크를 들고 왔다. 다시 부팅을 하고……. 하드 디스크로
들어간 승희가 헉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준후야! 이거 네가 다 쓴 내용이니?"
승희가 루트 디렉토리 상에서 dir/w를 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Volume in drive C has LOVELOVE!!!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Directory of C:\
COMMAND.COM TREEINFO.NCD CONFIG.SYS AUTOEXEC.BAT
ARAK3488.DAT
5 file(s) 244723712 bytes
0 bytes free
"저게 뭐야! 아라크3488? 그리고 딴 디렉토리는 다 어디 갔어? 아깐 모뎀 디렉
토리도 있고 많던데."
다시 승희가 떨리는 손길로 dir을 눌렀다.
Volume in drive C has LOVELOVE!!!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Directory of C:\
COMMAND.COM 0 08-12-93 5:40p
TREEINFO.NCD 0 11-10-93 3:25p
CONFIG.SYS 0 01-01-80 6:43p
AUTOEXEC.BAT 0 12-02-93 3:24p
ARAK3488 DAT 244723712 12-21-93 18:33p
5 file(s) 244723712 bytes
0 bytes free
"으악! 이럴 수가! 시스템 파일까지 다 잡아먹었네!"
승희가 한 번 더 dir을 하자 이번에는 예의 그 거미의 무늬만이 나타났다.
다시 전원을 끄자 이번에는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파괴를 위한 일념에서…….
다시 플로피로 리부팅을 한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chkdsk를 해보자
Volume Serial Number is 3F5E-63E8
Errors found, F parameter not specified
Corrections will not be written to disk
0 lost allocation units found in 0 chains.
0 bytes disk space would be freed
244801536 bytes total disk space
77824 bytes in 2 hidden files
0 bytes in 0 directories
244801536 bytes in 5 user files
0 bytes available on disk
4096 bytes in each allocation unit
59766 total allocation units on disk
0 available allocation units on disk
655360 total bytes memory
589344 bytes free
"이건……. 이렇게 지독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영의 두려움보다도 지독한 바이러스의 성질에 일동은 전율했다. 그리고 승희는
막 추가된 한 구절에 대한 생각을 해내고 있는 참이었다.
-파괴를 위한 일념에서…….
거미의 증식
정혜영이라는 유학생은 연희와 함께 먹을 것을 잔뜩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이곳으로 초대를 한 것이지만 막상 일행
중 꼬마가 자신의 컴퓨터를 가지고 장난하다가 엉망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혜영도
약간은 기분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신종의 바이러스 때문이
라고 하자 호기심이 돌았는지 박신부 일행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혜영 자
신이 살짝 컴퓨터를 만져보더니 거기에 나타난 그 이상한 증상에 대해 굉장한 호
기심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역시 혜영도 프로그래머로서의 '끼'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는 듯했다. 혜영은 곧 새로 나타난 바이러스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잊은
듯 한동안 컴퓨터 키만 두드리며 땀을 흘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지독하네요! 어떤 사람이 이런 걸 만들었을까?"
승희가 물었다.
"왜요?"
"도대체 복구가 안 되는군요. 부트섹터, FAT, 루트 디렉토리가 다 날아갔어요!
어디서 이런 게 묻어왔죠?"
"준후야!"
승희가 부르자 준후가 벌레씹은 얼굴이 되어 쭈뼛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컴퓨터
를 잘 모르는 박신부와 현암은 잠자코 뒷전에 물러서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
의 깊게 듣고 있었다.
"예, 누나!"
"너 도대체 아까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된거야!"
"글쎄요……. 뭐 난 통신 프로그램 같은 게 보여서 거기에 있는 전화번호를 몇
번 그냥 쳐본 것밖에 없어요. 뭐 통신 접속한 것밖에 없는데……."
승희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혜영에게 물었다.
"접속만 해도 바이러스가 묻게 할 수 있나요?"
"아뇨. 그건 어렵겠죠. 일부러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면 모르지만, BBS 운영 체
제를 그렇게 새로 만든다는 건 좀……."
"그러면 뭔가 파일을 다운받거나 해야 바이러스가 묻어올 수 있다는 말이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준후야, 너 혹시 파일을 다운로드 받은 적이 있니?"
"아뇨. 그냥 접속하자마자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원래 바이러스가 안에 들어 있었다는 말인가? 바
이러스 검색 프로그램에도 걸린 것 같지 않던데……."
혜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노트북에 있는 바이러스 체
크 프로그램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 노트북 안에 있는 프로그램도 저 안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데 별로 이상한 점은 없는데……. 이상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렇게 된 것일까
……."
혜영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 맞지? 그래, 준후야. 프로그램 접속을 몇 번이나 해봤지?"
준후가 머리를 살짝 긁었다.
"한 네다섯 번 정도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잔뜩 나와서. 다른데 걸어보고 또
걸어보고 여러 번 했었어요. 혹시 한글은 안 나오나 해서요.헤헤……."
"아, 그랬군. 그런데 거기에 있는 전화번호는 다 정상적인 비비의 번호들인데 어
쩌다가 그런 바이러스가 묻었지?"
"글쎄요. 아 맞아요. 중간에 전화번호를 손으로 친 적이 있는데. 잘못 쳤는지
이상한 비비에 접속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뭐 인터네트하고 중간지점 인 것
같던 비비던데."
"전화번호를 기억해?"
"글쎄. 기억은 못하지만 맨 끝자리를 하나 잘못 쳤을 거예요. 아, 맞아요. 이걸보
고 치다가 틀렸어요."
준후는 리스트에 올려진 전화번호 중 하나를 가리켰고 혜영은 그 전화번호를
끝자리가 0으로 끝나는 것부터 해서 하나하나 접속을 시도해보았다. 처음엔 가정
집만 나오거나 부재 신호 따위만 나오다가 여섯 번째 순서가 되었을 때 BBS에 접
속이 되었다. 준후가 말했다.
"그래요. 아! 여기예요."
화면에 떠오른 로고에는 이상한 안시(ANSI) 문자를 쓴 그림들과 정신병자의 비
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장난기의 메시지가 씌어 있었다.
"이거 원 참. 싸이코들의 BBS?"
혜영이 노트북의 엔터키를 쳤다. 그러나 화면은 갑자기 먹통이 되었고 한참이나
하드디스크가 빙빙 돌아가는 것 같더니 간신히 초기화면이 떴다.
"이게 뭐지? 뭔가가 이상한데……."
혜영은 초기화면에서 몇 군데 가입 신청 메뉴를 돌아다녔으나 그때도 하드디스
크 입출력이 잦아졌으며 무엇보다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후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아까도 이랬던 것 같아요. 아까는 노드가 안 좋아서 이렇게 된 줄 알았
었는데……. 그런데……."
혜영이 다시 엔터키를 눌렀을 때 갑자기 화면에 거미 그림이 나타났다.
"앗! 이게 뭐야."
혜영이 소리를 치자 승희가 재빨리 노트북을 껐다. 잘 그리지 못한 거미 그림이
었지만 갑자기 나오자 거미가 액정 모니터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
다. 그런데 전원을 끌 때 역시 몇 가닥의 목소리가 승희의 마음속에 들려왔다.
-비록 곧 놈이 죽겠지만…….
승희는 긴장된 얼굴로 준후를 돌아보았고 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 또한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들고 있어서 그 그 의미를 알아들은 것이었다. 그리고 승희
는 재빨리 투시를 해서 방금 눈앞을 스쳐간 다른 영상을 보았다. 이번에 투시로
본 영상은 어떤 자의 창백한 입술이었다.
"눈과 입술, 그 두 개 가지고는 얼굴 같은 것을 투시하기 어려운데. 좀더 찾아
볼 수 있을 거예요."
"투시요? 아이고 그게 뭐예요?"
"음…….나중에 이야기해 줄게요. 좌우간 이 번호로 주소를 알아낼 수 없을까
요?"
혜영이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듯 하더니 승희에게 말했다.
"이것은 일반 가정집 전화번호에요. 그러니까 이 BBS는 틀림없이 개인 비비라
할 수 있겠지요. 금방 주소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거미의 공격
한참이나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서 사설 비비가 있는 집의 주소를 알아내자 일
행은 두 대의 차에 나눠서 그 집에 찾아가고 있었다. 혜영은 박신부, 승희와 함께
뒤차에 탔는데 혜영은 차안에서 승희에게 간략하게 사건과 그들의 정체에 대한 이
야기를 듣고는 낯빛이 질려 있었다. 승희가 친절한 혜영에게 거짓말을 하기가 뭣
해서 아예 까놓고 말한 것이다. 좀 얼떨떨한 듯 한동안 창 밖만을 바라보던 혜영
은 그 와중에도 노트북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를 고립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퇴마사가 무엇인지 납득은 안 갔지만 자기가 들은 거미보다는 귀신들과 영들을 상
대로 싸운다는 이들에게서 뭔가 더 무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승희가 피식 웃으
면서 혜영에게 말했다.
"무서워할 것은 없어요. 저희를 도와주셔야 해요……. 혜영언니가 이 프로그램에
서 자세한 것을 알아내야 될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 좀 도와주세요. 예?"
그러나 혜영은 귀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은 후라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의 컴
퓨터만을 두들기고 있었다. 승희가 덧붙였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어떤 자에게 원한
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원한을 어떻게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풀었는
지 알 수가 없네요. 아무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죠."
혜영이 나직이 한숨을 쉬는 소리를 듣고 운전하던 박신부도 한숨을 쉬었다. 앞
차에서는 현암과 준후가 연희와 함께 타고 있었다. 준후가 말했다.
"레오라는 사람의 주소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암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승희의 말에 의하면 여태까지 들은 그 영의 메시지는 두 가지라고 했어.'놈이
곧 죽겠지만'과 '파괴를 위한…….' 만약 우리의 생각대로 그 바이러스에 깃든 영
이 원한령이라면 말이야. 그 영은 지금 파괴를 하려는 것 같은데. 아마도 곧 죽을
지 모르는 자신의 원수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인 것 같아. 어때 내 생각이 맞
는 것 같니?"
"그럴 수 있겠군요."
현암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좀
이 있어. 파괴를 통해서 복수를 한다니……. 그것
도 바이러스를 통해 복수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바이러스로 파괴할
수 있는 건 기껏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데이타일 것 아닐까? 그런데 컴퓨터의
프로그램이나 데이타를 파괴한다고 해서 사람의 목숨을 해치게 할 수 없는 것 아
냐? 물론 그 사람을 망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 사람을 직접적
으로 죽이는 일은 할 수 있을까? 뭔가 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뭔가 이유가 있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보러 가는 것 아니에요."
"하긴 그래.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컴퓨터 BBS가 어떻게 해서 그런 바이
러스에 정복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바이러스는 사방
으로 퍼져나가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나저나, 뒤의 신부님 차는 왜 이리 느리지…
….쩝……."
현암이 모는 차는 어느덧 레오라는 사람의 독신자 아파트 부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덧 차는 그 레오가 살고 있는 아파트 부근에 도착하자 연희가 지도책
을 한참이나 뒤적거리고는 여기가 틀림없을 거라고 단정해주었고 잠시 후 도착한
뒤 차에서 내린 혜영도 이곳이 맞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박신부가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했다.
"어떻게 하지?……. 일단 누가 올라가 보겠어."
현암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봐야죠. 그리고 연희 씨가 통역을 해줘야 할 테니 같이 가주셨으면 좋
겠는데요."
"나도 같이 가보겠네."
박신부가 앞으로 나섰다. 준후는 외국인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키
지 않는 듯 직접 나서지 않았고, 승희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혜영이 무서우니까 같
이 있어달라는 듯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올라가지 못했다.
"아니 뭐가 무섭다는 거예요."
"음……. 저 꼬마하고만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어쩌라는 거예요. 무
서워요!"
"저 꼬마라구요?. 저 꼬마가 얼마나 대단한 애인지……. 아이고!"
설명하려던 승희는 그냥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다 말고 이야기를 맺었다. 현
암과 박신부 그리고 연희는 우선 우체통의 주소를 확인했다. 레오라는 사설 비비
의 운영자가 사는 곳은 6층쯤 되는 것 같았다. 떠날 때 승희는 혹시나 해서 연희
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한 조각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준후가 가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고물아파트라서 일행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고 그 사이에 나머지 세 명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혜영이 무서움을 잊
으려는 듯 한참 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뭔가 조금은 알아냈어요. 이 프로그램 이름은 '아라크노이드'인 것 같군요. 그
리고 하드디스크의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하드디스크를 온통 채
워버리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그리고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소스 코드를 놓고 몇 달은 봐야 알 수 있을……."
혜영이 말하는 중에 갑자기 준후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준후는 소리를 질렀다.
"엎드려욧!"
승희가 놀라며 거의 반사적으로 혜영의 몸을 덮쳐누르고 준후도 고개를 푹 숙
였다. 옆 창문으로부터 무언가가 날아와 유리를 와장창 깨고는 다시 반대편의 창
문을 깨부수고 나갔다. 소방용 손도끼였다. 혜영은 눌려진 상황에서 찢어질 듯한
고함을 질러댔고, 준후는 재빨리 차의 문을 열고 몸을 굴렸다.
준후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눈이 흐려져 있는 미쉘이었고 그의 손
에는 또 하나의 손도끼가 들려 있었다.
아래층에서 일장의 활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현암과 박신부는 연희
와 함께 6층의 레오의 집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613호. 일단 불어를 할
줄 아는 연희가 문을 두드리고 벨을 몇 번이나 눌렀으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안
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요. 안쪽의 불이 켜져 있는 것 같던데."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도록 만들어진 작은 렌즈 구멍으로 하얀 형광등 빛이 아
주 약하게나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 집안에 불이 켜져 있고, 사람이 있
는 것이 분명했는데 벨 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조금은 기분이 묘했다. 외출
중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에 박신부가 문 앞으로 나서서 안쪽을
향해 살짝 투시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준후나 승희의 투시력에 비하면 박신부의
능력은 훨씬 미약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투시는 할 수 있었다. 한참이나 눈
을 감고서 신경을 집중한 다음에야 박신부는 입을 열었다.
"이거 분명 이상하긴 하군. 안에 누군가 있는 듯한 기척은 느껴지는데. 어쩌면…
…."
박신부가 잠시 다시 눈을 감더니 덧붙였다.
"안에 있는 건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죽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BBS 운영자가 왜?"
"모르겠네. 하여간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있어. 방을 잘못 찾은 것 같지도 않고
……. 하여간 무슨 일인지 모르니 내가 관리실에 가서 키를 빌려와야겠네. 말이 안
통하니 연희양도 같이 가세. 우리가 가서 키를 빌려올 테니까 현암군 자네는 여기
서 잠시 지키고 있게나."
"예. 그러죠."
올라오면서 본 계단 중턱에 써 붙여진 벽보에 의하면 관리실은 맨 위층에 위치
해 있었다. 연희와 박신부는 일단 관리실에서 키를 달라고 하기 위해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고, 현암은 아파트의 복도 문 앞에서 어정거리며 잠시 동안은 기다리
고 서 있었다. 그러나 성질 급한 현암으로선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는 다는 것이
체질상 맞지 않았다. 처음 한 1분 정도는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었으나, 이내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문 안쪽을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 안쪽에 누
군가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서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다. 문을 부술까 하다가 간신히 그 충동을 억누른 현암
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문에 대고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나 집중해보
았다. 원래 현암의 혈도는 자유로이 유통되지 않아 귀까지 퍼지지 않기 때문에 초
인적인 청력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력을 표면적으로 귀까지 퍼트려서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소리를 잘 들리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현암이 귀를 기울여서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 하는데 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었고 오히려 난데없
이 바깥 쪽에서 낯익은 여자의 비명소리가 현암의 귀에 아주 가냘프게 들려왔다.
'아. 이건 이건 승희의 비명소린데. 그럼 바깥에서 혹시 무슨 일이…….'
현암은 깜짝 놀라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보니 승희가 있는
아파트 앞 뜰 쪽으로 면한 창문이 하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로 가야 아래
가 보일 것 같았다.
남자가 막 준후의 멱살을 잡고 위로 치켜올리는 것을 보고 승희는 비명을 질렀
다. 준후는 자신이 워낙 악령들과 주로 싸우다보니 지금 자신들을 공격한 남자 또
한 분명 무슨 악령이 씌었을 것으로 혼자 판단하고 재빨리 남자에게 달려들어 부
적을 던졌으나 부적은 아무런 힘도 발휘 못한 채 남자의 몸에 맞고 떨어져 내렸다.
영과는 관계 없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마치 무슨 동물처럼 몸을 웅
크렸다가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준후의 멱살을 잡고 무서운 힘으로 위로 치켜올렸
다. 멱살을 잡힌 준후가 허공으로 치켜올려지자 몸을 버둥거려보았으나 사람에게
는 주술을 쓰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준후인지라 어떤 수를 쓰거나 하지는 않
았다. 남자가 무슨 노래가락 같은 것을 흥얼흥얼거리면서 태연하게 허리춤 뒤편에
찔러두었던 듯한 밧줄을 꺼냈다. 혜영은 의외의 광경에 거의 쇼크를 먹고 몸을 움
직이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승희는 비명을 지른 다음 앞뒤 가릴것없이
남자에게 달려들어 준후를 잡고 있는 남자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놔! 내려 놔.놓으라고!"
"M re araign e Sans app tit……
S mpressa de manger son mari……"
남자의 입에선 계속 흥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어로 하는 소리인지라
승희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어쨌거나 지금 이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
명했다. 남자는 준후의 목을 움켜잡은 채 켁켁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준
후의 목에 왼손으로 밧줄을 감으려 했다. 승희는 남자의 오른팔을 잡고 흔들어대
고 있었으나 그 힘조차 이겨낼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기운이 무척 세어
진다던 말이 사실인 듯했다.
"안돼! 어서 놔! 놓으란 말이야!"
"Ce aui restaint du mari
Regarda Sa femme sans voir……."
다급해진 승희는 남자의 팔에 매달리는 것을 포기하고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해서 자신의 몸을 날려서 남자의 다리를 걸었다. 옛날에 누군가에게서 서양인들은
상체의 힘이 좋은 대신 하체가 약해서 다리를 걸면 거의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
는 말을 주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맞았는지 남자는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
고 넘어졌다. 목에 밧줄이 걸린 준후가 헉 하면서 남자가 넘어지는데 딸려 목이
졸려지는 것을 승희가 재빨리 밧줄을 잡는 바람에 간신히 심한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강한 힘으로 목을 잡혀 있었던 준후는 반쯤 의식을 잃고 있
었고 승희도 남자가 밧줄을 당기자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승희는 쓰러
지면서 재빨리 남자와 자신과의 사이에 여분으로 있던 밧줄을 뒤로 쭉 끌어들였다.
남자의 손에서 밧줄이 미끄러져서 어느 정도 승희와 준후 사이에 밧줄의 여백이
생기자 남자도 다시 힘을 주어 밧줄을 잡았고 줄은 팽팽해졌다. 남자는 넘어 졌던
몸을 서서히 일으키더니 승희와 준후가 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한 미소
를 띠우며 다시 그 알 수 없는 노랫가락 같은 것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Le Ventre de m re araign e agit
Et donna naissance plusienurs petits
Les petits d vor rent alors leur m re……."
그러더니 자리에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몸을 발로 버티고 줄을 끌어 잡아당기
는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힘이었다. 승희는 자신이 손을 놓으면 정신을 잃고 쓰러
져 있는 준후의 목이 졸려 질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줄을 잡고 줄다리기를 하듯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가 아무리 힘을 주어 버텨도 몸이 조금씩 앞으
로 끌려가는 듯했으며 몸에 더 힘을 주자 손에서 밧줄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
다. 손바닥이 벗겨지는지 몹시 쓰라렸다. 하필 주변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혜영은 아직도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만 있었
다.
"뭐하는 거야! 어서 빨리 도와줘요!"
승희는 소리를 쳤으나 혜영은 얼빠진 얼굴로 덜덜 떨면서 멍한 눈으로 중얼거
리는 것이었다.
"거미. 거미래. 거미……."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도와줘요! 급해요, 어서!"
"엄마 거미가 아빠 거미를 잡아먹고 ……."
지금 혜영 또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도움을 기대하기는커녕 오히
려 쇼크 상태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 같았다. 놀란 데다가 남자가 흥얼거리는
가락이 너무도 음산해서 승희도 기절하고 싶을 판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
다. 승희는 이를 악물면서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는 비명을 질렀다. 손에서 밧줄
이 점점 미끄러져 나가며 거친 밧줄이 승희의 손바닥을 찢는 듯했다. 더 이상 힘
을 주기가 어려워졌다. 정말 남자의 힘은 놀라웠고 손에서 밧줄이 많이 빠져나가
서 이제는 승희의 뒤편으로는 밧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준후의 목에 걸린 줄
과 승희의 손에 잡고 있던 사이의 줄이 팽팽해지려 하고 있었다.
'더 버텨야 해. 버텨야 해. 왜 소리를 지르는데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 거지. 다
른 사람들은 뭘 하는 거야. 이런 제기랄…….'
"Voyant ceci, les restes de leur p re……
En rires clat rent……
Le mangeur de toutes mani res……
Se fera mang son heure……"
그러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는 남자가 조금 더 큰소리로 흥얼거리며 갑자
기 손에 힘을 더 증가시키자, 승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벌렁 넘어졌다. 뒤
에 목이 매어져 있던 준후가 무의식중에 헉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렸다. 승희
는 체면이고 뭐고 할것없이 소리를 질러대며 땅에 엎드린 채로 줄을 잡고 버텼다.
남자는 양 손으로 줄을 잡고 힘껏 잡아당기자 승희는 몸채로 끌려서 남자의 손이
닿을 듯한 곳까지 끌려가기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위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승희야!"
현암이었다. 승희는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
파트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한 손으로 줄을 잡고 한 손으로 뭔가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승희는 현암 쪽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라 남자가 어떻게 행동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현암이 6층에서 내려다보니 줄을 잡아당기고 있
는 남자가 한쪽 손으로 줄을 옮겨잡고 뭔가를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들고 있는
것이 네온싸인 불빛에 번쩍하고 반사했다.
'이런, 급하다!'
현암은 급히 계단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계단을 내려가도 저 남자
가 도끼를 내려치는 시간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었고 승희의 머리는 두 토막이
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월향을 날릴 수도 없었다. 이곳의 창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현암이 양팔로 몸을 끌어올려야만 겨우 밖을 내다볼 수 있
었기 때문이다. 현암은 더 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앞뒤 생각 없이 팔에 힘을
주어 창문 너머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시간적으로는 몇 초 안될지 모르지만 허공을 날아서 떨어지는 동안은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여유를 준다. 일단 현암은 몸을 날려서 왼손이 자유롭게 되자 왼
손의 월향검을 내뻗었다. 일단 승희를 구해주라는 의도로 월향검을 뿌리고나자 땅
바닥이 벼락처럼 금세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로 땅을 짚어볼까?'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은 현암으로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6층이라고
하면 높이가 20미터 이상 된다. 아무리 현암이라 할지라도 공력으로 보호되지도
않는 다리로 그 위치에서 떨어져 땅을 밟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생각나는 방법
은 한가지뿐이었다. 현암은 허공에서 떨어지면서 몸의 중심을 바꿔서 머리가 아래
쪽으로 향하게 한 다음 순간적으로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땅바닥이 덮쳐들
듯 눈앞에 크게 확산된 순간, 현암은 공력으로 가득 찬 오른손을 내밀면서 엉겁결
에 자기 자신이 알고 있었으나 아직 한번도 써보지 않은 태극기공 18자 9결 중에
'나(拿)'자 결을 운용했다.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꺄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면서 흰 물체가 번뜩하고 날아오자 승희
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암이 6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곤두박질치는
것이 보이자 승희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
간 써늘하게 날아온 월향은 승희의 머리 위를 넘어서 남자에게 덮쳐들었고 승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줄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고, 막 자기 머리를 향해 떨어지려는 도끼의 목이 싹둑 잘려서 도끼 날
이 옆으로 떨어지는 것이 슬로비디오처럼 승희의 눈에 들어왔다. 승희는 다급한
나머지 재빨리 뒤로 몸을 젖혔다. 승희는 놀라 줄을 엉겁결에 놓았으나 남자가 한
손에 잡고 있던 줄을 당기자, 또 다시 준후가 무의식 중에 헉 소리를 내면서 몸이
조금 끌려갔다. 승희는 욕을 하며 다시 밧줄을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놈아! 놔! 이 우라질 놈! 죽일 놈! 망할 놈!"
그러나 승희의 욕설이 남자의 귀에 들어갈 까닭이 없었고 남자는 오히려 더 크
게 노랫가락을 중얼거렸다.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그러는 중에 허공에 제비처럼 원을 그리며 돌아온 월향검이 남자와 승희 사이
를 휙 하고 지나가면서 밧줄을 싹둑 잘라버렸다. 승희와 남자는 둘 다 자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넘어지면서도 남자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함 없
이 음산한 목소리로 이상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쾅 하면서 둔중한 소리가 들리자 현암은 골이 지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공
력을 오른손으로 성공적으로 집중시켜 땅바닥을 내리치는 바람에 몸이 직접 땅에
부딪치지는 않았고 큰 타격은 공력으로 보호되는 오른팔이 흡수해 주었지만, 오른
팔을 통해서 전해진 충격 때문에 수련을 많이 쌓은 현암일지라도 아찔하게 만들었
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월향검을 날려 놓았다고 해도 월향검은 특정
한 이유 없이 사람을 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저쪽에 있는 남자가 뭐하
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준후가 벌써 쓰러져 있고 승희도 고전을 하고 있는 것으
로 보아, 어서 그쪽으로 서둘러 가보아야 했다. 현암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보니까 아파트 화단에 오른팔이 거의 어깨까지 깊숙이 박혀
있어서 쉽사리 손이 빠지지 않았다.
'윽! 산 넘어 산이라니.'
현암은 급한 김에 공력으로 팔을 단번에 빼려 했지만 공력은 오른팔에만 돌 뿐
이었으니 묻혀있는 오른팔에 공력을 돌린다 해서 어깨까지 깊숙이 들어간 팔이 빠
질 리 없었다. 현암은 하는 수 없이 조금씩 오른손에 힘을 넣어 오른팔을 돌면서
힘없는 왼팔과 다리의 힘으로 몸을 들어올려서 팔을 빼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잘 안 빠지네. 승희야 조금만 참아.'
현암은 마음속으로 소리를 치면서 계속 힘을 주었다.
거미의 먹이
관리실에 올라갔던 박신부와 연희는 아래 주차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관리인을 데리고 레오가 살고 있는 방에 여벌 열쇠를
가지고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 관리인은 순순히 키를 주지 않으려 했지
만 검은 사제복 입은 신부가 심각
쥣수는 없었겠지만-계속 이야
기를 하고, 또 연희가-물론 거짓말이지만-다급한 듯한 어조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
자 군말 없이 키를 찾아들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뭐라고 했길래 저 사람이 순순히 문을 열어주겠다는 거지?"
박신부가 내려가는 길에 살짝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레오라는 사람은 평소 우울증이 있던 사람인데 지금 집에 있는 것은 분명
하지만 문도 열어주지 않고 연락을 안 받으니 자살한 게 아닐까 하고 겁을 줬죠.
이 아파트는 자살자가 많다는군요."
박신부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돌았으나 이내 씁쓸한 얼굴로 바뀌었다. 연희도
박신부와 같은 생각인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레오라는 사람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하죠? 무서울 것 같아요. 신
부님 기분도 이상하다면서요."
"글쎄."
세 명은 레오의 집 문 앞에 도착했고 박신부와 연희 둘은 관리인의 뒷전에 서
서 관리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연희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레오라는 사람이 정말로 죽어 있을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
제까지 죽은 사람을 못 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박신부는 제발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관리인이 들어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그렇지 않기를 바랐는데."
박신부와 연희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어수선하게 오만 잡동사니들
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관리인은 방문 하나를 열어놓고 그 앞에 서서 연신 "하느
님 맙소사" 하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관리인의 몸에 가려서 두 사람에게는
아직 방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희가 겁을 먹고 앞으로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가면서 관리인의 어깨를 살짝 쳤다.
"왜 그러시죠?."
연희가 묻자 관리인이 멍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사람이 자살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연희가 고개를 내밀어 방안의 광경을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윽 하는 소리
를 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관리인을 한쪽으로 잠시 밀쳐내고 방으로 들어간 박
신부의 입에서도 저절로 "아멘" 소리를 중얼거렸다. 방안은 몹시 지저분했고 온갖
책들과 디스켓, 프린터 용지에 먼지까지 가득 뒤덮여서 거의 발을 디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두 대가 켜져 있었는데, 그중 한대의 모니터에는
예의 그 시커먼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온몸이 꽁꽁 묶이
고 머리가 갈라진 수박처럼 완전히 두 조각이 난 채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의자
는 뒤집혀져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디스켓이며 책들을
흠뻑 적시고 있어서 아무도 그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희가 욕지
기가 나는 것을 참으려는 듯한 목소리로 관리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박신부에게
들려주었다.
"의자에 묶여 있다가 머리를 맞은 것 같다는 군요."
그러나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머리를 맞았다면 왜 몸이
꽁꽁 묶여 있다는 말인가. 몸이 꽁꽁 묶여서 머리를 친 것이 이론적으로 합당하다
고 생각했으나 지금 그것을 문제삼을 계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를 묶은 줄은
……. 박신부는 성호를 그으며 관리인에게 누군가 부르라는 듯이 눈짓을 했고 관
리인은 서둘러서 거실의 전화로 갔다. 경찰을 부르는 듯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
다. 연희는 여전히 시체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고 박신부는 주변을 꼼꼼이 살피다
가 연희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연희가 이런 광경을 오래 보고 있는 게 좋지 않게
생각되기도 했고…….
"내려가서 혜영 씨를 불러오는 것이 어떨까?"
연희가 놀란 듯 말했다.
"혜영 씨에게 이 광경을 보여주려고요?"
"그러면 경찰이 시체를 치울 때까지 조금 기다릴까? 그러나 저 화면이 떠 있는
컴퓨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연희가 시체를 보지 않으려 손으로 눈 밑을 가리며 책상 위를 보았다. 책상의
두 대의 컴퓨터 중 한 대는 데스크탑이었고, 그 옆에 있는 또 한 대의 컴퓨터는
노트북이었다. 데스크탑의 모니터에는 그 을씨년스러운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
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데스크탑과 노트북, 두 콤퓨터가 두꺼운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북은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계속해서 알아보기 어려운 16진수 숫자들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 거미 바이러스인가 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던 중이 아니었을
까.'
연희는 일단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아래층으로 향했다. 혜영을
부른다기보다는 이 끔직한 곳에서 멀어지려는 생각이 연희의 마음속에 더 강했는
지 도 몰랐다. 박신부는 방안을 좀더 꼼꼼이 살펴보다가 마루로 나가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 관리인에게 가서 그의 등을 도닥거리며 기도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
관리인도 마침 카톨릭 신자였는지 박신부가 기도를 하자 같이 성호를 그으면서 크
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희는 쓰러져 있는 준후를 몸으로 가린 채 음험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째려보고 있었다. 남자가 인상을 쓴다거나 화를 내거나 난폭한 행동을 했
다면 차라리 덜 무서웠겠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이상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히죽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승희가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 빨리 와 도와줘!"
피하고 싶었지만 승희는 무서워서 준후까지 끌고 몸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 같
았다. 계속해서 현암을 소리쳐 부르면서 승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준후의 부적이 듣지 않은 것을 보면 악령이 씌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제정
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정신병자인 것 같은데.'
남자의 마음속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눈을 감고 투시할 상황이 아니
었다. 한동안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뒤에선 준후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승희는
남자에게서 경계의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뒤로 돌려서 준후의 몸을 짚어보았다.
준후는 아직 몸을 일으키진 못하고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승희의 손에 준후의 목에 걸려 있는 밧줄이 잡혔다. 그 밧줄이 가는 목에 걸려
있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느껴져서 승희는 뒤로 손을 돌린 자세 그대로 준후의 밧
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러나 볼 수가 없어서 밧줄은 잘 풀리지 않았다. 안달이
난 승희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 '설마 그 사이에…….' 하는 생각으로 재빨리 몸
을 돌려서 밧줄을 풀어내려고 시선을 남자에게서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치
지 않고 남자는 승희에게로 휙 하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
던 현암이 소리를 쳤다. 승희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눈
앞에 남자가 덮쳐오는 모습이 보였다. 승희는 너무 무서워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
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덮쳐오던 자세
그대로 옆으로 나자빠져서 땅에서 구르는 것이었다. 승희가 고개를 돌려보니 부들
부들 떨고 있는 혜영의 손에서 깨어진 빈 병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차
린 혜영이엉겁결에 빈 병으로 승희에게 달려드는 남자의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고마워."
승희가 말하자 혜영은 대답 대신 그 자리에 주저 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마
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안간힘을 쓰던 현암은 그제서야 간신히 땅에서 팔을
빼냈다. 그리고 말 없이 승희 쪽으로 다가가 준후를 안아들었고 준후의 목에서 밧
줄을 풀어냈다. 승희도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우는지 어쩌는지 고개를 무릎에 묻
었고 현암은 준후를 다독거렸다. 준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별 탈
은 없는 듯했고 다만 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잠시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
다. 그러다가 승희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고는 울고 있는 혜영에게
다가가서 혜영의 등을 도닥거려 주었다. 현암이 조용히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승희가 대답했다.
"몰라……. 차 속에 있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도끼를 던지며 덤벼들었어. 뭐 하
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정신병자인가봐."
현암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준후를 내려놓고 남자가 가지고 있던 밧줄을 가지
고와 그 남자를 꽁꽁 묶었다. 승희는 안심이 되는 듯 혜영을 다독거리면서 남자를
향해 이제는 남자의 마음을 투시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소리
치며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연희였다.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승희는 현암과 연희에게 자기들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문제의 그 남자는
그 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묶인 상태에서 몸을 조금씩 움찔거렸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그 이상한 미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다시 그 흥얼거리는 노
랫소리가 들려오자 승희가 이를 갈면서 벌떡 일어났다.
"야, 임마 그만 중얼거려! 듣기 싫어 죽겠어!"
승희가 남자를 발로 차려는 것을 현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살짝 밀어
냈다. 남자가 그 노랫소리를 내자 혜영이 다시 몸을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고, 승희
는 남자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다가 혜영을 다독거리면서 다시 멀리 떨어진 차
속으로 데리고 갔다. 현암은 아무 말 없이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옆에서 연
희가 남자의 노래를 듣고 있다가 그 내용을 현암에게 말해주었다.
"뭔가 좀 이상해요. 이 사람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요."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데?"
"이 남자가 하는 노래는 거미 이야기예요."
"거미?……."
"네에. 거미예요. 동요 같군요……."
연희는 조용히 남자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통역해서 현암에게 들려주었다.
"M re araign e Sans app tit
식욕이 없는 엄마거미가
S mpressa de manger son mari.
제 남편을 먹어치웠다.
Ce aui restaint du mari
남편의 남은 껍질이
Regarda Sa femme sans voir.
제 부인을 무심코 바라봤다.
Le Ventre de m re araign e agit
엄마 거미의 배가 움찔거리더니
Et donna naissance plusienurs petits.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다.
Les petits d vor rent alors leur m re
그때에 새끼들이 엄마거미를 잡아먹었고
Voyant cew, les restes de leur p re
이것을 보던 아빠거미의 껍질이
En rires clat rent.
소리내어 웃어댔다.
Le mangeur de toutes mani res
먹는 자는 어쨌거나
Se fera mang son heure.
다음번에는 먹히는 것.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인걸.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인걸……."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쫓고 있는 그 원한령이 깃들여 있는 바이
러스도 바로 거미 아니었던가. 혹시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연희는 고개를 돌려서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잘라진 손도끼를 보더니 헉 하
는 소리를 냈다.
"또 왜 그러지?"
"참. 깜박 잊고 이야기를 안 했는데 레오라는 사람, 그 BBS 운영자는 자기 방
에서 죽어 있었어요."
"뭐라구? 죽어 있다구?"
"예. 머리가 두 토막이 나서 비참하게……. 그런데 이 남자가 도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왠지……."
"도대체 어떤 일일까?"
현암은 남자의 품을 뒤져서 지갑을 꺼냈다. 거기엔 신분증과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연희에게 보여주니 연희는 남자의 이름이 장 쉥 미쉘이고 대학원 전산과
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최근에 등록을 한 것으로 보니 원래 정신병자 같지는 않은데요. 정말 이상하군
요. 더군다나 거미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도끼를 들고 있었던 것 보니 위에 죽어
있는 남자와도 무관한 것 같지가 않아요. 이 미쉘이라는 사람이 레오를 죽인 것
같아요."
현암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번뜩거리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미 그림이 나오는 바이러스, 거미 노래를 중얼거리고 있는 도끼를 든 남자.
그리고 도끼에 맞은 채 머리가 두 토막 나서 죽어 있다는 거미 바이러스의 BBS운
영자.'
연희가 또 한가지 사실을 덧붙여 주었다.
"위쪽엔 케이블로 서로 연결된 컴퓨터 두 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바로
그 거미 그림이 떠올라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하나의 컴퓨터에는 계속 프로그램
이 돌아가고 있었어요. 분명 서로 접속되어 있었는데……. 그건 거미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아요."
"뭔가가 다 얽혀 있는 것 같아. 이건……."
현암과 연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저만치에서 경찰
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연희에게 경찰에 사정 이야기를 잘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위층을 향
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런 난리가 났는데도 누구 하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
다니, 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좌우간 뭔가 주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
연관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레오라는 남자가 죽어 있다는 방을 자세히 보
아야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6층으로 레오의 방을 찾아간 현암은 곧 박신부를 만났다. 피차간에 겪은 일들을
간단히 이야기한 다음에 현암은 레오의 방을 구경하길 원했고 박신부는 말없이 현
암에게 열린 방문을 손가락질해서 보여주었다. 마루에 앉아 있던 관리인은 아무
말 없이 창 밖만 보고 있었다. 현암이 그 방으로 들어가자 쓰러져 있는 레오의 시
체와 함께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거미그림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현암은 눈살을 찌
푸리면서 거미 그림을 잠시 쳐다보다가 옆에 아직도 숫자들이 스크롤되고 있는 다
른 컴퓨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컴퓨터는 신기하게도 옆 컴퓨터와 접속이 되고 있는데 바이러스가 들어가
지 않는 것 같군요."
"음, 그런 것 같네."
그리고 현암은 다시 쓰러져 있는 레오의 시체를 다시 곰곰이 살펴보았다.
그것을 보고 박신부가 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어."
현암이 반문했다.
"뭐죠?"
"저 사람 말이야. 저 사람이 어떻게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암은 별로 생각지 않은 채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누군가 들어와서 의자에 앉아 있던 저 사람을 꽁꽁 묶고 그 다
음에 도끼로 머리를 내려쳤겠죠. 그래서 쓰러졌고 저런 자세가 되었겠구요."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네. 잘 보게. 저 사람이 쓰러져 있는 자세가 이상하지
않은가?"
"글쎄요. 별로 이상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데요."
"글쎄. 자세히 봐. 저 사람은 의자 뒤쪽으로 엎어진 것이 아니라 의자 앞으로 쓰
러져 있어. 저 사람을 꽁꽁 묶고 도끼로 쳤다면 구태여 그 사람을 의자에 앉혀 놓
고 뒤로 돌려놓고 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거야 뭐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또 있어. 한번 자세히 보게. 저 남자를 묶은 줄에 피가 튀
어 있나?"
현암은 속으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미처 현암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머리를 쳐서 머리가 두 토막이 나고 피가 사방으로 튀어 바닥에 가득 고일 정도면
레오를 묶었던 줄에도 피가 튀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오를 묶은 줄에
는 피가 묻은 자국은 있었지만 피가 튄 흔적은 없었다. 박신부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참 이상하단 말이야. 저걸 봐서는 저 사람을 도끼로 쳐서 죽인 후 다시
시체를 묶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왜 쳐서 죽인 사람을 다시 줄로 묶으려 했을까.
그것도 칭칭 줄로 묶어서 반쯤 미라를 만들어 놓은 상태로 말이야. 시체가 움직이
거나 도망칠 것도 아닌데……."
현암의 머리에 뭔가 스쳐지나갔다.
"죽인 다음에 줄로 묶는 경우가 있지요."
"어떤 경우인가?"
"거미는 그렇게 합니다. 저 아래 도끼를 휘둘렀던 남자……. 연희 씨의 말에 따
르면 그 남자는 자신이 거미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요. 거미에 대한 노래를 읊조
리고 있었고."
"거미에 대한 노래?"
박신부의 눈이 책상 위에 있는 거미 그림이 떠 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현암이
나직이 박신부에게 말했다.
"저 위에 있는 컴퓨터. 아무래도 이상해요. 혜영 씨의 컴퓨터도 그랬지만 거미
바이러스의 접촉만 하면 금세 컴퓨터는 거미 바이러스에게 점령되어 버렸잖아요?
그러나 저 옆에 있는 컴퓨터는 안 그렇네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신부는 방바닥을 다시 한 번 살폈다. 레오라는 남자가 도끼의 일격을 맞아 죽
은지는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피는 이제 서서히 굳어
가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박신부도 옛날에 검시관인 장박사를 따라 다니면서
여러 유형의 시체를 보아 왔기 때문에 이 정도로 피가 응고되려면 적어도 두세 시
간은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최소한 두세 시간 동안 저 컴퓨터
는 그 옆의 컴퓨터와 접속이 되고 있었을 텐데도 거미 바이러스가 들어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살인자가 컴퓨터를 켠 것이라고 최소한으로 잡아도 박신부가
방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컴퓨터가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혹시 이 사람이 그 거미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 옆의
컴퓨터는 그 거미 바이러스를 막는 프로그램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맞아요. 저 컴퓨터가 대단히 중요하겠는데요. 저걸 슬쩍 가져가서 혜영 씨나 누
구에게 보여주면 안 될까요?.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다루기가 어려워지
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저 물건을 그냥 집어가자는 말인가?"
"글쎄요. 좀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경찰은 분명 이를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처
리해 버릴 것이 분명해요. 그러나 저 바이러스에 원한령이 깃들어 있는 이상, 저
프로그램과 컴퓨터들이 경찰의 손에 그냥 넘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요.
이 일은 틀림없이 그 바이러스가 중점이 된 것이고 그렇다면 그 원한령과도 관계
가 있지요. 경찰은 이런 영적인 일을 해결하지는 못해요."
"글쎄."
박신부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현암이 막무가내로 자그마한 노트북
과 옆에 있는 컴퓨터와의 접속선을 모조리 빼버린 후 노트북과 코드를 모두 챙겨
서 옆에 끼었다.
"아무도 모를 거예요. 도둑질을 하자는 것은 아
니야. 저 관리인도
컴퓨터가 두 대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현암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리인이 정말 컴퓨터가 두 대 있었는지 기억할지 못
할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 컴퓨터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현암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났는지 재빨리 노트북 컴퓨터를 끼고 박신
부가 말리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2,3분 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노트북 컴퓨터가 들려 있었다.
"이건 혜영 씨가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입니다. 이걸 옆에다 놔두면 그 관리인도
컴퓨터 2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더라도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혜영
씨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네요. 마루에 있는 관리인은 저
를 보지는 못했어요."
현암은 노트북 컴퓨터를 내려놓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박신부는 그런 현암을
말리지도 못하고 잠시 서 있다가 손수건을 꺼내들고 지금 내려놓은 혜영의 노트북
컴퓨터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지문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건 원. 완전히 범죄자가 다 되어가는구만……."
경찰들이 막 연희와의 이야기를 마친 듯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박신부
는 찝찝한 얼굴로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거미의 목적
경찰의 관점에서 볼 때, 바로 그 다음날 사건은 이제 어느 정도 수습이 되는 듯
했다. 범인은 도끼에서 검출된 혈흔 등으로 볼 때 미쉘임이 분명했고 그는 정신병
자를 위한 특별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박신부와 승희는 증인 겸 범인 체포자 겸
최초 목격자 등등의 명목으로 사방의 경찰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어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신을 차린 준후는 다행히 별 다른 쇼크는 먹지
않았는지 다시 쾌활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만 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며
칠 동안 다녀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답답하다며 인상을 한번 찌푸린 것뿐
이었다. 연희는 그런 준후가 안쓰러워서 계속 준후와 놀아주었다. 현암은 혜영과
함께 자신이 들고 온 노트북 컴퓨터로 뭔가 작업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혜영은
처음에는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지만 현암과 연희가 잘 타이
르고 그 노트북 컴퓨터를 보여주자 오기가 되살아나는 듯 다시 프로그래머의 '끼'
를 발휘해서 그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여러 루틴들을 분석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현암이 지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소파에 누워 있을 때 방 안에서 혜영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찾았다! 이제 알았어요!"
혜영의 목소리를 듣고 현암과 준후와 연희는 혜영에게로 달려갔다. 방 안은 사
방 디스켓이며 종이들로 잔뜩 어지러져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혜영은
헝크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만면의 미소를 띠고는 싱글벙글이었다.
"무슨 일이죠? 혜영 씨!"
"드디어 알아냈어요. 이 노트북 컴퓨터 안에 들어 있던 것은 그 바이러스의 소
스 코드와 그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는 에디터 루틴, 그리고 바이러스가 퍼져나
가는 것을 감지하는 모니터링 루틴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이것만 있으면
그 바이러스가 어디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살펴볼 수 있어요. 그러나 단 하나, 컴
퓨터들끼리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컴퓨터간의 교신을 할 수 있
을 때만 모니터링이 되요. 그래서 어느 쪽으로 퍼졌는지 다 알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그것을 바탕으로 거미 바이러스인지 뭔지를 잡는 백
신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죠. 그래서 그 백신 프로그램을 네트워크에 띄우면……."
"좋아요. 그건 혜영씨 맘대로 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바이러
스들이 어디어디로 퍼져나갔느냐는 사실입니다. 그걸 알면 그쪽으로 퍼진 바이러
스 루틴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냈던 그 원한령의 메시지를 전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그 원한령이 무엇을 노리고 있던 것인지 밝혀낼 수 있 것 아
닙니까?"
혜영이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화국 컴퓨터에 접속하여-혜영도 해
킹 전문가였다.-전화번호로 여러 주소 코드를 알아내 줄줄 출력하는 동안에도 자
신이 알아낸 거미 바이러스의 특징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거미의 설치, 그리고
유충 거미들의 분리와 성장 등등…….
그러는 사이에 지친 얼굴로 승희가 박신부보다 먼저 돌아왔다.
"에이, 빌어먹을. 경찰서는 어느 나라든 갈 곳이 못 돼. 도대체 사람을 들볶으니.
원."
여기저기 컴퓨터가 설치된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든 현암이 막 들어온 승희를 보
고 말했다.
"승희야. 같이 나가자."
승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나가? 난 몹시 피곤한데……."
"나가야 해. 바이러스들이 퍼져 있는 곳이 어디인지 대충 알아냈어. 그 바이러스
에 깃들여 있는 원한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승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런 제기랄. 난 잠도 마음대로 못 자나. 그만 좀 괴롭혀. 그만 좀!"
승희가 중얼거리는 것도 듣지 않고 현암은 혜영만 남겨 놓은 채 승희를 준후와
연희도 같이 데리고 문을 나섰다. 혜영은 나가는 네 명에게 인사조차 없었다. 아마
도 이번에 그 백신 프로그램인가 뭔가를 만드느라 또 다시 프로그래머의 '끼'를
훨훨 불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고생을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결과, 약간의 성과가 있었다. 주소지
에 써 있었던 곳들 중 이미 몇 군데에서는 그 거미 바이러스 침투를 알아내고 피
해를 입은 뒤 아예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는 조치를 취해 버린 후여서 거기에 깃든
메시지는 자세히 알아낼 수 없었으며, 또 몇 군데에서는 아예 컴퓨터가 있는 곳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바람에 거미 구경도 할 수 없었지만, 나머지 몇 군데
에서는 컴퓨터에 떠올라 있는 거미 그림과 함께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와 함께 퍼
져나가는 그 원한령의 분화된 메시지를 승희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
들은 저번보다 더 단편적이어서 '과거…….'라든가 '참을 수…….'라든가 '침투…
….'와 같은 몇몇 단어만이 들렸을 뿐 저번같이 '파괴의 일념'과 같은 문장은 남
아 있지 않았다. 연희가 이것은 그 바이러스가 좀더 분산되어서 사방으로 퍼져 나
간 결과가 아니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했고, 현암은 어둡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조금씩 알아낼 수는 있었지만 아주 극히
일부분을 조각 맞추기 식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고 그것을 한데 모으기는 힘들
었다. 더욱이 승희가 알아낸 것은 그 남자의 얼굴 중에서도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처음에 눈과 창백한 입술을 본 이후로 코의 일부분과 이마의 한쪽 그리고 귀와 한
쪽 뺨 정도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것이 거기에 출력된 주소 리스트를 따라 돌아다
닌 노력의 전부고 그것만으로는 별소득이 없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의
얼굴이라든가 약간의 메시지를 알아낸 것은 수확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알아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놈이 비록 곧 죽겠지만……. 용서……. 남을 것이다……. 이 지경에. 내가…….
그 사실. 영원히. 프로그램……. 파괴를 위한 일념으로……. 저주. 빠트린.
승희가 토막토막 적었던 것을 정리해서 보여준 메시지들을 보고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파악할 수가 없군 그래. 처음에 알아냈던 두 개의 좀 긴
메시지 말고 이번에 알아낸 것들은 단어 하나씩밖에 안되잖아. 더군다나 순서도
정확히 알 수
側然 어떻게 놈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지…
…."
그러자 준후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말했다.
"승희누나. 얼굴의 어떤 부분이 보였다고 했지요?"
"음, 글쎄다. 여기저기 보이긴 했지만 아주 작은 부분들일 뿐이고 얼굴 전체는
생각하기 어려워."
"승희누나 그림 잘 그려요?"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승희누나 아버님은 화가셨잖아요. 승희누나도 아버님을 닮았으면 그림을 잘 그
릴 수 있을 거고, 조금씩 생각나는 부분을 그려 얼굴을 만든다면 좀더 얼굴의 윤
곽이 확실히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준후의 말은 그러니까 몽타주를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모두들 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라 동의했고 승희는 좀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난 그다지 그림을 잘 못 그리는데. 그렇지만 한번 해보자고."
승희가 근처 상점에서 노트와 펜을 사들고 왔다. 일행이 카페에 자리잡고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승희는 종이에 끄적거리고 있었다. 어느덧 주변이 어두컴컴해질
때가 되어서야 승희는 간신히 그림 하나를 만들어냈고 그때까지 어슬렁거리면서
카페 안에서 잡담을 나누거나 혹은 졸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승희가 그림을 완
성했다고 하자 승희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더 잘 그릴 수 있었는데……."
"누가 네 그림 실력 보자는 거니?"
"와!"
자신은 실력이 별로라고 했지만 상당히 잘 만들어진 그림이었다. 특이하게 보이
는 점은 별로 없었지만 조금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듯한 인상을 주는 남자의 얼굴
이었다. 현암이 물었다.
"이 인상이 확실한 것 같아?"
승희가 슬며시-회심에 찬 듯한-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대강 비슷은 한 것 같아. 나 원래 그림 실력 없다고 말했잖아."
"아니, 그림 실력 문제가 아니고 이 그림을 바탕으로 그 영에 대한 것을 추적해
낼 수 있느냐는 거지."
현암이 자신의 그림 실력에 대해서는 아무말을 하지 않자 승희는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한 번 해보긴 해봐야 할 텐데……. 별로 자신은……."
그러자 준후가 끼여들었다.
"일단 이 남자의 신원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일이 쉬워지는 것 아녜요. 이 그림
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찾아보는 방법은 없을까요?"
"여긴 우리 나라가 아니란다. 준후야."
준후는 다시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뭔가 단서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단서가 되지? 이 얼굴 하나를 알아냈다고 사람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
닐텐데. 더구나 이건 사진도 아니고 그림이잖아."
"아니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준후가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승희누나의 투시는 그림만으론 잘 되지 않을지 모르죠. 더군다나 그 사람은 이
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원한령이 되어 나타난걸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
니까 승희누나는 안되더라도 제가 소혼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이 그림만 보고 소혼을 할 수 있겠니? 내가 그림을 그리긴 제대로 그린
걸까? 호호."
현암은 눈을 감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준후가 아무런 기색 없이 말했다.
"그림만 가지고는 좀 힘들겠지요. 하지만 혜영 누나의 컴퓨터에 들어 있는 바이
러스에 어느 정도 원한령의 기운은 남아 있잖아요. 그것과 이 그림을 합하면 어느
정도 소혼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현암이 준후의 말에 못을 박았다.
"그렇다고 소혼술을 자꾸 써서는 되나. 그런 일은 부작용이 생겨서 안돼.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구."
현암이 고개를 젓는데도 준후는 계속 매달려 졸랐다.
"배운 것을 이런 때 써먹지 않으면 언제 써먹어요. 영을 잡아내기 위해선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요. 형! 다른 방법 있어요? 이 그림 한 장하고, 어떤 말인지
도 제대로 모르는 저 메시지만 가지고 뭔가를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암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준후의 말이 맞을지 몰랐다. 준후가 소혼술을 시키
면 영의 정체를 알아내기가 훨씬 쉬울 테니까. 그러나 현암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
다. 현암의 얼굴이 좀 음울해지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닫았다. 일행은 우울한 기분
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암이 일행과 함께 혜영의 집에 도착해보니 박신부
가 와 있었다. 그러더니 박신부가 종이 몇 장을 현암과 승희와 연희에게 나눠주었
다.
"거기서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지 몹시 피곤하군. 그들 말로는 그 학생은 최근까
지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던데……."
승희가 말했다.
"누구 말이죠? 우리를 공격한 미쉘이라는 놈 말이에요? 원……. 그렇다면 갑자
기 미친 건가?"
"음, 경찰 쪽에서는 그 행동을 정신적인 장애로 판단하는 모양이야. 내가 어렵게
그들을 설득해서 그 사람의 증상에 대해 정신병 의사가 기술한 것을 복사해 왔지.
이걸 연희양이 좀 읽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연희는 박신부가 가지고 온 자료를 읽어주었다. 거기에는 미쉘이 뭔가 거미에
대한 콤플렉스로 심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스스로 거미
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는 내용 외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
두 어려운 학술 용어로 쓰여져 있어서 읽어봐야 알 수도 없었고…….
박신부가 말을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그 미쉘이란 남자는 거
들어냈거나, 아니면 그 거
미
바이러스를 많이 이용하다가 미쳐 버렸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말이죠."
승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미쉘이란 남자를 한번 투시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오히려 더 확
실해질지 모르는데……."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준후가 답답하다는 듯 중간에 끼어들었다.
"제가 소혼을 해보면 일이 빨라진다니까요."
"그건 안 된다. 준후야!"
박신부가 꾸짖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술수를 자꾸 써서 네 명을 갉아먹게 할 순 없어.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지 않더냐? 승희야, 그럼 그 미쉘이란 남자에 대해 투시를 해보겠니?"
준후는 자기 의견이 묵살당하자 불만스런 듯이 박신부에게 다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승희누나가 미쉘이라는 남자를 투시할 때 저도 그 내용을 알 수 있
게 해주세요. 그러면 소혼은 하지 않더라도 그 영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떠돌아다니는지 읽어낼 수 있으니까요.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고 명이 깎이
지도 않아요. 예?"
"음……."
박신부는 아무말 없었다. 현암도 생각을 하다가 그 정도는 괜찮을 듯 싶었는지
연희에게 받은 세크메트의 눈을 준후와 승희에게 건네주었다. 승희는 곧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미쉘이란 남자에 대해 투시하기 시작했다. 무척 혼란스런 느낌이
었다. 거미의 그림, 옛날에 창밖에서 보았던 거미줄의 모양, 복잡한 컴퓨터 프로그
램들의 내용들이 아무런 이유도 연관성도 없이 머릿속에 정신없이 스쳐지나갔다.
미쉘의 마음속은 승희로서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로 복잡했다. 도대체 제정
신이 아닌 사람의 마음속이라 온갖가지 생각이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
로 떠오르고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간신히 참으면서 계속 투시를 하다보니 뭔
가 한 가지 장면이 눈에 띄었다. 바로 자기가 그렸던 그림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
의 형상이었다. 남자는 몹시 화를 내는 듯한 얼굴로 잠시 나타났다가 아득하니 멀
어져 갔다. 안타까운 마음에 승희는 미쉘에게-들리지 않을 테지만-안달을 부렸다.
'아니야. 저 남자에 대한 것을 빨리 더 생각하라니까. 아이고! 저런, 한번 더 봤
으면…….'
승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미쉘의 마음속을 추적했다. 세크메트의 눈을 통
해 준후의 느낌이 나직하게 전달되어 왔다.
-누나, 바로 저 남자 같네요. 누나가 그렸던 그림하고 매우 비슷해요.
잠시 후 미쉘의 마음속에 그 남자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미쉘은 그 남
자의 모습을 꿈에서 본 모양이다. 영이 미쉘의 꿈속으로 들어가 아라크노이드 프
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한 듯했다. 둘은 프로그램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승희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남자가 미쉘을 정
신적으로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준후의 낮은 탄성이 들렸다.
"아! 저거……. 저 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아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현암이 급하게 말을 되받았다.
"그게 뭐지?"
"잠깐만요. 지금 제가 추적해볼게요. 미쉘의 마음속을 투시하는 것은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 남자의 메시지가 느껴져요. 아이고! 잊기 전에 어서……."
이번에는 준후가 땀을 한참 뻘뻘 흘리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준후는 박신부가
얼른 집어준 종이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글자를 써내려갔다.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박신부가 탄성을 올렸다.
"맞아! 틀림없어! 바로 이 메시지야. 바이러스에 들어 있던 그 원한령의 단편적
인 생각인 것 같아.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면서 원한령이 저 바이러스를 미쉘에게
만들게 했고, 지금 준후가 그 기억을 잡아낸 것 같군. 준후야, 계속……."
준후는 잠시 펜을 놓고 계속 중얼거렸다.
"나를 이렇게 만……든……. 아니, 이 지경에 빠트린 놈에게."
준후는 말을 하려다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거
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준후가 애를 써서 꽤 긴 문
장을 만들어냈다. 현암이 소리내어 그 문장을 읽어내려 갔다.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나를 이 지경에 빠트린 놈에게,
놈의 완전한 파괴를 위한 일념으로 나는 최후의 저주를 퍼붓는다. 놈을 죽이는 것
은 암이 아니라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나는 내 프로그
램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놈보다 훨씬 오래…….> 이게 전부냐, 준후야?"
준후가 힘들었는지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말했다.
"글쎄요. 이게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잖아요. 헛고생한 건 아닌지……."
"아니야, 분명히 중요한 내용이 있어."
박신부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준후가 쓴 글을 몇 번 읽어보고 와서 잠시 후 입
을 열었다.
"여긴 놈이 곧 죽을 것이라 했고 놈을 죽게 하는 것은 암이라고 메시지에 되어
있지 않니? 또 놈보다는 자신이 프로그램 속에 남아 더 오래 사는 것이라는 내용
등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원한령이 노리는 상대는 암환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
는군."
연희가 한숨을 쉬었다.
"암환자요? 참 지독한 사람이군요. 그 글로 봐서는 얼마 안 있어도 죽을 사람인
것 같은데, 그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자기 손으로 죽이려 하다니……."
"사람에겐 누구나 다 그런 심리가 있지. 자기 손으로 직접 끝장을 내지 않으면
시원하지 않은 그런 심리
쥣닦고 있던 승희가 말했다.
"그나저나 이것만 가지고는 별로 소용이 없겠는데요? 암환자와 바이러스. 이 두
가지를 어떤 식으로 연관시킬 수 있죠? 신부님 말씀 대로라면 그 원한령은 바이러
스를 만들어서 암환자를 해치려는 것 같은데……. 컴퓨터 바이러스로 사람을 어떻
게 해친다는 거야. 무슨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컴퓨터가 자기 혼자 걸어다녀서 모
니터로 머리라도 치지 않으면……. 호호호."
"앗! 잠깐만!"
현암이 놀란 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잠깐만! 바이러스가 들어간다고 해서 컴퓨터가 움직일 수야 없지……. 직
접적으로 바이러스가 암환자를 죽일 수는 없을 거야. 그러나…… 간접적으로 암환
자가 치료를 못 받게 할 수는 있지. 컴퓨터를 망가뜨리고 모든 데이터를 지운다면
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치료를 컴퓨터가 하나? 의사가 하지."
"아니야. 요즘은 병원에서도 모든 기록을 컴퓨터로 정리해. 만약 그 암환자의 기
록,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투병과정, 투약과정이 적힌 자료들을 전부 컴퓨터에 기록
해 두었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가 모조리 일순간에 날아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치료과정들이 입력되어
있는 컴퓨터의 기록이 모조리 없어진다면 암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할 것
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질 수밖에.
연희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그럼, 그 프로그램의 원한령이 바로 이걸 노리고……. 그렇다면 그 병원의 모든
암환자가 전부 타격을 받을 수도……."
일행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현암의 추리대로라면 그 원한령은 분명 자신
이 복수할 수 있는-아무 영이나 물리력을 쓸 수는 없으니까-최선의 방법을 찾아
낸 것은 확실했다. 그러면 그에 따라 죄없이 피해를 입을 다른 수십, 아니 수백 명
의 사람들은……. 준후가 슬픈 듯이 말했다.
"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사람이 노리는 사람을 우선 찾아야 하
는 거 아니에요?"
승희가 짜증나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암환자가 한두 명이라야 말이지. 치료하는 병원도 한두 곳도 아닐 거고.
도대체 이 넒은 프랑스 땅에서 어떻게 그 사람을 찾아내냔 말이야."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신부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가만 가만. 좀더 생각해 보자.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현암군이 무슨 생
각이 있는 모양인데……."
현암은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면 으레 그러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번쩍거리는
눈초리로 입을 꼭 다물고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현암의 머리가 급박
하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그런 현암의 모습만 말 없
이 쳐다보고 있었다.
거미의 행동
한참을 생각한 끝에 현암은 마침내 입을 열었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사람들
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암의 얼굴이 밝은 표정인 것으로 보아 뭔가 단서를
잡고 추리해낸 모양이었다.
"자, 잘 들어봐. 일단 우리가 어떤 어떤 것들을 알고 있는가부터 생각해봐야 해.
우리는 승희의 그림으로 일단 그 남자의 대체적인 얼굴 윤곽은 알아냈어. 그리고
그 사람이 프로그래머였다는 것, 또 어느 암 환자에 대해서 아주 뿌리 깊은 복수
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도. 그리고 내 생각인데 말야, 그 사람이 죽은 지는 그
다지 오래 된 것 같지 않아. 기껏 해야 1년 미만일 것 같아."
승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이 사람은 원한령이긴 하지만 여태껏 우리가 상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한 영
은 아니야. 다만 지능은 훨씬 좋은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미쉘이란 남자의 꿈에
나타나 미쉘에게 프로그램을 만들게 암암리에 압박을 주어서 이 아라크노이드 바
이러스 프로그램을 만들었겠지. 아마 꿈속에서 그 미쉘이라는 프로그래머에게 그
프로그램에 대해 많이 가르쳐주었을 거야. 내 생각으로는 그 미쉘이란 사람이 프
로그램을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아. 레오라는 사람은 BBS 운영자였다니 그
미쉘이란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자기의 BBS에 그 프로그램을 올려주는 역할을 했을
거고……. 그리고 정신이 이상해진 미쉘은 레오를 죽이게 되었을 거야. 거미가 먹
이를 구하는 것처럼 말야. 아마 거미의 흉내를 내서 레오를 꽁꽁 묶었을 것이고,
착란을 일으켜서 아무에게나 덤벼든 거겠지. 거미는 본래 닥치는 대로 먹이를 잡
잖아? 그 원한령이 죽은 다음에 암으로 입원한 사람의 거취를 자세히 알아내는 것
은 어려웠을 것 아냐? 원래. 암으로 죽을 정도의 진단이 내려진 환자라면 오랜 기
간 동안 살아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원한령의 주인도 기껏해야 1년 정도 전
에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박신부가 조용히
이해가 되는군. 그러면 그 다음에는?"
"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또 있어요. 이 원한령은 그 암환자에 대해 조
사를 많이 했거나 잘 알고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환자가 있는 병원의 구조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바이러스를 만들겠다는 애초의 생
각에서 짐작해 볼 때 그 환자의 진료기록이나 모든 것이 컴퓨터로 보관되고 그 컴
퓨터는 더군다나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는 대용량의 컴퓨터라는 것도 그 사람이 소
상히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거죠.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만
들어서 그 네트워크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지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암환자를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해
칠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군. 좋아. 그러면 ."
"그 다음은 당연하죠. 이제부터는 발로 뛰어야 합니다. 프랑스 내에 암환자를 수
용하는 병원을 일단 찾아내는 거죠. 그 리스트를 만든 다음 거기에서 대용량의 컴
퓨터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의 네트워크와 수시로 연결될 수 있는 병원이
나 센터 기관을 추려 내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그 기관들을 찾아가서 이 그림들
을 보여주는 거죠. 근래에 이곳에서 근무를 하거나 연관이 많았던 사람들 중에 사
망한 사람이 있었는지. 말이죠."
"그건 또 어떻게 생각해 냈지?"
"당연하지요. 아무리 프로그래머 라 해도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병원이 어떤 식
으로 컴퓨터 네트워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그 시스템이 외부와 연결되어서 침투되어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
도 쉬운 일이 아니죠. 그렇다면 그 원한령의 임자가 되는 남자가 애당초에 그 모
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그곳에 근무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
지요. 그렇지 않나요?."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정말 일리가 있는 것 같군. 좋아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알아보도록 하세."
박신부를 비롯한 일행이 몸을 막 일으키는데 뒤에서 혜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예?. 뭐가 문제지요?"
"지금 백신 프로그램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간간이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잠깐잠깐. 그 모니터링 프로그램이란 게 뭐죠?"
"그러니까. 그건 지금 퍼져나가고 있는 바이러스의 상황을 자동으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에요.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를 맨 처음 만든 사람이 어
떤 목적에선지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런데."
"그런데. 뭐죠?"
"지금 방금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그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교통국
컴퓨터에 들어간 것을 알았어요."
"교통국 컴퓨터요?. 그렇다면 큰일이에요. 모든 열차 및 전동차의 운행에 타격을
입을 수 있을지 몰라요. 떼제베(TGV)도 물론이고, 자동 제어되는 신호등에까지 영
향을 줄지도……."
"이거 큰일이군요!"
"엉뚱한 곳으로 바이러스가 번져나가서 영향을 주는군……."
연희가 급히 라디오를 틀어 보았다. 라디오에선 긴급 보도로 TGV를 비롯한 모
든 열차 운행이 컴퓨터 고장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고 아나운서가 말하고 있었다.
'단지 한 사람이 만든 바이러스 때문에 이런 사태가 오다니.'
연희가 중얼거리는데 혜영이 다시 말했다.
"한 사람이 만든 바이러스인지는 몰라도 정말 엄청난 프로그램이에요. 저도 이
런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어요. 이건 일종의 게임과 비슷
한 성격인데."
"게임요?"
"네에. 그러니까 일종의 라이프게임과 비슷한 원리이에요. 라이프 게임에서 스스
로를 복제하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바이러스
는 네트워크 망을 종적인 관계가 아닌 횡적으로 연결해서."
"잠깐잠깐…….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주세요."
승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현암과 박신부는 그런 승희에게 그러지 말라고
눈짓을 했으나 혜영은 순순히 승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원래 시스템들은 종적인 관계로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메인 밑에 서
버가 있고 그 밑에 터미널들이 있는 식이죠. 시스템이 그런 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일 때는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아래로 바이러스를 퇴치해 가면 큰 문
제없이 퇴치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러나 횡적인 관계에선 달라요. 모든 컴퓨
터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져 있고 네트워크 상에서 교신을 하게 되죠. 이 거미
바이러스의 특징은 네트워크 상의 구조를 먼저 파악해서 일종의 자동코드를 생성
해요. 그러니까 네트워크로 되어 있는 컴퓨터들의 상황을 유전자처럼 알아내어 계
속 번져 나가고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거죠."
"맙소사. 그런 거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네요."
"생명까지는 안되지만. 자기 복제를 충실히 하는 거죠. 일단 그 유전자 코드 같
은 것이 만들어지면 . 이 바이러스는 놀랍게도 각 시스템에 있는 메모리 속에 자
신들의 유전자를 집어넣고 다른 시스템 여건을 알아내어 새롭게 발전 시켜나가는
거예요. 그러니 보통 방법으론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지워도 자꾸자꾸 생겨나니
까요."
"메모리가 장치되어 있는 것은 컴퓨터 본체만이 아닌 가요."
"그렇지 않아요. 컴퓨터 대해서 잘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실지 모르지만 실
질
들어 있는 것은 컴퓨터만 아니랍니다. 컴퓨터 메인 메모리도
중요하지만 비디오 카드에도 별도의 메모리가 들어 있고 하다못해 시간을 기록하
는 클럭에도 메모리가 있어요. 프린터에도 수메가씩 메모리가 있고 키보드에도 메
모리가 따로 부착되어 있는 종류도 있어요. 모든 호스트와 주변장치 속에 유전자
코드가 들어갈 수 있고 어느 일부에서라도 거미의 유전자 코드가 들어 있기만 하
다면 그 프로그램은 어디서든지 또 살아나게 돼요."
"그렇지만 그런 유전자 코드란 것이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람의
유전자만큼은 안되어도 그 정도 내용을 담고 있으려면 길이가 엄청나게 긴 것일텐
데."
"아니에요. 이 유전자 코드란 것은 그러니까 시스템의 하드웨어 사양과 자기들
이 침투할 수 있는 경로만을 기록한 거예요. 그러나 그 하드웨어의 종류들은 단순
히 몇 바이트씩의 기호로만 된 것이고, 상세한 데이터는 엄마거미가 모조리 가지
고 있어요. 그러니까 엄마거미 프로그램은 굉장히 그 크기가 커지는 거죠. 이용가
능한 모든 하드웨어들의 자료들이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엄마거미를 죽이면 유전자코드도 소용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아네요. 그 때문에 그 기록들은 삼중 사중으로 중복되어 사방에 분산된 채 퍼
져 있어요. 어느 하나를 파괴한다 해도 다른 곳에서 카피해서 시스템으로 데이터
를 옮기기 때문에 잡기가 정말 어려워요. 이것을 잡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떤 방법이죠?"
"모든 시스템의 전원을 일시에 차단시키는 거예요. 그리고 난 다음 시스템이 딴
네트워크와 물리지 않도록 독립된 상태에서. 하나하나 잡아나가야 할 텐데."
"아이고 맙소사. 지금 이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퍼져있는 네트워크에 연결
된 컴퓨터들의 수는 몇 만대는 될거예요. 그걸 언제 하나하나씩 잡는단 말이죠?"
"이거. 하여튼 으쓸하군요. 컴퓨터 안에서 눈에 안보이게 그런 바이러스가 설치
고 있다니.이건 영보다 더 무섭군요. 근데 혜영 씨가 만든다는 그 백신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는 거죠?"
"지금 수동식 백신 프로그램은 완성된 상태에요. 그렇지만 이것을 작동시킬 여
유조차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려구요?"
"저도 바이러스를 만들어야 겠어요."
"바이러스를 만든다구요?"
"백혈구 바이러스 같은 거죠.그러니까 기존의 바이러스에 있는 시스템에도 뚫고
들어가서 다시 그 바이러스를 죽여버리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바이러스 말이
에요. 바이러스를 죽인 다음엔 스스로 분해되고 자폭하게 만들면 그만이죠."
"그렇지만 그것을 만들면 또 컴퓨터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만든 바이러스는 악성 바이러스는 아닐 테니까
염려 없어요. 아. 기술적인 것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그러나 저러나 제가 여러분
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가 궁금한 것이 있다는 뜻이죠. 아까 원한령…….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묻는 거지만……."
"뭔데요?"
"모니터링에서 이상한 게 보였어요.모니터링 프로그램에서는 현재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퍼져나가 있는 시스템들의 상태가 대부분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 이상
한 점이 발견되었어요."
"뭐죠?"
"각 거미바이러스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긴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한군데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쪽 네트워크가 특별히 연결이 잦은 것도 아니거든요. 네트워크의 연결이 많지 않
은 곳이라면 상식적으로 그쪽엔 바이러스가 적게 퍼져야 해요. 근데 이건 마치 의
도적인 듯 몰려들고 거의 . 제가 볼 땐 거의 공포스런 일에 가까워요. 프로그램 코
드만으로는 그런 목적성을 가지게 할 수 없어요. 그러나…….제 생각으로 바이러스
가 어떤 의도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가요?"
"저희도 알 수 없지요. 그 바이러스가 어떤 원한관계에 의해서 원한령의 사주를
받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많지만 그렇다고 그 프로그램 자체가 원한령을 대변한
다고는 볼 수 없어요. 어떻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글쎄요. 전 프로그램에 대해선 알 수 있지만 영
에 대해선 알 수가 없어요. 솔직히 무서워 죽겠구요."
"그건 이해해요. 저희가 있으니 염려 마시고 짚이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
요."
혜영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지요. 즉 난수배열 말이에요 ."
"난수 배열이라구요?"
"네에.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엔 어떤 경우에나 난수배열이 들어가요.
랜덤넘버 라고 하는 것인데.즉 그것은 선택을 의미하는 거죠."
"선택이라구요?. 그건 또 뭐죠?"
"그러니까 주사위를 던지는 일과 마찬가지에요. 예를 들어 제가 거미바이러스라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있는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가 6대가
있다고 해요. 1부터 6까지요. 그렇다면 내가 어느 컴퓨터에 가장 먼저 침입을 할
것인가는 선택을 해야해요. 그러나 창의성 프로그램 자체에는 독자적인 창의성이
없이 때문에 그런 문제에 부닥칠 경우는 난수를 이용하게 하게끔 프로그램을 하지
요. 즉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1번이 나오면 1번 컴퓨터로
가는 것이고 4번이 나오면 4번 컴퓨터로 가는 것이죠. 이것과 비슷한 루틴이 저
바이러스 코드 중에 있는 거 같더군요. 혹시……. 그 난수 배열에그 원한령인지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가능할
후가 말했다.
"저도 얼마 전에 실험을 했어요. 어느 잡지에선가 내용을 보구요. 컴퓨터의 난
수 배열을 사람의 정신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해보니까 내
가 마음먹은 숫자가 더 난수 배열에서 많이 나오게 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 바이러스에 깃들어 있다는 원한령이 난수 배열을 계속 조작하여
바이러스를 원하는 방향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결국 그 원한
령은 바이러스를 무기 삼아 자신이 원한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을 파괴하러 바이러
스를 몰아가는 것이 틀림없어. 그래. 분명히 그럴 꺼야. 그런데 혜영씨.깜박 잊고
물어보지 않았군요. 그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모여드는 곳이 어디죠?"
"바로 국립 암 연구센터예요."
"암연구 센터."
현암이 소리를 쳤다.
"틀림없어. 딱 아귀가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곳에 있는 환자들 중에 이 바이
러스에 들어 있는 빌어먹을 원한령에게 원한을 산 사람이 있을 꺼야. 그래서 바이
러스는 원한령의 조정을 받아 그쪽으로 침투를 하는 것이 분명하고.한시가 바쁘군.
혜영씨 어때요. 그 컴퓨터는 지금 바이러스에게 침투 당해 있는 상태인가요?"
"지금 주변장치 쪽은 거의 장악되어 있어요. 그리고 조금 있으면 거기도 거미
바이러스에 완전히 장악될 거예요. 그러나 신기하게도 거기는 오래 버티는 군요.
누군가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방어를 해서 침입을 막고 있나봐요."
"방어요? 무슨 방어요?"
"시스템은 해커들이나 바이러스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어떤 수단을 가지기 마
련인데, 그걸 방어한다고 표현하죠."
"거의 전쟁이네……."
"그런데 그곳의 위치는 어디죠?"
"여기서 그다지 먼 곳은 아니지만. 30분에서 40분 정도는 차를 타고 가야해요."
"삼사십 분이라. 이거 서둘러야 하겠군."
박신부가 그 큰 체구를 벌떡 일으키며 재빨리 밖으로 나오면서 소리쳤다.
"다들 같이 가자구.이런 류의 경험은 처음이지만 어쨌든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혜영이 얼떨떨한 듯 말했다.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것이 어떤 가요?"
승희가 혜영을 쓸쓸한 눈으로 한번 쳐다봤다.
"경찰에요? 컴퓨터 바이러스이야기만 나와도 경찰은 골치아파 할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원한령이 들어 있다는 소리를 해보세요. 누가 믿어 주겠나."
혜영이 살짝 중얼거렸다.
"하긴 저도 전혀 믿어지지 않아요."
더 긴소리를 할 것 없이 일행은 혜영의 집을 나와서 차에 분승해서 올라탔다.
혜영이 잠시 꾸물거리더니 노트북 컴퓨터 하나를 들고 헐떡거리면서 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차에 올라탄 채 그 아라크노이드 바이러스가 몰려가고 있
다는 국립 암 센터로 차를 몰고 가기 시작했다.
거미와의 싸움.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원래 짐작보다 훨씬 늦게야 일행은 국립 암 센터로
도착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암센터로 가는 길 중간에 대규모 적인 교통 혼잡이
일어나서 길이 많이 막혔기 때문이다. 전철과 지하철 등 교통국의 통제로 가동되
는 교통수단은 모조리 가동이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의외의 사태에 당황하여 사방
에서 몰려나왔다. 이용 가능한 교통 수단이 자동차밖에 남지 않게 되자 거리는 자
동차로 붐벼 넘쳤는데 나중에는 전자제어로 통제를 받는 신호등들이 팍팍 꺼지고
동작이 중단되는 바람에 길거리 또한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에서 접촉사고가
일어나서 교통체증을 더욱더 심화시켰고 차 속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떼제
베(TGV) 두 대가 달리던 중 콘트롤을 잃고 역에서 충돌해서 바스티유가극장의 임
원진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현암과 박신부는 발만 동동 구르며 난폭운전을 하여 열심히 차들을 비집고 나
갔지만 그래도 시간은 훨씬 더 걸렸다.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 길거리를 내다보며
연희는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준후도 밖의 풍경이 몹시 안쓰러워 보이는 듯 한마
디했다.
"전자적으로 통제하니 평상시엔 편하긴 한데 이럴 때는 문제가 되는군요. 이건
도대체……."
거의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려서 국립암센터에 도착한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암센터의 커다란 정문에는 외부차량을 통제할 수
있도록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문이 한쪽만 열려 있고
한쪽은 닫혀 있는 채 그 앞에서 수위들이 웅성거리며 혹은 문을 움직이려 하고 혹
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격렬하게 떠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전자적으로
내부 통제를 받아서 작동하는 문이 내부의 주 컴퓨터가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아
고장나자 그에 따라서 동작을 멈춰버린 것이 분명했다. 뭔가 센터의 기운이 심상
치 않다는 것을 초입부터 느낄 수 있었던 현암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이미 늦은 거 아니야."
박신부가 차를 세우고 성급히 차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가보도록 하세."
일행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문을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던 수위
들이 길을 막았다. 연희가 이야기해보니 지금은 센터 안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외부인 들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
이 개 한 마리를 끌고 와서 수위 한 명에게 줄을 넘겨주는 것이 보였다. 그 수위
가 개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연희가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외부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다더니 저 개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죠?"
"저 개는 우리 원장님이 기르시는 개 입니다."
"아니 그러면 개는 비상사태에라도 센터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사람은 못 들어간
다는 말인가요?"
연희는 화가 나는 듯 그 수위를 마구 몰아 세웠고 그러는 사이에 박신부와 현
암 그리고 승희, 혜영, 준후 이 다섯 사람은 얼결에 그들을 만류하려는 수위들을
제치고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수위들은 더 따라오지 않는 듯했다.
아마도 지금은 문의 동작이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원래 환자가 많이 있는
곳인 만큼 암센터의 출입은 일반 병원처럼 자유로울 수 있었겠으나 지금 비상이란
말을 들어서 수위들이 그들을 통제하려 했던 것 같았으나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연희에게 기가 질린 것도 같았고 아무튼 그래서 수위들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고 일행은 일단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커다란 건물 두개를 보며 망설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까! 환자를 먼저 찾아봐야 하
나."
"일단은 전산실로 가야죠."
혜영이 본관센터 건물이 왼쪽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표지판에서 읽어 내어 가
르쳐 주었다. 연희도 수위와 입씨름을 끝냈는지 재빨리 와서 합류했고 다시 일행
은 와르르 몰려서 본관센터 쪽으로 향했다. 본관센타는 원래 신분증을 제출하고
들어가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 의료원 상태가 매우 몹시 불안해서인지 정문의 수위
는 마침 제자리에 없었다. 수위가 없는 대신 여기저기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뛰
어다니고 서로를 소리쳐 부르면서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고있었다. 안에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거 같았다. 그 광경을 보고 혜영이 중얼거렸다
"센터 전체가 난리군요. 하긴 이렇게 큰 센터의 컴퓨터가 작동을 멈춰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도 그렇죠.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요."
"어쨌든 일단 가야 할 곳은 전산실입니다. 전산실이 어딘지 물어봐주게. 연희
양."
박신부가 말하자 연희는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던 흰 가운을 입은 사람에게 전
산실의 위치를 물었고 그 사람은 힐끗 연희에게 한쪽방향을 손짓해 주고 몇 마디
를 한 채 황급히 걸음을 옮겨서 사라져 갔다.
"전산실은 3층에 있다는 군요. 3층 복도 맨 왼쪽 끝방이라는데."
"그럼 어서 가봅시다."
일행은 바쁜 발걸음으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오히려 수위가 있지 않은 정
문과는 달리 3층 전산실로 들어가는 복도는 초입부터 수위들과 내부 경비원들이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그들을 향해 뭐라 이야기하며 그들을 밀어
냈다. 마침 연희는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차는지 뒤에 좀 쳐져 있는 상태여서 박
신부와 승희가 영어로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영어를 알아듣는 듯
하는데도 프랑스어로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반쯤 얼이 빠진 듯, 정신이 없는 것
처럼 보이던 혜영이 말했다.
"불어로 이야기 해야 해요. 프랑스 사람 중에는 불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예
아는 척도 안해버리는 사람이 많아요."
"지금 사정이 급한데 그런 것도 따진다 말이야?"
"프랑스인 들은 고집이 강하죠. 잠깐만요."
혜영이 앞에 나가서 뭐라 말했으나 경비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외부인 출입 통제라는군요. 지금 전산실 안에 문제가 생겨서 들어갈 수 없다는
군요."
혜영은 경비원들이 앞을 막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면서 쩔쩔대자 현암이
화가 나는 듯 앞으로 나섰다.
"혜영 씨.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해요. 어서요"
혜영이 고개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현암은 빠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
다.
"우리는 프로그래머들이고 바이러스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지금 이곳
에 이상한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번져서 컴퓨터로 통제되는 모든 시스템 기능이 정
지되었죠?. 그렇죠?"
혜영이 조금 더듬거리면서 현암의 말을 옮겨주자 수위의 눈이 휘둥그래 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 일을 어떻게 알았냐고 이 사람이 묻고 있어요."
가만 보니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일반 수위나 경비원이 아니라
경비책임자인 듯했다. 조금 나이도 많아 보였고 옷차림도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이 내부에 돌아가는 실제 상황을 좀 안다
면 분명히 자신의 말이 먹혀들 것이라고 현암은 자신했다.
"그런 말엔 대답할 것 없어요. 좌우간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아마 우리만이 시스템을 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당신들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느냐는 것만 반복해서 묻고 있어요."
"에이. 지금 시간이 없는데. 잔소리 말고 비키라고……. 아니 좌우간 꼭 들어가
야 한다고 말해요. 좀 큰소리로 말해요, 더듬거리지 말고.,"
현암이 말하자 혜영은 거의 악을 쓰듯이 말투를 높여서 그 경비책임자 인 듯한
사람에게 말했고 경비책임자인 듯한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잠시 말이 없는 것
이었다. 암암리에 길을 비켜 준다는 신호 같았다. 현암은 수위들이 제지하는 것을
뿌리치면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위 몇 명이 형식적으로 현암을 제지하려
했지만 현암이 가볍게 수위들의 손에 잡힌 어깨를 한번 슬쩍 움직이자 수위들은
우르르 현암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현암이 전산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들어갔고 경비책임자 인 듯한 남자가 체념한 듯 양어깨를
으쓱하고 있었
모가 큰 전산실 센터 안의 풍경이라 한다면 시원하고
조용한 가운데 약
간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컴퓨터 자체의 팬과 기계들이 돌아가는 조용한 소리
만이 나는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센터의 전산실 내부는 그야말
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비상사태 때문에 비번인 사람들까지 모조리 불려오고
외부에서 도움이 될 사람들까지 불러 왔는지. 온갖가지 사람들이 머리가 헝클어진
피곤한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나 혼돈스런
상황이어서 일단 전산실 안으로 발을 디딘 일행들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전산실 내부를 둘러보니 주위에 있는 많은 모니터들에서 그 을씨
년스러운 거미그림이 떠올랐다. 프로그래머 인 듯한 한사람이 거미그림이 떠오른
듯한 그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미친 듯 두드리다가 키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 구석에서 방금 또 거미 그림이 떠오른 듯, 모니터 앞에서 한
프로그래머가 분노에 가득찬 듯한 소리를 지르며 디스켓 뭉치를 땅바닥에 내동댕
이 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바이러스들을 만나서 지금 제정
신이 아닌 듯했다. 그런 중에 어디에 끼어 들어야 하는지를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잠시 전산실 내부의 광경을 보고 있던 박신부가 준후의 옆구리를 찔렀다.
"준후야 뭔가 느껴지니?. 영기 같은 것은?"
"아주 미약해요. 바이러스 코드 안에 숨어 있는 영이라 그런지 이건 도대체."
준후가 부적 한 장을 꺼내더니 거미그림이 떠올라 있는 모니터 앞쪽으로 걸어
갔다. 이상한 옷을 입은 동양인 꼬마가 이상한 종이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앞에 있던 프로그래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로그래머가 얼빠진 듯이 아무말
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준후는 역시 별 소리를 하지 않고 가만히 종이 부적을 모
니터에 대고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느껴져요. 파괴. 그리고 최후의 저주. 오로지 그 일념만 가득 차 있어요."
"그것밖에 안 들리니?. 준후야. 아무리 영의 마음이 분화 되어나갔다 해도 그
근본이 되는 큰놈이 어딘가 있을 것 아니야. 그놈을 일단 잡아야 해."
박신부가 말하자 준후는 모니터에 붙인 부적에 손을 댄 채 계속 정신을 집중하
다가 자그맣게 탄성을 냈다.
"앗. 저……. 컴퓨터 안에 원한령의 기운이 온통 모여 있는 것 같아요. 그 놈을
어서 잡……."
준후가 말을 이으려는데 그때까지 멍한 얼굴로 준후가 하고 있던 일을 보고 있
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뭔가 욕설 같은 것을 하고 준후를 밀쳐냈다. 준후가 잠시
화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아이고. 이런 . 막 잡으려 했는데. 놈도 내 낌새를 알아차렸을 거예요."
준후의 날처럼 그 원한령이 자신을 잡으려는 낌새를 챘는지 갑자기 전산실 내
부에 영기가 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승희가 고함을 쳤다.
"놈이 뭔가 다급한 느낌을 가지는 것 같아요."
이상한 기운은 박신부와 준후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프로그래머
들은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일단 가만히 서서 번쩍이는 두 눈을
뜨면서 사방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려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고 혜영은 메인
컴퓨터가 어느 것인지 눈으로 짚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준후가 또
소리를 쳤다.
"영기가 저쪽으로 몰려가요."
준후가 손으로 가리키는 쪽의 천장에 있던 형광등들이 껌뻑껌뻑 거리며 일시에
타다닥 나가 버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마치 줄을 이어서 사열을 하듯 형광등이 주
르르 꺼지다가 퇴마사들이 있는 곳의 천장의 형광등은 붉은 색으로 달아오르더니
펑하고 폭발했다. 유리조각이 날리자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몸을 가렸고 준후를 밀
쳐내었던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프로그래머는 전기가 오르는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갑자기 그 프로그래머가 앉아 있던 컴퓨터에서 퍽퍽하고
흰 연기가 나면서 작은 불똥이 튀겼고 갑자기 거미그림이 있던 모니터가 펑하고
브라운관이 터져버렸다. 주변에 있던 프로그래머들이 의외의 일에 놀라 마구 소리
를 치면서 그쪽으로 모여들었고 한 사람은 배전반을 열고 스위치를 조작하려 했다.
그것을 본 연희가 소리쳤다.
"컴퓨터에 고압전류가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해요. 이곳은 병원이라 특수 장비
의 동작을 위해 고압선이 많은데 그 고압선이 오동작을 해서 아무렇게 접속된다고
하는군요."
"놈은 분명히 이곳에 있어. 그리고 우리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뭔가 수작을 부
리고 있는 거야. 이건 단순한 바이러스의 짓이 아니야."
박신부는 심각한 표정으로 성수 뿌리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은
퇴마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프로그래
머들은 눈이 휘둥그래 진 채 모니터에 떠 오라 있던 거미그림이나 현재 상황을 잊
고 잠시 자기들끼리 손가락질하며 빠른 목소리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연희가 소
리쳤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냐고 소리치고 있어요."
몇몇의 프로그래머가 경비원을 부른 것 같았고 또 몇 명의 프로그래머들은 눈
에 핏발이 선 채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준후가 또 막 부적을 꺼내 모니터를 만지
려 하자 덩치가 좋은 프로그래머 한 명이 곱지 않은 얼굴로 준후를 번쩍 들어 아
예 옆구리에 끼었다.
"놔요. 놔요. 어이구 ."
"빨리 놔줘요."
준후가 버둥거리차
나 프로그래머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가라는
시늉을 하듯 그들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박신부가 바깥으로 끌려나가려는 준후의
앞에 서서 준후를 안고 있는 프로그래머를 막아서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지금 저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없어 어떤 방법이 없을까?."
갑자기 그러는 사이에 저쪽에 있던 모니터가 또 폭발을 했고 배전반을 손보던
프로그래머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언뜻 보니 그 배전반은 흔히 볼 수 있는
수동 배전반이 아니라 프로그래머블 콘트롤러가 부착된 자동 배전반이었다. 그것
들도 컴퓨터와 나름대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지금 멋대로 오동작을 하고 있는 것
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다시 몇 개의 모니터에 거미 그림이 떠오르자 그 앞에 앉
아 있던 프로그래머들은 다시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센터 내부는 거의
모든 전등이 나가버린 듯했으나 메인 컴퓨터 쪽에만은 아직 전원공급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에 나이든 남자 하나와 또 젊은 프로그래머 인 듯한 사람이
프로그래머들에게 뭐라 소리를 치자 프로그래머들이 다시 남아 있는 단말기 주변
에 부지런히 달라붙어서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프로그래머는 자신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던 것을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나이든 사람과 함께 앞으
로 나섰다. 와중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았는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나이든 사람이
먼저 말을 했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저는 이곳 시스템 담당자인 제라르라 합니다. 당신
들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 들어왔으며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군요. 도대체."
뒤에서 연희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들은 당신들을 도우려는 거예요 이곳에 지금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난리가
났죠?.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보통의 방법으로 치료될 수 없
다는 것까지두요."
혜영이 연희의 말을 덧붙였다.
"이 바이러스는 횡적 연결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유전자 배열과 같은 기본
코드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들을 잡지 않으며 이 거미바이러스는 절대 치료될 수
없어요."
갑자기 뒤에 있던 젊은 프로그래머가 믿어지지 않는 듯 앞으로 나섰다.
"저는 이 네트워트의 담당자인 알렉이라 합니다. 저희 네트워크도 이 거미 바이
러스 때문에 난리가 났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어떻게 거미바이러스에 대해 어떻게
잘 알지요?"
알렉이 말을 이으려는데 제라르가 알렉이 말을 하는 중에 끼여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당신들 문제는 아니요. 다짜고짜 이렇게
들어와서 이상한 행동만 하니…….무엇을 하는 것인지 납득이 갈 수 있도록 이야
기를 해봐요. 지금의 우리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단 말이오. 데이터들을 지키는
것만도 힘든데."
혜영이 소리쳤다.
"데이터! 맞아요! 바로 당신들은 이곳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아직 모르고 있지요?. 그 바이러스는 데이터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 진 거예
요. 원한."
연희가 재빨리 혜영을 눈짓으로 원한령이라 말하려 하는 것을 제지하고 대신
말을 이었다.
"그 바이러스는 바로 이곳에 있는 암환자들의 데이터를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
어지고 침투하게 된 거예요."
알렉이 소리쳤다.
"암환자들의 데이터라고요? 그건 도대체."
연희가 주위에 있는 승희에게서 승희가 그렸던 남자의 그림을 받아들고 그것을
앞에 서 있는 늙은 남자에게 보여줬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나요? 이 사람은 여기 프로그래머가 아니었나요?"
늙은 사람은 놀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 친구는."
"이 사람을 아시나요?"
"네에. 여기 근무했던 사람이에요.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이 사람
은 일년 전쯤에 자살한 사람이란 말이요.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관계가…
…."
"틀림없군요."
연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알렉은 혜영과 말이 통할 것이라고 느꼈는지 (혜영
이 노트 북을 끼고 있어서 프로그래머로 보였나 보다.) 혜영에게 말을 걸고 있었
다.
"지금 우리는 데이터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그러나 테이
프 백업 장치가 이미 제일 먼저 마비되었고 그 다음에 메인 하드디스크도 나갔죠.
다행히 아직 메인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번지기 전에 제가 와서 백업용으로 운용하
고 있는 서브시스템의 하드디스크에 그 기능을 옮겨서 지금 그 앞에 임시로 패스
워드를 걸어서 보호하게 했죠. 아마 그것은 풀지 못할 거예요."
"글쎄요. 그럴까요? 그건 다행한 일이지만 그 데이터는……."
"물론 이곳의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제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동정지하고 다름 사람에게 맡긴 채 제일 먼저 이곳으로 달려 온 겁니
다. 제 네트워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정되는 연결점이 여기였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일단계 조치는 이미 취한 상태에요. 이제 우리가 하는 것은 메인 시스템을
복구 하려는 것뿐이고 그 데이터들이 백업되어 있는 하드디스크와 서브시스템이
대신 동작하고 있어요. 지금 간신히 서브 시스템에 방어막을 쳐 놓았으니 아무리
거미 바이러스라 해도 우리가 쳐놓은 방어막은 뚫을 수 없을 거예요."
"서브시스템이 살아난 건 다행이지만, 거미 바이러스는 너무 무서워요. 그러니
메인 컴퓨터의 바이러스를 완전히 잡을 때까지 서브시스템을 외부와 완전 격리 시
키는 게 어때요?"
혜영이 말하자 알렉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네트워크 중에서도 의료계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에요.
여기서 시스템을 그냥 차단시키면 현재 의료 행위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요. 수술중인 사람들이 볼 참고자료도 갑자기 떠오르지 않
을 것이고 의료 기구들의 통제도 불가능하고 의사들이 기록을 찾아 볼 수도 없어
요. 이건 사람들의 목숨과 직결된 데이터들이라고요.절대 그럴 수는 없어요. 여기
는 어떤 수가 있더라도 지켜야 해요."
"그렇지만 이 서브시스템 마저도 파괴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지 않게 해야죠."
"저는 이 거미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아요. 이 바이러스는 아라크노이드 바이러
스이고 미쉘이란 사람이 만든 것이며 레오라는 사설 BBS 운영자가 퍼트린 거예
요. 그리고 보통 바이러스가 아니라 어떤 원한이 개입된……."
혜영의 말을 듣던 알렉이 미쉘과 레오라는 이름이 나오자 갑자기 놀란 듯한 표
정을 지었다.
"미쉘이요?. 이 바이러스를 미쉘이 만들었다는 것은 당신들이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또 레오는……."
"잘 들어요. 미쉘은 지금 레오라는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
요. 바로 이 거미바이러스 때문에 미쳐버린 거예요."
"미쉘이 레오를 죽였다구요?. 그리고 정신병원 이라구요.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
에요?"
"모두 이 거미 때문이에요. 미쉘이란 사람도 백퍼센트 자기가 원해서 거미 바이
러스를 만든 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어떤 원한령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은. 아이고 이걸 뭐라 이야기 해야 하나……."
"도대체 믿을 수 없군요."
현암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는 중에도 박신부 준후 승희는 원한령이 데이터를
통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는 듯 모니터들과 망가져있는 기계사이를 누비며
눈을 감고 투시를 행하기도 하고 좌우간 상당히 애를 쓰고 있었고 연희는 땀을 흘
리며 제라르란 사람을 설득하고 있었다. 현암이 혜영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말했
다.
"우리는 미쉘 씨가 직접 만들었던 모니터링 프로그램과 에디터 루틴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이용하겠다고 말해봐요. 그게 중요한 거리고 아까 혜영 씨가 말했잖
아요."
혜영이 정신이 드는 듯 알렉에게 말했다.
"우리는 미쉘 씨가 말들었던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요. 이것을 통해
서 엄마 거미가 어떤 경로로 시스템을 통해 침투하려는 지를 알 수 있어요. 그리
고 엄마거미 바이러스의 맨 처음 소스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으며 저는 거미 바이러
스를 퇴치하는 백신도 대충 만들어 놓은 상태에요. 그러니 어서 메인 컴퓨터에 제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포트를 알려 주세요.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알렉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구요? 모니터링프로그램과 에디터 루틴이라구요? 더구나 이 바이러스의
백신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렉은 흥분한 듯 혜영을 불렀다. 그리고 혜영의 노트북 컴퓨터를 받아들었고
혜영은 재빨리 알렉 옆에 앉았다.
"어서 빨리. 이 컴퓨터와 노트 북을 접속시켜 주세요."
혜영의 말에 따라 알렉이 컴퓨터 포트에 선을 꼽자 다시 노트 북에 떠 올라있
던 모니터링 루틴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거미와의 싸움(2)
이미 준후는 세 번, 박신부는 두 번이나 컴퓨터 안에 깃들여 있는 그 영의 자취
를 발견하고 영적인 조치수단을 강구해서 영기를 지워버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애
당초에 영이 바이러스에 깃들어 있어서 그런지 지금 나타나는 현상은 대단히 특이
했다. 한번 영기를 지워나가도 또 다른 곳에서 곧 영기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박신
부가 화도 나고 지치기도 한 듯 노한 목소리로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아무래도 이 상태로 가면 끝이 없을 것 같구나.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은 그 원한령이 아니라 원한령이 만들어낸 원한이 깃든 염체 같은 것 일 뿐이야.
이것은 원한령 자체가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니 원한령을 없애 버려야 될 거야."
준후가 또 다시 부적하나를 태우며 박신부 말에 고함치듯 대답했다.
"저두 알아요. 그러나 어디 어떻게 숨어 있는지 느껴지지 않아요. 너무 복잡해
서. 이런 참."
승희도 눈을 감은 채 계속 그 원한령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자
정말 이곳에 그 원한령의 사념이 집중되고 있는 것처럼 굉장히 많은 메시지와 영
상들이 두서없이 섞여서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해."
박신부와 준후 그리고 승희가 한쪽에서 애를 쓰고 있는 동안 혜영과 알렉은 노
트북 컴퓨터를 통해서 바이러스를 잡는 백신프로그램을 메인 컴퓨터에 밀어 넣으
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연희와 현암은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
었다. 다만 연희가 혜영과 알렉이 주고받는 대화를 조금씩 작은 목소리로 중
“ 들려줄 뿐이었다.
"혜영 씨가 지금 자기가 아까 만들었던 백신프로그램을 옮기고 있는 중이에요.
아직 거미바이러스가 침투하지 않은 옆의 서브 컴퓨터를 통해서 메인 컴퓨터에 있
는 엄마 거미를 잡는 다는군요."
컴퓨터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현암은 망연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신은 영적인 힘도 별로 없고 주로 싸우는 것을 본업 비슷하게 했던 참이라 지금
상황에 별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기지 않자 답답하고 성질이 폭발할 것 같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뭔가 자신도 도움 될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웅얼거리면서 현암은 성질을 죽인 채 혜영과 알렉이 하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혜영은 노트북 컴퓨터를 열심히 조작하여 몇 번이고 키를 눌렀으나 생각대로 작동
이 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 역력했다. 알렉이 무어라 소리쳤고 연희가 그 내용
을 현암에게 일러주었다.
"백신이 이상하게 들어가지 않는다는군요. 분명히 들어가지 않을 다른 이유가
없는데 메인 컴퓨터 가 잘 받아들이 않는대요."
"무슨 소리지?"
"자꾸 에러가 난다는군요. 전혀 이유가 없는데."
"이유없이 프로그램이 들어가지 않는다구?"
현암은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저만치에서 승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영기, 영기가 매우 짙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준후도 소리를 쳤다.
"신부님 저쪽. 저쪽으로 도망친 것 같아요. 저쪽에서 지금 놈이 뭔가 안간힘을
쓰고 있어요."
준후가 가리키는 쪽에는 메인 컴퓨터의 본체가 있었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
에는 오만가지 장비가 널려 있어서 덩치 큰 박신부가 금방 뚫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현암의 머릿속에 희뜩 어떤 생각이 지나쳐 갔다. 지금 저 원한령은 바이러스 코
드의 랜덤 넘버를 조작해서 자신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바이러스 코드의 작동을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들었었다.
"그럼 저 백신 프로그램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원한령의 짓이 아닐까?"
순간적으로 생각한 현암은 박신부와 준후를 향해 소리쳤다.
"그 원한령인지 하는 놈을 잡아 버려요. 어서! 놈이 뭔가 방해하고 있어서 프로
그램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요."
박신부가 이 이야기를 듣고 성수 뿌리개를 꺼냈다. 그리고 현암에게 소리쳤다.
"놈이 지금 어디에서 방해를 하고 있다는 거지?"
"메인 컴퓨터! 바로 이거예요!"
현암이 손짓으로 자신에게서 약간 떨어진 커다란 컴퓨터 본체를 가르쳤고 그러
자 박신부는 멀리서 기도문구를 외우면서 메인 컴퓨터를 향해 성수를 뿌렸다. 옆
에 있던 몇몇의 프로그래머들은 박신부가 성수를 뿌리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일부는 킥킥거리면서 웃기까지 했지만 박신부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성수 뿌리개
를 흔들어 성수를 메인 컴퓨터에 뿌렸다. 그러자 갑자기 고통을 느끼는 듯한 울음
소리 같은 것이 준후에게 느껴졌다.
"맞아요! 틀림없어요! 신부님 계속하세요. 그리고 승희누나 날 좀 도와줘요."
승희는 눈을 감고 준후에게 힘을 몰아보냈다. 준후가 우보법으로 두 발짝 방위
를 밟으면서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소리를 쳤다.
"덧없는 원한으로 수많은 사람을 해치려한 나쁜 자! 어서 나와!!"
준후는 프로그래머들을 의식해서인지 이번에는 뇌전이나 멸겁화 같은 눈에 보
이는 기운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연기를 잔뜩 컴퓨터 쪽으로 불어넣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상당히 큰 기계였고 준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무지
막지하게 힘을 있는 대로 뽑아서 컴퓨터 쪽으로 밀어 대면 알아서 영이 뛰쳐나오
리라 여겨졌다. 한참 몇 초 동안 어마어마한 영력을 컴퓨터 안에 밀어 넣자 폭발
하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한남자의 영 같은 것이 컴퓨터 안쪽에서 뛰쳐나오는 것
을 준후는 분명히 보았다.
"이놈."
준후는 숨이 가빠 하면서도 붉은 종이로 만들어진 흡령부를 허공에 던졌다. 부
적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날다가 메인 컴퓨터 위쪽의 공중에서 덜컥 정
지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지만 흡령부가 원한령의 보이지
않는 몸에 달라붙은 것이었다. 준후의 눈에는 흡령부에 정통으로 맞은 원한령이
뭔가 아우성을 치면서 부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영이 부적으로 빨려
들어가자 종이는 다시 나풀거리며 땅으로 떨어졌고 준후가 그것을 재빨리 나꿔채
어 소매 자락에 넣으며 미소를 머금고 다시 소리를 쳤다.
"와! 하하! 이제 잡았어요! 다시 해보라고 하세요!"
현암은 준후의 말하는 것을 듣고 혜영에게 다시 소리쳤다.
"다시 해봐요. 백신프로그램인지. 뭔지. 작동해봐요."
"잘 안 된단 말이에요!"
혜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현암이 낮은 음성으로 천천히 다시 말했다.
"지금 영을 잡았어요. 준후가 영을 잡았으니 이번엔 방해받지 않을 거예요. 어서
다시 해봐요."
혜영은 거의 보이지 않는 손놀림으로 노트북의 키를 빠르게 조작했다. 그러자
모니터링 루틴이 뭔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 커서가 깜박깜박하면서 노트북 컴퓨터
가 활발히 작동하는 것이 보였다.
호 하는 소리를 냈고 혜영
도
회심의 미소 같은 것을 얼굴에 떠올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얼굴에는 이를 부득부
득 가는 것 같은 분노의 표정과 좀 잔인(?)해 보이는 미소가 같이 떠올랐다. 초조
하게 혜영은 컴퓨터 엔터키 부분에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마침내 백신 프로그
램이 메인 컴퓨터로 들어가는 것이 성공했는지 커서가 떨어지자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죽어랏! 엄마거미!"
혜영이 소리를 치며 거의 주먹으로 치듯 노트북 컴퓨터의 엔터키를 쾅하고 누
르자 옆에 있었던 메인 컴퓨터에 떠올라 있던 거미 그림이 휙 하고 꺼져버리는 것
이 들렸다.
"된 건가?"
현암과 연희는 초조히 메인 컴퓨터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혜영과 알렉은 핼쑥
한 얼굴로 계속해서 노트북 컴퓨터에 떠올라 있던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보다가 갑
자기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어떻게 된 거예요?. 성공했나요?"
혜영이 거의 눈물을 흘릴 듯이 함박 웃으며 재잘거렸다.
"네에. 성공했어요! 컴퓨터에 있는 엄마거미는 지금 새로 포맷되고 있는 중이에
요. 메인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장악되면 제일 먼저 백신 프로그램부터 다시 주입
하고……. 그러고 나면 다시 거미바이러스가 침투할 수 없을 것이고……. 하여튼
이제 잘되어 가는 것 같아요."
혜영은 말하면서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에 떠올라 있는 글자들 중에 한 줄을
가리켰다.
"엄마거미 삭제됨."
연희가 그 문구를 현암에게 말해주며 미소를 띄었다. 현암도 기분이 좋아서 준
후와 박신부에게 소리를 쳤다.
"신부님, 준후야 이제 그 바이러스는 없어졌어. 염려하지 말라구."
현암의 말을 듣고 박신부와 준후는 부산하게 돌아다니던 움직임을 멈추고 현암
을 쳐다보았다. 준후가 잠시 후 망설이듯 이야기를 했다.
"어……. 이상한데. 원한령을 잡았으니 나머지 바이러스에 있던 영력도 사라졌어
야 하는데 뭔가 다른 것이 느껴져요."
현암이 눈을 크게 떴다.
"응?. 그럴 리가!"
박신부가 이야기했다.
"혹시 아직 주변장치 같은 곳에 그 기운이 남아서 그런 건 아닐까?"
말하고 있는데 준후가 다시 고함쳤다.
"이상해요. 아까 것보다는 조금 다른 성격이에요 원한령 혼자만의 영력이 아니
라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것도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 이상해요 미쉘
이라던 남자의 기운. 느낌 같은 것이. 어 이게 도대체 뭐지?. 다시 한번 살펴보세
요."
준후의 말을 알아듣고 현암이 눈을 크게 뜨고 혜영을 쳐다봤다. 왠지 몸에 소름
이 끼치는 것 같았다. 혜영도 준후의 말을 알아듣고 이상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러나 모니터의 루틴은 분명히 엄마 거미가 죽었다고 나와있었다.
"이상하군요. 엄마거미는 분명히 죽었어요."
혜영은 재빨리 몸을 돌려 메인 컴퓨터의 키보드를 몇 번 두들겼다. 그러자 잠시
후 메인 컴퓨터에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프롬프트가 떴다. 혜영은 심심풀이로 몇
자 쳐서 엔터를 눌러 보았다. 정상적으로 입력이 되는 것 같았다.
"분명히 됐어요.엄마거미 프로그램은 완전히 지워졌는데."
혜영이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알렉이 무어라 소리치면서 놀란 듯 노트북 컴퓨
터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희도 따라서 알렉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글이 익살스레 깜박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현암이 연희에
게 물었다. 연희가 얼굴이 하얗게 된 채로 이야기했다.
"원 세상에. 저건."
"뭔데?"
"아빠거미. 아빠거미…….아빠거미는 껍질만 있어도 죽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9. 거미의 최후.
"뭐라고? 아빠거미?"
현암이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승희가 벌떡 일어났다.
"연희언니……. 그 노래.미쉘이 중얼거리던 그 노래."
승희의 말을 듣고 연희도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어제 정신이 나간 미
쉘이 자신들을 공격하면서 계속 흥얼거렸던 그 노래! 엄마거미가 아빠거미를 잡아
먹었지만 아빠거미는 껍질만 남아서 계속 엄마 거미를 쳐다보고 나중에 큰 소리로
웃는다는 그 노래!
'그렇다면 미쉘이 흥얼거리던 노래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단 말인가? 만약 그
것이 미쉘이 엄마거미 프로그램을 만들고 또 다른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는 것을
암시하던 노래였다면……. 그렇다면 엄마거미가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모
니터링 루틴이란 게 바로 아빠거미!'
연희의 몸에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만약 그렇다면…….
혜영이 알렉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시 노트북이 있는 곳으로 와서 노트북을
미친 듯 만져보더니 소리를 쳤다.
"아니 이럴 수가."
"뭐에요?"
현암이 혜영을 보고 소리치자 혜영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
었다.
"모니터링 루틴 자체에도 바이러스가……. 이건 엄마 거미도 아니고……. 도대체
이건 뭐지. 이것도 거미바이러스 일종은 틀림없는데……. 이건……. 이건……."
혜영이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컴퓨터를 검색했다.
"아빠 거미인 것 같아요! 엄마 거미가 완전히 죽을 것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아!! 이럴 수가. 이 모니터링 프로그램 자체도 일종의 함정이었어요. 엄마 거미를
잡으려면 이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미쉘은 미리 생각했나봐
요. 그래서 거기다 또 다른 변종의 거미 바이러스를 아예 넣어둔거예요. 이건."
혜영의 말을 듣고 연희는 미쉘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 Rira bien qui rira le dernier. (최후에 웃는 자가 정말로 찝v
알렉은
미친 듯이 제라르와 함께 서브 컴퓨터로 가서 서브 시스템을 점검해 보
기 시작했다. 알렉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메인 컴퓨터 쪽에서 이 서브 시스템으로 미친 듯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고 해요!"
혜영이 소리쳤다. 혜영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신
음 같은 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큰일이에요. 내가 만든 백신은 엄마거미에 대항하는 것뿐이에요. 이 아빠거미.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요. 아…….도대체 이걸 만든 놈은……."
혜영은 발작적으로 다시 메인 컴퓨터 쪽의 키보드 쪽으로 가서 마구 키보드를
두들겨 보았으나 그새 아빠거미에게 장악되었는지 메인 컴퓨터는 혜영의 노력에는
아무 동작도 하지 않은 채 멍청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컴퓨터에 장비 되어 있
던 모든 작은 전구들은 활발히 깜박거리며 메인 컴퓨터 내에서 아빠거미가 안에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조롱하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현암이 소리쳤다.
"도대체 어떤 일이에요?"
"지금 저 서브시스템은 알렉이 걸어놓은 패스워드로 보호되고 있어요. 그런데
패스워드는 6자 짜리에요. 영문자 6개면 3억개의 조합이 가능한데 지금 이 메인
컴퓨터에 들어간 아빠거미 바이러스가 그것을 풀려고 하고 있어요."
"3억 개요? 그 3억 개의 조합을 풀려면 시간이."
"아니에요. 얼마 되지 않아요. 아! 도대체 어떻게 하나!. 이 메인 컴퓨터에 부착
되어있는 8개의 패러렐(병렬)포트는 1초에 1메가 바이트의 데이터가 전송이 가능
해요 1초에 1백만 바이트씩 8개의 포트가 모두 지금 저 서브 시스템으로 연결되고
있어요 3억개의 조합이 있다고 해도 1초에 100만개씩 전송할 수 있는 8개의 포트
로 패스워드를 푼다면 5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아니, 8개의 포트에 분산해서 보낸
다면 3분! 2분밖에 안 걸릴지도! 이럴 수가. 도대체 시간이."
"뭔가 방법을 생각해 봐요."
"그럴 수가 없어요. 이 메인 컴퓨터는 저에 대해선 지금 완전히 고물이에요."
알렉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서브시스템 쪽의 키보드를
미친 듯 두드리고 있었다. 아마 패스워드의 숫자를 늘려서 방어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2-3분안에 프로그램을 고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영이 다시 신음 소리
같은 어투로 . 그러나 높고 빠른 말투로 소리쳤다.
"엄마 거미라면 주로 모뎀 선과 시리얼 통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너무 시간이
걸려서 패스워드를 풀어낼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이 놈은 아예 패러렐포트를 집
중해서. 아 어떻게 이걸. 얼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5분도 최대한의 수치
고 일반적으로 따지면……. 아 3분도 채! 이젠 1,2분밖에 안 남았는데. 아 이것을…
…."
알렉은 무어라 소리를 쳤고 제라르가 다시 달려왔다. 제라르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몹시 당황한 듯 계속 고함을 치고 있었다. 연희가 다급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현암에게 말했다.
"제라르 씨도 소리치고 있어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저 데이터들을 지켜야
한다고. 지금 사태가 몹시 급해요. 저 데이터 마저 침입 당한다면 수백 명의 환자
들의 목숨은 …….어떻게 하든지. 저 컴퓨터를 지켜야 한다고."
"전기를 끊으라고 해요!"
"전원도 통제가 안 돼요! 주 전원실까지 가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혜영의 소리를 듣고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자기는 뭐가 뭔
지 하나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컴퓨터에 대해선 잘 몰랐으니까…….그렇지만…….
제라르가 마구 소리를 치면서 땅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연희가 재빨리 현암에
게 들려주었다.
"선로를 끊어야 한대요! 그쪽으로 패러렐포트 선 하나가 지나가는 모양이에요."
프로그래머들이 그쪽으로 달려들어서 땅바닥에 철판으로 막혀있는 부분을 떼
기 위해서 마구 달려들고 있었으나 나사를 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다.
현암이 입술을 깨물고 월향검을 빼 들고 그곳에 뛰어들었다. 손을 저어 다른 사람
을 밀어 낸 다음 현암은 월향검에 공력을 집중했다. 검기가 칼 끝에서 쭉 뻗어 나
오자 현암은 그대로 월향검을 땅에 그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철판이 갈라
지며 불똥이 튀고 땅에 깊은 칼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저쪽에서 혜영은 고개를 저
었다.
"더 깊이 들어가 있어요. 선로가 차단되지 않았어요!"
현암은 이를 악물고 다시 또 한번 칼을 그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혜영이 소리를
질렀다.
"하나는 끊어 졌어요. 그러나 아직 일곱 군데나 남아 있어요!"
제라르는 지금 어떻게 해서 현암이 조그만 칼로 콘크리트 깊이 묻혀 있는 선
로를 끊어 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좌우간 감탄의 소리를 지르며 다른 선로가 어
느 쪽으로 개설되어 있는지 찾고 있는 듯했다. 현암은 두리번거리는 제라르의 얼
굴을 보고는 다시 혜영에게 물었다.
"혜영 씨. 이쪽으로 선로가 다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요?"
"아이구. 아닌 거 같아요. 8개 모두가 분산되어서 ."
시간이 없었다. 8개 선로를 모두 차단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제라르가 그 선로가
지나가는것도 정확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제라르는 뭔가 생각을 하려는 듯 머
리를 쥐어뜯다가 기억이 나지 않는지 하늘에 대고 비탄에 가까운 소리를 울부짓듯
이 내뱉었다.
"저 데이터들은 수백 명의 목숨이 달린 거예요. 무슨 수가 있어도 저 데이터들
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만."
"무슨 수가 있어도…….말인가요?"
현암은 다시 중얼거리며 월향검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현암의 머리
속에 뭔가 하나 잡히는 것이 있었다.
'급할수록 냉정해라.'
현암은 다시
깨물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사람들
과 그리고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있는 각종 기기 들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현암의 머리 속에 뭔가 희뜩 하고 스쳐지나갔다. 현암은 어쩔 줄 몰라서 거의 울
음을 터뜨리려 하고 있는 혜영에게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혜영 씨 빨리 대답해 줘요!"
"아……. 지금 무슨 방법이."
"어서 대답해줘요! 급합니다! 지금 이 메인 컴퓨터는 아빠거미에게 완전 장악된
겁니까?"
"예! 도대체 손을 쓸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저 중요한 데이터가 백업되어서 보관되어 있다는 그 서브시스템은
메인과는 별개로 작동이 가능한 거죠?"
"네에. 두개는 거의 완전히 독립된 시스템이죠. 그러나 거기 연결돼 있는 포트들
을 제거할 수 없어요. 이 안쪽으로 깊숙이 땅속으로 선로가 개설되어 있는 것이고
숫자가 8개 . 그걸 한꺼번에 제거한다는 것은……."
말하는 새 알렉이 고통스러운 비명소리 같은 것을 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혜영도 비명을 올렸다.
"아악! 서브시스템의 패스워드가 풀린 것 같아요! 이젠 10초도 채……."
현암은 다시 눈을 돌려 먹통이 되어버린 메인 컴퓨터의 옆에 있는 본체를 바라
다보았다.
"이것이 아빠거미가 잡고 있는 메인 컴퓨터입니까?"
"네에. 맞아요.그렇지만 그것은…….이제 고작 5초!"
"좋습니다."
현암이 갑자기 허공에 대고 고함을 쳤다. 공력을 모으느라 집중하는 소리인 것
을 눈치채고 멍청히 혜영의 말에만 기울이고 있던 박신부와 승희, 준후는 현암을
쳐다보았다. 프로그래머들도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의
몸에서 넘칠 듯한 공력이 피부를 통해 전달될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고 그 힘은 모
조리 현암의 오른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뒤에서 연희가 놀라서 말했다.
"현암 씨!"
현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현암은 공력을 가득 넣은 오른손 주먹으로
메인 컴퓨터를 있는 힘을 다해 내려치는 것이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사람들은 현암의 난데없는 행동에 더욱더
놀랜 모양이었고 알렉은 거의 기절할 듯 놀란 모양이었다. 혜영은 의자에 힘없는
듯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옆에서 현암이 메인 컴퓨터를 단 한방에 박살내는 것을 보
고 놀란 나머지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메인 컴퓨터는 현암의 혼신의 공력을 다한 주먹. 단 한방에 거의 두 조각이 난
고철덩어리로 되어서 여기저기서 피식피식하는 연기 같은 것만 약간 베어 나오는
고물로 변해 있었다. 현암의 주먹 한방이 거의 사람 만한 크기의 메인 컴퓨터를
그대로 납작하게 눌러 버린 것을 보고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동안이나 멍
하게 있을 뿐이었다. 이 시스템의 담당자라는 제라르가 한순간에 십년은 늙어버린
듯한 얼굴로 비척거리면서 현암에게 다가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 이건 도대체 말도 안. 안."
현암은 한숨을 한번 내쉬면서 조용히 혜영을 한번 보면서 물었다.
"이러면 메인 컴퓨터에 있는 아빠 거미 프로그램도 사라졌겠지요?"
혜영은 멍한 듯 촛점없는 눈으로 현암을 한동안 올려보다 거의 무의식 적으로
초점조차 없는 눈으로 다시 알렉이 뒤로 나빠진 채 쓰러져 있는 모니터 쪽을 다시
주시해 보았다. 그 쪽의 컴퓨터는 아직 활발히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네에. 서브시스템은 무사. 무사.한데. 그런데. 이건 이…… 컴퓨터는……."
현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연희가 갑자기 활짝 웃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
다.
"그렇다면 됐어요. 데이터는 지켰고. 암환자들도 계속……."
현암은 아무말도 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연희도 이야기를 멈추고 현암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담당자라던 제라르는 어지러운지 등을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고 알렉은 조각상처럼 서서 정말 꼼짝도 하지 않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서 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던 프로그래머들도 모두 다 반
은 울음이 터질듯 하고 반은 정신이 나간 멍한 듯한 표정으로 이미 완전히 찌그러
져 버린 메인 컴퓨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신부가 다가와 현암의 어깨를 살짝
치며 씩 웃었고 저만치에서는 준후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현
암은 아무 표정 없는 바위 같은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찌그러진 메인 컴퓨터
를 내려다보며 다른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