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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교회를 가다
(1) 베트남 사회와 교회 상황
박해 · 가난에도 굳게 지켜낸 신앙
- 전쟁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빈탄신학교 성전. 현재 빈탄신학교에는 빈교구와 탄화교구의 신학생 120여 명이 6년 과정으로 교육받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역사적 대치상황, 식민통치의 뼈아픈 기억, 남북으로 갈라져 벌인 동족상잔의 전쟁. 베트남과 한국이 가진 공통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박해의 역사와 수많은 순교자, 비슷한 숫자의 성인(117위)이 존재하는 교회 등 베트남은 많은 부분 우리와 닮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베트남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으로 곳곳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본지는 베트남 사회와 교회의 상황, 지역마다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본당들의 현황, 월남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중부지역 복지문제에 대해 3회에 걸쳐 보도한다. 사회주의 정권과 불완전한 종교의 자유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고 어두운 곳에 등불이 되고 있는 베트남 교회를 찾았다.
베트남 사회와 문화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남북으로 약 1600㎞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면해있다. 면적은 대한민국(남한)의 3.3배(32만9315㎢), 인구는 1.8배(8853만7000명)에 달한다.
베트남은 2020년까지 ‘현대화, 공업화’의 기치를 내걸고 경제적 성장을 꾀하고 있는 신흥개발도상국이다. 자국의 산업보호와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헌법 개정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개혁과 개방을 도모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과 1000년의 항쟁, 프랑스와 100년의 투쟁, 미국과 8년의 전쟁 등 베트남 민족은 끊임없이 침략자에 억눌려 가난과 질병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은 가족과 민족을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인고의 세월을 참고 견뎌온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자연 조건의 영향으로 그들만의 끈기와 인내를 지니게 됐다.
베트남 사람들은 친근하고 정이 많다. 손님을 접대할 줄 아는 예절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은데, 열대지방의 낙천성 때문인지 외국인을 보면 피하지 않고 친근감 있게 대한다.
때마침 베트남을 찾은 시기는 한국의 음력설과 같은 베트남 최대의 명절 뗏(TET) 기간이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식구도 본가를 찾아가 한가족이 모두 모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음식을 잘 차려 먹으며 형제 가족 간에 우애를 다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날 전에는 집안을 청소하고 남에게 빚이 있으면 갚고 새해를 새롭게 맞는다. 설빔을 입고 친지를 찾아 새해의 행운을 비는 인사를 나눈다. 설 전날부터 폭죽을 요란하게 터뜨리며 축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긴다. 어른들은 노름도 즐긴다. 이 축제는 설날부터 보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베트남 교회의 과거와 현재
- 주일을 맞아 성당을 찾는 베트남 시골 마을 신자들.
베트남 교회는 16세기 프랑스 선교사인 이냐시오 신부가 첫 발을 내딛은 이후 활발한 교역과 포교가 이뤄진다. 한국에선 박해가 이뤄지던 19세기 초 베트남은 이미 3명의 주교와55명의 외국인 선교사 사제, 121명의 방인 사제를 보유한 커다란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는 서구 사상이 왕조 유지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으로 1825년부터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다. 이 박해는 1848년부터 훨씬 더 심해져 13만 명에 이르는 신자가 순교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는 중국 대륙에 대한 정치적 욕심으로 베트남을 침략한다. 186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식민지 시기는 베트남 민족으로서는 굴욕의 시기였지만 가톨릭교회로서는 본격적인 황금기를 맞이하며 교육과 복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00여 년의 황금기를 보낸 베트남교회는 1954년 전쟁의 발발로 또다시 커다란 시련을 맞는다. 북부 지역의 성직자들은 감옥으로 잡혀가고 신자들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난다. 특히전쟁 이후 무신론적 관념이 팽배해지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축소됐다.
이후 정부는 교회의 재건을 허락하지 않다가 1988년 즈음에야 복구가 시작된다. 또 제한적인 종교 활동이 허락되면서 많은 성소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부모로부터 끊이지 않고 내려온 신앙의 유산 때문이다.
1988년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기 이전까지는 신자들 가정에서는 많은 경우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물들어 신앙을 잃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현재 베트남 정부는 작년부터 신학교 입학과 사제서품을 매년 허용하고(이전까지는 격년 허용, 인원 제한) 명절 때 가톨릭기관을 방문하는 등 유화책을 펼치고 있지만 여전히 아직까지 성당 외 지역에서의 종교 활동이나 선교는 금하고 있다.
[인터뷰] 베트남 빈교구장 가오 딘 투이엔 주교
“세계 교회의 관심이 절실합니다”
가오 딘 투이엔 주교.
“한국교회의 베트남에 대한 호의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베트남교회이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위해 더욱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청빈의 모습이 그득 배인 빈교구청의 교구장 집무실에서 83세의 가오 딘 투이엔 주교를 만났다.
“교구청이 위치한 이 지역은 주교좌성당뿐 아니라 수도원 신학교 등이 포탄으로 무너져 내려 재건한 곳입니다. 현재 베트남 남부에는 많은 성당들이 신축됐지만 북부와 중부에는 신자들을 위한 성전이 매우 부족한 실정입니다.”
가오 딘 투이엔 주교는 “대부분의 가난한 본당들의 경우에 성전을 수리, 증축할 여력이 없어 신자들이 성당 밖에서 전례와 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해외 교회의 도움을 얻어 성전도 고치고 복지사업도 펼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설명한다.
빈교구는 다른 교구와 마찬가지로 정부와의 문제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현재 상황이 조금 좋아져 보이지만 아직까지 갈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요즘 들어 설날을 맞아 인사를 전해오는 등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에안지역 내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고 선물을 전하는 등 정부의 이런 관심은 유례가 없어서 기쁜 마음으로 희망을 품게 됩니다.”
빈교구가 위치한 베트남 중부 지역은 전쟁 피해가 가장 심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기형아의 출산이나 장애를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며 복지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장애인 시설이나 복지관을 만들려고 해도 정부가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혐오시설이라는 이유 때문이죠. 정부의 이런 정책으로 인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트남교회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세계교회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가오 딘 투이엔 주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성장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면서 “한국교회가 주님의 평화 속에서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베트남 가톨릭교회 현황
▲ 교구 : 3개 대교구 포함 총 26개 교구
▲ 신자 : 800여 만 명
▲ 사제 : 3000여 명
▲ 주교단 : 추기경 1명, 대주교 2명, 주교 39명
▲ 수도자 : 73개 수도회 2만 3000여 명
▲ 신학생 : 7개 신학교 1500여 명
▲ 연간 세례 : 16만 4000여 명
▲ 연간 견진 : 1만 2000여 명
※ 특이할 점은 16만여 명의 새 신자 중 12만여 명이 7세 이하의 유아세례이며 나머지 4만여 명도 혼배성사를 통해 신자가 된 경우다. 베트남 정부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할 경우 자녀의 교육 등 모든 혜택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엄격하게 선교를 금하고 있다.
(2) 북부 베트남 교회의 본당들
공동체마다 분위기 다르지만 마음만은 하나
현재 베트남 교회는 북부지방에 9개 교구를 포함한 호치민대교구, 중부지방에 5개 교구를포함한 휴대교구, 남부지방에 9개 교구를 포함한 하노이대교구 등 3개의 관구로 이뤄졌다. 교구의 숫자나 구성만 따지자면 각 지방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1954년에서 1975년까지 북부와 남부로 갈라져 벌인 전쟁은 비단 사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가톨릭교회에도 심각한 불균형을 낳았다. 1954년 베트남의 가톨릭 신자 수는 북부가 110만 명, 남부가 48만 명이었다.
하지만 북부 베트남지역을 장악한 공산주의 세력을 피해 65만 명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이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남부지역 교회는 전쟁 기간 중에도 성장을 계속하게 됐으며 1975년 말 정부가 교회를 전체적으로 통제하기 전까지 가톨릭교회의 무게중심은 남부지역으로 쏠리게 되는 비정상적 발전을 초래하게 됐다.
- 덴풍본당 주변은 대부분 논밭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네 시골의 정겨운 풍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후 남부지역 교회들은 정부의 간섭 속에서도 교우촌을 형성하고 끈끈한 응집력으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수많은 성전을 세운 반면 북부지역은 무자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본당을 지키던 일부 신자들과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신자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별히 이번 기획은 베트남 북부지역에서 신앙을 어렵게 지켜온 타이빈교구의 덴풍본당과교회 재건을 위해 활발하게 노력하고 있는 빈교구의 트엉록본당을 살펴봄으로써 베트남 북부 신자들의 실상과 신앙생활에 대해 알아본다.
타이빈교구 덴풍본당 - 3가구 신자만이 낡은 성전 · 믿음 지켜
앞과 뒤, 어디를 살펴봐도 커다란 건물 하나 없이 펼쳐진 논밭. 다만 3모작을 하는 쌀농사로 인해 추수와 모내기가 함께 이뤄지고 있다는 이색적인 모습을 제외하면 우리네 시골의 정겨운 풍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비포장 시골길을 조금 더 달리니 유럽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덴풍성당이 보인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모습과 커다란 성당의 규모는 수많은 신자들의 활발한 공동체를 떠올리게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타이빈교구 소속의 덴풍본당은 현재 3가구 17명의 신자들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1954년 대부분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기 전까지는 신자들이 넘쳐나는 본당이었다. 전쟁의 상처는 본당을 ‘조용한 공동체’로 만들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젊은이들은 산업화 · 공업화를 추구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도시로 떠나갔다.
- 덴풍성당 전경. 커다란 규모와는 달리 현재 3가구 17명의 신자가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비록 덴풍본당의 신자 숫자는 적지만 남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뜨거운 공동체’를이루고 있었다. 오래된 교우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주며 성당을 지켜오는 모습이 초대공동체를 닮았다.
이곳에서 만난 라민 전반빈(75)·마리아 무디연(77) 부부는 전쟁과 박해 속에서 끝까지 남아 성당을 지켰던 역사의 산 증인이다. 라민 전반빈 씨에게 전쟁 때 왜 남쪽으로 피란 가지않았느냐고 물으니 “성당은 우리가 사는 우리의 집”이라며 “그냥 떠나고 싶지 않았고 성당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리아 무디연 씨는 “성당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끝까지 여기에 살겠다고 다짐했었다”고 회고한다.
또 덴풍성당은 베트남의 117위 성인 중 베트남 방인 사제인 성 귀세 신부의 출생지이며 순교 후 유해가 묻힌 성지다. 본당을 관리하는 부제는 “성 귀세 신부님은 미사를 금지하던 박해시절 끝까지 주님의 제사를 봉헌하다가 참수형을 당했다”고 설명하며 “특히 이 지역의 신자들은 그러한 순교자들의 영향을 받아 충실하게 신앙을 지켜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자들의 뿌리 깊은 신앙심과는 달리 성당의 모습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1928년에 건축한 성전의 지붕은 양철 지붕으로 덮여 비가 올 때마다 미사를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고, 신자들은 덥거나 추운 날씨엔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은 신자들이 많이 없어서 신부님이 그동안 안 계시다가 2년 전에야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비가 없어서 사제관 공사도 중단된 상황입니다. 그래도 저희들은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나는 덴풍본당.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의 소중함을 깨닫고 지켜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보인 것은 절망이 아닌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빈교구 트엉록본당 - 매주일마다 성대하게 미사 봉헌
- 트엉록본당의 미사 봉헌 예절에서 봉사자들이 다니며 직접 헌금을 받고 있다.
‘빵빠라 방빵’ 지휘자의 손놀림에 맞추어 관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시작됐다.
‘무슨 커다란 잔치나 행사가 벌어진 것일까?’
마을의 수많은 주민들이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그곳에서 빈교구의 트엉록본당 관악대는 주일미사의 시작을 알리며 초·중·고등학생 및 일반 복사단과 함께 긴 행렬을 이뤘다.
트엉록본당은 매 주일마다 성대하게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를 나누기도 하는, 북부 베트남교회에서는 매우 활발한 공동체다.
본당의 관할 구역 중에는 주민의 70% 이상이 신자로 구성된 곳도 있고, 각각의 신자 가정집에는 가장 높은 곳에 성상을 모시고 조명을 설치하는 등 신앙심의 표현이 매우 열정적이다.
주일이면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자전거와 오토바이 등을 타고 성당에 모여든다. 학생들과 젊은이들도 넘쳐나 성전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신자들은 바깥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미사를 봉헌하기도 한다.
본당 신자 호아 센(35) 씨는 “주일마다 성당에서 기도하고 친구들도 만나는 생활이 너무나 즐겁다”면서 “비록 베트남에서 가톨릭 신자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부모로부터 이어온 신앙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성전 안의 모습도 이채롭다. 아직까지 베트남 교회는 남녀의 좌석이 구분돼 있으며 봉헌을하는 경우 몇몇의 봉사자들이 잠자리채 같은 것들을 가지고 다니며 신자들로부터 직접 헌금을 받는다.
신자들 전체가 노래로 미사를 봉헌하는 장엄미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엄숙함을 더하게 한다. 제대의 양쪽에 위치한 복사를 위한 자리도 역시 남녀가 구분돼 있다.
- 초등학생들의 복사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팔짱을 낀 모습은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전통적인 표현의 하나.
본당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선택의 문제로만 여길 수 없는 절박함이 있다. 베트남 정부는 엄격하게 선교활동을 금지하고 있기에 자녀들에게 꼭 유아세례를 주고 신앙의 중요성을 가정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다.
트엉록본당의 경우에는 지역 내 신자의 비율이 높아 정부에서도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 장애아동들을 위한 복지관을 설립하는 등 새로운 건축 등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신자들이 가난하다 보니 교회도 신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확충할 수 없는 현실에 큰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관도 없었고 날씨가 좋지 않으면 성전이 비좁아 밖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하지만 트엉록본당의 신자들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빈교구는 사제의 숫자가 부족해 신자들이 많이 있음에도 사제들을 제대로 파견할 수 없는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3) 복지현실과 교회의 노력
전후 35년…고엽제에 시달리는 사람들
- 베트남 빈교구의 아동복지 시설에서 수녀님이 장애아동을 돌보고 있다.
베트남은 현재 연평균 7%대의 고도성장을 이루며 경제적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일부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는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가 심해 잦은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는 중부지역은 베트남전쟁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들은 가난, 환경파괴, 고엽제 문제 등 3중고를 겪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전쟁 이후 세계교회의 다양한 원조를 발판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제는 받는 교회가 아닌 나누는 교회로의 전환을 요청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 피해를 입힌 도의적 책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마산교구 성산종합사회복지관(관장 이성렬 신부)은 2008년부터 베트남 중부지역 에안에 중증장애와 고엽제 아동을 위한 장애인시설 건립을 추진했으며 이미 완공단계에 있다. 본지는 장애인시설을 방문한 성산종합사회복지관과의 동행취재를 통해 베트남 복지의 실태를 알아보고 성산종합사회복지관의 시설 건립 취지와 과정 등을 살펴본다.
- 아동복지시설의 한 어린이가 추워하는 동생을 보살피고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정글이었다. 네이팜과 기화폭탄, 화염 방사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어떤 폭탄이 떨어진 자리라도 폭우가 한 번 내리면 3일 안에 복구가 될 정도로 정글의 생명력은 강했다.
그래서 군이 선택한 것이 고엽제다. 나무를 고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제초제인 고엽제 중 미군이 베트남전 당시 사용한 것은 에이전트 오렌지. 여기에는 다이옥신이 들어있으며 다이옥신의 치사량은 0.15g, 청산가리의 1만 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지고 있다. 다이옥신은 체내에 축적돼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각종 암과 신경계 손상을 일으키며, 기형을 유발하고, 독성이 유전돼 2세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현재 베트남은 전쟁이 끝난 지 35년이 흘렀음에도 수많은 이들이 고엽제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고 있으며 기형아 출산 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경제 발전에 집중한 나머지 복지 문제에 대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가난한 대부분의 가정은 장애아를 출산할 경우 보살필 형편이 안 되고 아이를 맡길 복지시설도 많지 않아 제대로 된 치료는커녕 최소한의 끼니를 때우기에 급급하다.
- 마산교구 성산종합사회복지관이 베트남 중부 에안에 건립하고 있는 장애인 생활시설.
빈교구의 사회사목 담당 안토니오 풍 신부는 “빈민층의 경우에는 자녀가 아프거나 장애가 있더라도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탓에 병원에는 갈 수 없다”면서 “다행히 교구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에 들어올 경우에는 그나마 낫지만 시설의 규모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밝힌다.
또 풍 신부는 “시설이 건립된다 해도 운영을 위한 자금이 부족한 탓에 아이들에게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세계교회의 관심과 사랑으로 의료봉사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마산교구 성산종합사회복지관의 장애인 생활시설 건립은 열악한 베트남의 복지 현실에 큰 기쁨이 되고 있다. 성산종합사회복지관은 약 1200㎡의 부지에 2층 규모의 시설을 건립하고 있으며 90% 가까운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50여 명의 중증장애 아동이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은 병실과 진료실, 재활교육실, 사무실 등 각종 편의시설을 모두 갖췄다.
2008년부터 2억여 원의 지원을 통해 장애인 시설을 건립한 성산종합사회복지관은 그동안한국에서의 모금과 바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베트남의 복지 현실을 알리고 관심을 촉구해 왔다. 하지만 빈교구는 완공을 앞둔 시설의 운영과 각종 비품 마련을 위해 추가적인 도움을 요청한 상태다.
빈교구장 가오 딘 투이엔 주교는 “정부에서는 장애시설에 대한 지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서 “오히려 정부가 복지시설의 확산을 억제하고 있다가 1990년대에 와서야 장애인시설 건립을 허락하는 등 어려움이 많다”고 밝히며 베트남교회 자체적으로 복지사업을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설명했다.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형으로 태어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베트남교회는 이들을 위해 힘써 줄 역량이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이들이 건강을 찾고 신앙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전쟁이 끝난 지 35년이 흘렀음에도 기형아 출산 등 고엽제로 인한 많은 문제들이 계속되고 있다.
[인터뷰] 마산교구 성산종합사회복지관장 이성렬 신부
“지속적인 사랑 · 나눔이 필요”
“처음 제가 방문했던 복지시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머리가 거꾸로 달려 있거나, 몸이 머리보다 작거나, 팔다리가 없는 기형의 몸으로 태어나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힘으로 몸을 움직인 적 없는 사람들….”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이성렬 신부가 장애인 생활시설 건립에 나선 것은 교구 이주사목위원장을 겸하던 2008년 1월 처음 베트남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무엇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장애인 시설 건립을 추진하게 됐습니다.”
이 신부는 “성산종합사회복지관 역시 변변한 사회교육시설 하나 없던 1985년 오스트리아 그랏즈교구의 도움으로 건립된 곳”이라며 “이제는 우리도 받은 것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복지관은 이후 모금과 바자 등의 활동을 통해 성금을 모았고 베트남에 장애인 시설을 건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렬 신부는 한 번의 도움으로 빚을 갚았다는 생각보다는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베트남교회는 정부의 강압으로 선교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계속해서 사랑과 나눔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면 선교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엽제에 시달리는 베트남 아동에 사랑을”
후원계좌 : 842401-01-449470 국민은행 / 807-01-020365 농협
예금주 : 창원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21일, 에안(베트남) 이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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