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七宮]
숙빈 최씨의 사당과 정빈 이씨의 사당
위치소재지
북부 순화방(조선시대) |
종로구 창의문로 12 칠궁 |
요약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毓祥宮)이 있었다. 연잉군은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를 위해 사당을 짓는데, 처음에는 ‘숙빈묘’, 그 후에는 ‘육상묘’였다가 1753년에 ‘육상궁’으로 승격되었다. 이후에는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七宮)’으로 불렸다. 즉, 육상궁(숙빈 최씨), 연호궁(정빈 이씨),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선희궁(영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 덕안궁(순빈 엄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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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의 주인들
칠궁의 첫 번째 주인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다. 1718년(숙종 44년) 숙빈 최씨가 죽고 나서 7년 후인 1725년에 아들 연잉군이 영조로 등극했다. 영조는 즉위년에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마련하여 ‘숙빈묘(淑嬪廟)’라 했고, 이후 ‘육상묘’, ‘육상궁’으로 이름을 올렸다.
고종 때에 흩어져 있는 후궁들의 사당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1870년 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 · 숙종의 간택후궁 영빈 김씨 · 정조의 간택후궁 화빈 윤씨의 사당은 경우궁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고,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 · 진종(효장세자)을 낳은 정빈 이씨 · 장조(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 ·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의 사당은 육상궁 안의 별묘에 함께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영빈 김씨와 인빈 김씨의 이봉은 취소된다.
1878년에는 육상궁에 화재가 나서 고쳐 지었으며, 1882년에 다시 화재로 신주가 타버려 다음 해에 육상궁을 개건했다. 1887년에는 대빈궁의 신위(희빈 장씨)가 옛 사당 자리로 돌아갔다. 1896년 선희궁(영빈 이씨)의 신위를 육상궁 별묘로 옮기고, 다음 해 다시 옛 선희궁으로 이전하여 육상궁 별묘에는 연호궁(정빈 이씨)과 의빈궁(의빈 성씨) 신위만 남게 되었다.
순종은 1908년에 제사 제도 개정안인 ‘향사이정에 관한 건’을 반포했다. 이때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영빈 김씨 · 화빈 윤씨 · 의빈 성씨의 신위는 땅에 묻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들의 신위를 모신 저경궁 · 대빈궁 · 연호궁 · 선희궁 ·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내로 합사(合祀)하여 육궁(六宮)이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오면서 ‘칠궁(七宮)’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육상궁과 연호궁의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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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경궁의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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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궁의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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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안궁의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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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궁과 경우궁의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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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 박씨 신주의 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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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22일에는 육상궁을 사적 제149호로 지정했다. 일반적으로 칠궁으로 불리어 오던 육상궁은 2011년 7월 28일 ‘서울 육상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여기에서는 원래의 칠궁 구역에 있던 육상궁과 연호궁만 알아보고, 나머지 궁은 따로 단락을 나누었다.
궁주인묘남편아들
저경궁 | 인빈 김씨 | 순강원 | 선조 | 원종(정원군, 추존왕-인조의 생부) |
대빈궁 | 희빈 장씨 | 대빈묘 | 숙종 | 경종 |
육상궁 | 숙빈 최씨 | 소령원 | 숙종 | 영조 |
연호궁 | 정빈 이씨 | 수길원 | 영조 | 진종(효장세자, 추존왕-정조의 양부) |
선희궁 | 영빈 이씨 | 수경원 | 영조 | 장조(사도세자, 추존왕-정조의 생부) |
경우궁 | 수빈 박씨 | 휘경원 | 정조 | 순조 |
덕안궁 | 엄황귀비 | 영휘원 | 고종 | 영친왕 |
칠궁의 주인들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육상궁
영조의 어머니 최씨는 어려서 궁궐에 들어가 궁녀 생활을 시작했다. 무수리라고도 하고 침방나인이라고도 하는데, 궁궐의 온갖 궂은일을 다 거쳤다.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다가 이곳을 지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어 종4품 ‘숙원’이 되었다.
첫째 아들 영수를 낳고 종2품 ‘숙의’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종1품 ‘귀인’이 되었다. 이처럼 숙종은 최씨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품계를 올려주었고, 1699년에 단종 복위가 이루어진 경사로 ‘숙빈’으로 승급되었다. 숙빈 최씨가 낮은 계급의 궁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숙원이 되고 아들을 낳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가 숙빈이 되었으니, 그 과정을 보더라도 당시 왕실에서 왕자의 출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의 권세 속에서도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아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는 것도, 왕위에 오르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된다.
숙빈 최씨의 출산 전후 과정은 호산청에서 기록한 《최숙원방 호산청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일기에는 ‘숙원’으로 첫째 아들을 낳았고, ‘숙의’로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귀인’으로 셋째 아들을 낳았다고 쓰여 있다.
《최숙원방 호산청일기》
숙빈 최씨의 출산 전후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모두 3책으로 제1책은 영수의〈계유구월일 최숙원방 호산청 일기〉, 제2책은 영조의〈무술팔월일 최숙의방 호산청 일기〉, 제3책은 일찍 죽은 셋째 아들의〈무인칠월일 최귀인방호산청 일기〉로 출산의 전후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왕실에서는 왕의 자손을 임신하면 출산을 돕기 위해 왕비의 경우 출산 예정 3개월 전에 산실청(産室廳)을, 후궁인 경우 출산 예정 1개월 전에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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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즉위한 뒤 생모의 사당을 잠저인 창의궁에 건립하기를 원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경복궁의 북쪽(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을 건립했다. 1725년 건립 당시 묘호를 ‘숙빈묘’라 했다가 1744년에 ‘육상묘(毓詳廟)’로 고쳤으며, 재위 29년째 되던 해인 1753년에 다시 ‘육상궁’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전자은어사묘(全慈恩於斯廟)’라는 현판을 직접 내렸는데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영조는 틈날 때마다 거둥하여 어머님의 명복을 빌었고, 재실인 냉천정에는 자신의 어진을 걸어 봉안했다. 어진을 사당 앞 재실에 걸어두고 밤낮으로 생모를 모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리라. 이 어진을 모사한 것이 현재 남아 있는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이다.
육상궁의 모습은 정선이 그린 〈정선필육상묘도(鄭敾筆毓祥廟圖)〉(보물 제873호)와 〈장안연우(長安烟雨)〉에 잘 나타나 있다. 1739년에 그려진 〈정선필육상묘도〉에는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인 숙빈묘일 때의 모습으로, 초가집의 형태와 홍살문이 보인다. 그리고 1741년 그려진 〈장안연우〉에는 숙빈묘가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다. 숙빈묘는 이후 육상묘, 육상궁으로 바뀌었고 1878년과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화재로 다시 지어졌을 것이다.
전자은어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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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
영조는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뜻의 ‘전자은어사묘’ 현판을 육상궁에 직접 내리고 틈날 때마다 거둥하여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국립고궁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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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소령원
숙빈 최씨가 죽고 처음 추천된 장지는 경기도 광주(현재 성남시 수성구 태평동)의 명선, 명혜공주묘의 청룡(靑龍)터와 선릉 근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연잉군이 양주 고령동 옹장리로 정했다(현재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 이즈음에 숙종은 세자빈(경종비 단의왕후)의 상을 당했고, 소현세자빈의 신주를 다시 만들고 시호를 내리는 등의 일로 분주하여 연잉군이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연잉군이 어느 날 용미리산을 지나는데, 한 남자가 험준한 망지에다 산소 자리를 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하도 딱해 상주에게 사연을 물으니 집이 가난하여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래서 이 자리는 누가 보아준 자리냐고 물으니, 아랫마을 산기슭에 사는 선비가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측은지심에 연잉군이 양주 목사에게 쌀 한 가마니와 돈 100냥을 보내라고 기별을 보냈다. 양주 목사가 즉시 포졸을 시켜 쌀과 돈을 보내주어 상주는 묘소를 다시 잡아 장사를 치렀다. 묏자리를 알려준 선비가 괘씸하다 생각한 연잉군은 그 선비를 찾아가서 “왜 이런 망지에 산소 자리를 잡아주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비는 “쌀 한 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십니까?”라고 대답했다. 놀란 연잉군은 이 선비가 이름난 지사(地師)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생모 숙빈 최씨가 세상을 뜨자 영조는 이 선비에게 부탁하여 묏자리를 정했는데 그곳이 바로 소령원이라는 것이다.
숙빈해주최씨소령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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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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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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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에는 묘비가 세 개나 있다. ‘유명조선국후궁숙빈수양최씨지묘’는 1718년 숙빈 최씨 사망 후 처음 세운 것으로 연잉군이 즉위하기 전이다. ‘숙빈해주최씨소령묘’는 1744년 묘호를 ‘소령’으로 고치고 세운 것이고, ‘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은 1753년 시호를 ‘화경’으로 묘를 원으로 올린 후 세운 것이다.
소령원(사적 제358호)
연잉군은 이름난 지사에게 물어 숙빈 최씨의 묏자리를 정할 정도로 효심이 극진했다. 소령원에는 묘비가 세 개나 있고,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묘 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 제일 처음 세운 ‘유명조선국후궁숙빈수양최씨지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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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령원 입구에는 연잉군이 왕이 된 다음 해인 1725년에 세운 신도비가 서 있다. 용의 머리와 발톱을 지닌 거북이 커다란 보주를 입에 물고 등에 비석을 세운 형태로, 머리 위에 ‘왕(王)’ 자가 새겨져 있는데 마치 당장이라도 승천할 기세로 서 있다. 그 규모도 어마어마해 어떤 왕릉의 신도비 못지않은 웅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광사를 원찰로 삼고 어실각을 지어 어머니의 위패를 모셨으며, 향나무를 심어 그 뜻을 기렸다. 지금도 영조가 심은 300년 된 향나무가 영조 대신 어실각을 지키고 있다.
보광사 어실각과 300년 된 향나무
영조는 보광사를 어머니 숙빈 최씨의 원찰로 삼고 위패를 모셨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향나무를 심었는데, 300년 된 향나무가 어실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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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국중앙학연구소 장서각에서 ‘조선 왕실의 여성’ 전시회를 개최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전시회는 책봉과 가례, 출산과 안태, 의례와 행사, 교육과 여가, 상장과 추숭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소령원과 관련된 〈묘소도형여산론〉, 〈소령원도〉, 〈소령원화소정계도〉, 〈소령원배치도〉를 보고 영조가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손수 쓴 비문의 탁본과 《호산청일기》도 전시되었다. 〈숙빈최씨 소령원도〉는 2007년 보물 제1535호로 지정되었다.
〈묘소도형여산론〉
소령묘의 산의 모양을 그린 것으로 상단에 제목을 쓰고, 가운데 산도를 그리고, 하단에는 산론을 적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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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도〉
산도의 형식으로 가운데 묘소와 제청(祭廳), 비각(碑閣)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을 그려놓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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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화소정계도〉
능원에 산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거리까지 초목을 불살라 제거하는 화소(火巢)를 표시한 것이다. 붉은선으로 화소의 경계를 나타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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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소령원배치도〉
소령원의 석물 배치를 나타낸 그림이다. 봉분 주변의 담장, 비석, 혼유석,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을 실재 위치에 맞추어 그대로 그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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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는 정빈 이씨
연호궁(延祜宮)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정빈 이씨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맞은 후실이다. 창의궁에서 일찍 죽은 딸과 경의군(진종)과 화순옹주를 낳았다.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세자궁에 속한 내명부 종5품 ‘소훈’이 되었고,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소원’으로 승격되었으나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때 경의군은 3세, 화순옹주가 2세였으니 어린 아들과 딸을 두고 눈을 감은 것이다. 1725년에 경의군이 효장세자로 책봉되자 ‘정빈’으로 추증되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자, 세손 정조를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서 왕위를 이어받게 했다. 정조는 즉위 후 양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1778년에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묘를 ‘수길원(綏吉園)’으로 높였으며, 경복궁 추성문 밖 서북방(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사당을 정하고 ‘연호궁’이라 했다.
연호궁은 1870년(고종 7년)에 육상궁 별묘로 이전했으며, 이곳은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으로 편입되었다. 연호궁은 육상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가 육상궁 내에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8 · 15광복 후 이곳에 청와대가 들어섰는데, 연호궁의 옛 위치는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 부근으로 추정된다.
수길원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묘로 시어머니 되는 숙빈 최씨묘 소령원과 가까이에 있다. 묘비에는 ‘대한온희정빈수길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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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길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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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육상궁과 연호궁은 한 건물 안에 있어 영조의 생모와 영조의 후궁,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있다. 정빈 이씨는 숙빈 최씨 사후 3년 후에 죽었으니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모셨을 것이다. 그런데 육상묘의 현판이 안쪽에, 연호궁의 현판이 바깥쪽에 있어서 마치 연호궁 내에 육상궁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고 쓰인 현판이 무수리에서 왕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숙빈 최씨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사당뿐만 아니라 고부 간의 묘인 숙빈 최씨의 소령원과 정빈 이씨의 수길원도 가까이에 있다. 조선 왕실에서 유일하게 묘도 사당도 함께하는 고부 간이다. 정빈 이씨의 아들 효장세자는 10세에 죽었고, 딸 화순옹주는 월성위 김한신과 혼인하여 월성위궁에 살다가 남편을 따라 죽었다.
육상묘와 연호궁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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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사건과 칠궁
칠궁의 속내를 가장 근간에 알 수 있는 자료는 1977년에 출간된 《한국의 고건축 4: 칠궁》이다. 사진작가 임응식은 이때 ‘한국의 고건축’이라는 주제로 경복궁, 비원(창덕궁 후원), 종묘, 칠궁의 사진을 찍었다. 책에서는 칠궁의 소문(小門)을 들어서면 덕안궁, 경우궁, 선희궁, 대빈궁의 정문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똑같은 전정(前庭)이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칠궁이 이건되기 전의 사진이다. 사진으로나마 이건되기 전 칠궁을 볼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사진 속 칠궁은 각 궁마다 월대(섬돌)와 삼계, 담장이 있다.
칠궁은 1967년과 1976년의 도시계획에 따라 일부가 철거, 이전되었다. 궁들을 북쪽으로 옮기면서 각 궁마다 있던 월대는 세 궁(저경궁, 대빈궁, 경우궁(선희궁))을 연결하여 공동으로 사용하고, 삼계는 단계로 줄였으며, 각각의 담장과 삼문을 없애고 전체에 담장을 두르고 삼문을 냈다.
칠궁이 옮기기 전후의 모습은 〈조선 시대 사묘 칠궁의 구성 공간 고찰〉 ‘변경모형분석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덕안궁 서쪽 도로 쪽으로 세 궁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지만 이건되기 전 칠궁은 각 궁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각각의 문이 있는 엄숙한 사당으로 지금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조선 왕실의 후궁 7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칠궁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간첩들이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1 · 21사건 또는 김신조 사건)으로 대변화를 겪는다. 북한군 31명이 청와대 침투를 목적으로 휴전선을 넘어온 사건이다. 이들은 경복고등학교 뒷문과 칠궁 사이까지 침투했다.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이들을 제지하다 죽었으며 시민도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 청와대 경호를 이유로 창의문로와 효자로가 만나는 칠궁 서쪽 도로를 뚫었다. 이 공사로 칠궁은 축소, 이건되었고 1978년에 지은 영빈관으로 인해 칠궁 앞이 막혀버렸다.
김신조 사건 이후 칠궁의 재실 구역에 살고 있었던 의친왕의 다섯째 아들 이택(수길)을 비롯한 10여 세대도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청와대 주변에 있는 공공기관의 경비를 철저히 한다는 이유로 문화재관리국은 청와대 측의 요청에 따라 칠궁의 관리와 경비권을 청와대에 넘겼다. 이후 33년 동안 민간인에게 칠궁의 관람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1년 11월 청와대 관람이 공개되면서 칠궁도 일반인의 관람이 허용되었다. 아직도 청와대 방문의 마지막 코스로만 관람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앞으로 칠궁만을 관람할 때가 오리라 생각된다. 2006년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개방되었고, 2007년 청와대의 뒷산인 백악산이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칠궁으로 합사되기 이전에는 각 궁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합사 이후 1년에 두 번, 각 궁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1929년에 덕안궁이 이전해오고 8 · 15광복 이후 칠궁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2001년 11월 24일에 제사를 재계한다는 고유제를 지냈다. 2003년부터 칠궁 제사를 모시는데 매년 10월 넷째 주 월요일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년에 딱 한 번, 이날은 칠궁의 자유 관람이 가능하니 칠궁을 자유롭게 보고 싶은 독자들은 이날을 꼭 기억하여 ‘장희빈’도 ‘동이’도 만나기 바란다.
현재의 칠궁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