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로운 시작
EVERY DAY A NEW BEGINNING
저자 소개_ 알베르토 R. 팀(Ph.D.)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리 및 신학 발전 분야의 전문가이다.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2년부터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1월 1일
열린 문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계 3:8)
새해는 새로운 기대, 새로운 도전과 함께 시작된다. 그런데 언제부터 1월 1일이 새해로 정해진 것일까? 그 기원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53년에 로마는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1월 1일을 새해로 정했다.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기원전 46년에 채택된 율리우스력과 1582년에 가톨릭 국가 대부분에서 채택하고 나중에 다른 나라들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한 그레고리력 역시 결국 같은 날을 한 해의 첫날로 잡았다.
1월에 해당하는 영어 ‘재뉴어리(January)’는 라틴어로 문(門)을 뜻하는 단어 ‘야누아(ianua)’에서 비롯했다고 일부 역사학자는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1월이 한 해의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과 출입구의 신이자 시작과 변화의 신인 로마의 야누스(Janus)에게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더 유력하다. 두 얼굴의 신 야누스는 과거를 돌이켜 보는 동시에 미래를 내다본다. 둘 중 어떤 해석이 옳든 간에 양쪽 다 1월을 미래로 향해 열린 문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신 야누스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길”(요 14:6)이자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계 22:13)이며 우리 앞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계 3:8, 현대인)을 제시하는 존재로 소개하신다. 자비로운 그분은 우리를 위해 1년 365일 그 문을 열어 두신다.
우리는 이제 막 새해 여정을 시작했다. 또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작이다. 이 여행길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이것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옮겼다. 맑은 날이든 궂은 날이든 비가 내리든 언제나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이어진 것이며 매 하루는 인생의 축소판임을 명심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하다면 오늘 당장 시작해 보라. 하나님을 위해, 구원이 필요한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라. 매일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올 한 해도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한국연합회 세계선교본부
전 세계 선교지에서 섬기는 선교사들을 위해
1월 2일
어렴풋한 모습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사진은 소중한 추억을 영구히 보존해 준다. 사진은 과거를 현실로 불러오고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줌과 동시에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말했다고 알려져 있듯 “인물 사진은 카메라가 아닌 그 맞은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진정한 사진은 설명이 필요 없고 말로 담아낼 수도 없다.” 이 시대는 거의 모든 사람이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되어 소셜 미디어로 사진을 공유한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826~27년에 프랑스 발명가 니세포르 니에프스는 최초의 사진을 촬영했다. 1839년 1월 2일, 또 다른 프랑스인 루이 다게르는 처음으로 달 사진을 찍었다. 안타깝게도 두 달 뒤 발생한 화재로 다게르의 연구실과 사진은 모두 불타 버렸다. 초기에는 흐릿한 흑백 사진이 전부였고 인물, 풍경 같은 피사체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그대로 담기 어려웠다. 그러나 꾸준히 기술이 발전했고 금속 플레이트, 유리 플레이트, 플라스틱 필름, 폴라로이드 종이, 다양한 감광 물질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풍경의 웅장한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기란 여전히 불가능하다. 사진 자체는 감정이 없으며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석양을 찍은 사진은 석양의 이미지일 뿐이지 실제 석양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은 하늘 왕국의 희미하고 흐릿한 모습만 겨우 보여 준다. 눈부시고 장엄한 그 광경을 요한계시록의 기록만으로는 절대로 충분히 묘사할 수 없다(고전 13:12).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지아드 압들누어가 남긴 영감적인 말을 되새겨야 한다. “인생은 카메라와 같다.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라. 적절한 타이밍을 포착하라. 그리고 결과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냥 다시 찍으라.” 하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서 하늘로, 유한에서 영원으로 이끄실 때가 이르면 이 땅에서 우리가 찍은 최고의 장면도 보잘것없게 느껴질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볼 것”(계 22:4~5, 킹흠정)이며 그분이 우리의 빛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앞에 거할 때 비로소 우리의 존재는 온전하게 표현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하지홍/황고은 선교사 부부(기타 지역)
선교지의 사회·경제적 안정을 위해
1월 3일
가을 낙엽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숲은 방법과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가령 위도를 기준으로 열대림, 온대림, 한대림으로 분류한다. 계절 변화에 따른 잎사귀의 반응을 기준으로는 상록수림과 낙엽수림으로 나눈다. 상록수림은 1년 내내 푸른색을 띠지만 낙엽수림은 매년 잎사귀를 떨구는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엘렌 화잇은 나무에서 유용한 영적 교훈을 이끌어 낸다. 상록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나타낸다. “여름에는 상록수와 다른 나무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면 상록수만 남고 다른 나무는 모두 잎을 떨어뜨린다. 그와 같이 지금은 진짜 그리스도인과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지만 신앙의 겨울철이 곧 닥칠 것이며 그때는 차이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쟁투, 602).
한편 낙엽은 재림 기별이 담긴 책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을 예증하기도 한다. 재림교회에서 미시간주 배틀크리크에 인쇄소를 딱 하나 소유하고 있던 1875년 1월 3일에 엘렌 화잇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여러 언어로 재림 기별을 발행하는 계시를 보았다. 몇 년 뒤 화잇은 스위스 바젤과 노르웨이 오슬로에 방문해 계시에서 보았던 출판사를 발견했다. 1890년대에 호주의 에코 출판사를 방문했을 때도 화잇은 비슷한 경험을 했다. 1878년 엘렌 화잇은 “재림교회 출판물이 늘어나 가을 낙엽처럼 뿌려져야 한다. 이 소리 없는 기별꾼들이 각 나라와 지역에서 수천 명의 마음을 일깨우며 변화시키고 있다.”(문전, 5)라고 진술했다. 가을과 겨울이면 낙엽이 온 땅을 뒤덮듯 우리도 재림교회 출판물로 온 세상을 뒤덮어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면주/김영문 선교사 부부(파키스탄)
파키스탄연합회 내 지역 교회들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1월 4일
과학과 종교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욥 26:7)
제대로 배운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현대 과학자가 많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기초를 놓은 과학자 중에 창조론을 믿는 이가 수두룩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이작 뉴턴 경이다. 1643년 1월 4일, 영국 링컨셔의 울즈소프 매너에서 태어난 뉴턴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로 여겨진다. 물리학, 천문학, 자연 과학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다. 만유인력의 법칙, 운동의 3법칙, 빛의 굴절 연구 등이 뉴턴의 업적이다.
1676년에 뉴턴은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는 까닭은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중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몰라도 나는 진리의 망망대해를 앞에 두고 바닷가에서 매끈한 조약돌과 예쁜 조개껍질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주의 기원과 복잡한 원리의 최종적인 해답을 과학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현대 과학자와 달리 뉴턴은 “수많은 규칙적인 운동이 단순히 몇 가지 기계적인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또 “중력은 행성을 움직이게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같은 공전 운동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우주의 틀을 마련한 지적인 존재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잘 알았던 뉴턴은 언제나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우주의 통치자”로 드높였다. 그는 과학보다 종교적인 글을 더 많이 남겼다. 그가 죽은 뒤인 1733년, 런던에서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예언에 관한 고찰』이라는 그의 유작이 출간되었다.
뉴턴은 “신앙에 대한 반대는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우상 숭배”라고 했다. 한마디로 진정한 의미의 무신론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경배의 대상이 바뀔 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섬기거나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다른 신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황자연/Danny Hong 선교사 부부(케냐)
켄두 병원이 선교센터로 거듭도록
1월 5일
재물이 아니라 지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대하 1:7~8, 10)
과학에 전념하면서도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까? 흑인 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1864~1943)는 그렇게 했다. 가난하게 자란 카버는 식물학자, 발명가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하나님께 식물의 비밀을 알려 달라는 기도와 함께 카버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한번은 카버가 “창조주 하나님, 대체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기도드렸다. 하나님은 “너무 많은 것을 궁금해하는구나.”라고 답하셨다. 그러자 카버는 “그럼 땅콩은 왜 있나요?”라고 질문했고 하나님은 “그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지.”라고 답하셨다.
카버는 땅콩의 용도를 300가지 이상 발견했다. 음식은 물론 기름, 페인트, 잉크, 비누, 샴푸, 세면 크림, 플라스틱 등을 땅콩에서 얻어 냈고 고구마에서도 가루, 전분, 합성 고무 등을 추출했다. 카버는 식물학과 농업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마하트마 간디,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가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토머스 에디슨과 헨리 포드도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카버는 ‘하나님의 공작실’로 부르던 자신의 연구실에 남아 제자들을 돕고 싶어 했다.
그는 특허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지만 가난한 이들도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특허를 내지 않았다. 이타적인 봉사 정신의 모본인 카버는 1943년 1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터스키기 대학 캠퍼스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부와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을 돕는 일을 행복과 명예로 여긴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 삶의 동기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대하 1:7~10)을 구했던 솔로몬은 “명예는 많은 재산보다 소중하고 존경받는 것은 금은보다 낫다”(잠언 22:1, 공동)고 말했다. 선한 사마리아인(눅 10:25~37)과 도르가(행 9:36~39), 조지 워싱턴 카버의 사례를 단순히 감탄할 만한 과거의 기억으로만 간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본받아 우리도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극복하고 인류를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배진성/정해옥 선교사 부부(인도 1000명선교사 훈련원)
새롭게 개원한 영어학원의 선교 중심적 운영을 위해
1월 6일
고아의 눈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1951년 7월 23일 자 『라이프』지에 마이클 루지어는 ‘웃지 않는 소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 한국 서울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작은 집에 부모와 형과 함께 살았던 이강용이라는 소년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다섯 살 때 그의 마을은 파괴됐고 군인들이 생존자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다. 분대원들이 소리를 질러 가며 생존자를 찾았지만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한 병사가 주변을 더 샅샅이 뒤졌고 발가벗은 채로 벽에 웅크려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있는 강용을 발견했다. 다른 쪽에는 짚으로 된 거적 위에 쓰러져 구더기와 파리로 덮여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강용의 어머니인 듯한 그 여인은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형과 아버지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기사에 따르면 “군인들을 따라가는 동안 강용은 계속해서 집이 있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발작하듯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고 미군들은 생각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강용은 가는 내내 울며 눈물을 흘렸지만 끝내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를 본 군종 목사는 연대 지휘소로 돌아와 “아이의 몰골은 수많은 작은 뼈가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라고 묘사했다. 고아원에서도 강용은 사람들과 어울릴 정서적 기력이 없었다. “강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없이 아이들을 피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거기 서서 그는 한 손으로 반대편 엄지손가락을 움켜쥔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흘러도 강용은 계속해서 자기를 형한테 데려다 달라고만 말했다.
강용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수많은 전쟁고아 중 한 명이다. 곤경에 처한 아이들을 위한 프랑스 기구(SOS Enfants En Détresse)에서는 1월 6일을 전쟁고아의 날로 지정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외로운 자녀를 돌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이다. 죽어 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이 우리 안에서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전재송/장혜순 선교사 부부(필리핀 1000명선교사 훈련원)
1000명선교사 지원자들의 증가를 위해
1월 7일
니콜라 테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계획과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창의력과 이상만 좇다가 좌절되는 프로젝트가 허다하다. ‘누울 자리를 봐 가며 다리를 뻗어라’는 속담이 있다. ‘뒹굴 자리 보고 씨름에 나간다’는 속담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꿈과 야망을 접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꿈에 빠져 살지 말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뜻이다.
니콜라 테슬라(1856~1943)는 타고난 발명가이자 엔지니어, 물리학자, 미래학자였다.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태어났고 1884년, 미국으로 이민해 토머스 에디슨과 함께 일했다. 은행과 금융계의 지원을 받은 테슬라는 곧 자신의 연구소와 회사를 차렸고 다양한 전자 장비를 개발했다. 뛰어난 두뇌로 그는 “발명하고 예측하고 수많은 기술을 개발해 냈다. 리모컨, 네온사인, 형광등, 무선 통신, 컴퓨터, 스마트폰, 레이저 빔, X레이, 로봇 공학과 더불어 그는 오늘날 전력 시스템의 토대인 교류 방식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1901년, 여러 투자자의 도움을 받아 테슬라는 전 세계에 전기를 공급할 발전소와 타워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수익성을 우려하던 금융계가 투자를 철회했다. 그리고 1917년 미국 정부마저 독일 스파이가 1차 세계 대전 중에 도청 장치로 사용할 우려가 있다며 끝내 타워를 철거해 버렸다. 이 위대한 발명가는 말년을 쓸쓸하고 가난하게 보냈다. 1943년 1월 7일, 테슬라는 뉴욕시의 평범한 호텔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상을 품고 위대한 꿈을 꾸는 것은 좋다. 실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소박하더라도 예산의 한도 내에서 이룰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세담/박유진 선교사 부부(대만)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선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1월 8일
비성경적인 전통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
수 세기에 걸쳐 비성경적인 전통이 진리처럼 떠받들어지며 교회의 비호를 받았다. 이러한 행위는 성경의 가르침을 뒤틀어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했고, 신앙과 맹신을 뒤섞어 놓았다. 천동설과 지동설로 논쟁을 벌이던 16~17세기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었고 이것은 지배적인 의견이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1632년,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책에서 태양이 중심이라는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는 과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갈릴레오를 이단자로 몰아 처벌했다. 1633년 6월 22일, 70세의 천문학자 갈릴레오는 흰색 참회복을 입고 로마의 종교 재판에 참석했다. 그는 “거룩한 성경에 반하는 이설, 즉 태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며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는 혐의를 받았다. 갈릴레오의 책은 불태워졌고 1642년 1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성경이 천동설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시편 19편 4~6절에서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솔로몬은 전도서 1장 5절에서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구절들이 과연 지구를 태양계의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진술들은 과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시적인 표현에 가깝다. ‘해가 뜬다.’, ‘해가 진다.’라는 표현은 오늘날에도 흔히들 사용한다. 왜 성경에만 일상에서 쓰지도 않는 다른 표현들을 구태여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관념과 이론, 전통을 성경에 갖다 붙이면 안 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류재경/김미현 선교사 부부(기타 지역)
각 교회(총 4개)의 리더십을 위해
1월 9일
재림교회 학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복음과 교육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에 다가갈 수 있고 교육으로 새로운 세대를 육성할 수 있다. 세계 지도를 펼쳐 보라. 교육과 복음이 모두 전파된 지역에서 재림교회는 성공을 거두었다. 재림교인 자녀에게 가장 적합한 학교는 재림교회 학교이다. 만약 교인들이 교회 학교의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1894년 1월 9일 자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에서 엘렌 화잇은 이렇게 진술했다. “젊은이와 성인들이 교회 학교와 세상 학교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일반 학교의 그릇된 규율과 모본을 알면서도 교회 학교를 선호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자세히 따져 봐야 한다. 우리의 교육 기관이 세속화되고 있을 수도 있다. 한 걸음씩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의 끈이 그들을 붙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학교들을 바로잡고 깨우칠 것이며 세상과 구별된 자리에 그들을 다시 굳게 세울 것이다. 나는 지대한 관심으로 지켜보면서 우리 학교가 진리의 영과 순결한 신앙으로 가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1년 뒤인 1895년 1월 9일 화잇은 다시 이런 글을 썼다. “모든 참된 교육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타나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원고 40, 1895.). 영성을 핑계로 학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학업을 핑계로 영적 헌신에 소홀해서도 안 된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우리 학교가 영적 정체성을 잃어 간다면 정체성 회복을 우선시하여 학교의 존재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
교회와 가정이 합심하여 교회 학교의 영적,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자녀를 그곳에 보내어 학교를 도와야 한다. 교회의 미래 세대를 위해 비판을 줄이고 대신 봉사하라. 학생들은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삶을 위해 사려 깊게 준비되어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오정훈/강유영 선교사 부부(기타 지역)
섬기고 있는 교회가 다시 한번 활력을 얻도록
1월 10일
강 건너기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 3:5)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루비콘강은 로마의 갈리아치살피나와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는 이탈리아를 나누는 경계였다. 로마의 어떤 장군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갈 수 없었다. 그것은 사형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기원전 49년 1월 10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의도적으로 루비콘강을 건너 내전을 일으켰다. 폼페이우스와 수많은 원로원 의원이 두려움에 로마를 떠났다. ‘루비콘강을 건넌다.’라는 표현은 여기서 유래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는 말이다.
몇 백 년 앞서 이스라엘 백성도 요단강가에 도착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그 강을 건너야만 했다. 하지만 때마침 강이 범람하여 “온 둑이 넘치”던 시기였다(수 3:15, 한글킹). 다리나 배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을 믿는 길밖에 없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자신을 성결하게 하시오. 주님께서 내일 당신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수 3:5, 새번역). 하나님은 물길을 여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을 밟으며건넜다.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은 수많은 설교와 노래에 영감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우리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도 하나님은 능히 해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집중하고 우리 삶에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그분께서 우리 삶에 효과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 11:40, 공동)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한 것과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시온산에 이르는 모습에서 유사점을 발견한 이도 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6~17). 우리 모두 그곳에 가야만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송을섭/이옥진 선교사 부부(일본)
선교지에서 영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1월 11일
감사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감사라는 아름다운 옷을 입으면 세상은 더 의미 있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감사는 평범한 날도 추수 감사절로 만들고 일상에 기쁨을 채워 넣으며 흔한 일도 축복으로 바꾼다.”고 윌리엄 아서 워드는 말했다. 밀려드는 경쟁, 요구 사항, 비판의 물결은 세상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러나 감사와 고마움을 표현하면 세상이 따뜻해진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에 고마움을 느낄 때 피어나는 꽃과 같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월 11일은 세계 감사의 날이다. 미국을 비롯한 몇 나라에서 기념하는 추수 감사절과는 다른 날이다. 감사의 날은 기원이 불분명하다. 감사 카드 제조사에서 매출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기원과 상관없이 감사라는 소중한 마음을 품고 표현하기 딱 좋은 날이다.
감사에는 적어도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겉으로 말만 하는 수사적 단계이다. 별 느낌 없이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다. 둘째는 진솔한 단계이다. 특정한 선물이나 행위에 감사를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가장 뜻깊은 것은 생활 습관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일상에서의 사소한 일에도 감사를 느낀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말한다.
고마운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오늘은 감사의 날이므로 나의 이 기도력을 읽어 주는 모든 독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준 이들,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을 이들에게 감사의 글을 보내기 바란다. 여러분을 사랑하며 보살피는 이들 역시 감사의 메시지에서 큰 힘을 얻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감사하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PCM(캠퍼스 선교사 운동)
2023년 새롭게 파송되는 대학생 선교사 2명을 위해
1월 12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와 재창조의 능력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 하나님의 명령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히 11:3).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다(시 33:9). 그런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도 동일한 힘이 있다. 성경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책으로 알려져 있다.
2013년 1월 12일, <히스토리 채널>에서 ‘세상을 바꾼 101가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방송은 세상을 바꾸고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첫 번째로 성경을 꼽았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일 것이다. 히포의 성자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초기 기독교 신학과 철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젊은 시절에 그는 “채워지지 않는 정욕에 이끌리는 습관”의 노예로 지냈다. 그러나 로마서 13장 13~14절을 읽은 뒤 완전히 변화되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회심하면 삶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께서는 주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주님 안에서 쉬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쉼을 얻지 못하나이다.” 엘렌 화잇은 “자신의 힘을 하나님께 죄다 내려놓으면 인생의 문제가 아주 간단해진다. 그렇게 하면 타고난 마음의 정욕과 벌이는 수천 가지 싸움이 싱겁게 끝나 버린다.”(청년, 30)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성경과 동떨어진 신비의 체험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요 1:14)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요 5:39) 이 둘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순전히 근거 없는 감정이 아니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굳게 뿌리박고 있다. 매일 특별한 시간을 정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배우면서, 변화시키는 성경의 경이로운 능력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양희원/현아름 선교사 부부(대만 따리교회)
패스파인더 사역을 통한 어린이와 3040세대의 선교와 양육을 위해
1월 13일
총력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전쟁의 끔찍함과 무서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전격전’이라는 혁신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독일어로 ‘번개 전쟁(blitzkrieg)’을 뜻하는 이 치명적인 전술의 핵심은 속도와 기습이다. 1943년 1월 13일, 아돌프 히틀러는 총력전을 선언했다.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면 목숨을 비롯한 모든 자원을 쏟아붓겠다.”는 입장이었다. 히틀러는 남성 공장 근로자를 여성으로 대체하고 독일군 50만 명을 추가로 징집했다.
성경은 우리도 악의 영향에 맞서 총력전을 벌이고 있으며(엡 6:12) 마귀도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계 12:12) 화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전쟁은 매 순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벌어진다. 만약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인다면 “시험에 빠진 자를 돕기 위해 천사가 신속하게 날아가 마귀의 군대에 둘러싸인 그를 건져 내고 확실한 기초 위에 굳게 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세력 간의 전쟁은 세상의 전쟁만큼이나 실제적이며 이 영적인 투쟁으로 영원한 삶이 결정된다.”(선지, 175)라고 엘렌 화잇은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을까? 철저하게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병사의 전신 갑주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엡 6:10~20). 이 우주적인 전쟁에서는 “기도하지 않으면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버틸 사람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면 한시도 안전하지 못하다”(쟁투, 530; FE, 537).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사람에게 그분은 “자기를 신뢰하는 그 누구도 사탄에게 굴복당하지 않도록 하늘의 모든 천사를 신속하게 내려보내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실 것”(쟁투, 560)이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을 자신의 보증으로 삼으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남경원/조효정 선교사 부부(파키스탄)
파키스탄 1000명선교사 훈련과정이 원활히 진행되도록
1월 14일
섬기는 삶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헌신적인 봉사에 관한 재치 있는 표현은 많지만 직접 실행에 옮긴 사람은 많지 않다.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용기 있는 인물이다. 1875년 1월 14일, 독일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태어난 슈바이처는 저명한 신학자, 음악가, 철학자이자 의사가 되었다. 네덜란드 간호사 마리아 J. 라헨디크는 슈바이처를 두고 “그는 진정 독일 셰퍼드와도 같은 사람이다. 슈바이처는 프랑스인처럼 매력적이면서도 독일인처럼 강직하다.”라고 말했다.
1904년, 슈바이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가봉에 의사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모두가 말렸지만 그는 전도유망한 슈트라스부르크 의과 대학의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1913년 4월 아내와 함께 랑바레네로 떠났고 거기에 정글 진료소를 차렸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오랫동안 말로 하는 일을 해 왔고 신학 교사와 설교자의 소명을 기쁘게 따랐다. 새로 시작한 이 활동은 사랑의 종교를 설교가 아니라 행동으로 전하는 일이다.”
1952년에 슈바이처 박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1953년 12월 10일에 상을 받았다. 그 뒤에도 그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상금을 랑바레네 나환자 병원에 사용했다. 임종을 앞둔 그의 아내는 아프리카에 얼마나 머물 계획이냐고 슈바이처에게 물었고 슈바이처는 “내가 숨 쉬는 한 이곳에 머무를 거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사는 것보다 타인, 진리, 선을 위해 사는 것이 훨씬 값진 선물”임을 굳게 믿었다.
헌신적인 봉사에 대해 슈바이처는 이렇게 덧붙였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일해야 한다. 그러나 남을 섬기고 불쌍히 여기며 돕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모범을 보이는 것은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방법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다.” 이 말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 오늘 곰곰이 생각해 보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태영/전주은 선교사 부부(서인도네시아 - 천명선교사 훈련원)
훈련원에 필요한 추가적인 건물의 건축을 위해
1월 15일
허드슨강의 기적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2009년 1월 15일 오후의 뉴욕 라과디아 공항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US항공 1549편이 이륙 후 3분 만에 쇠기러기와 충돌하면서 제트 엔진이 양쪽 모두 멈추고 말았다. 양쪽에서 불이 뿜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가까운 활주로로 갈 여유조차 없는 상황에서 체슬리 B. 설렌버거 기장은 허드슨강에 불시착하기로 결정했다. 영하 7도나 되는 추운 날씨였다. 비행기 내부로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승무원들은 재빨리 승객들을 날개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 뒤에도 설렌버거 기장은 두 번이나 오가며 객실을 살펴보고 나서야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확인했다.
탑승자들이 구조된 과정은 설렌버거 기장과 승무원 및 지상 구조 요원들이 일궈 낸 한 편의 팀 프로젝트와도 같았다. 놀랍게도 탑승자 155명 전원이 생존했고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은 2명뿐이었다. 전문가들은 “경이로운 비행 실력”, “항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불시착”, “영웅적이고 탁월한 항공 업적”이라며 칭송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우리 죄를 속하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떠올랐다. 그리고 하늘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분의 은혜로운 구원을 찬양할 미래의 모습도 그려 보았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어린양께 드리는 하늘의 찬양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찬양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아담은 하늘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님의 낙원에 서 있는 구속받은 자기 가족의 큰 무리를 볼 것”이라고 엘렌 화잇은 진술했다. “그때 그는 그 찬란한 면류관을 벗어 예수님의 발 앞에 던지고, 그분의 가슴에 몸을 던져 구주를 껴안는다. 그는 황금 하프를 연주한다. 그러자 승리의 노래가 하늘 공간에 울려 퍼진다. ‘합당하고 합당하고 합당하다.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난 어린양이시여!’ 아담의 가족은 노래를 부르며 면류관을 구주의 발 앞에 벗어던지고 엎드려 경배한다”(쟁투, 648). 여러분과 내가 그 영광스러운 현장에 함께 있기를 바란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의권/스즈키 에리코 선교사 부부(일본)
소그룹 사역의 활성화를 위해
1월 16일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 19:15)
성경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조세 칙령 때문에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가야 했다(눅 2:1~5). 카이사르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63~서기 14)이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뒤 전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기원전 27년 1월 16일, 로마 원로원은 그의 공식 명칭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라고 부르기로 결의했다. 역사가들은 보통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른다.
로마 황제는 신 혹은 신의 아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성, 다시 말해 신의 본성을 지니고 있느냐는 고대 이교도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황제 숭배에서 표현된 것은 상대적인 신성, 즉 신성한 지위 및 숭배자들에게 발휘하는 절대적인 권력이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는 군중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요 19:15)라면서 그들의 충성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예표 하는 것이 매일의 본업인 대제사장들도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변호해야 했지만 부끄럽게도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라고 소리쳤다(15절).
그리스도는 지조 없는 제사장들에게 거절당했지만 하나님께는 거절당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한없이 낮아지심으로 영광을 받으셨다(요 12:23~24).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외친 이들과 반대로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라고 소개한다.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어린양이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14절)라고 말한다. 우리를 둘러싼 군중이 뭐라고 소리치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기 바란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한국연합회 세계선교본부
10/40 선교 프로젝트 - 키르기스스탄 어학원 설립 및 국제 교회 개척을 위해
1월 17일
자정이 거의 되었다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사 21:11)
역사는 비극으로 시작해 극적으로 마무리된다. 태초에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결국 종말의 때에 인류는 다시 하나님을 마주할 것이다. 그때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명망 높은 과학 단체들도 지구의 멸망이 가까웠다고 염려한다.
1945년 9월 26일, “원자력의 등장으로 떠오른 과학적, 기술적, 사회적 문제”에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시카고 핵과학자 모임이 조직됐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이다. 1947년 6월에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위험한 기술 때문에 지구의 멸망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대중에게 경고하기 위해” 『핵과학자회보』(3권 6호) 표지에 ‘운명의 시계’ 그림을 싣기 시작했다.
이후로 70년 동안 운명의 시계 분침은 22번이나 조정되었다. 2017년 1월 17일에는 자정 3분 전에서 2분 30초 전으로 분침이 이동했다.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대부분 믿지 않는 과학자들조차 지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으며 세계적 대재앙이 코앞에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핵과학자회보』 1949년 10월 호 표지에는 운명의 시계 그림 밑에다가 “지금은 때가 다 되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할 때이다.”라는 로버트 리디의 글을 덧붙였다. 과학계와 환경계는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매우 고심하고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세상이 끝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이 오셔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계 11:18). 세상 끝은 더 가까워졌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깝다. 하루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세상에 경고의 기별을 전할 날도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5증언, 88).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박교린/이미화 선교사 부부(아랍에미리트)
아랍 현지인을 위한 디지털 사역이 활성화되도록
1월 18일
집이란?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
오늘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다. 1983년 1월 18일 화요일에 내가 아내 말리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랑스런 세 자녀 설런, 윌리엄, 셸리를 얻었다. 나의 결혼기념일을 맞아 어떻게 해야 집다운 집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단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수많은 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진정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 ‘가옥에 사랑을 채워야 가정이 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여기에다 ‘안정적인 가정이란 하나님의 사랑 위에 세워지고 그분의 가치와 원칙에 충실할 때 유지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오페라 알토 가수인 에르네슈티네 슈만하잉크(1861~1936)는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따뜻한 글을 남겼다. 그는 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를 막아 주는 지붕, 바람을 막아 주는 사방의 벽, 냉기를 차단해 주는 바닥. 그러나 집이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의 웃음, 어머니의 노래, 아버지의 기운이 함께해야 한다. 따뜻한 사랑, 행복으로 반짝이는 눈, 다정함, 성실, 우애가 함께해야 한다. 가정은 아이들의 첫 학교이자 첫 교회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친절한 것인지를 배우는 곳이다. 아프고 병들 때 위로받는 곳이다.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이 되는 곳이다. 아빠와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곳이다. 가장 높은 왕이라도 가장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이면 충분한 곳이다. 도타운 사랑이 돈보다 중요한 곳이다. 찻주전자마저 행복에 겨워 노래하는 곳이다. 집이란 그런 곳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함께하기를.”
죄로 물든 이 세상에는 완벽한 가족도, 흠 없는 가족도 없다. 그러나 깨어진 가족을 회복하고 냉랭한 집을 따뜻한 가정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마지막 때 우리가 맡은 사역 중 하나이다. 예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말 4:6). 이 세상의 가정은 하늘 집으로 향하는 여행의 지원 센터가 되어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고종식/김인아 선교사 부부(아드라 필리핀)
2023년 아드라 필리핀의 안정적인 사업을 위해
1월 19일
빛을 전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4~15)
어둠이란 빛이 없는 상태다. 빛이 밝혀지면 어둠은 자연스레 사라진다. 살아 있는 것들은 빛을 받을 때 더 왕성하게 자란다. 사실상 빛이 없다면 생명도 없다.
1883년 1월 19일 뉴저지주 로셀에서 개최한 행사는 전등이 가정에 들어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수많은 실험 끝에 토머스 에디슨이 전신주를 활용한 전기 조명 서비스를 개시한 것이다. 마을 전체가 중앙 발전소의 전기로 불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은 지구상의 수많은 도시, 시내, 마을, 가정이 전등을 사용하고 있다.
실생활에 빛이 빠질 수 없듯 우리의 영적 삶에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미암는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빛들의 아버지”라고(요일 1:5; 약 1:17)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와 같이 아버지를 드러내려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했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다(요 8:12).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므로 둘 다 이 세상을 밝힐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119편 105절에서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자기 자신의 빛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빛, 즉 그분의 말씀이라는 빛을 주위 사람들에게 반사할 뿐이다. 그 빛은 절대로 우리를 돋보이게 하지 않는다. 그 빛은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선언하셨다(마 5:16).
토머스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해 가정집들에 빛을 선사했듯 우리도 세상 어둠 속에서 죽어 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이 세상을 밝힐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기원/이용숙 선교사 부부(대만)
루조우 지역 주민들이 선교 프로그램과 개인 전도로 성경 공부 및 침례를 결심하도록
1월 20일
한마음으로 봉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극은 막을 내렸지만 냉전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컸다. 서구 자본주의 진영과 동구 공산주의 진영 간에 정치적·군사적 긴장이 팽배했다. 불안정한 그 시기에 존 F. 케네디가 미국의 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61년 1월 20일, 워싱턴 D.C의 미 국회의사당에서 케네디는 취임 연설 도중 미국과 서구 진영 국가들을 향해 함께 연합하여 공통의 목표를 떠받들자고 호소했다.
“뭉치고 협력하면 못 이룰 모험이 없습니다. 갈라서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반목하고 뿔뿔이 흩어지면 강력한 도전에 어찌 맞설 수 있겠습니까?” 연설 말미에 케네디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이타적인 봉사를 강조했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 존경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말고 우리가 인류의 자유를 위해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십시오.”
이 인상적인 연설에 담긴 정치적인 어조에 여러분이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진행 중인 거대한 선악의 대쟁투에 우리 모두가 직접 연루되어 있으며 여기서 자신의 노선을 확실하게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엡 6:12, 바른).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고전 12:12~31)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요 17:21) 이타적인 봉사로 서로를 받들 때만 승리할 수 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이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마 20:28, 바른) 오신 예수님의 모본을 우리는 착실하게 따라야 한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주위에서 죄로 멸망해 가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라. 우리가 속한 집단의 변화는 모두 사심 없는 봉사에서 비롯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민섭/김순임 선교사 부부(대만)
신띠엔 교회의 발 마사지를 통한 지역 사회 봉사를 위해
1월 21일
신자들의 침례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침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엄숙하고 의미심장한 의식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인이 되어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고(마 3:13~17) 제자들도 그와 같이 하도록 명령받았다(마 28:18~20). 물에 잠기는 침례식만이 죄에 대한 신자들의 죽음을 온전히 표현한다.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예식은 새 생명으로 부활했음을 뜻한다(롬 6:3~6).
유럽에 고대의 침례탕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수 세기 동안 성인들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식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도 시대 이후부터 대안적인 방식이 등장했다. 2세기 말 북아프리카에서는 유아 세례를 거행했다. 3세기 중반에 로마의 주교 노바티오누스는 병상에 누워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세례를 받았다. 예외적인 이 방법이 나중에는 기독교 전통의 공식 절차로 자리 잡았다.
16세기에 재세례파들은 성인 세례를 시작했다. 1525년 1월 21일, 이들은 취리히에 있는 펠릭스 만츠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을 거행했다. 기도 후에 전임 사제였던 게오르그 블라우록이 일어서서 평신도 콘라드 그레벨에게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청했다. 그레벨은 바가지로 양동이의 물을 떠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블라우록에게 부었다. 이어 블라우록이 모여 있는 다른 이들에게 세례식을 거행했다. 나중에 일부 재세례파는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식을 다시 시작했다. 침례교와 다른 몇 기독교 종파에서 이 방법을 따르고 있는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도 그중 하나다.
그리스도처럼 침례를 받고 신실하게 침례 서약에 따라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삼위께 도움을 구하면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삼위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다는 보증이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학교에서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우는 신실한 제자들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듣고 응답하신다”(6증언, 99). 침례 받을 때 했던 헌신의 서약을 오늘 새롭게 되새겨 보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남형우/배현경 선교사 부부(일본)
일본 재림교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을 위해
1월 22일
보편적인 지성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스파이 활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성경에서 가나안 땅을 탐색했던 히브리 열두 정탐꾼(민 13장)이나 여리고성에서 라합의 도움으로 숨었던 두 정탐꾼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수 2장). 현대로 넘어오면 소련의 KGB나 미국의 CIA가 떠오를 수도 있다. 첩보 활동을 벌이는 이유는 적국이나 심지어 우방에 관한 비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다.
1946년 1월 22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창설한 중앙 정보 단체는 나중에 중앙 정보국, 즉 CIA로 이름을 바꾸었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보 기관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의 인텔리전스 커뮤니티, 이른바 IC라는 정보 당국에서는 CIA를 포함해 17개 기관과 조직체가 독립적이면서도 협력적으로 움직이며 대외 관계와 국가 안보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IC나 기타 정보 기관들이 아무리 복잡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한들 온 우주를 감독하시는 하나님의 정보망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다윗왕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라고 외쳤고 솔로몬왕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라고 말했다.
인간의 정보 기관과 반대로 하나님의 정보 네트워크는 우리 편이며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 구하기 위해 작동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한마디로 온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정보망이 우리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모든 것을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내다보시는 그분의 영역 밖에서는 어떤 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토록 굉장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우리 각 사람을 보살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남웅/심은정 선교사 부부(대만)
신좡 행복국제교회의 한글반과 각종 전도회를 통한 사역을 위해
1월 23일
바람직한 모습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9~10)
“소박함과 정절”(딤전 2:9~10)은 흔히들 바울의 시대에나 해당하는 구시대의 복장 규정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라는 보편적인 원칙을 옷차림에 적용한 것이다. 합당치 않은 복장은 피하라는 말이다.
이 시대에는 모두가 과다 노출하고 있다. 오늘날의 유행은 섹시해 보이고 선정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데 치중한다. ‘팔지 않을 상품은 진열대에 꺼내 놓지 말라.’는 격언을 기억하자. 알몸 노출은 정신적인 헐벗음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보여 주려는 것이 실제로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인지 확인해야 한다. 교회에 갈 때마다 교회당의 통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통로이지 재림교인 패션쇼를 벌이는 ‘런웨이’가 아님을 명심하라.
한편 오늘날의 복장은 전부 잘못되었고 용납할 수 없다면서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이들도 있다. 엘렌 화잇은 1900년 1월 23일 자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헤럴드』에서 “옷차림에 무신경하고…예법과 모양새를 무시한 채 옷 입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여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의 복장은 마치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주인의 수준을 드러내는 듯하다. 그들의 옷은 지저분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툭하면 자기 자랑에 대해서 혀를 찬다. 그들은 세련되고 단정한 것을 자기 자랑으로 치부한다.” 제발 “세련되고 단정한 것”을 무신경하고 개념 없는 것과 혼동하지 말자.
항공사 대부분과 수많은 회사에는 특정한 복장 규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복장 규정을 채택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은 자기 모습 그대로 환영받고 예배에 참석해야 하며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교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거기에는 옷차림도 해당된다. 다른 이들이 그 원칙을 따르지 않더라도 적어도 여러분과 나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한석희 선교사(몽골)
게이트웨이 삼육대학 설립 프로젝트의 안정적인 진행을 위해
1월 24일
거의 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신 34:4)
2015년 11월 13일, 영국 육군 출신으로 나이 50세인 헨리 워슬리는 1,530km에 이르는 여행을 시작했고 남극점을 거쳐 남극 대륙을 횡단했다. 80일치 식량, 연료, 생존 장비를 담아 무게가 150kg이나 되는 썰매를 두 달 이상 끌었다. 어니스트 섀클턴을 비롯한 유명 극지방 탐험가들이 단체로 움직인데 비해 워슬리는 전 여정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횡단하는 최초의 탐험가가 될 뻔했다.
하지만 목적지를 48km 남겨 두고 워슬리는 이렇게 적었다. “71일간 혼자 남극 대륙 900마일을 걸었고 서서히 지구력이 떨어지더니 마침내 오늘 완전히 바닥이 났다. 이것이 여행의 마지막임을 애석한 심정으로 보고한다.” 어슬리는 칠레 푼타아레나스에 있는 마가야네스 병원에 항공기로 후송됐고 세균성 복막염이 장기 부전으로 발전해 2016년 1월 24일 사망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광야를 순례했던 모세는 하나님께 비스가산으로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았고 거기서 가나안 땅을 보았다. 앞서 드러낸 믿음의 부족 때문에 모세는 종착지인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 죽었다(민 20:12; 신 34:1~6). 그래도 모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해 영생을 얻었고(유 9) 후에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변형산에 나타났다(마 17:1~7). 그의 이름은 믿음의 영웅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히 11:23~29).
워슬리가 최후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듯, 천국에 관하여 꿈꾸고 말하고 노래하지만 안타깝게도 절대로 거기에 이르지 못할 사람이 많다. ‘구원을 거의 얻을 뻔했다는 것은 완전히 잃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는 속담이 있다. 새로이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분과 함께 걸을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아침마다 새로우”(애 3:22~23)므로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신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바른). 하지만 오직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잊지 말자(마 24:13).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김종훈/조혜정 선교사 부부(네팔)
지역 교회를 섬기고 있는 50여 선교사의 건강과 영성을 위해
1월 25일
폭풍 속의 고요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
시먼즈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여정이 평상시처럼 진행 중이었다.
배에는 영국 식민지 주민 80명과 모라비아 기독교도 26명이 선교사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형제와 함께 타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인 모라비아 신자들은 소박하고 욕심 없이 생활하는 활동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기쁨과 깊은 헌신에 존 웨슬리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화내지 않았고 무례한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1736년 1월 25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신자들의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웨슬리의 말마따나 느닷없이 “깊은 바다가 배를 집어삼키듯 달려들어 가장 큰 돛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며 갑판 위로 쏟아졌다. 찢어지는 비명이 영국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독일인들은 차분하게 노래를 계속 불렀다. 나중에 그중 한 사람에게 ‘무섭지 않았어요?’라고 물었다. 그 남자는 ‘아니요. 감사하게도요.’라고 답했다. ‘하지만 여자들과 아이들은 무섭지 않았을까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그 남자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니요. 우리 여자들과 아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답니다.’” 그날의 사건은 웨슬리의 영적인 삶과 목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목사 교육을 받은 영국 국교회의 안수 목사이자 선교사임에도 모라비아 신자들처럼 깊고도 실제적인 영성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여러분의 신앙은 얼마나 깊은가? 목숨을 위협하는 폭풍이 들이닥칠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주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흔히들 하는 생각보다 더 높고 깊고 넓은 경험이 필요하다. 이미 하나님의 위대한 가족이 되었지만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치료, 503).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하는 한편 매일 그분과 더 깊은 개인적인 경험을 쌓아야 한다. 주님과 친구가 된다면 맑은 날이 아니라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그분이 내 손을 붙들고 계신다는 확신으로 침착할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최지수 선교사(대만 PCM)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선교사가 되길
1월 26일
눈 속에서 맨발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2008년 5월의 화창한 봄날,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카노사성에 가 보았다. 거기서 『마틸데와 카노사성』의 저자인 마리오 베르나베이를 만나 계획에 없던 인터뷰도 했다. 베르나베이는 카노사의 마틸데 백작 부인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관계를 상세히 밝혔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굴욕당한 과정도 언급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의 날씨와 달리 하인리히 4세는 1076~77년, 그 지방에서 가장 추운 시기인 겨울에 카노사를 찾아왔다. 교황을 모욕하고 반역했던 하인리히는 교황에게 파문과 폐위를 당했다. 교황이 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인리히는 그를 찾아가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교황은 황제를 따뜻한 성안으로 영접하지 않았고 1077년 1월 26~28일, 사흘 동안 그를 밖에 머물게 했다. 하인리히는 눈 위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금식하며 머리에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사흘을 지냈다. 이렇게 혹독한 참회를 거친 뒤에야 교황은 마침내 황제를 자기 앞으로 나오도록 허락했고 용서를 베풀었다.
수백 년 동안 카노사는 로마 교회가 권력의 우위에 있으며 이 사실을 강력한 국가 수장에게 인정받은 역사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실세인 오만하고 거만한 그레고리우스 7세와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신 겸손하고 자비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조하기도 한다. 만약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인리히 황제를 대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신다면 어떻겠는가?
우리의 죄가 무엇이든 요한일서 1장 9절의 약속에 해당하지 않는 죄는 없다는 점을 잊지 말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2장 31~32절과 마가복음 3장 28~29절에 언급된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엄밀히 말해 그것은 ‘죄를 고백’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은혜에 힘입어 믿음으로 얻는 아름다운 구원에서는 죄를 회개하고 고백했는데도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나를 위한 것이며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해당된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남동현 선교사(대만 PCM)
국립 타이중 과학기술대학교 캠퍼스 선교를 위해(한국어 동아리, 점심 기도반)
1월 27일
하늘의 달란트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신동이자 작곡자, 음악 연주자로 알려져 있다. 4세 때 모차르트는 어떤 미뉴에트도 30분 만에 터득했다. 5세 때는 작곡을 시작했고 6세 때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약 600개에 이르는 최고 수준의 음악 작품을 남겼고 그 장르 또한 다양하다. 의심의 여지없이 모차르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다.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모차르트의 팬이었던 카를 바르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시작할 때는 바흐의 곡만 연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할 테고 그러면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그것을 특별히 즐겨 들으실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의 곡을 천상의 차원에 속한 것으로 상상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열정과 헌신으로 자신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활용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모차르트가 될 수는 없다네’라는 독일 노래가 있다. 위대한 작곡가와 같은 천재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님을 알려 주는 노래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한 손가락으로 치는 초급 피아노 악보도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재능이 많으냐 또는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느냐가 아니라 그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활용하느냐이다.
“세상이 ‘하찮다’고 여기는 일을 성실하게 대하는 삶이 성공한다. 작은 선행, 자제력을 발휘하는 작은 행동들, 도움이 되는 말들, 작은 죄를 경계하는 태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일상의 축복을 감사하고 일상의 기회를 지혜롭게 활용하고 주어진 재능을 부지런히 계발하는 삶이야말로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삶이다”(청년, 143). 오늘 여러분도 사랑이 담긴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PMM(목회자 개척선교운동)
올해 새롭게 선교지로 파송되는 선교사 5명의 가정을 위해
1월 28일
가장 위대한 명예의 전당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유명 인사들에 관한 기억은 명예의 전당, 기념비, 초상화 등으로 영구히 보존된다. 널리 알려진 프로젝트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이들도 있다. 파리 마르스 광장에 있는 에펠탑도 그중 하나다. 에펠탑은 원래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만국 박람회를 위해 세운 것인데 현재는 해마다 약 700만 명이 보러 오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의 회사에서 설계하고 건축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이라고 명명했다. 본래 모리스 쾨클랭과 에밀 누기에의 디자인에 스테팡 소베스트르의 통찰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1887년 1월 28일에 기초 공사를 시작해 1889년에 완공했다. 1957년에는 탑의 꼭대기에 방송용 안테나를 추가했다. 탑의 높이는 TV 안테나를 포함해 324m이며 무게는 7,300톤이다. 부품 1만 8,038조각을 리벳 250만 개로 이어 붙였다. 초기에는 당대 유명 미술가와 지식인들에게 비난과 항의도 받았지만 에펠탑은 현재 프랑스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에펠탑에는 에펠 외에도 프랑스 과학자, 공학자,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새겨 놓아 그들의 남다른 기여를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예의 전당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 어떤 명예의 전당도 아니 모든 명예의 전당을 다 합쳐도 우리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는 특권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꼭 필요한 참된 신앙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많다.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이 땅의 교회 녹명책에는 적혀 있지만 생명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이 있다”(1증언, 504).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사랑”할 수도 있다(요 12:43, 킹흠정). 덧없는 인간의 영광보다 영원히 지속되는 하늘 영광을 더 추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눅 10:20).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효수/김윤주 선교사 부부(터키)
수년 내에 현지인 사역자가 많이 배출되어 현지인들이 선교 사역을 이어 나가도록
1월 29일
느긋하게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도로의 교통 체증은 우리의 참을성과 그리스도인 품격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몇 가지를 점검해 보자. 앞에 있는 차가 느릿느릿하게 움직일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 상대 운전자의 실수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지금보다 차들이 당연히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가? 전설적인 자동차 레이싱 선수인 마리오 안드레티는 “모든 것이 규제 아래 있다면 당신은 충분히 빨리 움직이고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886년 1월 29일, 카를 벤츠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의 특허를 신청했다. 최초의 자동차로 알려진 이 차는 가솔린 엔진으로 움직이는 삼륜차였다. 같은 해 7월 3일에 벤츠는 독일 만하임의 링슈트라세에서 자신의 발명품을 대중 앞에 공개했다. 이 초기 모델의 최고 시속은 16km였다. 수년에 걸쳐 자동차 산업은 눈에 띄게 발전했다. 오늘날 공도 주행용 자동차인 부가티 베이론 16.4의 최고 속도는 시속 431km나 된다.
자동차는 문화를 반영한다. 오늘날의 차들은 숨 가쁜 사회만큼이나 빠르다. 규제 아래 있는 곳에서는 위대한 일을 이루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빠르게 운전하면 목적지에 더 신속히 도착할 수 있지만 더 빨리 움직일수록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초고속은 비단 운전뿐 아니라 삶의 모든 국면을 특징짓는 습관이 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정도로 숨 가쁘게 살 수도 있다.
자신의 생활 스타일이 어떠하든 그리스도의 초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바란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 다음으로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자신의 시간이다. 시간은 자신의 우선순위,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그분보다 더 시간을 차지하는 다른 ‘신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여러분은 그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하루는 이 점을 생각하며 행동하라.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이효신/이은화 선교사 부부(아드라 캄보디아)
캄보디아 정부의 평화를 위해
1월 30일
한 형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이 세상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격전장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여 한데 모으고자 하신다. 반대로 사탄은 자신의 끝없는 이기심으로 인류를 그릇 인도하여 갈라놓으려 한다. 사탄은 당파주의, 종족주의, 인종 차별 등의 죄악으로 온 세상에 뿌리 깊은 사회적 분열을 조장했다.
1939년 1월 30일, 독일 의회 연설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저는 다시 한번 예언자가 되겠습니다. 유럽 안팎에 있는 유대인 국제 금융가들이 나라들을 다시 한번 세계 대전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결과로 세상이 공산화되어 유대인이 승리하는 게 아니라 유럽에서 유대인의 씨가 마르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적인 자신의 연설을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실현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참된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한 가족으로 여기며 문화적, 인종적, 사회적 장벽을 극복한다. 구약 성경에 묘사된 메시아 시대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함께 예배드리면서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으로 만드는 시대이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보고 나서 시므온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만민”(눅 2:30~32)에게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예언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라고 확증해 주었다. 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이끌어 영적인 한 형제가 되게 하고도 남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외국인들이나 나그네들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이다”(엡 2:19, 바른). 상대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심지어 원수이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서로 사랑할 수 있다(마 5:43~48).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석수장이가 되어 인종적·사회적 균열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메울 수 있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세상은 우리의 신앙에 담긴 변화시키는 능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1000명선교사 운동
2023년에 ‘가는 선교사’와 ‘보내는 선교사’가 크게 늘도록
1월 31일
조건을 따지지 않는 충성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7~38)
셰익스피어는 “불에 타 죽는 사람보다 불 지르는 쪽이 이단”이라고 진술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가인이 친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창 4:1~15) 그리고 이후 그와 비슷한 수많은 사례에서 입증됐다(히 11:30~38). 그중에는 발도파(왈덴스인)들의 학살도 포함된다.
발도파 신자들은 가톨릭에 순응하라는 강요를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 1655년 4월 23일 피에몽에 살았던 발도파 약 1,700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 듯 1686년 1월 31일, 사부아 공작은 “골짜기에 있는 발도파 교회들과 거주민을 진멸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단을 포기해야만 사형이나 추방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도파들은 계속되는 위협에도 믿음을 지켰다.
이것을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은 박해당하고 집을 잃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연구했고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았다. 재산을 빼앗기고 집이 불탔을 때는 산으로 도망해 거기서 굶주림과 수고와 추위와 헐벗음을 견뎠다. 그럼에도 집을 잃고 흩어진 이들은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노래했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으며 격려했고 초라한 피난처조차도 감사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들고 죽는 아이가 많았다. 그러나 부모들은 믿음을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 땅의 안락함과 세상의 재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하나님께 위로를 얻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상급을 내다보았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신앙만이 인생을 내걸 만한 신앙임을 잊지 말자. 주님을 향한 발도파들의 용기와 믿음이 우리 자신의 신앙이 되게 하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한국연합회 세계선교본부
10/40 선교 프로젝트 - 수단에 설립될 도시감화력센터를 통한 선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