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장부답게 천 잔의 술을 마시다
(飮千杯男兒事)
단예는 무량검과 신농방의 업신여김을 당했고, 남해악신에게 핍박을 당했으며, 연경
태자에게 감금을 당하고, 구마지의 포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만다산장에서는 원예사가
되어 꽃까지 심어야 했다. 그야말로 그가 겪은 여러 가지 고초는 적다고 할 수 없었
다. 그러나 한 번도 이처럼 누군가가 원망스럽고 화가 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기실 청향수사에서 어느 누구도 그로 하여금 난처하게 만들지를 않았다.
포부동은 그를 떠나도록 했지만 제보곤을 상대할 때처럼 팔을 부러뜨리거나 어깨에
상처를 입히지도 않았고, 요백당을 대하듯 발길로 걷어차 굴러가도록 하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왕어언은 하룻밤 더 묵다가 떠나라고 했고 아주와 아벽은 예의있게 전송까지
해주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자기가 우울해 있는 이유를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호상에는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밤바람에는 능(마름)에서 풍겨오
는 맑은 향기가 실려 있었다.
단예는 힘주어 노를 저었다. 그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며 실로 자
신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껏 목완청, 남해악신,
연경태자, 구마지, 왕부인 등이 그에게 준 모욕은 정말 무서울 정도였으나 그는 태연
히 받아들였으며 그토록 원망스러운 것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왕어언을 깊이 사모하
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 소저의 마음속에는 단예에 대한 호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심지어 아주와 아벽도 그를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은근히 화
가 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귀여운 왕세자로 태어나 모든 이들의 관심과 귀여움을 받았
다고 할 수 있었다. 대리국 황제에서부터 황후 이하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대단한
존재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설사 적이라 하더라도 남해악신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를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구마지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대
리에서 강남까지 잡아온 것만 하더라도 그를 퍽이나 중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영과 목완청과 같은 소녀는 더 더욱 그를 한 번 보자마자 사모하지 않았던
가.
그는 한평생 오늘처럼 남에게 경시당한 적은 없었다. 물론 상대방에서는 예의를 갖
추기는 했으나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예의였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모용 공자라
는 존재는 대단한 것으로 부각되어 있었지만 그는 아주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
과했다. 이 며칠 동안 그 누구라도 모용 공자를 입에 담기만 하면 금새 사람들이 표정
이 달라졌고 하나 같이 귀를 기울이지 않던가?
왕어언은 물론 아주, 아벽, 포부동 그리고 심지어는 등 첫째 라는 사람, 공야, 둘째
라는 사람 그리고 풍 네째라는 사람도 하나같이 모용 공자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단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처럼 남을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감정을 느껴
보지 못한 터였다. 홀로 배를 저어 호수 위를 가로지르자 마치 모용 공자가 하늘에서
그를 향해 냉소하는 것 같았고 마치 모용 공자가 다음과 같이 그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단예, 단예야, 네가 어찌 나의 몸에 난 털 하나에라도 비교되겠는가? 너는 나의 외사
촌 누이에게 뜻이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려는 것 아니겠느냐? 너 자신은
몰염치하고 가소롭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는 화가 난 만큼 노를 힘주어 저어댔다. 한 시진 가량 노를 젓자 그의 몸 안에 내
력이 천천히 발동되기 시작됐다. 배를 저으면 저을수록 정신이 맑아 왔고 가슴 속이
답답하고 우울하던 것도 점점 사라져갔다.
다시 한 시진 가량 노를 젓자 날이 조금씩 밝아왔다. 그러자 북쪽의 운무 속에 쌓여
있는 한 조그만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는 대략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청향수사와 금운소축은 모두 동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북쪽으로만 배를 저으면
청향수사나 금운소축으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노를 저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가닥 연연한 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도 모
르게 작은 배가 북쪽으로 한 자 나아가면 왕어언과 그 만큼씩 더 멀어지는 것 같아 서
글픈 생각이 들었다.
오시쯤 되어서야 그는 자신이 보았던 그 조그만 산 아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언덕에 오르자마자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산은 바로 마적산(馬跡山)이었다.
마적산에서는 무석(無錫)이 무척 가까웠다.
그는 책에서 무석이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은 춘추전국 시대부터 유명한
한 채의 대성(大城)이었다. 그는 배로 다시 돌아가 북쪽으로 저어갔다.
배는 신시쯤 되어서 무석성 뱃터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니 행인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매우 번화해 보였다.
그리고 대리와는 또 다른 풍물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발걸음 내키는 대로 걸었다. 별안간 그는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따. 바로
초당(焦糖)에 간장을 섞어서 살코기를 익히는 냄새였다. 그는 반나절 동안 음식을 전
혀 먹지 못했고 거기다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왔기 때문에 배가 무척 고팠다. 그는 냄
새가 나는 곳을 찾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한 커다란 주루가 거리 한쪽에 있었다. 현반 위에는 "송학루"(松鶴
樓)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간판은 오랜 세월 바람에 시달렸는지 시커먼 연기에
찌들어 있었으나 금(金)으로 만든 글씨는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고, 그곳에서 술 냄
새와 고기 냄새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요리사들이 음식을 다지는 소리와 사환들이 음
식을 나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나고 있었다.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환이 즉시 접대를 했다.
단예는 한 되의 술과 네 가지의 안주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 위층 난간에 기대
어서 스스로 술을 따라 마셨다. 별안간 처량하고 외로운 감이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
르게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때 서쪽에 앉아 있던 한 덩치 큰 사나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얼음장 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재빠르게 두어 번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단예는 그 사람의 체구가 매우 우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십여 세의 나이로
몸에는 잿빛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해진 상태였다.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
을 하고 있었고 높이 솟은 코에 커다란 입을 가졌으며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꽤나 풍상을 겪은 듯이 보였다. 그 사내의 시선은 만인을 굴복시키는 위엄이 있었다.
단예는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대한(大漢)이군! 이 사람이야말로 연나라나 조나라 등 북쪽에 있는 나
라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비분강개하던 지사를 닮아 기개가 늠름하구나. 강남 땅이
나 혹은 대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물이다. 포부동은 자칭 자기가 영기발랄하다
고 하였지만 이런 대한이야말로 영기발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한의 탁자 위에는 한 접시의 익힌 소고기와 한 그릇의 국, 그리고 두
주전자의 술이 놓여 있을 뿐 다른 음식은 없었다. 이로 미루어 그는 먹고 마시는 것도
매우 호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대한은 단예를 한두 번 쳐다 보더니 고개를 돌리고 혼자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단예는 그렇지 않아도 적막하고 무료한 때라 그러한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그리하
여 그는 사환을 불러 그 대한의 뒷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의 술값과 안주값은 나한테 받도록 하게.
그 대한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단예는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눔으로써 마음
속의 외로움을 떨쳐 보려고 했으나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랐다.
다시 술을 석 잔 마셨을 때 이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고 곧이어 다른 두 사람이 올라왔다.
앞에 선 사람은 한쪽 발을 들고 있었는데 거의 지팡이에다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놀림은 매우 신속하고 민첩하였다.
두 번째 사람은 울상을 짓고 있는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대한의 탁자 앞으로 가더
니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읍을 했다.
그 대한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몸을 일으키거나 답례하지 않았다.
다리를 절룩이는 사내가 나직히 말했다.
큰 형님께 알립니다. 상대방이 약정한 시간은 내일 이른 아침입니다. 바로 혜산량정
(惠山凉亭)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시간이 좀 촉박하군.
노인도 말했다.
형제는 그들과의 약속을 삼일 후로 미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우리의 사
람 수가 부족한 것을 알고 있는 듯 자신감에 넘친 목소리로 "감히 그 장소에 나설 용
기가 없다면 내일 아침 그 장소에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대한은 말했다.
그렇군, 그러면 모두들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하게. "오늘 밤 삼경에 혜산에 모이도
록 하라"고 말일세. 우리가 먼저 가서 상대방을 기다리세.
두 사람은 허리를 굽혀 읍을 하고는 돌아서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들 세 사람의 말하는 소리는 지극히 낮았다. 그래서 윗층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예는 내력이 고강한 까닭에 귀가 남달리 밝아 들려
오는 말들을 알아 들을 수가 있었다.
그 대한은 이 때 우연인지 고의인지 다시 고개를 돌려 단예를 쳐다보았다.
단예가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
었다고 판단했는지 두 눈에 정광을 폭사하면서 차갑게 코웃음쳤다.
단예는 그 코웃음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서 왼손을 흠칫했다. 그 바람에
탁, 하니 술잔이 떨어지면서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 대한은 빙그레 웃으
며 입을 열었다.
형씨는 어인 일로 그토록 놀라워하고 당황해 하시오? 이쪽으로 와서 같이 한 잔 하
는게 어떠하오?
단예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단예는 사환에게 장과 젓가락을 다시 대한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갖다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대한의 맞은 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성명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형제는 알면서 물을 필요가 어디 있소? 우리 예의에 구애됨이 없이 호탕하게 몇 잔
의 술을 마시는것이 좋지 않겠소? 적아(敵我)가 분명하게 된다면 술맛이 없게 되는 것
이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께서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모양이오. 나를 적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만.
..... 하지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말에는 소제도 찬성하는 바입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그리고선 한 잔의 술을 따라서는 쭉 들이켰다.
그 대한은 미소지었다.
형씨도 꽤 시원시원하구료. 하지만 술잔이 너무 적소.
그리고 그는 사환을 불렀다.
사환, 대접 둘을 갖다 주고 열 근의 고량주를 내어 오게.
그 사환과 단예는 열 근의 고량주라는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환은 웃으며 말했다.
나리, 열 근의 고량주를 다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 대한은 단예를 가리켰다.
이 공자께서 내게 한 턱을 내시겠다는데 왜 자네가 이 공자의 돈을 아끼려고 하는가
? 열 근이 부족하다면 스무 근을 갖다 주게나.
사환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대접 두개와 한 항아리의 술을 통째로 탁자 위에 갖다 놓았다.
대한은 말했다.
두 대접에 잔뜩 따라라.
사환은 그 말에 따라 술을 따랐다.
대접에 가득 차도록 술을 따르자 단예는 대뜸 술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야말로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대리에 있을 때 간혹 두어 잔 술을 마
셨을 뿐 이처럼 큰 대접으로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 대한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먼저 함께 열 대접의 술을 마셔봄이 어떻겠소.
단예는 그의 눈에 비웃음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만약 평소였다면 그는 거절을 했을
것이며 도저히 주량이 따라 낼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청향수사에서 냉대를 받을 대로 받은 뒤로 그는 생각을 달라졌다.
"이 대한은 십중팔구 모용 공자와 한 패거리인 것 같다. 등첫째와 공야 둘째가 아니
라면 바로 풍 네째일 것이다. 그가 이미 남과 싸움을 약속했는데 상대는 개방이 아니
면 서하의 "일품당"일 것이다. 흠, 모용공자라면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가? 나는 결코
그의 수하들에게 멸시를 받지는 않겠다. 기껏해야 취해서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는 가슴팍을 내밀고 큰 소리를 쳤다.
불초는 목숨을 걸고 그대를 상대해 드리지요. 나중에 술을 마신후 어떤 행동을 저지
르더라도 행실은 탓하지 마시요.
그는 한 대접의 술을 들고는 꿀꺽꿀꺽 마셨다. 그가 이 한 대접의 술을 마신 것은
홧김에 무엇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어언은 곁에 없었으나 그로서는 바로 그녀에게 보란듯이 술을 마신 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용복과 대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앞
에서 결점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심리와 같았다. 따라서 한 대접의 독한 술은커녕 독약
이라도 아마 주저하지 않고 마셨을 것이었다.
그 대한은 단예가 이처럼 호방하게 나오자 뜻밖이라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참 시원하오!
그 대한은 마치 목이 마르기라도 하였던 듯 대접을 들자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리
고 다시 두 대접을 더 마시는 게 아닌가!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맛좋은 술이군! 맛좋은 술이야!
그는 후 하니 숨을 내쉬었다. 그런 후에 다시 한 대접의 술을 마셨다. 그 대한 역시
한 대접을 마시고 대접에 술을 따랐다.
이 한 대접의 술은 거의 반 근은 되었다.
단예는 한 근의 술을 마시자 뱃 속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했다.
"모용복이 어떻다는 거야?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내가 어떻게 그의 부하에게 질 수
있겠어?"
그는 다시 세 번째 대접을 들고 술을 마셨다.
그 사내는 삽시간에 그가 취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그는 단예가 세 번째 대
접만 들이킨다면 더 이상 못 견디게 취해 쓰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예는 세 번째 대접의 술을 들이마시기 전에 이미 가슴이 답답해지고 구역질이 났
다. 그런데 다시 독한 술 한 대접을 들이키게 되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배 속의 술이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 별안간 단전에서 여러 가
닥의 진기(津氣)가 끓어올랐다. 그러자 여러 가닥의 진기가 마구 요동치는게 아닌가?
바로 천룡사에서 진기를 거둬들이지 못했을 때의 상태와 흡사했다. 그는 즉시 백부
님이 전수해준 요령으로 그 진기를 대추혈(大椎穴)로 모아 들였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술기운이 놀랍게도 진기와 섞이는 게 아닌가?
술이나 물은 형태가 있는 사물로 진기나 내력처럼 혈도에 모아 둘 수가 없었다. 그
는 술과 섞인 진기가 천종혈(天宗血)과 견정혈(肩井血)에서 시작하여 왼팔을 타고 소
해(小海), 지정(支正), 양로(養老)등의 혈도를 지나 손바닥에 있는 양곡(陽谷), 후할
(後轄), 전곡(前谷)등의 혈도를 통하여 새끼 손가락의 소택혈(小澤穴)로 쏟아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때 그가 움직인 진기의 운행 방법은 바로 육맥신검의 "소택검"이었
다. 소택검은 본래 힘은 있으나 형체가 없는 검기였다.
이때 그의 새끼손가락에서는 한 줄기의 술이 천천히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단예는 처
음에는 이런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얼마후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면
서 새끼 손가락에서 술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거 정말 절묘하기 이를 데 없군!"
그는 왼손을 바닥 쪽으로 내려뜨렸다. 그 대한은 그러한 단예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
했다. 그런데 단예가 본래 취해서 눈빛이 몽롱해지더니 조금 지나자 다시 맑아지는 것
을 보고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의 주량은 정말 약하지 않구료. 진정 그럴싸하오.
그리고는 다시 두 대접에 술을 따랐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나의 주량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답니다. 흔히들 지기를 만나게 되면 천 잔의 술도
부족하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 한 대접의 술은 내가 볼 때 이십여 잔의 술밖에 되질
않습니다. 따라서 천 잔이 되려면 약 오십 개의 대접이 있어야 할겁니다. 그러나 이
형제는 아마도 오십 대접의 술을 마시진 못할 겁니다.
그는 다시 자기 앞에 놓인 대접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운기행공을 했다.
그는 이번에는 왼손을 창가의 난간에 걸쳤다. 손톱 사이로 흘러 나오는 술이 난간을
타고 아래층 담장 밑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말 귀신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
쪽 같았다.
삽시간에 그가 마신 네 대접의 술을 모조리 쏟아낼 수 있었다.
그 대한은 단예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독한 술을 네 대접이나 따라 마시는 것을
보고는 무척 기뻐했다.
좋소, 좋아. 지기를 만나게 된다면 천 잔의 술도 모자란다고? 내가 먼저 잔을 비워
경의를 표하도록 하지.
그는 두대접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잇따라 두 대접에 가득찬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시 단예에게 두 대접의 술을 부어 주었다.
단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그술을 모두 마셨다. 그
독한 술을 마시는데도 맹물이나 찬물을 마시는 것보다 쉬워 보였다.
두 사람의 이와 같은 술내기는 송학루의 윗층이나 아랫층에 있던 손님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조수들까지도 이층으로 올라와서는 두 사람을 에
워싸고 구경을 하게 되었다.
그 대한은 다시 말했다.
사환, 다시 이십 근의 술을 더 갖다 주게나.
사환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도 재미가 나서 더 만류하지 않고 다
시 커다란 술항아리를 가져왔다.
단예와 대한은 나 한 대접, 너 한 대접하는 식으로 마셔댔다. 그야말로 호적수였다.
밥 한 끼 먹을 동안에 두 사람은 이미 서른 대접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단예는 그 독한 술이 자기의 체내를 한 바퀴 돌 뿐 즉시 쏟아져 나오므로 주량이 무
궁무진할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한은 진짜 실력이었다.
따라서 단예는 그가 잇따라 삼십여 대접이나 비우고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것
을 보고 속으로 여간 탄복하지 않았다.
처음 그는 그 대한이 모용 공자와 한 패거리라고 생각하고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태도가 호방하고 영기발랄한 것을 보고 불현듯 그 대한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겨룬다면 나는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내는 너무나 많은 술을 마신
결과 몸을 해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십여 대접을 마시게 되었을 때 입을 열었다.
형씨,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사십여 대접을 마셨겠지요?
그 대한은 웃으며 말했다.
형씨 그대는 정신이 맑구려. 대접의 수까지 다 헤아리고 있으니 말이요.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형씨와 나는 정말 호적수로서 임자를 만난 것이외다. 그러니 승부를 가리자면 쉽지
않겠구려. 이렇게 마셔대다간 이 형제의 주머니에 있는 술값이 모자라겠소.
그리고는 품속에서 꽃을 수놓은 주머니를 꺼내어서 탁자 위에 던졌다.
탈칵, 하는 가벼운 소리로 보아 그 주머니에는 금은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단예는
사실 구마지에게 잡혀오느라고 몸에 지닌 돈이 별로 없었다.
이 꽃을 수놓은 주머니는 금실과 은실로 장식했기 때문에 첫눈에 귀한 물건임을 알
수가 있었으나 주머니 안은 부끄럽게도 돈이 얼마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한은 이를 보고 크게 웃더니 몸에서 한 덩이의 은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단
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갑시다.
단예는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대리에 있을 때 황제의 아들로서 진심으로 사귄
친구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술내기로 이 사내를 사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대한은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그는 앞장서서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는데 그야말로 길을 따라 질풍같이 나아가는 것이었다.
단예는 한 가닥 진기를 끌어올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는 무공은 모
르지만 내력이 충만하기 이를 데 없어 그처럼 빠른 걸음으로 급히 따라가도 조금도 가
슴이 뛰거나 숨이 차지 않았다.
그 대한은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좋소, 누구의 걸음이 빠른지 시험해 봅시다.
그리고는 힘껏 달려갔다.
단예는 몇 걸음 급히 내달렸다. 그런데 너무 급히 서두른 나머지 그만 휘청하니 쓰
러질 뻔했다. 그 기세를 빌어 그는 왼편으로 반 걸음 비스듬히 내딛었다.
그제서야 그는 바로 설 수 있었다. 이번에 그는 공교롭게도 능파미보(凌波微步)를
펼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우연히 밟게 된 이 능파미보로 인해서 평소 걸음걸이보다
빨리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대단히 기뻐하였다. 두 번재 걸음도 능파미보의 걸음걸이 요령으로 내
딛었다. 그렇게 되자 대번에 그 대한을 따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
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람 소리가 휙휙휙, 나며 길가에 서있는
나무들이 다투어 그들의 뒤로 밀려나갔다.
단예는 능파미보를 배울 때는 다른 사람과 그 발걸음을 시험해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대한은 크게 발걸음을 떼어 놓으며 더욱 빨리 나아갔다. 삽시간에 그는 단예를
떼어 놓고 훨씬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늦추고 숨을 돌
릴 양이면 단예는 또 뒤 쫓아 따라왔다.
대한은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단예의 몸놀림은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다. 마치 정원
에서 산보를 하는 사람처럼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대한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으며 다시 발걸음을 몇 번 재촉해 보았다. 그러면 단예는 또 조금 뒤쳐졌다.
그러나 얼마 후면 금방 다시 뒤따라왔다.
이와 같이 몇 번 시험을 하게 된 후 그 대한은 단예의 내력이 자기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십여리 안팎에서 단예를 이기는 것은 쉽지만 만약 삼사십 리의 먼 길을 간다
면 승부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육십여 리 이상을 가게 된다면 자기가 반드시
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모용 공자, 오늘 이 교봉(喬峯)은 그대에게 승복하겠소. 고소 모용씨는 정말 명불허
전(名不虛傳_이름이 헛되이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구료.
단예는 재빨리 말했다.
소제의 성은 단이고 이름은 예라고 합니다. 형씨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요.
대한은 의아한 빛으로 말했다.
뭐라고? 그대가 모용 공자가 아니시라고?
단예는 미소했다.
소제가 이 강남 땅에 온 이후 매일같이 모용 공자의 대명을 귀로 들었습니다. 따라
서 매우 우러러 보는 마음 크오나 아직까지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내가 나를 모용복으로 오해했다면 적어도 이 사내는 모용복의 일파는 아니겠
구나!"
따라서 그는 그 사내에게 더욱더 호감을 갖고 물었다.
형씨께서는 스스로 성이 교이고 이름이 봉이라고 했지요?
그 대한은 놀람과 의아한 빛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불초가 교봉이오.
단예가 말했다.
불초는 대리 사람으로 강남땅에 처음 와 실로 형씨와 같이 호탕한 인물을 사귀게 되
니 실로 영광이 아닌가 합니다.
교봉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음, 형씨는 대리 사람 단씨의 자제였구료. 그대의 무공이 뛰어난 것도 무리는 아니
군! 단형, 그대는 어인 일로 이 강남 땅까지 왔소?
단예는 말했다.
말하자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소제는 실로 어떤 사람에게 잡혀서 이곳까
지 왔습니다.
그는 어떻게 구마지에게 잡혀 왔으며 어떻게 모용복의 시녀들과 만났는가 하는 사연
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교봉도 그 말을 듣고 놀람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단형,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솔직하구려. 내 한평생 그대와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소. 그대와 나는 한 번 보고 마음이 통했으니 두 사람의 의형제를 맺음이 어떻
겠소?
단예는 기뻐했다.
소제로서도 바라던 바입니다.
두 사람은 나이를 따져 보았다.
단예는 교봉보다 열한 살이 적었다. 자연히 교봉이 형이 되었다.
그들은 흙을 모아서 향을 삼고 하늘을 향해 여덟 번의 큰절을 올렸다. 한 사람은 "
아우님"하고 부르고 다른 한 사람은 "형님, 형님"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단예는 말했다.
소제는 형님께서 오늘 밤 송학루에서 적과 만날 약속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
제는 무공은 모르나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데 형님께서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교봉은 그에게 몇 마디의 말을 물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무공을 모르는 게
아닌가.
교봉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아우님의 그와 같은 내공으로 상승무공을 배우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네. 아우님이
오늘 밤 우리들이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적의 손 씀씀이가 악랄할지
모르니 아우님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게나.
단예는 기뻐서 말했다.
그거야 형님의 당부에 따르지요.
교봉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우리 형제는 함께 무석성 안으로 들어가 다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싸울 장소로 가도 늦지 않을 것이네.
단예는 그가 다시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전 마흔 대접이나 술을 마셨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술을 마시자고 하
는구나!"
생각을 마친 단예는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가 형님과 술내기를 한 것은 사실로 말하면 형님을 속인 것입니다. 형님
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요.
그는 즉시 어떻게 하여 술을 새끼 손가락 끝으로 흘러 내보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
다.
교봉은 놀라 말했다.
아우님, 그대의 그 수법은 혹시 육맥신검이라는 기이한 무공이 아니오?
단예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소제가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많이 서툴답니다.
교봉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선사에게서 대리 단씨 집안에 "육맥신검"이라는 재간이 있어 무형의 기운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믿지 않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정말
그런 신공이 있었구려.
단예는 말했다.
기실 이 재간은 형님과 술내기를 할 때 요령을 피우는 것 이외에는 별 소용이 없습
니다. 내가 구마지란 그 화상에게 잡혔을 때 전혀 반격할 여지가 없었거든요. 세상 사
람들은 육맥신검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님, 그
런데 술은 몸을 해치니 적당히 마셔야만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더 이상은 술을 마
시지 않기로 합시다.
교봉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아우님의 충고도 옳은 말씀이야. 그러나 이 못난 형은 몸이 황소처럼 건장
하고 어릴 때부터 워낙 술을 좋아해서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더 난다네. 오늘 밤 대
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좀더 독한 술을 많이 마신 후에 그들과 한바탕 놀아볼 생각
이라네.
두 사람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무석성으로 되돌아 왔다. 이번에는 걷기
시합을 하지 않고 천천히 어깨를 마주하고 걸어왔다.
단예는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어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나 좀체로 모용복과 왕어언
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몇 마디의 말을 나눈 이후 그는 참을 수 없어 교봉에게 물었다.
형님, 조금 전에 소제를 모용 공자로 오해하셨는데 혹시 그 모용 공자의 생김새가
소제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까?
교봉은 말했다.
나는 평소 고소 모용씨의 대명을 들어 왔다네. 이번에 강남땅으로 온 것도 바로 그
사람 때문이지. 소문을 듣자하니 그 사람은 점잖고 준수하다고 하더군. 나이는 약 스
물 일곱 여덟 살 가량 되었으니 아우님보다는 서너살 위이지. 그러나 나는 모용복 이
외에 강남에 무공이 고강하고 용모가 우아하면서 준수한 젊은 공자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그래서 사람을 잘못 알아 본게야. 정말 부끄러우이.
단예는 그가 모용복을 대해 말할 때 무공이 고강하고 용모가 우아하고 준수하다고
표현하자 그만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금 할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형님이 멀리서 그를 찾아 온 것은 그를 친구로 사귀기 위해서였습니까?
교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본래 그를 친구로 사귀었으면 하고 바랬었지만 아마도 이 바램은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네.
단예는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죠?
교봉은 말했다.
나에게 절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두 달 전에 비명에 갔네. 그런데 모든 사람
들은 하나같이 모용복의 흉수에 의해 죽었다고 하네.
단예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수법을 상대에게 펼친다는 방법을 썼군요?
교봉은 말했다.
맞아, 이 친구의 치명상은 바로 그 친구가 명성을 떨치던 절기에 의한 것이었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러나 강호에는 기이하고 괴상한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판이라 좀처럼 사리
를 판단하기 어렵지. 그러니 소문으로 들은 말만으로 경솔하게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
울 수는 없다네. 이 형이 강남으로 온 이유는 바로 그 진상을 조사하는 데 있네.
단예는 물었다.
진상은 밝혀졌습니까?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직은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군. 그런데 나의 그 친구로 말하면 명성을 떨친 지도
오래 되었고 위인됨도 단정하며 성격도 온화한 호인이지. 그리고 언제나 일을 처리함
에 있어서도 지극히 신중을 기한다네. 이유 없이 모용 공자에게 죄를 지을 일을 한 사
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어째서 그가 남에게 암살을 당하게 되었는지 실로 이해하
기가 곤란하다네.
단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이 굵은 것 같은데 속마음은 매우 자상하고도 세심하구
나. 곽선생이나 과언지, 사마림, 구마지 등처럼 자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모용 공자
가 흉수라고 무조건 단정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형님과 내일 아침 만나기로 한 강적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입니까?
교봉은 말했다.
그들은......
그때였다. 큰길로부터 의상이 남루하고 마치 거지 같은 두 사내가 질풍과 같이 다가
왔다. 교봉은 하던 말을 그쳤다. 두 사라은 교봉 앞에 이르더니 일제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방주님께 알립니다. 네 사람이 "대의분타"(大義分舵)로 뛰어 들었습니다. 장타주는
그들의 솜씨가 매우 뛰어난 것을 보고 결코 선의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직감하고 만
약 당해 내지 못할까 하여 속하로 하여금 "대인분타"(大仁分舵)의 사람들을 부르러 가
라고 했습니다.
단예는 그들 두 사람이 교봉을 보고 방주라고 부르며 태도가 지극히 공손한 것을 보
며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형님은 어떤 방(幇)의 두목인 모양이구나."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어떤 자들이지?
한 사내가 대답했다.
그들 중 세 명은 여자이고 한 명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중년 사내로 태도가 매우
무례했습니다.
교봉은 싸늘히 코웃음치며 말했다.
흠, 장타주도 마음이 많이 약해졌군. 상대방은 단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도 상대
를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사내는 말했다.
방주님, 그 세여자도 무공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가보도록 하지.
두 명의 사내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예.
그들은 손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교봉의 뒤로 가서 섰다.
교봉은 단예에게 물었다.
형제, 나와 함께 가겠는가?
단예는 말했다.
물론이죠.
두 명의 사내가 앞장을 섰다.
일 마장쯤 나가서는 왼쪽으로 돌았다. 그리고는 꾸불꾸불한 시골의 밭고랑을 따라
걸었다.
이 곳의 토양은 매우 비옥하였고 도처에 냇물과 도랑물이 교차하고 있었다.
수 마장쯤 나아가서는 행자나무 숲을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한 사람의 음성이 행자나무 숲속에서 들려왔다.
우리 모용 형제가 낙양으로 가서 너희 방주를 만나려고 하는데 왜 너희들은 모두 무
석으로 왔지? 이것이야말로 고의로 만나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담
이 없어 두려움을 느꼈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우리 모용 형제가 수고스럽게도 헛걸음
을 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야.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이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 소리를 듣게 되자 단예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바로 "아니로소이다."의 주인공인 포부동의 목소리였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왕소저도 그를 따라 함께 왔을까? 세 사람의 여자가 함께 왔다지 않은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개방은 천하 제일의 방파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늘 개방의 방주와 의형제를 맺었단
말인가?"
이때 북방 말씨를 쓰는 사람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모용 공자는 방주님과 사전에 약속이라도 했소?
포삼선생은 말했다.
약속을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지. 모용 공자가 낙양으로 가셨다면 개방의 방주가 자
리를 떠서 모용 공자가 허탕을 치게 하면 안 되지. 그럴 수가 없단 말일세......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그 사람은 다시 물었다.
모용 공자는 편지나 쪽지로 개방에 그러한 사실을 알렸습니까?
포 선생이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모용 공자도 아니고 개방의 방주도 아닌데 어떻게 안
단 말이야? 당신의 그러한 말은 너무나 사리에 닿지 않아. 어처구니가 없군. 어처구니
가 없어!
교봉은 얼굴 빛을 굳히더니 성큼성큼 살구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단예는 그 뒤를
따랐다.
살구나무 숲에는 두 패의 사람들이 나뉘어 마주보고 서 있었다. 포 선생의 등 뒤에
는 세 소녀가 서있었다. 단예의 시선은 그 세소녀 중 하나에게 못박히자 다시는 떨어
질 줄 몰랐다.
그 소저는 물론 왕어언이었다.
왕어언은 나직하게 어, 하더니 말했다.
그대도 왔군요?
단예는 말했다.
나도 왔소.
그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왕어언은 두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저런 눈으로 날 쳐다보다니 정말 무례하군!"
그러나 그녀는 단예가 자신의 용모를 우러러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마
음 속으로는 기뻐했지 결코 화를 내지는 않았다.
행자나무 숲속에서 포부동과 맞은 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의상이 남루한 거지들이었
다.
앞에 서있던 사람은 교봉이 온 것을 보자 얼굴에 기쁜 빛을 띠고 즉시 마중 나왔다.
그리고 그 등뒤에 있던 개방의 무리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예를 하며 부르짖었다.
속하 등이 방주에게 인사드립니다.
교봉은 포권의 예를 했다.
여러 형제들도 안녕하셨소?
포삼 선생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그대가 개방의 교방주이시요? 형제는 포부동이라 하오. 그대는 반드시 나의 이
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오.
교봉은 말했다.
알고 보니 포 선생이시군. 불초는 오래 전부터 영명을 들어 왔소이다. 오늘 이렇게
귀하를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아니로소이다. 나에게 무슨 영명이 있소이까? 그러나 강호에 악명이 있긴 좀 있죠.
세상 사람들은 이 포부동이 시비만 일으키고 입만 벙긋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하지요. 헤헤헤...... 교 방주, 그
대가 마음대로 강남땅에 온 것은 그대의 잘못인가 하오.
개방은 천하 제일의 대방이었다. 방주의 신분은 존귀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방의
무리들은 방주에 대하여 그야말로 신처럼 받들었다.
뭇 사람들은 포부동이 자기들의 방주에게 대뜸 꾸짖는 말을 하자 모두들 크게 분개
했다. 장타주 등뒤에 섰던 일흔 일곱 사람 가운데 거의가 칼자루를 움켜잡거나 주먹을
쥐면서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교봉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째서 불초가 잘못했는지 선생은 깨우쳐 주시구려.
포부동은 말했다.
우리 모용 형제는 그대 교 방주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개방에는 영웅
호걸이 많다는 사실을 듣고 특별히 귀하를 만나려고 낙양으로 달려갔소. 그런데 그대
는 어째서 멋대로 이 강남 땅으로 왔소? 허허허, 이럴 수가 있소? 이럴 수가 있느냐
말이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용 공자가 낙양의 개방으로 떠나셨다니...... 불초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
이 공손히 맞아들였을 것이오. 미처 나아가 맞아들이지 못한 점 사과드리리다.
그리고는 포권을 하고 예를 했다.
단예는 속으로 감탄했다.
"형님의 이 말들은 정말 적절하구나. 정말 개방 방주의 풍모로다. 만약 그가 포 선
생에게 성질을 부렸다면 그것이야말로 방주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포부동은 교봉의 사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중을 미처 나오지 못한 죄는 확실히 사과를 해야 하지요. 물론 흔히들 모르고 지
은 죄는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만 벌을 내릴 권리는 상대방에게 있지요.
그는 의기양양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구나무숲 뒤에서 몇 사람이 일
제히 터뜨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행자숲을 쩌렁하게 흔들어 놓을 정도였다.
커다란 웃음 소리 가운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강남의 포부동이 개방귀를 잘 뀐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포부동은 말했다.
소리나는 방귀는 냄새가 없고 소리를 내지 않는 방귀가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고 하
던데 조금 전의 개방귀는 소리도 크고 냄새도 대단하군. 혹시 개방육로가 뀐 것이 아
니오?
그러나 숲 속의 그 사람은 말했다.
포부동은 개방육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여기서 터무니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는거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숲 뒤쪽에서 네 명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어떤 사람은 수염이
허옇고 어떤 사람은 붉은 얼굴을 했는데 제각기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네 귀퉁이로 각각 서더니 왕어언과 포부동 등 네 사람을 각각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포부동은 개방이 강호에서 제일 가는 큰 방파이며 방에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개방 육로는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수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거만하고 어릴 적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고 하지만 개방의 육로 가운데 사로(四老)가 나타나자 속으로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단났군. 야단났어! 아무래도 오늘 이 포삼선생의 영명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겠
군!"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말했다.
네 분 늙은이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소? 아니면 이 포 선생과 한바탕 싸움이라
도 벌일 셈이요? 어째서 다른 두 늙은이는 나서지 않는 것이오? 한편에 매복해 있다가
이 포 선생애게 기습이라도 하겠단 말이요? 좋소, 좋소, 매우 좋소! 이 포삼선생이 가
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싸움이라오!
돌연 허공에서 한 사람이 뚝 떨어져 내리며 소리쳤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싸움을 좋아하는 자는 누구인가? 포 선생인가? 아니지, 아니야!
그는 바로 강남일진풍(江南一陳風)이야!
단예는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한 그루의 탱자나무 가지 위에 한 사람이 서있었
다.
그 나뭇가지가 연신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뭇가지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
왔다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몸매는 매우 수척하고 왜소한 편이었다. 나이는 약 서른 두셋 정도로 보
였으며 두 뺨은 움푹 꺼져 있었다. 입술 위에 두 가닥 쥐꼬리 모양의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눈썹도 아래로 처져 있는 형편이어서 용모가 추하기 이를데 없었다.
단예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바로 아주와 아벽이 말하던 네째 오라비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벽은 그를 불렀다.
풍 네째 오라버니, 공자의 소문을 들었나요?
풍파악(風波惡)은 말했다.
오늘 호적수를 만나게 되었으니 신나게 싸우고 보자. 공자님의 일에 대해서는 나중
에 이야기하자꾸나!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재주를 한 번 넘더니 북쪽의 키가 작고 땅딸한 노인
에게 덮쳐갔다.
그 노인은 손에 들었던 강철 지팡이를 재빨리 앞으로 휘둘러 풍파악의 가슴을 찔러
왔다. 이 지팡이는 거위알만한 굵기였으며 밀어낼 때 생기는 파공성은 요란하기 그지
없었다. 풍파악은 몸을 날려 곧장 덮쳐들며, 손을 뻗어 그 강철 지팡이를 낚아채려고
했다. 그 노인은 손목을 한 번 떨치더니 강철 지팡이를 쳐들고 그의 가슴을 재차 찔러
왔다.
풍파악은 부르짖었다.
정말 위험한걸?
그는 갑자기 몸을 낮추고 상대방의 허리를 때리려 했다. 그 키가 작고 땅딸한 노인
의 강철 지팡이는 이미 바깥쪽으로 기울여진 상태였는데 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지팡이를 거두어 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호통을 치며 즉시 발을 날려 풍파악
의 배를 걷어찼다.
풍파악은 몸을 비스듬히 날려 피하더니 곧장 동쪽의 붉은 얼굴을 한 노인 앞으로 다
가갔다. 하얀 광채가 눈부시게 번쩍이는 가운데 어느덧 그의 손엔 한 자루의 칼이 들
려 있었고 그 칼은 비스듬히 내려쳐갔다. 붉은 얼굴을 한 노인의 손에 들린 것은 한자
루의 괴두도(愧頭刀)였다. 칼등이 두텁고 날이 얇은 것인데 칼날이 긴 편이었다. 풍파
악이 칼을 휘두르며 베어오자 괴두도를 세우고 풍파악의 칼날과 맞부디쳐 왔다. 풍파
악이 부르짖었다.
그대의 무기는 매섭군! 그대의 칼과 부딪히면 크게 손해를 보겠어!
그는 뒤로 훌쩍 몸을 날려 물러났다. 그러면서 냅다 뒤로 칼을 휘둘러 남쪽의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을 치려고 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오른손에 한자루의 철간(鐵磵)을 들고 있었다. 철간 위에는 무
쇠로 만든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는데 바로 적의 무기를 낚아채는 데 필요한 가시였
다. 그는 붉은 얼굴의 노인의 괴두도가 아직도 공세를 거두어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자
기가 상대방의 초식을 받는다면 붉은 얼굴의 노인과 더불어 협공하는 것이라 생각했
다. 그는 자기의 신분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피했다.
풍파악은 싸움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나게 싸우면 싸울수록 재미있어 했고
누가 이기고 지는지에 대하여는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싸울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을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이 몸을 날려 물러선 것은 누가 보아도
일부러 싸움을 회피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되는 일이건만 풍파악은 무림의 예의나 규칙
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피하느라고 생긴 빈틈을 노리고 연이어 네 번이나 후려쳤다.
모두 다 공격하는 초식이있으며 그 기세는 질풍처럼 신속무비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그가 계속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재빨리 철
간을 휘둘러 맞받으며 잇따라 네 걸음을 물러서서야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등은 한 그루 살구나무에 닿게 되어 물러설래야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철
간을 비스듬히 쳐들고 휙, 하는 음향을 내며 일초를 공격했다. 이것은 그가 수세에서
공세로 바꿀 때 쓰는 특기의 하나였다.
풍파악은 호통을 내질렀다.
다시 한 사람 더 공격해야지?
그는 하얀 수염의 노인이 휘두르는 철간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물러서면서 칼을 휘
둘러 커다란 원을 그리는 듯하더니 개방 장로 가운데 네번째 장로를 베어갔다.
네 번째 장로는 두 팔이 무척 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왼손에 한 가지 부드러운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풍파악이 공격하는 것을 보자 팔을 쳐들고 무기를 뻗쳐냈다. 그
가 휘두른 것은 쌀을 담을 때 쓰는 푸대였다. 푸대는 바람을 맞게 되자 불룩해졌고 주
동이를 벌리게 되었는데 그는 그 푸대를 휘둘러서 풍파악의 머리 위를 덮쳐씌우려고
했다.
풍파악은 놀라면서도 기뻐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정말 묘하군, 정말 묘해! 내가 그대와 싸우기로 하지!
그가 한평생 좋아하는 것은 싸움이었다. 상대방이 몸에 이상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거나 희귀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더욱 좋아했다. 마치 유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기이
한 형태의 산천을 구경하는 심정과 같았고 또 미식가가 새롭고 맛좋은 음식을 먹게 되
었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었다. 풍파악은 한번도 이와 같은 무기를 가진 사람
과 손을 써보지도 못했고 또한 들어보지도 못했기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암암리에 경계
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칼끝으로 찔러보았다. 칼끝으로 푸대를 찢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 그런데 긴 팔의 노인은 별안간 푸대를 오른손으로 옮기더
니 왼판을 빙글 돌리며 풍파악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하지 않는가?
풍파악은 고개를 쳐들고 피했다. 그리고 칼을 아래에서부터 그어올려 상대방의 사타
구니를 노리고 냅다 베어나갔다. 그런데 긴팔의 노인은 통비권(通臂拳)이라는 교묘한
재간에 능통해 있었다. 그 한 대의 주먹은 힘이 다 뻗쳐나온 듯이 보였으나 재차 주먹
이 앞으로 반 자 정도 더 뻗어나오는 게 아닌가? 다행히 풍파악은 한평생 싸움하기를
좋아하여 크고 작은 싸움은 수천 번 해본 경험이 있어 임기응변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상대방의 주먹을 깨물려고 했다. 긴 팔의 노인은 이 한 대의 주먹으
로 그의 이빨을 몇 대 부러뜨리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주먹이 그의 입가에 닿으려
는 순간 풍파악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물려고 하지 않는가? 긴팔의 노인은 손을 움
츠렸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으며, "아"하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손가락 끝이
어느덧 이빨에 물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크
게 욕을 했고 어떤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포부동은 의젓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풍사제, 그대의 여동빈교구(呂洞賓郊狗)라는 일초는 정말 명불허전이로구만! 정말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십여 년 동안 고된 연마를 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군! 천 팔백 마리나 되는 하얀 개와 검은 개, 얼룩무늬의 개들을
물어 죽인 끝에 오늘의 놀라운 조예를 쌓은 것이 아닌가?
왕어언과 아주는 소리내어 웃었다. 단예는 웃으며 말했다.
왕소저, 천하의 무학에 대해 그대는 모르는 것이 없는데 저 사람의 깨무는 재간은
어느 문파에 속하나요?
왕어언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풍 네째 오라버니의 독문무공이예요. 저는 모른답니다.
포부동은 말했다.
그대가 몰라? 허허허 견문이 좁은 탓이지! 여동빈교구대구식(呂洞賓郊狗大九式)은
매 일식에 각기 정반(正反) 여덟 가지 무는 방법이 있는데, 팔 구는 칠십 이, 모두 합
쳐 일흔 두 가지의 깨무는 방법이 있지. 이것은 고명하기 짝이 없는 무공이지.
단예는 왕어언이 포부동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역시 몇 마
디의 우스갯 소리를 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저 긴 팔의 노인은 교 형님의 부하이다. 내 어찌 그를 비웃을 수 있으랴?"
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싸움터에서 이상한 파공성 소리가 크게 일었다. 긴 팔의 노인은 푸대를 마귀
휘두르고 있었는데 푸대 자체는보이지 않고 한 무더기의 누런 그림자만 어른 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풍파악을 푸대자루의 기세 속에 가둔 것 같았다. 풍파악의 도법은
정묘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리 막고 저리 막으며 틈틈히 공격을 하는데 여전히 여유있
게 상대방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푸대의 초식을 그는 아직도 제대로 파악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통비권의 무서운 방법은 이미 가르침 받은 바 있었고 여동빈교
구라는 그 일초를 펼쳐 요행스럽게 성공한 셈이었지만 그같이 깨무는 방법을 두번씩
쓸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도 소홀히 하거나 적을 얕볼 수가 없었다.
아벽은 풍파악이 싸워 이기지 못하자 근심이 되는듯 왕어언에게 물었다.
왕소저, 저 긴 팔의 노인이 푸대로 펼치는 무공은 어떤 것인가요?
왕어언은 눈쌀을 찌푸렸다.
그 같은 무공을 난 책에서 본 적이 없어. 그의 권각법은 통비권의 일종인데 푸대를
펼치는 수법은 대별산(大別山) 회타연편십삼식(廻打軟鞭十三式)의 기운을 싣고 있으며
호북 원(阮)씨 집안의 팔십일로(八十一路)의 삼절곤(三節棍)수법을 섞고 있는데 아무
래도 푸대를 휘두르는 재간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가봐.
그녀의 말은 큰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긴 팔의 노인은 대별산 회타연편십삼식과
호북 원씨 집안 팔십일로 삼절곤이라는 소리를 듣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몸놀림이
둔해졌다. 그는 본래 호북 원씨 집안의 자제였다. 삼절곤은 가전의 무공인데 어쩌다
집안의 윗어른을 살해하는 큰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후 그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삼
절곤도 버린 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본래 모습을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려서 배운 무공을 아무리 애써 버릴려고 해도 격렬한 싸움을 하게 될 때
는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곤 했다. 그는 왕어언의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놀라고 말았
다.
"저 어린 소녀가 어떻게 나의 내력을 알고 있을까?"
그는 자기가 수십 년이나 속여 온 옛일을 그녀가 알고 있다고 짐작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어다. 그가 정신이 헛갈리게 되자 풍파악의 계속되는 도법의 공세를 막아낼 수
가 없었다.
그는 잇따라 세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풍파악이 칼을 휘두르며 계속 공격
해오자 즉시 왼발을 들어 풍파악의 오른쪽 손목을 차려고 했다.
풍파악은 칼을 비스듬히 휘둘러 곧장 그의 왼발을 절단하려고 했다. 긴팔의 노인은
두 발을 잇따라 걷어찼다. 원앙연환(鴛鴦連環)이라는 두발차기의 수법으로 그의 몸은
이 순간 허공에 뜨게 되었다. 풍파악은 그의 나이가 꽤 많은데도 솜씨가 민첩한 것이
젊은이 못지 않는지라 자기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훌륭하오!
그는 획, 하고 왼주먹을 내질러 상대방의 무릎을 쳐갔다. 긴 팔의 노인은 몸이 허공
에 띄우고 있는 만큼 움직일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게 된다면 무릎
이 박살나지는 않는다 해도 다리뼈가 반드시 부러질 형편이었다.
풍파악은 자기의 팔이 그의 무릎과 가까워졌는데도 상대방이 초식을 변화시키지 않
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별안간 세찬 바람이 일며 상대방의 손에 들린 푸대
자루의 주둥이가 활짝 펼쳐지면서 자기 위로 떨어지는게 아닌가? 그가 주먹으로 그 노
인의 다리뼈를 부숴놓는 순간 그 자신의 머리가 푸대자루 안으로 들어갈 형편이었다.
그는 곧장 내지른 주먹을 급히 비스듬히 쓸어내는 수법으로 바꾸어 푸대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때 그 노인은 오른손을 살짝 기울이더니 푸대의 주동이를 빙글 돌려 그의 주
먹을 향해 덮어씌워 왔다.
푸대의 주둥이 안으로 풍파악의 주먹이 들어가게 되었다.
풍파악은 즉시 손을 움츠려 푸대 안으로 들어간 손을 빼냈다. 별안간 손등이 따금거
리며 아팠다. 마치 가느다란 침으로 찌른것 같았다. 그는 내려다 보는 순간 깜짝 놀랐
다. 조그만 전갈이 손등에 앉아서 꼬리로 자기 손등을 연신 찌르는 것이 아닌가? 이
전갈은 보통 전갈보다 작았으나 오색영롱한 빛으로 얼룩진 것이 매우 흉칙했다. 풍파
악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애써 그 전갈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전갈
의 꼬리가 그의 손에 꼭 달라붙어 있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풍파악은 급히 왼손을 들어올려 손등을 칼등으로 내려쳤다. 쫙,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오색의 전갈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개방의 평범한 제자들이라도 사용하는 독물은
매우 무서웠다. 그런데 육대장로 중 한 장로가 사용한 그 전갈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풍파악은 즉시 일 장 밖으로 물러나 품 속에서 한 알의 해독알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팔이 긴 노인은 추격하지 않고 푸대를 거두어들이고 끊임없이 왕어언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저 처녀가 어떻게 내가 호북 원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포부동이 관심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네째 좀 어떤가?
풍파악은 왼손을 한 두번 흔들었으나 별로 이상한 점이 없어 말했다.
별일없소.......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앞으로 푹 쓰러졌다.
포부동은 그를 부축이며 잇따라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어떻게 된거야?
풍파악은 얼굴 피부가 뻣뻣해졌으며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포부동은 깜짝놀라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손목과 팔굽, 어깨의 세 관절 가운데 여
섯 군데의 혈도를 짚어 독기가 위로 오르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 오색 전갈의 독성
은 매우 신속하게 퍼지는 모양이었다. 전갈의 독성이 생각보다도 빨리 퍼지는듯 풍파
악은 입을 벌려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저 어, 하는 소리만 낼 뿐 말을 못했다.
포부동은 독성이 무서워 아무래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크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큰소리로 호통을 내지르더니 곧장 팔이 긴 노인을 향해 덮쳐갔다.
이때 강철 지팡이를 들고 있던 땅딸한 노인이 말했다.
차륜전(車輪戰)을 펼치려고 하는가? 이 왜동과(矮冬瓜)가 고소땅의 영웅호걸들을 상
대해 주지!
그는 강철 지팡이를 내밀며 포부동을 찍으려고 했다. 이 무기는 지극히 무거운 것이
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가벼운 것을 들고 휘두르는 듯 날랬으며 초식을 펼치는 데 있
어서도 장검을 쓰는 것처럼 질풍 같았다.
포부동은 분노와 근심에 휩싸이게 되었으나 상대방이 강적인지라 조금도 소홀하지 못
했다. 그는 땅딸한 장로를 사로잡아 팔이 긴 노인에게 해약을 내놓도록 위협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금나수법을 펼쳐 강철 지팡이의 빈 틈을 뚫고 공격해 들어갔
다.
아주와 아벽은 풍파악의 좌우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불렀다.
네째 오라버니, 네째 오라버니!
왕어언은 독을 사용하거나 치료하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크게 후회했
다.
"내가 본 무학 서적 가운데에는 독을 치료하는 방법이 적지 않게 실려 있었는데 나
는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 당시 몇 번 쳐다보기만 했어도
어느 정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눈을 뜨고 네째 오라버니가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텐데......"
교봉은 포부동이 땅딸한 장로와 막상 막하의 싸움을 벌이고 있고 삽시간에 승부가
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팔이 긴 노인에게 말했다.
진(陣)장로, 저 네째 나으리에게 해독약을 주시구려.
진장로는 어리둥절해 했다.
방주, 저 사람은 너무 무례합니다. 무공 또한 약하지 않습니다. 살려 놓으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교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우린 아직 모용복을 만나 보지도 못한 처지인데 먼저 그의 부하에게 상처를 입힌다
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수이 여겼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오. 우리는 비난받지 않도
록 일을 처리하도록 합시다.
진장로는 울화가 치미는듯 말했다.
마(馬) 부방주(副幇主)는 분명히 모용이라는 녀석에게 당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원한을 갚아야 하는 마당에 그들을 상대로 인의와 도리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교봉은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우며 말했다.
먼저 그에게 해독약을 주시오. 나머지 일은 천천히 해결해도 늦지 않소이다.
진장로는 내키지 않았으나 방주의 명을 거절할 수 없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즉시 품속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 몇 걸음 다가갔다. 그는 아주와 아벽에게 말
했다.
우리 방주는 인의(仁義)를 중히 여기는 분이라오. 이것이 해약이니 가져가시오.
아벽은 크게 기뻐 재빨리 다가가 먼저 교봉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진 장로에게 머리
를 숙여 보인 후 말했다.
교방주, 정말 감사합니다. 진정으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 조그만 병을 보며 말했다.
장로님, 이 해약은 어떻게 쓰는 것인가요?
진장로는 말했다.
상처의 독액을 모조리 빨아낸 이후 해약을 바르면 되는 것이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독액을 완전히 빼지 않고 해약을 바르면 해는 있을지언정 이익은 없으니 알아 두시
오.
아벽은 말했다.
네.
그리고 몸을 돌려 풍파악의 손을 들어 입을 벌리고 그의 손등에 나 있는 상처로부터
독액을 빨아내려고 했다.
진장로는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아벽은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진장로는 말했다.
여자는 독액을 빨아낼 수 없소.
아벽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여자가 어쨌다는거죠?
진장로는 말했다.
그 전갈의 독은 음한(陰寒)한 독이외다. 여자는 음에 속하는데 음에 다시 음을 가하
면 독성이 더욱 증가하게 되오.
아주와 아벽, 왕어언은 반신반의했다. 그 말이 이상야릇했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
는 생각되지 않았다. 독에 독을 더하면 큰일날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 쪽 남자라곤 포
부동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포부동은 땅딸한 늙은이와 한창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지팡이 그림자가 점점이 수놓아지는가 하면 장세가 표표히 허공을 가르고 있
는 상황이었다. 일시에 손을 거둘 것 같지 않았다. 아주는 부르짖었다.
세째 오라버니! 잠시 싸움을 멈추세요! 네째 오라버니를 먼저 구한 후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해요.
그러나 포부동의 무공과 땅딸한 노인의 무공은 백중지간이었다. 한 번 어울리게 되
자 싸움 테두리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고수들이 무공을 겨루는 데 있어
일초가 생사를 판가름할 때가 많았다. 마음대로 공격했다 물러날 수는 없다. 포부동과
땅딸한 노인은 막상막하인지라 물러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포부동은 아주가 부
르는 소리를 듣고 풍파악의 상처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초조해져 서둘러 몇 초
를 공격했다. 그것은 땅딸한 노인이 귀찮게 달라붙는 것을 떨쳐 버리자는 것이었다.
땅딸한 노인은 이미 포부동과 백 초를 넘게 싸웠다. 개방의 네 장로는 하나같이 무
공에 있어 독특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청성파의 제보곤이나 사마림, 진가채의 요백당
등은 포부동이 웃고 이야기하면서 수월하게 쫓아버릴 수 있는 형편이었으나 이 땅딸한
늙은이는 정말 수월하게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다.
교봉은 왕어언 등 세 소녀가 얼굴에 놀람과 당황한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을 보고 진
장로가 키우고 있는 얼룩진 전갈의 독성이 지극히 무섭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내가 풍 네째 나으리의 독을 뽑아 주지.
그리고 그는 풍파악 곁으로 다가갔다.
단예는 왕어언의 근심스런 표정을 보고 풍파악의 손끝에 퍼지는 독액을 직접 빨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교봉과 그는 의리로 맺어진 사이가 아닌가? 그가 교봉의 적을 도
와 준다면 금란지의(金蘭之義)에 금이 갈 것이 뻔했다. 교봉이 진장로에게 해약을 꺼
내 놓으라고 했지만 정말로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교봉이 풍파악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서야 정말 해독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실
하고 재빨리 말했다.
형님, 소재가 빨아 주죠.
그는 한 걸음 성큼 내딛어 능파미보의 보법을 펼쳤다. 그의 몸은 기울어지는 듯 교
봉을 앞질러 풍파악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는 즉시 입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풍파악의 한 손은 모두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또한 커다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
었는데 얼굴의 근육은 뻣뻣해져 눈도 감지 못했다. 단예는 한 모금의 독혈을 빨아서
땅바닥에 뱉었다. 그 독혈은 먹물처럼 검었다. 뭇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같이 놀
라마지 않았다. 단예는 다시 입을 가져가 독액을 빨려고 했다. 그런데 상처에서 검은
피가 쉴새없이 흘렀다. 단예는 어리둥절해 생각했다.
"이 검은 피가 흘러나온 이후 빨아야 유효할 것 같구나."
그는 사실 자기가 만독의 왕, 망고주합을 먹었기 때문에 어떠한 독물도 제압할 수
있으며 오색영롱한 전갈의 독도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빨고 나자 독액은 그 즉시 흘러나오게 된 것이었다. 별안간 풍파악은 몸을 꿈틀하더니
말했다.
정말 고맙소.
아주 등은 모두 기뻐했다. 아벽은 말했다.
네째 오라버니, 이제 말을 할 수 있군요.
그의 검은 피가 점점 엷어지더니 자색으로 변했다. 피가 좀더 흐르게 되자 자색의
피가 선홍색으로 변했다.
아벽은 재빨리 그에게 해약을 발라 주고 포부동이 봉쇄했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삽시간에 풍파악은 커다랗게 부어오르던 손등이 회복되었고 말과 행동도 처음과 다름
없게 되었다.
풍파악은 단예에게 깊이 읍을 했다.
공자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단예는 급히 반례했다.
그까짓 일로 뭘 그러십니까?
풍파악은 말했다.
나의 목숨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적은 것이지만 나에게 있어선 큰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아벽의 손에서 조그만 병을 받아들더니 진장로에게 던졌다.
그대의 해약을 되돌려 드리지.
이어 교봉에게 포권의 예를 했다.
교방주께선 인의가 뛰어난 분이십니다. 무림에서 제일 큰 방파의 수령으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풍파악은 매우 탄복했습니다.
교봉 역시 포권을 하고 반례하며 말했다.
과찬이시오.
풍파악은 자기 칼을 집어들더니 왼손으로 진장로를 가리켰다.
오늘 나는 그대에게 졌소. 이 풍파악은 졌음을 기꺼이 시인하되 다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 다시 싸우기로 합시다. 그러나 오늘은 싸우지 맙시다.
진 장로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든지 상대해 드리겠소.
풍파악은 몸을 비스듬히 돌리더니 손에 철간을 들고 있는 장로에게 말했다.
나는 귀하와 싸우겠소.
아주와 아벽은 깜짝 놀라 일제히 부르짖었다.
네째 오라버니, 안 돼요! 체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풍파악은 말했다.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거야!
그는 칼을 휙휙 휘두르며 공격해 갔다. 어느덧 철간을 들고 있는 장로에게 바짝 접
근해 있었다.
철간을 사용하는 노인은 하얀 눈썹에 하얀 수염을 하고 있었는데 수십 년 전부터 강
호에 명성을 떨쳐온 사람이었고 또 많은 인물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풍
파악처럼 방금 죽음에서 살아났으면서 흉악하게 공격하는 모습은 일찌기 상상해 보지
도 못했던 일이라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교봉은 눈쌀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저 풍씨란 친구는 너무 분수를 모르는구나! 우리 단 아우님이 호의로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불문곡직하고 다시 싸움을 거는 거지?"
이때 단예는 갑자기 동쪽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곧이어
북쪽에서도 사람들이 다가오는데 그 수가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예는 교봉에
게 나직이 말했다.
형님,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교봉 역시 알고 있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십중팔구 모용공자가 매복해 놓은 사람들이겠지. 포가와 풍가 두 사람이 우리들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놓은 이후 한떼의 사람들을 시켜 일제히 공격하도록 한 것이었구
나."
그는 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서쪽과 남쪽으로 나누어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
기 자신과 서장로, 그리고 장 타주가 길을 뚫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과 남
쪽에서 삽시간에 잡다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사방팔방에서 적이 에워
싸고 있는 것이었다.
교봉은 나직이 말했다.
장타주, 남쪽의 힘이 가장 약하오. 나중에 나의 손짓에 따라 즉시 형제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물러가도록 하시오.
장타주는 말했다.
네.
바로 이때 동쪽 행자나무 뒤에서 오륙 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모두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머리칼은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무기를 들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깨어진 밥그릇에 죽장을 들고 있었다. 모두 개방의 무리였다. 곧
이어 북쪽에서도 개방의 제자들이 걸어나왔다. 각기 표정이 엄숙했으며 교봉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연중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포부동과 풍파악은 별안간 많은 개방의 무리들이 나타나자 속으로 놀라 생각했다.
"어떻게 왕소저와 아주와 아벽 세 사람을 구해서 이곳을 벗어나지?"
이때 가장 놀라움과 의아함을 느낀 것은 바로 교봉이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개방의
제자들로서 평소 교봉에 대해 지극히 우러러보았다. 멀리서 교봉을 발견하기만 해도
달려와 절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갑작스럽게 나타났으면서도 어째서 방주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일까?
그가 의혹을 느끼고 있을 때 서쪽과 남쪽에서도 수십 명의 개방 제자들이 달려왔다.
잠시 후에는 살구나무 숲 속의 빈터를 꽉 메우게 되었다. 그런데 방 중의 수뇌인물은
먼저 도달한 사대 장로와 장타주 외에는 그 속에 섞여 있지 않았다. 교봉은 갈수록 놀
람을 금할 수 없었고 손아귀에는 식은땀이 고였다. 그는 일찌기 가장 강하고 고약한
적을 만났을 때도 지금처럼 놀라워한 적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개방에 내란이 생긴 것일까? 전공(傳功), 집법(執法), 두 분 장로와 분타의
타주들이 살해되었단 말인가?"
포부동과 풍파악은 두 장로와 여전히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왕어언 등은 한켠에 서
서 침묵을 지키기만 했다.
이때 진장로가 큰소리로 외쳤다.
타구진(打狗陣)을 펼쳐라!
그러자 동서남북 사면의 개방 제자들 가운데서 이십여 명씩이 달려나왔다. 각기 무
기를 들고 포부동과 땅딸한 장로 등 네 사람을 에워쌌다.
포부동은 개방에서 삽시간에 진세를 펼쳐 오는 것을 보고 자기는 간신히 도망친다고
할 수 있어도 풍파악은 중독된 후 원기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니 중상을 입게 되리라
고 생각했다. 왕어언 등 세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같은 정세
에 놓이게 되자 손을 멈추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부동은 고집스럽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보통 사람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꼭 꺼꾸로 행하는
때가 많았다. 거기다 풍파악 역시 싸움을 자기 목숨보다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싸울 기
회만 있다면 이기고 지던 따지지 않고 생사마저 도외시하는 사람이었다.
강약의 형세가 이미 분명해졌는데도 포와 풍 두 사람은 여전히 큰소리를 내지르며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조금도 굴하려 하지 않았다.
왕어언은 부르짖었다.
포 세째 오라버니! 풍 네째 오라버니! 안 되겠어요! 개방의 타구진을 두 분은 깨뜨
릴 수 없을 것이니 역시 일찍 손을 멈추세요!
풍파악은 말했다.
좀더 싸우고 지지 않을 때 손을 멈추는 게 좋아!
그는 말을 하느라고 정신이 헛갈리게 되자 쫙 하는 소리와 함게 어깨를 하얀 수염의
장로가 휘두른 철간에 얻어맞고 말았다. 더군다나 철간에는 가시 같은 것들이 잔득 꽂
혀 있어서 그의 어깨에선 대뜸 선혈이 흘러내렸다.
풍파악은 욕을 했다.
빌어먹을! 이 일초는 꽤 무섭군!
그는 휙휙 하며 삼 초를 잇따라 공격했다. 바로 상대방과 함께 죽자는 수법이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생각했다.
"나는 이 자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찌 이토록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날뛰는 것일
까?"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자기자신을 지킬 뿐 더 공격하지 않았다.
진장로는 이때 길게 소리를 내며 노래 부르듯 소리쳤다.
남쪽의 형제들이 와서 밥을 구걸하네! 아이구 아야야......!
그가 부르는 것은 거지들이 밥을 빌어먹을 때 부르는 타령이었다. 그러나 또한 공격
하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남쪽의 수십 명의 거지들은 각기 무기를 쳐들었다. 이제 진
장로의 타령이 끝나기만 하면 달려들 참이었다.
교봉은 개방의 타구진이 공세를 펼친다면 사방의 제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반드
시 적을 죽이거나 상처를 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는 진상을 알아보기 전에 고소의 모용씨와 공연히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왼손을 쳐들고 호통쳤다.
잠깐!
그는 몸을 날려 풍파악 곁으로 다가가서 왼손으로 그의 안면을 움켜쥐려고 했다. 풍
파악은 급히 오른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봉의 오른손이 아래로 떨어지자 어
느덧 풍파악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다른 한손으론 그의 칼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왕어언이 부르짖었다.
훌륭한 용조수(龍爪手)와 창주 삼식(滄珠三式)이네요! 포 세째 오라버니, 그는 왼쪽
팔굽으로 그대의 가슴을 내지를 것이며 오른손으로는 그대의 허리께를 치려고 할 것이
오. 그리고 왼손으론 그대의 기호혈을 짚을 것인데 이것이 용조수 가운데 패연유우(沛
然有雨)라는 수법이예요!
그녀가 왼쪽 팔굽으로 그대의 가슴을 내리친다는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교봉은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따르려는 듯 왼쪽 팔굽으로 포부동의 가슴을 내질렀다. 그리고 왕어
언이 오른손으로 그대의 허리께를 내려치려 한다고 했을 때 교봉의 오른손은 포부동의
허리를 내려쳤다. 한 사람은 말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행동으로써 보여주는데 평소
그 같은 훈련을 쌓았다 해도 이토록 척척 맞아떨어질 것 같지 않는 광경이었다. 왕어
언이 세번째의 한마디를 말하게 되었을 때 교봉의 오른 다섯 손가락은 어느덧 갈고리
처럼 화해 포부동의 기호혈(氣戶穴)을 움켜 잡고 있었다.
포부동은 전신이 시큰거리며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는 화가 치미는 듯 말했다.
정말 훌륭한 패연유우이군! 누이, 그대는 왜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하는거지? 그
래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진작 말을 했더라면 나는 준비라도 했을 것이 아니야!
왕어언은 겸연쩍게 말했다.
그의 무공이 너무 고강해서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전혀 조짐을 보이지 않아 미처 알
아볼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포부동은 말했다.
뭐 미안해 할 것은 없어. 어찌 되었든 오늘 우리는 참패를 당하고 연자오의 체면이
손상되고 말았군!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보니 풍파악은 뻣뻣한 채 서있었다. 아마도 교봉이 그의 칼을
빼앗으면서 그의 혈도를 짚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순순히 손을 멈추고 싸
우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진장로는 방주가 풍, 포 두 사람을 단숨에 제압하는 광경을 보고 한마디 노래를 다
부르기 전에 멈추어야 했다. 개방 사장로와 제자들은 교봉이 적수를 제압함은 물론 그
수법의 교묘함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을 보고 진심으로 탄복해마지 않았다.
교봉은 포부동의 기호혈을 놔주고 왼손을 뒤로 돌려 풍파악의 어깨를 가볍게 몇 대
내려쳐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두 분은 이제 가 보시오.
포부동의 성격이 아무리 괴짜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기 무공이 상대방과는 하늘과 땅
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자기가 한 마디 더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체
면을 깎는 것임을 알아채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왕어언의 곁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풍파악은 입을 열었다.
교 방주, 나의 무공은 그대만 못하오. 하지만 조금 전 일 초에 진 것은 승복할 수가
없소이다. 그대는 내가 방해하지 않은 틈을 타서 준비하지 않는 나를 공격한 것이외
다.
맞았소. 나는 확실히 그대의 의표를 찔러 그대가 방비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공격햇
소. 그러면 우리 다시 몇 수를 시험해 봅시다. 내 그대의 도법(刀法)을 받아 보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허공을 격하고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한줄기 기
운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휩싸는 것 같았다. 그 칼은 튀어오르듯 교봉의 손으
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교봉은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듯 하며 칼을 돌려 칼자루를
앞으로 하고 풍파악에게 내밀었다.
풍파악은 어리둥절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이건 금룡공(擒龍功)이 아니오? 세상에 정말...... 정말 그같은 신기한
무공을 펼치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오?
교봉은 미소했다.
불초은 아직 조금밖에 알지 못하오. 웃지나 마시오.
그는 눈을 들어 왕어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왕어언이 그가 펼쳐낸 패연유우라는
일초를 미리 알아차리고 말했던 사실에 대해서 그는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그는 모든 종류의 무예에 정통한 이 소녀가 자기의 금룡공에 대해 어떤 평을 하
는지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왕어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으며 교봉의 놀라운
무공을 못 본 척했다. 그녀는 넋을 잃은 것이었다.
"교 방주의 무공이 저토록 뛰어나다니...... 우리 외사촌 오라버니가 그와 똑같이
명성을 날리고 강호에서 북교봉 남모용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고종 사촌 오라버
니의 무공이 어찌...... 어찌......
이때 풍파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이길 수 없소. 강약의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나니 싸워도 재미가 없을 것
같소. 교 방주, 다음에 만납시다.
그는 싸움에 져도 조금도 의기소침해 하지 않았다. 이기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지는
일도 기쁜 듯이 여기는 모양이었다. 다만 싸울 수 있는 싸움만 있어 팽팽한 싸움을 격
렬하게 벌일 수만 있다면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교봉과 작별을 고하고
포부동에게 말했다.
세째 형, 공자는 소림사로 갔다는 소문이 있소. 그곳에 사람이 많으니 반드시 싸우
게 될 것 같소. 나는 빨리 달려갈테니 그대들은 천천히 뒤따라 오시오.
그는 싸울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이라도 놓칠 게 두려운 듯 포부동의 대답도 듣지 않
고 달려갔다.
포부동은 말했다.
갑시다! 가! 재주가 남만 못하니 얼굴에 광채가 없구나! 다시 십 년을 연마했건만
재차 지고 말았노라! 차라리 진작 그만두었다면 체면이나 세울 것을!
그렇게 말을 하며 훌쩍 뛰었다. 그는 패배한 데 대하여 허무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
었다.
왕어언은 아주와 아벽에게 말했다.
세째 오라버니와 네째 오라버니가 떠났는데 우리는 또 어디로 가서...... 그를 찾지
?
아주는 고개를 숙였다.
이곳의 개방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상의할 모양이니 우리는 먼저 무석성으로 돌아가
도록 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교봉에게 말했다.
교 방주, 우리 세 사람은 가겠어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은 마음대로 하시구려.
동쪽의 거지들 가운데 모습이 점잖은 거지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얼굴 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교 방주, 마(馬) 무방주가 참혹하게 죽은 원수를 갚지도 못한 터에 방주께선 어찌
함부로 적을 봐주는 것이오?
이 몇 마디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그 표정은 사람을 다그치는 빛이 역력했다. 조금
도 부하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교봉은 말했다.
우리가 강남 땅으로 온 것은 바로 마 둘째 형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이오. 그러나 이
며칠간 내가 여러 모로 살펴본 결과 마 둘째 형을 죽인 흉수가 반드시 모용 공자라고
생각되지 않았소.
그 중년 거지의 이름은 전관청(全管淸)이었으며 호는 십방수재(十方秀才)라고 했다.
위인됨이 많고 꾀가 많고 무공이 고강해서 개방에서의 지위는 육대 장로의 다음 가는
사람이고 여덟 개의 푸대를 메고 다니는 타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지분타(大智分舵)
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교봉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방주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오?
왕어언과 아주, 아벽은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해다. 그런데 갑자기 개방의 사람이 모
용복을 들먹이자 세 사람은 모용복에 대해 지극히 관심이 많은 터라 즉시 한켠으로 물
러나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교봉은 말했다.
나의 짐작에 그렇다 할 뿐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외다.
전관청은 말했다.
방주께서 어떻게 그런 짐작을 하셨는지 속하 등은 알고 싶소이다.
교봉은 말했다.
내가 낙양에 있을 때 마 둘째 형이 소후금나수(鎖喉擒拿手)의 재간 아래 죽었다는 말
을 듣고 고소 모용씨의 "그 사람의 수법으로 그 사람에게 펼친다"는 한 마디를 상기하
게 되었고, 마 둘째 형의 소후금나수는 천하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으니만큼 모용씨
일가 외에는 능히 마 둘째 형을 그분 자신의 절기로써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고 생각했던 것이오.
전관청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교봉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며칠 동안 깊이 알아보면 볼수록 우리가 먼저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 아닐
지도 모르며 이 가운데에는 어떤 말 못할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소.
전관청은 말했다.
제자들은 모두 상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방주께선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교봉은 그의 말투가 곱지 못하고 또 여러 제자들의 표정이나 태도가 평소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 안에 이미 중대한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
었다.
전공(傳功), 집법(執法), 두 장로는 어디 있소?
전관청은 말했다.
속하는 오늘 두 분 장로를 뵙지 못했습니다.
교봉은 다시 물었다.
대인(大仁) 대신(大信) 대용(大勇) 대례(大禮) 네 타주는 어디 있소?
전관청은 고개를 돌려 서북쪽에 서 있는 일곱 개의 푸대를 메고 있는 한 명의 제자
에게 말했다.
장전상(張全祥), 그대들의 타주는 왜 오시지 않았는가?
그 제자는 말했다.
음...... 음...... 음, 저는 모릅니다.
교봉은 평소 대지분타 타주인 전관청이 심계에 뛰어나 일을 잘 처리하는 똑똑한 사
람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부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을 도모코자 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지극히 무서운 적으로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일곱 개
의 푸대를 멘 제자 장전상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우물쭈물할 뿐만 아니라 감
히 자기를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을 보자 크게 호통을 쳤다.
장전상, 너는 본타의 방(方) 타주를 살해했지? 그렇지?
장전상은 깜짝 놀라 말했다.
아닙니다. 방 타주는 무사히 그곳에 계십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이건...... 이건 저와 관계없는 일이고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교봉은 날카롭게 외쳤다.
그렇다면 누가 한 짓이지?
그 말은 우렁차지는 않았지만 위엄으로 가득차 있었다. 장전상은 몸을 벌벌 떨며 전
관청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교봉은 변란이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공과 집법 등 뭇 장로들이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즉시 몸을 돌려 사대 장로에게 물었다.
네 분 장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사대 장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하나같이 다른 사람이 먼저 입을 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교봉은 그같은 광경을 보고 진 장로 역시 그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본방은 나로부터 아래의 모든 제자에게 이르기까지 의를 중요시하여 왔소.
거기까지 말하고 뒤로 잇따라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런데 한 걸음이 모두 일장 남짓
했다. 천하의 누구라 해도 앞쪽으로 몸을 날린다 해도 그토록 신속할 수 없었을 것이
고 또 보폭이 그토록 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두 번 물러서게 되었을 때는 전광
청과는 석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몸을 돌리지 않고 왼손을
뒤로 돌려 뻗쳐내고 오른손으로 금나수를 펼쳐내 전관청의 가슴에 있는 중정(中庭)과
구미(鳩尾) 두 혈도를 움켜 잡았다.
전관청의 무공은 사대 장로에 못지 않았다. 그런데 일 초도 반격할 사이 없이 그만
움켜잡히고 말았다. 교봉은 손에 진기를 돋우어 내력을 전관청의 두 곳 혈도로 밀어보
냈다. 그리고 경맥을 따라 그의 무릎 관절이 있는 중위(中委)와 양대라는 혈도로 밀어
보냈다. 이렇게 되자 전관청은 무릎이 시큰해지고 힘이 빠져 자기도 모르게 땅바닥에
꿇어 앉게 되었다. 개방의 모든 제자들 가운데 아연 실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하나같이 경악하고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래 교봉은 사람들의 말투와 얼굴 빛을 보고는 이번 변란에 반드시 전관청이 주모
자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만약 그를 일거에 제압하지 않는다면 큰 화근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설사 반도들을 무찌른다 하더라도 서로 죽고 죽이는 형세를 면할 수 없다고 판
단했던 것이다. 개방은 그야말로 강적을 앞에 두고 있는 이때에 어찌 스스로 원기를
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몸을 돌려서 사대 장로에게 말을 묻는 척하면서 전
관청이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는 뒤로 나아가 그의 경맥을 움켜 잡은 것이었다. 이
와 같이 그의 재빠른 움직임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겉으로 보기에 전혀 힘을 기
울이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가 한평생 배운 바를 모조리 펼쳐낸 것이었
다. 만약 뒤로 움켜잡아 노리는 부위가 반 치라도 차이가 나게 되었을 때는 전관청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내력으로 그의 무릎 관절에 있는 혈도에 충격을 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와 공모를 한 사람들이 구하려고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쌍
방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전관청을 제압하고 무릎을 꿇
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전관청 스스로 투항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누구도
감히 이상한 거동은 보일 수가 없다고 내다보았다. 교봉은 몸을 돌리고 왼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가볍게 두 번 쳤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가 이미 잘못을 알았다면 이렇게 무릎을 꿇을 것까지는 없소. 그러나 웃 사람을
거역한 죄는 따지지 않을 수 없을 것, 천천히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그는 오른쪽 팔굽을 가볍게 뻗쳐서 말을 할 수 없도록 그의 아혈을 짚어버리고 말았
다.
교봉은 평소 전관청의 언변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말을 하게
되어 개방의 제자들을 선동하게 된다면 화를 면할 수 없게 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임시방편이라도 확고한 수단
을 써서 일을 처리해야만 되었다.
교봉은 전관청을 제압하고 그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 다음, 큰소리로 장전
상에게 말했다.
네가 먼저, 대의분타 장(蔣) 타주와 함께 가서 전공과 집법 두 장로 등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해라. 너는 순순히 이 일을 행해야만 너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앉아서 함부로 일어나지 않도
록 해라
장전상은 놀람과 기쁨에 휩싸여서는 잇따라 대답했다.
예, 예.
대지분타 장 타주는 반란 음모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전관청이 감히 윗
사람을 거역하는 변란의 태도를 보이자 아까부터 울화가 치밀어서는 얼굴이 시뻘개졌
고 또한 숨을 씩씩거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봉이 그에게 분부하여 장전상
을 따라가 사람을 구하라는 말을 하자 겨우 심신을 가다듬고는 자기가 통솔하고 있는
분타의 이십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본방에서는 불행히도 변란이 발생했다. 모두들 생명을 걸고 방주의 은덕에 보태할
때이다. 모두들 힘을 합쳐 방주를 구할 것이며 무조건 방주의 명령에 따르도록 해라.
그는 사대 장로 등이 떼를 지어 공격을 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방주 혼자 외톨이가 되어 공격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교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장 형제, 그대는 분타의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가게. 사람을 구하는 일은
큰 일이니 어떤 차질도 있어서는 안 된다네.
장 타주는 명을 거역할 수 없어서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방주님,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저는 될 수 있으면 빨리 갔다가 빨리 달려 오겠습
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다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형제들이 아닌가? 다만 잠시 의견
을 달리 했을 뿐 큰 일은 없을테니 그대는 안심하고 가보게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다시 사람을 파견해서 서하(西夏)의 일품당(一品堂)에 통지하여 혜산(惠山)
의 약속을 이레 뒤로 미루도록 하게.
장 타주는 허리를 굽히고 읍을 한 후 자기 분타의 무리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교봉은 입으로는 태연히 말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여간 긴장하지 않았다. 대지분타
이십여 명의 무리들이 떠나자 살구나무 숲속에 있는 단예, 왕어언, 아주, 아벽의 네
명의 관계없는 사람들 외에 나머지 이백여 명은 음모에 참여한 패거리들이라 할 수 있
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나서서 한 번 부르짖기만 한다면 뭇 제자의 감정
은 즉시 폭발하게 되어 어떤 짓을 할 지 모르게 될거이고 그렇게 된다면 실로 상대하
기가 여간 어렵지 않게 될 처지였다.
그는 사방의 제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색했다. 어떤 사람은
억지로 진정하는 듯이 보이고 어떤 사람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고 어떤
사람은 진관청같이 자기의 용기를 한 번 시험해 보려는 것 같았으며 위험을 무릅쓸 각
오가 되어 있는 제자도 보였다. 그리고 사방의 이백여 명의 사람들은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는 제자도 보였다. 그리고 사방의 이백여 명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한 마디 말
도 하지 않았는데 만약에 그 누가 있어 한 마디만 하게 될 것 같으면 금방이라도 변란
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 무렵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별빛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살구나
무 숲속에는 엷은 안개가 서서히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오로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될 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데로 옮겨야 한다. 그리하여 전공, 집법 장로 등이 돌아
오게 된다면 변란은 평정될 것이다."
그는 힐끗 단예를 바라보며 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여러 형제들, 오늘 나는 무척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이 한 분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
는데 바로 이분 단예라는 분이시오. 그는 대리 단씨의 후예라오. 우리 두 사람은 의기
투합하여 이미 형제가 되었소.
왕어언과 아주, 아벽은 책벌레 같은 단예가 놀랍게도 개방의 교 방주와 의형제를 맺
었다는 사실에 똑같이 의아한 얼굴빛을 띠웠다. 교봉은 계속해서 말했다.
형제, 내가 그대를 대신해서 우리 개방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시켜 드리지.
교봉은 단예의 손을 잡고 허연 수염에 허연 머리카락을 기르고 손에 철간을 든 장로
를 가리켰다.
이 분은 송(宋)장로일세. 본방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우러러 모시는 원로이시고 이
가시가 돋친 철간은 과거 강호를 주름잡은 적이 있었다네.
단예는 말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
다.
그는 포권의 예를 했다. 송 장로는 억지로 답례를 했다. 교봉은 다시 강철 지팡이를
쓰는 땅딸한 노인에게 소개했다.
이 분은 해(奚) 장로인데 본방의 외가(外家)고수라네. 그대의 형은 바로 십여 년 전
종종 이분에게 무공을 가르침 받았다네. 따라서 해장로는 나에게 있어서 반은 스승이
고 반은 친구이며 서로의 정은 말할 수 없이 깊다네.
단예는 말했다.
조금 전 저는 행장로와 그 두 분 나으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말 무공이
뛰어나셔서 탄복했습니다.
해 장로는 성격이 직선적이었다. 교봉이 말끝마다 옛정을 되풀이 하면서도 특별히
옛날 자기가 무공을 가르쳐준 사실을 들먹이자 자기가 멍청하게 전관청의 말을 믿었던
사실이 크게 부끄러웠다.
교봉은 푸대자루를 무기로 쓰던 장로를 소개한 이후 다시 귀두도를 쓰는 붉은 얼굴
의 장로를 소개하려고 했다. 그때 별안간 발걸음 소리가 나면서 동북쪽에서 많은 사람
들이 달려왔으며 떠들썩하는 소리와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주는 어디 계시지? 반도들은 어디 있지?
어떤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에게 속아 여지껏 갇혀 있었다니 정말 울화가 치미는 노릇이군!
어지럽게 계속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봉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오 장로의 신분과 명망을 단예에게 이야기해 준 이후 몸을 돌렸다. 이때 전공
장로, 집법장로, 대인, 대용, 대례, 대신의 각 타주가 한 패의 개방 제자들과 함께 들
이닥쳤다. 모두들 할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방주 앞이라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들 제각기 자리에 앉도록 하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
뭇 사람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어떤 사람들은 동쪽으로 어떤 사람들은 서쪽으로 자기 직분과 배분에 따라 질서정연
하게 앉았다. 단예가 볼 때 개방의 제자들은 무질서하게 흩어져 앉는 것 같았으나 기
실 어떤 사람은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은 뒤에 있는 등 각기 서열이 있었다.
교봉은 뭇 사람들이 모두 규칙을 지키자 조금 마음이 놓여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우리 개방은 강호의 친구들로부터 높이 받들어져 왔고 백여년간 무림에서 제일 큰
방파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소. 그러나 사람이 많다 보니 자연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
가 없게 되었소. 그러니 모든 것을 명확히 밝히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상의한다면 여전
히 다정하고 아껴주는 형제가 될 것이외다. 여러분들은 일시적인 감정으로 생긴 분쟁
을 너무 심각하게 보지 마시기 바라오.
그의 어조는 지극히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팽팽하던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이때 교봉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얼굴이 싯누런 늙은 거지가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송, 해, 진, 오, 네 분 장로에게 묻겠소. 당신들이 우리들을 태호의 조그만 배에 감
금한 것은 무슨 까닭이오?
이 사람은 개방의 집법 장로였다. 이름은 백세경(白世鏡)이라고 하며 언제나 준엄하
게 법을 따졌으며 사사로운 정을 봐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방의 모든 인물들은 설
사 방규를 어기지 않았다 해도 그를 만나게 되면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네 장로 가운데 송장로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는 네 장로의 수뇌라 할 수 있었
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우리는 다년간 어려움을 같이하고 생사를 함께 한 형제들이
아니겠소? 자연 악의는 없었소이다...... 백...... 백 집법은 이 늙은이의 얼굴을 봐
서라도 마음에 두지 않기를 바라오.
뭇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가 너무 늙어서 망녕이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방회
에서 윗사람을 거스르고 반란을 도모했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의 늙은 얼
굴을 봐서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게 아닌가.
백세경은 말했다.
송장로는 악의가 없었다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소. 나와 전공장로
등은 모두 세 척의 배에 갇히게 되었고 그배는 태호에 띄워져 있었는데 배에는 잡초와
나무 유황으로 가득차 있었소. 그리고 우리가 만약 도망친다면 즉시 불을 질러 배를
태우겠다고 했소. 송장로 설마 그같은 짓이 악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소?
송장로는 말했다.
그건...... 그건...... 그건 확실히 지나쳤소. 모두들 한 집안 사람이고 언제나 형
제와 다름 없이 지내는 터에 그토록 흉악하게 나가면 안 되지요. 이것을 따지고 든다
면...... 서로 거북해지지 않겠소?
백세경은 한 사내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말했다.
너는 우리를 속여 배 위에 오르게 했고 방주께서 부르신다고 했다. 거짓으로 받은
방주의 명을 전한다면 그 죄는 어느 죄목에 해당하지?
그 사내는 놀라 온몸을 벌벌 떨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는 직분이 낮은데 어찌 윗사람을 범하고 방주를 기만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모
두가...... 모두가......
거기까지 말하더니 전관청을 바라보았다.
백세경은 말했다.
그대는 전타주의 분부를 받은 것인가?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하지 않았다. 감히 그렇다고 말도 못하고 그렇지 않다
고 하지도 못했다.
백세경은 말했다.
전타주가 너에게 방주의 명을 거짓으로 전하고 우리들을 속여 배에 오르게 했을 때
너는 당시 그 명령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그 사내는 얼굴에서 핏기를 잃었다.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백세경은 냉소했다.
이춘래(李春來), 너는 언제나 자기가 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내였지 않은가?
사내 대장부가 되어 일을 할 용기가 있었다면 책임을 질 용기도 있지 않겠는가?
이춘래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을 펴며 낭랑히 말했다.
백 장로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이춘래는 잘못했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처
분하십시오. 제가 백 장로에게 방주의 명을 전달할 때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백세경은 말했다.
그렇다면 방주께서 자네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가? 또는 내가 자네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가?
이춘래는 말했다.
모두 아닙니다. 방주께선 속하에게 태산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백장로
께선 공정하시고 엄격하십니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백세경은 날카롭게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무슨 까닭으로 그와 같은 일을 자행했지?
이춘래는 땅바닥에 엎드린 전관청을 한번 바라보고 교봉을 한 번 쳐다본 후 큰소리
로 말했다.
속하는 방규를 어겼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그 가운데의 원인은 감히 말할 수 없습니
다.
그러더니 손목을 훽 뒤집었다. 하얀 광채가 번쩍하는 곳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칼이 어느덧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이 한 칼은 너무나 빨랐고 심장을 정
확히 꿰뚫은지라 칼끝이 심장을 통과하는 순간 이춘래는 즉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개방의 무리들은 와,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놀라서 내지른 소리였다. 그러나 각기
원위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으며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세경은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명령이 가짜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방주께 알리지도 않고 오히려 나를
속였으니 마땅히 죽어야 했다.
그리고는 전공장로에게 말했다.
항(項)형, 그대를 속여 배 위에 오르게 한 사람은 누구요?
별안간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더니 숲 밖을 향해 급히 도망치기 시작
했다.
그런데 제보곤은 사천성 서쪽의 관현(灌縣) 제씨 집안의 사람이었다. 제씨 집안은
사천성 서쪽에서 제법 큰소리치는 큰 집안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봉래파의 제자가
되었을까? 여러 사람으로서는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