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북동쪽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한 고원지대. 라따나끼리(Ratanak Kiri). 경작지가 거의 없는 라따나끼리에는 아직도 숲을 태워 화전을 가꾸는 화전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뿌리까지 다 태워 화전을 완성하는데 3개월. 불에 탄 풀과 나무들은 농작물의 거름이 됩니다. 그러나 화전으로 일군 밭은 고구마 등을 심어 2년 정도 운영한 후 땅이 밀림으로 우거지지 않도록 바나나나무, 고무나무 등을 심어 놓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요즘은 캐슈넛 나무를 많이 심고 있는데 캐슈넛은 다른 작물에 비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어 라따나끼리의 화전민들이 선호하는 작물이 되었고 그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사과와 비슷한 모양으로 열리는 캐슈넛은 겉껍질에 강한 염산 성분이 있어 그냥 먹을 경우 입천장이 데고 입이 마비됩니다. 캐슈넛을 먹으려면 불에 구워 독성을 없애고 일일이 껍질을 벗겨 알맹이만 취하는 가공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생것인 경우 kg에 2달러 정도에 거래됩니다. 캐슈넛은 아몬드와 영양성분이 비슷한데 아몬드보다 맛이 더 달콤하고 부드러워 대부분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길에서 스님을 만나기가 쉬운 곳이지만 라따나끼리는 예외입니다. 라따나기리 주에는 사원이 딱 한 곳밖에 없는데 그곳이 바로 ‘프놈 스와이(phnom swai temple)입니다. 1954년에 지어진 프놈 스와이에는 힌두, 이슬람, 불교, 그리고 부족신앙까지 포용하는 내용의 벽화와 크메르루즈 당시 불교 탄압으로 훼손된 와불이 있습니다. 와불은 얼마 전에야 복원되었지만 당시의 불교 탄압 흔적을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끄릉족, 자라이족 등 9개 소수민족들이 각자 다른 신앙을 가지고 살던 라따나끼리였지만 1965년 시아누크 왕이 이곳으로 이주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집과 소 두 마리를 주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지금은 9개 소수부족들이 거의 사라졌고 끄롱족을 비롯한 다른 소수부족들의 모습은 시엡립에 있는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동생활을 하는 소수부족이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산길로 한 시간 정도를 올라가야 간신히 도착하는 자라이족의 마을. 자라이족은 마을 근처에 토템을 세워두는데 모든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자라이족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토템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토템에는 헬리콥터 모양도 있는데 베트남전쟁 당시 헬리콥터와 전투기가 마을을 폭격을 해서 파괴하니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월맹군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을 펼치는 베트콩이 캄보디아에 숨어들자 이를 잡기 위해 캄보디아까지 폭격을 했으며 그로 인해 킬링필드 희생자보다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으나 오늘날까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참고) 자라이족이 옷을 입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 년 전 외국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다녀간 이후부터라고 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다른 부족과 달리 자라이족은 자신들의 문화를 아직까지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라이족 마을을 방문하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의식이 있는데 바로 ‘까안’이라는 전통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외부인은 발효된 쌀이 들어 있는 항아리에 물을 부어 즉석에서 만드는 ‘까안’을 반드시 마셔야 비로소 친구로 대접을 받습니다. 만약, 술을 삼키지 않고 뱉거나 마시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적으로 간주되니 조심해야 합니다.
라따나끼리의 주도 반룽(Ban Lung)은 붉은 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룽에는 보석상점들이 많이 있는데 주로 에머랄드, 루비, 자수정 등 1차 가공만 끝낸 보석을 팔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파는 보석들은 반룽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께오(Bokeo) 마을에서 채취한 것들입니다. 라따나끼리에서만 나오는 보석도 있습니다. 바로 ‘라따나끼리’죠. 라따나끼리는 그 자체가 보석의 이름이면서 ‘보석산’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보께오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미국 서부 시대 골드러시를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광산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 수직으로 뚤린 땅굴만 즐비합니다. 폭은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가는 정도로 깊게는 20여 미터까지 내려간다고 합니다. 가족단위로 이뤄지는 보석채취 작업은 수직으로 파내려간 땅굴 안에서 작업하는 남편이 파낸 흙을 위로 올리면 나머지 가족들이 그 흙에서 손으로 원석을 골라내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채취되는 원석은 라따나끼리, 그리고 자수정, 에메랄드, 사파이어 순입니다. 안전장비 하나 없이 땅을 파내려 가다보면 간혹 입구가 무너져 내려 안에서 작업하던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특히 우기 때는 흙이 물러져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숨을 건 위험한 작업이지만 그들이 생계를 잇는 방법이 이것뿐이니 이곳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가족을 잃은 캄보디아인의 눈물을 머금은 라따나끼리의 보석. 아름답게 빛나지만 어딘지 슬퍼 보입니다.
-2011년 6월 14일에 방송된 EBS 다큐 ‘잃어버린 시간의 땅, 캄보디아 2부’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