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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정(申晸)(1628~1687)의 분애유고(汾厓遺稿) 권 12, 남행일록(南行日錄)
신정이 1671년(현종 12년)에 영남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영남 각지를 다니며 감찰한 뒤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신해년(1671년, 현종 12년) 9월 초하루. 나는 겸보덕(兼輔德)으로 춘방(春坊)에서 입직하며 머물러 있었다. 서연(書筵)에 나아가 강론한 후에 교리 윤경교(尹敬敎)·수찬 이단하(李端夏)·정랑 이선(李選)·좌랑 정유악(鄭維岳) 등 여러 사람들과 병조[騎省]에 모여 이야기하였다. 정오 무렵에 승정원에서 (국왕의 명령으로) 명패(命牌)를 내어 나를 불렀다. 대청(臺廳)에 나아가 도착하니, 어사의 행장을 꾸리라는 명령이었다. 이혜(李?, 字 次山)·조위봉(趙威鳳, 字 子羽)·김만중(金萬重, 字 重叔)·오시복(吳始復, 字 中初)과 내가 명을 받았는데, 오시복은 일이 있어 나아가지 않았다. 호조[度支]에서 쌀과 콩 각각 1섬·감장(甘醬)·미역(甘藿)·조기(石魚) 등의 물품을 보냈다.
14일. 맑음. 지난 밤에 일 때문에 꺼려 피혐하고(引避), 돌아오는 길에 부학(副學) 이혜중(李惠仲)을 들러 방문하니, 이중(彛仲)이 교하의 농장(交庄)으로부터 돌아와서 남쪽 북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삼촌 조카들이 모두 자리를 같이하였다. 서로 부르고 대답하며 온화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은 후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숙취가 아직 깨지 않아서 해가 높이 솟아오르도록 일어나지 못하였다. 회양(淮陽) 부사 임문중(任文仲)이 찾아와서 옷을 걸치고 나가 만나서 인사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국왕께서) 부르는 명패가 내려와서 서둘러서 대궐에 도착하였다. 아직 처치(處置)를 거치지 않았다고 대궐에 도달하여 사정을 진달하니 승정원에서 아직 아뢰지 않았다며 대청(臺廳)에 들어와 기다리라고 하였다. 부득이하게 들어가보니 이혜(李?) 등이 모두 자리에 있어 함께 이야기하였다. 미시(未時) 말(오후 3시 무렵)에 중사(中使)가 봉서(封書)를 전하고, 사약(司?)이 납제(臘劑) 다섯 종류를 전달하였다. 삼학사(三學士)들과 함께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모여서 봉서를 열어보니, 나는 영남지역, 차산(次山, 이혜)은 호남지역, 자우(子羽, 조위봉)는 호서지역, 중숙(重叔, 김만중)은 경기지역이었다. 서리(書吏) 진익천(秦益天)이 따라왔다. 한강 나루에 이르러 차산과 중숙과 나는 각각 배 한 척씩 타고 건너는데,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묵묵히 서로를 쳐다보며 다만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건너편 강 언덕에 내려서 차산과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광주(廣州)의 사동(寺洞)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비로소 길이 갈라지기에, 장차 그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러 유숙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웃에 시골의 얼치기 서생(學究) 세 사람이 있었는데, 술에 취해 소란을 일으키면서 몽노(夢奴 : 이름에 ‘몽’자가 들어가는 노비)를 붙잡아다가 커다란 막대기(大杖)로 마구 치려고 하였다. 내가 직접 가서 구해주려 하였으나 (그들이) 심하게 소리를 질러 그 여파가 나에게까지 미쳤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서리(書吏)를 불러서 꾸짖어 물러가게 하니, 그들 또한 심히 황송하고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극히 가소로웠다. 암행어사의 형적(形迹)이 이미 드러나서 그 마을에서 유숙하지 못하고 달밤을 틈타서 양재역(良才驛)으로 전진하여 유숙하였다. 이날은 20리를 갔다.
15일. 새벽에 안개가 짙게 깔렸다가 낮에 갬. 한밤중에 잠에서 깨었는데 지는 달빛이 창에 가득 차고, 촌닭이 꼬끼요 울었다. 묵묵히 미소지으며 앞으로 길을 나아가매 나그네의 심사가 막막하였다. 또한 암행하며 살피고 탐문하는 일을 생각하매 마땅함을 얻기가 가장 어려우니,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리를 잡고 편안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늘이 아직 밝아오기 전에 출발하여 판교(板橋)의 주막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곧바로 단양(丹陽)으로 향하여 이숙(李叔)을 뵙고 그 길로 식량과 노자를 구하여 죽령(竹嶺)을 넘어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도를 펼쳐보니 추첨으로 뽑은(椎?) 여러 고을들과는 길이 상당히 어긋나 있었다. 그래서 조령(鳥嶺) 길로 바꾸어 정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이차산(李次山, 이혜)이 그의 산소로부터 와서 점문(店門)을 지나다가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고는 갑작스레 들어왔다.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이라서 놀랍고 기쁘기가 말할 수 없었다. 중숙(重叔, 김만중) 또한 이제 막 이곳을 지나갔다고 하는데 만나지는 못하였다. 오후에 또 차산(次山)을 만나서 가다가 중도에서 차산은 청전(靑田)으로 향하고, 나는 용인(龍仁)으로 향하였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에 길이 나뉘어 헤어졌는데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용인 어로포(魚魯浦)의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금양역(金梁驛)에서 숙박하였다. 짐말이 병이나 넘어져서 다른 말로 교체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16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죽산(竹山) 맹곡(孟谷)의 수색(水色) 산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대개 허경휘(許景輝)가 수확을 살피기 위하여(監穫)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회숙(晦叔) 허환(許煥) 또한 그 자리에 있어서, 함께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죽산의 산성(山城) 아래에 있는 마을의 촌가(村家)에서 투숙하였다. 이날은 75리를 갔다.
17일. 맑음. 지난 밤에 주인의 어린 아이와 한 방에서 함께 잤으며, 또한 이(?)까지 있어서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새벽에 출발하여 괴산(槐山) 가는 길로 향하였다. 충주(忠州) 북면(北面) 창산촌(窓山村)에 도착하여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어떤 노인이 그 고을의 폐단을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음성(陰城) 동도면(東道面) 일마곡촌(日馬谷村)의 촌가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같은 고을 남면(南面) 당곡리(唐谷里)에서 묵었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18일 맑음. 서리 진익천과 괴산에서 헤어져서 그 고을 읍내의 서리(胥吏)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에 인산역(仁山驛)에 가서 말을 바꾸려고 하였는데, 주인이 우리 행색을 이상하게 여겨서 자꾸 훔쳐보았다. 그래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촌가(村家)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해가 저물 무렵 감영(監營)의 군관(軍官)으로 변장하고 본역(本驛 : 인산역을 말함)에 들어가 투숙하였다. 서리 진익천이 앞서서 연풍(延豊) 길로 향하였다가 우리 행차를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자 다시 인산역으로 들어와서 이웃집에서 머물러 잤지만, (나는 그를) 불러 보지 않았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19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연풍(延?) 장풍촌(長豊村)의 조(曺)씨 성을 가진 기병(騎兵) 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주인이 생선을 내왔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계속 나아갔다. (연풍)현의 읍치 15리쯤 되는 곳에 나무가 울창한 숲이 있어, 그곳에서 말안장을 풀고 말을 먹이면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 또한 서리 진익천에게 길 가는 데 필요한 노자(行資)을 나누어주었다. 대개 내일 조령을 넘으려고 하는데 고개를 넘은 이후에는 노자를 나누어주는 것이 (민정을) 듣고 살피는 데 번거롭게 폐가 되기 때문이었다. 해가 저물 때 병영(兵營)의 군관(軍官)이라 칭하면서 그 현의 읍치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연풍현의 현감은 유군방(兪君枋)이었다. 유군방은 내가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이다. 그를 보니 매우 기뻐서 그대로 그와 함께 머물러 자고, 양식과 노자를 얻었다.
20일. 오후에 이슬비가 내렸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4시[罷漏] 쯤에 행장을 재촉해 출발하여, 조령의 고사리(高沙里)에 있는 주막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길에서 한 유생(儒生)을 만나 그와 함께 동행하였다. 그는 내가 군복[戎服]을 입고 가는 것을 보고 어느 곳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금군(禁軍 : 국왕 경호와 대궐 수호를 담당하는 군대, 즉 국왕 친위대)으로 동래(東萊)에 내려간다고 대답하였다.
오후에 용추(龍湫)에서 잠시 쉬었다가 베옷[布衣 : 벼슬 없는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변장하고 주막에 들어가니, 그 유생이 먼저 도착해 있다가 내가 변장한 것을 보고는 매우 해괴하게 여겨 그 곡절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대답하고는 부득이하게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숲속에 숨어 있다가 조금 늦게 말을 돌렸다. 본색이 탄로나기가 매양 이와 같으니, 마음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문경(聞慶) 읍내의 남학노(南學奴)의 아들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듣기에 수령은 김빈(金火賓)인데 이제 막 모친상을 당했다고 한다. 저녁에는 신동면(新東面) 목현촌(木峴村)의 촌가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21일. 흐림. 문경 남면(南面) 호계촌(虎溪村)에서 아침을 먹고 오후에는 함창(咸昌) 남면(南面) 기주촌(岐洲村)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정산(定山) 수령을 지낸 권(權) 아무개의 집이 있었는데, 정산 수령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권렴(權廉)과 권렴의 조카 김세정(金世鼎)의 생질이 있었다.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이 행차가 암행어사 길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니라고) 말을 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의혹을 풀지 못하였다. 맛있는 술을 내어 나를 접대하며, 스스로 길주(吉州) 수령 임한백(任翰伯)의 사위라고 말하였다. 술을 마신 후에는 재촉해 앉아서 나의 일정을 묻고 그 고을 수령의 소행을 자세하게 말하였다. 그대로 그 마을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2일. 아침에 비 오고 늦게는 흐림. 새벽에 상주(尙州) 내서면(內西面) 막실촌(莫實村)에 당도하여, 병 때문에 그대로 유숙하였다.
23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왔던 길로 다시 향하였다. 함창(咸昌) 남촌(南村)에서 아침을 먹고 마을의 여염집 5~6곳을 지나다 들러보고 그 고을의 폐단을 물었다. 저녁에 사창(司倉)의 뒷마을에 들어가니 주인이 나의 행색을 의심하여 그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24일. 맑음. 닭이 세 번째 울 무렵 출발하여 곧바로 상주(尙州) 가는 길로 향하였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지난 밤 투숙한 곳의 주인이었다. 그가 가는 곳을 물으니, 처음에는 상주에 사는 친척을 방문한다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붙잡아다 여러 방면으로 꼬치꼬치 캐물으니, 그는 함창(咸昌) 고을의 병방(兵房)인 오의흥(吳義興)이라는 자로서 함창 수령이 그를 시켜서 나의 암행길의 행적을 뒤쫓게 하였던 것이다. 상주의 서문(西門) 밖의 별장(別將) 성여방(成汝枋)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낙양역(洛陽驛)에서 말을 바꾸었다. 낮에는 남면(南面) 평천촌(平川村)의 촌가에서 쉬었다가 저녁에는 상주의 안실역(安實驛)에서 투숙하였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25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금산(金山) 북면(北面) 신촌(新村)에서 아침을 먹고, 개녕(開寧) 경내에 들어가 촌가 5~6곳을 드나들며 그 고을 수령의 치적을 탐문하였는데, 칭송하는 말들이 자자하였다. 저녁에는 읍내에 들어가 진휼(賑恤)을 담당하는 아전의 집에서 잤다. 주인이 처음에 나를 보더니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아들이 밖에서 들어와서 자못 공손하고 공경하는 안색이었다. 필시 나의 행차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이날은 60여 리를 갔다.
26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개녕(開寧) 부상역(扶桑驛) 근처의 촌가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성주(星州) 읍내에 들어가 백씨(白氏) 성을 가진 호장(戶長)의 집에서 투숙하였다. 서리 진익천을 보내어 성주 목사에게 양식을 요청하였다. 피곤함이 심하여 일찍 누웠는데, 초경(初更 : 밤 7~9시 사이)에 아우 한종건(韓宗建)이 갑자기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무릇 성주 목사는 아우 한종건의 장인으로, 마침 일 때문에 이곳에 왔다가 나의 행차가 성 안에 들어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도 안 타고) 걸어서 한달음에 보러온 것이었다. 성주목사가 아들 상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뜻밖에 그를 만나 함께 온화하게 이야기를 나누니 자못 나그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27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성주 동면(東面) 율촌(栗村)에서 아침을 먹고, 안원원(安遠院)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에는 성주 동면에 있는 고령(高靈)의 월경지인 검정포촌(黔丁浦村)의 촌가에 투숙하였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28일. 새벽에 이슬비가 내리다가 낮에는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고령 동면(東面) 구을음촌(仇乙音村)의 촌가에서 아침을 먹고 촌가를 드나들다가 저녁에는 읍내에 들어가 관청의 색리(色吏) 집에서 잤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29일. 새벽에 안개가 낌. 새벽에 출발하여 고령의 안림역(安林驛)에서 아침을 먹고 말을 바꾸었다. 저녁에는 합천(陜川) 읍내에 들어가 관노비의 집에서 잤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회일(晦日). 맑음. 아침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늦게 삼가(三嘉)에 있는 금곡사(金谷寺)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이 이후로는 기후가 상도(上道 : 경상도 북부지역)와는 사뭇 달라서 나뭇잎들이 아직 누렇게 단풍이 들지 않았고, 무더기져 있는 채소는 오히려 쌈용으로 쓸 수 있었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10월 초하루. 맑음. 병이 나서 그대로 머물렀다. 기거하는 스님이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았다가 밤사이에 찾으니 그를 대하기를 더욱 조심하였다.
초이틀.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단성(丹城) 동상면(東上面)의 촌가에서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성 안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서 성 밖에서 유숙하였다. 곳곳에 대나무를 심어 경치가 자못 아름다웠다. 촉석루(矗石樓)가 구름 사이에서 흐릿하고 남강(南江) 한 줄기가 누대 앞을 휘감아 돌아 바라보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전직 관리 강위흥(姜渭興), 김씨 성을 가진 장관(將官)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병영(兵營)의 폐단을 상세하게 들었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초사흘.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문지기가 시종일관 완강하게 가로막았다. 무릇 병사(兵使)가 새로 부임하여 성문의 금령이 매우 엄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주 남서면(南西面) 당목촌(唐木村)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에는 진주 영성면(永城面)에 있는 통영(統營)의 사수(射手) 집에서 투숙하면서, 통사(統使)의 잘잘못을 상세하게 들었다. 이날은 65리를 갔다.
초나흘. 맑음. 아침 식사 후 출발하여 고성(固城)의 성 밖에 있는 촌가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늦게 통영으로 향하였다. 말을 채찍질해 달려 원문(院門)에 들어가는데, 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심히 완강하게 막고 나서 서리 진익천을 결박하고서는 큰 나무로 마구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부득이하게 마패(馬牌)를 내어 보여주어 겨우 중상을 면할 수 있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진퇴양난에 빠져 낭패였다. 그래서 곧바로 세병관(洗兵館)으로 들어가 영리(營吏)를 불러 수문장을 잡아들였다. 수문장이 도피하여 들어오지 않기에 그의 모친과 처를 가두게 하니 밤이 깊은 후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형장(刑杖) 10도(度)를 치고 심문한 후에 함께 풀어주었다. 담당한 도사(都事)는 민홍도(閔弘道) 군이었는데 복심관(覆審官)으로 이곳에 와서 동상방(東上房)에 거처하고 있다가 나를 피하여 아헌(衙軒)으로 옮겼다. 병영의 군관(軍官) 이해빈(李海賓)과 소촌(召村) 찰방 송상문(宋相問)이 나를 보러 왔다.
초닷새. 맑음. 아사(亞使 : 도사를 말함) 민홍도가 나를 보러 왔다. 아침 식사 후에 가서 민군을 만나고 고성현으로 출발하였다. 점심을 먹었다. 고성 현감 김학배(金學培)는 휴가를 얻어서 안동(安東)의 본가에 갔다고 한다. 저녁에 고성 서면(西面) 망림촌(望林村)의 촌가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고성현의 아전이 나와서 접대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초엿새. 맑음. 닭이 울기 전에 몰래 출발하여 사천(泗川) 서면(西面) 수박동(水朴洞)에서 아침을 먹고, 곤양(昆陽) 동면(東面) 가리촌(加利村)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곤양의 성문 밖에 있는 촌가에서 투숙하였다. 주인은 청풍청(淸風廳)의 군관(軍官)인 김진한(金振漢)이었는데, 한양에 올라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6촌형인 군리(郡吏 : 곤양군의 아전) 김진명(金振冥)이 와서 석화(石花)·홍시감 등을 접대하였다. 나는 먹과 붓으로 답례하였다. 이날은 100리를 갔다.
초이레.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하동(河東) 동면(東面) 일원촌(日遠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미시(未時 : 오후 1~3시) 무렵에 남해(南海) 노량진(鷺梁津)을 건너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에 올라 관람하였다. 저녁에는 북면(北面)의 촌가에서 투숙하였다. 이날은 60리를 갔다.(細注 : 지난 7월 사이에 관리부랑(官吏部郞)이 출사하지 않아서 일자(日者 : 점쟁이를 말함) 최진영(崔晉英)을 불러서 좋은지 나쁜지를 물어보니, 수 개월 내에 마땅히 품계가 3품(品)이 오를 것이고, 간지(干支 : 10간 12지, 즉 뽑힌 점괘를 말함) 가운데 역마가 남몰래 움직이니 필시 어사가 되어 동남쪽 바다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제 바다를 건넜으니 그의 말이 딱 들어맞아 참으로 신기하다.)
초여드레. 동틀 무렵 출발하여 북면(北面) 오곡촌(烏谷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여염집을 들락거리며 수령의 치적을 들었다. 촌락 사이에 유자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어 노란 유자의 향기가 매우 감미로웠다. 사계월계(四桂月桂)는 높이가 한 길 정도 되었는데 붉고 탐스러운 것이 사랑스러웠다. 기후가 따스하고 온화하여 마치 8월 초와 흡사하니 가히 다르다고 할 만하다. 저녁에는 남해군 읍성의 북문(北門) 밖에 있는 마을인 향교동(鄕校洞)의 버드나무 제방에 있는 납속(納粟) 첨지(僉知) 정해립(鄭亥立)의 집에서 투숙하였다. 정해립은 나이가 올해 65세인데 기력이 매우 강건하고 건장하였으며 수염이 나부꼈다. 사람됨은 순수하고 후덕하여 어른의 풍모가 있었다. 외딴 섬 먼 지역의 백성 중에 이처럼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그는 식사를 차려서 나를 정성껏 대접하여, 잠시나마 나그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 형 또한 동지(同知) 신원서(申元瑞)가 유배살이 할 때(살았던 집)의 주인이었다. 이날은 30리를 갔다.
초아흐레. 맑음.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출발하여 다시 노량진을 건너 곤양(昆陽) 서촌(西村)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에는 같은 군 미리교촌(彌里橋村)의 촌가에서 투숙하였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10일. 흐림. 새벽에 출발하여 곤양 명봉산(鳴鳳山)에 있는 영악사(靈岳寺)에서 아침을 먹고, 진주 남강(南江) 가에 있는 박생원(朴生員)의 농장 근처에서 말을 쉬게 하였다. 박생은 본래 봉해진 호(號)가 있었는데, 기와집 100여 칸이 한 동네에 가득 찼으며, 또한 누대(樓臺)가 있었다. 그는 오락을 좋아하여 나그네가 이르면 안면이 있건 없건 관계 없이 모두 음식을 차려서 성대하게 대접한다고 한다. 그가 나의 행차가 그의 농장 근처에 이르렀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사람을 보내어 뵙기를 청하였다. 가보니 우후(虞侯)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여 보지 않고 말을 재촉하여 나왔다. 저녁에는 소촌역(召村驛)에 투숙하였는데, 찰방 송상문(宋相問)이 편복(便服)을 입고 걸어서 촌가로 나를 찾아왔다. 그가 소매 속에서 배 3개와 전복, 마른 꿩을 꺼내고 추로주(秋露酒) 3잔을 따라 나를 접대하였다. 또한 노자(路資)를 갖추어 주었다. 먼 곳에서 옛 친구를 만나니 나도 모르게 눈빛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11일. 맑음. 큰 말로 바꾸고 새벽에 출발하여 진주 동면(東面) 허현촌(虛峴村)의 촌가에서 아침을 먹고, 함안(咸安) 서면(西面)의 사내미촌(沙乃彌村)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에는 같은 군(함안군을 말함) 동면(東面) 아리현촌(阿里峴村)에서 숙박하였다. 경상도 전체가 흉년이 특히 심한데 함안은 한 군데도 경작한 곳이 없었다. 눈에 가득 들어오는 것은 황량하여 마치 난리를 겪은 땅 같았다. 살고 있는 백성들은 야생에서 저절로 자란 기장(稷)과 시든 풀의 열매를 먹고 있었으며, 모두들 장차 떠나가 흩어질 형색이 있었다. 닭과 개들도 굶주려 죽어서 닭울음이나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를 보니 참담하였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12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정오에는 칠원(漆原) 상포(上浦)를 건넜다. 배에 오를 때에 짐들이 모두 물에 젖어서 언덕 위의 촌가에 올라가 햇빛에 말렸다. 그곳은 영산(靈山) 경계 내였다. 저녁에는 창녕(昌寧) 읍내의 아전 집에서 숙박하였다. 청도(淸道) 수령 유비(兪秘)가 며칠 전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13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밀양(密陽) 북면(北面) 금곡촌(金谷村)에서 말을 먹이고, 청도(淸道) 탁영서원(濯纓書院)에 들어가 손씨 성을 가진 경주(慶州) 유생과 영귀루(詠歸樓)에서 이야기하였다. 저녁에 읍내에 들어가 향사당(鄕射堂) 근처에 있는 아전의 집에서 묵었다. 경산(慶山) 수령 이여서(李汝瑞)가 마침 겸관(兼官)으로 여기에 이르렀다가 나의 행차가 이곳에서 숙박한다는 것을 알고 홀로 말을 몰아 찾아왔다. 그에게서 백헌상(白軒相)이 세상을 떠났고, 관찰사 민공서(閔公瑞)가 사직하여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싹 다가앉아 마음 편하게 터놓고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14일. 맑음. 이른 아침에 여서(汝瑞)가 다시 찾아왔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같은 고을 유천(楡泉)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는 밀양(密陽) 읍성 안에 있는 아전의 집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15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밀양부 삼랑촌(三浪村)으로 심려(沈攄)를 방문하였다. 그의 조카 약렴(若濂)과 약항(若沆) 및 그의 아들 약간(若澗), 심찰방(沈察訪)의 사위 송시보(宋時輔) 등이 모두 들어와 인사하였다. 근처에 사는 무인(武人) 조공원(曺公遠)이란 자가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불러와 좋은지 나쁜지를 물었다. 그대로 유숙하였다. 이날은 35리를 갔다.
16일. 맑음. 새로 과거에 급제한 조공원의 아들인 조정하(曺挺夏)가 찾아왔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저녁에는 양산(梁山) 북촌(北村)에서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17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동래(東萊) 북촌(北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곧바로 수영(水營)으로 향하여 수사의 정치를 탐문하였다. 오후 느지막이(땅거미가 질 때) 동래(東萊)의 송상현을 모신 충렬사(忠烈祠)에 찾아가 강당에서 잠시 쉬었다. 재직(齋直)이 와서 말하기를 일본인 7~8명이 방금 향교에 와서 소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저녁에 향교에 도착해서 남쪽 누대에 올라 잠시 쉬었다. 밤이 깊은 후에 들어가 동래 수령 정백(鄭白)을 만났다. 접위관(接慰官 : 접대를 담당하는 관리) 신덕보(申德甫)가 말을 타지 않고 걸어 와서 참석하여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부망(副望)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모임이 파하여 박준흥(朴俊興)의 집을 나오는데 기운이 무척 피곤하여 길을 갈 수가 없어서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18일. 맑음. 머무름.
19일. 닭이 세 번째 울 때 출발하여 기장(機張) 서촌(西村)에서 아침을 먹고, 울산(蔚山) 서면(西面)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에는 울산부 박취문(朴就文)의 농장 근처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20일. 바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병영(兵營) 근처의 촌가들을 출입하다가 저녁에는 병영 성의 동문 밖 백년암(百年岩)에 있는 사부(射夫) 김제품(金悌品)의 집에서 숙박하였다. 옆에 사는 박취문(朴就文)의 서얼 동생 취순(就純)이 보러 와서, 병사가 은(銀)을 사들인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들었다. 이날은 20리를 갔다.
21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경주(慶州) 가는 길로 향하였는데, 성문을 닫아걸었다. 대개 우리 일행이 성 아래에 도착했다고 들으면 혹 성으로 들어올까 두려워 이런 괴이한 일을 하였으니, 그 계책이 심히 졸렬하여 저절로 껄껄 웃음이 나왔다. 서리(書吏)의 말과 짐말을 울산(蔚山) 부평역(富平驛)에서 바꾸고, 울산부 구리역(求利驛)에서 점심을 먹었다. 울산에서 경주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광야가 아득하게 펼쳐져 남북으로 50여 리나 되었는데, 전답들이 모두 황폐화하여 그 광경을 보니 참담하였다. 저녁에 경주에 도착하여 월성(月城)에 들렀다. 이는 신라시대의 왕궁터라고 하는데 지세가 약간 높아 만월대(滿月臺)와 비슷하였다. 자취를 숨기고 다니는 행색이라 다른 사람과 서로 접할 수 없는지라, 포석정 유적지를 물을 곳이 없어 심히 애석하였다. 이른바 국탑(國塔)이 석양에 우뚝하니 서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한양 생각(銅馳之感)이 나게 하였다. 남루(南樓)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산의 형세가 구불구불 길게 흘러 기국(氣局)이 광활하고 원대하니, 진실로 대국(大國)의 형승이었다. 관부(官府)가 굉장하고 웅대하기가 경상도 내에서 으뜸인데, 근래 들어 흉년이 들고 고을의 수령들이 자주 교체되는 까닭에 물력(物力)이 탕진되어 예전의 모양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한다. 저녁에는 읍성의 북쪽에 있는 아전의 집에서 잤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22일. 흐리고 바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경주 갑산촌(甲山村)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에는 경주부 곽광현(郭光縣)의 촌가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23일.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붐.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청하성(淸河城)에서부터 영덕(盈德) 남역(南驛)에 이르기까지 종일토록 바다를 따라다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이 땅을 날렸고, 성난 파도는 하늘까지 닿으니, 정말로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장관이었다. 영덕 어부의 집에서 말을 먹였는데, 촌락이 쓸쓸하여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고, 언어는 낯설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인이 말하기를 “바다로 80리를 들어가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혹 비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침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 또한 거의 죽을 뻔한 경우가 여러 차례였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는 괴이한 동물이 있는데 크기는 고래에 못 미치지만 이빨이 창칼 같아서 능히 큰 고래를 물어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저녁에 같은 현(영덕현을 말함) 남역(南驛)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65리를 갔다.
24일. 맑음.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촌가들 사이를 드나들며 잘 다스리는지의 여부를 염탐하며 묻고 다녔다. 느지막이 같은 현에 있는 퇴계(退溪) 이 선생[李滉]을 모신 서원에 들러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현의 읍성 밖에 다다라 유숙하였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5일. 아침에 맑고 늦게 바람이 붐.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영덕 북촌(北村)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는 같은 현 한동(漢洞)의 촌가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26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안동(安東) 남면(南面)의 촌가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는 의성(義城) 동면(東面)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27일. 맑음. 촌가에 드나들며 수령의 치적을 물었다. 오후에는 말을 몰아 본현(의성현을 말함) 철파역(鐵破驛)에 이르렀다. 본현에 사통(私通)하고 곧바로 전진하였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28일. 맑음. 안기부(安奇夫)의 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출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본현의 장관(將官) 신덕길(申德吉)은 한양에서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이다. 나의 행차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듣고서 나에게 인사하러 왔다.
29일. 크게 춥고 크게 바람이 붐. 그대로 머물렀다. 밤에 그곳 수령 이당규(李堂揆) 군을 방문하였다.
10월 초하루. 맑음. 늦게 출발하여 저녁에 군위(軍威)에 도달하여 유숙하였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초이틀. 맑음. 무자년(戊子年) 같은 해에 함께 과거에 급제한 김령(金靈)의 아들 종량(宗亮)과 홍량(弘亮) 두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다. 주수(主守 : 그 고을 수령) 유사(柳王師) 군을 불러서 이야기하였다. 같은 현 효녕(孝寧)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인동현(仁同縣) 송림사(松林寺)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초사흘. 맑음. 아침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정오 무렵 대구(大丘)에 들어갔다. 관찰사 민공서(閔公瑞) 영공이 나를 만나러 왔다. 저녁에 경산(慶山)에 가서 그곳 수령 이여서(李汝瑞)와 아헌에서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초나흘 맑음. 그대로 머물렀다.
초닷새. 그대로 머물렀다. 관찰사가 서간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성현(省峴) 찰방(察訪) 이후시(李厚蒔)는 율곡(이이) 선생의 증손인데, 불러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밤중에 파하였다.
초엿새. 맑음. 아침을 먹은 후 출발하여 느지막이 하양(河陽)에 도착하였다. 경차관(敬差官) 조근(趙根, 字 復亨)이 약속대로 먼저 와 있었다. 망춘정(望春亭)에 모여 잤다. 그곳 수령 여단제(呂端齊) 군과 회재(晦齋 : 이언적을 말함) 선생의 서출 현손(玄孫)인 이홍기(李弘?)가 와서 관서문답(關西問答) 한 건을 주었다. 이날은 30리를 갔다.
초이레.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복형(復亨)과 수령이 술을 따라 여러 바퀴 돌고 신령(新寧)으로 출발하였다. (신령에서) 유숙하였다. 현에는 환벽정(環碧亭)이 있었는데 넓이는 몇 서까래 차지 않았으나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 빙 둘러 에워싸고 있었고 계곡 물이 구비쳐 감싸안고 흘러 뛰어나게 그윽한 풍취가 있었다. 걸어서 올라가 졸다가 그곳 수령 허해(許垓) 군을 불러서 대화하였다. 하양(河陽) 승려 법련(法蓮)이 와서 잤다. 이날은 30리를 갔다.
초여드레. 큰바람이 불었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의흥(義興)에 이르니 바람이 더욱더 거세게 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서 잤다. 이날은 40리를 갔다.
초아흐레. 맑음. 경차관(敬差官)과 경산(慶山) 및 하양(河陽) 수령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신령(新寧)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비안(比安)에서 잤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10일. 맑음. 그곳 수령(主守 : 비안 수령) 이민도(李敏道) 군과 한가롭게 이야기하였다. 청도(淸道) 수령의 상여가 읍내를 지나간다고 듣고서 가서 상주 유사겸(兪士謙)에게 조문하였다. 저녁에는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에서 투숙하였다. 비안(比安) 수령의 아들 이세석(李世奭)이 따라왔다. 예천군 사람 문석규(文錫珪)가 거문고 악사[琴師]를 거느리고 방문하여 그대로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태수(太守 : 예천 군수를 말함) 이수항(李守恒) 군은 옛친구로, 역참(驛站)에 나와서 나를 기다렸다. 그와 함께 회포를 풀고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11일. 맑음. 이창하(李昌夏) 군이 용궁(龍宮)에서 나를 찾아와서, 그대로 그를 데리고 (예천까지) 와서 저녁에는 예천에서 잤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12일. 맑음. 문경(聞慶) 수령 김빈과 찰방 장방진 두 상인(喪人)에게 위문장을 썼다. 저녁에는 풍기(豊基)에서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13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저녁에 단양(丹陽)에 도달하였다. 이창하(李昌夏) 군이 따라왔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청풍(淸風) 수령 이상일(李尙逸) 공이 서간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삼락루(三樂樓)에 오르니 달빛이 대낮 같고 강산은 맑고 청량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을 벗어난 것처럼 여겨지게 하였다.
14일. 맑음. 머물렀다. 벽 사이에 백부(伯父)께서 지어 읊은 시가 있었다. 어루만지며 가만히 읊으니 나도 모르게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다.
15일. 눈이 조금 내렸다. 머물렀다. 서계(書啓) 문서를 작성하였다.
(細注: 각 읍의 민인들이 올린 청원장을 살펴보매 관찰사가 공사(公事) 보는 것과 같아서 눈코 뜰 새가 없으니, 심히 괴로운 일이다.)
16일. 바람 불고 추움. 머물렀다.
17일. 맑음. 머물렀다. 그 고을 수령(主守)인 숙부님께서 나를 만나러 와서, 연두부를 차려주었다.
18일. 맑음. 머물렀다. 청풍(淸風) 수령이 조보(朝報)에 난 도목정사(都目政事 : 인사 이동상황을 기록한 부분)를 보내주어서, 비로소 삼도어사(三道御史)들이 모두 이미 도성에 들어갔음을 알았다. 아우 이상연(李尙淵)이 도성에서 내려왔다.
19일. 맑음. 머물렀다. 비로소 문서 작성을 다 마쳤다.
20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수산역(水山驛)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는 청풍(淸風)에서 잤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한벽루(寒碧樓)에 올라보니 산천의 빼어난 경치와 결구(結構)의 오묘함이 마치 한 폭의 그림 속 풍경 같았다. 영남루(嶺南樓)에 비교하자면 걸출하게 광대한 규모에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온화함은 오히려 더 나음이 있었다. 벽면 가득히 차 있는 것은 모두들 우리 나라 유명한 인물들이 읊은 시들이었으며, 백부님 동회공(東淮公 : 申翊聖)의 시 한 수도 거기에 있었다. 한벽루의 판액은 재상인 우암 송시열께서 쓰셨다. 어슴푸레 날이 저물 무렵 그곳 수령[主守]과 응청각(凝淸閣)에 모여 이야기하였다. 그곳에서 그대로 유숙하였는데, 뼈가 시리고 정신이 말똥말똥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체로 이 군의 형승은 참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겠다. 다른 날 이 고을을 한번 다스려보는 것이 소망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 십중팔구는 한탄만 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찌 이 계획이 기필코 이루어지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21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아헌에 가서 수령[主守]을 만났는데, 그곳의 경치 또한 응청각에 못지 않았다. 황강역(黃江驛)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충주(忠州)에서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그 고을 수령[主守 : 충주 수령] 원만춘(元萬春)이 찾아와서 이야기하다가 한밤중에 파하였다.
22일. 비. 머물렀다. 그 고을 수령[主守]이 그의 아들을 데리고 나를 보러 왔다.
23일. 안개. 아침 식사 후에 그곳 수령[主守]을 찾아가서 만나고 출발하였다. 용안역(龍眼驛)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는 무구역(無咎驛)에서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24일. 안개.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죽산(竹山)의 촌가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는 맹곡(孟谷)에 있는 허빙(許聘) 집안의 산소에서 숙박하였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신필주(申弼周)와 권욱(權勖) 군이 와서 잤다.
25일. 비. 머물렀다. 암행길을 다녀오는 도중에[沿路]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였다.
26일. 맑고 추움. 아침 식사 후에 출발하여 양지(陽智)의 촌가에서 말을 먹였다. 그곳 수령 이지백(李知白)이 와서 접대하였다. 저녁에 용인(龍仁)에서 잤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주수(主守 : 용인 수령) 조지항(趙持恒)이 보러 왔다.
27일. 맑음. 새벽밥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렀다. 이날은 60리를 갔다. 밤에 보령(保寧) 수령 강필주(姜弼周) 군이 이 고을을 지나다가 나의 행차가 이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서 찾아와서 회포를 풀었다.
28일. 맑음. 새벽밥을 먹은 후에 출발하여 도성에 들어가 대궐에 이르렀다. 이날은 30리를 갔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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