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자아 인식에서 탐색하는 시간과 삶의 행로
--이병호 시집 『 』
김 송 배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자아 인식과 성찰의 의미
현대시의 정신은 그 시인의 정서와 사유(思惟)의 범주(範疇)가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하는 중심 사상과 거기에서 발현하는 주제가 어떤 지향점으로 의식의 흐름을 흡인하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 대단히 중하다.
이는 한 시인이 시적인 발상이나 동기가 어떻게 상황을 설정하면서 전개되고 있는지의 출발점이 바로 그 작품의 진가(眞價)를 이해하는데 많은 공감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시인이나 독자가 서로 상관물에 대한 이미지의 투영이 융합하거나 화해하는 시법(詩法)이 발흥(發興)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체로 현대시의 흐름이나 전개 양상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수순을 지나게 되는데 자아의 인식은 곧 그 시인의 존재적 의미에서 탐색하는 인생이나 삶의 지향점을 모색하는 하나의 가치관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이병호 시인이 상재하는 시집 『 』의 원고를 읽으면서 이러한 전제(前提)를 먼저 상기하는 것은 이병호 시인이 의식하거나 인식하는 심저(心底)에는 그가 한생을 살아온 인생의 행로(行路)가 과거의 시간성에서 회상하면서 현재를 인식하는 단계를 밟게 되는데 그가 그 행로에서 탐색하는 주안점은 성찰의 의미적인 요소를 시적으로 해법을 찾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일찍이 영국의 시인 리처즈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정서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는 점만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라는 말과 같이 우리 주변에서 사소하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추적하는 시의 소재가 바로 자아의 성찰을 탐색하는 한 방법의 시법일 것이다.
이병호 시인의 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1987년에 도미하여 UCLA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미국방 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과 교수를 35년 6개월간 봉직한 인생의 체험이 바로 자아를 인식하는 원류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그는 ‘나 또한 위트가 없고, / 마냥 침묵을 지킬 자신도 없지만 / 아무렇지 않습니다. / 이유는 나름의 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 세상은 재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지만 /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 대신 잘할 수 있는 나만의 특기가 있습니다. / 꼭 말해야 할 때 / 나는, 말할 수 있는 소신과 / 용기가 있으니 아무렇지 않습니다.(「용기와 소신」중에서)’라는 어조(語調)와 같이 담담하면서도 세상과 삶을 통달(通達)한 자적(自適)의 사유가 성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람도 없는 모래 언덕에
무엇이 그리 두려워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만들려고 하는가.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50년이라는 양철집 주변을
서성이다 보니 이미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
아직까지 명주실 같은
연약한 목소리만 나올 뿐
대포알 같은 함성은 나오지 않고
바싹 마른 두 손바닥을
서로 비벼대며
분필을 들고 칠판에다
하염없이 흰 손수건을 그리며
흔들며 떠들어대고 있다.
--「자화상」전문
여기에서는 이병호 시인은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현상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현재까지의 인생(혹은 삶)을 회상하면서 정립시킨 ‘자화상’이다. 그러나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 50년이라는 양철집 주변을 / 서성이다 보니 이미 / 은퇴할 나이가 되었다.’는 어조에서는 숙연해지는 그의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그는 ‘대포알 같은 함성은 나오지 않고’라는 언술과 ‘분필을 들고 칠판에다 / 하염없이 흰 손수건을 그리며 / 흔들며 떠들어대고 있다.’는 진솔한 언어가 바로 그의 인생의 진실이며 시적 흡인력이 된다. 어쩌면 초라하고 연약한 인생의 성찰하는 행로가 적나라(赤裸裸)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김형석 교수는 그의 글 「내가 있다는 일에 관하여」에서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이로부터 세계와 우주는 그 자리와 의의를 가지게 된다. 우주의 중심이 나에게 있으며 세계의 모든 무게가 나라는 초점 위에 머물고 있다’는 논지와 같이 ‘나’라는 존재의 확인이 바로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 거기에서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호 시인은 이러한 시간 속에서 어느덧 ‘고희’를 맞게 된다. ‘고희(古稀)가 / 눈앞에 와 있다 // 오늘은 십이월 삼십일일 / 해마다 찾아오는 날이지만 / 오늘은 유난스레 눈물이 난다 // 머릿속에는 / 아직도 어릴 적 엄마의 얼굴이 / 스멀스멀 출렁이는 기억으로 / 향기로운 내음으로 펴져 있는데 // 늦은 귀갓길인데도 / 동네 몇 바퀴 몇 바퀴 돌아온 것밖에 없는데 / 코앞에 고희가 / 빙그레 웃고 있다.(「고희」 전문)’에서와 같이 인생은 서글프고 외롭고 고단한 삶의 행로를 빙빙 돌고 있는 고독감에 젖어 있다.
이병호 시인은 이러한 인생관을 정리하고 ‘그래도 행복은 찾는 웃음은 계속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인데 행복을 위해서는 이보다 /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행복을 찾는 길」 중에서)’라거나 ‘행복은 풍요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해진다. / 불신보다는 조그만 일에도 감사한 마음을 느끼면 / 그게 행복인 것이다. / 행복해서 감사한 게 아니고 / 감사해서 행복한 것이 아닐까 싶다.(「행복」중에서)’라는 행복론의 전환으로 그가 자존의 인식을 단정하면서 시적 진실을 정리하고 있다.
2. 시간성과 동행하는 인생 행로
이병호 시인은 시간성에 대하여 많은 집중을 하고 있다. 이 시간과 동행하는 인생행로가 다변적이며 그 시간에 따라서 구축되는 인생의 지향점이나 가치관의 탐구가 다양하게 변환하는 시적인 전개과정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명징(明澄)한 개념으로 인생과 대입한다면 우리 인간이 간직한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에서 상관하는 정감적인 행로가 재생되어 인식하고 성찰하거나 미래를 기원하는 인생관을 재창조하게 되는 계기를 맞기도 한다.
우리의 칠정(喜怒哀樂 愛惡慾) 중에서 노(怒)와 애(哀) 그리고 애(愛)가 우리의 한생을 통해서 각인(刻印)되거나 불망(不忘)의 이미지로 창출되어 주제로 투영하는 시법을 자주 대하게 되는데 이병호 시인도 이러한 우리 인간의 고유한 정(情)을 배제하지 않는다.
대체로 현대시를 해부해보면 자애(self love)라는 대명제를 항시 유념하면서 어떤 인생을 영위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병호 시인은 특히 애(愛)에 관한 실생활(real life)에서 획득되는 시간(혹은 세월)과 융화하고 화해하는 해법을 현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린다
속도제한을 염두에 두고
행선지를 향하여
앞차도 보고 뒤차도 보고 옆차도 보면서
인생도 달리고
마음도 달리고
시간도 달린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그리며
과거도 달리고
현재도 달리고
미래도 달린다
하루하루가 고달파도
인내가 보약이 되도록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달린다
희망도 달리고
꿈도 달린다
행선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일을 향하여
행복을 싣고서
--「고속도로를 달리며」전문
여기에서 이병호 시인은 ‘인생도 달리고 / 마음도 달리고 / 시간도 달린다’는 어조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과 동행하는 것은 인생뿐만 아니라 마음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는 ‘과거도 달리고 / 현재도 달리고 / 미래도 달린다’는 그의 내면에는 그에게 부여된 모든 시간이 함께 희노애락을 동승시키고 있다.
이병호 시인의 이러한 궁극적인 진실의 목표는 바로 ‘행선지에 도착할 때까지 / 내일을 향하여 / 행복을 싣고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우리 인간들의 ‘희망’과 ‘꿈’은 내일의 행복이 최종 목표라는 단순하면서고 소박한 기원의 의지가 ‘고속도로’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노정(路程)에는 인내가 있어야 하고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면서 /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 가야 한다. 작품 「은퇴」에서도 ‘시간은 화살처럼 너무 빨리 날아가는데 / 괴로움도 어려움도 산들바람에 실어 보내고 /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설계해 본다’는 새로움의 인본주의적인 자의식(自意識)이 발현되어 그의 관념이미지가 돋보이고 있다.
그 세월에 희로애락도 많았는데
가르치는 즐거움 속에서 나도 모르게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나 보다
양어깨에 건강과 소망을 메고 터벅터벅 걸으며
걸어온 길 뒤돌아 보지 않고 앞을 향하여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단것처럼
그는 ‘은퇴’ 후의 인생 설계에 대해서 그동안 감당해온 체험, 즉 외연(外延-희노애락)에서 추출해낸 내포(內包)의 중심에는 ‘걸어온 길 뒤돌아 보지 않고 앞을 향하여 /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단것처럼’의 확고한 가치관의 모색이 승화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심경(心境)에서 파생된 시간의 향훈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 가는 시간에 못다 푼 꿈일랑 맡겨 버리고 /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냥한 미소로 반기는 너 (「론 사이프레
스」중에서)
- 시간은 간다 / 공간을 초월하여 / 시작도 없이 끝도 없이 / 어제를 뒤로하고 / 오늘도 가 고 내일도 간다. (「시간」중에서)
- 어느 오후 한나절 / 따스한 햇볕 아래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 바닷가 를 바라보면서 장미꽃을 피워가는 젊은 남녀가 정겹습니다(「정겨운 모습」중에서)
- 시간의 바퀴는 돌아가는데 변함없는 생활 / 어느 사람도 탓할 수가 없나 보다(「캐나다 기러기」중에서)
- 새하얀 물보라에 꿈을 실으 /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 / 바다는 내 마음을 아는가(「몬 트레이 바닷가에서」중에서)
- '벌써 세월이 이렇게 되었나' / 사진관을 돌아서는 발길이 무겁다.(「영정사진」중에서)
이병호 시인의 시간은 ‘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통한 성찰의 내면을 적시(摘示)하고 있는데 대체로 ‘오늘도 후회 없는 하루’이며 ‘하루하루가 행복한 삶으로 잇대어지도록 /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며 ‘목적지를 향하여 정답게 걸어가는’ 것이다.
또한 그는 ‘소망의 내일이 기다리는 것’을 음미하면서 시간과 동행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시간은 ‘시간은 영혼의 생명’이라고 강조한 롱펠로의 말처럼 생명이 인간의 시간을 진실로 유로(流路)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성은 우리 시학에서 시제(時制)라고 하는데 한스 메이홉에 의하면 ‘문학이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는 체험적 시간, 즉 의식내용을 의미관련으로 조직하여 예술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문학에서의 시간 문제가 작가나 시인의 체험 곧 의식 내용과 근본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示唆)해 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시들은 대체로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한 시인의 체험이 어떻게 작품 전체에서 작용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시간성은 작품의 창작이나 감상에서 그 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인고의 삶’과 생명의 현장
이병호 시인에게서 다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의 탐색은 ‘인고의 삶’을 통해서 추적하는 이미지의 산책이다. 그는 삶의 현장에서 체험(추억한)한 ‘거짓과 사기’와 ‘전직과 진실’, ‘성실과 신뢰’, ‘불평과 불만’, ‘칭찬과 격려’, ‘말보다는 행동’, ‘실망과 좌절’, ‘용기와 비전’(이상「바라는 사회상」중에서)이라는 심원(心願)으로 내면에 잠재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분사(噴射)하는 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천 년의 침묵은 비碑가 되는가
인고의 삶을 이고 온 역경의 역사
햇볕 따가운 열기에 합장하는가
새들은 주변을 돌아 줄기를 트고
삶의 보금자리를 찾는다.
어느 누구도 건들지 말라고
가시로 방패 삼아
지나가는 세월에 그리움 안겨 보내고
매서운 비바람에도
굳건히 서 있는 너의 자태
고난도 역경도 하늘을 우러르며
깊은 뿌리를 생명선에 지탱한다
내일의 환한 미소를 위해
긴 호흡 하늘로 내뿜는다.
--「선인장 소묘」전문
여기에서는 ‘선인장’이라는 한 사물이 ‘너’라는 인간으로 변한 수사학상 의인법의 전형으로 작품을 이미지화하고 있는데 ‘인고의 삶을 이고 온 역경의 역사’와 ‘고난도 역경도 하늘을 우러르’는 현장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나 ‘깊은 뿌리를 생명선에 지탱’하려는 애환이 그의 진실로 승화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병호 시인은 ‘내일의 환한 미소를 위해 / 긴 호흡 하늘로 내뿜는다.’는 어조의 결론은 휴머니즘을 열망하는 순수 인간들의 순정적인 이미지가 ‘선인장’을 비유한 지적인 시법으로 잘 현현되고 있다.
그는 다시 ‘가난과 굶주림이 있는 곳에 / 구제가 있기를 / 전쟁과 테러가 있는 곳에 / 평화가 있기를 / 수고와 땀이 있는 곳에 / 기쁨과 행복이 있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바라는 것들」중에서)’라거나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어도 한숨 쉬지 말고 / 짜증 나고 화가 나도 그렇게 살으시구려(「그렇게 살으시구려」중에서)’ 그리고 ‘한세상 살면서 미워도 서로 풀고 / 싫어도 밝은 미소로 살아가시구려(「오해」중에서)’라는 어조와 같이 인고의 세월을 인내하고 성찰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시법을 제시하고 있다.
갈등과 혼란의 세상에서
길가에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은
가는 세월에 생명을 맡긴 채
사랑스러운 호흡을 즐긴다
오가는 사람마다 서로 인사로 반기며
가는 길과 목적지가 달라도 가야 할 길은
반드시 가야 한다
갈 길이 멀고 험해도
희망의 가슴으로 나그네의 길을
오늘도 쉼 없이 걷는다
--「바닷가 오솔길 따라」중에서
곤하고 지쳐도
세상의 명예 권위 세월 속에 묻어 두고
마음의 등불 되어 생명으로 이어지는 님의 뜻을 따라
빛이 인도하는 대로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네
--「나그넷길」중에서
보라. 이병호 시인이 삶의 현장에서 조망(眺望)하는 ‘인생길’은 바로 ‘생명’에의 갈구(渴求)이다. 그에게 착안(着眼)된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생명력이 강렬하게 유동(流動)하는 신념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갈등과 혼란의 세상에서’ 체험하게 되는 ‘나그네의 길’이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마음의 등불 되어 생명으로 이어지는 님의 뜻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확고한 기독교의 신심(信心)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장자가 말했다. 개개의 육체는 죽으면 없어지는지 몰라도 인류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다. 섶을 인간의 육체에 비유한다면 그것을 태우는 불은 생명이다. 섶이 타고 없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불은 이 섶에서 저 섶으로 이어져서 영원히 타오르는 것이라는 생명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병호 시인은 이밖에도 ‘우리 인생 모두가 빈손으로 왔다가 / 빈손으로 가는데 / 우주를 가슴에 품고 / 이 세상 것 뒤로하고 / 푯대만 바라보고 한발 한발 걸으련다(「별이 빛나는 밤에」중에서)’라거나 ‘지금도 늦지 않으니 / 인생의 멋과 맛을 선사하며 / 석류알 같아 보이리라(「석류」중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지내는 우리 부부 / 희로애락을 맛보며 생의 수레바퀴를 감사함으로 끌면서 / 빛과 소금이란 비전을 품고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을 옮기지요 / 행복 품은 인생사를 글 속에 담아 두고 싶은 소망이 똑같거든요(「우리 부부」중에서)’라는 어조처럼 인생과 인생사 그리고 생명의 갈구 현장은 새로운 각오와 여망과 기원이 동시에 그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다.
4. 순수 서정의 향기-자연 동화
이병호 시인은 순수 서정 시인이다. 그는 인생관뿐만 아니라 대 자연관의 경지도 대단한 오감(五感)으로 발현되고 있다. 시학에서 사물이미지의 창출은 시인이 간직한 깊고 넓은 지적 관념의 결정체에서 출발한다.
우리 인체의 오관(五官-眼耳鼻舌身)이 감지하는 이미지는 시인의 체험이 재생되면서 생산적으로 바뀌는 지적인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데 시인들은 이를 잘 수용하고 감응(感應)하면서 작품을 탄생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이병호 시인도 이처럼 시각적인 어떤 자연의 현상에서 추출하는 순정적인 어조의 서정성은 남다르게 표출하고 있다.
초록빛 물이 톡톡 튀는
뒷마당에 나간다
조그만 쌍잎 어린 분꽃은
어느새 함박꽃 누이 같은
예쁜 꽃을 흐드러지게 만들었다
호박잎 가지잎 부추잎 고춧잎
아내의 바구니에는
어릴 때 뒷마당의 향취가 흘러나오고
뺨에는 분홍빛을 머금은
분꽃이 되어 있다
긴 세월의 골짜기를
건너온 태평양 바람이
분꽃 가지를 흔들 때마다
어린 아내의 분 냄새 같은
향기가 가만가만 풀어놓는
뒷마당의 분꽃
--「분꽃」전문
우선 이 ‘분꽃’에서 이병호 시인이 응시한 정경은 향토적인 전원의 한 풍경을 상기하는 정감이 물씬 풍겨지고 있다. 그가 흡인하려는 이미지의 재생은 ‘호박잎 가지잎 부추잎 고춧잎 / 아내의 바구니’에서부터 ‘향취’로 그를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서정은 현대의 문명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생성한 자연의 재발견이다. 누군가가 시는 자연의 모방이며 자연의 형상이라고 정의를 내린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이 ‘긴 세월의 골짜기를 / 건너온 태평양 바람이 / 분꽃 가지를 흔들 때마다 / 어린 아내의 분 냄새 같은 / 향기가 가만가만 풀어놓는’ 향수의 개념까지 변환하고 있다.
봄이 오면
깊은 잠에서 깨어 세상에 새 얼굴을 내밀고
여름이 오면
보이지 않는 호흡으로 생명을 나누어주면서
파릇파릇한 삶을 즐긴다.
가을이 오면
형형색색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다가
어느덧 바람결에 지상에 낙하하면
색이 바랜 잎사귀 밟는 소리에 세월을 깬다.
겨울이 오면
소리도 없이 벌거숭이 되어
세상사를 경험하다가
또 다시 긴잠을 청한다.
--「낙엽」전문
이 ‘낙엽’에서도 이병호 시인이 천착(穿鑿)하는 시간 개념과 생명이 동일하게 작용하는 사계(四季)의 정경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일생을 형상화한 주제가 자연의 개념으로 메타포어를 현현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의 인격화에는 감상적 오류(誤謬)라는 비정적(非情的) 타자성(他者性)을 원용(援用)하고 있는데 동화(同化)와 투사(投射)라는 두 원리가 작용하게 된다. 고 김준오 교수의 『詩論』에 따르면 동화(assimilation)는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원리이며 투사(project)는 시인이란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다른 존재를 채우는 것 곧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원리로 해석하고 있다.
이병호 시인은 이러한 개념의 정립으로 만유(萬有)의 자연과 대좌(對坐)한다. 그는 ‘오랜 침묵 속에 변함없는 고아한 자태 / 한 점 부끄럼 없이 화려함을 자랑하 / 탐욕과 혼란의 세상에서 / 기다림을 먹고사는 꽃(「난」중에서)’이라는 어조와 같이 서정시(lyric)의 본래 목적인 그의 개인적인 정서나 경험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그는 ‘스치는 바람결에 아름다운 미소가 넘친다 / 설레는 마음으로 넌지시 다가가니 / 말없이 뿜어내는 상긋한 향기 속에 / 사랑의 속삭임이 메아리친다(「뒤뜰에 핀 장미」중에서)’라거나 ‘지금도 늦지 않으니 / 인생의 멋과 맛을 선사하며 / 석류알 같아 보이리라(「석류」중에서)’ 그리고 ‘눈비와 바람이 맵찬 / 추운 겨울 다 잊고 / 너끈히 한세상 이룬 / 꽃잔디밭 속을 거닐다 보면 / 아픔도 환한 빛이 되리라(「꽃잔디 해변」중에서)’라는 순수 서정의 향연이 메아리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서정시는 신라의 향가나 조선시대의 시조가 훌륭한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서정시는 사회의 복잡화와 비합리성에 대한 시인의 각성, 시인의 자의식의 과학적인 분석 그리고 음유(吟遊) 시인의 문화에 대한 멸망 등에 의한 정서의 자연적인 흐름의 서정은 모습을 감추고 정서화된 비평을 내포한 경향의 서정을 많이 대할 수 있게 한다.
고뇌와 번민 속에서 시상(詩想)을 낚아
삼겹줄을 수십 번 엮어내고
해산의 고통을 이겨내면
마음에 밝은 미소가 태양처럼 다시 떠오른다.
이병호 시인은 「어느 시인의 고백」전문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마음에 밝은 미소가 태양처럼 다시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고뇌와 번민 속’을 헤매면서 ‘해산의 고통을 이겨내’는 정서적인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말했다.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그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이라고 ‘시의 정신’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병호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서 자아 인식과 성찰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생 행로를 시간성과 동시에 추적함으로써 삶과 생명의 동반이라는 진실을 재발견하는 시법을 강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연관에 대한 서정적인 심성을 투영해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등식을 명징하게 정립하는 시인 본래의 정감으로 현현하고 있어서 그의 내면에 원류를 두고 있는 시적 진실을 깊게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