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의 시대나 예수의 생존 당시에,
과연 불각(佛閣)이나 교회란 것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다른 종교에는 우상과 제단(祭壇)이 있었지만,
석가나 예수는 그런 것은 일체 만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그 후세의 사람들이
석가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마음을 기리고자 해서 만들었던 것이,
그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물질과학이 발달하여,
극미(極微)의 세계, 극대의 우주로 인간의 과학하는 마음이 쏠려 가면,
이러한 교회나 불각(佛閣)은, 겉발림 같은 것으로서
관광이나 결혼식장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다만 좋은 점은, 이러한 교회나 불각은,
인간인 이상 인간의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효용은 확실히 있는 듯하다.
결혼식이라는 인생의 출발을, 이런 장소를 골라서 하는 것도 그 표현일지 모른다.
또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는, 그다지 필요하게 느끼지 않지만,
장사가 부진, 후배에게 앞지름을 당하거나,
가정불화, 질병, 불안, 초조 등을 당하게 되면,
절간이나 교회에 가서, 정신적 안식을 구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무엇인가에 매달리고 싶고, 도움을 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참선(參禪)이라도 할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될 수만 있다면, 깨달음을 얻어,
세상사의 이치를 이 눈으로, 이 몸으로 알고 싶다고 원하는 사람도 나오지요.
석가는, 처자를 버리고, 왕자의 자리마저 내던지고 출가(出家)했으나,
그 시대는, 전쟁과 빈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무력(武力)과 압정(壓政), 사종(邪宗) 의 횡행(橫行)등,
사람의 도리는 땅에 떨어져,
지배자이외는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던 시대로서,
오늘날과는, 그 배경이 전혀 달랐다.
깨달음을 얻은 뒤,
석가는, 재가(在家)의 중생에게 불교를 전도하여,
함부로, 현실 도피를 위하여 출가하는 것을 훈계하였다.
인간의 목적은, 현실 사회의 조화이다.
생활 속에, 깨달음이 있다.
석가는, 그 길을 많은 중생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굳이 출가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괴로움을 해탈하여, 인류 구제의 목적을 완수하여 간 것이다.
예수 또한 그러하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서, 처음에는 일을 하면서,
사랑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전도(傳道) 외길로 나서서,
그 생애를 던져, 성서(聖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많은 기적을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훑어보면, 사찰이라든지 교회의 존재 의의란 것은,
오늘에서는 그다지 마음에 닿지 않는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장(場)으로 밖에 좋은 용도가 없다.
왜냐하면, 석가도 예수도,
이와 같은 전당(殿堂)이나 가람(伽藍)은 만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사물의 구별, 짜임새를 아는 것은,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사실, 사계의 변화,
물의 성질, 인간 사회의 가지가지 경험 속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전당(殿堂)에 막대한 돈을 들여, 위엄을 뽐내지 않아도,
인간 그 자신의 마음의 존엄성이야말로, 알아야 할 것이며,
또, 그런 돈이 있다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일이다.
대전당(大殿堂)을 만들어 신자를, 맹신시켜 조종하는 것은,
석가도 예수도 하지 않았다.
자연은 항상 바르게 운행하며,
우주도, 극미(極微)의 세계도, 하나로써,
신불(神佛)의 경륜(經綸)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것은 본디 대우주체는 대신체(大神體)이며,
지구는 대신전(大神殿)이기 때문이다.
일련(日蓮)이 쓴 ‘남묘호오렌게쿄’라고 하는 만다라(曼陀羅)를 가지고,
이것을 신불(神佛)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만다라.
그 자체는 한낱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련종(日蓮宗)의 신자가 나에게
“당신에게는 예배를 드릴 본존(本尊)이 없지 않은가.
우리한테는 만다라(曼陀羅)라는 본존(本尊)이 있는데,
대상물 없이도 기도를 올릴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반대로 질문했다.
“왜 기도할 대상이 필요한가.
만다라는, 본존이라고 일컫는 일련이 만든 것인가.“
그 신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일련이야말로, 구원의 부처이니, 성인이 만든 만다라야말로 본존이다.”
일련은 과연 신(神)인가. 아니다.
일련도, 육체를 가지고, 인간으로서 지상계에서 생활했던 사람일 뿐이다.
그 일련이 태어났을 때, 목에 만다라를 걸고 나왔을까.?
역시 일련도 사람의 아들이다.
신(神)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주고 있으며,
만다라 따위는,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낸 것이다.
예배할 대상물은,
대우주의 법,
곧 신의 마음과 자기 자신의 마음과의 대화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당신이 태어날 때,
기도를 드릴 대상물로서 만다라를 목에 걸고 나왔다면 믿겠다.”
라고 하니 그 신자는
“만다라를 걸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인도의 그 당시 고타마 붓다는
무학(無學) 문맹(文盲)의 중생에게 방편으로 설법했다.
중생이 알기 쉽도록 설명한 것 중의 하나가,
법화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되었다.
-----------------------
“ 모든 중생(衆生),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들이여,
저 늪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 있다.
어떤 것은 물 위에, 어떤 것은 물속에 피어 있다.
그러나 물밑은, 진흙으로 더러워져 있을 것이다.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중생이여, 비구, 비구니들이여,
그대들의 육체도, 저 연꽃과 같다 할 것이다.
눈을 보라, 피로할 때나, 눈병이 나면, 눈꼽이 나올 것이다.
코딱지, 귀지, 땀, 대소변, 한 가지도 깨끗한 것은 나오지 않듯이,
육체는 흡사 진흙의 늪과 같은 것이다.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