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버스를 타면 금방 닿는 거리에 도산공원이 있다. 가끔 어린 손
녀를 데리고 찾아갈 적마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독특한 독립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며칠 전에는 그곳에서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이왕 공원을 조성할 양이면 명칭은 어떻든 개발 당시의 무소불위(?) 행
정력을 「왕창」 발휘하여 강남땅의 절반 이상을 아예 공원화했더라면 어땠
을까…. 숨막히는 서울의 허파 구실을 해냈을 것이다.
상상은 「망상」으로 돌리고, 성실 근엄 정직의 산 표본이었던 도산의
민족정신을 다시 떠올렸다. 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 시절의 도산은 보통학
교보다 조금 급이 높은 미국 소학교에 다니다가 도중에 퇴학당한다. 그해
나이 23세였으므로 18세 이하의 입학규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지역 신문
이 미담삼아 소개한 「늙은 학생」 기사가 화근이었다.
하숙집 주인이 「풀리시(미련)」하다며 타일렀다. 『그대는 동양인으로
키도 작으니까 17세쯤으로 행세하라』고. 그러나 도산은 듣지 않았다. 『입
학을 못했으면 못했지 연령을 속일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어린이날을 앞둔 시점에서 새삼 회상하는 대목이거니와, 도산은 특히 어
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진솔한 수범을 기회 닿는대로 강조했다. 그것이 언
제적 일인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닌 정직성의 눈금은 얼마나 나아지고
찌그러졌는가를 돌이키게 된다.
파장에 이른 국회청문회의 실패양상이 반면교사의 구실을 한 셈이다. 진
실을 향한 고통의 절정에서 죽음을 택했던 한 증인의 비극이 애달프다. 철
갑을 쓴 듯 당당했던 사람들 앞에서 말은 겉돌고 무의미하게 부서져내렸다.
거짓말에 대한 마비현상이 번진 가운데, 「아니다」 「모른다」 부정법만
한 달 가까이 곤욕을 치렀다.
입에 침도 안바르고 부정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믿어달라는 전제로 미
리 다짐하는 속세의 맹세가 우리처럼 처절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하
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쯤은 약과다.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한
다. 「성(姓)을 갈겠다」고 한다. 「사람도 아니다」고 한다. 심지어 「내
가 네 자식이다」라는 언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손을 들고 공중 앞에서 선서만 안했다뿐이지 결코 그만 못하지 않다. 그
렇게 살아온 민족이거늘, 만천하의 국민과 국회의원 면전에서 진실만을 밝
히기로 굳게 맹세한 입이, 그토록 술술 일방통행으로 흘렀다.
죽음보다 더 중히 여기는 성을 걸고, 짐승의 시간을 살겠노라 자청할 정
도로 거짓말쟁이의 치욕을 감수하던 풍토에서, 이제는 어지간히들 당돌하다 .
물론 거짓말도 거짓말 나름이다. 「거짓말도 잘하면 오례 논(올벼를 심
는 논) 닷마지기보다 낫다」든가, 「외삼촌보다 낫다」는 속담도 있듯이,
때로는 생활의 윤활유 노릇을 한다.
영국에는 「할수없이 하는 거짓말은 해가 없다」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이런 유의 허언은 하루에 삼세번씩 한들 상관
없다. 더구나 농담성 거짓말은 엔도르핀을 발생시켜 몸에 이롭다고 했다.
국가 사회가 공인하는 「거짓말의 날」인 미국의 만우절은, 무해무득한
거짓말로 고단한 삶의 자물통을 열고 한바탕 웃어나보자는 의도 아닌가. 올
해 그날은 클린턴 대통령 스스로가 시범을 보였다. 대변인과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연극을 벌여 세상을 웃겼다.
지금 우리 처지가 이런 한가한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모
를 사람은 없다. 국가 운명에 맞바로 영향을 미칠 사람들의 한결같은 답변
태도에 모두들 지겨움을 느낀다.
국민에게 진 천 냥 빚을 성실한 말로 갚으려는
노력은 커녕, 어떻게든
뜨거운 장면만 피하면 된다는 속셈에 그들은 태연하다. 진상이 밝혀지기까
지는 위증이 아닌데, 여러 여론조사에서 확인된 민심의 80% 이상은 동의하
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틀이 문제다. 그러한 틈을 좁히거나 메워 국가적 몸통을
건강하게 키워나가는 처방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나와있다. 철저히 도려내
고 밝히는 방법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적당한 선에서 봉합하다 말았다. 작은 거짓말에는 꽤나 민감하던 여론도
, 워낙 데 비상구가 많고 변명의 여지가 넓었다. 「정치적」이라는 포장이
이때 흔히 동원된다.
다행히 이번에는 갈 데까지 가, 검찰의 매운맛을 보여줄 기세다. 잘한다 . 잘한다. 다른 허물은 눈감아줄 망정 자식의 거짓말은 외수없이 닦달하던
배달민족이다. 어린 싹들이 이어받을 미래의 밝은 오월을 위해서도 본때 있
게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