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Knight of Dragoon
용기사
“물론 내가 재수 없고 증오스럽고 한심하게만 보이겠지만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좀 이해해주길 바라네.”
“다시 말해서, ‘한 번만 봐주세요.’, 그건가?”
“아~ 아~ 정확한 표현이군.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게 있네.”
“뭔가?”
“자네가 내게 보이는 그 증오와 원망이란 결국 잘생긴 남자에 대한 질투와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난 평소 그렇게 이해했네만~.”
“단순 명쾌한 지적이군.”
미슐랭은 내 대답에 웃으며 장검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와 나는 모두 쓸쓸한 인간들이었다.
제 1장 금주선언(3)
(1)
헤미오네 상단에 속한 여관에서 말을 찾고 도시락을 받아 챙긴 난 손을 내밀었다. 내 손바닥을 본 여관 마스터 브라운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뭐 달라고? 이미 계산한 것은 다 줬잖아.”
“돈이요.”
“응? 무슨 돈.”
“식량이랑 옷 살 돈이요. 내 통장에 아직 돈 많잖아요.”
난 더 이상 말을 잇기 싫을 정도로 온몸이 땀으로 젖어 불쾌지수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심지어 반갑다고 투레발치는 내 절친한 친구 마루에게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였다. 브라운은 소리 내어 웃었다.
“잔액? 아~ 오늘 아침에 정확히 걷어간 7플로넬 52크로넬 33브로넬 말이지?”
“걷어가요?”
“응. 걷어갔지. 헤미오네양이 아침에 직접 내린 지시였다는데?”
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게 언제였습니까?”
“오늘 새벽쯤이었지. 아마 그럴 거야. 내가 마루한테 막 여물을 먹일 때였으니까.”
그러니까 이미 사면장까지 다 작성하고 나에 대한 방침까지 정한 후, 그렇게도 놀려먹었다는 것이군.
“그럼, 도대체 내가 왜! 그 인간들한테 벌벌 긴 거야!”
난 눈을 돌려 이 일의 원흉을 찾았다. 성큼성큼 걸어 수피아를 내려놓고 온 마굿간 쪽으로 간 난 뒷골이 뻐근해지는 혈압상승을 느껴야 했다.
“누나가 라이건 형 노예에요?”
“그렇답니다. 갚지 못할 빚을 진 저로써는 어떻게든 마스터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6살 난 여관집 아들 에밀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난 이러다가 아버지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할까봐 연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응?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는 게 뭐예요?”
“어머어머~ 도련님, 성교육이 안 되었구나. 자, 보세요. 남자와 여자는 신체구조가…….”
얼씨구, 손가락이 어딜 향해 있는 거야!
“그마아아아안~!”
난 버럭 달려가 수피아를 안아들고 마루 안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숙여 초롱초롱한 눈빛의 에밀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에밀, 모든 것을 다 잊어라. 다 때가 되면 안 단다.”
“힝! 형도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야?”
말에 올라탄 수피아도 참견했다.
“마스터님, 성교육은 어릴 때부터 옳게 가르치는 게 중요해요. 억압된 욕망은 향후 인격형성에 장애가 되며…….”
“시끄러.”
“흥!”
그래도 여긴 다른 사람이 보고 있으니까 막 대들진 않는군. 난 다시 에밀을 봤다.
“무시가 아니다. 정말, 이건 모를수록 좋은 거란다.”
“왜?”
“알게 되면 그때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지.”
“다르게 보이는 게 뭔데?”
어린아이 특유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난 어쩔 수 없이 비열하면서도 지극히 효과적인 무기를 빼어들었다.
“크면 알게 된다. 아직 넌 몰라도 돼. 마루야! 가자.”
“히히힝~!”
고삐를 잡아당기자 마루는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걸었다. 잘 훈련된 전투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이 마루는 순하기 이를 데 없는, 3살 난 트레비존드 산 말이었다. 그 위에 올라앉은 수피아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동심에 대못을 박다니~.”
“얼씨구, 아이를 어른 만들려던 사람이 누구인데? 나 봐. 다 크면 자동적으로 알게 돼. 괜찮아.”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어른인데 뭘. 정말 지독한 독재자라니까. 다 자기 맘대로 하려고 들어. 나쁜 마스터.”
“그런데…… 우리 대화가 좀 이상하지?”
“마스터도 그렇게 생각해?”
나와 수피아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수피아도 마찬가지인 듯 어깨가 연신 움찔거렸다. 난 고개를 절래 내젓고 다시 말고삐를 잡아 앞으로 걸었다.
“이렇게 쉽게 친해진다니 이게 좋은 일일까?”
“나 같은 미녀에겐 슬픈 일이에요. 마스터 나리.”
남쪽 성문으로 통하는 길에 접어들자 이제 건물들이 점차 줄어들고 대신 공터가 많이 보였다. 전쟁 때 사용할 구조물들도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를 조용히 벗어나자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다. 성문을 지키던 요새 수비병들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라이건~ 또 언제 오나?”
“글쎄요. 되도록이면 오고 싶지 않습니다만…….”
난 어깨를 들썩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수비대 캡틴 한스는 말에 타고 있는 수피아에게 말을 걸었다.
“엘프씨. 노예라지만 여기 쾰른에선 자유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 라이건은 거칠긴 하지만 착한 녀석이니 때 되면 자유의 몸으로 풀어 줄 거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 감사해요.”
도개교를 지나 시 외각지역의 빈민촌을 지나고 남쪽으로 근 2시간을 걸어갈 때까지도 난 더 이상 수피아에게 말 걸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고맙게도 내게 정리할 시간을 주고 있는지 수피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느 새 날은 정오를 넘어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가로운 마을이 풍경이 보일 때쯤 난 문득 멈춰 섰다. 수피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날 내려봤다.
“마스터, 왜?”
“말이 지나치게 짧은 거 아니야? 마스터한테 좀 경의를……. 됐다~ 관두자.”
어느 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수피아에게 더 이상 할 말이란 없었다. 난 말고삐를 잡고 길에서 벗어나 근처 숲으로 들어섰다.
“왜 길에서 벗어나는 거야? 설마 여기서!”
“뭘 상상하는지 묻기 겁나는군. 이제 거의 술 깼어. 걱정하지 마. 덮치라고 해도 안 덮쳐.”
숲 사이 오솔길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이름 모를 꽃향기와 풀향이 가득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수피아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짓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숲의 종족이잖아. 숲을 오랫동안 못 봤을 것 같아서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잠시 들렸다 가면 좋지 않을까 해서.”
“와~ 마스터, 정말 착하네.”
“여기서 내려. 여긴 내가 좋아하는 곳이야.”
난 수피아에게 다가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긴 치마를 입어서 두 다리를 벌려 타지 못하고 안장에 기대앉는 식으로 탔기에 이렇게 도와주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내 품에 안겨 말에서 내려온 수피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조그마한 언덕 정상에 있는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멋져~!”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보람 있었다. 난 안장에 넣어두었던 도시락을 꺼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통 안에는 빵과 치즈, 그리고 사과가 들어 있었다. 난 그것과 함께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통을 수피아에게 건넸다.
“고기는 안 먹어도 치즈는 먹지?”
“유제품은 괜찮아.”
“식성 까다롭긴~.”
난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아 빵을 먹기 시작했다. 수피아도 사과를 아삭아삭 깨물어 먹었다. 사과가 이윽고 씨만 남았을 무렵 난 손을 들어 지평선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곳이 내가 사는 ‘참나무 마을’이야.”
“아하~.”
이 자그마한 동산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평화로웠다. 마을 회관 겸 아이들 학교로 쓰이는 성당을 중심으로 백여 채의 올망졸망한 석회와 나무로 쌓아올린 단층집들이 둘러쌌다. 그 주변을 검은 띠처럼 둘러싼 밭은 이제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나 짚더미들이 마치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개천에서 송어가 뛰어오르며 내는 물장구 소리를 제외하면 정말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집집마다 굴뚝에선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빵 굽는 구수한 향과 스튜, 아니면 폴렌타 끓는 냄새가 어울러졌다.
난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을은 영양가 많은 풍성한 참나무 열매로 키운 맛좋은 돼지로 유명해. 대충 백 가구 남짓 사는 ‘참나무 마을’은 집마다 적어도 다섯 마리가 넘는 돼지를 키우고 그 돼지 분뇨는 비료로 재활용하지. 그래서 다른 마을보다 농사도 잘 되는 편이고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이 살고 있어.”
“응~ 그렇구나. 좋겠다. 좋은 곳에 살아서.”
“응, 좋은 곳이지. 하지만 수피아의 고향은 아니지.”
“응?”
난 머리를 북북 긁었다.
“3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계속 혼자 살아서 술이 좀 늘었나봐. 아무래도 집안에 어른이 없으니 내가 요즘 들어 막 나가는 적이 많아. 그래서 어제하고 오늘 그 난리법석을 떨었지. 이제 술이 좀 깨고 나니 정신이 들었어.”
“마스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풀을 한 줄기 뽑아 질겅질겅 씹었다. 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세례 받을 생각은 없지?”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없어. 크리샤트는 당신네들의 신이지 내겐 아니야.”
“하지만 세례를 받으면 신분이 보장돼. 교인끼리는 서로를 노예로 부릴 수가 없으니 자동적으로 자유인이 되지. 그러면 혼자서도 여행 다닐 수 있어.”
“내가 왜 혼자서 여행가?”
난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빚은 내가 그냥 다 갚을게. 지금부터 넌 내 노예가 아니야. 그냥 자유의 몸이야. 억지로 같이 살지 않아도 돼.”
수피아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정겨웠지만 난 속이 타들어갔다. 난 어물거리며 말했다.
“같이 있기 싫다거나 하는 다른 의미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럼 어떤 의미인데?”
“그냥 곰곰이 생각해봤지. 난 백정이야. 엘프인 수피아는 고기를 먹지 않지. 최악의 조합이잖아. 내가 하는 일은 네게 끔찍할 거야.”
“난 그 끔찍한 일을 하지 않으면 되겠네. 그리고?”
“응?”
너무 쉽게 나온 대답에 난 멍해졌다. 수피아는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난 그 소, 돼지 잡는 일 하지 않을 거라고. 마스터가 혼자 해. 그럼 되잖아. 또 뭐가 있어?”
“그, 그리고 난 혼자 살아.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들어오면 그 다음에 필히…….”
“그렇게도 나랑 하고 싶어?”
뭘 해? 난 벌떡 자리에 일어서 두 손을 흔들었다.
“엉?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두 다리를 가슴으로 모아 안고 있던 수피아는 내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마스터와 내가 만난 지 이제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어. 우린 짐승이 아니잖아. 내 마음이 허락할 때 마스터를 받아들일게. 그 정도는 지켜줄 수 있지?”
“으, 응.”
“그럼 그것도 됐네. 또 무슨 문제가 있어?”
무언가 예상과 다른 전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난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크으~. 수피아, 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않아. 됐지?”
“왜에~!”
수피아의 눈은 더욱 아련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햇빛 속으로 흩어지듯 퍼져나갔다.
“난 고향도 없고 날 반겨줄 가족도 없어. 요정은 잊혀진 존재야. 그리고 잊은 존재야. 마스터, 난 돌아갈 곳이 없어.”
문득 말이 멈췄다. 수피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수피아의 두 눈은 맑았다. 더욱 짙어지는 향긋한 사과향이 나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들었다.
“마스터, 날 배려해주고 싶었어? 이런 날 걱정해준 거야?”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피아는 내가 볼 때마다 다른 얼굴로 날 대하고 있었다. 어떨 땐 귀엽고 애교를 떠는 모습으로, 어떨 땐 방금 전처럼 격의 없는 친구처럼, 그리고 지금은 마치……. 수피아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의 뜻으로 내가 노래를 하나 불러줄게.”
하늘 아래 다섯이 살고 있었지요.
바람에 흩날리며
아름다운 영광을 노래하던
구름 같은 이.
숲 향기에 취해
영원한 기쁨을 어루만지던
들꽃 같은 이.
바위 아래
안온한 평화를 만들어나가던
산 같은 이.
물 속에서
무엇보다 옳음을 믿고 있던
바다 같은 이.
땅 위에서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은
보석 같은 이.
하늘 아래 다섯이 살고 있었지요.
구름 같은 이는
서글픈 영광을 노래하지 못해
사라졌어요.
들꽃 같은 이는
영원한 슬픔을 어루만지지 못해
사라졌어요.
산 같은 이는
부서진 평화에 슬퍼하다가
사라졌어요.
바다 같은 이는
보다 좋음을 믿지 못해
사라졌어요.
그러나
보석 같은 이들은
아직 증오를 잃지 않았기에
살아가고 있답니다.
하늘 아래 다섯이 살고 있었지요.
넷은 하나를 사랑해요.
아브락사스가 날갯짓하면
넷 모두가 다시 되돌아올 수 있지만
넷은 약속을 했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보석 같은 이들의 사랑을 지켜주기로.
하늘 아래 다섯이 살고 있었지요.
아브락사스는
다섯이 살던 때를 기억하며
지금도 구슬프게 울고 있답니다.
수피아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향기는 너무나 황홀했다. 따스한 체온 너머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 몸을 구석구석 흔들었다. 난 다리에서 힘이 빠져 나도 모르게 수피아를 꽉 껴안았다. 수피아의 부드러운 허밍이 가라앉을 때쯤 난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수피아는 그런 날 보고 다시금 웃었다.
“노, 노래를 정말…….”
“정말 잘 한다고?”
“응.”
“남자가 그 정도밖에 찬사를 못 보내? 표현력 부족이야. 문학작품을 좀더 많이 봐야겠어. 하긴 도축업자이니 심성이 메마른 것은 당연하지.”
수피아는 그렇게 웃으며 내게 다시 다가와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나의 어수룩한 마스터. 마스터는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뚝뚝 흘릴 줄 알았어? 꿈 깨셔.”
“엉?”
“나 노예, 당신 마스터. 마스터는 노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 줘야해. 알겠지?”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엉, 그렇지.”
수피아는 내 팔을 감아 자신의 목에 휘둘렀다.
“난 비싼 몸이니까 잘 대해줘. 잘 부탁해. 나의 마스터님.”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난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위험한 동거 생활은 시작되었다. 노래 부르던 그 모습에 홀린 나로썬 그저 한심하기만 한 마스터의 모습이었다.
(2)
카로링거 기사왕국(騎士王國) 중남부 도시 아를레앙
루이지의 연녹색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투명하고 깊은 호수처럼 맑았다. 미슐랭은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항상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면 루이지는 약간 붉은 기운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폭포수처럼 미슐랭의 가슴팍에 흘러내리며 포근히 안겨왔다. 완전히 하얗지 않지만 또 그래서 더욱 건강하고 섹시한 피부의 그녀는 카로링거 왕국 최고 군사귀족 발레리우스 가문의 계승자답지 않게 부끄럼 타며 속삭였다.
“난 자기하고 함께 있을 때, 그 무엇보다 행복해. 자기도 그래?”
“어, 응. 물론 나도…….”
미슐랭은 정말 멋없게 더듬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그저 숫기 없는 잘 생기고 선 얇은 교수에 불과했다.
“자기야. 요즘에 어떤 연구를 해?”
훌륭한 음식은 언제나 사람의 감성을 자극한다. 미슐랭은 지금 충분히 흥분한 상태였다. 루이지 폰 발레리우스가 가져온 음식은 역시 훌륭했다. 풍미가 좋은 이달리아산 적포도주를 시작으로 차갑게 굳힌 꿩고기 전채에 최고급 버터를 사용한 마지팬, 우유에 넣어 조리한 파바 콩, 껍질이 바삭바삭한 뜨거운 뱀장어 파이, 크림이 듬뿍 들어간 부드러운 체리 케이크, 이 계절에 쉽게 얻을 수 없는 신선한 사과와 배가 후식이었다.
여기에 루이지는 서민(!)적인 취향이라며 얼굴을 찌푸리지만 미슐랭이 무척 좋아하는, 소금에 절인 배추와 함께 얇게 저며 살짝 볶은 햄 요리까지 덧붙여 있었다. 이런 도시락(?)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분명 호사스러운 음식이지만 발레리우스 대공(大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촐한 식사였다. 이런 식사를 대접받았다면 미슐랭은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해야 했다.
“처음 시작은 역시 이걸로 해야 할까? 오늘도 에드리아산 포도주를 가지고 왔네.”
“응. 아무래도 싸고 좋으니까.”
“그렇지만 에드리아 도시 연맹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
“우리의 숙적이지.”
“그게 이 포도주 때문이라면 어때?”
“응?”
발레리우스는 카로링거 왕국의 대들보와 같은 군사 귀족 가문. 지금 카로링거 왕국은 동남쪽의 에드리아 도시 연맹과 사이가 안 좋은 상황이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 우습겠지만 이 분쟁의 진정한 원인은 오늘 도시락 메뉴에서도 나타나 있다. 오늘 미슐랭은 카로링거 대귀족의 딸, 거기에 자신도 작위를 가진 귀족여인, 덧붙여 기사단 단장인 여기사와 함께 에드리아산 포도주를 마셨다.
무슨 말이냐고? 카로링거 왕국의 국민들은 포도주를 무척 좋아한다. 포도농장을 가진 귀족들은 돈 참 쉽게 벌었다. 10년 전, 에드리아 도시 연맹 상인들이 질도 좋고 값싼 포도주를 대량으로 카로링거에 들여오기 전까지는. 그 결과는 지금에 와서 극명히 드러났다.
가장 보수적이고 애국심에 넘친다는 발레리우스 귀족가도 결국 에드리아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다! 포도농장주와 그의 인부들, 덧붙여 국내 포도주 생산업체, 상인들,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귀족들이 매해 되풀이 하는 ‘에드리아 포도주 망국론’은 지금에 와서 ‘건방진 내륙해(內陸海) 놈들과 한판 붙자!’로 변질되었다.
“이번 논문에서 내가 밝혔듯이 무역 수지 불균형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압력으로 변질되어 자국의 이익집단이 국가에 대해 일정부분 영향력 행사를…….”
미슐랭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역시 루이지는 뛰어난 기사답게 이런 쪽으로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젊고 총명하고 뛰어난 정치학 교수는 빙긋 웃었다.
“별 거 아니야. 하여간 그런 거 공부하고 있어.”
“미슐랭 교수님.”
“어! 이브.”
하얀 투피스 위에 아를레랑 대학당국에서 지급하는 정복을 입은 여인은 미슐랭과 루이지가 앉아 있는 잔디밭까지 걸어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연구실에서 박사를 받고 미슐랭을 도와주는 이브 몰리에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루이지는 눈을 찌푸렸다. 단정히 빗어 내린 적갈색 생머리가 무척 깔끔한 인상을 주는 이브는 루이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발레리우스 여백작 각하.”
“안녕. 이브. 잘 지냈어? 여긴 무슨 일이지?”
“대학 당국에서 교수님을 찾습니다.”
“대학 당국에서?”
맛있는 식사 후 포만감에 젖어 있던 미슐랭은 문득 고개를 돌려 이브를 바라봤다. 이브는 웃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번에 제출하신 영수증에 대해 경리과에서 무언가 할 말이 있던 것 같군요.”
미슐랭은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 싫다싫어! 연구 좀 돈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없을까?”
아마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몇 만 명의 교수들이 입 밖으로 낼법한 한탄을 토해낸 미슐랭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 루이지. 그만 일어나야겠어.”
“그런 사소한 문제로 자기를 괴롭히면…….”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 발끈 성 내려하던 루이지는 다음 순간 미슐랭의 차가운 눈빛에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야. 자기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 없어.”
어느 새 마음씨 좋은 교수의 모습으로 돌아간 미슐랭은 환하게 웃으며 루이지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고마워. 배웅은 하지 못해 미안해.”
“아니야. 이만 갈게.”
짐을 재빨리 정리하고 손수 물건을 들고 멀리 떠나가는 루이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미슐랭과 이브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브는 조용히 말했다.
“착한 아가씨입니다.”
“그래. 정말 그래. 장미의 기사단 부단장이면서 공작위를 계승할 여기사치고 너무 가녀리고 착해. 검을 잡을 수 없는 나를 배려해 롱소드가 아닌 레이피어를 가지고 왔고 가난한 학자인 나를 생각해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수수한 승마복을 입고 왔지. 그래서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아닙니다. 마스터에게 어울리는 고결한 아가씨입니다.”
“이 멍청한 아가씨야.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다는 거야. 난 비천하고 남루하니까. 대개 야망을 가진 이들이란 이런 한심한 몰골을 하고 있는 법이지.”
대답 없는 이브에게 젊은 교수는 짧게 말을 끊었다.
“나답지 않은 말이었어. 잊어버리게.”
“예.”
“좀 여자답게…….”
“예?”
“아니야. 아무 것도…….”
한 번 피식 웃고 만 미슐랭은 팔짱을 끼고 이브를 돌아봤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미슐랭을 마주 바라보던 이브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브라삭스’가 곁님을 찾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삭스가 그 ‘아브라삭스’를 말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자신의 지성에 대해 자신감 있고 또 충분히 그만한 실력을 갖춘 자답게 미슐랭은 자신의 예상 범위를 넘어가는 돌발 상황을 마주하고 순간 혼란에 빠졌다.
“근거를 빨리 말하라.”
“2주일 전 교황청에서 흘러나온 정보입니다. ‘아브라삭스 출현’. 그때는 단순한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재까지 취합된 정보에 의거하면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것 같습니다. 각국 최고지도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기사왕국의 국왕과 바지티움의 황제, 교황청의 교황, 브리타니아 백국(伯國) 매직 타워의 마스터, 에드리아 메디치아 맹주가문, 피레네 산악공국(山岳公國) 공왕…….”
“거기에 휸 제국의 후계자라 자처하는 마자르 왕국 또한 움직임이 포착되겠군.”
“그렇습니다. 마스터.”
“이거 재미있군. 내가 알기로 이번 아브라삭스가 마지막이지 않은가? 그 피가 그토록 희미해진 카우리족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나? 예언대로라면 세계는 정말 멸망할 텐데……”
그리고 역시 미슐랭은 재빨리 공황을 극복했다. 그는 재빨리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보가 부정확하다.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 최우선 과제로 곁님과 아브라삭스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찾는다.”
“알겠습니다.”
“동시에 전대 아브라삭스에 대한 모든 기록을 뒤져 전투력을 알아내라. 또한 모든 경우에 상정해서 아브라삭스를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찾아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미슐랭은 말을 하다말고 웃음 지었다.
“것 참 살다보니 이젠 세계 구원까지 나서게 되는군. 할 일도 많은데 말이야.”
이브는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미슐랭은 그만의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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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여름이 끝나가는군요. 즐거운 시간들 보내고 계십니까?
야랑 오승환 올림
첫댓글 피서한번못갔습니다. . . .밤새서 이거보는데 우울하네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