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의금부 터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조선의 군사체제가 정비되면서 의금부 기능은 축소되어 정치범이나 중죄인 등을 다스리는 사법 전담 기관이 되었다.
의금부는 한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는데, 현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인근의 SC제일은행 화단에 표지석이 서 있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다.
[자료제공 : 한국교회사연구소]
의금부에서 국문(鞫問)을 받은 것으로 기록된 천주교 신자 가운데 성인과 복자
박해(연도) | 성명 | 세례명 | 순교지 | 비고 |
신유박해(1801년) | 주문모 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최창현 | 요한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정약종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홍교만 | 프란치스코하비에르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최필공 | 토마스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홍낙민 | 루카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강경복 | 수산나 | 서소문 밖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유항검 | 아우구스티노 | 전주 | 복자 |
신유박해(1801년) | 윤지헌 | 프란치스코 | 전주 | 복자 |
기해박해(1839년) | 앵베르주교 | 라우렌시오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모방 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샤스탕신부 | 야고보 | 새남터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유진길 | 아우구스티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정하상 | 바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조신철 | 가롤로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남이관 | 세바스티아노 | 서소문 밖 | 성인 |
기해박해(1839년) | 김제준 | 이냐시오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베르뇌주교 | 시메온제4대교구장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브르트니에르신부 | 유스토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볼리외신부 | 베르나르도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도리신부 | 베드로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남종삼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최형 | 베드로 | 서소문 밖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정의배 | 마르코 | 새남터 | 성인 |
병인박해(1866년) | 전장운 | 요한 | 서소문 밖 |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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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금부
1) 의금부란?
① 의의,역사,위치
조선의 최고 사법부 가운데 하나로, 금부(禁府), 왕부(王府), 금오(金묻)라
고도 불리었으며, 형조(刑萬), 한성부 (漢城府)와 함께 삼법시-(三法司)라고 하였다. 1414년(태종 14)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를 의금부로 개편한 데서 징식
으로 시작되었고,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때 의금사로 개칭되면서 법무아문(法務W門)에 속했다가 다음해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衝門權設裁判所,고등재판소)로,1899년에 다시 평리원(評理院)으로 개편되었다. 그 위치는 한성부 중부 견평방(堅平技,현 종로구 공평동 100번지 인근)에 있었다.
② 임무야 사법 기능
설립 초기에는 포도(捕盜), 순작(巡轉),금란(禁亂)의 군사적 임무까지 관장하였지만,뒤에는 약간의 금란 임무만 남고 주로 사법부의 역할 만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정약용(丁苦-第)은 “의금부가 옥사를 다스리는 기관이고 순작의 책임은 없으니 ‘금오’ 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라 고지적하였다.
의금부의 사-법 기능으로는 첫째,왕권을 응호하는 역 할로,반란 및 음모,난언(亂言)이나 요언(妖言)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둘째,유교 윤리
를 옹호하는 기관으로,강상죄(網常罪)를 전담하였디셋째,왕의 교지를 받들어 추국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으로,사건을 재심하거나 이관 받아서 재판했으며,조선의 삼복제 아래에서 최고의 재판 기관이 되었다. 넷째 , 대 의금부, 전옥서 위치도(도성대지도)외 관계 범죄와 양반 관료의 범죄를 전담하였다. 이 밖에도 의금부에서는 왕명에 따른 민간 실정 조사,신문고 담당, 민폐 금지 임무,몰수 재산 처리, 금화도감(禁火都監,현 소방서) 참여,고사장(考査場)의 금란 임무,나례의식 (徵禮儀式) 주관 등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③ 관원과 옥사
〈경국대전〉에 따르면, 의금부에는 종1품 판사(判事), 정2품 지사(知事-),종2품 동지사(同知事) 등 당상관 4명을 두게 되어 있었는데 모두겸 직 이 었 고 , 실무는 종4품 경력 (經歷)과 종5품 도사(都事)인 당하관 10명이 관장하였다. 후에는 경력이 없어지고 도사로만 실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으며,서원이자 사무 정리 담당인 영사(令史)가 추가되었다. 또 세종 때는 금란(禁亂)을 위해 나장(羅將) 100명,도부외(都府外) 사졸(士卒) 1,000명을 두었으나,훗날 도부외 사졸을 모두 없애고 나장수를 줄이면서 금란 임무를 한성부로 이관토목 하였다.
의금부 안에 동간, 서간, 남간의 세 감옥을 두었는데, 서간에는 조관 경죄자(朝官輕罪者),동간, 남간에는 역옥(逆獄) 등 중죄자름 수금했으며,궐내에는 의금부 관원들의 당직청 (當!社廳)을 두었다.
2) 의금부와 천주교 순교사
① 1801년의 신유박해
천주교 순교사에서 의금부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초였다. 즉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박해령이 내려진 지 얼마 안 된 3월 22일(음력 2월 9일) 천주교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있던 이가환,정약용(요한 사도),이승훈(베드로)이 금부 도사들에게 체포되어 이튿날부터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게 된 것이다. 이후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복자 최필공(토미-스), 하느님의 종 권철신(안브로시오),복자 최창현(요한),조동섬(유스티노),복자 홍낙민(루카),복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기-) 등이 연이어 의금부의 추국을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추국을 받던 권철신과 이가환이 문초와 형벌로 인해 4월 4일(2월 22일)에 물고되었고,4월 8일(2월 26일) 최필공, 정약종, 이승훈, 홍교만, 최창현, 홍낙민 등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 장으로 끌려가 순교했으며. 이존창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고,다른 신자들은 유배 형 을 받았다.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에는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은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의금부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았으며,이곳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로 끌려가 5월31일에 순교하였다.
이어 5월 10일(음력 3월 28일)부터는 전라도에서압송되어 와 전옥서에 갇혀 있던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복자 윤지헌(프란치스코) 등이 의금부로 끌려와 추국을 받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전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또 11월 8일(음력 10월 3일) 이후에는 충북 제천에서 의금부로 끌려온 하느님의 종 황사영(알렉시오)이. 15일에는 복자 현계홈(플로로)과 하느님의 종 황심(토마스), 옥천희(요한)가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각각 능지처사형과 참수형의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가 순교하였다.
② 1839년의 기해박해와 1866년의 병인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9월 14일(음력 8월 7일)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추국이 시작되었다. 이날 성 앵베르(L. Imbert, 범 라우렌시오) 주교,성 모방(P. Maubant, 나 베드로) 신부와 성 샤스탕(J. Chastan,정 야고보) 신부가 추국을 받았으며,이튿날에는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성 정하상(바오로),성 조신철(가롤로)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어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 성 김제준(이냐시오)도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고, 유진길, 정하상 등은 9월 22일과 26일에 각각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충청도 제천에 내려가 있던 성 남종삼(요한)은 제천을 떠나 상경하다가 3월 1일(음력 1월 15일)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되어 이튿날 중죄인을 수감하는 의금부 남간(南間)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3월 2일부터 남종삼 성인을 비롯하여 좌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투옥되어 있던 성 베르뇌 (S. Berneux, 장 시메온)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S.M.J, Bretenieres, 백 유스토) 신부,성 볼리외(L. Beaulieu, 서 루도비코) 신부, 성 도리(P. Dorie, 김 베드로) 신부, 하느님의 종 홍봉주(토마스),주교의 하인 이선이,성 최형(베드로), 성
정의배(마르코),성 전장운(요한) 등이 의금부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게되었다.
이후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신부 등 4명은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남종삼, 홍봉주와 최형, 전장운은 3월 7일과 9일에 각각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1868년에도 의금부에서는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추국이 열렸다.
이때 이승훈의 셋째 아들 이신규(李身達, 마티아)와 그의 아들 이재겸(李在諫),이승훈의 손자요 이신규의 조카인 이재의(李在訴). 권철신의 증손자 권복(權復, 프란치스코),조연승(촙演承), 낙승(格承) 형제 등이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두ᅵ, 유배형을 받은 이재겸 외에는 모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③ 의금부 순교사의 의의
의금부에서는 신유박해 이후 병인박해 때까지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지도층 신자들이 추국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의금부는 천주교 순교사의 중요한 신앙 증거터가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종 권철신(암브로시오)에게는 이곳이 순교 터가 되었다. 다만,의금부 내에 있던 세 곳의 옥에서 옥살이를 한 신자는 하룻밤 남간에 투옥되었던 성 남종삼(요한)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의금부는 성인,복자, 하느님의 종들의 신앙 증거터요 하느님의 종 면철신 암브로시오의 순교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