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코미디언 외 7편
문정희
코미디를 보다가 와락 운 적이 있다
늙은 코미디언이 맨땅에 드러누워
풍뎅이처럼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
그만 울음을 터트린 어린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코미디를 보고 운다고...
그때 나는 세상에 큰 비밀이 있음을 알았다
웃음과 눈물 사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어두운 맨땅을 보았다
그것이 고독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그런 미흡한 말로 표현되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맨땅에다 시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늙은 코미디언처럼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마라
푸른 하늘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러고는 쉬이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 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사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위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화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에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화장을 하며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앉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 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색은 섹시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데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 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발라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테 로더의 아이라이너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오르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 배우처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유방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왔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띄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리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투옥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인가”를 규명해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뜩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문정희(Moon Chung-hee. 1947)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5년 진명여고 재학시 시집 꽃숨 출간.
1969년 동국대 재학시 월간문학 신인상에 작품 「불면」 당선 등단
1973년 시집 문정희 시집(월간문학사)
1974년 시극 <나비의 탄생> 명동 예술극장 공연
1975년 시, 시극집 새떼(민학사)
1976년 제 21회 현대문학상 수상
1984년 시집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문학예술사)
1985년 시집 찔레(전예원)
1986년 장시집 아우내의 새(일월서각)
시극 <도미> 문예회관 공연
1988년 시집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나남)
1991년 한국대표시인 100인 시선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2년 대전엑스포 개막 공연(국립극장 제작) <구운몽> 공연
<서정주 시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로 서울여대 대학원 박사학위 받음
1993년 시집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미학사)
1994년 시극집 구운몽(둥지)
1995년 미국 Iowa대학 (IWP) 국제창작프로그램 참가
1996년 시집 남자를 위하여(민음사)
제1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말레이시아 국정 교과서 대원 바하사 초청
2000년 제13회 동국문학상 수상
2001년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민음사)
2002년 마케도니아 스투르가 세계 시인대회
2003년 루마니아 오리엔트 오시던트 초청
2003년 제1회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뉴욕 (Ledig House 국제 작가촌 입소)
2004년 영역시집 Windflower(Wolhee & Robert E.Hawks) 번역
레바논)NajiNaamans재단 문학상 공동 수상
제15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마케도니아테토보DitetEaimit에서 <올해의 작품상> 수상
2005년 현대 불교문학상 수상
2006년 한국현대시 100주년 기념 미국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 “스픽 퍼시픽” 참가
2006년 이화여고 개교 120주년기념 유관순동상 장시 <아우내의 새> 서시 시비 건립
2006년 멕시코 중남미권 세계 도서전 참가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2007년 시집 나는 문이다(웅진 뿔), 독역시집(Edition Peperkorn)
알바니아어역시집 화살의 숲(마케도니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세계 도서전 참가.
영역 시집 Woman on the terrace(White fine press)
아일랜드 제랄드 홉킨스 문학재단 초청
2008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수상
동국대학교 총동창회 <청우상> 수상
인도 영문 문예지 아트라스 초청 뉴델리 세계시인 초청
2009년 미국 UC 버클리대학 초청 <런치 포엠스> 시낭송
문정희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웅진 뿔)
인도네시아 리터라리 비엔날레 초청 (코바코 후원)
이스라엘 <헬리콘> 재단 <분쟁지역의 작가들>
2010년 시집 다산의 처녀(민음사)
스웨덴 헤리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Cikada)상 수상
이탈리아 베니스 대학 초청 예술가로 3개월간 참가
2012년 한국 오스트리아수교 120주년 기념 비엔나 시낭송
독일 튀빙겐, 베를린 시낭송 (한국문학 번역원 후원)
프랑스 역시집 Celle qui mangeait le riz froid(대산 후원)
프랑스 라디오 방송 퀼튀르 <외칠 필요 없다> 40분간 특집.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
2013년 프랑스 <시인들의 봄> 초청 참가.
스웨덴 번역시집 Sang till gryningen(Diktet 출판사)
2013년 프랑 라디오 <Aligre Fm>(Sophie Haluk) 시세계 조명.
2013년 제 10회 육사시문학상 수상
2014년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교 시낭송 (한국문학번역원 후원)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 초청 시카다상 수상자 <생명> 심포지엄
프랑스 AR-TE 텔레비전 (기적을 이룬 한국 감독 쟈크 뎁스)
인도네시아 번역시집 그라메디아 출판그룹
2014년 스페인 시집 Yo soy Moon (스페인Huerga &Fierro)
영역시집 I must be the Wind(Clare You & Richard Silberg)
시집 응(민음사)
홍콩 폴리 테크니칼 대학 초청 시낭송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 초청 아시아의 여성시인 3인의 정담
2015년 쿠바 아바나 도서전 시낭송 (외교부 주관)
스페인 마드리드 세르반데스 서거 기념 축제 세계 <책의 밤>
미국 노던 캘리포니아 북 리브어스 어워드에
<I must be the Wind> 베스트상 노미네이선
러시아 시집 바람의 눈을 따라(루도미노출판사)
목월문학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2016년. 일본어 번역 시집 물을 만드는 여자(시쵸사)
한국 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프랑스 빠리도서전 .
칠레 한국문화원 강연. 케이팝 경연대회 오프닝 시낭송 .
아르헨티나 작가협회 초청 세계 시인대회 초청 참가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학 초청 시낭송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대학 초청 강연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 초청 시카다상 수상시인
진명여고 개교 110주년 교훈상 수상
2017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 초청, 한국학 연구소 개소식 강연
프랑스 낭뜨 메종 드 라 뽀에지 시의 밤 출연
프랑스 시집 찬밥 먹던 사람 중판
중국 챙두 세계시인 포럼
삼성 행복대상 여성 창조상 수상
홍콩 세계 시인의 밤 및 시리아의 시인 아도니스와
난징 <아 방가르트 서점> 초청 시낭송.
2018년 14번째 시집 작가의 사랑(민음사)
청마시문학상 수상
중국 광저우 국제 문학 주간 한국 작가 국제문학 교류대사
2019 첫시집 문정희 시집 복간 (청색종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3.1운동 100주년 <아우내의 새> 낭송의 밤
2007 ~ 2009.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14. 9. ~ 2016. 3. 제40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2005 ~ 2018.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