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지키라 화를 냄으로써 상대방이 만들어 놓은 수렁에 빠지지 말라...아우렐리우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장기적인 관점으로 오늘을 혁신하라 직장인들을 보면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기회가 많다고 하고, 어떤 이는 힘들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무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다.'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관점에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나는 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인가 하루 빨리 변화의 흐름을 읽고 주도적인 자기경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실천해야 한다. '현재의 나'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10년 후의 나'를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인생을 '조감도 관점'으로 보자 마침내 궁지에 몰려서야 후회를 한다.
현재가 중요한 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고, 잘못된 과거까지 바로 잡을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차분하고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는 지구력과 끈기를 제공해 준다.
매 순간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자 현재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은 조직을 그만두는 순간 역량이 곧 바닥을 드러낸다. 조직의 문화와 시스템이 훈련시킨 수동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10년 후를 준비한다면 현재에 충실하라 '인격과 실력'을 지닌 사람들에겐 좋은 인연이 자연스레 다가온다.
장기적인 조감도를 가지는 것, 그리고 하루를 혁신하는 것!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10년 후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 법이다.
이 순간이 바로 시작할 시점이다.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정주영, 사진 한 장으로 조선소를 짓다 " 1970년대 초 어느 날. 청와대에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오래 동안 흘렀다. 박 대통령이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 정주영에게도 하나를 권했다. 정주영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배도 안 부르는 담배를 왜 피우느냐’고 생각한 ‘근검절약’ 정주영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정주영에게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박 대통령이 불을 붙여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총수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하겠다니 그런 게 있을 수 있소?”
정주영도 1960년대 말 조선소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건 몇 년쯤 뒤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압박 아닌 압박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포항제철이 완성되는 시기였다. 포항제철에서 생산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줄 산업이 필요했다.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정주영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다. 정주영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정주영에게 튕겨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결국 정주영은 결심한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덩치의 탱크가 바다에 떠 동력으로 달리는 게 배지, 뭐. 배가 별거냐.”
어렵고 힘든 일을 부딪치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주영의 주특기가 발휘된다. 정주영은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다.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조선소를 지을만한 돈이 없었다.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차관을 들여와야 했다. 정주영도 나름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서 갔다. 그렇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너희 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십만톤의 조선소를 지을 수 있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정주영의 모험은 시작된다. 3번에 걸친 관문을 뛰어 넘어야 했다. 당장 필요한 건, 돈이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외면을 당한 정주영은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영국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였으나, 신통한 반응이 없었다.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식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다. 정주영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에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차관 도입이라는 난제와 승부를 내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 정주영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소나무가 서 있는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 사진이 전부였다.
그는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롱바톰 회장 역시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직 배를 사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한국의 상환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 것 같다."
정주영은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500원짜리 지폐가 생각이 났다.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다. 주머니에 꺼내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테이블에 펴놓았다.
“이걸 보세요. 우리의 거북선이오. 당신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라고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우리가 당신네보다 3백년이나 조선 역사가 앞서 있었소.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우리의 잠재력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소.”
롱바톰 회장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현대건설이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시공하고 있고 발전계통이나 정유공장 건설에 풍부한 경험도 있어 대형 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주었다. 첫 번째 관문의 통과였다.
며칠 안 돼,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점심 약속 하루 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현대건설 사람들과 셰익스피어 생가와 옥스퍼드대를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궁을 보았다. 이튿날, 정주영은 우아한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됐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물었다.
“정 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소학교만을 졸업한 정주영은 짧은 순간 아찔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낸 사업 계획서를 보았습니까?”
“봤습니다.”
정주영은 순간적으로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퍼드대 졸업식을 본 생각이 났다.
“어제 내가 그 사업계획서를 들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번 척 들쳐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정주영은 구질구질하게 자신이 학력을 짧지만 사업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배포를 보여주는 유머를 내던졌다.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옥스퍼드대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거요. 당신은 그들보다 훌륭합니다. 당신의 전공은 유머 같소.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내겠소. 행운을 빌겠소.”
물론 정주영의 유머 한 마디가 차관을 이끌어 낸 건 아니다. 부총재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한 건, 자신들이 빌려줄 돈으로 조선소를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부총재는 그런 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도 될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정주영이 은행 쪽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재로 현대건설은 치밀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은행 쪽은 관계자들을 우리나라에 보내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두 번째 관문의 통과였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다. 현대건설은 마지막 심사를 받아야 했다. 영국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 했다.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갖고 와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당신네한테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내가 배를 살 사람이라면,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달러 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치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는 당신네 배를 사지는 않을 거요.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거요?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 없소.”
정확한 지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나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배를 만든다고 해서 그 배를 믿고 사갈 사람은 없어보였다.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자신처럼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날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다.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다.”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리바노스가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했다. 리바노스는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정주영 역시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겠다. 배값을 싸게 해주겠다.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겠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상황을 봐서 조금씩 배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다 돌려주겠다.”
정주영은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 사람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다. 마지막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준비 작업이었다. 앞으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다. 정주영은 다시 창의력을 발휘한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다.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건조는 선박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정주영은 처음부터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시켰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2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지었다.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는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구두끈도 못 푼 채 자고 배를 만들었다.
정주영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뜨끈해졌다. 불과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에도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그 사람들의 엄숙한 현실이고 삶이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삶이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정주영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그때마다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하는 생각으로 불끈 힘을 얻고는 했다.
건조 능력 70만톤, 부지 60만평, 70만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 것이 1974년 6월. 기공식을 한 1972부터 2년3개월만이었다.
현대조선은 그렇게 세워졌다. 그리고 한창 잘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1973년 불어 닥친 오일쇼크였다. 오일쇼크로 배를 주문했던 사람들이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취소가 잇따랐다. 현대조선이 만든 배 가운데 세척이 울산 앞바다에 떠 있었다. 그 중 한 배는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였다.
현대조선이 휘청할 수도 있는 위기였다. 정주영은 또 다시 역발상을 한다.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갖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된다.”
정주영은 1976년 3월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을 갖고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 진출했다. 우리나라에 수입해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렸던 외국 선박회사들은 수송 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400만달러를 요구했다. 정주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야 자기네들 사정이지. 그 동안은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쓴 것이지. 이제부턴 우리나라 배로 우리나라 기름을 운반해다 쓰겠다는데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정주영은 버텼다.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달러로 떨어졌다. 그래도 버텼다. 결국에는 10원도 건네주지 않고 기름을 운송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했던 아세아상선은 지금 현대상선이 되었다. 오일쇼크로 몹시도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잘 나가는 현대중공업이다.
다 만들어진 배를 안 찾아가려고 떼를 썼던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황량한 모래벌판 사진 한 장을 보고 배를 주문해 난감했던 차관 도입의 물꼬를 터주었기 때문이다.
"정주영, 꽁지 빠진 닭 '포니'를 만들다 " 정주영이 미국 포드와 손을 잡게 된 건, 그가 젊은 시절 아도서비스에서 일한 경험이 한몫했다. 1966년 4월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가 한국 진출을 위해 시장 조사를 벌였다. 포드는 우리나라에 합작 법인을 세우기 위해 몇몇 업체와 접촉을 벌였다. 그들이 서울에 왔을 때 현대는 접촉 대상자 명단에도 끼이지도 못했다. 현대는 그저 건설업체일 뿐이었다. 그 무렵 신진공업이 군사정부 주선으로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코로나를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조립해 내고 있었다. 자동차 사업은 정주영의 꿈이었지만, 포드의 눈에는 현대가 들어오지 않았다.
포드 사람들이 한국의 몇몇 회사와 접촉하고 돌아간 뒤였다. 정주영은 단양시멘트 확장 공사를 위한 차관 교섭을 위해 미국에 있던 정인영에게 미션을 내렸다. 차관은 늦더라도 당장 포스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고 들어오라고 것이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쉽게 되될까요?” 정인영의 반응이었다. “해보기나 했어?” 정주영의 대꾸였다. 정인영은 그날부터 정주영이 원래 유능한 자동차 수리 기술자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워 포드를 설득했다. 그 설득이 주효해서 현대는 파트너 후보 명단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해 12월 정주영은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뚝딱 세웠다. 포드는 제휴 대상기업들의 자본력과 신용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포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정확한 정보를 모았다. 주한 미 대사관을 포함해 미국 정보기관, 미국 언론기관, 주한 미국 금융기관, 심지어 주한미국 상공회의소까지 움직일 수 있는 조사 기관은 모조리 동원해 16개 기관이 관여했다. 현대건설 신용도와 CEO인 정주영의 사업에 대한 열의로, 현대는 1위를 따냈다. 그러나 신용도가 1위라고 해서 곧장 기술 계약이 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2월 포드의 국제 담당 부사장 일행이 정주영을 면담 하러 왔다. 면접시험이었다. 사흘을 예정했던 그들의 면담 스케줄은 단 두시간만에 끝이 났다. 자동차 엔진구조에서부터 변속장치, 제동장치, 1만여개 부품의 명칭들, 그리고 자동차 운전솜씨까지 이야기하는 정주영은 포드 사람들에게 자동차 만능 박사로 비쳤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일행을 직접 운전을 해 가면서 정성을 쏟았다. 그들이 내한한 이튿날인 현대와 포드는 21(국산부품)대 79(미국산 부품)로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예상을 뒤엎은 정주영의 자동차사업 진출은 우리나라 생산업계의 일대 충격이었다.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매달려 자동차공장에는 전력투구할 겨를이 없었지만, 현대는 울산의 시골구석에 진입로를 만들고 공장을 지었다. 3년은 걸려야 생산이 가능하리라던 포드의 예상을 깨고 만 1년 만에 코티나를 조립해 생산해서 시판에 들어갔다. 현대자동차가 코티나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시장에 나온 코티나 승용차는 툭하면 말썽을 부렸다. 곳곳에서 물어 달라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바람에 버스나 트럭도 잘 팔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예 코티나를 ‘코피나’ ‘고치나’ ‘골치나’로 부르기도 했다. 코티나 택시 100대가 한꺼번에 경적 시위를 벌이면서 자동차 반납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도로는 아스팔트를 깐 곳이 별로 없었다. 포장이 되지 않아 대부분 길이 울퉁불퉁했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 고장이 잦았다. 코티나도 마찬가지였다. 포드는 한국의 도로 사정을 미처 몰랐다. 현대자동차가 만드는 첫 자동차로 코티나를 선택하게 한 것은 이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정주영은 그런 포드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한국의 도로사정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게 마련이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 없었다.
뒤숭숭한 마당에 현대자동차는 물난리까지 겪게 되고 말았다. 1969년 6월의 일이었다. 울산은 큰 홍수로 거의 물바다가 되었다. 조립이 끝난 현대자동차의 차들도 물에 둥둥 떠다녔다. 이 바람에 ‘현대자동차가 물에 빠진 자동차를 판다’는 소문이 났다. 이미 차를 산 사람까지 혹시 물에 빠졌던 차를 산 것이 아닌가 해서 남은 찻값을 내지 않겠다고 나섰다.
코티나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똥차라는 오명을 얻었고, 첫 출시의 참혹한 실패는 경영압박으로 이어졌다. 월급이 몇 달씩 밀리는 건 다반사였고 현대차 임원들은 날이 새면 발바닥이 닳도록 돈을 꾸러 다니면서 하루하루 부도를 막아가는 지경이었다. 세금을 못 내 전국 최고 체납자로 신문에 발표된 일도 있었다. 경쟁사 사장이 공개석상에서 현대차를 인수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포드와의 제휴도 비걱거리기 시작했다. 정주영은 값싸고 질 좋은 소형차를 만들어 포드의 전 세계적인 판매망을 통해 수출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포드는 딱 잘라 거절했다. 포드는 국제 시장은 포드의 것이지 현대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정주영은 현대차가 포드의 부품 공장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73년 정주영은 포드와 결별한다. 그리고 우리 지형과 실정에 맞는 소형차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회사 내에서부터 반발이 무척 거셌다.
“자금자본금(회사를 경영하는 바탕이 되는 돈)의 20~30배나 되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어디에서 빌린단 말입니까.”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해도 언제 세계 시장에 차를 팔아 그 돈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5만대는 팔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1972년 전체 자동차 판매대수는 승용차와 버스와 트럭을 다 합해 봐야 1만8086대입니다. 이중 현대는 4061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출하기 전에는 국내에서 팔아야 하는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주영은 굴하지 않았다. 동생 정세영과 함께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엔진을 만드는 회사와 합작을 추진했다. 일본의 미쓰비시가 찍혔다. 미쓰비시는 신진과 합작을 희망했다가 경쟁업체인 도요타에 밀려 냉대를 당해 한국 진출에 유감이 있던 회사였다.
이렇게 해서 정주영은 독자 생산의 길을 열었다. 1973년 영국 퍼킨스엔진과 디젤 엔진 기술 계약을 맺고, 이탈리아 이탈디자인과 차량 설계, 일본 미쓰비시와 가솔린 엔진 및 변속기 기술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 10월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1호인 ‘포니’가 나왔다. 4기통 1239cc 80마력의 미쓰비시 새턴 엔진을 단 포니는 당시 에너지 파동 뒤 연료난에 대처하기 위해 설계된 모델이었다.
정주영은 포니의 디자인이 꼭 꽁지 빠진 닭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아했었지만, 포니는 출시 전부터 62개국 228개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삼성 황제경영의 원조, 이병철" 아버지는 부자였다. 풍년에는 2000석, 흉년이 들어도 1500석을 거둬들이는 집안이었다. 이병철의 아버지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집안은 대대로 부자였다. 집안은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지방의 유지로 살아왔다. 당쟁으로 치닫는 중앙정치를 혐오해 지방유지로 만족하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비판적 시각에선 세상이야 어찌되던 가문의 안전만을 추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집안의 가풍은 혁신적이거나 진취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둔가적인 가풍이었다. 이런 성향은 아들은 물론 손자에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다. 할아버지도 유학자였다. 아들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런 할아버지 밑에서 아버지가 한학공부를 강요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집안의 가풍에 도전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집안의 전통을 깨고 정치에 나섰다.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게 위협받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독립협회 회원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아버지의 도전은, 유학자라는 측면에서 국왕에 대한 신하의 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군신관계의 전형인 셈인데, 이는 삼성의 기업문화로 뿌리를 내린다. 아버지가 기독교청년회에 출입하며, 뒷날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서로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아버지는 이승만과 동갑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그의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향에 파묻혀 은거생활을 했다. 아들은 자서전에서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고향인) 중교리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즐겼다”고 썼다.
아버지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엄하게 대했다. 아들이 쓴 자서전을 보면, 아들은 학교를 옮기는 일을 아버지 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얘기한 것처럼 나와 있다. 아들은 무뚝뚝하고 무서운 아버지 보다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보다 가까웠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사람으로 나와 있다. 아들이 공부에 뜻을 붙이지 못하고 이곳저곳 학교를 옮기려고 할 때 화를 내거나 아들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않았다. 존재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다. 그만큼 아들에게 아버지 상은 근엄하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이 성장하면서 그대로 닮아간다. 엄한 아버지 아래에서 아들은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되고 보다 섬세한 성격으로 변해간다.
아들은 막내였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는 맏아들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다섯 살 터울의 형만을 인정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듯 권한 역시 주지 않았다. 집안일은 맏아들 위주로 돌아갔다. 그가 설 곳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집안일은 아버지의 지휘 아래 형이 감당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아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공부는 시원치 않았지만, 다만 유별나게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형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는 힘들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조그마한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성격은 아들이 커면서 도드라지게 된다.
아들은 부잣집 막내였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떠받들어져 자랐다. 게다가 그는 막내아들이었다. 아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이 떠받들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런 성격은 그가 만든 회사 조직에서도 그대로 녹아지게 된다. 그 뒤 막내아들 이병철은 삼성을 세웠다. 이병철의 막내기질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재계의 청와대로 불렸던 삼성비서실이다. 비서실은 삼성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병철이 계열사의 일을 직접 챙기기 힘들어지자 그룹을 조율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1959년 세워진 비서실은 처음엔 삼성물산에서 20여명의 과 조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비서실 규모는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계열사 직원의 공포의 대상이 된 감사팀이 만들어졌고, 그 뒤 비서실은 15개팀 200여명을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커져나갔다. 비서실 기능도 인사에서 기획, 재무, 감사, 금융, 경영관리, 홍보 등으로 분야를 넓혀나갔다. 이병철은 비서실을 통해 조직을 관리 통제했다. 비서실의 순기능은 그룹을 조율 통합한 것이지만, 역기능은 이병철과 임직원의 관계를 군신관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른바 황제경영의 시작은 이 비서실을 통해서였다.
이병철의 아들인 이건희조차 이 비서실 조직을 비판했다.
“과거의 비서실은 권위에 싸여 있었다. 게슈타포, KGB라고 불릴 정도로, 나도 그렇게 느꼈다. 비서실장은 잘 알 것이다. 회장이 된 후, 나는 비서실에 과거의 모든 잘못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많이 내놓을수록 상을 주겠다고 했다. 몇 번인가 말했는데, 그러나 안 나오더라. 포기 직전까지 갈 수밖에. 나는 도와주려고 그랬는데, 과거 비서실은 ‘체’병에 걸려 있었다. 내가 공장이라도 방문할라치면 비서실은 이렇게 지시했다. ‘회장 얼굴 보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체해라. 부동자세 취해라’ 는 등 내 앞에서는 좋은 소리만 했다. 안 되는 것을 갖고 오라 해도 그마저 안 됐다. “
이병철은 비서실을 통해 삼성을 ‘관리의 삼성’으로 만들었지만, 어찌 보면 비서실로부터 철저하게 챙김을 받았다. 이병철은 정주영처럼 현장에 직접 나서 갈 필요가 없었다. 비서실이 알아서 분석, 진단, 확인까지 해주었기 때문이다. 비서실은 이병철의 완벽주의 때문에 사소한 실수라도 걸리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를 썼고 항상 긴장해야만 했다.
이병철의 막내 기질을 볼 수 있는 사례. 이병철은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비행기에 내린 뒤 단 1초라도 발걸음을 멈추게 되면 비서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그래서 비서실 직원들은 공항 수속 때 단 1초도 멈추지 않고 통과할 수 있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하느라 초긴장을 해야만 했다. 고속도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칠 때는 이병철의 차 이전에 비서실 직원들이 먼저 톨게이트 비를 정산해야만 했다.
엄격한 아버지에게 자란 이병철 역시 엄격한 경영자 스타일이었다. 이병철은 직원들에게 인간적이기 보다는 엄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보였다. 또 아주 작은 일까지 놓치는 일이 없는 철저한 경영자였다.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는 이렇게 아버지를 회고했다. 언젠가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삼성 계열사의 상무 한 사람이 무슨 보고가 있어서 아버지 방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나도 쳐다보고 잇는데 아버지가 보다 못해 충고를 했다.
“김 상무, 다리 떨지 마래이. 다리 떨면 복 나간대이.”
그런데 대답은 ‘예’라고 하면서도 그 상무는 계속 다리를 떨었다. 한 번 더 충고를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김 상무는 다리 떠는 습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긴장을 해서 그렇게 다리를 떤 것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좀체 꾸중을 하거나 큰 소리를 친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무섭게 느껴졌다.
이병철의 이런 스타일은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당당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세배를 가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국제그룹을 날려버렸던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이병철은 머리를 굽히지 않았다. 1996년 2월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공판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증언했다.
“(삼성에서) 정치자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액수나 시기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회장의 연세도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데다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분이라 재임 중에 몇 번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이 회장은 대통령도 만나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만난 횟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이는 이병철이 그의 가문의 전통처럼 은둔가적인 기질의 영향일 수는 있다.
이병철은 사업을 시작할 때 항상 치밀한 분석을 한 뒤 시작했다. 이병철은 1938년 삼성상회를 개업하기 전에 중국까지 치밀한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큰 항목 20개와 세부항목 90개가 포함된 세밀한 ‘사업성 검토 지침서’를 마련한 뒤에야 최종 결을 내렸다.
아버지에게 실수를 보이지 않으려했던 이병철의 성격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깐깐함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까도남’ 스탈이었다. 이는 조직의 안정과 품질을 우선하는 삼성의 기업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막내아들 이병철, 중퇴인생을 밟다" "일에는 반드시 본말(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시종(처음과 끝이)이라는 것이 있다. 열아홉이 되고서도 아직 그것도 모르느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심하게 나무랐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엄한 꾸지람이었다. 당시 아들은 결혼을 했었고 아들의 아내는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아들은 2남2녀 중 막내였다. 그의 10대는 중퇴 인생이었다. 공부에는 도통 흥미가 없었다. 아들은 다섯 살 때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서당 이름은 할아버지의 호인 ‘문산’을 딴 ‘문산정’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막내아들이 책을 옆에 끼고 형과 함께 대문을 나서는 것을 늘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서른여섯 살 때 막내아들을 낳았다. 때문에 막내아들에 거는 기대는 각별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공부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두 서너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을 막내아들은 일 년 남짓 공부해야만 했다.
“문산 선생의 손자가 이래서야…….”
아들은 훈장의 이런 말을 듣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막내아들은 서당 공부가 너무 지루했다. 서당보다는 신식학교에 가면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신식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아들을 신식학교에 보내자고 말했고, 결국 아버지도 허락했다. 막내아들은 11살이 되었을 때, 이발소에 가서 아침마다 어머니가 손수 땋아 주던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막내아들에게 맞는 첫 번째 개화였다. 막내아들은 진주에 있는 지수초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아들은 이곳에서 운명적인 사람을 만난다. 경영 맞수와 사돈으로 발전하는 사람이었다. 바로 LG그룹을 세운 구인회였다. 구인회 역시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바로 그때 이 학교로 편입을 한다. 둘은 같은 반에서 같이 공부한 동기동창이었다.
지수초등학교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들은 곧 싫증을 내고 좀 더 넓은 곳으로 가기를 원한다.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왔던 아들은 서울에서 공부하던 사촌형과 얘기를 하다 서울을 동경하게 된다.
“서울 곳곳의 큰 거리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고층건물들이 거리의 경관을 자랑하지. 그리고 상품도 풍부하고, 학교도 많아.”
사촌형의 얘기를 듣고 난 뒤 아들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했다.
“옳지, 서울 가서 공부하자.”
아들은 또 어머니에게 서울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서울에 가야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공부하게 해주세요. 제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유학에 대해 얘기 했지만 아버지는 처음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침 아들의 외가가 서울에 있어 아들을 챙겨줄 사람이 있는데다 아들의 고집이 워낙 강해 결국에는 아들의 의견을 받아주었다.
서울로 올라가던 날, 아버지는 함안역까지 바래다주면 열차가 올 때까지 서울에 가서 조심해야 할 일들을 일러 주었다. 처음부터 찬성했던 어머니는 도리어 몹시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들은 다시 서울 수송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학교를 처음 가는 날, 아들은 들뜬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섰지만, 곧 그는 외톨이가 된다. 반 친구들과 말을 주고받아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독한 사투리 때문이었다. 아들은 반 친구들이 하는 말은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반 아이들은 아들이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학교 성적은 여전했다. 수학은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조선어나 일본어는 백점 만점에 겨우 60~70점. 음악과 미술은 간신히 낙제점을 면할 정도였다. 성적은 50명 가운데 35~40등이었다. 아들은 여기서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또 다시 학교를 옮기고 싶다고 얘기한다.
“보통학교에서 배울 것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통학교의 과정을 단기간에 마무리 짓는 속성과가 있는 중학에 옮기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학교를 옮기는 것을 허락하며 ‘사필귀정’이라는 말을 아들에게 풀어준다.
“매사에 성급하지 말아야 한다. 무리하게 사물을 처리하려 들면 안 된다.”
여러 차례 학교를 옮겨 다닌 아들은 아버지에게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몇 차례나 학교를 바꾸는 내가 아버지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쳤을까. 공부의 성과가 있다고 보였는지, 아니면 공부의 길은 가망이 없다고 보였는지.”
아들은 끝내 그 답을 물어 볼 기회는 없었다.
중등중학교 속성과에선 1년 동안에 보통학교의 5~6학년 과정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아들은 공부보다 야구와 테니스에 열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에게 다시 일본에 유학가고 싶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일에는 반드시 본말이 있고 시종이 있다”며 크게 꾸중했다.
아들은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이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아버지가 꾸중을 한 뒤, 일본 유학을 허용했다고 썼다. 하지만 자서전 내용과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는 다르다. 이병철이 일본 유학을 결심했을 무렵 집안에선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일본 유학을 가겠다니 집안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한때는 창고에 가두어 두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본 유학 생활을 시도했을 무렵에는 결혼까지 했을 때인데 당시의 도일 유학은 그때 분위기로는 무리였던 것 같다.
이병철의 10대는 ‘중퇴인생’이었다. 경남 진양군 지수초 3학년 중퇴, 서울수송초 5학년 중퇴, 중동중 3년 중퇴,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1년 중퇴했다. 여러 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장 하나 없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런 중퇴 인생으로 그가 커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는 자영업뿐이었다. 물론 잇단 중퇴는 학업을 중간에 그만뒀지만 사업은 중퇴하지 않겠다는 집념을 키우게 만들었다.
이병철은 쉽게 싫증을 내는 막내 기질로 여러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이른바 ‘스펙’을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이병철이 진주의 지수학교에 들어간 이후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었다. 학위나 졸업장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런 아버지의 성격은 아들 역시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그리고 아들은 학위나 졸업장과 같은 형식 보다 실용적인 면을 보다 강조하는 사람이 된다.
이병철은 자신이 일본 와세다 대학을 중퇴한 것을 놓고 이런 말을 했다.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이며 또 동양의 중심지라는 도쿄의 조류가 과연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에 갔었다. 한 1~2년 보니까 그 사람들 생각도 다 이해가 되고, 게다가 일본 도쿄가 세계 중심이 중의 하나라는데 그곳에서 세계가 보이더라. 그런 상황에서 유학 생활을 더 하면 뭣하냐 싶은 회의가 들더라.”
이병철은 그의 아들에게도 학위나 졸업장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치 않았다.
“일에는 반드시 본말과 시종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아들의 성격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바로 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 사업이 해볼 만한 것인지를 먼저 분석하는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이병철은 첫 제조업 사업인 제일제당을 설립하기 전에도 치밀한 분석을 거친 뒤 사업에 뛰어들었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지금의 삼성 DNA가 되었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간다’는 삼성 특유의 기업문화가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