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혜 ( 수필과 비평 3월 신인상 수상작 )

[김미화]

운혜

          김미화

 선이 단아하다. 손가락으로 테두리를 따라가면 걸리는 곳 하나 없이 부드럽게 휘돌아 감을 것 같다. 와인 잔의 매끈한 호처럼 고운 선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게 어찌 저리 야무질까. 조선의 전통 복식사를 읽던 중, 책 사이에 사진으로 얌전하게 놓여 있는 신발 한 켤레에 마음이 먼저 내려앉는다.

 다소곳한 신발 한 켤레. 연한 갈대 색의 몸체에 보기에도 날렵한 자태가 얼핏 나룻배를 떠올리게 한다. 바닥과 겉은 가죽으로 곱게 감싸고 신발 안쪽은 부드러운 천으로 마감한 조선조 여자들의 신발. 이 가죽신발의 이름이 '운혜'이다. 구름 운(雲)자와 발등을 덮지 않는 신발을 통칭하던 혜(鞋)자가 합쳐진 단어인데 운혜의 가장 큰 특징은 신발앞코와 뒤축에 조그마한 구름무늬 장식을 넣었다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을 신발에 매어 놓을 생각을 하다니, 맨 처음 운혜를 만들었을 갖바치의 상상이 참으로 기발하다.

 새 신발을 신으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는 의미였을까? 담장 안에 갇혀 살았던 여인네들의 염원이 어쩌면 비밀처럼 담겨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록 발은 땅에 디디고 살아도 신발에 매어 놓은 구름 조각처럼 마음대로 어디든 흘러가고픈 속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은 아닐까.

 설명을 눈으로 좇아가고 있자니 사진속의 고운 운혜를 즐겨 신었을 이름 모를 사대부가의 젊은 여인이 떠오른다. 댓돌위에 놓인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부지런한 손도 떠오르고, 가끔은 정성껏 기름을 먹여 닦아 두기도 했을 것이다. 새하얀 버선을 신고서 가까운 사찰로 기도 공양 길을 나서기도 하면서 운혜와 함께 나이 들어갔을 여인의 모습이 실제인 듯 느껴진다. 잠시 눈을 감으니 치맛자락아래 수줍게 살짝 보이는 구름무늬 하나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다.

 운혜는 시집 간 유부녀와 중인층 이상 여인들의 일상 신발이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여서 미혼의 사대부집 아가씨 들은 당혜라 불리는 꽃신을 신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여자들은 시집가는 날만큼은 대부분 꽃신을 신었을 것이다. 화려한 혼례복 아래 꽃처럼 고운 꽃신을 신은 어여쁜 신부의 수줍은 얼굴이 아른거린다. 꽃신을 신고 집을 떠나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는 심정이 어떠했을지 헤아리기가 쉽지는 않다. 대다수 백성의 딸들은 미투리나 짚신으로 일상을 보내다가 시집 갈 때에 처음으로 어여쁜 꽃신에 발을 담아 보았을 것이다. 꽃신에는 부모 슬하를 떠나는 슬픔과 신발의 꽃무늬처럼 화사한 또 다른 미지의 삶이 함께 있었다. 당혜 한 켤레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밤을 새우는 어린 신부의 마음마저 보이는 듯하다.

  조선 후기 때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영국 출신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에는 당시의 여인들이 신고 있는 운혜나 당혜, 수혜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만 봐도 그녀가 조선후기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가졌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녀는 조선 후기의 사람들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담았다. 그림마다 세세한 장식품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심지어 치맛자락을 살짝 들치고 앞코만 삐죽 내민 운혜의 구름장식도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 놓았다.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도 운혜는 너무나 아름다운 신발이었던 것이다. [ 민씨 집안의 규수 ] 라는 그림을 그릴 때, 배경이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운혜를 신으라고 하였다. 덕분에 조선 후기 민영찬의 딸을 그린 그림 속에서 신발까지 완벽하게 갖춘 여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현관부터 살핀다. 식구들이 벗어 놓은 신발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시옷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벗어 놓은 것은 남편의 신발이다. 아들들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이 후다닥 벗어 던진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신발 한 켤레가 가끔은 말을 걸어온다. 사진 속의 운혜처럼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신발에는 그 사람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 들어있다. 신발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정리하고 있으면 신발의 주기란 것이 사람의 삶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새 것에서 조금씩 낡아지고 찌그러들고 색이 바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어찌 그리 사람의 삶과 닮아 있는지 놀랍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낡아짐으로 얻는 것은 숨 쉼이다. 편안함과 익숙함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낡아지면 수그러들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낡은 신발을 수거함에 내려놓을 때 마음이 짠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백 년 전의 운혜에도 휴식만이 남아 있다. 하도 편안해보여서 유유자적 물위를 흔들리며 떠가는 나룻배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잔잔한 물결위에 반사되는 달빛처럼 운혜는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일까. 신발은 곧 그 사람이다. 한복 차림에 지금 바로 신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운혜 한 켤레가 세월의 마루를 넘어와 곁에 가지런히 놓여진다.

 사진 속 운혜는 단아하고 매끄럽다. 분명 신발주인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딸에서 엄마가 되는 인생길을 걸을 때 구름장식 하나를 앞코에 달고서 구름 위를 걷듯이 내내 순탄한 삶으로만 이어지길 바랐던 소망이 눈시울을 적신다. 그 마음들이 애틋하고 또 애틋하다. 사진 속의 운혜를 천천히 쓰다듬어본다.

[노종우]

늦었지만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글 너무 곱고 단아하네요.

[김상준]

김미화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운 글 많이 올려주세요.

[신대근]

수필과 비평에서 아껴 아껴 읽어 봤는데 여기서 보니 더 오묘하고 깊은 뜻을 읽을수 있을듯 하네요
신인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신형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차분하게 글을 풀어내는 솜씨가 한결 돋보입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