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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역사 학보특강 : 2021년 5월 자료입니다. 교수님께서 기말시험 대비 학보에 소개한 자료이니, 참고용으로 읽어보세요.
제1장. 중국문명의 형성과 통일제국의 출현
중국 최초의 왕조라는 하(夏)나라는 아직 전설적인 존재이다. 갑골문을 통해 실체가 아려진 상(商)나라는 중국최초의 왕조로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보유한 읍제국가의 형태를 띠었다. 기원전 11세기경 주변의 제후들을 모아 상나라를 정벌한 주(周)나라는 읍제국가로서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종법적 봉건제도를 실시했다. 주나라는 혈연관계의 약화로 종법적 봉건제가 난관에 봉착한 기원전 771년 견융적의 침입을 맞아 뤄양(낙양)으로 천도했다. 이때부터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통일할 때까지를 동주, 이전을 서주로 불렀다.
동주시대는 전기를 춘추시대, 후기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 독립국이 되어 서로 공방전을 벌였으며, 제후국 중에서 방대한 영토와 인구 및 강대한 무력을 지닌 강국이 등장하여 주왕실 대신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춘추시대 후기부터 전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점차 진, 초, 연, 제, 한, 위, 조의 전국칠웅이 군현제적 지배와 이른바 ‘변법’ 이라는 개혁정책을 통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춘추전국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어 혼란스러웠지만 문화적 창조력이 크게 개화되었다. 이 시기의 문화 활동은 사(士)계층 출신의 이른바 제자백가라고 알려진 학자들과 그 사상을 잇는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인간 개인의 의지를 확신하였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추구하였으며, 과거의 경전을 정리하고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수하였다. 이 중 중요한 사상 혹은 학파는 유가, 묵가, 법가, 도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221년) 진시황은 황제 1인이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를 시행하면서 전국적으로 통일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진시황 사후 농민반란 등으로 혼란에 빠진 진 제국은 초 패왕 항우에 의해 멸망했다. 다시 항우를 꺾고 패권을 장악한 유방은 한의 황제로 즉위하여 군국제를 실시하고 민생의 안정을 기했다. 이후 한 무제는 중앙집권체제의 완성과 경제력의 회복 등 내치를 바탕으로 흉노에 대한 전쟁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서역을 통해 중국과 서방을 잇는 실크로드를 개통하였다. 또한 유학을 관학화하여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제2장. 한족 왕조와 정복왕조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당오대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은 한(韓)족 고유문화에 이민족의 외래문화가 접목되면서 폭넓은 변화를 경험했다. 한 무제 이래 외척정치가 지속되었고, 특히 왕망은 기원후 8년 유교적 이상 국가 신(新)왕조의 건설에 나섰다. 신왕조에 대한 지방 호족들의 불만과 기아에 굶주린 농민들의 반란을 계기로 호족 중 세력이 강했던 유수는 후한을 세웠다. 후한은 유학생을 양성하였고, 예교사회로 변모했다.
후한 말,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 끊임없는 농민들의 반란으로 화북의 조조, 강남의 손권, 쓰촨의 유비 등 각지에서 일어난 군신 등이 천하통일을 겨루었다. 이때부터 280년 서진(西晉)이 통일할 때까지를 삼국시대라고 한다.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쥔 것은 조조의 아들이 세운 화북의 위나라였지만, 실권이 사마씨에게 넘어간 뒤 서진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에는 외척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지배층은 사치와 부패에 빠져 내란이 발생했다.
311년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의 수도 뤄양이 함락되었고, 흉노에 이어 선비족, 저족, 갈족, 강족이 각축을 벌이는 오호시대로 접어들었다. 한족과 이민족인 호족은 상호 장단점과 한계를 인식하여 새로운 통치체제와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을 이루었다. 더불어 중국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강남에서는 화려한 귀족문화가 꽃피었다.
북주의 외척 양견은 화북과 강남지방을 통일하여(589) 수(隋)를 건설하여 문제로 등극하고 국가통치의 법제적 기준인 율령을 반포하여 통일제국의 제도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어 수양제는 화북과 강남의 경제적 통합을 위해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 및 농민반란에서 비롯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당(唐)고조 이연은 618년 건국 후 중국 전역을 장악했다. 당대의 중앙정부 구성은 삼성육부였는데, 이 제도는 훗날 동아시아 관료 구성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또한 당나라는 소농민을 대상으로 토지를 분배해주는 균전제를 시행했고, 조세로는 조용조를 거두었다. 당대에는 동서에 걸친 대제국을 바탕으로 국내 상업과 대외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실크로드를 통한 외국인의 자유로운 왕래로 국제적 문화와 국제적인 종교가 성행하였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755-763)으로 기울어갔다.
8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시기 중국은 귀족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변화하고 군주의 지위가 확립되었으며, 과거제가 정립되었다. 서민의 지위가 강화되어 서민문화가 등장했다.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실물경제가 쇠퇴하고 화폐경제가 나타났으며 대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장원제와 그 운영 방식인 지주, 전호관계가 발전했다.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토지의 생산성이 높아지자 일부 강남지방에서는 이모작이 이루어졌다. 증대된 농업생산물은 상품작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어 육로와 운하 등 유통망을 통해 전국 시장에 보급되었다.
8세기 이후 문벌귀족의 몰락과 무인 절도사 및 신흥 지주층의 부상, 그리고 대토지소유자와 결탁한 지방 군벌정권의 발호로 오대십국의 무인정치가 전대되었다. 960년 송(宋)나라는 오대십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강력한 문치주의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바탕으로 황제권을 안정시키고 사대부사회를 확립했다. 형세호라는 신흥지주층과 전호를 기본으로 하는 대토지소유제가 확립되었으며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화폐경제의 발달도 서민계층이 대두하고 도시가 번영했다. 문화면에서도 서민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특히 유학은 철학적으로 심화되어 송학이 발생했다. 송은 대외적으로 이민족에게 열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북방에서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이 연달아 일어나 요, 금, 원으로 이어지는 정복왕조 시기가 도래했다. 특히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중국의 전 영토와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한 세계제국을 형성하여 동서 문화의 활발한 교류에 기여했다.
원 말의 반란을 평정하고 한(漢)족의 주권을 회복한 明(명)태조 주원장은 정치, 경제, 군사상의 제도를 정비, 강화하고 송 이래의 황제독재체제를 완성하여, 산업을 회복하고 화폐경제를 발달시켰으며 중국전통문화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곧 명을 대체한 만주족의 淸(청)조는 군제를 제외한 명의 모든 제도를 계승하여 전제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몽골, 티베트, 중아아시아 각지를 병합하여 동아시아 대국으로 성장했다. 정복왕조인 청은 한족의 사상과 행동을 제약하기도 했으나, 회유정책을 써서 학자를 우대하며 중국문화 집대성에도 힘썼다.
명대 중기부터 청 말까지 향촌에 기반한 중간적이 지배계층으로서의 신사층이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관직의 경력이 있는 상층신사와 아직 관리가 되지 못한 하층신사로 구성되어 향촌의 질서유지, 백성의 교화와 여론의 주도, 지방의 공공사업에 대한 건의와 조언 등 공적 기능도 맡았지만 특권을 남용하여 대토지 겸병, 용역의 면제와 수리의 혜택 등 개인 이익을 우선하기도 하였다. 특히 청나라에 투항하여 특권을 보장받아 향촌질서 회복과 국가권력 보좌의 기능을 담담하면서 청 말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10세기 이래 곡창지대였던 강남지방은 직물업 등의 공업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가 상품작물의 재배지가 되어 미곡 생산이 부족해졌다. 명 말 양쯔강 중류지역이 새로운 곡창지대로 등장했다. 성업 발달로 등장한 상인집단은 쌀, 소금, 직물, 도자기, 차 등을 전국적으로 교역했다. 명대부터 유럽 상인도 출현했다. 중국의 견직물, 차, 도자기에 대한 대가로 유럽으로부터 은이 대략 유입되었고 은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이는 명대의 일조편법, 청대의 지정은제도라는 조세의 은납화로 이어졌다.
명대에는 주관적 수양을 중시하는 양명학이 유행한 반면, 청대에는 실증적이고 객관적 방법으로 문헌을 연구하는 탈정치적인 성격의 고증학이 객관성, 독창성, 전문성을 띠고 많은 분야의 학문을 개척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소개하였고, 서민문화가 성행하여 <수호전>, <삼국지연의>,<서유기>,<금병매> 등과 같은 통속소설이 널리 읽혔다.
제3장 근대 중국의 탐색
중국의 근대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함께 시작되었다. 중국은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 1840-1842)에서 패배하여 광둥무역체제를 포기하고 영국에 홍콩 할양, 5개항 개항 등을 조건으로 하는 불평등한 난징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미국, 프랑스 등도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에 가세했다. 제2차 중영전쟁(애로호 사건)결과 체결된 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중국은 텐진을 포함한 11개항 개항,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양쯔강 및 통산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등을 허용했다. 위의 두 조약으로 중국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종속적 시장으로 편입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스스로 반(半)식민지적 처지로 인식했다.
중국은 동아시아 내에서조차 우위를 빼앗겼다. 대만사건,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을 겪으면서 류큐, 베트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했으며, 이는 중화제국 질서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다. 여기서 민중은 청조를 타도하고 태평천국을 세우려는 반란을 일으키거나(태평천국운동,1851-1900) 반외세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의화단운동,1898-1900).
물론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이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시켰고 양무, 변법, 신정, 입헌 등의 지배층 개혁 움직임을 낳았다. 양무운동은 제2차 중영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을 계기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서구식 개혁을 도모했지만,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한계를 드러냈다. 위기의식이 심화되자 서구식 제도개혁을 주장해온 변법론이 힘을 얻어 강유위(캉유웨이)의 주도 아래 무술개혁이 시도 되었지만 서태후 측의 정변으로 좌절했다. 1901년 서태후도 서구식 개혁 (신정개혁)을 추구했으나 민중의 폭동만 야기하고 말았다. 러일전쟁(1905)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를 일본의 입헌군주국 체제로 인식한 지배층은 입헌을 시도했지만, 청조의 멸망으로 성과 없이 끝났다.
혁명운동은 1894년 손문(쑨원)이 흥중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흥중회, 화흥회, 광복회가 연합하여 결성된 동맹회를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은 실패했지만, 혁명적 정세는 확산되었다. 1911년 후베이성 우창에서 무장폭동이 성공하여 점차 확산되면서 쑨원은 난징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에 선출되기에 이르렀다.(신해혁명). 제2대 임시대총통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총통의 독재권을 확립해 나가면서 1946년 황제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제4장 현대 중국의 전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베르사유조약(1919)은 제3세계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중국의5.4운동 역시 그 일환으로, 신문화운동과 애국운동을 포함하여 이후 중국 근대화에 중요역할을 했다. 신문화운동은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과 같은 복고적 분위기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전근대적 정치, 도덕, 문화의 근간인 유교에 대한 비판 및 서구사상 수용을 내용으로 하는 신사상운동과, 통속적인 사회문학을 생활언어인 구어, 즉
백화(白話)로 쓰자는 신문학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 대가족제도에 대한 비판, 여성해방의 주장 등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지속된다. 신문화운동과 5.4(애국)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국민당이 대중 정당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공산당이 창당 되었으며 노동자조직들이 생겨났다.
1920년대 추진된 국민혁명은 군벌시대를 종식시켰다. 중국은 위안스카이의 병사(1916)이후 군벌시대로 접어들면서 민중의 생활과 경제발전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에 연성(聯省)자치운동이 서남지방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이는 이른바 민국 이래 최대의 암흑기인 군벌시대를 종식시키려는 시도로, 각 성이 독자적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해 연방정부 형식의 통일국가를 세우자는 움직임이었다. 국민혁명은 국민이 주체가 되는 혁명을 목표로 반제국주의(민족주의)과 노동자, 농민 등 평민의 권리와 생활 보장(민권주의, 민생주의)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삼민주의를 내세웠다. 쑨원은 공산당과의 합작(제1차 국공합작.1924)루 반제.잔군벌의 국민혁명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회의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1925년 3월 쑨원이 병사하면서 국민회의 국민회의의 구상이 좌절되었다. 이후 국민정부는 북벌을 시작해 중국을 통합하고 난징에 수도를 둔 국민정부 시대로 들어갔다. 북벌 과정에서 국민당에서 쫓겨난 공산당은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세력을 키워갔다. 일제의 침략적 움직임이 계속되자 공산당 측과 장제스의 국민정루, 장쉐량 등은 내전을 끝내고 항일을 하기로 협상했다.(제2차 국공합작,1937) 8년간의 항일전쟁에서 공산당의 영역은 크게 확장되었다. 1945년 8월 중국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1949년 마오쩌둥(모택동) 인민정부 주석, 저우언라이(주은래)정무원 종리 아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정부는 1958년부터 인간의 정신력과 집단에 의지한 생산의 도약, 사회개조를 시도한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를 조직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대신 개별 농가의 경작 권한과 책임이 늘어나면서 생산의욕이 커졌다. 하지만 경제가 우선시되고 정치나 사상이 밀려나면서 경제중심주의에 대한 마오쩌둥의 우려와 사회 불만이 맞물린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문혁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을 파괴하고 대중의 새로운 권력기구를 창출하자는 움직임이었으나.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의 체포로 종식되었다.
1978년 12월 이후 중국은 덩샤오핑(등소평) 주도로 개혁, 개방 정책을 추구하면서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했다. 개혁은 시장경제화와 자본주의화의 방향을 지향하고, 개방은 폐쇄적인 자력갱생 정책을 버리고 국제시장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개혁, 개방 정책으로 경제발전이 신속해지는 한편, 빈부격자, 권력을 남용한 경제 부정, 물가상승, 실업과 배금주의 등 사회문제가 대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5의 현대화로서 정치민주와를 요구하는 천안문사건(1989.6)이 일어났다. 하지만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혼란과 민족 분규를 목도한 중국 국민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우선시하고, 공산당을 전 계층을 아우르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중국인의 생활양식에서 서구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전족 폐지와 같은 신체의 자유와 의생활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청조 후기부터 유행한 경극과 새롭게 들어온 영화가 오락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TV와 비디오 게임, 인터넷의 폭주로 영화 관객의 숫자는 감소하는 추세이다. 또한 대가족제는 핵가족제로 급속히 변화했다.
제5장 일본사
현재 일본인의 직계 조상은 3-4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약1만 년 전 신석기시대 조몬인은 수렵, 채집, 어업 생활을 하고 계급, 지배 관계가 없는 사회를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 ,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야오이인은 북 규슈 지역에서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한 농경생활을 했다. 생산력의 급격한 증대로 小國(소국)수준의 집단들이 등장하면서 3세기 말부터 호족의 연합정권이 야마토 정권이 최초의 통일 세력으로 등장했다. 초기 야마토정권은 백제와 유대가 강하고 불교를 수용했던 소가씨가 승리를 거두어 불교 중심의 아스카문화를 주도했다. 야마토정권은 수당 교체기에 쇼토쿠태자 주도하에 율령체제를 도입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645년 나카노오에 왕자는 소가씨를 멸망시키고 다이카 개신에 성공하였으며, 7세기 중엽 덴지 천왕으로 즉위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은 천황 지배체제의 강화에 기어했다. 8세기 초에 율령이 기반한 국가체제를 갖추어 수도 헤이조코(나라)를 건설했다. 8세기 후반 율령제가 동요하지 헤이안쿄로 천도했는데, 이후 가마쿠라바쿠후가 성립할 때까지를 헤이안시대 라고 한다.
나라. 헤이안 시대에 전자 귀족 후지와라씨가 득세하면서 섭정, 관백이 통치를 대리하는 섭관(싯켄)정치로 귀결되었다. 이 무렵 사무라이로 불리는 무사가 득세하여 1185년 미나모토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가마쿠라 막부는 두 차례의 몽골 침략을 겪은 후 침략에 대비하려 했으나,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고케닌의 불만이 높아지는 가운데, 1333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몰락했다.
이후 남북조시대가 열렸다. 1392년 무로마치 막부가 남조선을 흡수했으나 지방 무사들이 자립적은 세력으로 성장하여 1467년 오닌의 난 이래 전국(센코쿠)시대가 시작되었다. 중앙 권력의 불안정과 전국 다이묘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다양한 사회세력의 성장 기회를 제공하여, 농민의 자립성이 강화되고, 도시가 발전했다. 전국 다이묘 중 통일을 추진하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자살하고, 그를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 일본을 통일 했으나 조선 침공에 실해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했다.
에도 막부로 불리는 도쿠가와 막부는 250여 개의 번과 직할령, 직할 도시를 통치했다. 다이묘를 통제하기 위해 막번체제가 고안되었고, 다이묘들은 산킨고타이와 상속자. 가족을 에도에 머무르게 하는 등의 의무를 이행했다. 이는 에도(도쿄,동경)를 거대 소비도시로 키웠으며, 17세기 말 전국적인 상업유통망의 형성과 화폐경제의 발전, 대상인의 등장, 도시문화의 번창으로 이어졌다.
막부는 러시아와 미국의 국교 수립 요구에 직면하여 미일화친조약(1854)과 미일수호통상조양(1857)을 맺었다. 개국 후 일어난 막부타도운동과 존왕양이운동은 사무라이 정권의 붕괴와 메이지정부의 수립(메이지유신)으로 귀결되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은 서남부 지역의 사무라이로, 급진적 서구화와 중앙집권화 정책을 선택했다. 메이지정부는 천황을 정점으로 정치를 재편성하고 서양 문물의 도입 및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고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제국구의적인 근대 천황제국가를 확립해 나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시대에 확대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한계가 분명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내 불황과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세계5위의 산업국가로 성장했으나 전후 수출 부진과 경제대공황에 직면했다. 일본은 중국시장을 독점하여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고, 이를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주장으로 포장했다.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추축국 진영에 가담하여 북부 중국까지 침략했으나, 미국의 참전과 원폭투하, 소련의 선전포고 앞에 1945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패전 후 국제사회는 일본정부에게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제외하고 만주사변 이후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책임만을 물었다. 이는 결국 한일 간의 역사인식의 차이로 이어졌다.
제6장 고대 지중해세계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 지중해와 에게해 유역에서는 오리엔트와는 또 다른 에게문명이 발달했다. 크레타사회는 기원전 3천 년경부터 소아시아계통의 사람들에 의하여 풍요롭고 세련된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기원전 2천 년경부터 북쪽에서 그리스 본토로 침입해 온 유럽계 미케네인들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미케네인들을 기원전 13세기 중엽 동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고 소아시아 서부해안에 진출했다. 그러나 기원전 1100년경에 북쪽에서 남하한 도리아인들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300년간 암흑시대가 지속되었다.
고전고대의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800년경에 설립된 폴리스(polis)라는 전사공동체와 더불어 시작된다.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안정된 폴리스체제가 점차 지중해 각지로 확산됨에 따라 지중해세계의 교역이 촉진되었다. 폴리스 안에서도 상업활동으로 성장한 부유층이 등장하여 폴리스 방위에 자발적으로 기여하면서 평민들의 정치적 참여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여기서 폴리스의 정치는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귀족정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폴리스도 있었다. 스파르타는 정복민인 도리아인들이 세운 국가로서 피정복민의 노예화와 전 시민의 전사화에 입각한 군국주의적인 국제를 수립하여 귀족정과 민주정을 혼합시켰다. 반면 원주민들의 자발적 공동체인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마찬가지로 노예노동에 의존했지만 전형적인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상공업이 발달하여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던 아테네에서는 조정자 솔론의 금권정치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에 이어, 기원전 6세기 말 클라이스테네스를 중심으로 한 민주정치의 기틀이 마련됐다.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사회는 오리엔트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제국과 벌인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했다. 특히 강한 해군력으로 그리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아테네는 그리스사회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5세기 말 폴리스 사이의 내분인 펠레폰네스소전쟁(431-404.BC)을 초래했다. 그리스 세계는 이 소모적인 전쟁 속에서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급기야 기원전 338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로 들어가고 말았다.
기원전 8세기경 로마는 라틴족이 세운 작은 폴리스로 출발했다. 팽창을 거듭한 로마는 기원전 1세기 말,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로마공화정의 팽창은 로마의 전 시민이 참여하는 시민군에 의한 것이었으나, 원로원 귀족들에게 독점되었던 정치 참여는 평민의 불만과 항의를 초래했다. 평민들은 2세기에 걸친 신분투쟁으로 기원전 3세기 초, 형식적으로나마 귀족들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오랜 정복전쟁 과정에서 무산자로 몰락한 로마의 중소농민들은 농촌을 버리고 로마시로 흘러들어왔다. 빈민들은 교외에 무리를 이루어 살면서 기아, 치안, 불안, 질병, 화재 등 사회불안 요소를 야기했다. 한편 귀족, 그리고 정복전쟁에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새로운 유력자들은 토지를 매점하여 피정복노예도동에 입각한 대농장경영 곧 라티푼디움의 제도를 수립했다. 중소농민의 몰락으로 시민군에 와해되자, 군대는 군사적 유력자들의 권력을 지켜주기 위한 사병집단으로 전락했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군인정치가들은 정권다툼을 벌이고 심각한 내란을 초래했다.
케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정복하고(기원전 31년) 제정을 설립했다.(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명분상 공화정의 회복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원로원을 복속시키고 독재권을 행사했다. 그는 정복전쟁을 종식시키고 국경방비에 힘썼으며, 공공건물의 건축과 시민의 복지증진 등 내치에 힘썼다. 제정 설립 후 약 2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로마의 안정을 로마의 평화라 불리운다. 로마는 광대한 영토와 발달한 상업망에 따라 시민법과 만민법의 체계를 수립하여 이후 유럽 법체계의 골격을 마련했다. 한편 기원후 30년경 유태지역에서 인류애에 바탕을 두고 성립된 기독교가 로마로 유입되어 초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국교로 확립됐다(395년).
180년 이후 행정력이 약화된 로마는 군인들의 정권다툼을 시작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쇠퇴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예의 숫적 감소 및 생산성의 하락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침제에 있었다. 라티푼디움이 소멸하고 소작인 곧 콜로누스제도가 나타나면서 자연경제로의 이행이 가속됐다. 로마의 소작인인 중세농노의 기원을 이룬다. 위기는 사회 모든 분야에 확산되는 로마의 제정 궁핍과 내란, 게르만족의 침입 등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3세기 말엽과 4세기 초엽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제군주제로써 혼란을 수습하려 했지만 단기적인 효과에 그쳤을 뿐, 이미 기반이 붕괴된 로마사회는 몰락을 길로 치달았다. 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침입을 맞아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제7장 서양 중세 봉건사회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번성기에 라인강과 도나우강 너머에서 부족제적인 원시생활을 하다가 로마가 쇠퇴하는 3세기경부터 로마로 유입했다. 초기의 평화적 이주는 곧 무력침공으로 바뀌었다. 게르만의 여러 왕국 중 유일하게 존속한 프랑크왕국은 로마문화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로마교회와 제휴하여 서로마제국을 부활했다.(800년)
게르만문화와 로마문화, 그리고 기독교신앙을 융합시킴으로써 중세유럽의 문화와 사회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서로마제국은 프랑족의 관습에 따라 분할, 상속되면서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역적 기원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의 통제권이 붕괴되고 지방 세력에 독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슬람, 마자르, 노르만 등 이민족의 침입은 혼란을 심화시켜, 유럽은 7세기부터 10세기 말까지 무질서 상태에 있었다, 10세기 말, 강자들의 지배체제인 봉건제도를 바탕으로 중세봉건사회가 수립되어, 봉건 귀족의 위계질서로 구성된 주종제,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 농노의 노동에 입각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인 장원제 등을 통하여 유지되었다.
이후 서유럽 사회와 경제는 발전 양상을 보였다. 농업 기술혁신, 농업생산량증대, 인구증가, 개간운동은 상업과 도시발달을 자극했다. 동방과의 원거리무역은 동방 사치품과 교환할 모직물산업의 발달을 촉진하여,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및 북독일지역의 도시가 발전하고 유럽 각지에 시장의 그물망이 퍼졌다. 중세도시는 공동체적인 투쟁으로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농노의 신분적 해방에도 기여했다. 투쟁에 앞장섰던 길드는 도시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성원의 상호평등 및 상부상조를 중시하여 자유경쟁을 억제하고 생산과 기술을 통제했다.
중세의 사회경제적 발전도 13세기 말부터 개간의 한계, 지력고갈, 부역노동의 비효율성 등으로 퇴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14세기 중엽,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구의 1/3이 감소되고 많은 경작지가 유기됐다. 사치품의 구입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던 영주는 부역을 강화하는 ‘봉건적 반동’ 의 행태를 보였고 농민들의 도주와 반란이 속출했다. 농민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농노제는 서서히 폐지돼 나갔다. 도시에서는 길드규제가 강화되어 길드와 길드, 상인과 수공업자, 주인과 직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도시대중 폭동이 빈발했다. 그러나 길드체제에서 벗어난 대상인과 은행가들은 선대제, 원거리 무역, 복식부기 들의 합리적인 기업방식을 채택하고, 화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로써 봉건적 경제체제를 침식시켰으며, 정치 세력과 결탁해 르네상스와 민족국가의 형성 등 근대 유럽의 탄생에 기여했다.
제8장 유럽 국가체제의 수립
동양에 비해 열등했던 서유럽은 15세기 말 비유럽 지역으로의 진출, 곧 지리상의 팽창으로 전기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종교적 동기와 동양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경제적인 동기가 가장 크게 작용했으며,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전, 중앙집권화된 민족국가의 출현은 현실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최초로 인도항로를 탐색한 포루투칼은
동방무역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장악해 해상제국을 건설했다.
이후 유럽인들은 동양물산을 대량 유입했고, 유럽인들의 생활은 크게 변화되었다. 특히 대량의 귀금속은 가격혁명을 초래했으며, 넓은 해외시장은 상업혁명을 초래하여 유럽의 상업 규모를 비약적으로 확대하고, 경제의 중심을 이슬람지역 및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의 민족국가로 이동시켰다. 이후 유럽은 동양의 문명권과 활발히 접촉하여 유럽주도적인 세계사를 전개해 나갔다. 중상중의는 이에 따라 나타난 경제적 이데올로기로서 중금주의, 무역차액주의, 중공주의, 식민지정책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초기적인 발전을 꾀했으나 자유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중상주의는 국가주의로서의 면모도 지녀 유럽 민족국가를 위한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16세기 이후 경제적 발전을 절대주의적인 정치체제를 등장시켰다. 절대주의시대로 불리는 16-18세기의 유럽은 사회, 경제, 문화면에서 근대적 발전이 두드러졌지만 봉건적 요소도 잔재했다. 중세 말부터 국가통합의 중심이 됐던 왕권은 이때에 절정에 달해 정대왕정의 정치체제를 이루어, 관료제와 상비군제도 및 전국적인 조세제도와 사법제도를 설치했다. 절대주의국가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라기보다는 국왕과 왕조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 잔재된 봉건적 부담, 길드제도 등은 자유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했으며, 시민계급과 귀족계급의 세력 갈등은 절대왕권의 군림을 허용했다.
에스파냐는 이슬람교도의 축출을 통하여 일찍이 중앙집권화에 성공했으나 국내 산업기반을 육성하지 못하여 이류 국가로 전락했다. 점진적으로 그러나 전형적인 형태로 수립된 프랑스 절대주의체제는 대표적인 절대군주 루이 14세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 구조적인 모순은 프랑스혁명으로 폭발하였다. 영국의 튜더왕조는 15세기 말 의회에 입각한 강력한 절대왕정을 수립했는데, 당시 크게 성장한 농업자본가 젠트리 계층은 프랑스적인 절대왕정을 수립코자 한 스튜어트왕실의 시도를 영구히 차단하고 의회중심적인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한편 프로이센과 러시아에서는 토지귀족관료와 농노로 구성된 봉건적 성격이 강한 절대왕정이 수립됐다.
제10장 프랑스혁명의 이해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 (형제애, 박애)의 이념을 바탕으로 절대주의적인 구체제를 타도했던 전형적인 시민혁명이었다. 혁명의 근본원인은 성직자인 제1신분, 귀족인 제2신분, 평민인 제3신분으로 구성된 봉건적인 신분제 내지 절대주의적인 구제도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평민 중에서도 상인, 제조업자 및 문필가 등의 자유직업인 등으로 이루어진 시민계급 곧 부르주아는 재력과 교양에도 불구하고 귀족과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고, 봉건적 제약으로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농민은 농노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봉건적 부담과 국가에 대한 세금 등으로 많은 불만을 지녔다.
프랑스 왕실재정을 루이 14세 시대 이래 적자가 누적되다가 미국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으로 결정적 위기를 맞으면서 혁명에 이르는 직접적 계기를 제공했다. 특권계급에의 과세 및 왕실경비의 삭감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시도가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루이 16세는 신분제의회인 3부회를 소집했다. 3부회에서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신분 간에 충돌이 벌어지자. 제3신분의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성립시켰고, 이에 자극받은 파리의 민중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해 혁명적 분위기를 지방으로까지 확산했다.
국민의회는 <봉건제의 폐지선언>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이념을 제시하여 민중의 지지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91년헌법”으로 유산계급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수립했다. 새로 소집된 입법의회는 국내외의 반혁명 움직임에 대항해 혁명전쟁을 시작했으며 (1792년 4월), 애국애와 혁명 열기에 고무된 민중은 1792년 9월 왕권을 정지하고 국민공회를 소집하여 프랑스 제1공화정을 수립시켰다. 중산적 부르주아와 소생산자층에 기반한 자코방당은 상층 부르주아에 기반한 지롱드당과 대립하다가 1793년 민중세력을 배경으로 자코방 독재를 확립했으며, 로베스피에로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는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1794년 7월 온건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고 공포정치를 종식시켰다. 1795년 유산 계급에 입각하여 수립된 총재정부는 전쟁에 따른 경제난과 좌우파의 압력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불안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로 무능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유럽대륙을 혁명의 이념으로 제패했던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라기보다 군사적 정복자였지만, 혁명의 성과를 수용해 프랑스 시민계급과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시킴으로써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틀을 이루었다.
제11장 19세기 시민사회의 전개
19세기는 유럽 여러 나라와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많은 성과를 달성하면서 동시에 많은 문제를 축적시켜 나갔던 시기이다. 경제적으로는 18세기 후반부터 각종 기계의 발명 및 기술혁신으로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이 전 산업 분야에 파급되면서 정치 및 사회 경제구조에 큰 변화를 야기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일찍이 산업혁명을 이룩한 영국은 점진적 개혁이라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선거법 개혁, 공장법 제정 및 노동조건의 개선, 보험제도, 시민적 자유의 확립 등을 통해 산업혁명의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간 영국은 19세기 후반 세계의 공장으로 군림하고 20세기 초에는 민주적인 복지국가의 길을 열었다. 1830년 7월 혁명 이래 점진적으로 진행된 프랑스의 산업화는 제2제정기에 급진전했으나 소규모 기업 및 농업의 비중이 높았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독일은 국민국가로의 통합에 성공하지 못하고 봉건세력이 여전히 강력하여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걷지 못했으나 1871년 통일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에 입각한 비약적인 산업화를 이룩했다. 절대주의적인 국가구조 속에서 무리하게 시도된 러시아의 산업화는 곧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 19세기에는 프랑스혁명 및 나폴레옹의 몰락 후 각국마다 사회의 진로를 둘러싸고 혼란과 갈등을 동반한 제반 실험이 진행되었다. 사상적인 관점에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등 상보적이기도 하고 상충적이기도 하는 다양한 사상적 경향들이 교차하고 갈등했다.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보수주의는 전통, 역사, 공동체를 중시하여 개인, 자유, 평등, 진보 등의 이념을 부정했다. 자유주의는 개인, 자유, 평등, 진보,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념으로 인간의 이성을 확신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낭만주의는 유럽의 문화생활을 지배한 새로운 문화적 지향으로, 특히 계몽주의의 엘리트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발 및 민족주의적 경향을 바탕으로 민중과 민중문화를 재발견 하고 혁명에 동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 이후 국가의 전 구성원을 하나의 통합된 정치적 실체로 파악하면서 등장했다. 19세기 말 국가 간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는 와중에 민족주의는 개인을 민족에 종속시키고 국가의 물리적인 힘을 신성시하여 국수적이고 팽창적인 성격을 띠게 되면서 제국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끝으로 사회주의는 19세기 전반의 초기 사회주의와 19세기 중엽 이후의 과학적 사회주의로 대별된다. 사회적 불행을 설득, 계몽, 형제애적 유대에 입각한 공동체 건설로 해결하고자 했던 초기 사회주의를 비현실적인 관념체계라고 비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시하였으며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모순으로 붕괴되리라고 예견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다.
이상과 같은 이념들은 현실로 반영되어, 혁명을 추구하는 새로운 변화의 물줄기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반혁명적인 의지가 서로 충돌하는 격동의 소용돌이로 나타났다. 특히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에 고무된 부르주아는 과거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보수반동세력에 대항하여 7월혁명, 2월혁명 등을 주도했지만, 점차 지배집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국가 권력과 결탁하는 경향을 보였다. 1848년 혁명으로 유럽 전체가 보수화하면서 부르주아와 노동자 집단의 연합은 깨졌으며, 자유주위와 민족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국가의 물리력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이탈리아와 독일이 각각 통일을 이루었고,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선거법 개혁을 비롯한 자유주의 개혁들이 진행되었다. 이 속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자본주의체제는 19세기 말부터 자체 모순으로 위기를 맞으면서 민족과 계급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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