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강아지풀>
5년 전, k와 이별하던 과정은 내가 이제껏 살아온 날들 가운데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k를 만난 지 1년이 되어가던 무렵 나는 우연히 k가 다른 이성과 주고받은 카톡을 보게 되었다. 누구냐고 묻자 그냥 일하며 알게 된 사람이라고 했다. 조금 쎄한 느낌이 들었지만 타 지역에 사는 사람이었기에 서로 마주칠 일은 없겠거니 하고 넘겼다. 아니, 그의 앞에선 넘긴 척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계속 찝찝하게 걸려 있었다. 당시 k는 비정규직으로 한 회사에서 청년 대표들의 창업을 지원해 주는 매니저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오전에는 카페 알바, 오후엔 프리랜서로 그림을 그리며 생활하고 있었다. k는 나와의 앞날을 희망적으로 그리다가도 끝에 가선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 둘 다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라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는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하신 얘길 하며 안정적인 직장이 없으면 자기도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밤, 그의 집에서 함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데 pc 카톡으로 메시지가 왔다. 지난번 그 사람이었다. 시각은 밤 11시쯤이었고 “자고 있나 보네.” 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 마음에 걸렸던 그 쎄한 느낌은 확신이 되었다. 일하며 알게 되었다는 그녀는 타 지역 어느 회사의 대표였다. 알고 보니 k는 애인이 없는 척 그녀를 속였고 그녀는 그걸 모르고 계속 k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그녀는 k에게 자신이 있는 지역으로 와서 자기네 회사에 일을 하면 어떻겠냐고, 실은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는데 우선은 같이 일을 해보며 알아가고 싶다고 했고, k는 그녀의 제안을 보험처럼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 얼마 후 k의 직장에 재계약 시즌이 다가왔고 그곳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k는 나와 그녀 사이를 저울질하다 마음을 굳혔다. 그녀가 있는 회사로 그녀가 구해준 집으로 그녀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로. 이사를 결정하고 나서 k가 나에게 그곳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고 황당하면서도 당장은 헤어지지 못해 진지하게 그 제안을 생각해보는 내 모습에 더욱 비참해졌다. 쨍쨍한 햇빛과 초록으로 우거지는 나무, 늦은 일몰시간이 주는 설렘이 가득해지는 계절, 여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시작되었고 연애는 끝이났다. 배신감, 분노, 슬픔으로 뭉친 불덩이가 가슴에 박힌 채로.
가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힘든 마음을 털어놨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아 틈이 날 때마다 정처 없이 걸었다. 하루에 2~3시간을 걸어야만 밤에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새벽에 자다 깨서 뒤척이면 구름이(고양이)가 베개 곁으로 다가와 웅크리고 앉아 골골 소리를 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맛도 느끼지 못하고 억지로 씹어 삼켰다. 상실을 겪거나 우울감이 들 때 보면 자존감을 높여준다는 책의 구절을 반복해가며 읽었다.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느끼는 감정을 아무렇게나 써 내려가서 하루에 대여섯 개의 메모가 생성됐다. 갖은 노력을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덩이같이 뜨겁고 숨이 차고 울분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매일 아침을 맞이했고 눈을 뜨면 나도 모르게 한 계절이 통째로 흘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대충 슬리퍼를 끌고 나와 초점도 없이 멍하니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 어느 터에 다다랐다. 그곳엔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빈집이 있었고 앞마당에 여러 종류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있었다. 마당 한쪽 귀퉁이에 한 평 남짓한 크기로 가득 피어있는 강아지풀 더미가 보였다. 연두색으로 가득한 강아지풀은 옅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보송한 털들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와아......’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글과 함께 블로그에 사진을 비공개 포스팅으로 남겼다. 그렇게 잠시 동안 아름답고 황홀한 마음이 가득 찼다. 배신감, 분노, 슬픔, 열등감, 허무 등... 하루를 살아가는데 버거운 감정들 뿐이었던 마음에 아름답다는 마음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내가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매일 그 길을 산책하며 강아지풀 더미를 봤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여전히 귀엽고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조금씩 엄마가 해주는 밥에서 맛이 느껴졌다. 구름이의 골골송에 엉덩이를 토닥여 줄 수 있게 되었다. 휴대폰 메모장을 켜는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연두색 강아지풀이 서서히 빛바랜 갈색으로 변하며 바람도 선선해졌다. 내 마음속에 들어있던 불덩이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5년이 흐른 뒤 이른 여름날이었다. 그 사이 나는 j를 만나 4년간의 연애에 이어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예식이 얼마 남지 않아 초조했던 탓인지 이제껏 내 멋대로 살아온 인생이 결혼으로 인해 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뭔지 모를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예식장, 드레스, 신혼여행 등 모든 준비는 끝났고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 부케. 그 부케에 의미를 담고 싶어졌다. sns와 포털 사이트를 통해 수십 종의 부케를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부케가 나오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던 꽃을 적어보았다. 토끼풀 꽃, 냉이꽃, 할미꽃, 데이지, 프리지아... 그 중에 가장 하고 싶은 꽃은 토끼풀 꽃이었지만 꺾으면 금세 시들고 무엇보다 그 시기에 꽃이 많이 피지 않아 구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문득 부케의 유래와 의미가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부케>는 <꽃다발>이란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옛날엔 풍요와 다산, 번영의 의미로 곡물 다발을 주었다. 그 후로 꽃향기가 질병이나 악령으로부터 신부를 보호해 준다는 미신이 생겨나며 꽃으로 바뀌었다. 결혼을 앞두고 신랑이 직접 꺾어 온 꽃다발을 신부에게 전해주면 신부가 답례의 의미로 한 송이를 빼서 다시 돌려주는 것이 부토니에가 되었다.’
부케의 뜻을 알고 나니 꼭 꽃이 아니더라도 나를 보호하고 번영시킬 수 있는 의미가 담긴 것이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게 뭘까, 단번에 강아지풀이 떠올랐다.
“강아지풀이요? ‘라그라스’라는 드라이플라워는 있는데 야생 강아지풀은 없어요.”
꽃집 3군데에 전화를 걸어 강아지풀 부케를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내가 직접 만들어볼까 싶어 작업실 근처를 돌며 찾았지만 여름이면 어디에든 피어있던 강아지풀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가 5월 말이었는데 강아지풀은 보통 6월 중순에 피기 시작해서 시기가 조금 일렀던 것이다. j와 함께 고민하다 갑자기 j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 거기에 한번 여쭤볼까?”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j의 통화를 지켜보았다. 이런저런 사정을 얘기하며 통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말했다.
“만들어주신대!” “헉, 진짜?” 부케를 만들어 주신다는 분은 <나풀나풀>이라는 이름으로 풀의 가치와 쓰임을 알리는 일을 하는 협동조합의 한 멤버셨고 j가 일하는 코워킹 공간에서 알게 된 분이었다.
며칠 후 결혼식 당일, 부케가 도착했다. 옹기종기 동그랗게 모인 연둣빛의 폭실폭실한 강아지풀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냉이 초가 감싸고 군데군데 하얀 안개꽃이 반짝이처럼 떠다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다운 부케였다. 강아지풀 부케를 들고 머리에 강아지풀 장식을 하고 버진 로드로 향하는 문 뒤에 섰다. 음악과 함께 문이 열리자 나는 강아지풀과 함께 활짝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버진 로드 끝에 다다르자 강아지풀 부토니에를 꽂은 j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나란히 섰다.
힘들었던 지난 여름날엔 위로를, 소중했던 여름날엔 기쁨을 함께한 고마운 강아지풀. 매해 여름, 길가 어디서나 피어나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반겨줄 강아지풀이 기다려진다.
(으아 ㅠㅠ 발표날에도 어김없이 지각을... 평소보다 몇배의 시간을 더 할애하며 글을 썼는데 결국 임박해서야 글이 나왔습니다 ㅠㅠ)
첫댓글 멋져요. 강아지풀 부케랑 부토니에! 구름돌 글은 항상 따뜻하고 몽글한거 같아요. 저는 남편이 5남매의 막내인데 어머님이 시골(안동)에서 결혼식 할 수 있게 됐다며 좋아하시는 걸 듣고 바로 다음 날 회사(강남역)에서 제일 가까운 예식장을 예약하고 왔어요. ㅎㅎㅎ 처음부터 무계획에 결혼식의 의미, 부케의 의미 찾아볼 생각도 못했는데...갑자기 의미를 챙길걸 후회가 드네요. ^^
악ㅋㅋㅋㅋㅋ 댓글보고 빵 터졌어요. 강남역 예약, 잘하셨어요.ㅎㅎㅎ 저는 유머러스한 돌멩이 글이 부러워요. 웃긴거 좋아하는데 글은 쓰다보면 왤케 진지해지는지ㅎㅎ
@구름돌 다행히도 당시엔 한남대교 남단에 예식장이 몇 개 있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