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장 피의 장막(帳幕) 뒤에서 -4
잠시 후.
"으으, 설마… 설마……!"
한순간, 밀사자의 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
대체 어떤 글을 봤기에…….
"후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으으, 놀… 놀랍습니다. 설마, 이것이… 이것이 바로… 바로 소
야를 중원에 내보내신 진짜 뜻이었습니까, 지존이시여?"
"그렇다!"
"아아, 정말… 정말 지존이십니다. 마(魔)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
하실 수 있는 그 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밀사자는 진심으로 탄복하며 절을 했다.
"후후… 중원에 가서 찾아 봐라. 칼자루를 쥘 사람이 어디엔가 꼭
있을 것이다."
"……."
"이 일은 나와 너만이 아는 비밀이 될 것이다. 이 일이 성공되면
… 너는 나와 헤어질 것이다!"
"헤, 헤어지다니요?"
"두려워하지 마라. 살인멸구(殺人滅口)하지는 않을 테니까!"
"고… 고맙습니다!"
"너를 묘족(苗族)의 족장(族長)으로 삼아 주거나 관외(關外)의 목
장주(牧場主)로 삼아 주고, 네 스스로의 일국(一國)을 꾸미게 하
겠다. 대신, 너는 지금 이것을 먹어야 한다!"
지존의 소매 속에서 단약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검은빛 단약, 그것은 아주 놀라운 작용을 하는 것이다.
변체역음단(變體易音丹).
복용하면 음성과 용모가 완전히 다르게 변하는 천축의 비약으로,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된다.
"얼마나 비밀리에 해야 하는 것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너는 오늘 밤중으로 연공 중 주화입마(走火入魔)되었다고 소문날
것이다."
"……."
"너의 장례식 때 너와 내가 꾸민 일이 결과를 드러낼 수 있기를
빈다. 후후, 장례는 삼십삼 일 장(葬)이다!"
"속하, 서른세 밤과 서른세 낮이 지나기 전 반드시 행하겠습니
다!"
"좋아, 가라!"
"예……!"
밀사자는 절을 한 다음, 암도(暗道)로 들어갔다.
그 다음 날, 서천마궁(西天魔宮)에서 한 가지 불상사가 벌어졌다.
대내총관(對內總官)이었던 혈전나후(血戰羅侯)가 폐관수련하다가
주화입마 되어 죽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지존의 죽마고우(竹馬故友)였었다.
지존이 그의 시신을 붙잡고 흐느꼈다는 소문이 났다.
그가 수하의 시신을 안고 울었다는 것은 서천마궁에 들어 한 때만
을 기다리며 각고(刻苦)의 수련을 거듭하는 무수한 마웅(魔雄)들
에게 큰 힘이 되는 일이었다.
- 지존에게도 눈물(淚)은 있었다!
- 그 분은 광마(狂魔)가 아니라, 위대한 신(神)이시다. 그 분은
수하들을 끔찍이 아끼신다. 그 분을 위해 충성한다는 것은 영광스
러운 일이다.
서천마궁 고수들은 그 일을 계기로 더욱더 뭉쳤다.
물론, 그 일은 절대 외부로는 소문나지 않은 일이었다.
제 17장 피의 장막(帳幕) 뒤에서 -5
소야(少爺)는 목욕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녀 뒤쪽, 몸이 아주 풍성한 여인 하나가 다소곳이 서서 소야의
옥같이 반듯한 등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는 중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온천(溫泉)은 소용돌이를 이루고 흘렀다.
거대한 욕조는 두 여인만으로도 가득 차 보였다. 수면에 그림자
두 개가 비치고 있기 때문일까?
흐느적거리는 여체 두 개, 뜨거운 증기가 그것을 가리는 것이 못
내 서운하기만 했다.
소야는 남이 제 몸을 어루만지는 데에는 이골이 난 여인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남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 열 살 때
까지는 대소변 처리마저도 남이 다 해 주었을 정도로…….
"유단주(兪壇主)의 배려는 정말 섬세하다. 천축에서도 못다 한 호
강을 유옥 대단주 덕에 다 하고 있으니! 그의 빚을 어찌 다 갚아
야 할지……!"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그 분은 항상 서천마궁에 충성할 생각뿐이십니다!"
등을 밀어 주는 여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소야보다도 풍만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만묘(萬妙)라고 했느냐, 네 이름이?"
"예……!"
"네가 나의 말벗이 되어 며칠 재미있었다. 사천왕은 사내들이라,
나의 비위를 그리 잘 맞추지 못했단다!"
"송구스럽습니다!"
"만묘, 너의 시중으로 내가 최근 매우 즐거웠으나… 그 일에 대한
보답은 너에게보다 유옥 대단주에게 해야겠다!"
"물론 그러셔야지요."
"호호… 너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느냐? 나는 지금 그가 좋
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을 정도로 그의 충성심에 반
하고 있다!"
"단, 단주님! 그 분은 두 가지만을 취미로 갖고 계십니다!"
만묘는 몸을 떤다.
몸을 씻는 쪽은 그녀인데, 두 개의 젖가슴 사이 골짜기에서 떨어
지는 폭포의 양은 만묘 쪽이 더 세차다.
그녀는 왜 이리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인지.
"그게 뭐냐? 슬쩍 물어 보는 것이니, 숨김없이 말해 다오!"
소야는 오늘따라 온정적이었다.
"그… 그것은 검술연마와 바둑입니다!"
"바둑(碁)?"
"예. 그 분은 사실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국수(國手) 이상이라,
천하에 대국할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흠……!"
소야는 야릇한 소리를 내다가…….
"그는 지금도 요양중인 줄로 아는데?"
"예."
"하지만 대국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요."
"호호… 그럼 그와 함께 바둑을 두며 그를 위로해 줘야겠구나."
"제가 당장 가서 사천왕 호법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야께서 이
곳을 나서신 직후, 전주님 거처로 가신다고!"
"그럴 필요는 없다!"
"예… 에? 소야는 언제나 사천왕님의 호법을 받아야 하시는 존귀
한 신세가 아니십니까? 한데, 어이해?"
"호호… 유옥 대단주가 자객(刺客)이라도 그렇게 다친 상태에서는
나를 암산하지 못할 것이 아니냐? 호호! 만에 하나, 그가 자객이
라면 서천마궁은 이십 년간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할 수 있다.
그를 못 믿고 누구를 믿겠느냐? 호호……!"
소야는 유난히도 말을 많이 했다.
여인의 마음, 그것을 뚫어 볼 사람은 바로 자신뿐일 것이다.
강호일금지(江湖一禁地)라 불리는 곳이 있다.
웅이지산(熊耳之山) 깊은 곳, 언제나 광풍우(狂風雨)를 일으키는
골짜기 하나가 있다.
특이한 형태로 늘어선 암석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날리는 모
래, 거센 바람으로도 흩어지지 않는 기이한 환무.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발길을 외면한 그 곳은 야릇하게도 화원이라
불렸다.
불귀화원(不歸花園).
황량하기 짝이 없는 곳이 화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것은 골짜기 근처에 언제나 꽃잎이 지천으로 널려 있기 때문이
었다.
광풍우에 휩싸인 골짜기 안에서 날아온 꽃잎.
꽃잎은 골짜기에서 십 리 떨어진 곳까지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이
다.
벌써 수백 년째 꽃잎은 골짜기 안에서 날아와 쌓였고, 그것은 꽤
오래 전부터 화독장(花毒 )을 형성했다.
죽음의 독장은 스물스물 흘러가고, 골짜기에서 들리는 우레 소리
는 땅 덩어리를 뒤흔든다.
벌써 오백 년째, 이러한 모습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유지되었다.
- 불귀화원 안에는 무엇인가 있다. 그것을 얻으면 천하제일인(天
下第一人)이 된다. 그러나 들어가려 하지 마라. 독장을 맡고 녹아
죽을 것이니까!
그러한 말은 오래 전부터 노래처럼 퍼졌었다.
독장 언저리엔 이름 그대로 불귀화원의 객이 되어 버린 백골(白
骨)들이 산(山)을 이루며 쌓여 있다.
그 위로 마치 원혼( 魂) 처럼 흐르는 독무, 그리고 연신 울려퍼
지는 뇌성.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입구는 바로 불귀화원과 같은 모습이리라.
츠츠츳-!
불귀화원을 가득 덮고 있는 독장이 악마의 숨결로 거세게 번져 나
갈 때 그들 둘의 모습이 나타났다.
광무군과 초적기인.
그들은 거의 동시에 독장의 경계선에 떨어져 내렸는데, 얼굴 표정
은 사뭇 달랐다.
광무군의 표정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는데, 초적기인의 이마에
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몹시 탈진한 사람마냥.
하긴 혼신공력을 다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린데다가, 입을 쉬지
않고 놀렸으니 지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