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규보, 무신정권 치하 문신의 삶’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강화 선원사와 팔만대장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선원사(禪源寺)
선원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대부터 조선 초까지 고려대장경 경판을 보관했던 절입니다.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시기인 서기 1245년(고종 32년)에 창건되었지요. 이 절은 최씨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입니다.
여기서 원찰은 사찰(寺刹: 절) 가운데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는 불교건축물입니다. 이러한 원찰인 선원사는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 격인 사찰이었지요. 국찰은 국가에서 창건하여 운영하는 절을 말합니다. 선원사는 원래 최우의 개인 절이니 국찰이라 하기는 그렇지만 당시 최우가 최고실권자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선원사는 역대 주지에 진명국사(眞明國師)·원오국사(圓悟國師)·자오국사(慈悟國師)·원명국사(圓明國師)·굉연선사(宏演禪師) 등 신망 높은 당대 고승들이 임명될 정도로 역할과 중요성이 컸다고 합니다. 심지어 훗날의 일이지만 충렬왕 때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승려들 개개인은 모르더라도 굉연선사를 제외한 모두가 ‘국사’입니다.
이런 ‘나라의 스승’인 국사들이 대대로 주지를 할 만큼 선원사는 위상이 높았다는 말입니다. 그랬으니 팔만대장경도 이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겠지요. 고려 정부에서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기도 했습니다. 대장도감은 고려시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즉 팔만대장경의 판각 업무를 담당한 관청이지요.
참고로 봉안이라는 말은 보관한다는 뜻이면서 보관 대상을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조선왕조실록』, 선왕·선비와 성현 등의 위패(位牌), 『선원보』, 어진(御眞) 등 왕실이나 나라의 중요한 기록과 제사에 관련된 물건을 보관할 때 봉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요. 팔만대장경도 최소한 이러한 정도의 위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② 대한민국 국보 제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위의 제목은 팔만대장경의 정식명칭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인 서기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즉 고종 23년~38년까지, 16년에 걸쳐 인쇄하여 발행했지요. 한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릅니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것이지요.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도 말합니다. 불교에서 ‘8만 4천’은 매우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상투적인 표현이지요. 가령 고대 남부아시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대왕이 인도 곳곳에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런가하면 부처들이 말한 온갖 법문들을 모두 일컬어 ‘8만 4천 법문’이라고도 표현하지요.
따라서 팔만대장경이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 함은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모았다는 자신감에 찬 표현이기도 합니다.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동기는 서기 11세기에 요나라(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 대부터 선종 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지요. 한국여성사에서 설죽화 이야기가 거론되는 시기도 이 무렵입니다.
이후 초조대장경은 서기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략하면서 소실되었습니다. 이후에 다시 만들어진 대장경이 바로 재조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지요. 당시 이러한 조판은 국가사업이었기 때문에 최우는 임시 수도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했습니다. 여기서 조판(組版)은 과거 활자를 배치하여 인쇄를 할 수 있는 활판을 만들어내던 일이지요.
판각의 지휘는 강화도의 대장도감이 맡았지만 실제 판각은 현재의 경상남도 남해군 지역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맡았다고 합니다.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은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워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관리하는 일, 즉 조성사업을 분담하던 임시 지방관서지요. 이 임시기구는 고려 전국의 여러 승려들이 맡았습니다.
예를 들어 말년에 『삼국유사』를 쓴 것으로 유명한 일연도 남해군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서기 1249년부터 3년 간 일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여하간 고려 조정은 남해에서 제작된 팔만대장경 경판들을 본래 강화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했다가 이후 선원사로 옮겼다고 하지요. 서문은 오늘날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용어들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은 대장경 경판(經板)을 수장하여 보관하는 건물이지요. 경판(經板)은 책을 간행하기 위하여 나무나 금속에 불경(佛經)을 새긴 판입니다. 수장(守藏)이라는 말은 책을 찍기 위하여 활자를 정리하고 감수하는 일을 말하고요.
③ 팔만대장경의 의의
팔만대장경은 수천만 개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와 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매우 큽니다. 현재 남아있는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등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지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가 이른바 ‘법보사찰’로 불리는 이유도 팔만대장경 때문입니다.
법보사찰(法寶寺刹)은 삼보(三寶) 사찰의 하나입니다. 삼보(三寶)는 불교의 3가지 보배란 뜻으로 불자가 귀의해야 한다는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하지요. 여기서 귀의는 부처와 불법(佛法)과 승가(僧伽)로 돌아가 의지하여 구원을 청하는 것입니다. 한편 법보(法寶)는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이러한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해인사가 순천시의 송광사, 양산시의 통도사와 함께 한국의 3보 사찰로 꼽히는 것입니다.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사찰이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수계(受戒)는 불교를 받드는 자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戒律)에 따를 것을 맹세하는 의식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왜 몽골제국니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