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마태복음 9:18-31
요절/마태복음 9:29, 찬송가/342장
17세기 영국의 종교역사가이자 정치가였던 존-액턴경은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 말은 그동안 역사를 통해 수없이 보여준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럼 절대권력, 절대권세를 가진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예수님도 부패하실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그 대답은 노! 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절대권세를 가지셨지만 부패하지 않으셨을까요? 마태는 오늘 말씀에서 절대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장, 나를 따르라(9-13)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이유는 세금을 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금을 거두는 세리, 지금으로 하면 세무공무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를 유지하고 사회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려면 세금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세금을 거두는 것은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였습니다. 그들은 이 세금을 유대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오직 식민지를 통해 자기 이익을 얻기만 했습니다. 또 세금도 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풀이를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들에게 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오늘 하루 길을 가면서 세리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세리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세리는 당시 쓸 만한 일자리가 없던 시대에 가장 확실한 철밥 통에, 수입도 좋았습니다. 결국 민족의식을 갖고 살 것인가? 아니면 현실의 욕구를 채우며 살 것인가? 하는 갈등에서 현실을 택한 자들의 세리요, 마태였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능력도 있고 또 계산도 빨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마태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라오면 밀린 세금을 다 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그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현재의 그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요,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어렵게 세리고시를 패스해서 얻은 이 좋은 직장도 그리고 그 결과 누리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말씀은 그의 삶에 대단한 도전이요, 삶의 방향전환이요, 무엇보다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평소에 그였다면, 당연히 계산기를 두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을 때, 얻게 될 이익, 반면 예수님을 따랐을 때 얻게 될 손해를 철저히 따졌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집에 앉아 있는 와이프에게 연락해서 이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어떻게 했습니까? 일어나 따랐습니다. 이것이 쉽게 이해가 됩니까? 잘 이해가 안됩니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더 좋은 직장에서 훨씬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도 이것저것 따져보고 고민한 다음에 결정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중요한 삶의 결정을 그냥 그대로 해버립니다. 마태가 왜 이러는 것일까요? 직장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세리의 삶에 심각한 회의와 절망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마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확 뒤집어 버리는데 이처럼 간단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창조의 능력이요, 말씀의 능력이요, 창조의 권세였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과 권세가 지금 마태를 부르시는 사건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곧 말씀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삶의 자리를 뒤집어엎어서 새롭게 시작하게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바꿉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권세자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 있고,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단지 병을 고치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고 귀신들을 제압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그 말씀으로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뒤집어 놓고,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강력하게 역사해서 우리도 일어나 새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태를 부르시고 그를 일어나 따르게 하신 예수님의 권세는 예수님의 절대권세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마태는 절대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또다른 면을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마태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서 앉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다들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이를테면 지상의 천국잔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잔치가 너무 기분 나빴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따졌습니다. 함께 먹는 것, 밥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 후에 함께 점심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애찬이라고 부르는 전통으로 성찬에 준하는 기독교의 중요한 예식입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은 신앙공동체로 서로 하나가 되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절대로 함께 식사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기의 죄인들은 무슨 죄를 지은 죄인들이 아니라, 그 직업 때문에 죄인들로 여겨졌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발사는 여성의 머리를 많이 만지므로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이유로 죄를 짓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도적질할 기회가 많다는 이유로 그리고 의사는 쉽게 환자를 속일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무슨 죄를 짓기를 전에도 이미 죄인들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죄인들을 다른 번역에는 ‘사기꾼과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유대의 시스템을 깨는 상당한 도전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고 병든 사람입니다. 죄인으로 취급 당하는 이들은 그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입니다. 사기꾼이나 쓰레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시며 자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호세아 6:6절의 인용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서에는 긍휼이라는 표현대신에 ‘인애’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같은 말씀을 인용한 12:7절에는 ‘자비’라고 했습니다. ‘인애’는 히브리어의 ‘헤세드’로 자비, 긍휼, 불쌍히 여김이 다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이 헤세드를 잘 보여주는 것이 룻기에서 보아스가 이방인이고 과부였던 룻을 감싸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호세아서를 인용해서 가르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사와 같은 종교행위가 아니라,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자기행위를 갖고 자랑하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도저히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함을 탄식하고 절망하며 또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자들을 품고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싸가 아니라 아싸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리같이 철저히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도 일어나 따르게 하시는 대단한 능력자이십니다. 그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면 당연히 인싸들과만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폼 나고 수준 있는 사람들, 의인들만 모아야 폼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 절대권세가 더욱 빛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러합니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요, 권세를 잡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정반대로 움직이십니다. 마치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한 모습, 연약한 모습, 병든 모습, 뭔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자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돕고자 우리를 부르시는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인애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배우길 바랍니다. 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므로 이 긍휼하심 속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2장,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4-17)
14절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왜 금식하지 않는가를 말합니다. 갑자기 금식이야기가 나옵니다. 흐름상 좀 생뚱맞게 여길 수 있지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예수님의 그 풍성하신 긍휼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혼인집에 신랑과 함께 있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혼인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정한 금식일이 되어도 금식하지 않고 함께 혼인잔치를 즐겼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로 들어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당연히 슬퍼하거나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신랑이요,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하는 손님으로 기쁨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16절에 보면,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베는 신축성이 좋은 옷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다 찢어지게 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계속 발효되어 나오는 가스를 낡은 가죽부대가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포도주도 다 쏟아지고 그나마 쓸만 했던 낡은 가죽부대도 못쓰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삶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베조각, 새 포도주는 낡은 유대전통과 다른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만이 아니라, 긍휼하심과 자비도 풍성하십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혼인잔치에 신랑손님으로 참석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 이런 감동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축의금을 많이 내야 합니까? 내가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을 통해 기쁨을 찾기 원하고, 행복과 즐거움을 찾기 원합니다. 변화된 새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그리고 그 잘 안 되는 이유를 교회에서 찾습니다. 목자에게서 찾고, 어떤 시스템에서 찾습니다. 그런 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무엇보다 바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새 가죽부대가 필요하듯이 주님이 주시는 그 능력과 권세, 그 긍휼하심과 자비를 담으려면 내가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동을 누리려면 무엇보다 내가 바뀌어야 하고, 내가 달라져야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므로 그 전과 다른 잔치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마태가 말씀을 따랐으므로 새 포도주를 담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내가 바뀌고 내가 말씀을 들으므로 주가 주시는 기쁨의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장,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26).
예수님께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말합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병들고 아픈 딸이 아니라 방금 죽은 딸입니다. 방금 죽었든, 어제 죽었든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의사도 뭔가 하지만 죽으면 모든 것을 멈춥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방금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구한 것 중에 최고로 부담스러운 부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따라가십니다. 그때에 열 두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와서 그 겉옷가를 만졌습니다. 불교에서는 겉옷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예수님과 인연을 맺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겉옷가를 만지면 12년 동안 앓던 고질병이 나아서 구원을 받겠다고 여겼습니다. 오랫동안 병을 앓다보니 여자가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많은 사람이 겉옷을 스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돌아보시며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가를 만지기만 해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여자의 생각이 옳았습니다. 겉옷만 만져도 12년 동안 앓던 병이 낫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권세와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뻗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자가 이대로 돌아가면 여자는 예수님의 겉옷을 만져서 자기 병이 나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예수님의 겉옷이 확 뜨게 될 것입니다. 겉옷을 숭배하는 사람도 생기고 짝퉁도 나오고, 심지어 예수 겉옷 종교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예수님의 겉옷에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대단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내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옷가를 그냥 만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수지의 그 많은 물을 내 집으로 끌어오려면 수도관이 있어야 하듯이 믿음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내게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시는 하나의 수단이요, 통로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겉옷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요, 여자의 믿음이 구원을 받게 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이미 집은 초상집이었습니다. 이이 이 사람의 딸이 죽었으니 장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물러 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 보내시고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가 병든 자를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죽은 자까지 살리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요, 부활의 권세자이십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절망도 무너뜨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4장, 너희 믿음대로 되라(27-38)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가서 가실 때에 두 맹인이 따라오면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의 이러한 외침은 긍휼을 원하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코드와 잘 맞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뭔가 이들의 소원을 들어줘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데,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정하는데 사정을 들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왜 일까요? 집에까지 따라 들어온 맹인들에게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코드라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 줄 아느냐?” 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맹인이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또 이들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같이 붙잡고 울어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러자 이들이 “주여 그러하외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여기서의 포인트는 ‘너희 믿음대로’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구하기는 하지만 정말 두 눈을 다 뜨게 하실 수 있을까? 한 눈만이라도 뜨면 좋겠어! 했으면 한눈만 떠지는 것입니다. 그냥 볼 수만 있으면 좋겠어 하면 그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믿음의 결과, 믿음의 책임이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습니다. 내가 갖는 믿음만큼 주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의 절대권세가 드러나게 하는 것은 나의 믿음입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 이유를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리고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한 아테네 철학자는 “보편적 정의란 없으며 정의는 강자의 이익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정의는 힘 있는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자기를 위해 쓰고자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역사적인 사실이고, 불편한 진실입니다. 또 그러다보니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힘과 권세가 있으시지만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를 막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마음으로 부족한 우리를 돕고자 하십니다. 그럼 그냥 다 되면 좋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주님의 능력,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주님의 권세와 주님의 자비, 헤세드, 이 모든 것을 실제로 내게 작동케 하는 것은 나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리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사정해도 별로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며 외쳐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변화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을 때 속 시원하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감동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 시작되고, 믿음이 있으면 답답한 인생이 환히 보게 되는 새 삶이 열립니다.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그러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내 삶을 고치고, 일어나게 하고, 기쁨의 새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