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응시하는 자들이 허위가 많으므로, 이전부터 조관(朝官)으로 보거(保擧 신원 보증)를 삼게 하였다. 영상 상진(尙震)이 서료(庶僚)에 있을 때 무과에 응시하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와서 보거되기를 요구하자 상이 모두 허락해 주었는데, 그 중에는 그 집에 찾아가지도 않고 허위로 상진의 서명(署名)과 수결을 해온 자가 많았다. 고시관이 필적이 같지 않음을 확인하고, 상진에게 서신을 보내어서 묻자, 그 답서에, “혹은 취중에 써 주고 혹은 졸면서 써 주었으며, 혹은 누워서 써 주었으므로 필적이 같지 않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 도량 넓은 것을 탄복하였다. 그 후 벼슬이 영상에 이르니, 복술가 홍계관(洪啓寬)의 말에, “음덕을 쌓아서 그 도움을 입었다.”고 하였다. 그는 임종시에 스스로 명(銘)을 쓰기를, “초야에서 일어나 세 번 상부(相府)에 들어갔고, 만년에 거문고를 배워 항상 감군은(感君恩)한 곡(曲)만을 탔으며, 나이 73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했다. 감군은은 그의 자작곡이었다.
우리나라 법률에는 출처(出妻)에 대한 조문이 없다. 유모(兪某)란 자가 그 아내의 음란한 행실을 들어 관가에 고하고 두 번이나 소송을 제기했으나 송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내 역시 성질이 패만하여 부부의 체통이 없었다. 그러나 중신(重臣)들은 모두 국법에 출처의 조문이 없다 하여,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출처의 조문이 없지만 출처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또 어디에 있는가? 출처하는 것이 진실로 폐단은 있으나, 부모에게 불효하고 음란한 행실이 있어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는 여자도 끝내 국법에 의하여 축출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남녘 고을에 사는 박(朴) 아무란 자의 아내는 성질이 악독했는데 하루는 달아나 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옥사가 되었는데, 옥관은 그 아내가 남에게 피살되었다고 의심하고 박모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겨우 죽음만 모면하였다. 그 후에 명문의 딸을 맞아 아내를 삼았는데, 전처가 그제야 나타났으니 이 같은 사건은 또 어떻게 처리되어야 할 것인가? 혹자는, “여자가 죄 없이 쫓겨나는 것을 고려한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죄가 있어도 쫓아내지 못하면 무한한 폐단이 있다는 것은 어찌 고려하지 않는가? 풍속이 퇴폐하는 원인은 규문에 달려 있으므로, 천만 가지 죄악을 쉽사리 금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혹자의 말과 같다면 성인이 예절을 제정할 때 어찌 부녀자를 위하여 깊은 고려가 없었겠는가만, 칠거(七去)의 조문을 말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이겠는가? 도둑을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엄밀하게 다루어야 하므로 간혹 형벌을 남용하여 양민들이 폐를 입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도둑 잡는 법을 금지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지금 풍속이, 악독한 아내 앞에서 숨을 죽이고 눈을 감기를 마치 하동 사자후(河東獅子吼)와 같이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주C-001]이혼(離昏) : 《類選》 卷3上 人事篇 親屬門. [주D-001]칠거(七去) : 아내를 내쫓는 일곱 가지 이유. 시부모에게 불순한 것, 자식이 없는 것, 음행이 있는 것, 투기하는 것, 악질(惡疾)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임. [주D-002]하동 사자후(河東獅子吼) : 이는, 진계상(陳季常)이 워낙 사나운 처 하동 유씨(河東柳氏) 앞에서 옴쭉도 못하는 몰골을 조소한 것. 소동파(蘇東坡) 시에, “河東獅子吼 手杖落地驚”이라 하였음.
서애 청백(西厓淸白)
유서애(柳西厓)가 조정에서 불안을 느끼고 물러가자, 그 탄핵에, “세 곳의 전장(田莊)이 미오(郿塢)보다 더하다.”고 하였다. 그 당시 국가에서 청백리(淸白吏)를 뽑는데 서애가 들었으니, 이는 백사(白沙 이항복의 호) 이상국(李相國)의 뜻이었다. 백사가 어느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탄핵이 유 상국에게는 그 경중이 될 바가 없고, 다만 다른 간사한 무리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미오(郿塢) 두 자를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애가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어 여러 아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거의 살아갈 도리가 없었다. 정우복(鄭愚伏)이 유계화(柳季華 유성룡의 아들 진(袗), 계화는 자)에게 준 시에,
하상의 유업 시서뿐이니 / 河上傳家只墨庄 자손들 나물밥도 채우기 어려워라 / 兒孫蔬糲不充膓 어쩌다, 십 년을 정승 자리 있으면서 / 如何將相三千日 성도의 뽕나무 팔백 주도 없었던가 / 倂欠成都八百桑
라 하였고, 또 “참소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그 얼굴이 뜨거울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서애가 새로 석갈(釋褐)이 되어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호) 이상국(李相國)을 찾아갔는데, 이상국이, ‘서울 근교에 장만한 가대(家垈)가 있느냐?’고 묻기에, ‘없다.’고 대답하자, 동고가 또, ‘벼슬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편리하다.’고 하였다. 서애가 속으로 의심하면서 자못 불만스럽게 여겼는데, 후일에 갑작스레 조정에서 물러 나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사찰에 우거하여 큰 곤란을 겪게 되자, ‘당시 이상국의 말이 참으로 진리가 있었다.’고 했다.” 한다.
근자에 들으니, 어떤 사람이 문학에 종사하여 과거(科擧)에 응시했으나, 늙도록 등제(登第)하지 못하였고, 다시 몸을 굽히어 음사(蔭仕 부모의 덕으로 하는 벼슬)에 나아갔으나, 이름을 드날리지 못하자 병이 들었다. 이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짐작하고 매양 벽을 향하여 껄껄대고 웃기를 마지않았으며, 그 연유를 물으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제들이 병으로 단정하고 증세를 기록하여 장차 의원에게 물으려 하였다. 어느 의원이 찾아와 보자 또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게 여기지 말라. 웃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평생을 헛되이 늙어 과거에 등제하지 못하고, 또 음사에 나아갔으나 이름을 드날리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내 신세를 돌아보건대, 이와 같이 녹록(碌碌)하므로 웃는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래도 뻔뻔한 사람의 취지보다는 약간 나은 데가 있다. 지금 시속 사람들은 한결같이 명리에 분주하다가 결국은 이루지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한탄만 마지않으니, 세상 일이 우습다는 것을 아는 자도 또한 드물다고 생각했다.
소가(笑歌)
이백(李白)이 지은 소가(笑歌)와 비가(悲歌) 2편이 있는데, 이는 시인의 낭만에서 나온 것이요 깊은 뜻은 없는 것이다. 옛날 금애종(金哀宗) 때 어느 남자가 상복을 입고 승천문(承天門)을 바라보며 웃다가는 또 곡하며 말하기를, “장상(將相) 중에 사람이 없는 것을 웃고, 금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곡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선조조 때 명문의 자제 이경전(李慶全)ㆍ이수록(李綏祿)ㆍ백진민(白振民)ㆍ김두남(金斗男)ㆍ유극신(柳克新)ㆍ김성립(金誠立)ㆍ정효성(鄭孝誠)ㆍ정협(鄭協) 등 연소한 자 40여 명이 패거리가 되어, 뛰놀고 노래하며 동동곡(鼕鼕曲)을 부르고 큰 길거리로 헤매면서 곡하고 또 웃으며, 하는 말이,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을 곡하고, 장상(將相)들이 사람 아닌 것을 웃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이 감히 금지시키지 못하고 재상들도 삼가 피할 뿐이었는데,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난리의 조짐이었다고 하였다. 대개 동동(鼕鼕)은 북소리이니, 동동으로 박자를 삼아 율동[鼓動]하는 뜻이다. 국조(國朝) 《악학 궤범(樂學軌範)》에 동동(動動)의 악보가 실려 있으니, 아박(牙拍)치는 소리에 맞춰 동동사(動動詞)를 부르면 여러 기녀들이 따라 화합하면서 한 번 나아갔다 한 번 물러나고 한 번은 서로 마주보다가 한번은 서로 등지며 혹은 좌로 갔다가 혹은 우로 가고 혹은 팔, 혹은 무릎으로 서로 치고 춤추며 뛰었다. 동(動)은 동(鼕)과 음(音)이 같으므로 와전되어 그렇게 된 것이다.
종측(宗測)
《가어(家語)》에, “짐이 무겁고 길이 멀면 땅을 가리지 않고 쉬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녹봉을 가리지 않고 벼슬한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내세워 구실로 삼는 자가 많으나, 이는 모두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한갓 영화를 도모하는 습속만 조장(助長)할 뿐이어서 옛사람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진(晉) 나라 종각(宗愨)의 손자 종 측(宗測)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녹봉을 가리지 않고 벼슬한다.’고 한 데 대하여 나는 그윽이 의심하는 바이다. 정성이 지금(地金)을 감응시키지 못하고 빙리(氷鯉)를 구하지 못할 바에는 다만 하늘의 기후를 이용하고 땅의 토리(土利)를 분별하여 농사 지어 봉친(奉親)할 것이지, 누가 남의 후한 녹봉을 먹고 남의 무한한 걱정을 떠맡겠는가.” 했으니, 이 말은 우리의 의향에도 수긍(首肯)이 가는 바이다.
[주D-001]지금(地金) : 한(漢) 나라 때 곽거(郭巨)의 고사. 집이 가난하나 그 모친을 효성으로 공양하는데 그 아들이 모친의 반찬을 축내었다. 아들은 없더라도 또 낳으면 된다 하고, 아들을 묻기 위하여 땅 3척을 파자 금 한 솥이 나왔음. [주D-002]빙리(氷鯉) : 진(晉) 나라 왕상(王祥)의 고사. 겨울철에 그 계모가 병이 들어 이어(鯉魚) 먹기를 원하자, 왕상이 강에 나가 옷을 벗고 얼음 위에 엎드리니 얼음이 스스로 녹으며 이어가 나왔음.
유극량은 천인인데 무과에 등과하여 벼슬이 부원수(副元帥)에 이르렀고, 임진왜란 때 임진(臨津) 싸움에 전사하여 나라의 충신이 되었다. 《하담수기(荷潭手記)》에는, “유(劉)는 같은 동리에 있는 정모(鄭某)의 종의 아들이라.” 하였고, 《명신록(名臣錄)》에는, “인재(忍齋) 홍섬(洪暹)의 집에서 도망한 종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어느 말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나 천인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며, 그 출신을 숨기지 않은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이다. 당시에 임금의 명령으로 각기 인재를 추천하게 되었는데, 성 우계(成牛溪)는 명성이 있어 조관(朝官)들이 모두 촉망하므로, 천거한 자가 4명에 이르렀는데, 유(劉)는 이보다도 더 많았으니, 여론의 돌아가는 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은 전혀 문벌을 숭상하므로 명문의 자제가 아니면 비록 학문이 정주(程朱)와 같고, 무예가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과 같더라도 사람들이 천하게 여겨 버리는 바이다. 우계가 비록 어질다 해도 청송(聽松 이름은 수침(守琛))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세상에서 존경함이 반드시 이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며, 유(劉)에 이르러서는 종의 아들로서 벼슬이 부원수에 올랐고 또 사람들도 감히 그 착한 것을 숨기지 못했으니, 그 인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어찌 구구한 지혜와 재능으로써 이룩될 일이었겠는가? 마침내 위급함에 임하여 목숨을 바쳐 천고의 미명(美名)까지 이루었으니, 어찌 특출한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이로부터 1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인심과 풍속이 날로 퇴패하여 비록 유극량과 같은 양재(良才)가 있더라도 군졸들 사이에서 늙어 죽을 뿐이다.
허노재의 말에, “말은 상등 말을 타고 소는 중등 소를 쓰며 사람은 하등 인간을 부릴 것이다. 상등 말은 천리를 갈 수 있고, 중등 소는 길들이기가 쉬우며, 하등 인간은 부리기가 쉽다. 만약 총명이 나보다 지나치면 내가 도리어 부리는 바가 된다.” 하였다. 나는 듣건데,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 했으니, 부릴 수 없는 것은 곧 하등 인간인 것이다. 노재의 설은 바로 저공(狙公)의 도토리를 주겠다는 수법과 같으니, 어찌 그릇됨이 아니겠는가?
[주C-001]허노재(許魯齋) : 원(元) 나라 때 학자. 허형(許衡)의 호. [주D-001]군자가 도를 …… 부리기가 쉽다 : 《논어》 양화(陽貨) 편에 보임. [주D-002]저공(狙公) : 《열자(列子)》에, “송(宋) 나라에 원숭이를 잘 기르는 저공이란 자가 있었다.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분배해 주기에 앞서, 아침에는 세 개를, 저녁에는 네 개를 주마고 하자 모두들 성을 내다가, 아침에는 네 개를 저녁에는 세 개를 주마고 하자 모두들 좋아했다.” 고 했으니, 이는 눈뜨고 사람을 우롱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
수령(守令)이 장차 체임될 때 고을 사람들이 다시 유임해 줄 것을 호소하는 자가 있으나 이것이 모두 진실에서 나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혹은 사정에 끌려 호소하는 자도 있고, 혹은 권력의 협박으로 이루어지기도 한즉 믿을 수 없는 점이 오히려 많다. 근세에 남구명(南九命)이란 이는 영남 사람이었다.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조정에 아뢰자 특별히 통정(通政) 계급에 승진되었다. 그 후에 어사(御史) 모(某)가 그 고을에 들렸는데 심히 거만하여, 이사(頤使)하려 하자 부사가 불응하였다. 어사가 크게 노하여 그를 무고하여 관직을 뺐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균전사(均田使) 모(某)가 순천에 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남(南)을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고 남사군(南使君)을 다시 부임시켜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 어사는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었고, 남은 추후하여 포장이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삭탈된 관직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처가 없었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서료(庶僚)들을 책려(責勵)할 도리가 있겠는가? 전자에 들은즉, “참의 유석증(兪昔曾)이 고을 백성들의 호소로 인하여 다시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이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정이천(程伊川)이 그 부친 태중 대부(太中大夫 이름은 향(珦))를 대신하여 조서(詔書)에 응하는 글을 올려 수령의 자주 체임하는 폐단을 말하자, 조서를 내려 정사에 우수한 자를 뽑아서 유임하게 하였으나, 조서에 응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천도 아마 애석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 법이 만약 시행된다면 어찌 백성에게 유리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