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성지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소년 김대건이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바로 모방 나 신부이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부주교로서 조선교구를 맡게 되었다.
당시 몽고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6개월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성지 표지석.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상해 금가항 성당(서품당시성당), 은이 성지에 복원
금가항 성당은 1845년 8월17일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서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다.
그러나 금가항 성당은 상해 시 개발 계획으로 철거되면서 본래의 성당건축 구조물을 한국에 가져와 보관 하다가 지난해 은이 성지에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금년 9월 15일 입당 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