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 章 난세(亂世) 3
원승지가 입을 떼었다.
『어르신께서 그를 속인 것이 사실입니까?』
온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그를 사랑채에서 쉬게 하고 결혼식을 준비했었지. 그런데 그는 끝내 믿지 않고 집에서 준 술과 안주 등 온갖 음식을 먼저 개에게 먹인 다음 아무 일없으면 먹고 했었지. 저녁에는 음식을 내버리고 석량진에 가서 사다가 먹더군.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연자탕을 한 그릇 가져와서 내게 말하길, '이것을 너의 남편에게 먹여라!' 하시더군. 나는 어떤 영문인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그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한다고만 생각하여 기쁘게 받아 방으로 가져갔었지. 그는 내가 손수 가져온 것을 보고는 즐거워하며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한 모금 마셨단다. 그리고 나와 얘기를 하려다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며 일어나 큰 소리로 말하길, '아니! 그대 마음이 이리도 지독하오!' 하길래 난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었지. 그런데 그는, '그대는 왜 나에게 독약을 주는 거요!' 하더구나. 당시 금사랑군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
원승지와 청청은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 졌다. 온의는 눈물이 솟다 다시 말을 잊지 못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홀연 정자 밖에서 껄껄하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 와 세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 온씨 5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고 있었다. 뒤에는 삼십 여명이 따르고 있는데 손에는 모두 무기를 쥐고 있었다. 그중 온방산이 큰소리로 외쳤다.
『온의야, 너는 너의 부끄러운 일을 남들이 다 알도록 이야기하다니, 이 무슨 꼴이냐?』
온의는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하려 하다가 그냥 참고는 고개를 돌려 원승지를 바라보았다.
『십년 동안 난 아버지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이후에도 난 영원히 말하지 않을 거야. 나는 일찍이 이 집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으나 내겐 청청이 있으므로 딴대로 갈 수 있겠어? 나는 항상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어느 날 다시 나를 찾으러 올 것으로 믿고 있어. 그때 만약 내가 이곳을 떠나고 없으면 그가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어? 그가 이미 죽었다면 나도 아무런 걱정이 없겠지만 나는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두려우세요?』
원승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자 청청이가 얼른 말을 받았다.
『승지오라버니는 두렵지 않으세요?』
라고 물었다. 온의가 말했다.
『그럼 다시 말을 계속 하겠어요.』
온의는 목소리를 높여 계속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때 방문으로 사람들이 쳐들어 왔단다. 많은 사람들이 칼과 창을 들고 진격해 왔었단다!』
그녀가 정자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시 방문 밖에 서 있던 사람이 바로 이분들이에요. 그들은 그들은…… 손에 모두 암기(暗器)를 지녔었어. 아버지는 아직도 나에게 부녀의 정이 남았는지 나만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셨어. 나는 내가 나가게 되면 그들은 즉시 암기를 사용해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지. '나는 나가지 않겠어요. 우리 같이 죽이면 되잖아요!' 나는 그이 앞을 가로막으며 마음속으로는 오직 그를 보호해야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어. 나는 정말로 그를 다치지 않게 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의자에 앉아 저들과 내가 한통속이 되어 독을 탔다고 생각하며 섭섭해 하고 있었지. 반항하지도 않고 그저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말하길, '그대는 연자탕 속에 독이 있는 줄 몰랐었구려!' 나는 그 말을 듣고 들고 있던 국물을 마시면서, '나도 당신과 같이 죽을 거예요!' 하고 했었지. 그러자 그는 얼른 그릇을 떨어뜨렸으나 국물은 이미 마셔 버린 뒤였어. 그가 웃으며 말하길, '이런 비겁한 수법을 쓰다니 너희들은 수치심도 모르느냐?' 그러자 백부님이 노하며 말하길, '누가 독을 탔다는 거냐? 독을 넣은 것은 영웅호걸이 아니다! 너 스스로 잘났다고 한다면 어디 나와서 한 번 대결해 보자!' 그러자 그는 '좋다!' 하고는 곧 밖으로 나가 그들 오형제와 싸웠어. 그가 큰 소리로 말하길, '연자탕에 비록 독약은 없지만 온씨 집안의 비약인 취선밀(醉仙蜜)을 넣었다. 이것을 마시면 천천히 온 몸의 힘이 빠지면서 죽은 듯이 잠을 자게 되는데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비로소 깨어난다. 이 사람들은 아직 나를 죽이려고는 하지 않고 정신이 혼미해지면 나에게 시달림을 주겠지. 그런 너희들이 영웅호걸이냐?' '이 무례한 놈은 일찍이 죽였어야 되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그런데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다니!' 그러자 이번에는 온방시가 노하여 그렇게 말했지.』
청청이 말했다.
『어머니는 십여년 동안 온씨 집에서 먹고 잤으니 네 명의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금은보화를 받기도 했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온씨 집안에 빚진 것은 이미 다 갚았어요!』
그러자 온방달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가문의 추한 일을 알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면서 말했다.
『원공, 너는 우리 오형제와 대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
원승지는 지금까지 온의의 말에 그들의 음모에 분개하며 말했다.
『흥, 다섯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시오. 당신들은 열 사람이 함께 덤벼들겠지. 그러나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이에 대해 온의가 웃으며 말했다.
『그날 밤, 그들 오형제는 능히 그 한사람을 당해 낼 수가 없었기에 그에게 취선밀을 먹인 후 힘이 빠지면 오행진을 만들어 비겁하게 오형제가 그 한사람과 대적하려고…….』
온의의 아버지인 온방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의야, 네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가문의 비밀을 누설하려고 하느냐?』
온의가 아버지의 말에 개의치 않고 원승지를 향해 말했다.
『그는 급히 다섯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쳐서 오행진을 파괴했으나, 비틀거리며 싸울 수가 없었지요. '당신은 빨리 피하세요.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예요!' 내가 소리치며 그를 불렀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치 그날 밤처럼 소리를 질렀다. 청청이 깜짝 놀라서 어머니를 불렀다.
원승지가 말했다.
『숙모님, 방으로 가서 좀 쉬세요. 내가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온의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안돼요, 안돼. 내 마음속에 19년 동안이나 쌓인 매듭을 오늘 풀지 않으면 안돼요. 원상공,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원승지는 그녀 말속에 울음이 섞여 있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온의는 여전히 그의 소매를 꼭 잡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목숨을 노렸어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돈이었어요. 그는 그들과 한판 싸우더니 상처를 입고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결국…… 결국 잡히고 말았지요. 내가 그이 곁으로 가려고 하자 어떤 숙부님이 나의 발을 걸었어요. 그들은 그에게 보물지도를 내놓으라고 했으나 그는 그 지도는 내게 없으니 누가 나와 같이 가져오자고 했어요. 그들은 그의 몸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지도는 나오지 않았어요. 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를 놔 주었어요. 약효가 없어지면 그와 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고 그를 죽이면 그이보다 지도는 영원히 손에 넣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최후로 아버지는 그의 총명함을 발휘했어요. 그때 그는 이미 기절을 했었고 나도 기절을 해 버렸어요. 내가 깨어났을 때 그들은 이미 그의 팔을 잘라 버려서 그의 무공은 영원히 쓸 수 없게 되어 버리고 지도 찾는 데에만 쓸 수 있게 했던 거지요. 참으로 영리했지요. 하하, 하하…….』
원승지는 그녀의 눈이 흐려지고 호흡이 가빠지며 말도 이미 정상을 잃어 가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숙모님은 역시 방으로 돌아가 좀 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러자 온의가 말했다.
『안돼, 좀 있다가 가요. 그들은 나를 죽일 거예요. 나는 이 말을 다하지 않고는 죽을 수 없어요. 그들은 그를 끌고 갔어요. 거기에는 공동파의 훌륭한 무사 두 명도 같이 갔었어요. 모두 횡재만을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를 놓쳐 버렸어요. 아마 그는 그들에게 지도를 주자 그들이 신이 나서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탔겠지요. 그들도 영리했지만 그이도 바보는 아니었어요. 그들 일곱 사람은 지도를 보자 서로 다투어 5형제가 합심하여 두 사람을 먼저 죽였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온방의가 화를 냈다.
『의야, 너 그렇게 말을 함부로 지껄이느냐! 닥치지 못해!』
그러자 온의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조심해서 무엇에 쓰게요? 숙부님은 내가 죽는 걸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세요?』
온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원승지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 지도가 가짜라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어요. 그들 다섯 사람은 남경을 반년 동안이나 헤맸는데 몇 천냥의 은전만 탕진했을 뿐이었어요. 정말 이처럼 재미있는 일도 없을 거예요.』
온씨 다섯 형제가 정자 밖에서 얼굴을 찌푸리며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승지를 두려워하여 감히 정자 안으로 뛰어들지는 못했다. 온의는 여기까지 말하고 멍해지면서 낮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가 그렇게 사라진 뒤 나는 두 번 다시 그의 소식을 못 들었어. 그의 손이 잘려 이미 폐인이 되었을 텐데…… 그의 고결하고 용감한 성격에 지금까지 살아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번엔 온방달이 소리쳤다.
『원가 이놈아! 비천한 년에게 우리 온씨의 오행진에 대해 이미 들었으니 자신 있으면 나와 대결해 보자!』
온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두세요. 그들과 싸우지 말아요.』
라고 하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금사랑군의 억울함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어요.』
원승지는 일찍이 온씨 오형제와 한사람씩 겨뤄 봤는데 그의 적수가 될 사람이 없었지만 다섯 사람이 일제히 덤비게 되면 격파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겨루었을 때는 서로 원한이 없기 때문에 양보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과 대결하고 싶지 않아 머뭇거렸다.
온방의가 말했다.
『원가야! 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아니면 우리들에게 공손히 세 번 절하라! 그러면 너를 놓아주겠다.』
그러자 온방산의 생각은 달랐다.
『이제는 절을 해도 소용없다!』
원승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큰 소리로 낭랑하게 말했다.
『좀 조용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겠소! 온의 오행진은 이미 비길 데 없이 우수하고 강호의 내노라하는 무사들도 당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러나 나는 좀 피로하니 한 시간 동안 쉴 수 있게 해 주시오.』
『한 시간이라…… 너는 10일이나 혹은 반년이 지나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좋다!』
온방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놈에게 무슨 계책이 있을라고 우리가 당장 그를 칩시다!』
온방달이 온방산에게 말했다.
『둘째 동생이 이미 그에게 허락했으니 그를 한 시간 더 살도록 하고 죽어도 원한이 없게 하자꾸나.』
온의가 원승지를 향해 말했다.
『원상공, 그들에게 속지 마세요. 그들은 본래가 흉악해요. 어떤 계책이 있어 당신에게 한 시간의 여유를 준 거에요. 요 몇 년 동안 그들은 오직 보물찾기에만 급급하였지요.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당신의 팔다리를 잘라 못쓰게 하고 단지 보물 찾는 데에만 이용할 것입니다. 당신은 청청과 함께 빨리 빠져나가세요. 멀리 가면 갈수록 좋아요.』
온방달이 그녀가 자기의 속셈을 말하는 것을 듣고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너희 세 사람은 무얼 생각하느냐? 원가야, 너는 도장에 가서 푹 쉬도록 해라. 움직일 수 있을 때가 행복할 것이다.』
원승지는 좋다고 대답하고 일어섰다. 온의 모녀는 오행진의 악랄함을 알기에 마음속으로 초조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승지가 무술 도장에 도착하자 온방달은 사람을 시켜 십여 개의 대초를 켜게 했다.
『이 초가 다 탈 때까지 너는 정신을 가다듬어라!』
원승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장 가운데 있는 긴 의자에 앉았다. 온씨 중 다섯 번째가 의자를 가져와 둥글게 배치하고 그를 중앙에 앉게 했다. 다섯 사람이 눈을 감고 정좌하였다. 이들 외엔 온남양, 온정 등 석량파 중 16명의 훌륭한 무사들은 좀 작은 의자에 앉아 하나의 큰 원을 이루었다. 원승지는 16명의 앉은 형태를 보고는 생각했다.
(이것이 오행진을 보좌하는 것이구나. 오행진 외에 팔괘진을 쳤으니 이것을 파괴하기는 더욱더 힘들겠구나.)
원승지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각각의 무공을 자세히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이 21명의 출중한 무사들에게 원으로 공격을 받게 되면 이 몸 하나 보전하기 힘들겠구나, 하고 우려했다.
(이 진을 뚫고 나가려면 굉장히 어렵고 정신력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목상도사가 전하는 바, 경공으로 진을 뚫고 나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온의 모녀를 남겨두고 가면 그 두 사람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텐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마침 초조해 하는 순간 머리에 번뜩이며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금사비급 중의 맨 뒷장에 있는 것이었다. 그 장의 무공은 당시에 연마할 수 없어서 다시 깊은 동굴로 들어가 돌 벽의 원형을 보며 드디어 깨달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처럼 복잡한 무공은 이해할 수 없었고 아주 많은 사족처럼 보였었다.
(접전할 때 적의 무공은 뛰어나고 사람 수도 많아 사방팔면으로 공격해 보면 조금의 틈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공은 확실히 여러 방면에서 공격해 올 때 만들어진 것이다.)
순간 원승지처럼 몸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금사랑군이 전심전력하여 만들어 낸 권법을 이용하면 확실히 이 오행진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당연히 석량에서 원수를 갚고자 생각했으나 손이 모두 잘려 버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원승지는 속으로 이 무공을 사용하면 오늘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면서 아직 뵙지도 못한 은사를 대신하여 그의 원한을 풀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눈을 떠 바라보니 탁자 위의 촛불이 거의 다 타 들어가고 있었다.
온씨 오형제는 원승지의 얼굴이 근심에 젖었다가 갑자기 기쁨에 넘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단지 오행팔괘진의 위력이 무궁하다는 것만 자랑하며 전혀 개의치 않고 있었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열 개의 눈을 뜨고 엄중하게 주시하고 있으나 그가 도망갈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원승지는 다시 눈을 감고 금사비급의 마지막장에 쓰여 있는 무공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더듬어 보며 최후로 적을 격퇴하는 길은 '쾌도참난마(快刀慘亂魔)'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전신에 진땀이 쫙 흐르며 속으로 절규했다.
(안돼! 이후 수십 명이 보검을 사용하여 공격하면 그들을 감히 접근할 수 없게 해서 적진을 난타한 틈을 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내게는 지금 금사검도 없다. 이 한 시간 동안 어떻게 어디서 보검을 구한단 말인가?)
청청은 옆에서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녀는 아직 봉을 건네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원승지는 초가 이미 다 타 들어가고 촛불이 흔들거리며 꺼질 듯 말 듯 하나 진을 격파할 묘법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아 더욱 초조해 할 뿐이었다. 이때 계집종이 차를 들고 그 앞에 와서 아뢰길,
『상공, 탕차를 한 잔 드십시오!』
그는 멍하게 팔을 뻗어 찻잔을 받아 들고 마시려 하는 순간 화살에 맞아 찻잔이 '쨍그랑!' 하고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원승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청청의 오른손이 오므라드는 것을 보고 이 화살을 그녀가 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정말 위험했구나! 내 어찌 이렇게 바보 같았을까? 그들이 또 똑같은 방법으로 나에게 취선밀을 먹이려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온방오는 자기의 계획이 청청에게 탄로 났다는 것을 알고 매우 화가나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댔다.
『저런 못된 계집 같으니라구! 죽도록 키워 놨더니 온씨의 덕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
청청은 그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말했다.
『온씨 집안은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지도 않으며 살인방화도 하지 않으셨지요?』
그 말에 화가 난 온방호는 후다닥 뛰어 올라와 청청을 때리려 하자 온방달이 말렸다.
『동생, 진정하게. 이 조그만 계집애에게 신경 쓰지 말게나!』
이때 원승지의 얼굴에 다시 기쁜 빛이 나타났다. 그러자 청청은 수건을 민첩하게 던졌다. 그 바람에 초가 흔들거리며 촛불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원승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좋소! 지도를 바랍니다. 지금 승부를 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온방달이 이를 받았다.
『네가 이기면 금덩이를 다 가져가고 지면 더 이상 말할 필요 없겠지?』
원승지는 만일 자기가 지면 당연히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음은 물론 이기더라도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염려돼 말했다.
『당신들이 금덩이를 이곳에 내 놓으면 내가 진을 뚫고 나간 다음 가져가겠소!』
온씨의 다섯째는 곧 죽을 놈이 말이 많다고 못마땅해 하며 금사랑군과 같은 도사도 온씨 오행진에 잡혔는데 저 같은 피라미 놈이 감히 탈출할 수 있을까 보냐고 거드름을 피웠다.
어쨌든 다섯 형제는 서로 상의하여 그들 가문의 능력을 그에게 보여 주기로 했다. 온방달이 가솔에게 분부하여 촛불을 바꾸게 하고 청청에게 말했다.
『금덩이를 모두 가져오너라!』
청청은 이미 이렇게 될 줄 예측한 바 황금을 모두 그에게 줘 버릴 걸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단지 금괴를 모두 포장하여 책상 위에 놓았을 뿐이었다. 온방달이 왼손으로 책상 위에 있는 금괴를 열자 수십 개의 금덩이가 땅바닥에 쏟아져 나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냉소하며 말했다.
『온씨 가문이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이 몇 천냥의 금덩이 따윈 소용이 없다. 원가야, 네가 우리의 이 오행진을 파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라!』
다섯 번째가 '후!' 하고 소리치며 무기를 들어 원승지 주위를 에워쌌다.
원승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들은 방안에도 사람을 배치해 봤을 텐데 이 진을 어떻게 뚫지?』
온방시가 그의 말하는 것을 듣고,
『방안에 사람이 있느냐? 있으면 모두 내려와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천장 위에 있던 사람이 '하! 하! 하!' 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내려왔는데 그들은 이십 여명이나 되었다. 그 중 제일 앞에 선 사람이 용유방의 우두머리 영채(榮彩)였다. 바로 그자였다.
원승지는 잠시 놀라면서 청청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약간 변하면서 입술을 깨무는 것이었다.
온방달이 말했다.
『영형, 이런 밤에 어쩐 일로 저희 집을 왕림하였습니까? 아, 방암의 여칠선생도 오셨군요.』
그러면서 영채 뒤에 서 있는 노인한테 예를 갖추었다. 그 노인도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형제들, 모두 건강하시오?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영채가 웃으며 말했다.
『다섯 분은 참으로 복도 많으시지! 거기다 무공도 강하고 지모도 뛰어난 조서를 얻으시고 거기에다 내 아들까지…….』
온씨 형제는 그들과 청청의 관계를 까맣게 몰랐었다. 거기다 석량파와 용유파는 평소 왕래가 있었다니…… 강적이 눈앞에 있는데 또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온달방이 말했다.
『영형, 우리 집 아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를 편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애가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을 바치게 하고 돈을 꾸었으면 갚아 드리겠소이다. 어떠시오?』
영채는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항상 오만하고 무례했던 사람들인데 오늘 따라 이렇게 말이 잘 풀리다니? 이들이 여칠선생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잠깐 원승지를 쳐다보더니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무공이 뛰어난 훌륭한 사람이 여기에 있었군. 그는 여칠선생도 대적할 수 없으니 나는 역시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겠소이다! 우리 용유방은 귀파와 평소 다툼이 없었는데…… 그러나 사노대는 이미 죽어 살아올 수 없게 되었지. 그것은 그가 무술을 잘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 금들은…….』
눈을 땅바닥에 있는 금괴에게 돌리면서 말했다.
『우리 용유방을 따라 몇 백리를 오는 도중 힘도 들고…… 사람도 죽였으니 우리 모두 강호에서 살았기 때문이야.』
온방달은 그가 여기까지 말한 것을 듣고는 계속 얘기하지 않는 것은 그는 복수보다는 황금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금은 모두 여기에 있으니 형께서 모두 가져가도 괜찮소이다.』
영채는 그가 대담하게 말한 것을 보고는 처음엔 비꼰다고 여겼으나 그의 얼굴색을 보니 그런 악의는 없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강한 어투로 말했다.
『온선생, 만약 금의 반절을 주어 우리파 형제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것으로 하면 고맙기 그지없겠소이다.』
그러자 온방산이 외쳤다.
『가져가라!』
그 말이 떨어지자 영채는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뒤에 서 있던 힘센 장사 몇 사람의 손이 금덩이에 닿자 갑자기 그들의 어깨를 밀쳤다. 그래서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앞으로 몇 발자국 밀려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에 원승지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말했다.
『영선생님, 이 금들은 틈왕의 군비인데 선생이 가져가시면 온당치 못하지요!』
틈왕의 명성은 북방에서는 널리 알려졌지만 강남과 강호에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알지 못했다. 영채는 여칠선생에게로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저 자가 틈왕의 이름으로 우리를 겁주는데요!』
여칠선생은 손에 크게 이상한 담뱃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모금 빨았다 뿜었다 하면서 원승지를 바라보았다. 원승지는 그의 무례함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화가 났지만 그 기품이 무림중의 큰 인물이라고 느껴져 예를 갖추어 말했다.
『선생님은 여(呂)씨이시지요? 저는 처음으로 이곳 강남에 와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여칠선생은 연기 한 모금을 곧장 원승지의 얼굴에 뿜었다가 다시 들어 마셨다. 그것은 백사처럼 한데 모여져 흩어지지 않았다. 원승지는 그걸 상관하지 않았는데 청청이 오히려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자 온의가 어깨를 가볍게 꼬집으며 말을 말라고 말했다. 청청이는 고개를 돌려 욕해주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여칠선생이 담뱃대를 벽에다 탁탁 치며 재를 털고 는 다시 담뱃대에 담배를 쑤셔 넣었다.
이때 온씨의 다섯째도 그 광경을 보고 견디기 어려웠으나 그가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지 오래되었고, 젊은 시절 그는 학형권(鶴形拳)으로 수많은 적수를 격파하였으며, 담배쌈지는 점혈(點穴)병기로 창칼을 버리게 한다고 들은 바 있어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도대체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으로 봐 온씨 다섯째는 원승지와의 대결을 그만 두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이 이기면 당연히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기운이 좀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여칠선생이 품속에서 부싯돌과 부싯지(紙)를 꺼내 불을 켜고 있는데 담배에 불이 채 붙기도 전에 지붕 위에서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빨리 우리 금을 내 놔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소녀와 건장한 젊은이가 함께 뛰어 내렸다. 그들의 뒤를 따라 50대의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장사꾼 같은 옷차림이었다. 왼손에는 주판을 들고 오른손엔 붓을 들었는데 매우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가 천천히 지붕 위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무공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바가 없어 궁금했다.
원승지는 그 소녀가 바로 안소혜(安小慧)라는 것을 알아보고 기쁘기도 하였고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기쁜 것은 도울 사람이 온 것이었으나 걱정스러운 것은 다른 두 사람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미지수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적수는 석량파 외에 용유방과 여칠선생 등이 있는데 새로 온 두 사람의 무술이 안소혜와 비슷하다면 도리어 그들을 도와줘야 하니 오히려 장애가 될 것 같아서였다.
이때 온씨 제자 중에서 웬 놈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그 소년은 큰 소리로 호통쳤다.
『어서 우리의 금을 내 놓아라!』
그 소년은 그렇게 호통을 치다가 금괴가 땅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는,
『어허, 여기에 있었구나!』
하며 허리를 굽혀 줍기 시작했다. 원승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맘속으로 저 소년은 매우 미련하구나, 생각하면서 높은 무공이 없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온남양은 그가 허리를 구부려 금괴를 줍는 것을 보고 발길을 날려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때 안소혜가 급히 소리쳤다.
『최오라버니, 조심하시오!』
그러나 그 소년은 이미 몸을 슬쩍 돌려 피했다. 그리고는 두 손바닥으로 받아쳤다. 온남양은 피하지 않고 역시 두 손바닥으로 마주쳤다. '딱!' 소리와 함께 네 손바닥이 부딪치면서 두 사람은 각기 몇 발자국씩 뒤로 주춤했다. 그 소년은 또 앞으로 나서는데 그 상인 비슷한 사람이 외쳤다.
『희민(希敏)아, 천천히.』
원승지가 안소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최씨 성을 가진 사형이 그녀와 함께 이 금을 호송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중도에서 갈라지게 되어 엉뚱하게도 청청이 빼앗아 가게 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소년은 최추산의 조카 최희민이 아닌가. 또한 큰 사형이란 자는 동필철산반(銅筆鐵算盤) 황진(黃眞)이다.
자세히 보니 그의 오른손에 가지고 있는 붓대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것이 틀림없는 동(銅)으로 만든 것이었고, 왼손의 주판은 반들반들한 것이 철로 만든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