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옹패설 전집 서 1편
역옹패설 전집 1, 전집 2
역옹패설 전집 1(櫟翁稗說前集一)
의조『懿祖: 태조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와 세조『世祖: 태조의 아버지 융건(隆建)』의 휘(諱) 아랫자가 태조(太祖)의 휘인 건(建)과 모두 같다. 김 관의(金寬毅)는,
“개국 이전에는 순박한 풍속을 숭상하여 혹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왕대종록(王代宗錄)》에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러나 의조는 육예『六藝: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에 능통하였는데, 그 중에도 특히 글쓰기와 활쏘기는 당대에 으뜸이었고, 세조는 어려서부터 기국(器局)이 있어 삼한(三韓)을 점령할 뜻을 둔 사람이었다.
그들이 어찌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이나 아들의 이름에 그 글자를 빌려다 썼겠는가? 더구나 태조는 왕업을 창건하고 그 대통을 이룩한 분으로서 언제나 선왕(先王)을 본받았는데, 어찌 잘못임을 시인하면서 억지로 예에 벗어난 이름을 태연히 썼겠는가?
이를테면 신라(新羅) 시대에는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 마립(麻立)은 말뚝[橛]의 방언이다. 신라 초기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회합할 때에는 말뚝을 세워 그곳을 임금의 위치로 정하였다. 따라서 그 임금을 마립간이라고 불렀으니, 곧 말뚝 세운 곳에 위치하는 자란 말이다.
간(干)은 신라의 풍속에서 서로 높이는 말이다. 이라 부르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ㆍ대아간(大阿干)이라 부르고, 심지어 하향 백성들까지도 으레 간(干)을 이름에 붙여서 호칭하였으니 이는 대개 서로 존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아간은 아찬(阿餐)ㆍ알찬(閼粲)이라 변칭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간(干)ㆍ찬(餐)ㆍ찬(粲)의 세 자의 발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의조ㆍ세조의 휘 아랫자 역시 간ㆍ찬ㆍ찬의 음과 서로 비슷한 글자라 이른바 서로 존칭하는 말로 그 이름에 붙인 것인데, 부르는 과정에서 변전(變轉)된 것이지 이름은 아니다. 태조가 마침 이 글자로 이름을 삼으니, 호사자(好事者)들이 이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3대가 한 이름을 쓰면 삼한(三韓)의 임금이 된다.”
는 말을 꾸며냈다. 그러나 이는 대개 믿을 것이 못 된다.
김 관의는 또,
“도선(道詵)이 송악산(松嶽山) 남쪽에 있는 세조의 집을 보고, ‘제(穄)를 심을 밭에 삼[麻]을 심었다.’ 하였다. 제(穄)는 왕(王)의 방언과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태조가 곧 왕씨(王氏)로 성을 삼았다 …… .”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는데 아들이 그 성을 고치다니, 천하에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그런 일을 우리 태조가 하였다고 할 수 있으랴? 또 태조는 세조를 이어 궁예(弓裔)에게 벼슬하였는데, 궁예가 의심이 많은 줄 알면서 태조가 까닭없이 왕(王)으로 성을 고쳤다면, 이 어찌 화를 취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상고하건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
“국조(國祖)의 성은 왕씨(王氏)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태조에 이르러 비로소 성을 왕이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穄)를 심었다는 설’이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또 말하기를,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 보육(寶育)을 낳았으니, 그가 곧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이 된다. 보육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당(唐)의 귀성(貴姓)에게 시집가서 의조를 낳고 의조가 세조를 낳고 세조가 태조를 낳았다.”하였다.
이 말과 같다면, 당의 귀성이란 자가 의조의 아버지가 되고, 보육은 의조의 아버지의 장인이 되는데, 국조라고 칭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태조가 3대의 조고(祖考) 및 후비(后妃)를 추존하여 아버지는 세조 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할아버지는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 할머니는 원창왕후(元昌王后), 증조모(曾祖母)는 정명왕후(貞明王后), 증조모의 아버지 보육(寶育)은 국조 원덕대왕이라 하였다.”하였다.
증조(曾祖)를 생략하고 증조모의 아버지를 쓰면서 3대라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상고하건대 《왕대종족기》에,
“국조는 태조의 증조이고, 정명은 국조의 비(妃)이다.”
하였으며, 《성원록(聖源錄)》에는,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이는 원덕대왕의 외조(外祖)이다.”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국조 원덕대왕은 곧 당(唐)의 귀성(貴姓)이라는 이의 아들로서 의조의 아버지가 되고, 정명왕후는 곧 보육의 외손녀로서 의조의 어머니가 된다. 보육을 국조 원덕대왕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다.
또 말하기를,
“의조가 당(唐) 나라 사람인 아비가 남긴 궁시(弓矢)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 멀리 근친(覲親)하였다.”
하니, 그렇다면 그 뜻은 깊고 간절하려니와,
“용왕(龍王)이 하고 싶은 일을 물었을 때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하였다.”
한 말은 의조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성원록》에,
“흔강대왕(昕康大王)의 처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 각간(角干) 두은점(豆恩坫)의 딸이다.”
하였으니, 김관의의 기록과는 다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는,
“천자(天子)의 사당은 7묘(廟)로서 세 소(昭)와 세 목(穆)에 태조(太祖)의 사당을 포함하여 일곱이 되고, 제후(諸侯)는 5묘로서 두 소와 두 목에 태조의 사당을 포함하여 다섯이 된다.”
하였고, 《예기》 제법(祭法)에는,
“왕(王)은 7묘를 세우고 1단(壇)ㆍ1선(墠)을 두며, 제후는 5묘를 세우고 1단 1선을 둔다.”하였다.
한(漢) 나라 위현성(韋玄成) 등은,
“주(周) 나라가 7묘를 세운 것은, 후직(后稷)이 처음으로 제후에 봉하여졌고,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은 천명을 받아 왕이 되었으므로 두 사당을 헐지 않았기 때문에 친묘(親廟)와 더불어 일곱이 된 것이다.”
하였고, 유흠(劉歆)은,
“7묘는 정해진 숫자로서 변할 수 없는 숫자이고 종(宗)은 변하는 것인데 그 묘수(廟數)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실로 공덕이 있는 이를 종(宗)으로 하기 때문에 미리 그 숫자를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은(殷) 나라에 3종(宗)이 있었는데 주공(周公)이 이를 들어 성왕(成王)에게 권하였다.”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말한다면 종(宗)은 일정한 숫자가 없는 것이고, 위씨(韋氏)가 말한 7묘는 오직 주 나라 제도일 뿐이리라.
《상서(尙書)》에 이윤(伊尹)이,
“7세(世)의 사당에서 그 조상의 덕을 볼 수 있다.”
하였으니, 7묘의 제도는 그 유래가 오랜 것이다. 반고(班固)가 유흠의 설을 옳게 여긴 것이 곧 이 때문이다.
소목(昭穆)의 위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회암(晦庵) 주자(朱子)가 대왕(大王)은 소(昭), 왕계(王季)는 목(穆), 문왕(文王)은 소, 무왕(武王)은 목이라고 말한 좌씨(左氏)의 말과, 아버지는 소, 아들은 목, 손자가 다시 소가 된다는 안사고(顔師古)의 말을 가지고 반복하여 논란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정현(鄭玄)이,
“체천(遞遷)된 신주는 소(昭)와 목(穆)으로 두 조묘(祧廟) 안에 합하여 간직한다.”
하였으니, 역시 소와 목이 각각 차례대로 두 조묘에 간직된다는 말이다. 위에 ‘합하여 간직한다’는 말은 여러 소를 좌측 조묘에 합하여 간직하고 여러 목을 우측 조묘에 합하여 간직하는 것을 말함이지 소와 목을 모두 우측 조묘에 합하여 간직하였다가 좌측 조묘에 옮긴 뒤에 단(壇)에 가고 선(墠)에 가며 귀(鬼)로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공영달(孔穎達)이,
“예(禮)에 삼년상이 끝나면 먼 조상은 체천되고 새 신주가 사당에 들어가게 되는데, 소목의 차례를 따져 소차(昭次)는 소묘로 들어가고 목차(穆次)는 목묘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 말이 몹시 분명하여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묵헌(黙軒) 민지(閔漬)는,
“소는 마땅히 체천되어 목이 되어야 하고 목은 마땅히 체천되어 소가 되어야 한다.”
고 논술하여, 주자(朱子)를 비난하기까지 하였는데, 지금 그의 《세대편년(世代編年)》을 상고하니, 소목은 만세에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이 왜 이와 같이 모순되었을까?
민공(閔公)이 경릉(慶陵 충렬왕(忠烈王)을 가리킴) 때에 《세대편년(世代編年)》을 지었고 후에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을 가리킴)의 명을 받들어 또 저서 하나를 내었으니, 그 책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이다. 위의 두 가지 저서에서 밝힌 소목에 대한 말이 서로 다르다.
형제가 서로 임금의 대를 이을 경우, 공양자(公羊子)는,
“소ㆍ목의 반열이 같아야 한다.”
하고, 공영달은,
“형제가 서로 임금의 대를 이을 경우 그 소목을 달리하면, 만약 형제 넷이 다 왕위에 올랐을 경우에는 조부(祖父)의 사당은 따라서 훼철하게 되기 때문에 이치상 꼭 소목을 달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여, 공양자는 그 반열을 같이한다는 것만 말했을 뿐인데, 공씨는 그 세대수(世代數)를 포함해 말하였으니, 아깝게도 미진(未盡)한 데가 있다.
만약 형제 다섯이 다 대를 이었을 경우 그 하나는 훼철할 것인가, 아니면 훼철하지 않은 것과 친등(親等)이 같다 하여 훼철하지 않을 것인가? 소와 목은 넷뿐이니 형제에 대해 그 반열을 같이한다는 것은 마땅하거니와 다섯 사람이 다 대를 이으면 5세(世)가 되는데, 반열을 같이한다 하여 차례로 훼철하는 것을 의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형이 죽고 아우가 대를 이었을 경우, 친묘(親廟)에 비교하면 그 의리가 실로 차등이 있을 것이라 본다. 친묘일 경우 천자는 7세, 제후는 5세에 차례로 훼철하는데, 형제의 경우 3세에 훼철되지 아니할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억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군(先君)으로서 형제가 서로 계승한 이는 태조(太祖)의 아들인 혜종(惠宗)ㆍ정종(定宗)ㆍ광종(光宗)이고, 현종(顯宗)의 아들인 덕종(德宗)ㆍ정종(靖宗)ㆍ문종(文宗)이고, 문종(文宗)의 아들인 순종(順宗)ㆍ선종(宣宗)ㆍ숙종(肅宗)이고, 인종(仁宗)의 아들인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이 바로 그들이다. 묵헌은 여기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결정할는지 모르겠다.
《통감(通鑑)》에 실린 말에 의하면, 우리 태조(太祖)가 호승(胡僧)인 말라(襪羅)를 통하여 진 고제(晉高帝)에게 말하기를,
“발해(渤海)는 우리와 통혼(通婚)한 사이인데, 그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으니, 그대 나라와 합세하여 거란을 토벌하자.”
하였으나 고조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제(少帝 고조의 아들)가 거란과 원수가 되므로 말라는 다시 거란의 토벌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소제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방을 흔들어 그 병세(兵勢)를 분산시키고자 곽인우(郭仁遇)를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우리 병력이 몹시 약함을 보고 지난번 말라의 말은 과장된 허튼 것임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 말은 그렇거니와, 후당(後唐) 청태(淸泰) 3년(936)에 거란이 석경당(石敬瑭)을 세워 황제를 삼았으니, 이가 곧 진 고조(晉高祖)이다. 거란과 부자(父子)의 의를 맺고 해마다 금(金) 30만 냥과 비단 30만 필을 바쳤다. 그런데 이 해에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甄萱)이 우리나라로 도망해 와서 반역한 그의 아들 신검(神劍)을 토벌하자고 하므로, 태조가 친히 정벌하여 신검을 사로잡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신라(新羅)의 왕 김부(金傅) 역시 땅을 바치며 입조(入朝)하였다.
이리하여 삼한(三韓)이 통일되었다. 곧 병기를 거두고 백성을 편히 쉬게 하며 문교(文敎)를 닦으니, 발해의 장군 신덕례(申德禮)ㆍ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ㆍ공부경(工部卿) 대덕예(大德譽) 등 수천 수만 명이 서로 앞을 다투어 귀화하였는데, 그 발해와 혼인하였다는 말 따위는 국사(國史)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조는 심원한 지략으로 공명을 힘쓰지 않았는데, 오계(五季)의 말엽에 중원이 온통 혼란에 빠져, 함께 손잡고 일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 것이며, 석랑(石郞)과 제파(帝羓)와의 친교 관계에 이간할 수 없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또 어찌 사신 한 사람도 보내지 않고 타국의 중[僧]을 바다를 건너 보내어 초창기의 미비한 진(晉)과 모의해서 발해를 위해 한창 강성한 거란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아주려 하였겠는가?
또 곽인우가 왔을 때 과연 우리 군사의 허실과 강약을 다 엿볼 수 있었겠는가? 진(晉)의 군신(君臣)이 전에는 말라의 말에 혹하였다가 뒤에는 인우의 말을 믿고, 곧 우리 태조를 과장한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본조(本朝 원(元)을 가리킨다)의 《경세대전(經世大典)》은 규장각 학사(奎章閣學士) 우집(虞集) 등이 찬한 책인데, 우리나라 사실을 적은 조항에 이르기를,
“태조황제(太祖皇帝) 13년에 천병(天兵 몽고 군사를 가리킴)이 반역한 거란을 토벌하여 고려(高麗)에 이르렀을 때에 고려 사람 홍대선(洪大宣)이 천병에게 항복하여 향도(嚮導)가 되어서 함께 거란을 치니, 거란 임금이 항복하였다.”하였다.
위에 이른바 반역자란 금산 왕자(金山王子)를 가리킴인데, 그는 참람하게 하삭(河朔 황하(黃河) 이북의 땅)의 황제로 군립하고 연호를 천성(天成)이라 하였다. 금산 왕자가 이어 천하를 석권(席卷)하려는 기세로 동쪽으로 달려 우리나라 북쪽 국경에 난입하자, 원 태조(元太祖)는 합진찰랍(哈眞札臘)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으니, 이때는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 5년(1218) 겨울 12월이었다.
날씨가 몹시 춥고 눈이 내려 군량을 운반할 수가 없었고 적은 깊숙이 성에 숨어 몽고병을 괴롭혔다. 이때 충헌왕이 군사와 군량을 제공하여 몽고병을 도와서 금산을 사로잡고 그 무리를 무찔렀다. 이리하여 두 나라는 서로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 맹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공(虞公)이 쓴 기록에는 마치 왕사(王師 몽고군사를 가리킨다)가 우리나라를 공격하므로 부득이 항복한 것처럼 되었고, 두 나라가 합세하여 적을 공격한 공로와 서로 우호의 맹약을 맺은 일은 빠뜨리고 쓰지 않았다. 그리고 홍대선은 변방 고을의 한낱 아전으로서 몸을 빼어 항복하였으니, 어찌하여 한 부대의 군사인들 임시로 모집하여 자기 나라를 공격할 수 있겠는가?
또 기록하기를,
“태종(太宗) 3년에 살탑(撒塔 살례탑을 말한다) 등을 파견하여 그 왕이 항복하자, 그곳 경(京)ㆍ부(府)ㆍ현(縣)에는 72명의 달로화적(達魯花赤)을 두고 회군(回軍)하였더니, 태종 4년에 그들은 달로화적을 모두 죽이고 배반하여 섬을 확보하였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로화적이란 원 나라에서 임명한 것인가,
아니면 장수가 왕명을 받아 자신이 둔 것인가? 부ㆍ현의 조그마한 것은 논하지 않더라도 2경(京)에 둔 달로화적은 필시 미미한 자가 아닐 것인데, 그 이름을 쓰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달로화적이 이처럼 많았다면 그들을 두는 일이나 죽이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것인데, 우리나라 역사에는 이미 그러한 사실이 없거니와 옛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는 이가 없으니 더욱 의심되는 일이다.
그 까닭을 가만히 찾아보니, 이때 천자가 북정(北庭 사막의 북쪽)에 있어 우리나라와 1만여 리나 먼 곳에 떨어져 있으므로, 일의 허실(虛實)을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며, 살탑은 요좌(遼左)에 군사를 배치시켜 놓고는 홍대선과 함께 약탈을 자행, 우리의 공로는 엄폐하고 도리어 죄를 씌워 무고하여 원 나라 조정을 격노시켜 멋대로 침벌(侵伐)을 일삼았던 것인데 우공(虞公)은 이를 자세히 상고하지 못한 것이다.
아, 예부터 군사를 거느린 자가 임금을 속이고 군사를 괴롭혀서 부귀를 도둑질하는 일이 많았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밝히지 못하여 뜻밖의 도륙(屠戮)을 당한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도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대신(大臣)으로서 일찍이 귀양살이를 한 일이 있거나 법을 담당하는 유사(有司)의 탄핵을 받고 파면된 사실이 있으면, 종묘(宗廟)에 배향하지 못한다.”
하나, 이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예기》 제법(祭法)에,
“백성에게 바른 법을 베풀었거나 죽음으로써 일에 근실하였거나, 힘써 나라를 안정시켰거나, 큰 재난을 막았거나 큰 환란을 물리쳤으면 종묘에 제사한다.”
하였고, 또,
“이들의 유가 아니면 사전(祀典)에 들지 못한다.”하였다.
지금 종묘에 배향된 이들이 비록 이런 유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모두가 국가에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덕을 입힌 이들이다. 설사 한때 임금의 감정에 저촉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거나, 일을 하다가 과오를 저질러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해서 그를 버리고 제사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쳐줄 만한 공덕도 없이 아첨하고 비위를 잘 맞추어 한 몸을 보전하고 지위를 누린 자를 떠받들어 제사를 지낼 것인가.
국사(國史)에 상고하니, 유검필(庾黔弼)은 일찍이 곡도(鵠島)에 귀양갔었으나 태묘(太廟)에 종사(從祀)하였고, 윤관(尹瓘)은 구성(九城) 싸움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예묘(睿廟)에 배향(配享)되었으니, 이로 보아 귀양살이를 한 대신이나 탄핵을 받아 파면된 자는 종묘에 배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오직 그 공적이 죄과를 덮기에 부족한 자라면 자연히 세상의 의논이 있으리라.
이부(吏部)는 문관의 선발을 맡고 병조(兵曹)는 무관의 선발을 맡는데, 그 선발된 자의 출사(出仕) 연월의 순서를 매기고, 그 노일(勞逸 편안하고 수고로움)을 구분하며, 공과(功過)를 기록하고, 그 재능의 위무를 구체적으로 문서에 기재하니, 이것을 정안(政案)이라 한다.
이 정안을 가지고 중서성(中書省)에서 승진시킬 것과 강등시킬 것을 적어 올리면, 문하성(門下省)에서는 제칙(制勅)을 받들어 시행하니, 이것이 국가의 법으로서 대개 중국의 법과 같다.
그런데 최충헌(崔忠獻)은 임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고 항상 부중(府中)에 있으면서 그 요좌(僚佐)들과 함께 제멋대로 정안을 가져다가 벼슬에 제수할 후보자를 주의(注擬)하여, 자기의 무리인 승선(承宣)에게 주어 그 승선으로 하여금 왕에게 아뢰게 하면, 왕은 부득이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충헌의 아들 이(怡)와 손자 항(沆), 항의 아들 의(誼) 4대가 정권을 잡아 이런 관습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인사(人事) 사무에 관한 승선을 정색승선(政色承宣)이라 하고, 요좌(僚佐)로서 이 일을 맡은 3품인 자를 정색상서(政色尙書), 4품 이하를 정색소경(政色少卿)이라 하며, 필기구를 가지고 그 밑에서 종사하는 자를 정색서제(政色書題)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는 곳을 정방(政房)이라 이르니, 이는 곧 부중의 사칭(私稱)인 것이다.
평장사(平章事) 금의(琴儀)ㆍ수상(首相) 김창(金敞)ㆍ상서(尙書) 박훤(朴暄) 등 여러 명사들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진출하였는데, 당세에서는 이를 영광으로 여기고 부끄러워할 것인 줄 알지 못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유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이 최의(崔誼)를 베고 정권을 왕실(王室)로 돌렸으나, 그 정방은 없애지 아니하여 왕실의 중임(重任)을 권문(權門)의 사칭을 그대로 인습하여 부르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덕릉(德陵) 초년에 정방을 없애고 문무 백관의 전선(銓選)을 선총부(選摠部)에 위임하여, 수상(首相)과 아상(亞相)이 그 일을 주관하게 하니, 거의 옛 제도를 회복할 전망이 있었다. 그런데 전선에 익숙한 한두 심복에게 다른 벼슬을 겸직시켜 오래도록 바꾸지 아니하므로, 염치없는 우둔한 자나 승진에만 급급한 경박한 무리들이 기회를 타고 그 잘못을 답습하여 왕을 속이고 자기를 봉(封)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려는 아름다운 뜻이 한갓 형식에 그칠 뿐이었으니, 이 또한 통탄할 일이다.
이같은 일이 의릉(毅陵 충숙왕(忠肅王))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나날이 더 심하여, 붉은 인(印)을 찍어 봉함한 정안(政案)이 한낱 환관의 수중에서 멋대로 변경되기도 하니, 흑책정사(黑冊政事)라는 비방이 아녀자들 입에까지 퍼졌다.
《좌전(左傳)》에,
“세금을 박하게 거두어들이도록 법을 만들어도 오히려 탐하는 폐단을 초래하는데, 세금을 탐하게 징수하도록 법을 만드니 그 폐단이 장차 얼마나 클 것인가.”
하였으니, 그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랴. 아이들이 두꺼운 종이에다 먹칠을 하고 기름을 먹여서 글씨 연습하는 것을 흑책(黑冊)이라 한다. 의릉(毅陵)이 봉자산(奉子山) 이궁(離宮)에 있을 때, 병으로 외인 보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므로 안팎이 막혔었다.
일을 맡은 자들은 모든 비목(批目)이 내리면, 서로 다투어 뭉개고 지우고 하여, 주묵(朱墨)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흑책정사라 하였다. 신왕(神王: 신종(神宗) 때 기홍수(奇洪壽)와 차약송(車若松)이 같이 평장사(平章事)가 되어서 중서성(中書省)에 합좌(合坐)하였다.
차약송이 기홍수에게 공작(孔雀)이 잘 있느냐고 묻자, 기홍수도 모란(牧丹)을 기르는 방법을 물어,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기롱하였다. 국가가 도병마사(都兵馬使)를 설치하여 시중(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참지정사(參知政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ㆍ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판사(判事)를 삼고, 판추밀(判樞密) 이하로 사(使)를 삼아, 큰일이 있을 때 회의(會議)하였기 때문에 합좌(合坐)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한 해에 혹 한 번 모이기도 하고 여러 해 동안 모이지 않기도 하였다. 그뒤에 도평의사(都評議使)로 고쳤고 혹은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라 일컫기도 하였다. 사대(事大) 이후 급한 일이 많아 첨의(僉議)ㆍ밀직(密直)이 매양 합좌하였다.
합좌하는 예의는 먼저 온 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향하여 서고 뒤에 온 자가 그 위치에 따라 한 줄로 서서 읍(揖)한 다음, 같이 좌석 앞에 이르러 남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엎드려서 서로 안부를 묻는다. 다시 자리 앞에 이르러 남쪽으로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한 줄로 서서 읍한 뒤에 앉는다.
지첨의(知僉議) 이상이 도착하면 밀직(密直)은 다 뜰에 내려가서 북쪽을 상석(上席)으로 하고 동쪽을 향해 서서 머리를 숙이고 손을 낮게 내린다. 첨의는 그 위쪽에 서서 두 줄로 읍하고 마루에 올라가 절하고, 앞의 예의와 같이 읍하고 앉는다.
첨의 한 사람이 출석하여 같이 앉게 된 뒤에는 다시 뜰에 내려가서 영접하는 예의가 없고, 다만 수상(首相)이 이르면 아상(亞相) 이하가 다 뜰에 내려가서 북쪽을 상석(上席)으로 삼고 동쪽을 향하여 서서 영접, 수상은 서쪽으로 향하여 마주 읍한다. 그런 뒤에 마루에 올라가 절하고 읍하는 것을 또한 앞의 예의와 같이 한다.
수상이 혼자 동쪽에 앉는 것을 곡좌(曲坐)라 한다. 아상 이하는 한 줄로 앉는데 수상이 정승(政丞) 여기에서 정승이라고 한 것은 옛날의 시중(侍中)이다. 이 아니면, 곡좌도 하지 않고 뜰에 내려가서 영접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녹사(錄事)가 회의 사항을 앞에 가서 보고하면 각각 자기의 의사대로 그 가부를 말한다.
녹사가 그 사이를 왕래하면서 그 의논이 일치하게 한 뒤에 시행하니 이를 의합(議合)이라 한다. 그 나머지는 단정히 앉아 말하지 아니하여 엄숙한 모습이 공경스럽고 두렵게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첨의와 밀직을 증원하고, 또 각각 상의(商議)하는 관원이 있으니, 판삼사사(判三司事)는 아상 윗자리에 앉고 좌사(左使)ㆍ우사(右使)는 평리(評理)의 윗자리와 아랫자리에 앉으며, 여럿이 떼지어 드나들고 이따금 큰 소리로 떠들고 웃으면서, 부부간의 사사로운 일이나 시정의 쌀값ㆍ소금값의 이익에 이르기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위에 말한 기홍수ㆍ차약송이 공작과 모란을 문답한 말과 견주어 볼 때도 또한 더욱 시대가 다른 것이다.
옛날 제도에는 이부(二府)가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경(卿)ㆍ감(監)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보는 날에는 날이 밝기 전에, 지공거는 북쪽 의자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동지공거는 서쪽 의자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다. 감찰(監察)은 왕명을 받들고 와서 남쪽에 앉되 조금 서쪽으로 하여 동북쪽을 향하며, 장교(將校)는 기(旗)를 잡고 계단 아래에 나누어 선다.
과거 응시자들이 다 모이면 곧 문을 잠그고 공원리(貢院吏)가 응시자들의 이름을 불러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두 곳에 있게 한 다음에 동쪽과 서쪽에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에다 시험 제목을 써서 건다. 해가 사시(巳時)에 이르면 승선(承宣)이 금인(金印)을 받들고 도착한다.
동지공거가 그를 뜰에서 영접하여 서로 읍하고 나아가면, 지공거는 북벽(北壁) 뒤로 자리를 피한다. 승선은 동지공거와 함께 마루로 올라가 두 번 절하고 서로 안부를 물은 다음 또 두 번 절한다. 지공거가 나와서 북쪽 평상 아래의 자리 위에 앉으면 승선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지공거도 두 번 절한다.
승선이 지공거의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안부를 물으면 지공거는 앉은 자리에서 답례한다. 승선이 물러나 또 두 번 절하고 지공거도 두 번 절한다. 그렇게 한 뒤에 서로 읍하고 앉는다. 승선은 동쪽 의자에 앉아 서향하여 동지공거와 마주 대한다. 공원리가 응시자들이 바친 시권(試券)을 안고 와서 올리면 승선이 금인(金印)을 열어 그 시권에 인을 찍는다.
다음에 내시(內侍)가 임금이 내린 술을 가져오면 지공거와 동지공거가 승선과 함께 하사한 것에 대해 절하고 평상에 나아가 마시고서 또 절하며 사은(謝恩)한다. 승선이 돌아가게 되면 동지공거가 뜰에서 읍하여 보낸다. 삼장(三場)을 다 이와 같이 한다. 제1장ㆍ제2장에는 승선이 와서 인이 찍힌 시권을 열어 시원(試院)에서 방(榜)을 내고 제3장은 임금의 염전(簾前)에서 방을 낸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가 지공거가 되었을 때에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이 승선이 되어 문에 서서 힐책하기를,
“모(某 홍자번 자신이다)가 왕명으로 금인을 받들고 왔는데, 지공거가 뜰에 나와 맞이하지 아니하니, 모(某 김구를 말한다)는 감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니, 문정(文貞)이 대답하기를,
“승선이 재상에게 오면 재상은 앉아서 접대하는 것인데, 지금 곧 일어나 피하는 것만도 예에 지나치다. 더구나 뜰에 나아가 맞이할 수 있으랴.”하였다.
홍 충정이,
“시간이 늦어집니다.”
하니, 문정이 마지못하여 계단을 내려갔으나 한 층계를 남기고 다 내려가지 않았다. 충정은 그때서야 비로소 들어갔다.
어떤 이가 누가 옳으냐고 묻기에 나는,
“문정의 말은 선왕(先王)의 제도로서 대신을 공경하기 때문이고, 충정의 말은 임금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그 임금으로 하여금 선왕의 법을 본받아 대신을 공경하게 하는 것 역시 임금을 높이는 뜻이 아니겠는가.”하였다.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신(臣) 제현(齊賢)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 거란이 낙타[橐駝]를 보내주었는데, 다리 아래 매어 두고 꼴과 콩을 주지 않아 굶어죽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다리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낙타가 비록 중국에서 나지는 않으나 중국 또한 일찍이 기르지 않은 적이 없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수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폐단이 백성을 상하기에는 이르지 아니할 것이요, 또 물리치고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 굶겨서 죽이기까지야 하겠는가.”하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왕업을 창건하여 대통을 내려주신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송 태조(宋太祖) 같은 이는 금중(禁中)에서 돼지를 기르게 하였는데 인종(仁宗)은 그 돼지를 놓아 주라 하였습니다. 뒤에 요망한 사람을 얻었을 때 둘러보아도 피[血]를 채취할 곳이 없어, 그제야 태조의 생각이 또한 여기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았다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꼭 정론(定論)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송 태조가 돼지를 기른 뜻이 피를 채취하는 것보다 더 큰 데 있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태조께서 낙타를 굶어 죽게 한 것은 장차 오랑캐들의 휼계(譎計)를 꺾으려 함인지, 아니면 후세의 사치심(奢侈心)을 막으려 한 것인지 모르나, 아마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조용히 생각해 보시고 힘써 행하여 본받을 것이요, 어리석은 신이 감히 함부로 의논할 바 아닙니다.”하였다.
또 신에게 묻기를,
“우리나라는 옛날에는 문물(文物)이 중화와 같다고 하더니, 지금은 학자들이 모두 중[釋子]를 좇아서 장구(章句)나 익히고 있다. 그러므로 으레 자질구레하게 문장만을 꾸미는 무리는 많아지고, 경서(經書)에 밝고 덕행(德行)을 닦는 선비는 적어지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였다.
나는 이에 대답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초창기에 여러 가지 나라일을 다스리기에 겨를이 없었으나,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았습니다. 한 번 서도(西都)에 행차하여서는 수재(秀才)인 정악(廷鶚)을 박사(博士)로 삼아서, 육부(六部)의 생도를 가르치게 함과 동시에, 비단을 하사하여 권장하고 창고의 곡식을 주어 양성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절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종(光宗) 이후에는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 안으로는 국학(國學)을 높이고 밖으로는 향교(鄕校)ㆍ이상(里庠)ㆍ당서(黨序)를 설치하여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리며, 스승과 제자가 서로 함양(涵養)하고 감화하여 마치 띠풀처럼 서로 엉켜서 초창하고 윤색하였으니, 이른바 문물이 중화와 같다는 것이 대개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의왕(毅王) 말년에 무인(武人)의 변란이 일어나 순식간에 훈유(薰蕕 훈은 향취를 지닌 풀이고 유는 악취를 지닌 풀이다.)가 그 냄새를 같이하고 옥석(玉石)이 함께 타는 것처럼 선악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겨우 범의 입에서 벗어난 것처럼 화를 피한 자는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가서, 의관(衣冠)을 벗어버리고 가사(袈裟)를 입고서 남은 생애를 보냈으니, 신준(神駿)ㆍ오생(悟生) 같은 유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 후 국가에서 차츰 문교를 쓰는 정책(政策)을 회복하자, 선비들이 비록 학문을 원하는 뜻이 있으나 좇아 배울 만한 곳이 없었으니, 부득이 가사를 입고 깊은 산중에 도망가 있는 이를 찾아가 배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까닭에 신준이 자기 제자를 서울로 보내 과거에 응시하게 하던 시(詩)에,
신릉 공자가 정병을 거느리고 / 信陵公子統精兵
멀리 한단에 가서 큰 이름 날리니 / 遠赴邯鄲立大名
천하 영웅들이 다 본받아 좇았으나 / 天下英雄皆法從
가엾어라 눈물짓는 늙은 후영이여 / 可憐揮淚老侯嬴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학자들이 중을 좇아 장구만을 익히게 된 그 원인이 대개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학교를 넓히고 상서(庠序)를 일으키며, 육예(六藝)를 높이고 오교(五敎)를 밝혀 선왕의 도를 천명한다면, 누가 참 선비를 배반하고 중을 따를 것이며, 실학(實學)을 버리고 장구(章句)만 익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자질구레하게 글귀나 다듬는 무리가 경서를 밝히고 덕행을 닦는 선비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덕릉께서는,
“경(卿)의 말이 그럴듯하다.”하였다.
문종(文宗)은 38년 동안이나 왕위를 누린 분으로 춘추가 높았다. 대신 왕총지(王寵之)와 이자연(李子淵)은 당시 연덕(年德)이 높은 분들이었는데, 왕은 늘 그들을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정사를 묻고 끝난 다음에는 술상을 벌여 밤늦도록 등촉을 밝혀가며 즐겼다. 임금과 신하는 모두 긴 눈썹에 흰 머리로 서로 마주 앉아 그 기쁨을 나누니, 마치 신선의 그림과 같았다.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은 처음에 유승단(兪升旦)에게 배웠고 거의 50년 동안이나 왕위를 누렸으니, 그는 대개 학문으로 덕을 기르고 근신으로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고 하늘이 도왔던 것이다. 충경왕(忠敬王: 원종(元宗)이 세자(世子)로서 원(元) 나라에 입조(入朝)하였을 때에 당시 원 나라의 황제인 헌종(憲宗)은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서 조어산(釣魚山)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세자가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멀리 행차하여 임시 머무는 곳)로 가려 하는데, 길이 경조(京兆)의 여산(驪山)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 수령이 세자에게 온천(溫泉)에 목욕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사양하면서,
“이곳이 당 명황(唐明皇)이 일찍이 목욕하던 곳이다. 비록 시대는 다르나 어찌 더럽힐 수 있겠는가.”하였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예의를 안다고 감탄하였다. 얼마 뒤에 천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곧 수레를 돌려 세조(世祖)를 양초(梁楚)의 근교에서 맞이하였는데, 세자는 오각사모(烏角紗帽)에 소매가 넓은 붉은 비단 도포와, 무소 가죽의 띠에 상아홀(象牙笏)을 잡고 진퇴(進退)하는 모습이 참으로 볼 만하였다.
세조는 이를 보고 놀라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만리 밖에 있는 나라로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 나라 세자가 오늘날 스스로 나에게로 돌아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은, 세자가 되었을 때 학사(學士) 김구(金坵)ㆍ이송진(李松縉), 중[僧] 조영(祖英)과 함께 시(詩)를 짓고 화답하여, 그를 수집하여 만든 《용루집(龍樓集)》이 남아 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날마다 문신 최옹(崔雍) 등으로 하여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하게 하니, 많은 아랫사람들이 감화되어 심지어 무부(武夫)ㆍ환관(宦官)들까지도 글을 읽고 시짓기에 능한 자가 있었다.
덕릉(德陵)은, 중국 조정에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유명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함께 종일토록 피곤함을 잊어가며 고금의 일을 강론, 삼대(三代)로부터 오계(五季)에 이르기까지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과 국가의 치란을 어제 있었던 일처럼 자세하게 말하였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초년에 선비(鮮卑)의 한 중이 상언(上言)하기를,
“황제의 스승인 팔사파(八思巴)가 몽고자(蒙古字)를 만들어내 세상에 공로가 있으니, 바라건대 온 천하의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사당을 세워 공자(孔子)와 비등하게 하소서.”하니, 원 인종(元仁宗)이 대신과 여러 원로들에게 명하여 회의를 하도록 하였다.
이때 덕릉이 국공(國公)인 양안보(楊安普)에게 말하기를,
“공자는 백왕(百王)의 스승으로 천하를 통하여 제사를 받게 된 것은 그의 덕(德) 때문이요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 팔사파가 몽고자를 만들었다 하여 공자에 비한다면, 후세에 이론(異論)이 있을까 두렵습니다.”하였다. 팔사파를 제사하는 일이 끝내 시행되고 말았지만, 덕릉의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훌륭하게 생각하였다.
덕릉은 항상 요좌(僚佐)로 하여금 《송사(宋史)》를 읽게 하고 단정히 앉아 듣다가, 이항(李沆)ㆍ왕단(王旦)ㆍ부필(富弼)ㆍ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ㆍ구양수(歐陽脩)ㆍ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명신전(名臣傳)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경모하는 생각을 가졌으며, 정위(丁謂)ㆍ채경(蔡京)ㆍ장돈(章惇) 등 간신전(奸臣傳)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지 않은 때가 없었으니, 어진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천품이라 하겠다.
문정공(文正公) 유경(柳璥)이 찬성사(贊成事)로 있다가 해임되고, 문순공(文純公) 원부(元傅)는 찬성사로 있다가 전임되어 판군부(判軍簿)가 되었다. 그 뒤에 문정이 판판도(判版圖)가 되어 다시 재상이 되었으니 지위가 문순공의 아래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순공이 말하기를,
“나는 유공(柳公)의 문인과 같은데 어떻게 유공의 윗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문정공이 말하기를,
“군부(軍簿)는 옛날의 병부(兵部)이고 판도(版圖)는 옛날의 호부(戶部)로 판병부(判兵部)가 둘째 재상이 되고 판호부(判戶部)가 셋째 재상이 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니,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두어 달 동안이나 서로 사양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에게 물으니, 허공이,
“유경의 말은 옛 제도이고 원부의 말은 사사로운 은정입니다.
그러나 후진이 선진에게 양보하는 것은 예의이니 원부의 말도 옳습니다. 지금 만약 유경으로 하여금 감수국사(監修國史)를 시키면 일이 해결될 것입니다.”하니, 왕이 그 말을 좇아 비답을 내려서 문정을 드디어 문순의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는 대개 문순공이 그때에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사대하게 된 뒤부터 적제(狄鞮 몽고어 통역)가 임용되는 일이 많아서 재상에 임명되기까지 하였다 홍자번(洪子藩)이 항상 말하기를,
“사신된 사람이 까다롭지 않고 솔직하면 비록 아홉 번 통역을 거치더라도 서로 일을 의논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직접 면대하여 말하더라도 스스로 궁지에 빠지기 일쑤이다.”하였다.
한 번은 사신이 합좌소(合坐所)에 이르렀는데, 고흥(高興) 유청신(柳淸臣)은 몽고 말을 아는 역관 출신으로서 직접 그 사신과 한마디 말을 하였다. 이때 홍 충정이 역관을 불러 책망하기를,
“너는 어딜 가 있었기에 재상으로 하여금 직접 말하게 하는가.”
하니, 고흥은 부끄러워 낯을 붉히고 땀을 흘렸다.
고흥이 수상(首相)이 되어 빈객과 접촉할 때는 비록 술잔을 나누며 담소하는 자리라도 역관을 그 사이에 두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빈주(賓主)의 뜻을 똑똑히 알아서 응대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고흥이 충정의 말에 징계된 것이 아닐까. 중관(中官) 이대순(李大順)이 원 세조(元世祖)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우리나라의 교동(喬桐) 사람이다.
그때 충렬왕이 입조(入朝)하니, 대순이 황제에게 충렬왕에게 조서를 내려 그의 형인 교위(校尉) 공세(公世)를 별장(別將)으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이르기를,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법제가 있고, 또 그 나라의 임금이 있는데 짐이 어떻게 간여하겠느냐.”하고, 곧 대관양(大官羊 양의 일종)과 상존주(上尊酒 으뜸가는 술)를 하사하고, 그곳에서 대순 자신이 직접 충렬왕에게 아뢰게 하였는데, 대순의 청을 들은 충렬왕은, “너의 형은 교위이니, 산원(散員)을 뛰어넘어서 별장(別將)을 제수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하였다.
대순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는데, 뒤에 황제의 그런 말이 있었음을 듣고 제수하였다. 강경룡(康慶龍)이 집에 있으면서 제자를 양성하더니,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을사년(1305, 충렬왕 31)에 그의 문도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자가 10명이나 되었다.
호명한 뒤에 제자들이 모두 와서 경룡을 뵈니, 그 갈도(喝道 높은 벼슬아치가 지나갈 때 길을 치우는 것)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종실(宗室) 익양후(益陽侯)의 집이 근방에 있었는데, 다음날 익양후가 궁중에 들어가 충렬왕을 뵐 때, 왕이 민간의 일을 물었다.
익양후가 곧 경룡의 일을 말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노인이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남을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아 그들을 성취하게 하였으니, 어찌 도움이 적다 하겠는가.”
하고, 관리에게 칙명을 내려서 곡식을 싣고 그 집에 갖다주게 하였다.
[註解]
[주01]단(壇)에 …… 귀(鬼)로 가는 것 : 이는 선조(先祖)의 대수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말한다. 《禮記》 祭法에 “천자는 칠묘(七廟)와
일단(一壇)ㆍ일선(一墠)을 세우는데, 친진(親盡)하면 신주(神主)를 조묘(祧廟)로 옮기고, 또 대수가 멀어지면 단에서 제사하고 또
더 멀어지면 선에서 지내며, 선에서 물러나는 것을 귀(鬼)라고 범칭(泛稱)한다.”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주02]석랑(石郞)과 …… 친교 관계 : 이는 후진(後晉)과 거란과의 친교 관계라는 뜻. 석랑은 후진 고조(後晉高祖)인 석경당(石敬塘)을
말하는데, 경당이 거란의 힘을 빌려 후당(後唐)을 멸망시켰고 이어 거란의 힘에 의하여 후진의 황제가 되었으므로, 거란에 대하여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섬겼다.
제파는 임금을 말린 고기라는 뜻으로 오대(五代) 때의 후한(後漢) 고조인 광덕(光德)이 후진을 멸하고 북쪽으로 돌아가다가 살호림
(殺虎林)에서 죽었는데, 거란 사람들이 그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젖을 담아 가지고 싣고 갔으므로 생긴 말이다. 여기서는 거란
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김신호 (공역) ┃ 1980
전집 2
역옹패설 전집 2(櫟翁稗說前集二)
역옹패설 전집 2(櫟翁稗說前集二)
국초에 서신일(徐神逸)이란 자가 교외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몸에 화살이 꽂힌 채 뛰어들어왔다. 신일이 즉시 꽂힌 화살을 뽑고 숨겨 주어 쫓아온 사냥꾼이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사례하기를,
“사슴은 내 아들이오. 그대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아니하였으니, 그대의 자손을 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신일(神逸)이 나이 80세에 아들을 낳았으니, 그 이름이 필(弼)이다. 필이 희(熙)를 낳고, 희가 눌(訥)을 낳아, 과연 서로 이어 태사(太師)ㆍ내사령(內史令)이 되었고,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근세에 통해현(通海縣)에 거북같이 생긴 큰 동물이 조수를 타고 포구(浦口)에 들어왔다가 조수가 빠져 나가지 못하였다.
백성들이 그것을 도살하려고 하자, 현령(縣令) 박세통(朴世通)이 말려서 굵은 새끼로 배 두 척에 매어 바다에 끌어다가 놓아 주었다. 꿈에 늙은이가 나타나 절하며 말하기를, “내 아이가 날을 가리지 않고 나가 놀다가 죽게 됨을 면치 못하였는데 다행하게도 공(公)이 살려 주어 그 은덕이 큽니다.
공과 공의 아들 손자 3대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리하여 세통과 그의 아들 홍무(洪茂)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그의 손자 함(瑊)은 상장군(上將軍)으로 벼슬을 그만두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시(詩)를 짓기를,
거북아 거북아 잠에 빠지지 마라 / 龜乎龜乎莫耽睡
삼대의 재상이 헛소리일 뿐이구나 / 三世宰相虛語耳
하였더니, 이날 밤에 거북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주색에 빠져서 제 스스로 복을 던 것이지, 내가 은덕을 잊은 것은 아니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조금 기다리시오.”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치사(致仕)가 취소되고 복야(僕射)가 되었다.
의종(毅宗) 말년에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ㆍ이고(李高)가 난을 일으켜 임금을 거제(巨濟)로 옮기니, 화를 입은 조신(朝臣)이 매우 많았다. 또 그들의 가족까지 도륙하려 하니, 대장군(大將軍) 진준(陳俊)이,
“우리가 미워하는 자는 한뇌(韓賴)ㆍ이복기(李復基) 등 4~5인에 불과하다. 지금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도 너무 심한데, 더구나 그 처자까지 죽일 수 있겠는가.”하면서 적극 말렸다.
그후 4년에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반정(反正)을 꾀하다가 실패하자 다시 문사(文士)를 일제히 수사하여 다 죽이게 되니, 중외가 흉흉하여 아침저녁 일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에 낭장(郞將) 김부(金富)가 정중부와 이의방 등에게 말하기를,
“하늘의 뜻은 알 수 없고 인심을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힘만 믿고 의리를 지키지 않아서 문사들을 풀베듯 죽였으니, 세상에 어찌 김보당 같은 자가 적다 하겠는가. 우리들 중에 자녀가 있는 자는 모두 문사들과 혼인을 맺어 그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장구함을 도모하는 길이다.”
하여, 뭇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따랐다. 그러한 뒤에 그 화가 수그러지게 되었다. 진준의 손자 식(湜)ㆍ화(澕)ㆍ온(溫)이 모두 등과하여, 식은 벼슬이 추밀사(樞密使)에 이르렀고, 화와 온은 모두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김부의 아들 취려(就礪)와 손자 전(佺)은 2대가 모두 수상(首相)이 되었고, 그 후예가 지금까지 많이들 현달하였다.
원(元) 나라 군사가 대대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경기(京畿)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때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가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기려고 여러 중신들을 청하여 의논하였는데, 문안공(文安公) 유승단(兪升旦)이 홀로 말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도리이니, 예의로 섬기고 신의로 사귄다면 저들 또한 무슨 명목으로 늘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城郭)과 종사(宗社)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 엎드려서 세월만 보내는 사이에 변경의 백성들로 하여금 장정은 모두 적의 칼날에 쓰러지게 하고 노약은 모두 잡혀서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
하였으나, 진양공은 듣지 않고 자기의 족당을 거느리고 먼저 성남(城南) 경천사(敬天寺)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날 진양공을 따라간 자에게는 차례를 따지지 않고 상(賞)을 내렸으며, 고종(高宗)도 마지못하여 따라갔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동안 북방의 주군(州郡)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식자들은 지금까지도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합진찰랍(哈眞札臘)이 금산왕자(金山王子)를 토벌할 때에 동진국(東眞國)의 군주 만노(萬奴)는 군사 2만 명을 출동시켜 완안자연(完顔子淵)으로 하여금 장수를 삼아 합세하게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문정공(文正公) 조충(趙冲)에게 부월(鈇鉞)을 주어 장수로 삼고 위열공(威烈公) 김 취려(金就礪)를 부장(副將)으로 삼아 서로 협공(挾攻)하게 하였다.
합진이 우리에게 군사와 군량을 요청하고 또 서로 보기를 청하므로, 위열공이 먼저 그들의 진영(陣營)에 나아가니 합진이 말하기를,
“힘을 합쳐 적을 치려면 우선 몽고 황제를 향하여 요배(遙拜)를 한 다음에 동진 황제에게 절하시오.”하였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거늘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소. 우리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두 황제의 신하는 될 수 없습니다.”하고, 끝내 만노에게 절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7척 신장에 수염이 배꼽 아래를 내려가, 정장을 할 때에는 언제나 두 비자(婢子)를 시켜 양쪽에 갈라 서서 그 수염을 걷어들게 한 뒤에 띠를 맬 수 있었다. 이때에 합진이 그 위의를 위대하게 여기고 그 말을 기이하게 여겨서 드디어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추밀(樞密) 한광연(韓光衍)이 음양설(陰陽說)을 무시하고 집을 수축하였는데, 그 이웃사람의 꿈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검은 의관을 한 10여 명이 모여 서서 좋지 않은 안색으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공사를 일으킬 때마다 우리를 편히 살지 못하게 하니 어떻게 할까.”
하니, 다른 자가 말하기를,
“왜 화(禍)를 입히지 않느냐.”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화를 입히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청렴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래서 그의 수행원에게 물으니, 바로 한공(韓公)의 집 토신(土神)이라 하였다.
장원(壯元) 유석(庾碩)이 안동(安東)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온 고을 백성은 그를 부모처럼 친애하였고 신명(神明)처럼 존경하였다. 뒤에 박(朴)이란 성을 가진 자 이름은 잊었다가 수령이 되어 정치하는 것이 유석에게 못지않다고 자만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성질이 근신한 아전 하나가 군재(郡齋)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지척(咫尺)의 가까운 곳도 울타리로 막으면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하는데, 더구나 한 곳 마루 위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사방을 살피고자 하니 또한 어렵지 않느냐. 지금 법을 농간하는 간사한 아전이 없는지, 원한을 품고 있는 억울한 백성이 없는지, 너는 숨김없이 말하라.”
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사또께서 고을에 오신 뒤로, 백성이 아전을 보지 못하니 아전이 농간부리는 것을 미처 모르겠고, 백성이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수령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나를 유사군(庾使君)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하는가?”
하니, 아전이,
“백성들이 유사군을 칭찬하다가 간혹 말이 사또에까지 미치기도 합니다.”
하니, 수령은 이에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지추(知樞) 손변렴(孫抃廉)이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을 때 남매간에 서로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그 아우가 말하기를,
“한 딸과 한 아들이 다같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어찌하여 누님만이 홀로 부모의 유산을 차지하고, 아들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고, 누이는,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에 전 가산을 나에게 주었다. 네가 얻은 것은 검은 의관 한 벌과 미투리 한 켤레 종이 한 권뿐이다.
아버지가 쓰신 증서가 여기 모두 있는데,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하여서, 여러 해 동안 판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두 사람을 불러 앞에 놓고 묻기를,
“너희들의 아버지가 임종할 때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니, 먼저 돌아가셨다고 대답하였다.
공은 또,
“너희들은 그때 나이가 몇 살씩이나 되었었느냐?”
물으니, 누이는 출가하였고, 아우는 아직 어릴 때였다고 대답하였다.
공이 그들에게 타이르기를,
“부모의 마음은 아들이나 딸에게 똑같은 것이다.
어찌 장성하여 출가한 딸에게만 후하고, 어머니도 없는 아들에게 박하였겠느냐. 돌아보건대 어린아이가 의지할 곳은 누이뿐이라, 만약에 유산을 누이와 똑같이 남겨주면, 그 사랑이 혹시 지극하지 못할까, 양육하는 것이 혹시 완전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장성하면 이 종이로 소장(訴狀)을 작성하고 검은 의관에 미투리를 신고 관가에 고발하면, 이를 판별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유독 이 네 가지 물건을 준 것은 대체로 이러한 뜻이라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서로 마주 보며 울었다. 공은 드디어 재산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진양공(晉陽公)의 서자인 선사(禪師)는 이름이 만전(萬全)이다. 그는 진도군(珍島郡)의 한 절에 머물었는데, 그 무리가 횡포를 부리고 방자하여 못할 짓이 없었다. 그런데 그중에도 통지(通知)라고 하는 자가 더욱 심하였다.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가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가 되었을 때에, 그들의 요청을 하나도 들어 주지 않았다.
영헌공이 한번은 그 절에 갔더니 만전은 거만스러운 태도로 욕하면서 나와 보지 않았다. 영헌공이 곧장 마루로 올라가니 마루 위에 악기가 있었다. 곧 거문고를 가져다가 두어 번 타고 피리를 가져다가 부니, 그 음절이 비장하였다.
만전은 그제서야 흔쾌히 나와 말하기를,
“마침 미질(微疾)이 있어 공께서 여기에 오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서로 해가 지도록 술을 마시며 즐겼다. 만전이 이 자리에서 10여 가지의 일을 부탁하니, 영헌공은 그 자리에서 모든 요청을 들어주고 두어 가지는 보류하면서,
“이것은 감영(監營)에 가야 할 수 있는 것이니, 통지를 보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영헌공이 돌아간 며칠 뒤에 과연 통지란 자가 찾아왔다. 영헌공은 즉시 아전을 시켜 통지를 포박하고 그 불법 행위의 죄목을 따진 다음에 강물에 던져 버렸다.
진양공이 죽자 만전이 이어 정권을 잡았으니, 곧 진평공(晉平公) 항(沆)이다. 비록 전일의 유감을 품었지만, 영헌공이 원래 청렴하고 삼가, 허물이 적기 때문에 해칠 수가 없었다.
문도공(文度公) 유천우(兪千遇)에게 아우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보(甫)였다. 그는 권신(權臣) 김인준(金仁俊)을 제거하고자 문도공에게 그 음모를 말하였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일을 거사하지 못한 채 실패하였는데, 인준이 공에게 사실을 알았느냐고 묻자, 공은 알았노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인준이,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분명 그 모사에 참여한 것이다.”
하니, 공이,
“고발함으로써 죄를 면할 줄 모른 것은 아니나, 노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하지 않았다.”하였다.
인준이 말하기를,
“전일에 내 아우의 집에서 음식을 대접할 때 홍시가 있었는데, 온 좌중 손이 다 그 맛이 좋다고 하였으나, 공이 홀로 먹지 않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가져다가 어머니를 드리겠다고 하였으므로, 내가 본래부터 공이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고, 드디어 죄에 연루시키지 않았다.
문정공(文正公) 유경(柳璥)이 네 번이나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을 맡았다. 그가 사람을 뽑을 때에는 우선 기국과 식견을 보았으며 글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뒤로 쳤다. 그러므로 그가 뽑은 사람은 모두 명사가 되었으며, 재상의 지위에 오른 이가 잇달아 있었다.
찬성(贊成) 유천우(兪千遇)가 일찍이 유 문정공 밑에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그의 성질은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글쓰는 법에 조그마한 흠이 있어도, 반드시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와 다투지 않았더니, 나중에 방(榜)을 보니 모두 과장(科場)에서의 글쓰는 법만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후에 이때 합격한 자 중에서는 대성(大成)한 자가 거의 없었다.
남쪽 지방의 도적 이가당(李家黨)이란 자가 처음에는 산 속에서 무리를 불러모아서 촌락을 노략질하였는데, 그 무리가 점차 강성해지자 주군(州郡)에 격문을 보내니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관리들이 혹은 그들을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거나 도망쳐 피하기도 하여, 감히 그 세력을 막을 자가 없었다.
추밀(樞密) 김경손(金慶孫)이 순문사(巡問使)가 되어 나주(羅州)에 들어갔는데, 그 이튿날 도적의 무리가 이르렀다. 공(公)은 백성으로 하여금 성문(城門)을 닫고 자수(自守)하게 한 다음, 자신은 성 밖에 진을 치고 일산을 받들고 호상(胡牀)에 걸터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도적의 무리들 중에 날래고 사나운 중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그 무리들과 약속하기를,
“내가 저 미소년(美少年)을 사로잡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겠다.”
하고 먼저 도끼를 휘두르고 휘파람을 불며 몸을 날려 뛰어나갔다. 이에 함양(咸陽) 사람 박신유(朴臣蕤)가 나아가 서로 대적하는데 두 사람의 칼날이 서로 닿아서 먼저 찍을 수가 없었다. 박(朴)이 그를 발로 차서 꺼꾸러뜨리고 그 머리를 베어 죽이니, 적은 크게 놀랐다. 관군이 이 틈을 타서 수십 리를 추격하여 쳐서 마침내 평정하였다.
위득유(韋得儒)ㆍ노진의(盧進義)가 한희유(韓希愈)와 공을 다투어 서로 싸우고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에게 고소하였는데, 공은 위씨와 노씨를 바르지 못하다고 판결하였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앙심을 품고,
“공이 희유(希愈)와 함께 거사(擧事)를 음모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달로화적(達魯花赤) 흔두(忻豆)가 공을 구금하고 사실을 자기 조정에 보고하였다. 홍다구(洪茶丘)가 황제의 명령으로 경릉(慶陵)과 함께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김공(金公)이 말하기를,
“소국은 상국(上國)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어버이처럼 경애(敬愛)하는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어버이에게 반역하여 스스로 멸망의 화를 부르겠습니까.”하였다. 그러나 다구는 반드시 죄를 자복시키고자 하여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고 기절하였다가 깨어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경릉이 차마 볼 수 없어 공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비록 자수하더라도 천자는 어지신 분이라 장차 사실을 밝혀서 죽게 하지 아니할 것인데, 어찌 스스로 이처럼 심한 고통을 당하
는 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항오(行伍) 속에서 발탁되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이니, 비록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더라도 국은(國恩)에 보답하기에 부족합니다. 어찌 이 몸을 아껴 거짓 자수하여 사직(社稷)을 등지겠습니까.”
하고, 다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죽일 테면 빨리 죽여라. 나는 불의(不義)로 굴복할 수는 없다.”하였다.
황제의 조서가 있어서 공(公)과 위씨ㆍ노씨가 함께 중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득유(得儒)는 도중에서 혀가 썩어서 죽었고, 진의(進義)도 경사(京師)에 이르자 병사(病死)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이 아상(亞相)이 되어, 일을 의논할 때마다 수상(首相)인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과 의견을 다투되, 문경은 간혹 억지로 그 의견을 따르곤 하였다. 한번은 양제(兩制)가 지은 사(詞)와 소(疏)를 열람하는데, 충정공이 그 하자를 지적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을 아뢰려고 온 아전들이 두어 사람씩이나 앞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문경이 문첩 녹사(文貼錄事 서류 따위를 맡은 하급 관리)에게,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충정공에게 글짓는 일이 그의 임무가 아님을 빈정댄 말이다. 충정공이 이에 얼굴을 붉히면서 그 지적하는 일을 그치므로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은 서로 용납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문경공이 죽었을 때에는 충정공이 탄식하기를,
“그는 근신하고 정직하여 알고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상에 어찌 다시 허공(許公) 같은 이가 있겠는가.”하였다.
충정공이 수상(首相)이 되었을 때, 조공 인규(趙公仁規)가 아상(亞相)이 되고 염공 승익(廉公承益)이 그 차석(次席)이 되었는데, 염공은 방술(方術)로 양궁(兩宮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아 늘 궁중에 거처하였고, 도당(都堂)에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하루는 충정공이 먼저 일어나 퇴청한 뒤에 조공이 염공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홍공(洪公)은 참 재상이라 하고 나는 노역(老譯 늙은 역관)이라 부르고, 공은 노주(老呪 늙은 점술장이)라고 부르니, 우리들은 참 재상의 지목을 받지 못하였소. 오직 아침에 출근하는 것과 저녁에 숙직하는 것이나 부지런히 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염공은 그날로 자진 사퇴하였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말년에 왕유소(王惟紹) 등이 적자를 폐하려는 음모로 경릉(慶陵 충렬왕(忠烈王))을 고혹, 경릉으로 하여금 천자에게 아뢰어 서흥후(瑞興侯)로 후사를 삼기를 청하게 하니, 대령공(大寧公) 최유엄(崔有渰)이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경령전(景靈殿)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태조(太祖)와 친묘(親廟)의 진용(眞容 초상화)이 실로 여기에 있으므로, 전하께서는 일찍이 그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서흥후가 책봉된다면 먼 훗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 서흥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후(侯)를 왕으로 추존하여 그 신주를 강령전에 모실 것이니, 그렇게 되면 고종(高宗)과 원종(元宗)의 신주는 옮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고종과 원종은 신이 몸소 섬긴 임금이니, 신이 지금 늙었으나 차마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하니, 경릉은 오랫동안 얼굴에 침통한 빛을 띠었다. 왕유소 등이 그제서야 두려워할 줄 알았다.
임연(林衍)은 제 마음대로 임금을 폐립(廢立)하여 원종을 서궁(西宮)에 처하게 하고, 또 세자가 우리나라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보내어 압록강(鴨綠江)에 대기하고 있다가 위협하려 하였다. 이때 의주(義州) 사람 정오보(丁五甫)가 밤에 압록강을 건너가 변을 고하니, 세자가 원 나라 조정에 돌아가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천자가 사신을 보내어 힐책하기를,
“들으니 너희 나라 뭇 신하들이 조정에 주청하지 않고 폐립을 제 마음대로 한다 하니, 자고로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
하고 곧 조서를 내려 왕을 복위시키고 입조(入朝)하게 하니, 임연은 이것이 걱정이 되어 등창이 나서 죽었다.
왕이 입조하니 황제가 독연가(禿輦哥)를 명하여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과 세자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행차가 송경(松京)에 도착하니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강도(江都)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왕명에 항거하려 하였다. 이때 남양(南陽) 홍규(洪奎)가 유무(惟茂)의 매부로 중승(中丞)이 되었는데, 유무는 그를 심복으로 믿고 있었다.
왕은 이빈성(李份成)을 홍공(洪公)에게 보내어 타이르기를,
“경(卿)은 여러 대를 이어온 중신의 후손인데, 마땅히 의리를 생각하고 사직을 이롭게 하여, 부조(父祖)를 욕되게 아니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니, 공이 두 번 절하며 이(李)에게 말하기를,
“내일 이맘때 부문(府門) 밖에서 나를 기다리시오.”
하고, 홍공은 이날 상장군(上將軍) 송송례(宋松禮)와 의논하고 송의 두 아들 염(炎)과 빈(份)을 모두 위사장(衛士長)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유무의 집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무가 누가 변란을 일으켰느냐고 물었을 때 홍 중승이라고 대답하니, 유무는 그만 낙담을 하였다. 이빈성이 홍공과 기약한 시간에 가니, 유무는 벌써 주살(誅殺)되어 있었다.
유무가 주살되니 삼별초(三別抄) 권신(權臣)이 사납고 용맹스러운 무사를 모집하여 자신의 호위로 삼은 것이니, 신의군(神義軍)ㆍ마별초(馬別抄)ㆍ야별초(夜別抄)를 이른바 삼별초라 한다. 가 스스로 반심을 품고, 서민을 협박하고 부녀를 약탈하면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珍島)에 성(城)을 쌓고 배반,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세워 왕을 삼고 관부(官府)를 두었다.
이때 정문감(鄭文鑑)이란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문진공(文眞公) 이장용(李藏用)의 문하에서 2등으로 합격했던 사람이었다. 문감을 승선(承宣)으로 기용하였다가 이어 정사를 맡기자, 문감은, “위조(僞朝)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황천에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낫다.”하고, 즉시 자살하고 말았다.
현문혁(玄文赫)은 어려서부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으므로 삼별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가 작은 배에다 처자를 싣고 도망하여 스스로 돌아오는데, 적(賊)이 추격하여 활을 쏘아 그의 팔을 관통시켜 배 안에 쓰러지니, 아내가 말하기를,
“의리상 쥐 같은 놈들에게 욕을 볼 수는 없다.”하고 그의 딸과 함께 물에 빠져 죽고, 현공(玄公)은 아들과 함께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문절공(文節公) 주열(朱悅)은 용모가 추하고 코가 문드러진 귤과 같았다. 안평공주(安平公主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처음 왔을 때, 전상(殿上)에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문절공이 일어나 헌수(獻壽)하니 공주가 왕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갑자기 늙고 추한 귀신 같은 자를 가까이 오게 합니까.”
하였다. 왕이 이에 대답하기를,
“얼굴은 귀신처럼 추하나 마음은 물처럼 맑다.”
하니, 공주는 얼굴빛을 고치고 예로 대하였다.
허 문경(許文敬 문경은 허공(許珙)의 시호)은 소년 시절에 항상 종 하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길에 버려진 사람의 해골이나 새ㆍ짐승의 썩은 뼈를 묻어주는 일을 하였다. 버려진 시체를 보면 자기 스스로 져다가 묻어 주었다. 그는 얼굴과 손을 씻을 때에도 1홉 정도의 작은 물밖에 쓰지 않았는데 귀하게 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홍 문정(洪文正 문정은 홍언박(洪彦博)의 시호)은 저녁마다 목욕을 하고 의관을 갖추고 하늘과 별에 절을 하였는데, 비록 조빙(朝聘)이나 행역(行役)으로 몹시 바쁜 때에도 일찍이 그 일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문경공(文景公) 설공검(薛公儉)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예를 좋아하였다.
조관(朝官)으로 6품 이상인 자가 부모의 상(喪)을 당할 때면 반드시 소복으로 조문하며, 시골의 후생들이 찾아와 뵐 때에도 의관을 갖추고 뜰에 내려가 영접하였다. 한번은 병석에 있었는데 중암(中菴) 채홍철(蔡洪哲)이 내실에 들어가 진찰하였다.
이때 베 이불에 해진 자리가 마치 중의 거처와 같이 쓸쓸하였다. 중암은 진찰하고 나와 탄복하기를,
“나 같은 무리가 공(公)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흙벌레가 황학(黃鶴)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하였다.
국가가 반역한 탐라(耽羅)를 정벌하고 동왜(東倭)에게 죄를 문책하며, 정해년의 근왕(勤王)과 경인년의 어구(禦寇) 때문에 군사를 동원한 것이 거의 20년이나 되어 선비들이 모두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활과 창을 잡았고,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자는 열에 한둘도 안 되었다. 그리고 선배와 노유(老儒)들이 모두 죽어서 육경(六經)이 실낱같이 겨우 전해질 뿐이었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말년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재상이 되어 국학(國學)과 상서(庠序)를 수리하고, 이성(李晟)ㆍ추적(秋適)ㆍ최원충(崔元冲) 등을 기용하여 한 경서(經書)에 두 교수를 두어서, 금학(禁學) 내시(內侍)ㆍ오군(五軍)ㆍ삼군(三軍)의 7품 이하로부터 내외 생원(生員)에 이르기까지 다 따라 익히게 하였다.
안향은 또 중이 되어 사주(泗州)에 사는 고(故) 낭중(郞中) 유함(兪咸)의 아들이 사한(史漢 사기(史記)ㆍ한서(漢書))을 잘 읽는다는 말을 듣고, 역전(驛傳)으로 불러 올려 서울로 오게 한 뒤에 윤신걸(尹莘傑)ㆍ김승인(金承印)ㆍ서인(徐諲)ㆍ김원식(金元軾)ㆍ박이(朴理) 등을 그에게 보내어 강설(講說)을 듣게 하였다. 이에 선비의 무리가 많이들 경서에 능통하고 옛일을 널리 아는 것을 일삼았다.
그 뒤에 백이재(白彝齋) 이정(頤正) 가 덕릉(德陵)을 따라 10년 동안 도하(都下 북경(北京))에 머물면서 정주(程朱)의 성리서(性理書)를 많이 구하여 돌아왔고, 나의 외구(外舅)인 정승 국재 권공(菊齋權公 국재는 호 이름은 보(溥))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얻어다가 판각하여 널리 전함으로써, 배우는 자가 또 도학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보건대 신효사(神孝寺)의 당두(堂頭) 정문(正文)은 나이 80세로 《논어》ㆍ《맹자》ㆍ《시경》ㆍ《서경》을 잘 강론하였는데, 유학자인 안사준(安社俊)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전에 한 선비가 송(宋) 나라에 들어갔다가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이 금릉(金陵)으로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모시(毛詩)》를 배웠는데, 7대를 전하여 사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시경》은 오로지 왕씨(王氏)의 해설을 쓰고, 《논어》ㆍ《맹자》ㆍ《서경》의 해설은 모두 주자장구(朱子章句)와 채씨전(蔡氏傳)을 합한 것이었다. 당시에 《주자장구》와 《채씨전》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이었는데, 사준은 어디서 그 해설을 얻었는지 알 수 없다.
밀직(密直) 안전(安戩)이 승지(承旨)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충렬왕이 환관 한 사람에게 참관(參官)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는 것을 공이 옳지 못하다고 고집하였다. 하루는 충렬왕이 공을 면대하여 타이르기를,
“이 사람이 나의 측근에서 부지런히 일한 지가 벌써 오랜 세월이 되었다. 경은 나를 위하여 억지로라도 6품의 벼슬을 주라.”
하고, 또 면전에서 그것을 쓰게 하니, 공이 부득이 낭장(郞將)으로 추천하였다.
조금 뒤에 공이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신은 재주 없는 몸입니다. 유악(帷幄)에 가까이 모시어 제품 전주(題品銓注)하는 일을 어찌 신과 같이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현능한 이를 택하여 이 소임을 맡기소서.”
하여, 그 말이 몹시 간절하니 왕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왕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니, 공이 또 그 뒤를 따라가 꿇어앉아,
“다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신은 내일이면 마땅히 체대될 것이니, 내수(內豎)를 참관으로 추천하라는 명은 보류하시고, 후일을 기다려 주소서.”하고 아뢰었다. 왕이 문지방을 넘어가다가 돌아보면서 성난 소리로,
“그리하라.”
하니, 좌우는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천천히 자리에 돌아와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의견을 허락하셨다.”
하고, 드디어 참관 추천하는 일을 삭제해 버렸다.
밀직(密直) 최수황(崔守璜)이 부처를 몹시 독실하게 섬겼다. 승지(承旨)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하객(賀客)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때에도 육(肉)은 없이 소찬으로 하였다. 왕지 별감(王旨別監) 임정기(林貞杞)가 백미(白米) 한 배[舟]를 최공에게 보냈으나 최공이 받지 않았다. 임(林)은 부끄러워 성내면서 한 배의 쌀을 권귀(權貴)에게 뇌물로 바쳐 최공을 대신해 승지가 되므로, 당시 사람들이 비열하게 여겼다.
어느 권력 있는 집에서 양민(良民)을 억지로 종을 삼으니, 그 양민이 전법사(典法司)에 고소하였다.
지사사(知司事) 김서(金㥠)와 그 동료들은 양민의 원통한 사정을 알면서도, 권력가의 세도를 겁내어 권력가에게 승소의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꿈에, 날카로운 칼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한 사(司)의 관리들을 마구 내리 찍었다. 그런 꿈이 있었던 이튿날 김(金)은 등창이 나서 죽었고, 달이 다 못 되어서 그의 동료들도 죄다 죽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죽지 않았으니, 그는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치암(恥菴 박충좌(朴忠佐)의 호)이,
“그 한 사람은 상서(尙書) 이행검(李行儉)이다.”하였다.
둔촌(鈍村) 김상훤(金相晅)이 김해(金海)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밀성(密城) 사람이 그 고을 원을 살해하고 반역하였는데, 이때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叔眞)이 감로사(甘露寺)에 있었다. 김상훤이 급히 안렴사를 성중으로 불러들였으므로 반역을 일으킨 밀성 사람은 밤에 안렴사를 수색하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밀성의 역도(逆徒)는 자칭 개국병마사(改國兵馬使)라 부르면서 군현(郡縣)에 통문을 보내니, 바람 앞에 풀이 쓰러지듯 무너지는 군현이 많았다.
김공(金公)은 곧 경주 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을 불러오라고 숙진에게 청하였다. 엄 수안이 도착하였을 때 서로 군사의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숙진(叔眞)을 끼고 적을 토벌할 계획을 의논하는데, 숙진이 겁내어 전에 있었던 절의 중을 불러다가 때와 방위를 물으면서 고의로 시일을 질질 끌고 있었다.
이때 공이 칼을 들어 중을 치니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 달아났다. 그러자 숙진이 두려워 공의 의사를 따랐는데, 적이 이 소문을 듣고서 저희들 스스로 괴수(魁首)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내안(乃顔)의 도당 합단(哈丹)이 포위를 벗어나 동쪽으로 도주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을 침입하니, 그 무리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그 무리는 사람을 죽여서 양식으로 삼고, 부녀들을 붙잡아 유린을 하고는 포(脯)를 떴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만호(萬戶) 정수기(鄭守琪)를 보내어 철령(鐵嶺)에서 방어하게 하였는데, 합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수기는 도망쳐 버렸다.
철령은 길이 험하고 좁아서 겨우 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곳이라, 합단이 말에서 내려 줄지어 올라와 기수가 버리고 간 물자로 며칠 동안 실컷 잘 먹고 북을 치면서 앞으로 행진해 오니, 원주(原州) 수장(守將)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기를,
“힘으로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니 아예 항복하여 백성의 죽음을 덜게 하느니만 못하겠다.”
하니, 고을 사람 진사 원충갑(元冲甲)이 유독 불가하다고 하면서 성문 밖에 앉아 있었다.
이때 적(賊)이 중 하나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는 통첩을 전해왔다. 충갑이 그 중의 머리를 베어 던져버리니, 적이 떼지어 몰려왔다. 이에 충갑이 두어 적군을 쳐서 죽이자 고을 군사들 또한 출동하였다. 판흥원창(判興原倉) 조신(曹愼)은 북채를 잡고 북을 치는데, 적의 화살이 그의 오른팔을 관통하였어도 북소리가 약해지는 일이 없었다.
적의 선봉이 조금 무너지니 그 후진은 경동되어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으며 도망쳤다. 고을 군사들은 높은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니, 그 소리는 산악을 진동하고 죽은 시체는 산곡을 메웠다. 그리하여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합단(哈丹)의 아들 노적(老的)이 군사를 이끌고 죽전(竹田)을 넘어 평양(平壤)으로 달려가는데, 만호(萬戶) 나유(羅裕)가 이것을 방어하다가 배[舟]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려 하는데, 현문혁(玄文赫)이 말리기를,
“저편 둘러싼 언덕과 진펄에 아마도 복병(伏兵)이 있을 것 같다.”하였다.
나공(羅公)은 이를 듣지 않더니 육지에 올라 미처 정렬도 하기 전에 수많은 적이 달려들었다. 나공은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 겨우 배에 올랐는데, 낭장(郞將) 이무(李茂)는 군사 수십 명과 함께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였다. 현공(玄公)이 배 위에 서서 외치기를,
“무(茂)는 힘써 싸워라. 뛰어난 공로를 세우면 나라에서 상(賞)을 내릴 것이다.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몸을 버리고 처자가 죽음을 당하는 것과 어느 것이 낫겠는가.”하였다.
이무는 수십 명의 무리와 함께 독산(獨山)으로 내달렸다. 적장(賊將)은 이무를 경시하여 말에서 내려 걸상에 앉은 다음에, 그 무리를 나누어 산을 포위하여 올라오는데, 화살이 비오듯 하였다. 이무는 나무 사이에 피신해 있는데 날은 저물어가고 배는 몹시 고팠다.
주머니 속의 마른 양식을 손으로 움켜 먹으면서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남아는 마땅히 죽음 속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활을 당겨 적장(賊將)의 목을 향하여 내리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적장이 꺼꾸러졌다.
적의 무리가 스스로 어지러워지자 무 등이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적의 머리를 벤 것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경인년ㆍ계사년 이후로 재상에 무인(武人)이 많았다. 이의민(李義旼)이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앉았는데 이가 두에게 자랑하기를,
“아무가 제 용력을 자랑하기에 내가 한번 쳐서 넘어뜨리기를 이와 같이 하였소.”
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다 흔들렸다. 이에 두가 대답하기를,
“어느 때의 일인데, 내가 맨주먹으로 힘껏 쥐고 휘두르니 사람들이 다 흩어져 달아났다.”
하면서 주먹으로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이씨와 두씨 / 吾畏李與杜
높이 군림한 참 재상일세 / 屹然眞宰輔
재상의 지위는 삼사 년이지만 / 黃閣三四年
주먹 바람은 만고에 떨치리 / 拳風一萬古
시중(侍中) 이연수(李延壽)가 국정을 맡고 있을 때, 고종(高宗)이 석씨(釋氏)의 의식인 연수신왕도량(延壽神王道場)을 행하고자 도당(都堂)에 칙명을 내려 그 비용을 지출하게 하였다. 도량의 관리가 나름대로,
“신왕도량(神王道場)이라고만 일컫고 시중의 이름자와 같은 연수(延壽)라는 말은 쓰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이 도량의 명칭을 묻게 되자 앞서 생각했던 것을 깜박 잊고 얼른 대답하기를,
“이연수 신왕도량(李延壽神王道場)입니다.”하였다.
공이 이에 말하기를,
“도량에도 성(姓)이 있느냐.”하였다.
경릉(慶陵) 때에는 홍훤(洪萱)을 사도(司徒)로 삼았는데, 찬성(贊成) 민훤(閔萱)이 녹사(錄事) 육희지(陸希贄)에게 신임 사또의 이름이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희지는 녹사로 늙은 사람이라 제 스스로는 대응 진퇴(對應進退)에 능숙하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민훤의 훤 자’라고 대답하니, 이를 듣는 자는 웃느라고 모두 이가 시릴 지경이었다.
문순공(文純公) 원부(元傅)가 하루는 퇴청하여 한가로이 있는데 문생(門生) 4~5명이 찾아와 뵈었다. 공은 그들을 자리에 앉게 하고 함께 앉아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이 수상(首相)이 되었으나, 재능이 뜻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여론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들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학사(學士) 방우선(方于宣)이 하좌(下座)에 있다가 대답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정치하는 것을 공의 성(姓) 자와 같이 한하고 합니다.”
하니, 공이 크게 웃으면서,
“나는 나의 성자를 본받아 둥글게 돌아서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으나, 너는 네 성자를 본받아 모로만 가면 어디로 가겠느냐.”
하였다.
사공(司空) 최온(崔昷)이 하천단(河千旦)ㆍ이순목(李淳牧)과 함께 고원(誥院)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와 이가 모두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최온은 자기의 문벌을 의지하여 그들을 매우 경홀히 대하였는데, 이들 역시 최에게 굽히지 않았다.
한번은 이웃 나라에서 힐문(詰問)해 온 문서의 답장을 지어 올리라는 칙명(勅命)이 있었는데, 최공이 붓을 잡을 처지라 머리를 짜며 애써 글을 지어보려 했으나 뜻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붓을 던지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촌구석의 가난한 무리들이 자부하는 까닭이로구나.”하였다.
상서(尙書) 박유(朴褕)가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동쪽으로서 목(木)에 속하는데 목의 생수(生數)는 3이요 성수(成數)는 8인데, 기수(奇數) 즉 3은 양(陽)이고 우수(偶數) 즉 8은 음(陰)이다. 우리나라에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법에 비록 고관(高官)이라도 감히 두 아내를 두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부녀들 중에는 간혹 머리가 희어지도록 시집가지 못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양반의 후예가 실낱같이 겨우 이어가고 병민(兵民)의 호구가 날로 조잔해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다 첩을 두게 하되, 벼슬 품계에 따라 내려갈수록 그 축첩의 숫자를 줄여서 서인(庶人)에 이르러서는 아내 하나에 첩 하나를 두는 것으로 일정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 홀어미의 원망을 없애고 백성을 풍부하게 하는 길입니다.”하였다.
이를 들은 부녀들은 귀천의 구별없이 모두 성내고 두려워하였다. 마침 관등일(觀燈日)에 박공(朴公)이 법가(法駕)를 호종하여 반열에 따라가는데 한 노파가 그를 알아보고 말하기를,
“첩을 두게 하라고 주청한 자가 저 늙은 거지놈이다.”
하자, 듣는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하였는데, 거리에는 아녀자들의 붉은 손가락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중찬(中贊)인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이 성균시(成均試)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백성이 아전을 보지 못한다.[民不見吏]”
는 문제로 시험을 보였는데 한 늙은 응시자가 지은 글귀에,
개는 꽃핀 마을 달에 잠잠하고 / 犬黙花村月
말은 버드나무 역전에 한가롭네 / 蹄閑柳驛塵
한 것이 있었다.
그 다음의 글귀도 그런대로 쓸 만하기에 공(公)이 하등(下等)에 합격시켰다. 방(榜)을 내고 하객(賀客)에게 잔치를 베푸는 날에, 공이 그 서생이 늙었음을 보고 민망하게 여겨 위로하는 마음에서 그 글귀 가운데 견(犬)ㆍ묵(黙) 자를 고쳐 하객들에게 자랑하기를,
삽살개는 꽃핀 마을 달에 잠자고 / 尨睡花村月
말은 버드나무 역전에 한가롭네 / 蹄閑柳驛塵
한 것이, 바로 이 서생의 글귀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야 산 글귀가 된다. 그랬더니 하객들이 미처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서생은 꾸부정한 태도로 나와,
“내가 지은 글귀는 ‘삽살개는 잠잔다[尨睡]’가 아니고 ‘잠잠하다’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서(尙書) 공 문백(孔文伯)이 술을 즐겼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 여극해(呂克諧)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공 상서의 연로함을 존경하여 자주 모셔다가 좋은 술을 대접하였다. 공 상서는 기뻐하여 그의 면전에서 칭찬하기를,
“이 젊은이의 용모와 행동을 보고 언론(言論)을 들어보니, 다른날 반드시 재상의 지위에 이르게 될 것이다.”하였다.
그 뒤 극해(克諧)가 일에 바빠서 달포가 지나도록 청할 겨를이 없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길에서 공 상서가 극해를 만나자 말하기를,
“재상이 될 운명도 늦어지고 빠르고 하는 수가 있으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하였다.
속담에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를 성자(聖者)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사람으로 성자의 행위를 하지 않는 자는 오직 곽예(郭預)뿐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곽공이 한림(翰林)이 되었을 적에 늘 비가 내릴 때마다 맨발로 우산을 들고 홀로 용화원 숭교사(龍化院崇敎寺)의 못가에 가서 연꽃을 구경하니 이것이 어찌 성자가 아니겠는가.”하였다.
그래서 곽공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연꽃을 구경하러 세 번 삼지에 이르니 / 賞蓮三度到三池
푸른 일산 붉은 단장 예전과 같건만 / 翠蓋紅粧似舊時
오직 꽃을 보는 옥당의 손님은 / 唯有看花玉堂客
정취는 여전한데 귀밑털이 허옇구려 / 風情未減鬢如絲
노당 선생(露堂先生) 추적(秋適)이 안동(安東)의 서기(書記)로 있다가 돌아왔는데, 몸이 몹시 비대해졌다.
노당은 나의 계부(季父) 비랑공(祕郞公)을 만나자, 농담하기를,
“이 소년의 수염이 제법 자랐군.[李少年鬚髥輒張]”
하니, 계부가 그 말을 듣자마자 대답하기를,
“추 사록의 배가 공연히 커졌습니다.[秋司錄腰腹空大]”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계부의 대답을 명대(名對)라 하였다.
노당(露堂)은 성질이 활달하여 거리낌이 없었고 늙어서도 식성이 좋았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손님을 대접함에는 다만 부드러운 쌀밥에 생선을 토막쳐서 국이나 끓이면 그만이다. 비록 많은 돈을 허비하여 팔진미(八珍味)를 차린다 하더라도 입을 지나가고 나면 마찬가지이다.”하였다.
노당이 용주(龍州)의 수령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평소에 서로 좋아하는 왕륜사(王輪寺)의 인조 대사(仁照大師)가 역마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오자 용주 고을 관내에 들어섰다. 인조 대사가 역리(驛吏)에게,
“너의 고을 사또는 누구냐?”
물으니, 아전이,
“추 시랑(秋侍郞)입니다.”
대답하였다.
인조가 또 역리에게,
“관리 출신이냐, 선비 출신이냐?”
물으니, 역리는,
“항상 붓과 벼루를 가지고 다니며 간혹 홀로 앉아 글을 읽는 것을 보니 선비 출신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사가,
“현달한 인사에 어찌 추가(秋哥) 성을 가진 자가 있으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조금 뒤에 대사가,
“날마다 정오가 되었을 때, 큰 사발에 담은 향기로운 쌀밥과 투가리에 담은 연한 고깃국을 차려 그 앞에 드리면, 너의 사또는 어떻게 하더냐?”
물으니, 역리가 곧 꿇어앉아,
“대사께서 나를 속였습니다. 대사께서는 우리 사또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하였다.
상서(尙書) 최원중(崔元中)은 학사(學士) 옹(雍)의 아들이다. 그가 처음 급제하여 구재(九齋)의 교도(敎導)가 되었을 때, 생도들에게 매질하는 법이 엄격하여 털끝만큼도 용서하는 일이 없어, 생도들은 그를 원망하여 진시황(秦始皇)이라 지목하였으니, 그 형벌이 혹독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가 얼마 뒤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을 때는 자못 자기의 재주를 믿고 남을 업신여겼다. 한림원의 동료인 이숙기(李叔琪)가 거짓 성내어, “너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기에 그처럼 스스로 잘난 체하느냐. 내가 만약 말 한마디만 하면 네가 어떻게 세상에 나설 수 있겠느냐.
너는 네 자신이 최 학사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느냐.”하니, 최가 발칵 성내어,
“함부로 남을 욕하여 부모에게까지 욕이 미치게 하니, 너는 나라의 법도 두렵지 않느냐.
네가 나를 누구의 아들이라 하려 하느냐.”하였다. 이(李)가 이에 천천히 말하기를,
“나는 너를 여불위(呂不韋 진시황(秦始皇)의 아버지라 일컫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하자, 최는 머리를 숙이고 허허 웃을 뿐이었다.
정통(鄭通)이란 자는 초계(草溪) 사람이다. 나주(羅州) 서기(書記)로 있을 때 관기(官妓) 소매향(小梅香)을 사랑하여 아이까지 하나 낳았는데, 전임(轉任)되어 서울로 가게 되자, 그는 맥이 풀려서 가면서도 가는 곳을 모르고 말하다가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도중에 한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마침 한 중이 좋은 말을 타고 와 그 집에 이르렀다. 중이 좌정하기도 전에 정통은 밖으로 나와 중이 타고 온 말을 훔쳐 타고 나주(羅州)를 향하여 3일을 달려가서 밤에 기생의 집에 들어가니 기생은 그 어미와 함께 등촉을 밝히고 앉아서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기실공(記室公)이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하였다. 이에 정통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울며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하였다.
통은 며칠 동안 머물다가 오래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말에다 기생을 태우고, 자신은 아이를 업고 뒤따라 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통의 아내는 남편을 잃어버리고 또 땔나무와 식량의 걱정을 이겨낼 수 없어 종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가는 판이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보니 한 부인이 말을 타고 아이를 업은 사내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종이 말하기를,
“저기 오는 분이 우리 나으리 같습니다.”
하니, 아내가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아무리 바람이 났다지만 이 지경에까지야 이르렀겠느냐.”하였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졌을 때에 보니 과연 통이었다. 아내가 말하기를,
“쯧쯧 딱하기도 하오. 늙은이가 어쩌다가 그 꼴이 되었소.”
하니, 통이 아내를 쳐다보고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장난을 해보는 것뿐이오.”
하였다.
봉익대부(奉翊大夫) 김여맹(金汝孟)은 성질이 나약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는 전염병을 피하여 당분간 어떤 시골 집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 이웃에 죄를 지은 자가 있어 관리가 그 죄인을 추적하다가, 김공(金公)이 우거하고 있는 처소에 이르러, 김공이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으나 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힐책하였는데도 응답하지 않으니 그 관리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의 거처가 이처럼 누추하니 네 신분을 알 만하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네가 옥에 가서야 변명할 테냐.”
하면서, 멱살을 잡고 길바닥으로 끌어냈다. 종이 다른 곳에서 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그 까닭을 요량하여 알아차리고, 관리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으리는 김 평장(金平章)의 아드님이요 김 추밀(金樞密)의 사위로서 벼슬 또한 3품입니다.
오늘 아침에 관의(官醫)가 군신약(君臣藥)을 지어서 복용하게 하고,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욕을 보이는 것이오.”하니, 관리들은 놓아 주고 절하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봉익대부(奉翊大夫) 홍순(洪順)은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의 시호)의 아들이다. 그는 항상 상서(尙書) 이순(李淳)과 내기 바둑을 두었는데, 이(李)가 골동품(骨董品)과 서화(書畫)를 걸었다가 거의 다 빼앗겼다. 마지막에는 보물로 여기는 현학금(玄鶴琴)을 걸고 두었는데, 홍(洪)이 또 그를 이겨 얻었다.
이(李)는 거문고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거문고는 우리 집의 청전(靑氈)으로서 거의 2백 년이나 전해 내려온 것일세. 물건이 오래되어 신(神)이 붙어 있으니, 그대는 잘 간수하게.”하였으니, 이(李)는 특히 홍(洪)의 성품이 겁내고 꺼리는 것이 많음을 알고 농담한 것이다.
하루는 밤이 몹시 추워서 거문고 줄이 얼어 끊어지면서 쨍하는 소리가 났다. 홍은 신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홍은 급히 등불을 밝히고 복숭아나무 회초리로 어지러이 치니 거문고는 치면 칠수록 더욱 소리를 냈고 홍은 더욱 의혹되어 종을 시켜 밤새도록 지키게 하였다.
날이 새자 홍은 종 연수(延壽)란 자에게 거문고를 들려 이씨 집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이(李)는 일찍 찾아온 것을 괴이하게 여기다가 가지고 온 거문고에 어지러이 맞은 흔적을 보고 속여 말하기를,
“내가 이 거문고 때문에 오랫동안 걱정하여 여러 번 깨뜨려버리려 하였으나, 또 신의 화가 있을까 두려워 깨뜨리지 못하던 차에 다행하게도 공에게 넘기게 되었는데, 어째서 돌려준단 말인가.”하고,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자 홍은 몹시 난처하여, 전에 내기하여 얻은 서화와 골동품 등을 죄다 곁들여서 거문고에 딸려보내니, 이(李)는 마지못한 체하고 받았다. 그러나 홍은 이에게 속은 것을 모르고 거문고를 돌려준 것만 다행하게 생각하였다.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은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榜)에서 첫째 자리는 문량공이 차지하였다. 문량공이 늙었을 때 악성 종기로 어깨와 목을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의원은 손을 쓸 수 없었는데, 묘원(妙圓)이란 중이,
“이 종기는 뼈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뼈가 반은 썩었을 것인데, 그 썩은 뼈를 긁어내지 아니하면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뼈를 긁어낸다면 그 아픔을 참아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문량공이,
“죽기는 마찬가지니 시험해 보라.”
하였다. 중은 드디어 예리한 칼로 살을 베어내니 과연 뼈가 썩어 있었다. 그 썩은 뼈를 긁어내고 약을 바르니 문량공은 기절하여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문영공이 이 말을 듣고 문병을 가서 문에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문량공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공이 나를 슬퍼함이 이와 같을 줄 몰랐다. 어찌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슬퍼하는가.”
하였다.
이에 문영공이 말하기를,
“허, 이게 무슨 말인가. 40년 동안 동년급제(同年及第)로서의 교분(交分)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문량공이,
“내가 죽으면 같은 방 안에서는 공(公)을 앞서는 자가 없기 때문일세.”
하였다. 문영공이 눈물을 거두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죽지는 않겠다.”
하고 돌아갔다.
낭중(郞中) 김서정(金瑞廷)은 그 뜻이 기이하고 예스러운 것을 숭상하였는데, 그 호를 우계(愚溪)라 하였다. 그의 자씨(姊氏)인 최 찬성(崔贊成)의 부인이 사람을 시켜 오라고 청하였다. 가고는 싶었지만 말이 없었는데, 마침 나무꾼이 소를 몰고 왔다. 드디어 그 소에다 안장을 차려 타고 가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장꾼처럼 많았다. 그러나 김군은 개의하지 않았다.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술주정을 부리면서 거짓 미친 체하였다. 일찍이 광명사(廣明寺)를 지나는데, 중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다 도망하였다. 졸옹이 선어(禪語)로 희롱하여 그 벽에 거사(居士)라고 써놓았다. 하루는 손님을 전송하기 위하여 광명사를 지나다가 한 승방에 들어가니, 요주(寮主)는 담을 넘어 달아나고 시자(侍者)만 있었다.
거사가 시자를 세 번 찾았으나 시자는 말이 없었다. 그후 어떤 사람이 공암(空巖)에게 말하니, 공암이,
“만약 내가 시자(侍者)였다면 그때에 곧 술을 받아다 거사에게 주어 보았을 것이다.”하였다.
[註解]
[주01]경인년ㆍ계사년 : 경인년은 고려 의종(毅宗) 24년(1170) 8월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일으켜 문신(文臣)을 대
량 학살하고 집권한 일을 말하며, 계사년은 고려 명종(明宗) 3년(1173) 8월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군
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치고 전왕(前王)을 복위(復位)시키려다 실패하고 포살(捕殺)된 일과, 그해 10월에 이의민(李義旼)이 전왕
을 경주(慶州)서 죽인 일을 말하는데, 통틀어 무인(武人)이 집권(執權)한 것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김신호 (공역) ┃ 1980
익재집
역옹패설 후집
역옹패설 후집 서
후집 1
후집 2
역옹패설 후집 서(櫟翁稗說後集序)
어떤 사람이 역옹(櫟翁)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전집(前集) 기술(記述)에는 조종(祖宗) 세계(世系)의 원근을 서술(敍述)하고 이름난 공경(公卿)의 언행(言行)도 비교적 많이 실었는데 도리어 골계(滑稽)로 끝맺었으며, 후집(後集)의 기술에는 경사(經史)에 대하여 강론한 것은 얼마 안 되고 나머지는 모두 장구(章句)를 다듬어 꾸민 것뿐이니, 어찌 특이한 조수(操守)가 그렇게 없는가. 이것이 어찌 품행이 단정한 선비로서 해야 할 일이겠는가.”
하므로, 답하기를,
“둥둥 북을 치는 격고장(擊鼓章)도 국풍(國風)에 들어 있고 너울너울 춤추는 빈지초연장(賓之初筵章)도 소아(小雅)에 편입되어 있는데, 더구나 이 기술(記述)은 본디 무료하고 답답함을 달래기 위하여 붓가는 대로 기록한 것이니, 실없는 이야기가 있은들 뭐 괴이할 것이 있는가. 부자(夫子: 공자)도 ‘박혁(博奕: 쌍륙과 바둑)놀음이 아무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으니, 장구를 다듬어 꾸미는 것이 박혁놀음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또 내용이 이렇지 않다면 패설(稗說)이라 이름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였다.
중사『仲思, 이제현(李齊賢)의 자(字)』는 서(序)한다.
[註解]
[주01]격고장(擊鼓章) : 이는 위(衛) 나라의 주우(州吁)가 환공(桓公)을 시해(弑害)하고 자립하여 송(宋)ㆍ위(衛)ㆍ진(陳)ㆍ채(蔡)가 연
합, 정(鄭) 나라를 칠 적에 여기에 종군(從軍)하던 위 나라 사람이 주우를 원망하는 시로, 옛날 결혼할 적에 아내와 함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같이 살자던 약속이 이제는 허사가 되겠다고 탄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격고는 군대들이 훈련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 邶風 擊鼓》
[주02]빈지초연장(賓之初筵章) : 이는 위 무공(衛武公)이 술에 탐닉했다가 뒤에 뉘우쳐 자신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시로, 술자리를 처
음 벌였을 적에는 점잖다가 술이 취할수록 예도(禮度)를 잃어 의관(衣冠)의 매무새가 흩어지는 줄도 모르고 춤추면서 벌이는 추태
를 서술한 것이다. 《詩經 小雅 賓之初筵》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김신호 (공역) ┃ 1980
후집 1
역옹패설 후집 1(櫟翁稗說後集一)
역옹패설 후집 1(櫟翁稗說後集一)
김 밀직(金密直) 승용(承用) 이 나에게 이르기를,
“《좌씨전(左氏傳)》에 ‘그대의 나라에서 포모(包茅: 다발로 묶은 띠)를 바쳐야 하는데 바치지 않았으므로 축주(縮酒)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축(縮) 자는 무슨 뜻입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두원개『杜元凱: 원개는 두예(杜預)의 자』의 주(註)에 ‘띠를 묶어서 이것으로 술을 거르는 것이다.’ 하였소.”
하니, 김공(金公)이 인하여 말하기를,
“과거 영광군(靈光郡)에 있을 적에 띠를 엮어 술을 거르는 것을 보았는데 술이 지극히 맑아서 견직물(絹織物)의 자루에 넣어 거른 것보다 더 좋았습니다.”
하였다.
내가 집 사람들을 시켜 시험하여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을 상고하니 ‘술을 거르는 데는 띠를 쓴다.’ 했는데, 정씨(鄭氏)는 ‘술을 거를 때 띠를 쓰는 것은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 설(說)이 두원개의 주(註)보다 더욱 자세하다.
그런데 세상에서 술을 거를 적에 견직물 자루를 쓰고 띠를 쓰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신(神)에게 제향 올릴 때 쓰는 것으로 사람들이 마시기 위한 것에 쓸 수 없어서인가. 소동파(蘇東坡)의 시(詩)에 “모시(茅柴)로 거른다.” 한 것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황경『皇慶: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초,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이 연경(燕京)에 가 있을 적에 시(詩)를 바친 자가 있었는데, 지(支) 자 운통(韻統)의 치(差) 자로 압운(押韻)하였다. 문사(文士)들이 다투어 그 운자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는데 모두 치(差) 자를 참치(參差: 고르지 않은 모양)라고 달았으나, 두 사람만이 유독 다르게 달았다.
한 사람은 치치(差差: 고르지 않은 모양)라 하였는데, 이는 한공『韓公: 한유(韓愈)』의 시(詩) ‘칼날의 흰 빛이 가지런하지 않다.[鋒刃白差差]’를 인용한 것이고, 한 사람은 옥치(玉差)라고 달았으니, 이는 송옥(宋玉)과 경치(景差)를 말한 것이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송본(宋本) 압운서(押韻書)에는 평성(平聲)인 지(支)자 운통의 치(差)자 아래 주(注)하기를 ‘경치(景差)는 인명(人名)이다.’ 하였으므로, 이를 취하여 음(音)이 치임을 입증하였으나, 학사(學士) 이의(李顗)는 말하기를,
“송본 압운서는 소략하여 전거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하였는데, 뒤에 《한서(漢書)》의 고금인명표(古今人名表)를 보니 경치의 치는 그 음이 도하반(徒何反)이라 되어 있었다
《급총서(汲冢書)》는 육경(六經)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으며, 순(舜)ㆍ우(禹)ㆍ문왕(文王)에게 모두 큰 악명(惡名)을 씌웠으니 이는 더욱 해괴한 일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조만『曹瞞: 조조(曹操)』과 같은 자가 스스로 악행이 많음을 알고서 ‘당세에는 누구도 두려울 것이 없으나 오직 두려운 것은 후세의 공론이다.’ 하고, 이에 대성인(大聖人)을 무함(誣陷)하여 자기에 대한 비방을 분산시키고자 땅을 파고 무함한 책을 묻어놓은 다음, 다행히 그 책이 후세에 발굴되어 세상 사람을 기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칠을 올린 대쪽의 자획(字畫)이 예스러움만 보고서 믿으니, 이 또한 잘못이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병진년(1316, 충숙왕 3)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아미산(峨眉山)으로 제사지내러 갔었는데, 조(趙)ㆍ위(魏)ㆍ주(周)ㆍ진(秦)의 옛 지역을 거처 기산(岐山) 남쪽에 이르렀으며, 다시 대산관(大散關)을 넘고 포성역(褒城驛)을 지나서 잔도『棧道: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 길』를 건너 검문(劍門)으로 들어가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여기서 또 뱃길로 7일을 가서야 비로소 이른바 아미산에 도착하였다. 인하여 이 적선『李謫仙: 이태백(李太白)』의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구(詩句)가 기억났는데,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태백산에 조도(鳥道)가 있으니 / 西當太白有鳥道
조도라면 아미산 정상까지 횡단할 수 있으리 / 可以橫絶峨眉巓
태백산은 함양(咸陽) 서남쪽에 있고 아미산은 성도(成都) 동북쪽에 있으니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함양으로부터 수천 리를 가야 성도에 이르는데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므로 그 길이 한결같지 않으며, 또 성도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 6백 여 리를 간 뒤에야 아미산에 이르기 때문이다.
비록 산천(山川)을 따라 도로가 우회(迂廻)하고 있으나 그 지세(地勢)를 헤아려보면 두 산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으므로 사람은 진실로 왕래할 수 없지만 조도라면 횡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백거이(白居易)의 호』의 장한가(長恨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쓸쓸한 찬바람에 누런 먼지 흩날리는데 / 黃塵散漫風蕭索
구름다리 얼기설기 검각에 오르니 / 雲棧縈紆登劍閣
아미산 아래엔 행인(行人)도 적고 / 峨眉山下少人行
여린 햇빛에 깃발도 광채를 잃네 / 旌旗無光日色薄
이는 당 명황(唐明皇)이 성도로 행행(行幸)할 적에 거친 곳을 말한 것이다. 만일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미산은 당연히 검문(劍門)과 성도(成都)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보건대 그렇지 않았다. 뒤에 《시화총귀(詩話總龜)》를 보고서 옛사람도 이에 대하여 논란하였음을 알았다. 아마도 백낙천은 서촉(西蜀)에 가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계해년(1323, 충숙왕 10)에 내가 임조(臨洮)에 갈 적에 가는 길이 건주(乾州)를 지나게 되었다.
당 무후(唐武后)의 묘(墓)가 황화역(皇華驛) 서북쪽에 있었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아파릉(阿婆陵)이라 불렀다.
내가 시(詩) 한 편을 남겼는데 그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구양영숙『歐陽永叔: 영숙은 구양수(歐陽脩)의 자』이 무후를 당기(唐紀)에 넣은 것은 대체로 반고(班固)ㆍ사마천(司馬遷)의 오류를 답습하여 더욱 잘못한 일이다.
여씨『呂氏: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는 비록 천하를 통제하였으나 그래도 어린 아들을 황제라는 이름으로 세워 한(漢)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였는데, 무후는 이씨(李氏)를 억누르고 무씨(武氏)를 높였고 당(唐)이라는 국호를 고쳐 주(周)라 일컬었으며 종사(宗社)를 세우고 연호(年號)를 제정하였으니 흉역(凶逆)이 더할 나위 없다.
당연히 잘못을 드러내어 바루어서 만세(萬世)에 보여야 할 터인데, 도리어 높여서야 되겠는가. 당기(唐紀)라 일컬으면서 주(周)의 연호를 쓴 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기록하는 자가 반드시 먼저 연대(年代)를 표시하고 다음으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조강(條綱)을 문란시키지 않으려는 때문이다.
그대의 말대로 한다면 중종(中宗)이 이미 폐위(廢位)된 뒤에는 그 연대를 빼버리고 쓰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천하의 일을 장차 어디에 붙여 기록하여야 하겠는가.’ 하므로, 이르기를 ‘노 소공(魯昭公)이 계씨(季氏)에게 쫓겨 건후『乾侯: 지명(地名』에 가서 살 적에도 《춘추(春秋)》에 소공의 연대를 적지 않은 때가 없었으니, 방릉『房陵: 중종(中宗)』의 폐위가 이와 무엇이 다른가.
사서(史書)를 만드는 데 있어 《춘추》를 본받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했다.”
하였으며, 그 시(詩)는 대략 다음과 같다.
구공이 진실로 명유이기는 하나 / 歐公信名儒
필삭에 잘못을 범하였도다 / 筆削未免失
어찌하여 주 나라의 찌꺼기로 / 那將周餘分
당 나라의 일월을 더럽혔는가 / 黷我唐日月
뒤에 회암『晦庵: 주희(朱熹)의 호(號)』의 감우(感遇) 시를 열람하였는데 그 시에,
어찌하여 구양자는 / 如何歐陽子
사필(史筆)을 잡고서 지공한 사실을 흐렸는가 / 執筆迷至公
하였다.
나는 책을 어루만지면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후생의 천루(淺陋)한 학문으로 이에 대하여 논한 것이 주자(朱子)의 생각과 다름이 없을 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하였다. 범씨(范氏)의 《당감(唐鑑)》에도 이런 의논이 있는 것을 보고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터뜨렸고 따라서 스스로 이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 적음을 후회하였다.
순자(荀子)는 매양 자궁(子弓)을 부자『夫子: 공자(孔子)』와 동격으로 치켜세워 중니(仲尼)니 자궁이니 하였다.
당(唐) 나라 양경(楊倞)이 말하기를
“자궁(子弓)은 중궁(仲弓)이고, 자(子)자를 붙인 것은 그가 자기의 스승임을 드러낸 말이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여 보건대, 순경(荀卿: 순자)은 맹자(孟子)보다 뒤에 태어났고 중궁은 자사(子思)보다 먼저 태어났다. 맹자도 자사에게 직접 배우지 못하고 자사의 문인(門人)에게 수업(受業)하였는데 순경이 어떻게 중궁을 사사(師事)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자궁이라는 사람이 응당 따로 또 한 사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궁의 공덕(功德)이 세상에 전하여지지 않았으니 과연 부자와 짝할 만한 사람이었는지 의심스럽다. 그 제자인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性惡說) 하나만 보더라도 그 연원(淵源)을 알 수 있거늘, 하물며 다시 전수받은 사람이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한 이사(李斯)였음에랴!
《역경(易經)》 건괘(乾卦)의 구삼『九三: 밑에서 위로 세어 세 번째의 효(爻)』에만 용(龍)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육효(六爻)를 둘씩 셋으로 나누어 삼재『三才: 천(天)ㆍ지(地)ㆍ인(人)』에 배정하는데, 첫째와 둘째 효는 땅을 뜻하고 셋째와 넷째 효는 사람을 뜻하고 다섯째와 여섯째 효는 하늘을 뜻한다.
이미 연못을 떠났으나 아직 하늘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니, 용의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한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삼(九三)에는 바로 인사(人事)를 말하고 용의 상(象)을 취하지 않은 것이다. 구사(九四)로 올라가면 하늘에 가까워져 그 변화를 신기하게 할 수 있으므로 ‘혹 못에 있으면서 뛴다.’ 하였다.
구이(九二)에 ‘밭[田]에 있다.’ 한 것은 못을 떠난 것이 아닌가. 밭은 물가를 말하는 것으로 용이 돌아다니는 곳을 이름이니, 구름과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을 천구(天衢)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역경》 곤괘(坤卦) 상륙(上六)에,
“용(龍)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르다.[玄黃]”
한 데 대하여 해설하는 사람은,
“음(陰)과 양(陽)이 함께 상(傷)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생각건대, 여기에서 용이라고 한 것은 양(陽)이 아니고 음(陰)이면서 스스로 양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음(陰)이 이미 극성하여 스스로 양인가 의심하므로 그 피가 검고 누르다고 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바야흐로 음이 양과 맞서면 반드시 음이 상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 것인데, 해설하는 자가 어째서 갑자기 양도 함께 상한다고 말하였는가.
암말[牝馬]의 상(象)이 유순(柔順)하다고 이정(利貞)한 곤덕(坤德)을 다 포함할 수 있겠는가. 《역경》의 저자(著者)가 사람이 알기 쉬운 것을 취택하여 상(象)을 만든 것뿐이다. 아무리 헤아릴 수 없는 신화(神化)를 부리는 용이라 할지라도 건도(乾道)를 다 포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경(禮經)》 단궁편(檀弓篇)에,
“공씨(孔氏)가 출모『出母: 아버지에게 쫓겨난 생모(生母)』의 상(喪)에 복(服)을 입지 않는 것은 자사『子思: 공급(孔伋)』로부터 시작되었다.”하고, 자사가,
“급(伋)의 처(妻)가 된 자는 백『白: 공급의 아들 자상(子上)』의 어머니가 된다.”하였다.
이는 아마도 계모(繼母)로서 출모(出母)가 된 자의 경우를 말한 것이요, 생모(生母)는 아닐 것이다. 유자후『柳子厚: 자후는 유종원(柳宗元)의 자』의 남악비(南岳碑)에, “가섭(迦葉)에서 24세인 사자(師子)에 이르러 갈라져서 달마(達摩)가 되었고 달마에서 5세인 홍인(弘忍)에 이르러 더욱 갈라져서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전등록(傳燈錄)》을 상고하여 보매, 사자는 파사사다(婆舍斯多)에게 전하고 파사사다는 불여밀다(不如密多)에게 전하고 불여밀다는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전하고 반야다라는 보리달마(菩提達摩)에게 전하였으니, 어떻게 사자에 이르러 분리되어 달마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자의 방출(傍出)로 달마달(達摩達)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유자후가 아마도 이 달마달을 보리달마라고 생각한 것 같다.
북원(北原)의 흥법사비(興法寺碑)는 우리 태조『太祖: 왕건(王建)』가 비문(碑文)을 짓고 최광윤(崔光胤)이 당 태종황제(唐太宗皇帝)의 글씨를 모아 돌에 모각(模刻: 본을 떠서 새기는 것)한 것인데, 사의(辭義)가 웅장하고 깊고 거룩하고 아름다워 현규『玄圭: 검은 빛의 홀(笏)』에 적석(赤舃: 바닥이 두 겹으로 된 붉은 신)을 신고 조정에서 읍양(揖讓)하는 것 같으며, 크고 작은 글자와 해서(楷書)와 행서(行書)가 서로 알맞게 배열되어 난새와 봉새가 물 위에 떠서 초연(超然)한 기상을 머금고 있는 듯하니, 참으로 천하의 보물이라 하겠다.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에 예종(睿宗: 고려 제16대 임금)이 지은 당률사운시(唐律四韻詩) 한 편을 새긴 비석이 있는데, 그 뒷면에 태자(太子) 아무가 썼다 하였으니, 아무는 인종(仁宗: 고려 제17대 임금)의 휘『諱: 해(楷)』이다.
이때에 왕과 태자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을 닦아 훌륭한 선비를 연방(延訪)하였으므로,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ㆍ이오(李䫨)ㆍ이예(李預)ㆍ박호(朴浩)ㆍ김연(金緣)ㆍ김부일(金富佾)ㆍ김부식(金富軾)ㆍ김부의(金富儀)ㆍ홍관(洪灌)ㆍ인빈(印份)ㆍ권적(權適)ㆍ윤언이(尹彦頤)ㆍ이지저(李之氐)ㆍ최유청(崔惟淸)ㆍ정지상(鄭知常)ㆍ곽동순(郭東珣)ㆍ임완(林完)ㆍ호종단(胡宗旦) 등의 현사(賢士)와 명신(名臣)이 조정에 포열(布列)되어 있으면서, 토론하고 윤색(潤色)하여 부지런히 힘썼으므로 중화(中華)의 풍도가 있었으니 후세에서는 따를 수 없다.
명왕『明王: 명종(明宗)』이 손수 필사(筆寫)한 《전한서(前漢書)》의 기(紀)ㆍ지(志)ㆍ표(表)ㆍ전(傳) 99편의 제목을 전일 상서(尙書) 유인수(柳仁脩)의 집에서 보았다. 명왕은 만기(萬機)를 보살피는 여가에도 전적(典籍)에 마음을 두었으며, 필찰(筆札)의 오묘함 또한 옛사람에 못지 않았으니 아무리 찬탄하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인하여 양정수(楊廷秀)가, 명종이 덕수궁(德壽宮)에다 써놓은 《한서(漢書)》 열전찬(列傳贊)을 보고 지은 시(詩)가 기억났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소신은 외람되이 선비의 옷차림으로 / 小臣濫巾縫掖行
효경 한 권도 아직 필사하지 못하였으니 / 手抄孝經未輟章
어찌 일찍이 한사(漢史) 쓸 마음인들 가졌겠는가 / 何曾把筆望史漢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읽으니 땀이 옷을 적시네 / 再拜伏讀汗透裳
이 시는 사람의 속마음을 잘 묘사하였다고 하겠다.
옛사람의 시(詩)는 눈앞의 경물(景物)을 묘사하였지만 의미는 말 밖에 있으므로, 말은 끝이 났지만 맛은 끝이 없다.
도팽택『陶彭澤: 도연명(陶淵明)』이, 동쪽 울타리 가에서 국화를 꺾다가 / 採菊東籬下
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본다 / 悠然見南山
한 시와 진간재『陳簡齋: 간재는 진여의(陳與義)의 호』의, 문 여니 비 온 줄 알겠는 것이 / 開門知有雨
늙은나무 반쯤 젖어 있네 / 老樹半身濕
한 시가 이런 유(類)이다. 나는 유독,
못 둑에 봄풀이 돋았구나 / 池塘生春草
한 시를 사랑하는데, 여기에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내가 여항(餘杭)에 나그네로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화분에 난초를 심어 보내 주어서 책상 위에 놓아 두었었다.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세속의 일을 수작할 때에는
그 향기를 느낄 수 없었으나, 밝은 달이 창을 비추는 깊은 밤에
고요히 앉아 있으면 난초의 향기가 코를 찔렀는데,
맑고 그윽한 그 향기가 못내 사랑스러웠으나 말로는 형언할 수 없었다.
나는 흔연(欣然)히 혼자 말하기를,
“이 즐거움은 혜련(惠連)을 만나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의 시구(詩句)를 얻은 것과 같다.”
하였다.
두소릉『杜少陵 : 소릉은 두보(杜甫)의 호 』의, 지역이 편소하니 강물이 촉 지방을 흔들고 / 地偏江動蜀
하늘이 머니 푸른 나무가 진 지방에 떠 있구나 / 天遠樹浮秦
한 시구(詩句)가 있는데, 내가 일찍이 진(秦)ㆍ촉(蜀) 지방을 유람하였다.
촉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양자강(揚子江) 물이 민산(岷山)에서 시작하여 성도(成都) 남쪽을 거쳐 동으로 삼협(三峽)을 향하여 흐르는데 물결의 광채와 산 그림자가 한데 어우러져 흔들렸다. 진중(秦中)은 지방이 천 리인데 지형이 손바닥처럼 평평하였으며, 장안성(長安城) 남쪽에서 삼면(三面)을 바라보면 푸른 나무가 무성하고 그 밑의 들빛이 하늘과 맞닿아 마치 푸른 나무숲이 큰 물 위에 떠 있는 듯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두소릉의 이 시구가 진과 촉 지방의 신기하고도 절묘한 것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경치에 연유하였음을 알았다.
사경쯤 산 위에 달 뜨니 / 西更山吐月
샐녘 물빛이 누대를 비추네 / 殘夜水明樓
진세(塵世)에 큰 거울 열렸으니 / 塵匣元開鏡
풍렴이 저절로 걷혀지네 / 風簾自上鉤
이 시(詩)에 대하여 졸옹(拙翁: 최해의 호) 최해(崔瀣)는,
“사람들은 뒤의 두 구가 모두 달을 말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진갑원개경(塵匣元開鏡)은 물빛이 누대를 비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는,
산협은 푸른 강을 끼고 솟아 있고 / 峽束蒼江起
바위는 고목에 둘러싸였네 / 巖排古樹圓
구름 위로 치솟아 초 나라의 기운을 눌렀고 / 拂雲埋楚氣
바다로 달리면서 오 나라의 하늘에 차네 / 朝海蹴吳天
한 기부영회(夔府詠懷) 시에서 구름 위로 치솟는다[拂雲]는 것은 고수(古樹)를 뜻하고 바다로 달리면서[朝海]라는 말은 창강(蒼江)을 뜻한 것과 같으니, 또한 시가(詩家)의 한 격식(格式)이다.”
하였다.
위언(偉偃)이 그린 소나무 그림에 대하여 희롱하여 지은 시에서는 그를 희롱하는 말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고소(姑蘇) 주덕윤(朱德潤)은 그림 솜씨가 매우 절묘하였는데, 나에게 말하기를,
“무릇 송백(松柏)을 그림에 있어 마디져 꾸불꾸불한 것과 크고 작은 쌓인 바윗돌은 비교적 그리기 쉬우나, 하늘을 향하여 우뚝 치솟은 모양은 가장 그리기 어렵다. 이 시의 뒤 네 구인,
내게 한 필의 좋은 동쪽 나라 비단이 있으니 / 我有一匹好東絹
소중하기 채색비단에 못지않다네 / 重之不減錦繡段
이미 혼란한 광택 닦아버리게 했으니 / 已今拂拭光凌亂
그대 붓 휘둘러 곧은 줄기를 그려 주게나 / 請君放筆爲直幹
한 것은 바로 언(偃)을 희롱한 것이다.”
하였다.
설 사성(薛司成) 문우(文遇) 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태백(李太白)의 청평사(淸平詞)에,
한 가지 고운 꽃에 향기 머금은 이슬 맺혔는데 / 一枝仙艶露凝香
무산의 사랑 이야기 부질없이 남의 애를 끊는구나 / 雲雨巫山枉斷腸
묻노니 한 나라 궁중에서 누가 이와 같았는가 / 且問漢宮誰得似
가련쿠나 비연이 화장에만 의지한 것이 / 可憐飛燕倚新粧
하였는데, 의(倚)의 뜻은 의지한다는 것이니 조후(趙后 이름은 비연(飛燕))가 한(漢) 나라의 궁중에서 총애를 독차지한 것은 화장에만 의지하였을 뿐이라는 말이고, 가련(可憐)의 뜻은 조소(嘲笑)하는 말이다.”
유 빈객(劉賓客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의 금릉회고(金陵懷古) 시에,
야성의 물가엔 조수(潮水)가 찼고 / 潮滿冶城渚
정로정에는 햇살이 비꼈네 / 日斜征虜亭
채주엔 풀빛이 새롭고 / 蔡州新草綠
막부엔 예처럼 푸른 연기 이네 / 幕府舊煙靑
흥폐는 인사에 말미암는 것인데 / 興廢由人事
산천은 덧없이 예대로구나 / 山川空地形
후정화 한 곡조가 / 後庭花一曲
애절하여 들을 수 없네 / 哀怨不堪聽
하였는데, 이 시가 이른바 네 사람이 용(龍)의 턱을 더듬어서 몽득(夢得 유우석의 호)이 여의주(如意珠)를 얻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시화(詩話)》에는 “왕준(王濬)이 누선(樓船)을 타고 익주(益州)로 내려간다.[王濬樓船下益州]”를 몽득(夢得)이 얻은 여의주라 하였다.
몽득(夢得)의 금릉오제(金陵五題) 가운데,
산은 첩첩이 고국을 둘러 있고 / 山圍故國周遭在
조수는 빈 성을 치다가 쓸쓸히 물러가네 / 潮打空城寂寞回
회수 동쪽에 뜬 옛 달은 / 淮水東邊舊時月
깊은 밤 여장 넘어 비쳐오네 / 夜深還過女墻來
주작교 가에는 들꽃이 피었고 / 朱雀橋邊野草花
오의항 입구엔 석양이 비꼈네 / 烏衣巷口夕陽斜
옛날 왕씨 사씨의 당 앞에 날던 제비 / 舊時王謝堂前燕
무심히 백성들의 집으로 날아드네 / 飛入尋常百姓家
살아 설법할 적엔 귀신도 듣더니 / 生公說法鬼神聽
죽은 뒤 빈 집엔 밤인데도 문이 열렸네 / 身後空堂夜不扃
예좌는 적막한 채 티끌만 쌓였으니 / 猊座寂寥塵漠漠
중정의 달빛이 정경에 어울리네 / 一方明月可中庭
한 이 3편(篇)은 모두 가작(佳作)이다. 백낙천(白樂天)은 유독 조타공성적막회(潮打空城寂寞回)라는 구를 좋아하여 머리를 흔들면서 읊다가,
“이 시를 읊고서야 내가 후세의 사인(詞人)들은 다시 시문(詩文)을 이렇게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일찍이 제3편을 써서 걸어놓았더니 어떤 이가,
“어째서 ‘밝은 달빛이 중정에 가득하다.[明月滿中庭]’ 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으나 동파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이 시(詩)에 대하여 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자)와 자후(子厚 유종원(柳宗元)의 자)의 글은 고금(古今)의 사람들이 서로 강적(强敵)이라 일컬어오고 있는데, 한유와 유종원의 글에는 논(論)ㆍ문(文)ㆍ서(書)ㆍ의(議)ㆍ서(序)ㆍ전(傳)ㆍ비(碑) 등이 갖추 있다. 한유의 송문창서(送文暢序)ㆍ오자왕승복전(圬者王承福傳)ㆍ서장중승전후(書張中丞傳後)ㆍ평회서비(平淮西碑)와 유종원의 복수의(復讐議)ㆍ재인전(梓人傳)ㆍ수양묘비(睢陽廟碑)ㆍ평회이아(平淮夷雅) 등의 글을 종류대로 편찬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 반복하여 읽으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굴원(屈原)의 천문(天問 《초사(楚辭)》의 편명(篇名))에 대하여 유자후(柳子厚)가 그 문(問)에 따라 답(答)한 글을 천대(天對)라고 하는데, 모두 글이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 집에 주회암(朱晦庵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이 이에 대하여 주해(注解)한 책이 있는데, 이를 읽으면 이른바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풀리고 즐겁도록 문리(文理)가 순하여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래 학사(學士) 민상의(閔相義)의 집에서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가 여기에 대하여 주(注)를 낸 것도 보았는데 더욱 이해하기 쉬웠다. 위의 두 선생과 왕일(王逸) 등 세 사람의 설을 엮어서 집해(集解)를 만든다면 또한 배우는 자들에게 한 가지 다행한 일이 될 것이다.
구양영숙(歐陽永叔 영숙은 구양수(歐陽脩)의 자)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나의 글 여산고(廬山高)는 누구도 그만큼 잘 지을 수 없고 태백(太白 이백(李白))이라야 지을 수 있으며, 명비후편(明妃後篇)은 태백으로서도 지을 수 없고 자미(子美 두보(杜甫))라야 지을 수 있으며, 명비전편(明妃前篇)은 자미로서도 지을 수 없고 나라야 지을 수 있다.”
하였다 하는데, 이는 후세의 호사자(好事者)들이 여산고의 음절(音節)이 태백의 시와 비슷하고 명비후편의 음절이 자미의 시와 비슷한 것을 보고서 함부로 만들어낸 말이다.
소노천(蘇老泉 노천은 소순(蘇洵)의 호)이 구양공(歐陽公)에게 올린 편지에,
“ …… 집사(執事)의 문장은 맹자(孟子)나 한자(韓子 한유(韓愈))의 문장이 아니요 구양자(歐陽子)의 문장입니다.”
하였는데, 시(詩) 역시 그러하다. 가령 이백(李白)ㆍ두보(杜甫)로 하여금 구공(歐公)과 같은 시를 짓게 하여도 반드시 똑같게 짓지는 못할 것이며, 구공으로 하여금 이백ㆍ두보와 같은 시를 짓게 하여 지었다 하더라도, 우맹(優孟)이 손바닥을 치면서 담소(談笑)하는 것과 같으리니 이를 진짜 손오(孫敖)라 할 수 있겠는가.
형공(荊公 왕안석(王安石))의 시(詩)로서 아동들이 학습하고 있는 《송현집(宋賢集)》 속에 들어 있는 10여 수(首)는 모두 절묘하다.
해 기우니 섬돌 그림자 오동나무로 옮겨가고 / 日西階影轉梧桐
발 걷으니 푸른 산이 눈앞을 가로막네 / 簾捲靑山簟半空
남쪽 시내에 석양이 비치니 놀이 절로 일고 / 南澗夕陽煙自起
서산은 아득하여 보일 듯 말 듯하구나 / 西山漠漠有無中
동강에 나뭇잎 지고 물은 질펀한데 / 東江木落水分洪
시든 갈대밭의 조는 오리는 운애(雲靄)에 묻혀 있네 / 睡鴨殘蘆掩靄中
북쪽 사람 고향에 돌아가 이 경치 못 잊어 / 歸去北人多憶此
집집마다 병풍에 그림 그려 놓았네 / 每家圖畫上屛風
물빛과 산 기운 푸르고 푸른데 / 水光山氣碧浮浮
해질녘 돌아가려다 잠깐 또 머무네 / 落日將還又小留
이로부터 이 경치 길이 꿈에 뵈리니 / 從此定應長入夢
꿈속에서 옛친구와 놀리라 / 夢中還與故人遊
금화로에 향불 꺼지고 누수(漏水) 소리 가냘픈데 / 金爐香盡漏聲殘
산들산들 부는 바람 으스스 춥구나 / 剪剪輕風陣陣寒
봄 경치 마음 괴롭혀 잠 못 이루는데 / 春色惱人眠不得
달 기울어 꽃 그림자 난간 위로 올라 있네 / 月移花影上欄干
강 어귀에 돛 내리니 달은 으스름한데 / 落帆江口月黃昏
목롯집에 등이 없으니 문 닫으려 하네 / 小店無燈欲閉門
모래 언덕에 반쯤 솟은 단풍나무 시들어 가는데도 / 半出岸沙楓欲死
배를 매었던 지난해의 흔적만은 남아 있네 / 繫舟唯有去時痕
나와 단청이 둘 다 환신(幻身)이라 / 我與丹靑兩幻身
세간에 유전하다가 끝내 티끌이 되는 것을 / 世間流轉會成塵
다만 이 몸이 남의 몸 아님 알겠으니 / 但知此物非他物
지금 사람이 옛사람과 같으냐고 묻지 마오 / 莫問今人猶昔人
수양버들 늘어진 샛길엔 보랏빛 이끼 덮여 있고 / 垂楊一徑紫苔封
원락에는 사람의 말소리 쓸쓸하네 / 人語蕭蕭院落中
한 그루 살구꽃 손을 부르듯 / 唯有杏花如喚客
담에 의지한 채 두어 가지 석양 속에 붉었네 / 倚墻斜日數枝紅
시냇물 맑게 흐르고 고목은 푸르른데 / 溪水淸漣樹老蒼
봄볕 즐기며 시냇가를 거니누나 / 行穿溪水踏春陽
깊은 골짝 우거진 숲 사람 없는 곳인데 / 溪深樹密無人處
그윽한 꽃 향기만 물 건너 풍겨오네 / 只有幽花渡水香
이와 같은 시는 한 자 한 구가 모두 야광주(夜光珠)를 소반 위에 굴리는 것같이 사랑스럽다. 원택(元澤)의,
물가의 산빛에 사창이 푸르른데 / 水邊山映碧紗窓
소나무 밑 석상에는 도서가 가득 쌓였네 / 松下圖書滿石牀
외객이 오지 않으니 봄이 정히 고요한데 / 外客不來春正靜
꽃 사이에서 우는 새만이 석양을 전송하네 / 花間啼鳥送斜陽
한 시는 참으로 형공(荊公)의 시법(詩法)을 체득한 것이다. 무산고(巫山高) 시(詩) 가운데,
백월(白月)이 해처럼 방과 창을 비추네 / 白月如日明房櫳
한 구절이 있는데, 이벽(李璧)이 주해(注解) 하기를,
“백월(白月)은 구슬을 말한 것이다.”
하였고, 유수계(劉須溪)가 이를 비평하기를,
“반드시 구슬만이 스스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벽의 속기(俗氣)는 숨길 수 없다.”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동파(東坡)가 오강삼현(吳江三賢)을 희롱하여 지은 시가 있는데, 희롱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므로, 내가,
“삼업(三業)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중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범려(范蠡)는 서시(西施)를 얻었느니 신업(身業)을 지은 것이요, 장한(張翰)은 농어[鱸魚]를 생각하였으니 구업(口業)을 지은 것이요, 육귀몽(陸龜蒙)은 남을 속여 재물을 취하였으니 의업(意業)을 지은 것입니다.”
하니, 중이 크게 웃었다.
동파(東坡)가 이공택(李公擇 공택은 이상(李常)의 자)의 백석산방(白石山房)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희롱하여 지었다.
우연히 흐르는 물 따라 높은 산에 오르니 / 偶尋流水上崔嵬
오로봉(五老峯) 푸른 얼굴 활짝 열렸네 / 五老蒼顔一笑開
만약 이태백을 보거든 말 전하여주게나 / 若見謫仙煩寄語
광산에서 머리 세었거든 일찍 내려오라고 / 匡山頭白早歸來
이를 만약 ‘동파가 오로봉을 시켜 이태백에게 말 전하여 달라.’ 한 것으로 풀이하면 잘못이다.
과거 내가 이것을 최졸옹(崔拙翁)에게 물었더니, 아랫구를 세 번 되풀이해 읽고도 이의가 있는 듯 대답하지 않으므로, 내가 큰 소리로,
“높게 착안하시오.”
하였더니, 옹이 곧 깨닫고 서로 크게 웃었다.
진간재(陳簡齋)가 상사(相師)에게,
서목임은 전부터 내 스스로 알거니와 / 鼠目向來吾自了
구장은 원래부터 세상과 어긋나네 / 龜腸從與世相違
취한 김에 스님에게 묻노라 / 醉來却欲憑師問
산에 가득한 단풍잎 속에 석장 날리는 뜻을 / 黃葉漫山錫杖飛
한 시를 주었는데, 구법(句法)의 공교함이 이와 같았다. 동파(東坡)는,
불꽃처럼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은 운수가 있다지만 / 火色上騰雖有數
급류 같은 벼슬 길에서 용퇴하는 사람 어이 없으랴 / 急流勇退豈無人
하였으니, 더욱 호탕한 사람이라 하겠다.
선군(先君 이진(李瑱))이 《산곡집(山谷集)》을 열람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과거 강도(江都)에 있을 적에 선달(先達 문무과에 급제는 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못한 사람) 이담(李湛)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심악군(深岳君)과 우연히 이름이 같았다. 있었는데, 시를 지으면 말이 엄격하고 뜻이 참신하였으나 인용하는 고사(故事)가 험벽(險僻)하여, 당시의 숭상하는 바에 배치되었으므로 마침내 드러나지 못하였다. 대개 부옹(涪翁 황정견(黃庭堅)의 호)의 시체(詩體)를 공부하여 너무도 똑같게 된 사람이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고심(苦心)하여 학문을 닦은 선비로서 요직에 있는 사람의 인정을 못 받아 늙어 죽도록 드러난 이름없음이 이 선달(李先達)과 같은 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정말 애석해 하지 않을 수 없다.”
[註解]
[주01]그대의 …… 못하였다 : 이 말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칠 적에, 초 나라가 명분 없는 침략이라고 항의하자 제 나라
의 관중(管仲)이 답한 말 가운데 있다. 《左傳 僖公 4年》
[주02]도하반(徒何反) : 이는 도 자의 ‘ㄷ’과 하 자의 ‘ㅏ’를 합쳐 ‘다’로 발음한다는 말이다. 《한서(漢書)》 고금인명표(古今人名表)에는
경치(景瑳)의 치에 대한 음을 자하반(子何反)으로 기재하고 치(瑳) 자는 치(差)로도 쓴다고 되어 있는데, 본문의 도하반은 글자의 오
기(誤記)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주03]《급총서(汲冡書)》 : 진(晉) 나라 태강(太康) 2년(281)에 급군(汲郡) 사람 불준(不準)이 위(衛) 나라 양왕(讓王)의 무덤을 발굴하
여 얻었다는 선진(先秦)의 고서(古書)이다.
[주04]조도(鳥道) : 나는 새만이 겨우 갈 수 있는 험준한 산길을 말한다.
[주05]당 무후(唐武后) :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말한다. 고종이 죽자 자기 아들 중종(中宗)을 세웠는데 마음에
맞지 않았으므로 폐위시키고 둘째 아들 예종을 세웠다. 그러나 곧 폐위시키고 자신이 정권을 휘두르면서 국호(國號)를 주(周)라 고
치고 요직(要職)에 친족을 앉혔으나, 뒤에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주06]노 소공(魯昭公)이 …… 살 적에 : 이 말은 《춘추좌전(春秋左傳)》 노 소공 28년과 29년 조에 보인다.
[주07]구삼(九三)에는 …… 말하고 : 이는 《역경(易經)》 건괘(乾卦) 구삼의 효사(爻辭)를 말하는데 그 효사에 “군자(君子)가 종일토록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고 조심하면, 처지가 위험하더라도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다.
[주08]혜련(惠連)을 …… 것과 같다 : 매우 즐겁다는 뜻. 혜련은 사혜련(謝惠連)을 말하는데, 그는 10세 때부터 글을 잘 지었다. 그의 족형
(族兄) 사영운(謝靈運)이 칭찬하기를 “시구(詩句)의 대를 맞추려 고심할 적이면 혜련이 척척 대를 맞추었는데 그 글귀가 매우 아름
다웠다. 언젠가 하루종일 시를 구상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혜련을 만나서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글귀를
얻었다.” 하였다. 《南史 謝惠連傳》
[주09]그대 …… 그려 주게나 : 이 말의 숨은 뜻은 위언(韋偃)의 이름 자가 누울 언(偃) 자이므로 누운 소나무만 그리지 말고 곧은 소나무
도 그리라고 희롱하는 말이다.
[주10]무산(巫山)의 사랑 이야기 : 초 회왕(楚懷王)이 고당(高唐)이라는 곳으로 유람갔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는데, 꿈에 한 여인을 만났
다. 그 여인이 “나는 무산에 사는 여인으로 왕이 유람왔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침석(枕席)을 받들고 싶습니다.” 하므로 인하여 운우
(雲雨)의 정을 나누었는데, 여인이 돌아갈 적에 “나는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어 늘 양대(陽臺) 아래 있습니다.” 하였다.
깨어보니 과연 그 여인의 말과 같았으므로 조운(朝雲)이라는 묘당(廟堂)을 세웠다 한다. 《宋玉 高唐賦》
[주11]후정화(後庭花) : 진 후주(陳後主) 때의 가곡명(歌曲名)으로, 후주가 연회를 베풀 적에 귀인(貴人)ㆍ여학사(女學士)ㆍ압객(狎客)
등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여, 그 중 가장 잘 된 것을 뽑아 악곡(樂曲)을 붙이고 아름다운 여인을 선발, 이를 노래부르고 춤추게 하
면서 즐겼는데 그 중 한 곡이 바로 이 후정화이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陳書 皇后傳》
[주12]용(龍)의 …… 아니겠는가 : 쉽게 지을 수 없는 아주 잘 된 글을 말한다. 《莊子》 列禦寇에 “쑥대로 발을 엮어 파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못 속에 들어가 천금의 값이 있는 구슬[珠]을 가지고 나오자, 아들에게 ‘이 구슬은 용의 턱 밑에 있는 것인데 네
가 이를 얻은 것은 용이 졸았기 때문이리라. 용을 잘못 건드려 깨웠다면 너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위에 서술한 몽득의 시가 구슬에 해당하는 좋은 글이라는 뜻으로 씌었다.
[주13]왕준(王濬) : 진(晉) 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익주 자사(益州刺史)를 지냈으며, 오(吳) 나라를 치기 위하여 누선(樓船)을 제조,
드디어 오왕(吳王) 손호(孫皓)를 사로잡고 오 나라를 멸하였다. 《晉書 卷42》
[주14]예좌(猊座) : 부처나 고승(高僧)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주15]우맹(優孟)이 …… 있겠는가 : 아무리 모방하여도 진짜와 똑같게 할 수는 없다는 뜻. 《史記》 滑稽傳에 “우맹이 손숙오(孫叔敖)의
의관(衣冠)을 입고 손바닥을 치며 담소(談笑)하였는데 한 해쯤 되자 손숙오와 똑같았으므로 초왕(楚王)을 위시하여 좌우(左右)의
근신(近臣)들도 분별할 수 없었다.” 하였다.
[주16]삼업(三業) :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말하는데, 신업은 살생ㆍ투도 등 몸으로 짓는 죄업, 구업은 입으로 짓는 죄업,
의업은 사념(思念)으로 짓는 죄업을 말한다.
[주17]광산(匡山)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대광산(大匡山)으로 이백(李白)이 여기서 머리가 세도록 글을 읽었다 한다.
[주18]이를 …… 잘못이다 : 이 말은 이공택(李公擇)에게 이백을 만나거든 말 전하여 달라는 것으로 풀이하여야 된다는 뜻이다.
[주19]서목(鼠目) : 소견이 작다는 뜻. 쥐의 눈은 작으면서도 밖으로 툭 불거져나와 있어 흡사 탐욕스러워하는 모양이므로 전하여 이렇게
비유한다.
[주20]구장(龜腸) : 마음이 세상과 잘 조화되지 못한다는 뜻. 시(詩)의 한 짝은 대(對)를 이루지만 한 구는 대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데, 그 예로 육구몽(陸龜蒙)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격류와 침석만 말하였을 뿐[但說激流幷枕石] 선복과 구장은 말하지 않았네.
[不辭蟬腹與龜腸]” 《西溪叢話》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김신호 (공역) ┃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