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천지쌍괴(天地雙怪) 1 - 인생광음화상로(人生光陰花上露). (주: 인생은 꽃 위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주루에 걸린 연(聯)에는 그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백삼청년이 있었다. 유비옥이었다. 문득 중앙의 탁자에 앉아 있던 무사차림의 장한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의 귓전으로 흘러들어왔다. 무사들 중의 1명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장합(張合)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자네 들었나?" 장합의 물음에 등에 장검을 메고 있던 무사가 반문했다. "뭘 말인가?" "무영천살이 나타났다는 소문 말야!" 그러자 장합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무소위(武所位)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ㅋ! 이 사람, 그게 무슨 대수로운 소문이라고." 장합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아니! 그럼 자네들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천하의 무영천살이 나타났는데 말이야. 더욱 그는 철검무정의 도전을 받고 있질 않은가? 이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인데 자네들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이 사람, 그거야 자네만 모르고 있었지.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사실이야. 무영천살이 다시 무림에 등장한 지는 꽤 되었단 말일세." 무소위의 핀잔이었다. "그래? 그럼 나만 여태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자넨 소문이 너무 늦어. 그래 가지고야 어찌 강호의 밥을 먹고 산다 할 수 있는가?" "끙! 할 말 없군." 장합은 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나 앉았다.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맞은편의 무사 하나가 끼어 들었다. "아무튼 무영천살의 출현으로 무림은 시끄러워졌어." "그렇지. 철검무정이 한동안 강호를 뒤흔들어 놓더니 이번엔 다시 무영천살이 나타나다니. 하긴 그의 재등장은 철검무정 때문인지도 모르지." "그것도 그렇지만 대화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이번엔 무영천살을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더구만." "그건 또 왜 그렇지?" "왜 과거 무영천살이 무림을 종횡할 때는 대화성이 방관만 하고 있었질 않은가?" "음, 그렇지." "더욱이 그때 살해된 무정검호는 대화성의 일등 공신이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바람에 대화성은 무림인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지. 그 때문에 이번에는 무영천살을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단단히 벼른다는 소문이네. 더욱이 무영천살은 이번에 재출도하면서 벌써부터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야." "피바람?" 장합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자네 정말 귀가 먹어도 단단히 먹었군. 무영천살은 얼마 전 동정호에 있는 파호성(破湖城)을 깡그리 전멸시켰다네." "파호성! 그 물귀신들을 말인가?" "맞아, 바로 그들이지. 수공에 관해선 천하제일이라 떠들어대던 그들이 무영천살의 검 아래 모두 수중 고혼이 되고 만 거야. 그러니 대화성이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얼마 전부터 대화성이 움직였다는 소문이 있다네." "흠, 그렇다면 앞으로 하루도 피바람 잘 날이 없겠군." 유비옥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가 마시는 술은 밀주(密酒)였다. 그것은 독하면서도 값싼 술이었다. 유비옥은 밀주를 병째 몇 모금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는 빈 술병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탁자 한 구석에 위태로이 놓여져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쨍그랑 깨어졌다. 장합 일행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침 그들이 주문한 술과 음식이 나오자 그들은 다시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마침내 나타났다.' 유비옥은 주루의 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떨려 오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백대 고수를 격패시키는 것으로 무영천살에게 향한 도전의지를 불태운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가? 마침내 무영천살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오로지 복수의 일념만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는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다려라, 무영천살.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다.' 2 천혜총(天慧總). 무림인이라면 천혜총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천혜총은 바로 대화성의 최고 두뇌집단이며, 대화성의 모든 정보를 관장하는, 하늘 아래 가장 막강한 지자(智者)들의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천혜총이 곳곳에 심어 놓은 정보원의 숫자만도 가히 수천을 헤아렸다. 또한 천혜총은 정보의 신속함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삼고 있는 조직이었다. 당금의 천혜총주는 천심공자(天心公子) 단리냉성(段里冷星)이었다. 바로 그가 천혜총에 있음으로 해서 대화성이 아직까지 지난날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호에서도 알 수 있듯 그를 유명하게 만드는 많은 요인들 중 하나는 그가 젊다는 것이었다. 단리냉성은 지금 고작 20대 후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하가 인정하는 기재 중의 기재였다. 호사가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단리냉성은 8세가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떼었다고 했다. 누군가 위대한 명성을 얻고 있다면 일단 그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다고 보아야 옳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단리냉성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무엇을 정리하고 분류하는데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철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혜총의 총수로 있는 만큼 단 하나의 정보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의 이유는 꼼꼼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천학수사(天學秀士) 비유랑(悲有朗). 천혜총에 속한 대륙 안의 부책임자인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단리냉성을 많이 접하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수집된 모든 정보가 그를 통해서 단리냉성에게 보고 되기 때문이었다. 천학수사 비유랑은 천심공자 단리냉성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떼어 놓고 본다면 비유랑은 천하의 그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기재였다. 단리냉성과 비유랑은 용모에서부터 사뭇 달랐다. 먼저 단리냉성은 유연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흰 피부를 가진 단리냉성은 누구나 한 번 보기만 해도 호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의 눈매는 여인의 그것처럼 맑으면서도 투명했다. 이와는 반대로 비유랑은 지니고 있는 지혜의 깊이에 비해 투박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는 저잣거리에 나서면 금방 인파에 묻혀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비유랑도 한 가지 개성은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입술선이었다. 그의 입술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런 입술의 모양은 그가 늘 냉소를 짓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비유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 대해 오만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들 두 사람의 외모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배경도 뚜렷이 달랐다. 단리냉성은 대화성의 총정주(總正主)로 있는 단리금천(段里金天)의 외아들이었다. 총정주라는 지위는 대화성의 이인자의 자리였다. 그런 단리금천이란 이름 앞에서 감히 고개를 쳐들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검성(劍聖) 우문좌하(右文左河)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우문좌하는 단리냉성의 외조부였다. 단리냉성은 바로 우문좌하의 금지옥엽인 우문수연(宇文愁沿)과 단리금천 사이에서 태어난 독자인 것이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단리냉성인지라 쉽게 천혜총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물론 그가 부친이나 외조부의 후광을 전혀 입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천혜총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로지 그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천학수사 비유랑도 제법 그럴 듯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배경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5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유철심이 무영천살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그의 부친도 똑같은 일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5년 전. 유비옥은 대화성으로 두 사람을 찾아갔었다. 그들은 바로 비유랑과 동방예였다. 그들 두 사람은 유철심의 쌍비위(雙秘衛)라 할 수 있는 일심만리객(一心萬里客) 비연(悲然)과 비도탈명살(飛刀奪命殺) 동방초엽(東方初燁)의 친자들이었다. 일심만리객과 비도탈명살, 바로 그들도 무영천살에게 암살을 당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때 유비옥은 그들 두 청년을 만났다. 그들은 서로 만나는 순간에 의기투합했다. 그리고는 똑같이 부친을 죽인 무영천살에게 복수하기로 결의한 것이었다. 유비옥이 무예를 가지고 복수의 검을 들었다면 비연의 친자인 비유랑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정보망과 지혜를 바탕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했다. 동방예는 유비옥처럼 무예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유비옥은 동방예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복수를 맹세하며 어디인가로 사라졌다. 과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물론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동방예는 스스로 살수지검을 익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천하의 그 누구보다 살인 감각을 타고난 인물이었으니까…….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유비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 무영천살이 나타나면 한 곳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던 것이었다. 이제 무영천살이 무림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들의 만남도 곧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였다. "……?" 막 몸을 일으키려던 유비옥은 흠칫하며 다시 앉았다. 막 주루의 문을 밀치고 이상하게 생긴 두 사람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3 "에라, 이 늙은이야! 너 때문에 난 항상 십 년은 더 늙는다." 홍의를 걸친 노인의 말이었다. 질세라 회의(灰衣)를 걸친 노인이 징그럽게 웃으며 쏘아붙였다. "크ㅋ, 누가 할 소리! 나는 너 때문에 항상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 이 귀신아!" 키 작은 홍의노인은 지지 않고 되쏘았다. "흥, 웃기는 소리 작작해라! 너는 노부 때문에 지금껏 살아 있지. 그렇지 않다면 벌써 귀신이 잡아갔을 놈이다. 이 돌대가리야!" 키 큰 회의노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홍귀(紅鬼)! 네놈은 노부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거리에서 광대 놀음이나 하고 있었을 게다. 이 늙지도 못한 놈아!" 홍의노인이 큼지막한 눈을 부라렸다. "뭣 광대? 야! 이 비쩍 마르고 폭삭 늙은 놈아, 그러는 네놈은 지금껏 노부가 건사하며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면 벌써 북망산에 가 있었을 게다. 요놈아!" 회의노인의 작은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북망산 좋아하네. 노부가 네놈을 따라다니는 것이냐? 아해같이 제대로 늙지도 못한 네놈이 노부를 따라다니는 것이지." 돌연 홍의노인이 복장을 터뜨렸다. "으이구!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이건 그래도 입이 있다고 사사건건 말대꾸니, 이 더러운 회귀(灰鬼)야!" 회의노인은 돌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그래, 노부가 마음이 좋으니 네놈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누가 아해와 같은 네놈과 친구로 지내려 하겠냐? 크크크!" 홍의노인의 눈이 기어코 흰자위를 드러냈다. "이……이런 우라질!" 홍의노인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탁자를 소리나게 내리쳤다. "회귀, 너 오늘 잘 됐다. 아예 이 기회에 결판내자, 이놈아!" 회의노인도 꺼릴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좋다. 그렇지 않아도 네놈이 사사건건 형님 운운하는 게 영 비위가 틀렸다." "오냐! 그래 좋다. 이놈, 물어보자!" 물어보자며 몸을 일으킨 그들의 눈동자가 주루 안을 휩쓸다가 유비옥에게로 향해졌다. "……!" 유비옥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흥미가 일어나고 있었다. 워낙 괴상한 노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홍의노인은 정말로 어린아이와 같았다. 제대로 발육을 못한 탓인지 뒷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 소동의 모습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그 작은 키에 홍의를 입었으니 영락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회의노인은 늙은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낼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성한 곳이 없었다. 온통 주름살로 뒤덮여 있는 얼굴은 늙은 원숭이를 방불케 했다. 대조되는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고목에 매미가 달라붙은 것이라 해야 옳을 만치 두 노인의 키도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홍의노인은 5살 박이 어린아이처럼 키가 작았다. 그와는 반대로 회의노인은 8척이 넘는 장신이었다. 그렇게 상반되는 기질과 외양을 하고 있는 두 노인은 유비옥의 탁자로 다가오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홍의노인이었다. "꼬마야!" 졸지에 유비옥은 꼬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다. 유비옥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그 말에 홍의노인이 돌연 성을 벌컥 냈다. "무슨 일이라니? 너는 우리가 이제껏 했던 말을 듣지도 못했느냐?" 유비옥은 멍청하게 대꾸했다. "예? 그건 또 무슨 트집입니까? 소생이 두 분의 이야기를 꼭 들어야 했습니까?" "……!" 유비옥의 대답이 일견 수긍이 간다는 듯 홍의노인은 회의노인을 돌아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러냐? 회귀야?" 회의노인의 고개가 끄덕였다. "글쎄, 그런 것 같기는 한데……." "흠, 그래." 홍의노인은 침음과 함께 정색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노부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거라." 그때였다. 느닷없이 유비옥은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소생이 왜 노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까?" 그 말에 대꾸한 것은 회의노인이었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비옥을 쏘아보는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흐흐! 그래도 네놈이 가장 똑똑해 뵈니까 그런다. 허험, 그럼 이제부터 노부가 말을……." 그 순간 홍의노인이 회의노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노부가 말하마. 아무래도 네놈보다야 노부가 훨씬 똑똑하니까." "……!" 회의노인이 독사 같은 시선을 홍의노인에게 던졌다. 그럼에도 홍의노인은 헤벌쭉 웃어 보이곤 말문을 열었다. "너는 천지쌍괴(天地雙怪)라고 들어보았느냐?" "……!" 찰나지간 유비옥은 내심 아차 싶었다. 4 천지쌍괴. 또 다른 별호로는 궤변쌍괴로도 불리는 그들은 천하를 주유하며 어이없는 궤변을 늘어놓는 괴인들이었다. 궤변도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궤변이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궤변은 일단 듣기만 하면 골치 아파지는 것이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들은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자신들의 궤변에 대한 해답을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껏 그들의 궤변을 듣고 명쾌한 답을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궤변은 황당무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궤변을 들은 사람이 답을 내려주지 못하면 이런저런 방법을 써서 괴롭히기까지 했다. 천지쌍괴는 진정 골치 아픈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제법 머리가 영특하고 말재주가 있는 자들 중에서는 그들의 방문을 은근히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유는 바로 그들이 내기를 거는 조건 때문이었다. 천지쌍괴는 궤변에 대한 올바른 답을 해 주는 자에겐 어떠한 일이든 한 가지를 해 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로 이들이 천지쌍괴였다. 그걸 왜 몰랐을까?' 유비옥은 내심 중얼거리며 두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홍의노인. 일명 홍귀라 불리는 그는 각청(覺聽)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회귀라는 별호를 가진 회의노인의 이름은 누루하(漏漏河)였다. 유비옥이 일시간 대답을 않자 홍귀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넌지시 되물었다. "그들을 모르느냐?" 그때서야 유비옥은 제법 흥미가 이는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니, 압니다. 바로 노선배들이 아닙니까?" 홍귀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흠! 역시 너는 똑똑하다. 그럼, 노부들이 내는 문제도 알 수 있겠구나." "내보시죠." 유비옥은 가슴을 쭉 펴며 그들의 입을 주시했다. 천하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궤변이 홍귀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가설이지만…… 회귀는 노부의 사부다. 회귀는 천하에서 가장 변론에 능한 변론가로 노부는 삼 년 전 그의 문하에 들어 갔다." 회귀가 말을 받았다. "그때 홍귀는 이렇게 말했다. 학비는 가난한 관계로 지금은 줄 수 없으니, 훗일 첫 변론에 나서 이기게 되면 주겠노라 말했다." 다시 홍귀가 이었다. "그리고 삼 년이 흘렀다." 회귀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노부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마치 찰떡을 찧는 방아처럼 기가 막히게 호흡이 척척 들어맞는 것이었다. 주거니받거니 하며 말을 이어가는 그들의 궤변은 회귀에 이르러 묘하게 얽혀들고 있었다. "노부가 보건대 홍귀 이놈은 분명 돈이 있는데도 학비를 내지 않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노부는 사랑하는 제자이긴 해도 소행이 괘씸하여 판결을 걸기에 이르렀다." "노부도 또한 맞서서 판결을 걸었다. 분명 노부는 후일 첫 변론에 이기게 되면 준다 하였거늘, 그 새를 못 참고 판결을 걸은 사부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네가 그 판결을 해 주어야 한다." 유비옥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인 노부는 판결이 어떻게 나든 학비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호흡을 가다듬는 회귀의 눈빛이 잔잔한 광채를 뽑고 있었다. "그 판결은 물론 학비를 받기 위해서다. 때문에 이기게 되면 노부는 당연히 돈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지더라도 받아야 한다. 그건 또 왜 그러냐 하면, 노부가 진다는 것은 곧 제자가 이기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말하기를 첫 변론에서 이기게 되면 학비를 준다했으니 그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노부는 이 판결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돈을 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홍귀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럼, 노부가 말해 보겠다. 결론적으로 노부는 판결의 결과가 어떻게 나든 간에 돈을 전혀 낼 필요가 없다. 노부가 판결을 건 것은 돈을 내지 않기 위해서다. 때문에 판결에 이기게 되면 자연 돈을 낼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지더라도 마찬가지다. 사부의 말처럼 애초 노부는 첫 판결에서 이기게 되면 학비를 준다 했다. 그러니 판결에서 지게 되면 돈을 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부는 판결에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비옥은 그만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허어, 참으로 기막히군.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 맞는 말이었다. 사부와 제자라는 가설을 세우고 궤변을 펼친 두 사람의 말은 어디 한 군데 틀린 구석이 없었다. 두 사람이 이기든 지든, 그 결과에 상관없다는 주장엔 하등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역시 어딘가에 아리송한 부분이 있는 것도 같았다. '분명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맞긴 맞다.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그처럼 판결이 날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유비옥은 참으로 난감했다. 그때였다. 홍귀가 눈을 빛내며 넌지시 물어 왔다. "어떠냐? 너는 그 문제를 풀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다면 노부들은 네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그러나 풀지 못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내기다. 너는 응하겠느냐?" 유비옥은 깨어나듯 반문했다. "그 답을 이 자리에서 해야 합니까?" 회귀가 그 말에 대답해 주었다. "크ㅋ, 그건 네 자유다. 자신이 있다면 어느 때고 좋다. 일 년이 가든 십 년이 가든, 아무 때나 좋다. 그러나 풀지 못했을 때의 대가는 그만큼 커지게 된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내기에 응할 테냐?" 유비옥은 되려 반문했다. "그럼, 당신들은 내가 그 내기에 응할 것 같소, 응하지 않을 것 같소?" 이렇게 되고 보니 어리둥절해진 것은 오히려 천지쌍괴 쪽이었다. "아니, 이 놈이?" '이 어린 꼬마 놈이 노부들에게 도리어 문제를 낸단 말인가?' 홍귀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그야 네놈 마음이 아니겠느냐?" 아니라는 듯 회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는 틀림없이 내기에 응할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유비옥의 질문에 회귀의 눈이 희번뜩했다. "노부가 이렇게 얘기하면 너는 틀림없이 내기에 응할 것이다. 그 문제는 아직 천하의 그 어떤 기재도 풀지 못한 문제기 때문이다." "호오! 자존심 때문에 내기에 응할 것이란 말씀이시군요. 그러나 미안하군요." 그 한 마디에 회귀는 물론 홍귀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그럼 너는 내기에 응하지 않을 참이냐?" 유비옥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누가 내기에 응하지 않는다 했소? 다만 미안하다고만 했지." 홍귀가 기어코 버럭 노성을 질렀다. "이 놈아!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아니, 전혀 틀리지요. 내가 미안하다고 한 것은 자존심 때문에 내기에 응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오." 홍귀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럼, 너는 내기에 응할 것이냐?" "물론이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어디에 있겠소." 말미가 약간 이상한지 회기가 반문했다. "좋은 기회?" 유비옥은 미소를 흘려냈다. "예, 노선배들께선 그 문제를 푸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준다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노선배들은 훌륭한 저의 협조자가 될 것입니다." 홍귀는 화가 나기도 했으나 유비옥의 자신만만한 어투에 흥미가 일어났다. "그럼, 넌 그 문제를 풀 수 있단 말이냐?" "지금은 아니오." "그럼?" "석 달 뒤에 풀겠소. 그렇게 해도 무방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문득 홍귀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그야 그렇다. 한데 왜 하필이면 석 달 뒤냐? 지금은 아니고." 유비옥은 입가를 묘하게 실룩였다. 분명 그것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두 노인은 유비옥의 그런 웃음을 보는 순간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이놈이 기분 나쁘게 웃긴…….' '이놈이 진짜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인가? 아직 그 누구도 풀어 내지 못한 문제인데…….' 천지쌍괴는 다음 순간 얼굴을 팍 일그러뜨렸다. 유비옥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왜 석 달 뒤냐 하면 말씀이오. 사실 내게 그 문제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지금이라도 당장 풀어 낼 수가 있소. 그런데 문제를 풀어 낸 대가로 노선배께 한 가지 일을 시킬 작정인데……. 혹여 노선배들의 능력이 그에 모자라면 어찌하겠소?" 찰나지간 홍귀의 안색은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이런 우라질 놈! 감히 우리 천지쌍괴를 그따위로 취급하다니!" 홍귀는 금방이라도 살수를 펼쳐낼 것처럼 흥분했다. 그러나 연륜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홍귀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제력을 발휘했다. 그는 은근한 어조로 협박하듯 말했다. "좋다, 이놈. 그러나 만약 그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네놈의 주리를 틀어 장강에 던져 버리겠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그럼 일단 그 문제는 석 달 뒤에 풀기로 하고, 우선은 노선배들의 능력을 보겠습니다." "얼씨구! 이 놈이 아주 제멋대로일세." 회귀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엔 강렬한 호기심이 일고 있었다. 유비옥의 당당한 말과 행동에 언뜻 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로서는 지금까지 유비옥과 같은 청년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과연 이 놈이 그 문제를 풀어 낼 수 있단 말인가?' 회귀는 의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유비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때였다. 유비옥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 나왔다. "일단 장안으로 가 주십시오. 그곳에 가서……." 빠르게 이어지는 유비옥의 말을 들으며 천지쌍괴는 자신들이 참으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먼저 미끼를 던진 것은 자신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이제는 그들이 한 애송이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함정을 빠져 나올 생각도 하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유비옥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침내 유비옥의 말이 끝났다. "크크크!" 홍귀는 음침한 광소를 흘리며 두 눈에 새파란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약, 네놈이 석 달 뒤에 문제를 풀어 내지 못한다면 어떡하겠느냐?" 회귀도 한 소리 거들며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푸푸풋! 네놈이 노부를 부려먹은 대가가 시원치 않게 나타났을 땐?" 유비옥은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내 목을 걸겠소." "……!" 천지쌍괴는 신광이 어린 눈빛으로 유비옥을 응시하다 메마른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푸풋! 좋다. 어찌 되었든 감히 노부 등을 부려먹으려는 네 용기가 가상하다. 일단 그 일은 해 주겠다." "어찌해서 일이 이상하게 되었지만…… 노부는 네가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사실…… 노부도 그 판결이 어찌 나올지는 모른다. 천하의 잘났다 떠들어대는 기재라는 놈들도 매 한 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일단 너를 믿어 보겠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저버렸을 때는 가차없이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맹세하오." 유비옥은 거두절미 잘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루를 빠져 나갔다. "……!"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한동안 유비옥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천지쌍괴도 마침내 유비옥의 뒤를 따라 주루 밖으로 나갔다. 천지쌍괴와 유비옥이 나간 주루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