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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폭행하는 장면이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촬영되고 그것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나라가 어수선한 적이 있었어요. 휴대전화에 카메라와 동영상 기능이 생기면서 알려지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사람들은 어디서나 남의 휴대전화에 내 얼굴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불쾌감을 불현듯 떠올렸지요. 이 외에도 신용카드, 인터넷 거래, CCTV(폐쇄회로 TV) 등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별다른 의심이나 불만 없이 이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 우리나라 인터넷 판매업체 옥션에서 대량으로 개인정보가 유출돼 피해 당사자들이 힘을 합쳐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있었어요. 내 허락도 없이 나의 정보가 어딘가로 흘러들어가 도용된다면 참으로 불쾌할 거에요. 혹여 나쁜 용도로 이용된다면 더더욱 큰일 날 일이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계산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신용카드도 내 돈을 내맘대로 쓰는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돈의 쓰임새를 들킨다는 찜찜한 구석이 있습니다. 또 국회에선 상습 성범죄자에게 전자발찌 착용 문제가 거론됐는데 이 법이 통과되기 전에 인권침해 논란이 있었답니다.
즉, 전자발찌를 착용하게 되면 그 사람의 위치가 일일이 경찰의 컴퓨터에 표시되어 그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감시당한다는 이유였지요. 성범죄에 노출된 어린이와 부모의 인권은 없느냐는 반론이 커서 전자발찌 착용은 올 9월부터 시행될 예정입니다.
또 엘리베이터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CTV는 범죄현장을 화면으로 남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부산시에서도 CCTV 시설을 통합 구축해 경찰과 자치단체가 정보를 공유한다(본보 6월 25일자 12면 - CCTV '정보고속도로' 탄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범죄 및 사고가 발생했을 때 발생지역 주변의 상황과 범인의 이동경로에 대한 동영상 확보, 그리고 영상정보의 통합 활용으로 종합적인 대처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1단계로 20억원을 투입해 시내 150∼200여개 장소에 CCTV를 부산지방경찰청과 공동으로 올해 11월까지 설치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경찰 뿐만 아니라 지자체도 함께 시민의 행동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네요.
그런데 CCTV가 많이 설치된다고 하니 여러분은 안심이 되나요, 아니면 어디서든 내가 CCTV에 찍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움츠러드나요?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혹은 그러한 사회체계를 일컫는 '빅 브라더'라는 말이 있어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소설은 절대 권력을 가진 자들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를 감시하며 이는 사회 곳곳에, 심지어는 화장실에까지 카메라를 설치해 심각한 사생활 침해를 벌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작가는 인간이 기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상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작가의 통찰력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음을 위의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 사회에는 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게는 비양심적인 쓰레기 무단 투기나 남의 자동차를 몰래 흠집 내어 피해 주는 일을 비롯해 지하철 안이나 버스 안에서의 성추행, 어린이 유괴, 은행 강도, 살인 등 무시무시한 사건·사고가 늘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줄이거나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CCTV 촬영이나 카드 기록 등이라면 나의 사생활이 좀 훼손되더라도 참을 수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또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한 예술작도 있습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이죠. 이 작품은 실제 1983년 12월 31일부터 1984년 1월 1일 사이 TV로 미국, 유럽, 한국 등의 현재 모습을 동시 분할 화면 등의 표현 방법을 통해 실시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가 매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미디어 작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그의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TV의 긍정성, 또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예견한 것이지요.
날로 진보하는 과학기술의 결과물을 사용하는 우리 사회가 자유를 향한 개인의 인권 존중이 더 중요한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더 필요한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윤영이 한국언론재단 미디어교육 강사
전자발찌법은
지난해 12월 안양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해사건 이후 법무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해 온 아동 성폭력사범 대책을 담고 있는 핵심 법안 가운데 하나. 전자발찌법은 재범 위험이 있는 13세 미만의 아동 상대 성폭력범죄자에 대해 최장 10년간 전자발찌를 부착해 현재 위치를 추적하는 방안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전자발찌는 성범죄자의 위치와 심장박동수가 갑자기 빨라지는 등 이상 징후를 보이면 이를 경찰에 즉각 통보하는 기능을 한다. 시행시기는 오는 9월 1일.
이밖에 성폭력사범 대책으로,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13세 미만의 아동을 강간하는 경우 징역 5년 이상에서 징역 7년 이상으로 올렸다. 치료감호법은 소아성기호증 등 정신성적 장애를 가진 범죄자를 15년 범위 내에서 수용·치료할 수 있는 치료감호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다.
조지오웰의 '1984년'-전체주의 본질 그려
11/23 19:58
조지 오웰의 「1984년」
조지 오웰의 「1984년」은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다. 2차대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48년 36년 후의 세계를 묘사했으니 픽션이고, 완벽한 전체주의를 「설계」했으니 정치소설이다.
만년에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지난 10년 동안 가장 열망해 온 것은 정치소설을 예술 수준으로 승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전쟁과 소비에트의 철저한 전체주의, 그리고 자신의 결핵이라는 절망적 순간에 「동물농장」(45년)이라는 풍자소설을 쓰고 대망의 예술적 정치소설인 「1984년」을 48년에 집필했다. 이 소설은 곧 세계 각국에 번역돼 베스트셀러로 군림했다. 미국에서만도 400만부 이상이 팔렸다.
「1984년」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당의 독재정치에 무력하게 반항하다 그의 사랑도 허무하게 죽고 스스로 세뇌되어 불 꺼진 재처럼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는 줄거리일 뿐 작품 주제나 독자가 받는 감명과 관계가 없다. 작가는 완벽한 전체주의를 그려 그 잔학성과 문제점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오웰이 상상한 1984년의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3대 초강대 국가군으로 정립한 무한 전쟁의 세계이다.
오세아니아 사회에는 두가지 정치철학만 존재한다. 사상통제와 과거통제. 사상통제는 거리, 방, 화장실에까지 설치된 감시 스크린과 「신어(新語)」체계로 이루어진다. 신어체계는 평화 자유 같은 전체주의에 반하는 말을 완전히 없애버린 새 언어다. 과거통제는 모든 기록의 날조를 통해 이뤄진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 작가 E. 자마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20세기에 나온 3대 「디스토피아(부정적 미래) 문학」으로 꼽힌다. 1920년대 작품인 「우리들」은 동구 관료독재체제의 공포, 1930년대에 나온 「멋진 신세계」는 과학만능주의로 인한 사회의 변질을 그린 것이다.
그의 예언은 어떤 면에서는 맞고 어떤 면에서는 틀렸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본질을 어느 작품보다도 적나라하게 그린 소설이라는 평가는 계속될 것이다. ▦조지 오웰
소설가이자 비평가. 본명은 에릭 블레어. 인도 벵골에서 세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영국으로 귀국했다. 장학생으로 이튼교를 졸업했으나, 대학에 가지 않고 곧바로 버마의 경찰관이 되어 식민지를 경험했다. 45년 아내를 잃고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런던 소재 병원에 입원, 「1984년」을 완성했다. 작품으로 소설 「파리와 런런 안팎에서」 「버마시절」 「목사의 딸」등. <빅브라더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는 빅브라더(Big Brother)는 긍정적 의미로는 선의 목적으로 사회를 돌보는 보호적 감시, 부정적 의미로는 음모론에 입각한 권력자들의 사회통제의 수단을 말합니다. 즉 "정보의 독점과 일상적 감시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감시 권력"을 의미합니다. 빅 브라더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은 우리 삶 속의 빅브라더를 정확히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소설 《1984년》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소설 속의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합니다. 이 는 사회 곳곳에, 심지어는 화장실에까지 설치되어 있어 실로 가공할 만한 사생활 침해를 보여줍 니다. 음모론에 입각하여 재해석하자면, 사회의 희망적 권력체제가 아닌 독점권력의 관리자들이 민중을 유혹하고 정보를 왜곡하여 얻는 강력한 권력의 주체가 바로 빅 브라더의 정보수집으로 완 성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빅브라더상이 있다고도 들은 적이 있는데... 빅브라더상은 프라이버시 침해에 가장 기여한 기관 혹은 개인에게 시상함으로써, 프라이버시 침 해 내용을 정확하게 밝히고, 사회에 널리 알리며,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놓기 위한 행사입니다. 또한, 빅브라더상 행사를 계기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는 사업이 중단 혹은 변경되거나, 정 부와 기업들이 프라이버시 보호에 좀 더 노력할 수 있도록 촉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지 오웰에 대해서> 조지 오웰(영어: George Orwell)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에릭 아서 블레어(영어: 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는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20세기 영어권의 가장 중요한 소설가, 비평가, 정치평론가 중 한명으로 영어권에서 광범위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만년의 두 소설 《동물 농장》과 《1984년》으로 특히 유명해졌다. 1950년에 오랫동안 앓아 온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창시절 에릭 블레어는 1903년 6월 25일에 당시 영국령이던 인도의 벵갈에서 태어났다. 에릭의 아버지인 리처드 블레어(Richard Walmesley Blair)는 식민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 이다 블레어(Ida Mabel Blair)는 에릭이 두 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에릭은 아버지가 3개월간 영국에 돌아왔던 1907년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이름의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가족에 대해 묘사하기를 '하층-상층-중산층'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에릭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추남이었으나 맑고 푸른 눈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6살 때 에릭은 누나가 다니던 헨리온템즈의 성공회 유치원에 보내졌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회고한 적이 없으나 그는 선생님들이 좋게 본 학생이었으며 2년 뒤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추천되었다. 서섹스에 위치한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좋은 예비학교 중 하나였다. 에릭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반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이곳을 마치고 웰링턴과 이튼 스쿨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웰링턴에서 1년을 마치고 에릭은 이튼 스쿨로 옮겨갔다. 그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왕립 장학생이었다. 훗날 오웰은 상당한 자율을 허용했던 이튼 스쿨 시절을 '그런대로' 행복했다고 회고했지만, 입학 후 공부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튼에서의 그의 학업에 대한 평가는 바보 같은 학생이었다는 것과 훌륭한 학생이었다는 것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몇몇 교사를 에릭은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오웰은 훗날 에세이 '기쁨은 그 정도로 컸다(Such, Such Were the Joys)' 에서 이튼의 교육에 대해 '(아는 척 할 줄 아는) 신용 사기를 향한 과감한 준비'만을 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결국 그가 이튼을 졸업할 무렵에는 167명중 138등을 할 만큼 성적이 신통치 못했다. 이 성적으로는 옥스퍼드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식민지 관료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이튼에서 훗날 자신의 지기들이 되는 친구들을 몇몇 사귀었다. 그중 싸이릴 코놀리는 잡지 '호라이즌'의 편집자가 되어 오웰의 유명한 에세이 대부분을 출간해주었다. 오웰은 어린 시절 계급차별을 느낀 경험이 있었으며 이튼에서는 그것을 더욱 체계적으로 인식했다. 그는 약하고 못생겼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했다. 어려서 형성된 실패한 인생이라는 감각은 그가 평생 동안 가졌던 것이었다. 이튼의 생활에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이튼의 교육은 학생들을 식민 관료, 군인, 제국주의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아직 에릭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버마의 나날 에릭은 이튼에 진학할 성적도 여유도 되지 않았으므로 버마에서 인도 제국 경찰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총독부 시험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1922년 인도 제국 경찰 간부 후보로 합격하였다. 그는 당시 인도 제국 내의 한 주였던 버마(현 미얀마)를 부임지로 선택하였다. 당시 버마는 90명 정도의 영국인 경찰 간부가 13000명 정도의 현지인 경찰을 관리했고 그들이 13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장악했다. 에릭은 미얀마에서 다른 영국인 간부들이 영국식 사교생활을 즐기던 것과는 달리 고독하게 지냈고 가끔 사창가를 찾았다. 그는 미얀마어를 쉽게 익혀 사용하였으며 훗날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그의 글들에서 미얀마어의 표현들을 구사했다. 에릭이 가혹한 식민통치자는 아니었으나 불교 승려들과 매춘부들에 대해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고 이는 훗날 제국주의자임을 거부했던 글에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체화되어 있었다. 그는 5년간이나 식민 관료 생활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깊은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1927년 휴가차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아버지가 35년간 근무하여 가족이 '중류 생활자'로 지내게 해준, 그리고 자신에게 5년간 영국 신사로 지낼 수 있는 신분을 차버린 것이다. 가족의 반대가 당연하였으며 그는 글로서 먹고살겠다고 선언하며 집을 나와 런던의 빈민가인 노팅힐에서 자취를 시작하였다. 오웰의 두 번째 저서인 '버마의 나날'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비극적인 로맨스가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반제국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파리아 런던의 밑바닥 생활 1928년에 그는 이모가 살던 파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살 생각을 하고 건너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몇몇 잡지에 기고할 수 있었지만 종종 접시닦이로 하루 13~17시간동안 일해야 했다. 1929년에 돈도 없고 병이 들어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버마의 나날'을 쓰기도 했지만 그는 수시로 나가서 밑바닥 생활을 하곤 했다. 가정교사 일을 잠깐 했고 집에서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그는 그 와중에 잡지 '뉴 아델피'의 정규 기고자가 되었다. '뉴 아델피'는 대중적 사회주의를 불러일으킨 주요 잡지 중 하나였으며 1935년까지의 오웰의 글 대부분이 발표되었다. 1931년 그는 다시 밑바닥 생활을 하였다. 런던의 빈민가에서 홈리스 생활을 하고, 켄트로 가서 홉 줍기 노동을 하루에 열 시간씩 3주간 한 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서 호손즈 학교의 교장 자리를 얻어 1933년까지 근무한다. 그는 이 시기에 엘리노어 자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오웰은 1933년에 그의 첫 번째 저서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출간한다. 오웰은 여기서 처음으로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가 작가로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고 가족들이 놀라지 않도록 선택한 것이다. 그는 서포크의 오웰 강을 좋아했고, 또 조지는 너무나 평범한 이름이었기에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한동안 기고문에는 계속 에릭 블레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는 그의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다. 첫 번째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순들을 묘사함에 있어 매우 신랄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밑바닥 생활을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와중에 런던의 속어와 욕설을 정리해둔다거나 구빈원 시스템의 모순을 치밀하게 폭로하는 등 다층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오웰다운 위트가 곳곳에 넘친다. 엽란을 날려라 1933년 말에 '버마의 나날'을 탈고하였으나 미국에서는 34년 10월에, 영국에서는 35년 5월에 겨우 출간되었다. 명예훼손 위험이 있어서 출간 자체가 어려웠고 출간 이후에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비해 호의적이지 못한 평가와 판매고를 올렸다. 오웰은 탈고 직후 폐렴에 걸려 교사 생활을 그만두었고 바로 세 번째 저서인 '목사의 딸'을 쓰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부터 오웰은 고서점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점의 회상', '책값 대 담뱃값', '좋으면서 나쁜 책'(문제가 있지만 그럭저럭 읽을 만한 책) 등의 에세이에서 책에 대한 애정을 밝혀놓은 바 있다. 이 시기에 오웰은 시 창작에도 주목하여 '아델피'에 발표하곤 했는데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5년 3월에 출간된 '목사의 딸'은 교구 목사관이나 여학교의 일상에 대해 사회학적인 분석에 가까운 묘사가 담겨있다. 출간당시 감상적인 중류계급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훗날 스스로 '어리석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쓴 창작품'이라고 혹평했지만 상업적으로는 괜찮았다. 1935년에 오웰은 '엽란을 날려라'를 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이 많이 반영된 소설로 주로 고서점 시기의 경험과 엘리노어와의 사랑이 그것이다. 영국 중류계급의 위선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한 것으로 '목사의 딸'처럼 모호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6년 초에 오웰은 빅토르 골란츠의 의뢰로 영국 북부의 공업지대 실업자에 대한 책을 의뢰받았고 그 결과물은 1937년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로 출간되었다. 1부는 과도한 공업화로 피폐해진 랭커셔와 요크셔의 생활실태와 가계조사 등으로 이루어져있고 2부는 자신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왜 사회주의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맞추어 서술되어있다. 이 책은 '좌익 독서 클럽'을 위해 쓰여진 책이었지만 골란츠는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포함된 것을 우려하여 그것을 해명하는 서문을 포함하여 출판하였다. '좌익 독서 클럽'은 문고본에 가까운 가격으로 가입자들에게 책을 공급하는 회원제 단체로 당시 영미권 사회주의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주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북부의 석탄이 북부 사람들을 어떻게 착취하여 남부에 부를 가져다주는지, 그리고 왜 민중들에게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 지지를 받고 있는지, 맑시스트들이 얼마나 교조적인 태도로 민중들과 동료들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서술하며 맑시스트들의 맹목적인 소련 숭배를 비판한다. 이 책은 오웰이 사회주의자로서의 의식을 표출한 첫 번째 본격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좌익 지식인들은 노동운동보다는 공산당에 매몰되는 친소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보수파들은 나치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특히 좌익 지식인들은 오웰이 나치도 스탈린도 모두 전체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을 소련의 동유럽 '진출'과 나치의 '침략'을 혼동한다고 비판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웰의 현실 인식이 관념적이지 않고 정확했다는 것 뿐 아니라 이후 스페인 내전에의 참가로 이어지는 오웰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민중중심적인 아나키즘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웰은 탁월한 현실 인식 능력을 가진 반권력의 작가였다. 오웰은 영국 북부를 방문한 후 런던 근교에 집을 얻어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시골생활을 하면서 한산한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것은 이득이 되지 않았지만 오웰에게 평화를 주었다. 1936년에 오웰은 하숙집 주인의 소개로 만난 아일랜드계 여인 아일린 오쇼네시와 결혼한다. 아일린은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 사회복지사를 거쳐 교육심리학을 다시 전공하고 있던 인텔리였다. 그녀는 오웰의 사상적 동반자로서 스페인 내전에 오웰과 함께 동행한다. <카탈로니아 찬가> 1936년 겨울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지하기 위해 참전했다. 그는 독립노동자당을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갔으며 곧 맑스주의 통일노동당(POUM) 민병대에 지원했다. 당시 카탈루냐 지방은 공화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노동자의 나라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영국 북부의 참혹상을 보고 온 오웰은 여기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의용군의 조직은 형편없었으며 총도 없이 아라곤 전선에 배치받았다. 하지만 장교에서 사병까지 누구나 똑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계급으로 차별을 받지 않았다. 넉 달 이상 전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한 채 추위와 굶주림에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전쟁이었다. 오웰은 전선에서 돌아와 마드리드의 국제여단에 참여하려고 신청했다. 국제적인 연대를 받는 곳에서 공화파의 승리를 위해 더 기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바르셀로나에 혁명적 기운은 사라지고 다시 계급이 형성되는 듯 한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화파는 각종 노선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 강해지고 있었으며 POUM이 점거중인 전화국을 탈취하기 위해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산당이 총격을 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오웰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던 국제여단으로의 참여를 포기하고 다시 POUM 소속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누구나 평등했던 부대 내에 다시 계급이 생겨 오웰은 소위가 되었다. 그러나 전투 참여 10일 만에 그는 머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훗날 오웰은 '총알에 맞는 것이 총알에 맞지 않는 것보다 행운이었던 상황'이라고 회고했다. 1mm만 왼쪽에 맞았더라면 즉사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오웰은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그는 공산당으로부터 트로츠키파로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미 아내 아일린 또한 가택수색을 당한 상태였고 두 부부는 간신히 야간열차를 타고 스페인을 빠져나왔다. 오웰은 스페인 국경을 빠져나오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해서 영국에 보냈지만 몇몇 곳에서 거부당했다. 런던에 돌아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카탈로니아 찬가'를 쓰기 위해 골란츠에게 연락했을 때도 골란츠는 출간을 거부했다. 오웰이 코민테른에 무조건적인 동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전쟁의 어리석음과 스페인 인민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르포문학의 걸작이다. 오웰은 스페인 내전 당시의 정치상활에 대한 분석까지 실어서 스페인 내전을 미시적이면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오웰이 죽을 때까지 초판이 다 팔리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무시당했다. 골란츠가 출간하지 않고 작은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기 때문이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한 오웰 부부는 1938년에 모로코로 요양을 간다. 그곳에서 쉬면서 중산층 외판원이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곳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 '숨쉬러 올라오기'를 쓴다. 1939년 골란츠에 의해 출간된 이 책은 꽤 호평을 받았다. 동물 농장 2차 대전 기간 동안 오웰은 농사를 지으면서 에세이집 '고래 뱃속에서'를 탈고한다. 많은 잡지들이 정간되어 오웰은 영화평을 쓰는 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다. 오웰은 채플린의 영화들을 특히 좋아했다. 1941년에 발간된 에세이 '사자와 일각수'는 오웰이 중산층에 대한 비판을 중지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쓴 것이다. 파시즘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 영국적인 고상함(그것이 위선이든 아니든 간에)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 책은 전쟁기간동안 많이 팔려나갔다. 오웰은 영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1941년부터 BBC에서 대 인도 선전방송의 원고 쓰는 일을 했다. 그러나 전시 검열과 영국의 제국주의적 태도는 오웰로 하여금 그 일을 오래 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43년 말부터 그는 좌파 잡지 '트리뷴'에서 문학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오웰은 자유롭게 글을 쓸 기회를 얻어 1947년까지 정기 컬럼 '나 좋을 대로'를 집필한다. 오웰은 목공실을 만들고, 동물을 키우고, 아이를 입양하는 등 평화로운 생활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오웰은 '동물 농장'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아일린의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어 '동물 농장'은 이전까지의 오웰 작품들과는 다르게 해학적인 면이 많아졌다. 1944년 2월에 탈고된 '동물 농장'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신랄한 비유로 가득차 있어 한동안 출간되지 못했으며 그 와중에 런던 공습에 의해 원고가 불타버릴 뻔 하기도 하였다. '동물 농장'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산주의로 읽혀 미국에 의해 광범위하게 번역되었다. 최초의 외국어 번역은 한국어 번역이었으며 이것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첨예하게 냉전이 벌어진 지역이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종종 동화로 분류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오웰은 '옵서버'의 특파원으로 파리와 쾰른으로 다녀왔다. 그리고 1945년 3월에 삶의 동반자였던 아일린이 죽었다. 전쟁이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계속 언론을 탄압하자 오웰은 '자유방어위원회'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전쟁이 벌어졌던 시기 내내 오웰은 참여적 지식인으로 살아왔고 '동물 농장' 이외의 글은 대부분 잡지에 기고된 현실적 논평이거나 에세이였다. 1984년 《동물 농장》으로 유명 작가가 된 오웰은 런던을 싫어져 1946년에 스코틀랜드 주라 섬으로 이주했다. 양자 리처드를 자연 속에서 키우면서 '《1984년》을 집필하기 시작해 1947년 말에 탈고했지만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폐결핵의 악화는 그의 심신을 탈진시켰고,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의 처지로 대변되어 나타난다. '만약 병이 그렇게 심하지만 않았다면 이 소설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듯이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위트가 없는 책이 되었다. 1948년 11월에 최종 탈고한 오웰은 48을 뒤집어 1984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삶의 소박한 것들을 사랑해왔던 오웰은 그것이 박탈된 근미래를 묘사하여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하였다. '1984년'은 출간 즉시 고전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오웰은 다시 폐결핵으로 입원했고 병상에서 소냐 브라우넬과 1949년 10월에 재혼했다. 그녀의 이미지는 '1984년'의 줄리아로 표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숨을 거두었다. 저서 오웰의 저서명은 박홍규 교수의 기준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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