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과의 동행
박연숙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간절하게 탈출하고 싶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을까?"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니 이때까지의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계획에 있었던 일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변할지 번개같이 명퇴신청서를 제출했다. 한순간 옳은 선택인가 두려운 마음이 스쳐 지나갔지만, 한 학기가 끝나고 자유인이 되었다. 즐거웠다. 신이 났다. 삼십여 년을 직장에 매여서 살다가 이렇게 환한 밝은 대낮에 길거리를 활보하다니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처음엔 친구와 일주일에 세 번, 동네 공원까지 왕복 50분 정도 걷기만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공원은 산과 이어져 있어서 산언저리의 솔숲 그늘에 앉아 맑은 공기 마시고 수다도 실컷 떨었다. 두 달쯤 지나서 도예 학원에 등록해서 도자기를 배웠다. 점토를 수백 번 주물러 치대어 공기를 빼는 과정이 힘들었다. 울퉁불통 못난이 작품이 나왔지만 그래도 내가 만든 것이라 애착이 갔다. 도서관에서 기초 영어 회화와 인문학, 동화구연을 들었다. 주민센터에서 꽃꽂이 수강을 했다. 꽃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라 시간은 잘 갔지만 곧 거리를 느끼게 되었다. 수강생들끼리 언니, 동생 하며 가끔 차를 마시고 밥도 먹으며 사이좋게 지내는 건 좋은데 낮부터 노래방에 가자, 술 한잔하자는 말에 피로를 느꼈다. 그들 역시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만두게 되었다. 걷기를 같이 하던 친구도 쌍둥이 손자, 손녀를 돌보기 위해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생활이 시들하고 조금 무료해졌다. 그러든 어느 날 연금공단 대구지부에서 문자가 왔다. 상록아카데미 개설 소식이었다. 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상 몇 번 받은 것만 믿고 수필 반과 풍선아트에 신청했다. 수필은 신청자가 많아 선착순 모집에서 떨어지고 풍선아트를 하게 되었다. 동화구연 반에 자리가 남아 신청했다. 풍선아트는 어렵지만 시간마다 작품이 하나씩 만들어지니 정말 재미있었고 동화구연 강사님 역시 탁월한 분이어서 2학기에 전문가 과정까지 수강했다.
다음 해엔 일찌감치 수필과 문화해설 반에 신청했다. 나와 상록수필과의 인연은 이렇게 2015년부터 시작되었다.
첫 수업에 상록수필 창간호를 나누어 주셨다. 동기를 부여하는 좋은 선물이었다. 수업의 도입은 입담이 좋으신 교수님께서 세상 살아가는 구수한 이야기와 여러 현자賢者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좋았다. 이론 수업의 주안점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었다. 수업을 들으며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는 명문도 떠 올리고 ‘인연’에서 선생님의 첫사랑 아사꼬와의 추억도 소환했다. 유경환 선생님의 ‘틀니’는 가슴이 시렸다. 틀니를 하려고 아들네에 돈 30만 원을 얻으러 왔다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돌아서는 선생님 어머니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나다니길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수필 공부가 딱 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지하상가 찻집에서 세상 관심사나 이런저런 이야기로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일도 즐거웠다. 생각이나 취미, 생활방식이나 종교가 서로 다르지만 서로 이해하고 적정선을 지켜서 분위기도 좋았다.
교수님은 한 주에 한편의 글제를 숙제로 내어주셨다. 일년 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쓴 글이 모여 우리 수필반의 산물인 상록수필 연간지 2호가 탄생하였다. 수필은 솔직하게 쓰는 글이다. 여러 해 계속 쓰다 보면 필력이 부족해서 가족 친지의 이야기나 살아온 이야기를 자주 쓰게 된다. 자신과 주변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일이라 글을 쓰는 일이 세월이 갈수록 부담스럽고 힘들다. 더구나 등단한 후에는 작가라는 이름에 누가 될까 조심스러워 글쓰기가 더 어렵다. 많은 사람이 수필은 누구나 자유로운 형식으로 쉽게 쓰는 글이라 오해한다. 형식에 맞게 쓰지 않으면 칼럼이 되고 논설문이 되고 기행문이 되기도 한다. 수필이 청춘의 글은 아니어서 그런지 과거를 회상하는 글이 많다. 나도 그렇다. 미래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비워두고 앞으로는 현재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세상에 지식과 지성을 추구하는 글은 차고 넘친다. 이런 책은 이제는 버겁고 어렵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은 공감을 주는 글, 잔잔한 감동으로 울림을 주는 글을 많이 읽고 쓰고 싶다.
2023년 올해는 상록수필 10호를 발간하는 특별한 해이다. 작년에 코로나와 연금공단의 사정으로 상록아카데미 수업이 폐강되었다. 대경 상록 자원봉사단 수필창작 교실에서 독립해서 '상록수필문학회'로 새롭게 발족했다. 어느덧 상록수필문학회와 함께 9년을 동행했다. 짧은 시간은 아니다. 10년 세월 동안 지도교수님의 열정으로 등단 작가도 많이 배출했다. 세월 따라 나이는 들고 몸은 늙어가지만, 문학회의 이름처럼 사시사철 늘 푸른 젊음을 간직한 역량 있는 문학회로 발자취를 이어가길 자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