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통과의례
정 안 석
매년 이맘쯤이면 고입과 수능 관련 뉴스가 언론지상을 통하여 보도되고 교문 옆에는 고입과 대입에 대한 홍보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게시되곤 한다. 차창으로 보이는 그 현수막을 바라보니, 문득 지난 시절 진학을 앞두고 두려움과 부담감으로 꿈에도 억눌리며 몸부림쳤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조그마한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모 사립고등학교에 응시하였다. 때는 겨울이라 진눈깨비가 내리는 으스스한 날씨인 데다 처음 접하는 도시의 풍경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교정의 크기에 다시 한번 놀라면서 여덟 살 터울인 막내 작은아버지의 안내를 받아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막내 작은아버지는 “석아! 시험 잘 보고 오너라.”하시면서 나를 고사장으로 밀어 넣으셨다. “네!”하고는 들어갔지만, 처음부터 자신이 없었다. 시험을 마치고 교문을 나오니 작은아버지는 먼발치에서 나를 확인하고 다가와서 “그래, 시험은 잘 보았지?”하고 물어보셨지만, 나는 대답을 시원스럽게 하지 못하고 그저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눈치를 채신 작은아버지는 “그래 고생 많이 했구나. 추운데 빨리 집으로 가자.”라고 하셨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작은아버지 뒤를 힘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예상대로 1차 시험에 실패하고, 자신이 없어 이류라고 불리는 사립고로 원서를 넣었으나 그마저 실패했다. 입시를 위해 한 일주일 정도 둘째 작은아버지 댁에 머무르면서 입시를 준비했었는데, 정말이지 두 번을 연이어 실패하고 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 농사일을 도우면서 재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틈틈이 시간을 내어 책을 펼쳐 보곤 하였다. 여름방학에 고등학교 모표를 달고 고향에 내려오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과연 나도 고등학교 모자를 쓰고 교복을 한 번 입어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장손이라고 끔찍이 아껴 주셨던 할아버지는 용기를 북돋워 주시면서 열심히 공부하라며 농사철에도 특별히 배려해주셨고, 가능한 한 장손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고 아버지께 당부도 하셨다.
여름방학이 다 지나도록 아버지는 묵묵부답 외면하셨고, 학원에 가라는 허락도 하지 않으셨다. 같은 처지의 다른 친구들은 3월부터 대구에 있는 입시 학원에 등록하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내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져만 갔다. 어느 순간부터 서운한 마음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어린 마음에 외면만 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 이제는 공부하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독임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다행히도 9월에 접어들어서야 가까스로 대구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고 둘째 작은아버지 댁에 기거하며 입시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제일 마지막 모집한 입시 반이라서 마땅한 교실이 없어 지하실에서 온종일 공부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아는 친구도 없는 지하실에 갇혀 생활하자니, 지겨움과 외로움이 온몸을 엄습하여 생활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주인집 할머니가 새벽 기도를 나가실 때 깨워주시면, 눈을 비비면서 억지로 일어나서도 예습과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원에서 저녁 늦게까지 준비하여 짧은 기간 공부로 겨우 연합고사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학원에서 생활하던 중 경산에서 작은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작은아버지를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닭똥 같은 눈물만 쏟아 내었다. 도시 출신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학원 담을 넘어 바깥쪽으로 나갈까 하고 경비 아저씨의 눈을 피하기에 안달이 났다. 하지만 내 심정은 마치 동물원에 매어둔 호랑이나 사자같이 울타리 안을 맴돌 뿐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으로 눈물만 글썽일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느덧 고3이 되어 공부를 열심히 하노라고 했지만, 워낙 기초가 없고 머리가 우둔한 탓인지 교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성적은 하향길을 내리박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꿈에서도 가파른 절벽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악몽에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로 깨곤 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비고사 성적도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를 얻었기에 더욱 불안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3학년 후학기부터는 야간에도 독서실에 나가 부진한 부분을 보충하려고 애썼다.
이미 고입에서 두 번 고배를 마셨기에 대입만큼은 우셋거리가 되지 않아야겠다고 마음으로 다짐에 또 다짐을 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절대로 재수는 하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을 쳤다.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턱걸이로 대학에 합격했다. 모두가 흡족해하시고 칭찬을 해 주셨다. 합격증을 가슴에 안고 고향에 가니 어머니께서 반가이 맞이하시면서 “그래 우리 아들! 고생했다. 정말 축하한다.”라고 감격하시면서, “그런데 점쟁이 소리 별로 믿을 게 못 되더라. 모두가 하나같이 네가 시험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라고 말씀을 하시며 웃으셨다. 아들이 시험을 앞두고 있었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으셨던지 여기저기 점을 보러 가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기대한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얼마나 상심하셨을까? 내색은 하지 못하고 당신 혼자 깊은 가슴앓이를 하셨을 것 같다. 그때부터 새벽 일찍 일어나시어 마당에 정화수를 떠놓고, 온 정성으로 손 지문이 다 닳도록 아들의 합격을 비는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평소에 부지런히 공부하였더라면 쉽게 진학을 하여 어른들께 그리 심려를 끼치지 않았을 텐데,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모든 분, 특히 어머니께 너무 죄송하고도 고맙다. 그렇게 마음 졸이셨던 어머니도 이제 하늘나라에서나마 시름을 놓으시려나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돈다.
고입에서의 낙방은 처음으로 겪은 좌절과 실패의 과정이었지만, 그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많은 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유비무환의 값진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여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생활 자세를 형성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고향 청도와는 거리가 먼 봉화 석포중에 첫 발령을 받았지만, 그 이후 순풍에 돛을 단 듯 사십여 년의 교직 생활을 대과 없이 수행해 왔다. 지난날의 모든 어려운 일들이 밑거름이 되어준 것 같다. 모두가 정말 감사한 일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