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지우기 혹은 좌망의 시학/박제천론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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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에서 추천을 완료한 것이 1966년이니 박제천 시인은 벌써 시력 50년을 넘겼다. 첫 시집 장자시(1975)에서 최근작 천기누설(2016)에 이르기까지 무려 15권의 시집을 상재하는 동안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것은 바로 사물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일이었다. 나무가 종이가 되고 종이가 다시 나무의 질료로 돌아가고, 흙이 되고 바람이 되는 과정이야말로 좀 거창하지만) 우주의 원리이다. 개체 단위에서 사물들이 분리/경케의 원리로 존재한다면 우주 단위에서 사물들은 연합/연쇄의 원리로 존재한다. 개체 단위에서 사물들이 이질성의 원리로 존재한다면, 우주 단위에서 사물들은 동질성의 원리로 존재한다. 억만 겁의 장구한 세월과 우주라는 무한 공간 안에서 개체들은 '차이'가 아니라 같음'의 기표들인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도 사실 도안에서 "모든 만물은 하나"라는 동질성의 철학이다. 나이 서른 무렵에 장자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으니, 그는 얼마나 일찍 '우주에 대한 사유'에 진입했는가. 그는 마치 사사로운 일상을 깡그리 지워버리기라도 할 듯, 초기부터 '관념'의 거대한 고원에서 출발한다.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상형의아름다운음정들
고물께서소리죽이고흐느끼는바닷물문득
머리위에높이떠피어나는물보라꽃에저희넋을실으나
뉘라볼수있으랴
허공속에서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거니
바다아래꽃게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네.
-장자시 그 둘 전문
그는 등단 후 첫 시집인 장자시를 출간하기까지 거의 10년을 상상력의 훈련에 전력을 기울였"(사물과 이치)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시에는 그런 노력과 성과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뱃고물에서 치는 물보라를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상형의아름다운음정들""허공에서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거니"라고 묘사한 부분은 한편으로는 상상력의 높은 성취를 보여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자"라는 기표가 상징하는 바 사유의 깊이를 보여 준다. 가령 물보라를 "상형의 아름다운음정들"이라고 부르며 "꽃잎"에 비유한 것은 공감각共感覺의 기발한 연속과 굴절을 보여 준다. 문제는 이 앞에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이라는 수식어와 "허공에서"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은 것이다. 그는 음정들(물보라)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함과 동시에 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들의 덧없음과 무의
미함, 정확히 말하면 어떤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규정하는 것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행의 "꽃게의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라는 표현은 지극히 낮은 것이 지극히 높은 아름다움을 삼켜버리는 위계의 전복을 보여 준다. 간단히 말해, 이 대목에는 높다고 높음의 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며, 낮다고 낮음의 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장자 특유의 사유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장자 내편 "제물론"에 나와 있는 바, "저것 아닌 것도 없고, 이것 아닌 것도 없다 ・・・(중략)저것은 이것으로부터 오고, 이것은 저것에 의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저것과 이것이 서로를 생기게 한다는 그 논리다物無非彼 物無非是 …(증략)…彼出於是 是亦彼彼方生之就]"라는 말은 대립물들 사이의 상호내재성을 잘 보여 준다. 세계의 모든 대립물들은 오로지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상대 항목이 없을 경우 스스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높
음이 낮음을 만들고, 낮음이 높음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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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천이 장자적 의미의 자유로운 '놀이'(소요유)에 집중하는 것은 열한번째 시집인 「아, (2007) 이후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맘껏 놀 것인가. 잘 놀기 위해서는 경계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고, 차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분간할 수 없는 것을 분간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자의 '나비 꿈(호접몽)'처럼 경계가 지워지고, 경계의 구분이 무의미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론과 논리에 매달리지 않는 것. 그리하여 인의(仁義, 예악禮樂의 율법들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이 놀 수 있다. '앉아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이 상태'를 장자는 공자를 빌어 "좌망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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