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제 올해의 정월 보름입니다. 정월 대보름.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정월달에 있는 보름을 어떤 세시 명절처럼 여겼었고. 또 농경사회다 보니까 마을 공동체에서 이날에는 한 해 농사나 농사의 풍요나 안정, 이런 것들을 기원하는 날이기도 했고. 이 날은 이제 마을 마을마다 다양한 동제(洞祭)라 그러지요.
마을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제나 동신제(洞神祭) 같은 제사를 지내기도 한 날이였구요. 한 해의 안정을 기원하면서 다양한 곳곳 지방마다 어떤 굿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이제 지내기도 하면서, 이렇게 한 해의 안정을 기원했다. 그래서 제사를 모시면서 한 해의 안정을 기원한 그런 날이기도 하구요. 짚신 밟기니 쥐불놀이니 뭐 이런 것들을 하기도 하고.
또 오늘 약식과 오곡밥 또 묵은 나물, 부럼 깨기 이런 것들을 하면서 절기, 어떤 절식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집집마다 해서 먹기도 하고 그랬던 날입니다. 보통 이제 입춘에서 보름 때까지 한 해 시작하는 때다 보니까 요때 이렇게 제사를 지내거나 한 해의 풍요 안정을 기원하거나 그런 의미에서 점을 보러 가거나 이런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제 한 해가 시작이 되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또 누구나 올 한해 나도 저 보름달처럼 정말 원만하고 좋은 일들이 좀 생기기를 바라고, 이런 마음들을 가집니다. 그런 마음으로 절에 또 나오시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에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내 일은 왜 이렇게 안 풀리지? 1년, 2년, 3년이 지나도 왜 이렇게 내 일은 안 풀리는가?
하는 사람도 아마 계실 것이고. 야, 나는 신기하게 절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이런 분도 계실 텐데요. 뭐랄까, 이 절에서는 어찌 보면은 삶의 진실? 이 세상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곳이거든요. 이 진실은 사실은 어찌 보면 좀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 단순하고 간단한 진리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괴로움의 문제가 아주 단순하게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단순하게 해결될 수가 있어요. 모든 괴로움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너무나도 단순한 것을 알아도, 알아도 실천이 어려워가지고 계속해서 괴로운 인생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럼 이 단순한 진리가 뭐냐?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항상 사성제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는 괴롭다 이거거든요? 지금 뭔가 괴로운 일이 있다. 괴로운 문제가 없으면 절에 나올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뭔가 모르지만 괴로운 문제가 있다.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이걸 고성제라고 해요. 그러면 도대체 왜 괴로운가? 왜 괴로우냐? 괴로움의 원인을 찾으면 괴로움의 원인만 해결하면 괴로움은 해결되는 거 아니냐. 이게 이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거든요.
단순합니다. 절에서는, 저도 이런 표현을 많이 쓰지요. 삶은 이대로 완전하다. 제법실상이다. 이러는데. 이거는 어찌 보면, 이것도 좋게 표현하니까 이런 건데요. 완전하다,라는 말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지금 이대로 일뿐이지. 지금 이렇게 삶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지. 여기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다기보다는 그냥 아무 일이 없습니다.
아무 일이 없어요. 그냥 이럴 뿐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괴로움이 왜 생기느냐?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냐? 그게 이제 인연 따라 생기는 거거든요. 어떤 인연 따라 생기느냐? 내가 세상을 이렇게 접촉하잖아요. 세상과 마주하면서 매일매일 삶을 살아갑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만나고 수많은 상황을 마주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사실은.
사람 만나면 사람 만나면 되고. 대화할 땐 대화하면 되고. 안 풀리면 풀도록 노력하면 되고. 노력해도 안 풀리면 그냥 말면 되고. 할 일 있으면 하면 되고. 했는데도 잘 안되면 안 되는 대로 그냥 안 되면 되고. 잘 되면 되면 되고. 그냥 사실은 삶은 그냥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데서 문제가 생기느냐면,
내가 세상을 자꾸 마주하면서, 마주하면서 접촉을 하다 보니까 여기에 보자마자, 이게 내 착각이지요. 어떤 착각을 일으키느냐면, 보자마자 이건 좋아 보이고 저건 나빠 보이는 거예요. 이 사람은 괜찮아 보이고 저 사람은 별로처럼 보이는 겁니다. 내 아들이 이 일을 하면 좋은데 저런 행동을 할 때는 싫어 보이는 거지요.
남편이 이런 일을 할 때는 좋은데 저런 일을 할 때는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거지요. 또 이런 사람은 내 마음에 드는데, 저런 사람은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지요. 이렇게 저건 좋아 보이고 저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럴 순 있지요. 거지요? 그런데 이건 좋아 보이고 저건 안 좋아 보이는 게 100%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게 좋아 보이는데 딴 사람은 저게 좋아 보일 수 있어요. 나는 내 아들이 공무원을 하기를 바라는데. 딴 집은 야, 공무원 해서 뭐 하냐? 사업을 해야지.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지만 반드시 행복하다? 저렇게 하면 반드시 불행하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건 확실한 이야기예요. 아들이 유학을 갈까 말까 고민을 해요. 가는 게 좋은지 안 가는 게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아이의 인연이 어떤지 모르니까. 가서 잘 될지 안 가서 잘 될지. 아이가 서울대를 가는 게 나을지 부산대를 가는 게 나을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연하게 서울대 가는 게 낫지. 이렇게 확정을 지어버려요, 머릿속에서.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 갔다가, 왔다 갔다 하다가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어떻게 된다면 만에 하나. 차라리 부산대 다니는 게 나을걸. 이럴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 부산대에서 정말 인생의 둘도 없는 귀인을 만나서 인생이 확 풀릴 수도 있지요.
서울대 갔다가 자꾸 교수를 하려고 했는데, 제가, 아 이런 얘기 하면 안 되지만 서도 모든 분야 분야마다 그곳이 이상적이지 않더라구요. 모든 곳들은요, 전부다 뭔가 문제들을 안고 있더라구요. 제가 아는 분들도 나름 정의롭게 열심히 살았는데 뭔가 사바사바를 못해가지고 뭔가 남들 하는 걸 못해가지고 거기 정교수가 안 되고. 이런 분들도 봤거든요.
어디 가서 잘 될지. 어디 가서 안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고 착각을 해요. 내가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라고 생각하는 걸 진짜라고 믿어버리고, 그게 진짜야,라고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생각에. 그 생각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으면서. 모를 뿐인데.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는, 미래에 대한 100% 완벽한 점을 칠 수가 있을까요?
어디 가도 100% 완벽한 점을 맞추는 데는 없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 데나 가보세요. 100% 여러분 미래를 맞추는 데가 있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을 확실하게 맞춰서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느냐? “여러분의 미래는 완벽하게 불확실하다.” 이것만이 확실합니다. 여러분의 한 시간 뒤, 두 시간 뒤, 일 년 뒤, 이년 뒤는 완벽하게 불확실합니다.
그리구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걸 노자는 혼돈이라는 표현을 썼고요. 불교에서는 모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우리는 내 머리를 가지고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삶은 이런 거야,라고 정리하기를 좋아하거든요. 그게 바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난 이렇게 살아야 돼. 저렇게 살면 안 돼. 내 머릿속에서 정리한 거잖아요.
그게 나를 괴롭히는 줄 모르고. 정리하면 안 됩니다. 정리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전부다 ‘무주(無住)’ 머물지 마라. ‘무상(無相)’ 상을 세우지 마라. ‘무집착(無執着)’ 집착하지 마라. 뭐라도 내세울 게 없다,라고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거든요. 왜 그러느냐면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기 때문에,
인연 따라 생긴 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습니다. 혼돈. 그게 진실이에요. 혼돈이라는 신에게 질서를 갖다 주려고, 내 생각만 해가지고 동서남북에 있는 신들이 눈, 코, 입을 선물로 주자. 그래서 눈, 코, 입을 선물로 뚫어주자마자 죽잖아요. 혼돈은 혼돈인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못 견뎌 하는 거예요. 내 미래가 불확실한 것을 우리는 못 견뎌 합니다.
그것 때문에 미래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삶이 시작돼요.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내 미래는 이렇게 돼야 돼. 저렇게 돼야 돼. 이렇게 정하기 시작하면서 그 정한 것이 옳다,라고 여기면서 정해진 대로 삶이 풀려나가면 잘 풀린다. 그러고. 내가 정한 대로 안 되면 안 되고 있어,라고 내 스스로 만드는 거지요. 괴로움과 행복한 삶을 내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삶은 불확실한 것 자체가 진리이고. 불확실한 게 아름다움이고.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고. 마치 꿈과 같아서 꿈의 스토리를 굳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꿈인데. 그게 진짜라면 실상이라면 알아야 되겠지만 알려고 노력해야 되겠지만,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허망한 물거품과 같은, 꿈과 같은 것인데,
그걸 확실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확실한 건 하나가 있지요. 꿈을 깨야 된다,라는 사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깰 생각은 하지 않고 꿈속에서 꿈속의 스토리를 꿈의 이야기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어떻게 내 식대로 바꾸면 좋을까? 그것만을 머릿속에 잔뜩 끼워 맞추고 상을 가지고 있지요. 이렇게 해야 돼. 난 이런 사람이 돼야 돼. 난 저럼 사람이 돼야 돼.
내 미래는 어떻게 해야 돼. 여기서 이제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사실 여러분 인생에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대로의 삶이 언제나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무 일없는. 그냥 이렇게 살고 있을 뿐이에요. 거기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돈이 없어서 한 1년, 2년 정도를 배가 고파서 밥에다 김치만 먹고사는 인생, 그게 비참한가요?
그게 비참하다는 건 내 머릿속에 생각일 뿐이지요. 옛날 사람은 그렇게라도 먹었으면 다행이라고 느꼈을 것이고. 저도 돌아 보건대, 제가 지금 이렇게 돌아 보건대, 제가 어릴 때,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때 특히나 더 어릴 때도 그랬구요. 집안이 아주 가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늘 빚을 갚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빚에 대한 이자를 갚으러 이렇게 제가 심부름을 늘 갔던 기억이 나요.
그리구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아주 좀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아침은 그냥 거르고 점심 겸, 점심을 조금 늦게 먹으면서 점심 겸 저녁을 정식, 대학교 식당에 정식이 천 원이었는데. 그걸 좀 많이 주세요, 하면은 잔뜩 줘요. 밥을 잔뜩 하고 반찬을 잔뜩 들어가지고 그걸로 한 끼를 때운 적도 많고.
집에 가는 길에, 지금도 생각나는 게 집에 가는 길에 2천오백 원 하는, 일 인분에 2천오백 원하는 삼겹살집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집을 지나갈 때마다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처럼 가난한 친구 하나를 꼬셔가지고 둘이서 “야, 우리 삼겹살 이 인분만 먹으러 가자.” 그래서 돈을 모아서 둘이서 한 6, 7천 원을 들고 그 집을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계속 고기를 요만큼 조만조만하게 잘게 잘라가지고 쌈은 2개 3개 넣고 김치 이런 거 잔뜩 얹고, 마늘과 김치를 계속 달라 해가지고 그렇게 먹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걸 단 한 번도 저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거나 그게 정말 부끄러웠다거나, 그런 생각 자체가 전혀 없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인생의 어떤 한때였어요. 아이들은 사실,
어른들이 남들 다했는데 얘만 못하면 비참하다고 내가 더 크게 느끼지. 아이들 때는 그렇게 크게 모를 수도 있구요.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어린 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행복하게 아무 문제없이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실은 우리 생각에는 이렇게 돼야 돼 저렇게 돼야 된다,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것은 제 인생에 너무나도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제가 처음 군에 와가지고 중위 장교 월급을 받았는데, 47만 원이 지금 기억이 납니다. 47만 원 초봉을 받았는데 그 느낌이 어땠냐면, 야 이 많은 돈을 내가 어디다 쓰지? 도대체. 돈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돈이 항상 모자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돈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랍게도,
나는 그 친구들이 다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사람들과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니까 아, 군인 월급은 박봉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진심이더라구요 그게. 난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더니 진심으로 박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이처럼 사실은 지금 내가 괴롭다,라고 여겼던 것이 진짜 괴로운 것인지 아닌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주춤하고 실패도 해보고 아파해보았을 때, 그걸 딛고 더 큰 사람이 되잖아요.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항상 칭찬만 받기를 원하면 그거는 부모님의 어리석음입니다. 욕심과 집착이기도 하고.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하고 칭찬도 받기도 하고 양변을 함께 경험하면서 살아야 어떤 삶의 균형이 잡힙니다.
친구를 만날 때도 무조건 좋은 친구만 사귀어라가 100% 정답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좋은 친구도 만나지만 때로는 조금 안 좋은 친구도 만남으로써 균형 있게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돼야 돼. 반드시 저렇게 돼야 돼,라고 내가 고정 짓고 그것을 100% 옳다,라고 믿기 때문에,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괴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삶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내 머리가 뭔가 계획을 세워놓고 특정한 걸 정해놓고 그것대로 돼야 되고 그것대로 안 되면 큰일 나,라고 머리가 속삭이는 것을 믿지만 않으면 혼돈스러운 이대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미래가 불확실한 이대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확정적인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어요. 사실은.
확정적인 것이 없는데 확정적일 거라고 믿는 게 얼마나 큰 괴로움입니까?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나봤는데요. 미래를 확실하게 안정 짓게 해 줄 만한 돈이 생기면 행복할 거라고 다들 믿잖아요. 그래서 돈을 벌잖아요. 미래가 확실할 수밖에 없을 만큼 돈을 번 사람들을 저는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 사람들? 이 돈 다 날릴까 봐 괴로워해요.
이 수십억, 수 백억을 어느 순간 날아갈 수도 있다,라는 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심지어 아주 많은 연금을 받는 분이 계세요. 제일 안정적이잖아요. 죽을 때까지 연금이 나오니까 제일 안정적이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 줄 아세요? 야. 이러다가 나중에 국가가 부도가 나서 내 연금이 안 나오면 어떡하지?
이 생각을 하더라니 까요. 이렇게 우리 머리라는 것은 남들이 봤을 땐 안정적인데, 본인은 안정적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끊임없이 불안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거지요, 불안정성을. 그러니까 완벽한 삶을 꿈꾸는 것 자체가 허망한 착각이에요. 내가 만든 허망한 착각. 그렇게 하는 인생을 살면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내가 잘 살았나 못 살았나를 자꾸 재야 됩니다.
내가 계획해놓은 대로 잘 살았나 못 살았나. 내 인생이 몇 점인지를 체크를 해야 되구요. 그다음 한 해가 시작될 때 항상 점 보러 가서 내가 올해는 잘 살까? 그 잘 산다는 게 뭔지. 내 머리가, 내가 규정해놓은 거잖아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잘 사는 거야,라고 해서 잘 사는 삶을 창조해놓고, 그걸 어만 점 보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면 어쩌겠습니까?
내가 창조했는데, 그 답은 딴 데 가서 달라고 하는 거지요. 내가 창조주거든요. 내가 신이고 내가 부처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사람한테 가가 지고 내 인생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 끊임없이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그렇게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 삶은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확실하게. 단순합니다. 어떻게 단순하냐? 지금 나에게 벌어지는, 내 인생에 벌어지는 이대로의 삶이 내 인생의 진리입니다. 진리만이 내 삶에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중에 어떤 분들은 “아니 괴로운 일이 생기는데 그게 왜 진리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괴로운 일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첫째는 그렇구요.
또 어떤 분은 나는 빨리 죽는데. 이제 곧 죽게 됐는데. 이게 진리라고 할 수가 있냐,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죽는 게 진리이지, 평생 죽지 않고만 사는 게 진리일까요? 남들은 다 죽는데, 나만 천 년만 년 산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게 진리이고,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죽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왜 그럴까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생각을 나라고 생각해서 그러고. 내가 이렇게 시계를 쳐다보잖아요. 시계를 쳐다보는 것과 이 몸을 쳐다보는 건 똑같습니다. 이걸 나라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요. 이 몸은 인연 따라 잠깐 생겨났다 인연이 다하면 그냥 가는 거고, 가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건 괴로운 일이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런데 몸이 내가 아니라, 그러면 내가 누구지?
이 몸이 내가 아니고 생각도 내가 아니고 감정도 내가 아니면 내가 누군가요? 여러분, 진짜 여러분은 누굴까요? 질문이 바로 답입니다. 내가 누구지? 하는 그놈이 바로 진짜 나거든요. 이 몸이 나도 아니고 생각이 나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만들어지는 이 삶이 일어나고 사라지도록 하는 그 바탕이 되고 배경이 되는, 이 소리를 듣는, 듣는 놈이 여러분입니다.
귀가 듣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여러분이 사는 게 아니라 삶이 이렇게 살려지고 있어요. 삶은 내버려 둬도 진리답게 살아가지고 있습니다. 숨 못 쉬면 죽는데, 숨쉬기 위해서 애쓴 적 한 번도 없잖아요. 알아서 쉬어지고 있고 삶은 알아서 살아지고 있어요. 배고프면 저절로 밥을 찾게 돼 있고 몸에서 부족한 게 뭔지 정확히 압니다.
영양학 전문가? 영양학 박사가 우리를 보고 이게 몸에 좋다고 챙겨주는 게 맞을까요? 내가 몸에서 땡기는 걸 먹는 게 진짜일까요? 몸에서 땡기는 걸 먹는 게 가장 최적의 어마어마한 과학이 그 속에 다 들어있거든요. 그걸 연구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모든 음식거리를 몇 칼로리 몇 칼로리 정해가지고 연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완벽한 부처가 있고.
완벽한 진리가 있고. 부처가 아니면 삶을 살 수가 없는데요.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갈까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라는 존재까지는 나무 거창하다면, 한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갑니까? 이 소리(죽비 소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지요?
이 소리(죽비 소리)를 듣는다,라는 것은 곧 내가 부처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육신이 듣는 게 아니거든요. 듣는 놈이 있습니다. 이거는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이 육신 안에 갇혀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주 전체 편만해 있어요. 그래서 허공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게 진짜 나지. 이 껍데기가 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가 나라고 생각하니까 껍데기인 내가 남들과 비교해서 더 잘 살아 돼. 이게 잘 사는 거고 저건 못 사는 거야. 이런 착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근원에는 아상과 아집이 있다,라는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착각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착각을 우리는 지금까지 진짜라고 굳게 믿으면서 한 평생을 살아왔고,
내가 만들어놓은 그 생각의 허상, 생각의 착각, 분별 망상, 그걸 주인이라고 생각한 채 진짜 주인을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이라는 허상의 노예가 돼서 평생을 살면서 매일매일 죽을 거 같다. 괴롭다. 내 괴로움을 해결해 달라. 어디 가서 누가 도대체 해결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만든 것일 뿐인데. 그러면 답은 나왔습니다.
지금 이대로 일어나고 있는 이것이 진리입니다. 지금 이대로 경험된 이대로가 진리거든요. 지금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기 해석만 하지 않으면 돼요. 다음 순간, 아니 그게 무슨 진리입니까? 그게 무슨 부처입니까? 부처는 다음 순간을 예측할 수 있고 사람들을 탁 보면 미래에 뭐가 될 줄 알고 어디 투자하면 돈이 되는 줄도 알고 전생이 뭔지도 알고 신통 자재한 게 도인 아닙니까,라고.
옛날 스승들도 물었어요. 스님들도 스승들한테 물었어요. 그럴 때 지눌 스님의 수심결에도 보면 뭐라고 나오느냐면 그런 질문을 한 제자에게 “너는 함부로 미친 소리를 하지 마라.” 하면서 아주 혼을 냅니다. 그게 도인이 아니거든요. 신통 자재한 거는 병이지. 병이잖아요. 여기 있으면서 뭘 본다. 여기 있으면서 “야, 영가를 본다.” 그게 도인입니까?
영가를 안 보는 게 도인이지요. 우리는 사람인데. 영가를 본다,라는 그런 사람들이 저 정신 병원에 가면 더러더러 있어요. 그런 말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도인이라는 것은 나와 다른 뭔가 신통 자재하고 놀라운 어떤 신통을 행하는 이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 이건 외도의 신통력이라고 부릅니다. 아주 삿된 신통력이에요.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삿된 길을 찾습니다. 그럼 내 인생이 삿되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도입니다. 그게 부처가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대로가 부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런데 하나는 내 머릿속에서 분병 망상이 자꾸 추구하니까, 자꾸 둘로 나눠놓고 추구하는 그 마음이 중생심이지.
그런데 그것도 허상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믿고 따라가지만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라는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사느냐? 제가 제 인생에서 이렇게 경험해보니까 삶으로써 경험해보니까 정확히 맞고, 이렇게 살면 정말 문제가 없습니다. 아, 내가 사는 게 아니구나! 그러니까 이제 이런 방편을 쓰지요. 부처님께 모든 걸 맡겨 놔라. 내 안에 본래 부처가 산다.
이 몸뚱이가 사는 게 아니다. 우주법계 전체가 법신 부처가 그냥 살아가는 건데, 내가 뭘 안다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라고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일어나는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내 생각을 아예 쓰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응무소주 이생기심.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거지. 마음을 내지도 말라는 게 아닙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해보라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진리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데, 나는 그걸 모릅니다. 그것만 확신하면 돼요. 마음 나면 그냥 하는 겁니다.
아이가 공부 조금만 시키면 서울대 갈 거 같다. 그러면 아이가 학원 보내 달라 이런다. 그럼 보내주고 뒷바라지해주고 최대한 해줍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이런 부모님들이 계세요. 그래? 그래 학원 보내 줄게.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가봐. 그런데 너무 기 쓰진 마. 가도 좋고 안 가도 괜찮아. 그런데 네가 간다고 하니까 내가 막지는 않을게. 열심히 해봐.
그리고 잘하면 응원해주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럼 본인이 갈 인연이 되는 아이면 그냥 내버려 둬도 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갈 인연이 안 되면 부모님이 무슨 이주영 샘을 갖다 붙이고 무슨 코디를 갖다 붙여도 서울대 못 갑니다. 가도 거기서 문제가 생길 수가 있고. 지금 이대로 벌어지는 제법실상이라는 삶의 진실.
지금 이대로,라는 삶의 진실을 놔두고 또 다른 내 머릿속 허상의 착각의 세계를 좇아가는 그런 어리석음을 벌이지만 않으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로 그냥 살 수 있습니다. 그리구 그것이 전혀 힘쓸 필요가 없어요. 애쓸 필요가 없어요. 애쓸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살면 되니까. 그냥 살면 되니까. 거기서 수많은 생각들을 양산해낼 필요가 없습니다.
경험하고 그냥 거기서 끝입니다. 만나서 대화 나누고 거기서 끝. 친구들과 대화 나누고 집에 가서 아, 내가 그 얘기를 왜 했지? 아, 그 엄마는 왜 그런 말을 했지? 하면서, 그런 생각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화 나누고 그냥 끝. 작용하는 그것이 부처이기 때문에 작용하고 끝이지. 뒤에 잔재를 남길 필요가 없어요. 그게 상이거든요. 뒤에 남는 이미지. 상. 뭔가 찜찜한 마음.
이거를 쥐고 그걸 맞다,라고 생각하는 게 어리석은 착각이에요. 아상을 타파하라는 게, 그 상을 깨라는 것이 그냥 지금 순간순간만 살면 매 순간순간 초살이로 살면 그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최선을 다해 살게 됩니다. 미래를 근심 걱정하지 않으니까, 그냥 최선을 다해 살게 돼요. 매 순간.
그런데 집착이 없으니까 과도하게 스트레스받는 게 없어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어떨까요? 부처님은 어떤 분이 부처님이냐면, 우리는 뭔가를 추구하는 게 우리 라면요. 바라는 바를 막 추구해서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면, 부처님은 그냥 이대로 오케이. 지금 이대로 이길 원하는 겁니다. 바라는 바를 얻고 나서 행복이 아니라,
바라는 바가 사라져버리는 게 진짜 행복이에요. 뭘 그리 바랄 게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여러분이 연세 잡수실 동안 바라면서 그걸 충족한 삶을 살아 봤으니까, 그게 별 그렇게 큰 성과가 없었잖아요. 한번 전면적인 전환. 바라는 것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대충 살게 안 돼요. 더 큰 열정과 삶의 순수한 에너지가 붙기 때문에 우주법계가 우리를 돕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위법이 돼서 힘을 짝 빼고 이완하고 살면 전보다 훨씬 더 잘 살게 되고 훨씬 더 부자가 되는데, 그걸 계산하고 또 이렇게 놓고 살 필요는 없구요. 그래서 오케이! 지금 이대로 오케이! 나라는 존재 이대로 오케이! 좋다. 이대로 완전하다. 이대로 나를 사랑한다. 뭔가 바뀌고 나서 나를 사랑할 게 아니고. 난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지금 이대로의 너를 사랑한다. 문제가 없어지면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문제 투성이인 너를 있는 그대로, 나는 너를 사랑해! 남편?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많지만, 맘에 안 드는 그 자체로써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고 허락해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이지. 불교에서 자비. 기독교 천주교에서도 사랑을 얘기하잖아요. 뭐가 진짜 자비이고 진짜 사랑인 줄 압니까?
지금 이대로를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는 것이 진짜 자비이고 사랑입니다. 잘 하면 사랑해주고 못하면 벌을 준다?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언제나 똥째로 허용해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잘잘못을 혼내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잘못하면 혼은 내지요. 그런데 거기에 과도하게 사로잡혀서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라는 그런 과도한 착각을 갖지 않습니다.
이렇게 애쓰지 않고 힘을 빼고 지금 이대로의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라는 것을 완전한 부처의 삶이다,라는 사실을 온전히 믿고. 그래서 이 부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게 되면 점집에 갈 필요가 없게 됩니다. 점집에 갈 필요가 전혀 없지요. 완전하다,라는 것도 하나의 개념이에요.
지금 이대로 그냥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 그냥 문제 있는 그대로 괜찮은 거예요.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요? 해소되려고 언제나 찾아옵니다. 문제는. 업장은 소멸되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괴로움이 찾아오는 건 고마운 일이에요. 빨리 소멸되려고 찾아오니까. 그런데 이 찾아오는 괴로움을 거부하는 마음을 가지면,
얘는 나한테 흡수되려고 찾아왔는데 내가 거부를 하니까 밀쳐내니까 얘는 이게 흡수될 때까지 계속 나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니까 한 달만 괴롭고 끝날 건데 두 달 세 달 네 달 일 년씩 괴로워하는 경우가 생겨요. 그런데 괴로움이 왔을 때 오케이! 그 괴로움이 나니까 그 괴로움을 지금 감당하는 이것이 진리니까 나는 그 괴로움을 받아들여 줄게, 흡수해줄게,
아파해줄게, 하고 괴로움을 확 받아들였을 때. 괴로움이 감당되기 위해 왔는데, 얘가 괴로움을 너무 빨리 흡수해서 착 받아들여버리니까 괴로움이 이제 본인 할 일을 다 해버린 거예요. 즉 업장이 소멸돼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괴로움이 빨리 사라져요. 그래서 병이 나아야지 하고 막 기를 쓰고 뭐 좋다는 데는 다 찾아다니고 약은 수십 개씩 먹고 그러는 사람보다, 그냥 병이 왔으니까 아파해줄게 하는 사람이 훨씬 병에서 빨리 나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괴로움에서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괴로움이 온다고 뭐가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괴로움이 오는 그대로가 진리이고. 행복하면 행복한 그대로가 진리이고. 아무 문제 없이 우리는 지금 언제나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 내 머리가 그게 아니야,라고 지금까지는 주인 행세를 했고,
그게 진짜 주인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힘을 실어줬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가짜 주인한테 힘을 실어주지만 않으면 생각을 쫓아가지만 않으면 생각 너머에 지금 이대로 해석하지 않아도 본래 혼돈이고 본래 불완전한 것이 진리이니까 본래 불확실한 것이 진리이니까, 그거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허용한 채 그것을 살아주기로 마음을 먹게 되면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 없는 부처의 삶이 시작이 됩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조금 조금씩 삶의 경계에 부딪칠 때마다 주춤거리겠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린 바른 지견 바른 불지견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바른 믿음과 견해가 딱 서게 되면 바른 지견이 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훨씬 쉬워요. 나를 찾아오는 괴로움이 훨씬 쉽게 쓰러져갑니다. 쉽게 사라져갑니다. 쉽게 해결이 돼버려요. 그걸 마음공부하는 사람이다,
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마음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그렇게 크게 우리를 압도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냥 왔다가 갈 뿐이지. 그렇다고 괴로움이 없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도 평생 괴로움은 따라다녔습니다. 괴로움이 부처님을 압도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냥 왔다 갈 뿐입니다. 거기서 끝이에요. 이 평범한 게 진리의 삶이지. 어마어마하게 신통을 부리는 게 진리의 삶이 아니다.
오늘 우리 이제 정월 보름이라 이렇게 말씀을 드렸고. 여러분 이제 정월만 대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 해 내내 정말 지혜롭고 정말 근심 걱정 없는 괴로움이 소멸된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 박수.
첫댓글 _()()()_
보통은 젊잖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는데... 오늘은 폴짝 뛰어가면서 ㅎㅎㅎ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젊잖다-점잖다로 바꿉니다. ㅠㅠ
(젊지않다?)
1. 형용사 언행이나 태도가 의젓하고 신중하다.
2. 형용사 품격이 꽤 높고 고상하다.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인사부터.
하고 읽겠습니다
고3우리딸 부처님
공부를 못해서?~~~^^
시험보고나면 '엄마~~~ㅠ' 하고
메세지가 옵니다
그러면
"우리 반야부처님~~♡
싸랑해요~~"
합니다
물론 전에는 눈치보며
잔소리하고
은근히 스트레스주고~
스님법문 듣고부터 관점을 바꿨지요
'화이팅! 사랑해♡!
이말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