낌새는, 앞서 언급했듯이, 관찰자의 태도에 상대적인 양자(量子)의 움직임처럼, 그
낌새를 알아챈다고 생각하는 주체를 한 걸음(두 걸음도 아니다!) 비켜간다. 낌새는 원칙적으로 신(神)의
지식이므로, 인간이 낌새를 알아챈다는 것은 바로 낌새의 보복까지를 포함한 자기수행적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629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자신의 앞날을 내다본다는 일은 다만 ‘어려울’ 뿐인
게 아니다. 그것은 위험하고, 단지 위험할 뿐 아니라 불상(不祥)한 노릇임을 기억해야 한다.
631
요점은, 자주 언급했듯이,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에고와 어떤 관계를 맺도록
훈련하는가 하는 데 있다. 633
부박하고
고집스러운 생각 속에서도 충분히 운용되는 지식이 많지만, 이른바 ‘실재의
앎’은 에고의 생각을 허물거나 넘어서서 찾아오기 때문에 생각과 앎은 오히려 비각을 이룬다. 638
비록
신적 기운이 인간의 에고가 깃든 자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의식’에 이르더라도, 이는 에고의 주체적 성취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639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바, ‘기다리면
이미 늦고 생각하면 어긋난다’. 647
아는
척하면서도 알아서는 안 되는데, 낌새의 직관이 주체의 자의식과 역설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650
‘알면서 모른 체하기’는 기본적으로 에고를 넘어 타자성의 지평을 범람하는 일이고, 생각의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며, 쉽게 말해 자신이 자신을 이기는 일이다.
653
***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 (천재까지는 아니래도) 영재라고 모두가 입을
모으는 연구원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친구는 자기가 무얼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더 어려운 수준의
과제를 끊임없이 성취해버린다. 어찌보자면, 그는 자아의 거름망이
열려버렸거나 뚫려버린 인간인데, 이 뚫림/열림의 무궁무진함이
그 자신의 자아를 규정하는 territory에 대한 남다른 ‘여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체/실존’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에 있는 까닭에, ‘무한’을 향한 방향성을 (부러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얻고야 말았다.
(말로 하자니 이렇듯 그럴듯하지만, 실상 그는 거의 ‘자폐’수준에
가까운 모습을 지닌 채 오로지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지질한 생활에 치이다 보니, ‘재주/재능’ 혹은 ‘천재/영재’라는 말에 예전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다. 남다른 재주를 지닌
사람을 간혹 보아도, 그저 ‘어떤 인간’이 있는 것이겠거니 하며 심드렁히 넘기고야 만다. 요사이 나에게 있어
그 잔향과 울림으로 유독 더 깊이 와 닿는 이들은, 자신의 남다름에 관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일에 결국 성공해버린 드문 인간들이다. 인정투쟁의 자장으로부터 크게 에돌면서도, 그 재주를 모두 소진한 뒤에 완벽하게 사라지는 기이한 삶을 더욱 흠숭하게 된다.
성스러운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재주를 자양분 삼아 아무런 빛 없이, 소리소문 없이, 주변을 가만히 밝히며 살아낸 사람들. 세상에 단 한 줄도 제대로 된 가르침이
남아 있을 리 없는 진짜 선생이라! 세상이 영영 기억하지 못할 완벽한 메시아라!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자, 神이 아닐까. 내 곁을 이미 스치고 지나치셨을 그 '님'들이 이제사 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