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올리는 낭만은 두 사람이 버스에 나란히 앉아 줄 달린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혼자지만 연결된 느낌, 좋음의 나눔, 적절한 소란과 고요의 공존, 정처 없는 떠남을 동경했다. 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싶었는데 그것이 혼자가 아니었다. 같이 있을 때 내 존재는 더 활성화됐다. 운 좋게도 직업을 통해 ‘둘의 낭만’이 지속 가능한 길이 열렸다. 사람을 만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된 것이다. p5
나는 인터뷰가 사람의 크기를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혹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워서 사람을 보지 못한다. 세상이 축소해서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좋은 인터뷰는 안 보이던 사람을 보이게 하고 잘 보이던 사람을 낯설게 하는 것 같다. 인터뷰이로 어떤 대상을 택하고 어느 부분을 어떻게 도드라지게 할 것인가, 이것은 전적으로 인터뷰어의 세계관과 미학에 따른다. p7
나는 이런 사람을 크게 그리고 싶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유를 자극하는 사람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자체로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는 사람들.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p7
이야기는 힘이 세서 견고한 신념을 부순다. 내가 듣는 이야기는 내 감각과 정신의 속성을 천천히 바꾼다. 살아가면서 참조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아야. 삶에 대한 질문을 비축해두어야 내가 덜 불행하고 남을 덜 괴롭히게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수업에서도 인터뷰를 꼭 과제로 내어주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정해진 시간에 집중해서 듣는 일보다 더 좋은 글쓰기 공부를,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보다 더 깊은 쾌락을 나는 모른다. 지배하는 단절과 분열의 문화 속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말이 있듯이 ‘연결’은 억압을 벗어나고 해방에 이르는 시작이자 원리다. p10
“고등학교 때 오빠가 있다고 하면 부러워하잖아요. 오빠 군대 갔다 왔니? 항상 물아봐요. 안 갔다, 그러면 왜? 오빠 장애인이야, 말하면 분위기 안 좋아지고. 그게 익숙해지니까 나중에는 그냥 갔다 왔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남한테 질문을 잘 안 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시는 게 당연하지 않거든요. 한 부모, 조손 가정도 많고요. 누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남편 뭐 해, 몇 살이야, 안 묻고 축하만 해줘요. 남편이 직장이 없을 수도 있고, 남편이 남자가 아닐 수도 있고요. 그런 걸 제가 안 겪어봤으면 몰랐겠죠. 애써 안물아봐요. 나 혼자 궁금하고 말지.”p57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대로 글쓰기는 잃은 자들의 몸부림이 남긴 흔적이다. 가슴에 난 구멍을 언어로 메우는 일이다. 그도 그랬다. 잠이 오지 않아서, 세상에 외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글쓰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라는 확신이 들었다.p107
지금의 나는 지난 시간들이 와 있는 거고, 물론 또 나도 흘러갈 거고요. 노동의 역사든 여성의 삶이든 내가 그냥 온전히 나이기도 하니만 내 안에 녹아 있는 시간들 있잖아요. 그래서 때로는 나도 지치고 힘든데, 아까도 말했던 공부방에서 만난 엄마들으 삶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거예요. p133
공감 능력은 필요한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쿠션이 튼튼한 사람이 의사가 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의사는 건강을 다른 이들에게 전염시켜야 되거든요. 공감능력과 회복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환자는 위로가 되죠. p195
“내 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누군가를 대할 때 눈빛, 표정, 말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됐고 내가 맞서고 싶은 것에 대항해 버티는 힘이 생기면서 자유로워지고 행동 반경이 넓어졌어요. 사람들이 성폭력상담소에 있으면 힘들고 피폐하고 괴롭지 않냐고 물어봐요. 무겁고 어둡고 힘들게 느껴지지만, 거기에 압도되고 짓눌리는 게 아니라 사건을 대응해보고 시간을 버텨보며 깊이가 생기죠. 상담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배우지 못했을 것 같아요.” p239
공사현장 추락사가 1년에 290여 건이다. 이 나라는 도심 어딜 가나 365일 건물이 부서지고 올리가는 공사판 토건공화국 아닌가. 건설현장이 많은 만큼 산재도 많다. 그러나 ‘죽음의 스펙터클’이 제공되지 않으면 이야기도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추락사 유가족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p275